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스트리트 보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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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리처드슨
하위 도로우
브라이언 리트렐
A.J. 맥린
닉 카터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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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빌보드 뮤직 어워드
파일:빌보드 뮤직 어워드 로고.svg
톱 아티스트상
1998년

1999년

2000년
Usher

백스트리트 보이즈

데스티니스 차일드


백스트리트 보이즈
Backstreet Boys


파일:백스트리트보이즈.jpg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결성
1993년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
데뷔
1996년 5월 6일
데뷔 앨범
Backstreet Boys
멤버
케빈 리처드슨
브라이언 리트렐
하위 도로우
A.J. 맥린
닉 카터
장르
, 댄스 팝, 틴 팝, R&B, 팝 록, 어덜트 컨템퍼러리
레이블
RCA, 자이브, BMG
링크
파일:BSB.pn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Threads 아이콘.svg
1. 개요
2. 멤버
3. 커리어
3.1. 결성 (1992~1993)
3.2. 데뷔 (1993~1996)
3.3. 1997~1999
3.4. 2000~2006
3.5. 2007~2010
3.6. 2011~2017
3.7. 2018~현재
4. 음반
4.1. 정규
4.2. 싱글
5. 기타



1. 개요[편집]


미국의 5인조 뮤지션 보이그룹. 전 세계를 넘어 그야말로 최고를 논하는 역대 보이밴드의 끝판왕 중 하나.[1] 백스트리트 보이즈와 엔싱크 이 두 그룹과, 그들의 선배격인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없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 및 전 세계의 수 많은 보이밴드들은 거의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백스트리즈 보이즈와 엔싱크와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탄생시켰던 미국에서는 아이돌 댄스 그룹의 시대가 2001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고, 2022년 현재까지 댄스 그룹보다 1인 아티스트 위주로 팝(장르) 문화가 발전해오고 있는 상태.[2]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장르 중 하나인 틴팝 음악의 효시 격인 그룹. 1990년대 초반 갱스터 랩과 그런지 락에 밀려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이들이 엄청난 인기몰이를 시작한 이후 팝 음악계는 10, 20대 취향의 틴팝 음악도 대세가 되었다.[3] 팝 음악계에 한 획을 그은 슈퍼 보이밴드라 할 수 있다.

1992년도에 결성하여 1996년도에 그룹 이름과 동일한 명칭의 앨범 '백스트리트 보이즈'로 데뷔. 원래 5인조로 출발한 그룹으로서 케빈 리처드슨을 필두로 닉 카터, 브라이언 리트렐, AJ 맥린, 하위 도로우 5인의 멤버로 이루어졌다. 멤버 각자의 부침이 있었고 그룹의 리더 케빈 리처드슨이 2006년에 개인사를 이유로 탈퇴했었으나 2012년 4월에 재합류했다. 아이돌임에도 데뷔 30주년에 2020년대 현재까지 멤버 교체없이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는 흔치 않은 케이스이다.

As Long As You Love Me, Everybody, I Want It That Way, Shape Of My Heart 등 여러 명곡을 쏟아냈지만 국내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노래는 원빈이 출연한 하이트맥주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었던 THE ONE[4]이라는 노래였다. 1990년대 팝 음악에 관심이 있는 국내 청취자라면 라디오들에서 흘러나왔던 As long as you love me가 더 친숙하겠지만 요맘때 쯤 국내 팝 시장은 시대적 변화와 여러가지 이유로 완전 죽어있던 터라 국내 일반 청취자들 중에서는 이 노래로 이 그룹을 알게 된 경우가 많았다. 훗날 일본 애니메이션인 기동아, 부탁해!에서도 이걸 주제가로 쓰기도 했다.

주로 인기를 끌었던 곡들을 보면 같은 시대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라이벌 보이그룹 격인 엔싱크에 비해 춤과 노래가 대체적으로 박력은 덜한 편이지만, 좀 더 서정적인 멜로디 라인과 젊은층에게 잘 와닿는 가사가 포인트.

실로 보이밴드 역사의 끝판왕이자 보이밴드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는 모범 사례라 할만하다.


2. 멤버[편집]


파일:25072500-2522-4636-8EFD-C6F35804596B.jpg
{{{+1 {{{#000 '''Kevin 'Scott' Richardson
케빈 '스콧' 리처드슨'''}}} }}}
생년월일
1971년 10월 3일
출생지
미국 켄터키 주 어바인
신체
187cm

파일:9D7AA690-9559-45F9-993E-E2FDE6A40874.jpg
{{{+1 {{{#000 '''Howard 'Dwayne'(Howie D.) Dorough
하워드 '드웨인' (하위 D.) 도로우'''}}} }}}
생년월일
1973년 8월 22일
출생지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
신체
168cm

파일:B154CB3A-6A86-4CBD-A8BE-E2805625F43A.jpg
{{{+1 {{{#000 '''Brian 'Thomas' Littrell
브라이언 '토마스' 리트럴'''}}} }}}
생년월일
1975년 2월 20일
출생지
미국 켄터키 주 렉싱턴
신체
173cm

파일:루드레 핑크 로고.webp[[파일:드래그 레이스 핑크 로고.webp
공식 시즌 역대 우승자
[ 펼치기 · 접기 ]
정규 시즌 우승자
시즌 1
시즌 2
시즌 3
시즌 4
비비 자하라 베넷
타이라 산체스
라자
샤론 니들스
시즌 5
시즌 6
시즌 7
시즌 8
징크스 몬순
비앙카 델 리오
바이올렛 차츠키
밥 더 드랙퀸
시즌 9
시즌 10
시즌 11
시즌 12
사샤 벨루어
아쿠아리아
이비 오들리
제이다 이센스 홀
시즌 13
시즌 14
시즌 15
시즌 16
시몬
윌로우 필
사샤 콜비

올스타 시즌 우승자
올스타 시즌 1
올스타 시즌 2
올스타 시즌 3
올스타 시즌 4
채드 마이클스
알래스카
트릭시 마텔
모네 X 체인지, 트리니티 더 턱
올스타 시즌5
올스타 시즌 6
올스타 시즌 7
올스타 시즌 8
셰이 쿨레
카일리 소니크 러브
징크스 몬순
짐보

