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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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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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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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투 전 상황
3. 전투 경과
3.1. 전초전, 송현리-송정동 전투[1] (8.18 ~ 9.18)
3.1.1. 8월 18일
3.1.2. 8월 20일
3.1.3. 8월 26 ~ 27일
3.1.4. 8월 31일
3.1.5. 9월 2일
3.1.6. 9월 7일
3.1.7. 9월 16일
3.1.8. 9월 18일
3.2. 1차전(9.24 ~ 9.27)
3.2.1. 9월 24일
3.2.2. 9월 25일
3.2.3. 9월 26일
3.2.4. 9월 27일
3.2.5. 9월 28일 (임무 교대)
3.3. 2차전(9.30 ~ 10.1)
3.3.1. 9월 30일
3.3.2. 10월 1일
3.4. 결과
4. 여담


1. 개요[편집]


1951년 9월 24일부터 10월 1일까지 국군 7사단8사단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와 연계해 강원도 양구군 백석산[2]의 북한군 32사단, 12사단을 격퇴하기 위해 벌인 고지전.

참고로 비공식적으로는 백석산 일대를 공략하기 시작한 8월 16일부터 백석산 거점들을 완전히 장악하는 10월 15일까지 치기도 한다.


2. 전투 전 상황[편집]


참고자료1 참고자료2
1951년 8월 초 7사단은 양구 서북방 파로호 남쪽 캔사스선과 그 북측 신 캔사스선을, 5, 8연대로, 3연대는 그 북쪽 전초선(Badge Line)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북쪽 백석산 일대엔 북한 5군단 예하 32사단과 12사단이 있었고, 32사단은 백석산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883고지-901고지-554고지를 요새화한 뒤 남쪽을 향해 정찰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8월 14일, 미 8군사령관은 국군 1군단 및 미 10군단의 합동 작전인 포박작전(Operation Creeper)[3]을 하달했고, 이에 미 10군단장은 16일 국군 5사단에게 가칠봉 일대를, 미 2사단은 단장의 능선을, 그리고 국군 7사단에겐 883고지를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3. 전투 경과[편집]



3.1. 전초전, 송현리-송정동 전투[4] (8.18 ~ 9.18)[편집]



3.1.1. 8월 18일[편집]


7사단 작계지 동쪽의 미 2사단이 단장의 능선 남쪽에 위치한 피의 능선에서 전투를 벌이자, 이에 국군 7사단도 적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전투지경선 너머[5] 피의 능선 서측 554고지 공격임무를 부여받는다.

3.1.2. 8월 20일[편집]


밀리고 밀리는 격전 끝에 5연대는 양갈래고지, 3연대는 883고지와 901고지[6]를 점령하나 적이 3연대 쪽을 역습해 883, 901 고지를 상실하였다.

3.1.3. 8월 26 ~ 27일[편집]


피의 능선 전투를 치루는 미 2사단 예속 국군 5사단 36연대가 혈전 끝에 가까스로 점령한 983고지(속칭 두밀령 고지)를 탈취당하자 미 10군단은 국군 7사단에게 피의 능선 서측방 554고지를 우선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8연대와 7사단 대전차공격대대는 554고지 남쪽 2㎞ 끄트머리에 위치한 536고지[7]를 우선 점령한다.

3.1.4. 8월 31일[편집]


8연대는 사단 동측방의 901고지를 공격해 점령한다.

3.1.5. 9월 2일[편집]


대전차공격대대가 전투지경선을 넘어 554고지 일대를 공격해 점령함으로서 피의 능선 전투에 가세한다.

3.1.6. 9월 7일[편집]


지난번 점령하였다가 피탈당한 883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5, 8, 3연대가 교대로 투입되었으나 적의 저항이 거세 별 성과는 없었다.

3.1.7. 9월 16일[편집]


이번엔 3개 연대를 883고지 주변에 일제히 투입하였다. 일단 8연대는 883고지 서쪽의 743고지를, 5연대는 서측방의 892고지[8]를 각각 점령해 적의 전력이 분산, 약화되었다.

3.1.8. 9월 18일[편집]


마침내 3연대가 883고지를 점령함으로서 송현리-송정동 전투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국군 7사단은 적의 고지들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기상 악화나 동쪽에서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가 연이어 진행중인 탓에) 항공지원이나 포병지원을 효과적으로 받지 못하여 병력이 70% 수준으로 감소해 전멸 상태가 되었고, 지원화기들도 고장나 8사단과 바로 임무교대해야 할 정도로 부대의 재정비가 시급히 요망되었다. 그러나 미 10군단장 Clovis E. Byers 소장은 동쪽에서 병행중인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적이 완강하게 저항하자 적이 백석산을 확보하고 있는 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7사단에게 교대준비를 미루고 우선 백석산(1142 고지) 공격을 명령하였다.

3.2. 1차전(9.24 ~ 9.27)[편집]



3.2.1. 9월 24일[편집]


파일:백석산전투=_=고지위치.jpg
이미지 출처.

