백범 김구 암살 사건

덤프버전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width:300px; min-height:calc(1.5em + 5px);"
[ 펼치기 · 접기 ]



파일:드라마 제1공화국 김구 암살.png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 백범 김구 암살 장면(제1공화국 20회 아! 백범 후편 中에서)
ⓒ1981 MBC All Rights Reserved.

1. 개요
2. 전개
3. 사건 이후
3.1. 외부의 평가
4. 진상 규명
5. 대중매체에서
6.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기거하던 백범 김구가 당시 포병 장교였던 안두희에 의해 자택 서재에서 암살당한 사건.

범인이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으나 정확한 범행 동기와 배후 세력의 존재 여부 등이 밝혀지지 않은 채 범인을 포함한 관련 인물들이 모두 사망하여 영구 미제사건이 되었다.[1]

2. 전개[편집]


1949년 6월 26일 오후 김구는 자택인 서울 경교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줄은 예상도 못하였으며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게 지내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각 경교장에 김구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찾아왔으니 그는 바로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였다. 안두희는 당시 군복 차림을 하고 경교장에 와서 비서진에게 백범 선생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고 비서진들의 안내에 따라 1층에서 대기하였다. 직후 헌병 대위 강홍모가 군용차에 필요한 휘발유를 얻기 위해 방문하였고 안두희의 양해를 구하고 먼저 김구를 만났다. 강홍모가 나간 후 비서진들은 아무런 검문이나 경계 없이 안두희를 그대로 김구가 있는 서재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 아무도 이 자가 김구를 죽이게 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하였으며 마침 안두희의 허리춤에 권총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단지 군인이라는 이유로 검문이나 제지 없이 통과시켰다.

이때 김구는 서재에 있었으며 글씨를 쓰던 중 비서로부터 포병장교가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며 보고했고 김구는 들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안두희가 김구 앞에 나타나 "선생님, 먹을 갈아 드릴까요?" 라고 묻자 김구가 고개를 들어 안두희를 보려는 순간 안두희는 미국제 권총을 꺼내들어 약 1미터 거리에서 김구를 향해 4발의 총탄을 발포하였다. 다음은 재판 당시, 안두희가 살해경위에 대해 말한 내용이다.

내가 선생 앞에 나가 거수경례를 하자 선생은 2미터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 때 선생은 매우 표정이 불쾌한 것이 역력했다. 선생은 38선 사태 및 포병의 편성 상태는 어떠냐고 묻기에 흐지부지 대답한 후 나는 선생에게 일부러 꾸며 거짓말을 하여 본심을 알아보려 하였다. … 나는 2, 3일 중 옹진 전투에 나가게 되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출정하며 선생님께 인사도 드리고 선생님의 포부도 똑바로 알고 싶어 왔습니다 하고 말하니까 선생은 국회 소장파 얘기를 꺼내며 세간에서는 경교장을 싸고 여러 가지 낭설이 떠돌고 있는 이때에 너까지 와서 이러면 남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 테니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나는 선생에게 그런 말을 하시는 선생을 어찌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저마저 선생님을 의심하게 됩니다. 정당이나 언론계에서는 모두 선생을 공산당과 악수한다고 합니다. 오늘을 꼭 선생님의 본심을 확실히 알고야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더니, 선생은 대노하시며, 이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크게 떠들었다. 나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30여 년 간 투쟁한 탑을 지금 선생님 손으로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지금 이 때가 바로 선생님이 개심할 때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으니 본심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십시오 하였다. 그랬더니 선생은 크게 노하시며, 에이 고약한 놈, 나에게 반동하는 놈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이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이 순간, 틀림없이 선생을 국가의 반동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단정했다. 안두희, 김구를 쏜 까닭은?(1949년 6월 26일)



3. 사건 이후[편집]


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나가다가 경교장 경비들에게 잡혀서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김구가 남북 협상을 통해서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결국엔 참다 못해 김구를 죽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이때 총성을 들은 비서진들이 서재로 달려가 보니 김구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론은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도 김구 암살 이후 6월 28일, 7월 2일의 두 차례에 걸쳐 성명을 발표했다.김구 선생 급서에 통탄불금 (1949년 6월 28일)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시신에 염을 하는 모습과 조문 인파를 담은 사진들[2]