기타 시즌 역대 우승자
[ 펼치기 · 접기 ]
셀럽판 우승자
시즌 1 1화
시즌 1 2화
시즌 1 3화
시즌 1 4화
베이비킨스 라 루
(조던 코너)
밴퀴샤 더 하우스
(바네사 윌리엄스)

레이첼 맥아담스애플 (더스틴 밀리건)
마담 댓 빗치 (알렉스 뉴웰)
뱃 보르도 (맷 아이스먼)
퀸 엘리자 베스
(헤일리 키요코)
시즌 2
시즌 3


포피 러브
(AJ 매클린)




UK 우승자
시즌 1
시즌 2
시즌 3
시즌 4
더 비비엔
로렌스 채이니
크리스탈 베르사체
대니 비어드
Down Under 우승자
시즌 1
시즌 2
시즌 3
키타 민
스팽키 잭슨
아이시스 아비스 로렌
캐나다 우승자
시즌 1
시즌 2
시즌 3
시즌 4
프리얀카
아이시스 쿠튀르
지젤 럴러바이

프랑스 우승자
시즌 1
시즌 2
팔로마
케이오나
벨기에 우승자
시즌 1
드래그 쿠완
멕시코 우승자
시즌 1
크리스티안 페랄타
VS The World 우승자
UK VS The World 시즌 1
Canada VS The World 시즌 1
블루 하이드랜자
라자 오하라



파일:931DE71C-E0E8-4E8C-AF4A-6A7A01FD1E21.jpg
{{{+1 {{{#000 '''Alexander 'James'(A.J.) McLean
알렉산더 '제임스' (A.J.) 맥린'''}}} }}}
생년월일
1978년 1월 9일
출생지
미국 플로리다 주 웨스트팜비치
신체
177cm

파일:DB5CC194-F4B9-417E-A18F-333F33951B78.jpg
{{{+1 {{{#000 '''Nickolas(Nick) 'Gene' Carter
닉콜라스(닉) '진' 카터 '''}}} }}}
생년월일
1980년 1월 28일
출생지
미국 뉴욕 주 제임스타운
신체
184cm


3. 커리어[편집]



3.1. 결성 (1992~1993)[편집]


1992년 켄터키 렉싱턴에서 사촌지간[5]이던 케빈 리처드슨과 브라이언 리트렐은 지역 교회나 학교축제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플로리다 올랜도 출신의 AJ와 하위가 만나 연예계 진출을 노리고 있었고, 후에 닉 카터가 하위와 AJ와 합류하면서 3명의 트리오가 되었다.
케빈 리처드슨이 올랜도로 이사를 오면서 낮에는 알바를 하고 밤에는 음악 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이들 3명과 합류하게 되었고 케빈은 같이 활동하던 사촌 브라이언을 소개하면서 5인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루 펄먼[6]이라는 제작자가 보이밴드 멤버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고, 이들이 여기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올랜도에 있었던 시장 이름인 '백스트리트 마켓'에서 따와 그룹 이름을 백스트리트 보이즈로 결정했다.

1993년 케빈 리처드슨 과 브라이언 리트렐이 합류하기 이전 1992년 부터 1993년 초반 까지 백스트리트보이즈에는 현재 멤버구성과는 다른 기존 멤버가 몇명 있었다.
현재까지 그룹에서 활동 중인 하위 도로우 와 a.j. 맥린 , 닉 카터 이 원년 멤버 3명 이외에 3명이 더 존재 했었는데
샘 리카타 (Sam Licata): https://backstreetboys.fandom.com/wiki/Sam_Licata
버크 파슨스 (Burk Parsons): https://www.ligonier.org/learn/teachers/burk-parsons
그리고 찰스 에드워즈 (Charles Edwards) 이 세명이다.

먼저 샘 리카타와 버크 파슨스 이 두명이 하위, AJ, 닉 과 함께 처음 Backstreet boys 의 멤버로 발탁 된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샘 리카타와 버크 파슨스는 각자 개인 사정의 이유로 그룹에서 하차하게 된다.
가장 먼저 그룹을 떠난 버크 파슨스는 신학을 공부 하던 학생으로 학업을 위해 그룹활동을 포기하게 된다.
(실제로 현재 미국 플로리다주에 위치한 Saint Andrews Chapel 교회의 담임목사로 활동 중이며 구글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목사" 버크의 정보가 나온다.)
버크는 루펄먼이 정말 아끼던 연습생이었던 것이 분명한게 백스트리트보이즈에서 탈퇴한 뒤 엔싱크의 멤버를 모집 중 [7] 이던 때 버크에게 엔싱크로의 합류를 간곡히 요청했었으나 진로를 확고하게 정한 버크를 붙잡지 못했다고 함.
찰스 에드워즈의 경우 버크 파슨스의 탈퇴 후 새롭게 발탁 된 멤버인데, 그룹에 합류한지 몇달도 되지 않아 BSB의 성공을 예상못하고 무조건 실패할거라는 자신만의 얕은 생각으로 그룹 탈퇴를 결정했으며 그 후 버크를 엔싱크 멤버로 재합류시키지 못한 루펄먼이 대신 찰스를 추후 엔싱크가 되는 그룹의 멤버로 재발탁 해주지만 그마저도 얼마 못가 엔싱크 역시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미스로 탈퇴. 그 이후 알려진 그의 대한 행보는 두 그룹에서 탈퇴 이후 인디밴드로 활동을 했다는 소식 외 거의 전무하다.
세번째로 탈퇴 소식을 전한 샘 리카타는 자신의 음악적인 가치관과 BSB의 스타일이 맞지 않는 다는 이유와 솔로활동을 원했던 것으로 인해 하차 한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룹 탈퇴 이후 피닉스스톤 (Phoenix Stone) 이라는 예명으로 솔로 음반을 한장 내고 2000년대 초반 활동 했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엄청난 성공을 목격한 이후 자신이 BSB에서 자진 하차 한것이 아닌 루펄먼에 의해 탈퇴를 강요받았으며 아직 그룹에서 자신이 공식적으로 탈퇴된 것이 아니며 루펄먼에게 성적학대를 당했었다는 소송을 걸었었다. (이는 일부 루펄먼의 강요에 의한 탈퇴와 불공정계약 부분이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고 이후 백스트리트보이즈가 루펄먼의 불공정 계약 및 성적학대에 대해 고소후 승소를 하는 과정에 참고 증언 중 하나가 되기도 했었다.) 그 이후 그는 2005년 멤버 케빈리처드슨이 5집앨범 (미국 공식 4집) NEVER GONE 활동 후 뮤지컬 활동을 위해 그룹을 떠나 있었던 상태에 개인 인터뷰 중 은근슬쩍 케빈이 떠난 빈자리로 복귀할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현하며 그룹복귀를 암시하는 멘트를 쳤다가 오로지 케빈의 복귀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BSB의 팬덤과 여론들의 뭇매를 맞고 나가리 된적이 있었음. 그 이후 공백기를 가지다가 2010년대 초 부터 다시 피닉스스톤 이라는 예명을 그대로 들고 나와 컨트리록 장르를 기반으로 한 앨범들을 내며 현재까지도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참고 비디오들-
https://www.youtube.com/watch?v=dsGKaNYuPeA&ab_channel=kasey85
케빈과 브라이언이 합류하지 않던 1992년 버크 파슨스와 샘 리카타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테잎의 링크주소.
'I got to get it' 이라는 곡이다.(위 영상 유튜브 영상정보란에는 버크파슨스 가 아닌 찰스에드워드가 참여했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버크파슨스 참여곡 이라고 함.- 이 곡은 후에 케빈과 브라이언 합류 이후 재녹음 되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kCDnuau2EQ&ab_channel=TheSydnerian
(케빈,브라이언 합류 후 'I got to get it' 1994년 라이브 공연)