이 당시 7사단은 892, 743, 883, 901 고지를 지키기 위해 좌로부터 5, 8, 3연대 순으로 3개 연대를 몽땅 전방 배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9] 게다가 북한군 32사단 및 이를 지원하는 12사단은 여전히 백석산을 정점으로 양 능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언제든 반격할 태세라 예비대를 대규모로 구성할 여력도 없었다.

그래도 명령은 명령이기에 우선 8연대가 주공으로 883고지에서 좌측 능선 접근로를 타고 북쪽의 894 고지를 공격했고, 3연대는 901고지에서 우측 능선을 타고 북쪽 300m에 있는 무명고지를 11중대 및 대대화력을 집중 퍼부어 총포와 방망이 수류탄으로 저항하는 적을 혈전으로 물리치고 1시간만에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3.2.2. 9월 25일[편집]


8연대는 894고지를 두고 여전히 난황을 거듭하다 화기중대의 포화로 적의 진지들이 무력화된 틈을 타 백병전을 벌여 결국 894 고지와 백석산의 서남쪽을 흐르는 능선의 남쪽 요지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3연대 3대대는 동쪽 미 2사단의 1024고지 공격에 호응하듯 전진하며 그 고지가 탈취될 무렵에 서측의 무명고지를 점령하였다.[10]

3.2.3. 9월 26일[편집]


이 무렵 국군 7사단은 28일에 8사단과 임무 교대를 앞두고 있는 상태여서 그 전에 공략중인 고지들은 어떻게든 점령해 명예롭게 인계한다는 결의가 있었고, 이에 백석산 전방에 위치한 3연대와 8연대를 앞세워 백석산을 공략했다.

우선 3연대 1대대는 1024고지 서측을 점령한 3대대를 지나쳐 백석산 남동측 1060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치달았으나 적의 포격에 물러나고 말았다.

한편 8연대는 2대대를 선두로 894고지로부터 공격을 속개해 항공폭격과 포병지원을 받으며 백석산 정상부의 두 주봉 가운데 남쪽 봉을 오후 4시경 손에 넣고 마지막 봉우리를 공략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정말 불운하게도 3연대를 화력지원하던 미군 전차의 전차포가 8연대 2대대 행렬을 덮쳐 폭심지에 있던 7중대를 중심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공격기세도 꺾이고 말았다.[11]

한편 3연대의 아군오폭은 이성가 사단장에게도 목격되었고, 직후 8연대 2대대장 임춘발 소령의 항의전화에 이어 8연대장 김기동 대령까지 사단 본부를 찾아와서는 이건 자신들을 시기한 3연대장 정진의 고의라며 항의했다.# 한편 백석산에선 이를 기회로 삼은 적의 역습이 이어졌고, 8연대 2대대는 남쪽 봉우리만 겨우 유지한 채 야간방어에 돌입했다.

3.2.4. 9월 27일[편집]


이날 새벽 적군이 역습을 시작했다. 이들은 단장의 능선에서 교대 후 이곳의 32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12사단 소속 부대들이었고, 이 공격으로 8연대는 점령중이던 백석산 서쪽 봉우리도 상실하였으며 직후 실시한 역습도 실패했다.

3연대 측도 적의 공격을 받았으나 3대대가 격전 끝에 이들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우측의 미 2사단이 1024고지를 빼앗겨 연대의 우측방이 위협받자 예비대를 전투지경선 너머로 투입해 이를 탈환한 뒤 미군에게 인계하였다.

3.2.5. 9월 28일 (임무 교대)[편집]


자정이 되자 7사단은 노전평 부근 작전지역을 미 해병 1사단에 인계하고 온 8사단인수인계 후 육본예비로 전환될 준비를 했고, 공교롭게도 이 날 북한군 측도 32사단과 12사단간의 임무교대가 있었다.

3.3. 2차전(9.30 ~ 10.1)[편집]



3.3.1. 9월 30일[편집]


8사단의 주공을 맡은 10연대는 1대대를 좌, 2대대를 우, 그리고 3대대와 대전차공격대대를 예비로 편성하고 오전 6시에 공격선으로 진출, 공격준비사격 후 1대대를 시작으로 돌격했다. 1대대는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 9시경에는 2,3중대가 적진의 일각을 돌파하고 발판을 마련하였으나, 적의 저항에 수류탄 축척거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한편 2대대는 완만한 경사를 타고 올랐으나 백석산 우측 봉우리에 완전히 감제되어 전진이 어려웠다. 이에 연대 수색중대를 우측방에 보내 공격의 활로를 개척하려 했으나 이조차도 막히고 말았다.

3.3.2. 10월 1일[편집]


10연대 1대대는 이른 아침의 안개를 끼고 재공격을 했으며, 3시간의 혈전 도중 우군 전투기들이 백석산을 폭격하자 숨을 고른 뒤 일제히 돌격해 백석산의 좌측 봉우리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우측의 2대대는 이날도 여전히 백석산 북쪽 1050고지의 적을 제압하지 못해 공격이 저지되었다.

한편 3대대의 공격을 저지한 백석산 우측의 적들이 좌측 봉우리에서 밀려난 적들과 합세해 좌측 봉우리로 역습을 실시하였고, 이에 1대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다시 밀려나고 말았다. 한편 2대대는 자신들로 인해 공세가 지지부진하자 재공격을 감행해 우측 9부 능선에 도달했고, 이에 적 역습부대가 2대대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였다.