사건 발생 1시간 24분만에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이 이 사건은 안두희 개인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했으며 이승만 역시 이 사건이 한독당 내부의 집안싸움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등이 살인교사 같은 누명을 쓰고 구속됐다. 안두희 역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김구와 의견 충돌을 벌이다가 죽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시켜 군에 복귀시켰고 정치권 일각에서 석방 논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자 계급을 소위에서 소령으로 특진시켰다. 결국 안두희는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장흥은 한독당 계열로 몰려 헌병사령관직에서 물러나고 전봉덕에게 사령관직을 넘겼다. 사령관직에서 물러난 직후 김창룡에게 조사를 받았는데 왜 안두희를 바로 영창에 구금했는지, 그리고 한독당 비밀당원인지의 여부를 추궁받았다고 한다.

예편 후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군으로 건너가 군납공장을 차려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권의 비호로 대저택까지 지어 떵떵거렸다. 김구 살해 진상규명은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진행되었는데 4월 29일에 한 시민이 안두희의 체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게 신호탄이었고 같은 날 안두희의 집도 분노한 학생들에 의해 파괴됐다. 이 시기부터 진상규명 운동이 벌어져 6월 26일에 심산 김창숙이 백범 사망 11주기 추모식장에서 "선생을 저격한 안두희를 죽여라! 그리고 그 배후 조종자인 이승만을 규탄하자!"고 절규했다.

이에 안두희는 잠적했다가 1961년 4월 17일 '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동월 28일에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암살사건 배후자 규탄대회'에서 시민 3,000여명이 국회의사당까지 가서 가두시위를 벌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그럼에도 안두희는 세인들에게 김구 암살범이라는 낙인을 받아 수차례 암살 및 살해 위협을 받아왔고 1987년부터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수차례 응징당하며 진실을 고백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여기서 안두희는 이승만의 명령을 받아 김구를 암살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으나 이후 권중희의 납치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부인하였다. 1992년에야 암살과 관련된 증언을 시작했고 백범 묘소에도 참배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본인 단독 범행이라고 얘기했으며, 언론사 인터뷰에서는 김창룡의 명령을 받았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미국이 시킨 일이라고 얘기하기도 하는 등 말을 자주 바꿨다.

1993년에 국회 법사위가 '백범김구암살진상규명소위원회'를 구성했고 1994년에는 안두희가 건강 악화로 들것에 실린 채 해당 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했으나 이승만과의 관계 등 배후세력에 대해선 실어증을 이유로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소위 측은 2년여 간의 조사 후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내고 1995년 12월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보고서는 김구 암살 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버스기사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2]에 두들겨 맞아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에 따라 당사자인 안두희도 사망하면서 이 사건은 현재까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3.1. 외부의 평가[편집]


주한미국대사관 차원의 분석작업은 안두희에 대한 재판(1949. 8. 3~6)이 종결된 직후에야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예리한 분석은 주한미국대사 무초가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1949년 8월 9일자 문서이다. 문서의 제목은 김구 암살의 영향 ; 안두희 재판과 판결 이며,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철에 소장되어 있다. 문서는 ① 김구 암살의 영향과 ② 안두희 재판·판결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두희 재판이 종결된 이후 무초가 제출한 이 보고서는 암살사건과 김구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암살사건의 동기, 정치적 배경, 관련자들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담고 있지는 않다. 즉 암살사건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암살사건 이후 한국 정부·군이 보여준 사건처리 과정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 무초의 보고서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 점이다. 첫째, 한국군이 암살사건의 발생부터 재판까지 전과정에 강력하게 개입하고 조작했다. 둘째, 한국군은 김구암살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선전함으로써 암살범을 비호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셋째, 김구암살에 관한 한국정부의 주장은 상당부분 근거가 있다. 무초가 말한 암살 발생 이후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한국 정부의 수사와 발표가 안두희의 혐의 및 배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김구가 암살당해야만할 정당한 이유와 동기, 한국독립당이 비난받아야할 동기 등을 선전하는데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무초는 암살사건이 발생한 이후 가장 의혹을 받은 대상이 첫째 과도한 관심과 개입을 하는 한국군, 둘째 김구의 활동이라고 논평했다. 실제로 한국군의 공식 조사결과 발표의 핵심은 역시 김구의 반민족·반정부·친공·반역행동과 쿠데타·대통령살해음모 등을 선전·부각시키려는 것이었다. 무초 주한미대사는 한국군이 최근 발표한 성명 가운데 가장 긴 성명이 바로 이 진상보도였으나, 안두희의 자백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승만정부는 김구암살과 관련해 미대사관과 동일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김구가 표면상으로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신뢰할 수 없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쿠데타나 전복활동에 개입한 것이 사실일 것으로 추정했다. 한 가지 특징적이고 공통적인 반응은 김구가 반국가, 반이승만정부 활동의 중심인물로 파악되었고, 암살이 그런 정치적 이유를 갖는다고 평가된 부분이다. 즉 암살의 주된 책임이 김구측에게 있었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는 김구 암살이 신생 한국 정세의 안정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김구가 이승만에게 가장 참기 힘든 옆구리의 가시같은 존재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김구에 대해 냉정하고 부정적인 종합평가를 내렸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정부의 안정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반영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평가를 염두에 둔다면 미대사관이 암살과 관련된 깊숙한 정보파악이나 배경·인과관계 등 진실을 파헤치는데 큰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김구의 제거가 미국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해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4. 진상 규명[편집]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金學奎)를 구속하였다.