https://www.youtube.com/watch?v=YGlfPEzGkSM&ab_channel=TheDarkSide-BackstreetBoys[8]
1992년 케빈 & 브라이언 합류 이전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Jackson 5 - i'll be there" 커버 영상.

그렇게 1993년 초반, 3명으로 줄어든 백스트리트 보이즈에는 이후 싱어송라이터가 되기 위해 켄터키 주 렉싱턴을 떠나 플로리다 주 올랜도로 건너온 케빈과 그의 사촌지간이었던 브라이언이 BSB의 새 멤버로 합류, 공석이었던 두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렇게 1992년 부터 1993년 초반까지 2명 + 1명이 탈퇴 하는 1년 남짓 기간의 멤버교체 과정을 거치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완전체가 완성되었다.

이후 1993년 케빈과 브라이언 합류 후 몇 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친 뒤 'Lover boy'와 'Tell me that i'm dreaming' ( https://www.youtube.com/watch?v=53UnWS-pUG8&ab_channel=MDShaxi -[9][10]) 으로 플로리다주 올랜도씨티에서 처음으로 프로모션 공연을 가졌고 이 무대를 지켜본 자이브레코드社와 공식 계약을 맺게 된다.




3.2. 데뷔 (1993~1996)[편집]


1993년 5월 올랜도에서의 지방 공연으로 데뷔.

매니저와 계약을 맺었지만 음반을 내기 위해서는 음반사와 계약을 맺어야 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11]

1993년은 LA 폭동 이후 떠오른 갱스터 랩과 너바나커트 코베인 사후에 쏟아져 나온 얼터너티브 록 그룹이 주류였던 시대였다. 비록 뉴 키즈 온 더 블록[12]이라는 걸출한 보이밴드가 있었으나 오래가지 못하며 인기 부진을 이유로 해체되었고 미국에는 보이밴드는 이제 한물 갔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음반사 앞에서 오디션을 보며 계약을 맺는 것을 정말 힘든 과정이었으나[13] 다행히 Jive[14] 레이블과 계약을 맺으면서 음반을 출시하게 되었다.

1995년 미국에서 데뷔싱글 We've Got it Goin' On을 발매하였으나 모두의 예상대로 판매는 극히 부진했다. 이유를 따지자면 위에 서술한 대로 보이밴드가 미국에서는 한물 간 장르로 여겨 라디오에서 틀어주려 하지 않았고 반응도 시원찮았다는 것.

결국 빌보드차트 69위라는 매우 부진한 성적을 받아들여야 했고, 이에 회사에서는 유럽으로 고개를 돌려보기로 한다. 그리고 싱글을 발매하였는데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유럽 5개국 나라 차트 톱5 안에 드는 쾌거를 달성했다.[15]

이를 기반으로 유럽에서 활동이 시작되고, 유럽 투어를 돌면서 1996년 미국을 제외한 나라에 1집 앨범 'Backstreet Boys'를 발매하였다.[16] 이 데뷔 앨범은 유럽 각종 차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3백만 장을 팔았다. 이렇게 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었지만 아직은 그들의 시대까지는 아니었다.

여담으로 I'll Never Break Your Heart 은 우리나라에서 초콜릿 CF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3.3. 1997~1999[편집]


1997년 2집 Backstreet's Back을 발매했다. BSB의 초창기 히트곡 As Long As You Love Me, Everybody (Backstreet's Back), All I Have To Give, Quit Playing Games (With My Heart) 등이 나온 앨범이다. 이 중에 특히 As Long As You Love Me는 유럽 차트를 석권하다시피 하였다.

싱글을 발매하는 족족 유럽 차트 상위권을 휩쓸자 드디어 미국으로 돌아가서 활동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미국 활동 전 이미 캐나다에서의 인기는 이미 폭발하고 있었고 유럽,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도 인기를 휩쓸고 있었다. 첫 무대의 쓴 경험과는 상반되게 금의환향하면서 복귀하게 된 것이다.

BSB는 유럽에서 발매하였던 1집, 2집의 히트곡을 묶어서 미국판 1집 'Backstreet Boys'를 발매하였고, 그리고 미국에서만 14 x플래티넘(당시 플래티넘, 다이아몬드 인증은 각각 100만장, 1000만장이었다)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기록, 다이아몬드 음반으로 등극했다.[17][18] 총 판매량은 전세계 도합 2200만장 추정.[19]

이 시기에 Quit Playing Games (With My Heart)는 BSB가 미국에서 낸 역대 싱글 중 가장 높은 2위를 기록하였다. BSB는 TV 활동보다는 콘서트와 같은 공연 수입에 많이 의존하는 방식을 택했고, 이에 따라 앨범 판매량은 굉장히 높았으나 싱글 판매량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는 같은 기획사인 엔싱크와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마찬가지. 근데 이쪽은 그래도 빌보드 1위곡이 있다. 엔싱크는 2집의 2번째 싱글인 It' Gonna Be Me로 1위를 차지했고,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처음 낸 ...Baby One More Time 부터 1위.

