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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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상루.jpg
파일:external/photos.wikimapia.org/65_big.jpg
백상루



1. 개요
2. 설명
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평안남도 안주시에 위치한 명승지. 관서팔경 중 하나에 속한다. 다만 본 건물은 6.25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재건된 것이다.


2. 설명[편집]


둥근 주춧돌 위로 높이 2m 가량의 기둥을 세워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린 기와집으로 중앙의 본채가 있고, 서쪽으로 곁채를 직각으로 붙여 평면이 T자형이다. 지붕의 용마루가 본채가 조금 높고 곁채가 조금 낮게 연결되고 마룻바닥 역시 곁채가 본채보다 조금 낮게 깔았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곁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이다. 마루 밑기둥에 이어 마루 위에 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건물의 중앙에는 기둥을 세우지 않고 중앙부를 강조하였다. 건물의 둘레에는 계자각 난간(鷄子脚欄干)을 설치하고 누각의 마루로 오르는 계단은 본채의 중앙으로 설치하였다. 공포는 2익공으로 구성되었으며 연꽃 장식을 조각하였다. 보의 머리는 용의 모양으로 장식하였으며, 기둥과 서까래 등은 모로단청으로 마무리했다.

淸川江上百祥樓 청천강 위 백상루에

萬景森羅未易收 삼라만경(森羅萬景) 벌여 있어 한눈에 보기 어렵고

草遠長堤靑一面 풀은 멀리 긴 둑에 한 줄로 푸르렀다

天低列岫碧千頭 하늘로 뻗은 멧부리 천으로 줄지었고,

錦屛影裏飛孤■ 비단병풍 속을 나르는 외로운 따오기,

玉鏡光中點小舟 옥거울 속에 뜬 한 점의 작은 배라.

未信人間仙境在 속세에 선경(仙境)이 있는 것을 믿지 않았더니,

密城今日見瀛州 밀성(密城)에서 오늘 영주(瀛州)를 보는구나.

-

충숙왕이 지은 어제시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충숙왕이 쓴 시에 백상루에 대하여 읊은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전부터 안주는 평양과 함께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통의 중요한 거점지로 북방 진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고, 거란이나 몽골, 홍건적의 침공 때마다 서북 방면의 군사 요충지 역할을 했다. [1] 태조 1년(918년) 대도호부가 설치된 평양이 고려 조정에 의해 서경으로 승격되면서 태조 14년(931년)에 안주 역시 안북부(安北府)로 격상되었고, 성종 2년(983년) 영주안북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로 승격되어 방어사(防禦使)가 설치되었고, 현종 9년(1018년)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로 개칭되었다. 의종(毅宗, 1127~1173) 때에는 안주에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두었다가 파한 적이 있고, 공민왕 18년(1369년)에 안주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었다가 뒤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

안주성 백상루는 안주읍성에 딸린 시설로 평소에는 인근의 경치를 구경하는 명승지였지만, 외적의 침입시에는 전투를 지휘하고 외적의 접근 및 이동 양상을 살피는 장대(망루) 역할을 했다. 일제 시대인 1938년(쇼와 13년)에 총독부에서 수리한 내역이 남아 있으며# 현존하는 백상루는 북한 정권에서 복구할 때 원래 있던 위치에서 서쪽으로 400m 정도 옮겨서 복구했고, 1753년에 고쳐지었을 때의 모습을 따라 복원했다고 한다. #

또한 이곳은 여말선초시대의 대신인 조준이 수많은 중원 젊은이가 고구려에서 물고기밥으로 사라졌다며 살수대첩을 얘기하는 칠언절구 를 남긴 곳으로도 유명하다. 해당 시는 1391년 경, 조준이 명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2]

薩水湯湯漾碧虛(살 수 상 상 양 벽 허 살수 강물 파도치며 허공에 출렁이니,

隋兵百萬化爲魚(수 병 백 만 화 위 어 수나라 백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것다.

至今留得漁樵話(지 금 류 득 어 초 화 지금까지 어초들의 얘깃거리로 남아,

不滿征夫一笑餘(불 만 정 부 일 소 여 지나는 나그네의 한바탕 웃음거리 되고도 남네.

-


안주의 백상루(百祥樓)에 이 시가 걸려 있었고, 수십 년 후 태종 시기 조선에 파견된 명 사신 축맹헌이 이 시를 보고 답시를 남겼다. 당나라가 수십년 후 끝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들어 수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면 성공했을 것이라는 식의 내용이다. 축맹헌은 청천강을 내려다보는 정자에 이런 시가 떡하니 걸려 있으니 굴욕으로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도 사대의 예 운운하며 노발대발하지 않은 걸 보면 타국에서 어느정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았던 모양.

이후 백상루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후에 북한 정권에 의해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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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웃긴 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까지 안시성의 위치를 이곳 안주로 비정하는 견해를 내놓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살수대첩과 마찬가지로 안시성 전투 역시 한국사에서 중국 왕조에 맞서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둔 중요한 사건이다. 안시성이 안주가 아니라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조선 후기 안정복 등 실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이루어졌다.[2] 명 사신과의 연회 자리에서 즉석에서 이 시를 지어 양국의 자존심 싸움에서 이겼다는 설화도 있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명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며, 정도전, 정몽주에 비견될 정도로 똑똑했다던 조준이 굳이 그런 어리석은 어그로를 끌 리 없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