7월 2일 이승만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암살이 정치적 배경을 지녔음에는 당시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며, 사건 발생 이후 지속적으로 암살의 동기·이유, 배후 조종세력, 이승만·한국정부·미국의 개입여부 및 책임 등이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에 1992년 드디어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미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던 도진순은 기존에 간행된 여러 기사들과 안두희 등 핵심관계자들의 증언을 면밀히 분석하는 한편 1949년 전후 김구의 정치노선을 집중분석했다. 도진순은 암살작전의 전개과정을 4단계로 분석하며, 암살배경으로 국내 및 미국과의 관련을 추적했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그의 견해를 반영하여「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의혹의 모략꾼' 김지웅이 암살 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했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안두희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 쪽이었다. 즉,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당시 방첩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한필동 당시 1연대 헌병대장에 따르면 김창룡은 1연대 정보과장으로 지령을 내릴 위치가 아니었으며[3]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과 장은상 포병사령관이 비밀리에 주도하였다고 증언했다.

한편, 2001년 역사학자 정병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C 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stration : NARA)에서 안두희가 미군방첩대(CIC)의 요원이자 극우 테러단체 백의사의 단원이었다는 문서를 발굴했다. 이를 계기로 김구암살과 관련해 지금까지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제기가 있었다. 특히 백의사 및 백의사 사령 염동진의 정체, 김구와의 관계, 백의사의 암살관련여부, 김구의 쿠데타 가능성여부 등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이후 정병준은 백의사·염동진과 김구의 관계, 암살과 반공·반북운동의 상관관계, 암살의 정치적 배경, 안두희의 경력 및 활동 등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백범을 다룬 대중매체에선 자주 다뤄지는 소재인데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 19~20회와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 제1회 및 16회(최종회), 2003년 4월 29일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80회 등지에서 비중있게 다뤘다. 특히 <김구>에선 백범 암살 전 김창룡(서상익 분)과 안두희(정진각 분)가 암살 모의를 하는 장면으로 보아 김창룡이 백범 암살의 배후라는 설정으로 나왔는데 이에 김창룡의 장녀 김미원이 KBS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으나 1998년 대법원이 제작진의 손을 들어줬다.(대법원 97다19038)


6. 참고 자료[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30 07:19:40에 나무위키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사실 유명인들, 그 중에서도 김구 같은 정계 거물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 중에는 범인의 체포 여부와는 별개로 배후 세력이 관여했다는 의혹만 남긴 채 미제로 남은 사건이 많다. 1969년 일어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박정희의 지시 하에 벌였다는 의혹이 있을 뿐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2] 해당 사진들은 미국 <라이프> 지 기자 칼 마이던스(1907~2004)가 찍었다.[2] 정말로 몽둥이 이름이 정의봉이다.[3] 백범 김구의 차남인 김신도 당시 계급 및 직위를 근거로 하여 김창룡 개입설엔 부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