1999년 Millennium를 발매했다. BSB 인기의 최정점을 찍은 앨범. BSB 최고의 히트곡 I Want it That Way가 수록된 앨범으로 유명하다.[20][21]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는 1, 2집 때 발표한 As Long As You Love Me이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 3집의 I Want It That Way를 BSB의 대표곡으로 여긴다. 미국에서는 6위를 기록했고 유럽차트 1, 2위를 석권했다. 2집에서 얻었던 인기가 3집에서 제대로 폭발한 셈.앨범은 유럽과 미국에서 거의 1, 2위를 다투었고 미국 판매량 13x플래티넘(실질 판매량은 1220만장추정으로 자기들 앨범중에서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전세계 도합 2400만 장 이상(추정)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렸다.

한편 브라이언은 어릴적부터 앓았던 심장 질환을 다스리기 위한 수술을 받았고, 다행이도 쾌차한 듯 쭉 활동을 이어나갔다.[22]


3.4. 2000~2006[편집]


2000년 Black & Blue를 발매했다. BSB의 마지막 히트 앨범. 대표곡으로는 Shape Of My Heart가 차트 9위에 오르며 앨범에서 낸 싱글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미국에서의 판매량은 8x플래티넘(실질 판매량 540만추정). 음반 판매량이 잘 나오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높은 판매량이지만, 그 전 두 앨범이 천만 장을 넘었던 BSB로써는 상당히 아쉬운 성적이었다. 전세계 도합 판매량은 1600만 장.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하필 같은 시기에 비틀즈의 미국/영국의 넘버원 히트곡만 모은 베스트 앨범 '1'이 나와버리는 바람에 몇주동안 2위로 밀리는 일도 있었다. 이걸 두고 죽은(엄밀히 말하면 해체된 밴드지 존 레논을 제외하곤 죽은 건 아니지만...- 당시 조지해리슨은 사망 전) 비틀즈가 산 BSB를 밀어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또한 이 시점이 바로 BSB가 내부적으로 굉장히 안 좋았던 시기이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큰 슬럼프를 겪던 AJ는 약물에 의존하기 시작하여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AJ의 약물 중독으로 인해 공연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그룹 멤버들 간에 다툼이 발생한다.

결국 활동 중단에 들어갔고 리더 케빈이 AJ의 호텔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 재활 치료를 권유하는 사태까지 가게 된다. 다행히도 재활 치료 후 2001년에 공연을 재개하며 나름 유종의 미를 거두며 B&B 시절의 활동을 종료하게 된다.

2001년 베스트앨범 Greatest hits-chapter one을 발매. 미발표 신곡 1곡 Drowning과 그동안의 히트곡 12곡을 모아 냈다.[23] 1993년 이후 끊임없이 활동을 하였던 BSB는 이 앨범을 낸 후 4년 동안 휴식기를 가지게 된다. 미국에서 백만 장이 팔렸으며 Drowning이 빌보드 28위에 올랐고, 그 외 나라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

다른 멤버들은 딱히 주목할 만한 활동을 하지 않았고 팀 내의 마스코트 닉 카터가 팝락 앨범을 내며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엔싱크저스틴 팀버레이크와 비교하면 많이 밀렸다. Now Or Never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발매한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7위와 판매량 50만 장이라는 기대 한참 이하의 성적만을 내는 데 그쳤다. 유럽에서의 성적도 중위권에 머무르며 신통치 않았던 건 마찬가지. Help Me라는 첫 싱글이 그나마 주요 차트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 뒤의 싱글들은 완전히 묻혀 버렸다. 오히려 형 닉의 후광으로 솔로 활동을 하던 애런 카터가 쏠쏠한 인기를 얻고 있던 때였다.

닉은 사실 팀 내에서의 인기를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십대 닉의 얼굴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팬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때문에 사실상 닉은 BSB의 얼굴마담이었다. 그의 솔로 앨범 실패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2000년대 초반에 이미 백스트리트 보이즈는 베스트 앨범을 끝으로 저무는 해였고, 당시 떠오른 넬리, 에미넴, 50센트 등 이미 미국 팝 장르 음악계는 흑인 음악으로 이동하는 시점이었다. 팝 장르가 아닌 락 장르 시장은 당시 신예 인기 밴드들이 나오기 시작했기에 닉 카터가 뚫고 들어가기에는 어려웠다. 엔싱크저스틴 팀버레이크가 팝의 동향을 영리하게 판단하여 최고의 흑인 프로듀서 팀벌랜드와 함께 작업을 해 시대에 부응하는 팝 음악을 만들어낸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 저스틴은 또한 간지나는 춤과 비트, 본인의 섹시미를 무기로 하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 300만 장을 팔고 해외에서도 여러 차트의 정상에 올라선 것이 그를 증명한다.[24]

반면 닉 카터는 본인이 어릴 적 좋아하던 80년대 락을 전면으로 내세웠는데, 앨범의 작곡진들을 보면 그렇게 공감하기는 어려운 느낌이었다. BSB의 수많은 히트곡을 만든 맥스 마틴을 프로듀서로 하여 뭔가 80년대 락 스타일스러운 곡을 만들었지만, 흑인음악으로 완전히 판도가 바뀐 미국 팝 장르 음악계 트렌드를 읽지 못해 맥스 마틴의 작곡은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또한 80년대를 강조하고 싶었다면 본 조비저니 등과 같은 팝 메탈 밴드의 곡을 받았으면 모를까, 여전히 틴팝 작곡가들에게 곡을 받았기 때문에 스타일도 거기서 거기였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음악 스타일로 성공을 거둔 에이브릴 라빈에 비교하는 이들도 있지만 라빈은 조숙하고 반항적인 십대 소녀의 이미지가 당시에는 매우 신선해서 먹혔다. 반면 닉 카터는 대중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자신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이미 보유하고 있던 인기를 바탕으로 그냥 시도해본 꼴이 된 셈이다. 솔로 활동 시절 무려 100kg 가깝게 살이 쪘다는 소문이 있었을 정도로 몸무게가 나갔다. 실제로 당시 사진들을 보면 불과 3년 전 BSB에서의 모습과는 딴 사람일 정도로 심하게 망가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12년 정도에는 다시 그룹 활동을 하며 몸무게가 정상이 되었고 어느정도 재건했지만 떨어진 인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할리우드의 사고녀 패리스 힐튼과 연애를 하며, 그나마 있었던 소녀 팬들도 우수수 떨어져 나가버렸다. 스스로의 관리 부족으로 자신의 인기 기반을 차버린 셈.