2대대가 적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재편성을 마친 1대대는 1중대를 선두로 재돌격해 백석산 주봉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뒤이어 2대대도 5,6중대가 우측 봉우리를 점령해 백석산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12]

3.4. 결과[편집]


  • 10월 10일부로 북한군 5군단이 후방으로 철수하고, 그 자리를 중공군 20병단 예하 68군이 맡게 되었다.[13] 한편 국군 8사단은 적들이 부대교대로 혼란한 틈을 타 백석산 북쪽 고지군까지 진출, 10월 15일 748고지, 도피막, 1090고지 서쪽을 점령한 뒤 10월 18일 미 2사단으로부터 1220고지를 인수받아 이곳을 발판으로 최종목표 1090고지 공략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 이렇게 일대에서 가장 높은 백석산에 이어 주변 고지군을 닥치는대로 장악한 결과 전선은 5∼10㎞ 북쪽의 어은산(1277) 일대로 북상하게 되었으며, 우측 단장의 능선과 문등리 계곡을 감제할 수 있어 단장의 능선 전투에 도움이 되었다.

  • 국군 7사단은 1951년 11월, 8사단과 임무교대해 이곳으로 되돌아와 이곳을 지키다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를 치루게 된다.


4. 여담[편집]


  • 북한군 12사단은 본래 7사단이었으나 개전 초기 춘천-홍천 전투에서 강원 홍천군으로 진격이 늦어지자 전우 소장이 해임되고 12사단으로 서수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 송현리-송정동 전투 당시 7사단 5연대는 지휘관이 사고나 책임을 지고 연이어 교체되는 징크스로 다들 오기 꺼리는 기피 연대였고, 병사들도 그 방치된 기간만큼 사기도 낮았다. 그러던 중 부연대장으로 부임한 채명신 중령이 김용배[14]연대장이 순직 후 연대장 없이 대리업무를 수행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김용배 사단장의 건의로 연대장으로 급속 진급했고, 그 뒤 과거 25연대에서 그랬듯 기강을 잡고 그간 쟁탈전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양갈래 고지[15] 공략에 과거 개성 송악산에서 써먹은 전술들[16]을 지시해 격전지였던 양갈래 고지를 순식간에 접수하는 등 제 기량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전투로 인해 5연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이 때문에 직후 벌어진 백석산 공략 때에도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 해당 전투가 끝난 후 8사단 10연대의 모습이 촬영되었다.

  • 현재 백석산 일대는 21사단 65여단이 담당중이며, 명칭도 담당지 중 가장 격전지임을 기려 백석산 부대다.


  • 2000년대 백석산 일대에서 유해발굴이 시작된 이래 2017년까지 590여구가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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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대전현충원 문서에 따르면 후술할 901 고지 등을 두고 벌인 전투라고 한다.[2] 평화의 댐 동쪽 산악지대다.[3] 양구군 해안분지 동쪽 낚시바늘 형상의 능선(J Ridge)을 탈취, 해안분지 공격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작전.[4] 국립대전현충원 문서에 따르면 후술할 901 고지 등을 두고 벌인 전투라고 한다.[5] 아래 지도에 보이듯 여긴 미 2사단 작계지이다.[6] 아래 전투 경과 이미지에서 3연대 담당지 양쪽 고지들. 참고로 이 두 고지는 백석산을 공략하는데 아주 중요한 거점들이다.[7] 아래 이미지에서 3연대 남동쪽 고지.[8] 아래 이미지에선 미표시. 지못미[9] 즉, 3개 연대를 몽땅 최전방에 놓아두고 사단 직할대인 수색 및 대전차 대대들을 후방에 놓아둔 상황이다.[10] 게다가 이후 이곳에서 진지 재편성 중 아군의 심한 포격을 피해 호 속에 숨어 있던 군관 1명, 사병 8명을 생포하기도 했다.[11] 몇몇 군사학자들은 두 연대가 동시에 오르면서 쌍방 정보 교류를 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 평가하고 있다.[12] 점령 과정에서 6중대 공재호 하사가 대공포판을 등에 지고 단신으로 기암절벽을 기어올라 적의 기관총 진지를 수류탄으로 잠재우고, 적 산병호에도 사격을 가해 돌격의 기회를 여는 수훈을 세웠다.[13] 이들은 1951년 5월 21일 압록강을 넘어 원산방어에 임하다 북한군이 패주하자 어은산-문등리로 투입돼 국군을 막아섰다.[14] 당시 7사단장과는 동명이인.[15] 단순히 지형이나 전투 양상에서가 아니라... 쟁탈전 속에서 정조없이 양쪽에 양다리를 걸쳤다는 해괴한 논리에서 유래됐다.[16] 우선 고지에 며칠이고 불규칙하게 공준사를 해대면 적들은 소수 병력만 남겨놓는데, 이러한 시기를 잘 노려 소수의 특공대를 보내 화력 지원 속에서 알박기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