2005년 5집 Never Gone를 발매했다. 12번 트랙인 케빈의 돌아가신 아버지 추모곡 Never Gone에서 이름을 따왔다. 발표 전 보이즈 투 멘과 듀엣을 한다는 소식도 있었고 유출곡들 또한 흑인음악 풍의 소울, 알앤비, 팝발라드 풍이 주류였다. 그러나 그들의 오랜 파트너 맥스 마틴이 팝락 스타일로 가자고 내세웠고, 완성된 앨범은 그간 유출곡들과는 완전히 딴판인 팝락 스타일이었다.

흑인음악 돌풍 이후 주춤하던 맥스 마틴은 켈리 클락슨, 핑크 등과 작업하며 팝락으로 다시금 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백스트리트 보이즈와는 그다지 궁합이 좋지 않았는지 다른 작곡가의 Incomplete는 빌보드 13위를 차지하고 여러나라에서 성공을 거둔 반면, 맥스 마틴의 곡은 하위권을 해매며 별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래도 빌보드 앨범 3위를 차지하며 미국내 백만장을 판매했고, 전세계 3백만장이라는 나름 선전한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이후에 2개의 앨범을 더 발표하였지만 오히려 이 앨범이 더 나았다 싶을 정도로 판매고는 더욱 떨어졌다.

Never Gone 활동을 마치고 난 후 브라이언이 Welcome Home이라는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기본적으로 CCM 스타일이나[25] 컨트리나 팝발라드도 포함되어 있다. 성적은 빌보드 차트 74위, 판매고는 10만 장을 기록했다. 사실 2006년 발표한 Unbreakable보다 솔로앨범이 더 나은 퀄리티라고 여겨지지만, 인기가 많이 내려간 상태여서인지 그닥 큰 반향은 없었다.


3.5. 2007~2010[편집]


앨범 발매 전 팀의 리더이며 흔들릴 때마다 팀을 이끌어주었던 케빈 리차드슨이 탈퇴하였다. 뮤지컬 활동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Never Gone이 팝락 스타일로 가면서 틴팝 팬들에게 이질감을 줬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작은 팝발라드 & 댄스 풍의 예전 스타일로 돌아왔다. 다만 BSB의 히트곡을 전부 만들었던 맥스 마틴과는 작업하지 않았다.[26]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원래 스타일로 가되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작곡가들과 작업하기로 한 것으로 추정. 재미있게도 엔싱크의 인기 멤버 JC Chasez가 Treat Me Right를 써주며 보이밴드간의 의리(?)를 보여주었다.

2007년 6집 Unbreakable은 전체적으로 어덜트 성향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예전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나는, 까놓고 말하자면 발전이 없는 앨범이라고 평가받았다. 판매량도 전세계적으로 하향세를 탔고 미국 판매량은 20만 장에 그치며 옛날의 영광을 무색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의 판매량이 30만 장을 기록하며 오히려 아시아에서의 판매량이 더 높은 현상을 보여주었다.[27][28]

2009년 7집 This Is Us은 나름 최신 트렌드에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앨범이다.

레이디 가가를 히트시킨 현 인기 작곡가 Redone에게 노래를 받았으며 첫 싱글도 Redone의 작품. 신곡 Straight Through My Heart가 이번 앨범의 대표적인 방향을 짐작케 해준다. 이 곡은 앨범 발매하기 직전 쯤에야 완성되었는데, 가장 마지막에 나온 노래가 앨범에서 첫 트랙이 되었고 첫 활동곡이 된 것은 아이러니.[29]

BSB는 그때까지의 앨범에서 타 가수와 전혀 피쳐링곡을 낸 적이 없었는데, 마지막 트랙 Helpless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다. 파트너는 그해 최고 인기 래퍼 Pitbull.[30] 노래는 그닥 감흥은 없지만 어쨋든 Pitbull과 함께 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또한 맥스 마틴을 다시 불러와 Bigger라는 한 곡을 받았다.

2005년 컴백 이후 나이를 먹었으니 보컬그룹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러나 이들이 악기를 다루는 것도 아닌 이상 보이밴드가 화음을 빼면 무엇이 남겠는가. Straight through my heart 뮤직비디오를 보면 알 수 있듯, 다시 원래의 댄스 스타일로 돌아왔다. 앨범 스타일도 트렌드를 적극 반영하고 아카펠라 곡도 수록하는 등 현 트렌드와 원래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장점을 조화시키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2005년 컴백 변화 → 2007년 예전스타일 → 2009년 주류트렌드 이렇게 방향이 흘러왔지만 이미 유행 자체가 지나간 그룹이다. 성적은 이제 기대하지 말자.

빌보드 앨범 순위는 9위를 기록하며 여태까지의 앨범중 가장 낮은 성적을 보였다. 고정팬층이 두꺼운 캐나다, 일본, 네덜란드 정도를 제외하면 중위권을 해매고 있다. 미국에서 9만 8천장이 팔렸고 일본에서는 30만 장이 팔리면서 아시아권의 인기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31][32]


3.6. 2011~2017[편집]


뉴 키즈 온 더 블럭은 원래 BSB가 활동할 당시 인기 하락으로 해체한 밴드였으나 2008년 새앨범을 내며 재결합을 선언한다. 2011년 BSB와 NKOTB가 NKOTBSB라는 프로젝트성 그룹으로 새롭게 결성하였다. 주요 활동은 공연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NKOTBSB라는 이름의 앨범과 Don't Turn Out The Lights라는 이름의 싱글도 발매되었다. 퇴물 그룹 둘이 합쳐서 공연 해봐야 얼마나 성공하겠냐는 말도 있었지만 그해 공연최고수입을 올린 아티스트 16위를 차지하며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다.

사실 공연수입과는 별개로 앨범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아무리 공연을 목표로 결합한 그룹이라고 해도 앨범을 내놓으려면 신곡을 여러 개 수록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13트랙 중 신곡은 고작 2개[3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이미 베스트 앨범으로 나온 두 그룹의 노래를 나눠 수록하였다. 새로운 결과물을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2013년은 결성한지 무려 20주년이 된 의미있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몇가지 중요한 활동들을 기획했다.

우선 지난 2006년에 팀을 떠났던 멤버 케빈 리차드슨이 복귀하였다. 케빈은 밴드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멤버이면서, 진중한 성격으로 팀의 중심을 잡아주던 리더였다. 케빈이 돌아오면서 오랜만에 밴드와 팬덤이 조금씩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두번째로 4년만에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기존 소속사였던 자이브와 재계약을 진행하지 않고, 본인들이 직접 소속사를 만들어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새 앨범은 컨트리풍의 사운드와 하모니를 강조하는 트랙으로 구성되었으며, 제목은 In A World Like This로 명명되었다.

세번째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 되었다. 활동 20년만에 로스엔젤레스의 할리우드 거리에 BSB의 이름이 새겨진 별모양의 동판을 받았다. 그간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준 맥스 마틴이 그룹을 직접 소개해주었고, 멤버들은 감격에 겨워 채 소감을 잇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2013년은 BSB에게 여러모로 의미있는 해였다. 미약하게나마 다시금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고, 향후 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투어와 음악작업이 본격적으로 기획되었다. 신보는 빌보드 5위로 데뷔, 조금씩 떨어지던 앨범차트 순위도 다소 만회하였으며 루즈투어, 광고, 방송활동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리고 몇년 후 BSB의 라스베가스 쇼가 성황리에 개최되며 밴드가 아직도 건재함을 알렸다.


3.7. 2018~현재[편집]


2018년 5월 17일, 새 앨범의 리드싱글 Don't Go Breaking My Heart가 공개되었다.[34][35]

2018년 11월 8일, Chances 싱글이 유튜브에서 공개되었으며, 이때 앨범이 2019년 1월 25일에 발매된다고 공지하였다.
여기서 DNA 월드 투어를 예약할 수 있다.

2019년 1월 4일, No Place 싱글이 유튜브에서 공개되었다.

2019년 1월 25일 9집 DNA가 RCA 레코드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앨범에는 Lauv, Andy Grammer, Stuart Crichton이 작곡한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2019년 2월 4일, 9번째 앨범 DNA가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36]


4. 음반[편집]





4.1. 정규[편집]


Backstreet Boys 파일:빌보드 로고.svg 200 기록
연도
순위
앨범명
비고
1996

Backstreet Boys
1집[37]
1997
Backstreet's Back
2집[38]
#4
Backstreet's Back
컴필레이션[39]
1999
#1
Millennium
3집
2000
Black & Blue
4집
2001
#4
The Greatest Hits – Chapter One
컴필레이션
2003
#3
Never Gone
5집
2007
#7
Unbreakable
6집
2009
#9
This Is Us
7집
2011
#7
NKOTBSB
NKOTBSB 명의

The Very Best Of
컴필레이션
2013
#5
In a World Like This
8집

The Essential Backstreet Boys
컴필레이션
2016

The New Best Of
2019
#1
DNA
9집
2022

A Very Backstreet Christmas
10집, 캐럴

4.2. 싱글[편집]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음에도 빌보드 1위 곡이 없는데, BSB는 싱글 판매보다 앨범 판매에 더 주력을 했고, 3집 Millennium 활동부터는 아예 판매용 싱글을 발매하지 않았다. 사실 뉴 키즈 온 더 블록 전성기 후에 데뷔한 보이밴드가 Hot 100에서 1위를 한 경우는 2010년대까지 상당히 드물었다. *NSYNC[40]는 단 한차례 1위에 올랐고, 원디렉션은 1위를 해보지 못했다. 조나스 브라더스 또한 재결합을 한 2019년에야 첫 1위를 했을 정도. 기존의 싱글차트는 라디오 방송횟수 하나만으로 기록을 한것이며[41] 만약 싱글발매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현재 싱글차트 10위 안에 랭크되었던 곡들은 1위를 했거나 TOP3 안에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Backstreet Boys 싱글 차트인 기록
연도
곡명
파일:빌보드 로고.svg
파일:오피셜 차트 로고.svg
비고
1995
We've Got It Goin' On
#69
#3

I'll Never Break Your Heart
#35
#8

1996
Get Down (You're the One for Me)

#14

Quit Playing Games (With My Heart)
#2
#2

1997
Anywhere for You

#4

Everybody (Backstreet's Back)
#4
#3

As Long as You Love Me

1998
All I Have to Give
#5
#2

1999
I Want It That Way
#6
#1

Larger Than Life
#25
#5

Show Me the Meaning of Being Lonely
#6
#3

2000
The One
#30
#8

Shape of My Heart
#9
#4

2001
The Call
#52
#8

More Than That
#27
#12

Drowning
#28
#4

2005
Incomplete
#13
#8

Just Want You to Know
#70

2007
Inconsolable
#86
#24

2009
Straight Through My Heart
[42]
#72

2011
Don't Turn Out the Lights
[43]

[44]
2017
God, Your Mama, and Me
#46
[45]
2018
Don't Go Breaking My Heart
#63

Chances
[46]



5. 기타[편집]




활동 초기 대한민국 MBC의 음악프로그램인 인기가요 베스트 50(쇼! 음악중심의 머나먼 전신 중 하나)에 게스트 출연한 적이 있으며,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도 출연, 당시 신인이었던 H.O.T.와 대결코너에 출연했다.[47]

백스트리트 보이즈는 데뷔 이래 세 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 했다. 2001년에 발매된 The Hits – Chapter One과 2010년에 발매된 Playlist: The Very Best of Backstreet Boys, 그리고 2013년에 발매된 The Essential Backstreet Boys. 하지만 세 장의 베스트 앨범 중 백스트리트 보이즈가 원해서 발매된 베스트 앨범은 2001년 작 The Hits – Chapter One이다. 나머지 두 장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음반사와 계약 때문에 백스트리트 보이즈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발매 된것. 실제로 2010년과 2013년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 트랙을 보면 싱글로 컷된 노래들만 그대로 옮겨 담았고 보통 베스트앨범이면 으레 수록하게 되는 신곡조차 포함되있지 않다.[48]

서브컬쳐에도 영향을 줬는데, 백 스트리트 걸즈 제목의 모티브로 보인다.

2020년 3월 29일 코로나19로 인해 자가격리 상태로 각자 집에서 I Want It That Way를 부른 뒤 모아 올려줬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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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악잡지 롤링스톤은 역대 최고 보이밴드로 이미 백스트리트 보이즈를 선정한 바 있으며, 그 동급으로 매긴 밴드들이 다름아닌 잭슨5, 보이즈 투 맨 등등.. 끝판왕 맞다.[2] 다만, 북미나 유럽 쪽의 보이밴드가 다 사라진건 아니고, 여전히 조나스 브라더스나 영국의 원 디렉션 등 예전 보이밴드의 맥을 잇는 그룹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 물론 현재 보이밴드 장르는 BTS를 위시한 한국 쪽에 주도권을 넘겨준 상태.[3] 단 틴팝 음악에 대한 거부감때문에 이를 버블검 팝이라 부르며 평가절하 하는 시선또한 상당했다. 에미넴이 당시 틴팝 스타이던 엔싱크나 브리트니 스피어즈를 디스했던 게 주목받던 것도 이 시기.[4] 한국 한정.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데뷔 앨범에서도 모든 트랙이 끝난 다음 히든트랙처럼 브리트니가 직접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신보 '밀레니엄'을 홍보했는데 거기서 맨 처음 소개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그러나 실제 차트 상에서의 이 곡의 인기는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다. 3번째 메이저 앨범 Millenium의 4번째 싱글로 빌보드 20위권에 머무른 정도.[5] 케빈의 어머니와 브라이언의 아버지가 친남매이다.[6] 후에 횡령이라든지 성추행으로 인해 자기가 키운 그룹들한테 고소를 먹게된다. 90년대 초반부터 다단계 사기를 벌여왔음이 적발되어 2006년에 감옥에 수감되었고 잇다른 소송으로 파산하였다. 향간에는 그가 게이였고 성범죄도 저질렀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 사람은 백스트리트 보이즈 뿐만 아니라 엔싱크도 만들었으며, 후에 공통적으로 두 그룹 모두와 수익 정산 문제로 법정싸움을 벌였다. 2016년 8월 22일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출처: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8/22/0200000000AKR20160822080200009.HTML [7] 엔싱크 (Nsync)라는 그룹이름은 엔싱크 5명의 멤버들의 이름의 끝 알파벳을 하나씩 따와서 만든 그룹네임이다. 저스틴 팀벌레이크 Justin Timberlake 저스틴의 justi"N" 크리스 커크패트릭 Chris Kirkpatrick 크리스의 chri"S" 조이 패턴 Joey Fatone 조이의 joe"Y" 랜스 베이스 Lance Bass의 데뷔 초창기 예명 란스텐의 lanste"N" 제이슨 샤세즈 Jason Chasez (줄여서 JC)의 j"C" 이렇게 다섯글자를 조합해 NSYNC 라는 그룹이름을 붙였던건데 이 당시에는 아직 BSB의 후임 보이그룹 (국내로 따지면 H.O.T를 만든 이수만의 두번째 보이그룹 신화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될듯)을 구상만 해놓고 인원을 모집하고 있었을 뿐 엔싱크라는 그룹네임을 정하지는 않았던 때라 만약 버크파슨스 혹은 밑에 기술할 찰스 에드워즈가 이 그룹의 멤버로 있었다면 엔싱크의 그룹네임은 조금 달랐을것이다. - 각주의 각주를 또 달자면 랜스베이스는 엔싱크에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멤버로 원래 그 자리에는 제이슨 갈라소(Jason Galasso)라는 다른 멤버가 있었는데 제이슨의 이름 끝글자 jaso"N" 역시 그룹네임 NSYNC의 네번째 알파벳 N에 반영되었었으나 그 멤버가 데뷔 직전 탈퇴를 하게되며 워낙 데뷔 직전이라 그룹이름을 바꾸지는 못하고 어떻게든 N으로 끝나는 이름의 멤버를 써야 그룹이름에 의미를 부여할수 있었기에 그자리를 대신한 랜스에게 란스텐 Lanste"N"이라는 예명을 붙여 활동하게 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1집 이후 앨범활동부터는 다시 본래이름 랜스 베이스로 활동했다...그리고 또다른 멤버 제이슨 샤세즈(JC)도 이름을 이니셜 J.C.로 줄여서 활동한 이유가 그룹이름 끝을 C로 깔끔하게 끝맺으려함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다른 멤버들은 모두 퍼스트네임(First Name)의 끝글자를 그룹이름에 반영했으나 본인만 라스트네임(Last name,성(姓))인 샤세즈(Chasez)의 이니셜인 C를 사용하게 된 이유가 앞서 말한 탈퇴했던 멤버 제이슨 갈라소와 같은 동명(제이슨)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둘 간의 차별을 두고자 본명 대신 이니셜을 예명으로 썼던것이며 그 이니셜의 마지막 글자인 C를 그룹이름에 반영했던 것이다.[8] 1992년 촬영된 이 영상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닉카터와 왼쪽에 기타를 치고있는 하위, 닉 옆에서 춤추며 서브보컬을 담당하고 있는 모자를 쓴 A.J. 외에 뒤에서 드럼을 치고 있는 멤버가 찰스 에드워드 이고, 건반을 치고 있는 키큰 멤버가 샘 리카타 이다. 찰스 에드워드 합류 전, 버크파슨스와 함께한 영상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듯하다.[9] 올드팝 흑인그룹 Temptations의 'Get ready'를 리메이크 커버한 공연장면 포함[10] 이때만 해도 하위가 그룹에서 메인 보컬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임. 현재 메인보컬인 브라이언은 이때는 거의 백댄서... 닉카터의 급식먹던 시절의 변성기도 오지 않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11] 미국의 음악 시스템은 한국과는 다르다. 음반을 내는 음반사와 가수를 관리하는 매니지먼트사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가수로 데뷔하려면 매니지먼트사와 음반사 둘 다 계약을 맺어야 한다.[12] 그 이전부터 잭슨5 같은 보이밴드가 이미 있었지만,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폭발적인 인기로 보이밴드가 미국 음악계에서 주류로 떠오르게 되었다.[13] 오디션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지방 소도시에서 계속 공연을 하며 인지도를 알려야 했다.[14] 브리트니 스피어스, 엔싱크, 백스트리트 보이즈 등 1990년대 후반 미국 음악계를 휩쓸었던 가수가 다수 있던 곳이다.[15] 유럽은 테이크댓이나 보이존같은 보이밴드들이 활발히 활동중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음악을 받아들이기 수월했던걸로 보인다.[16] 팝음악계에서는 데뷔 앨범이나 중요 전환점이 되는 앨범에 간혹 아티스트 이름을 그대로 내기도 한다.[17] 따라서 미국 앨범은 전세계 앨범보다 하나 전으로 친다. 예를 들면 2집을 미국에서는 1집으로 친다든지[18] 단 부풀리기가 있었는지 당시 플래티넘은 100만장이었으니 14 x 플래티넘으로 1400만장이 되어야 하지만 실질적인 판매량은 천만장을 조금 넘는걸로 집계되었다. 물론 그래도 다이아몬드 인증은 문제가 없지만.[19] http://www.mediatraffic.de/alltime-album-chart.htm[20] 이 노래는 후에 저명한 음악 잡지에서 발표한 199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 탑10위권에 꼽혔다.[21] GTA5 라디오 에도 수록되어 있다.[22] Show Me the Meaning of Being Lonely의 뮤직비디오의 첫부분에 브라이언이 수술을 받고있는 자기 자신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 건 이 때문. 뮤직비디오에서는 사망하지만, 현실에서는 멀쩡하니 안심하자.[23] 유럽 및 아시아버전 베스트앨범은 비공식 1집 히트곡을 포함해 16트랙[24] 애초에 엔싱크의 2001년작 ‘Celebrity’ 부터 기존의 맥스 마틴 스타일을 버리고 로드니 저킨스나 퍼렐 윌리엄스와 작업하여 틴팝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Top 10곡이 3개나 되었다. 이 앨범 분위기를 연장하여 흑인음악을 전면에 내세운게 저스틴의 솔로 데뷔작이다.[25]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유년기 시절부터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해왔던 브라이언은 BSB 활동 때부터 CCM 관련 음악을 하고 싶었다고 밝혀왔었다.[26] 맥스 마틴의 노래가 단 하나도 없는 앨범은 이것이 유일하다.[27] 여기서 자세히 언급은 안 됐지만, BSB의 초창기 시절 유럽 말고도 아시아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특히 Backstreet's Back 앨범과 Millenium 앨범의 아시아 각 나라 팝차트에서 1~2위에 오르기도 했고, 세계판매량에서도 높은 점유율을 보이기도 했다.[28] 사실 일본의 경우 해외 팝가수에 대한 고정 팬층이 엄청나게 높다. 보이즈 투 멘이나 오프스프링 같은 90년대 가수들은 물론, 심지어 딥 퍼플, 레인보우, 에어로스미스, 토토, 알카트라즈, 임펠리테리 같은 메탈밴드들의 충성스런 골수팬층이 두텁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활동을 안 해도 일본에서만 발표를 하는 일이 아주아주 많다. 게다가 일본은 경제력도 뒷받침되는데다가 2010년대인 아직도 음반을 많이 사는 나라다. 괜히 AKB48 싱글이 150만장씩 팔리고 아라시 앨범이 50만장씩 팔리는게 아니다. 그리고 오리콘차트는 음원 성적 반영조차 안한다.[29] BSB 본인들은 이 노래가 앨범 막바지에 탄생하여 나온 사실에 안도했다고 말했다.[30] 최고 인기 래퍼다. 최고 실력 래퍼가 아니다(...)[31] http://en.wikipedia.org/wiki/Backstreet_Boys_discography[32] 이 때문인지 Bigger의 뮤직비디오는 일본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33] Don't Turn Out The Lights와 함께 또 다른 신곡인 All In My Head는 원래 BSB의 데모곡으로 떠돌던 노래인데 NKOTBSB를 결성하며 뉴키즈온더블록과 함께 노래한 버전으로 정식 수록됐다. BSB 데모곡 버전[34] 이 곡은 2007년 "Inconsolable" 이후 빌보드HOT 100 첫 곡이자 2005년 "Incomplete"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곡이다.[35] 이 곡은 2002년 시상식에서 'Shape Of My Heart' 이후 처음으로 2019년 시상식에서 '최우수 팝 듀오/그룹'으로 그래미 후보에 올랐고, Adult Top 40 차트에서 11위를 차지했던 1999년 "I Want It That Way"를 능가하는 9위를 차지했으며, "Inconsolable" 이후 처음으로 Radio Single Chart 에서 38위에 올랐다.[36] 1위를 한 것은 2000년 Black&Blue 이후 19년만이다.[37] UK #12[38] UK #2[39] 1집과 2집의 수록곡들 중 싱글곡들을 포함해 12곡을 뽑아 미국판 1집으로 발매함.[40] BSB와 마찬가지로 엔싱크는 앨범 판매에 더 주력을 했다. [41] 당시 빌보드의 싱글 순위 선정 방식은 라디오 방송횟수 8:2 싱글 판매량이었다.[42] 버블링 언더 #6[43] 버블링 언더 #14[44] NKOTBSB 명의[45] Florida Georgia Line의 곡을 피처링[46] 버블링 언더 #7[47] 당시 문희준의 파워레이서 춤을 배워갔는데 나중에 AJ가 독일 콘서트에서 선보이기도 했다.[48] 사실 The Essential로 시작하는 베스트앨범은 백스트리트보이즈만이 아닌 여러 아티스트들의 앨범명과도 일치하는데 죄가 트랙들이 인기곡만 있는 순전히 소니뮤직마음대로 발매하는 상술 앨범이다. 소리바다나 네이버뮤직등에 the essntial로 검색을 하면 별의별 유명 아티스트의 천편일률적인 앨범 자켓의 베스트앨범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