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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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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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4.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5.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6.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7
1988
1989
1991
1997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번
김경훈
(1982)

백인호
(1987~1988)


윤재호
(1989~1992)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6번
서정환
(1983~1989)

백인호
(1990~1992)


윤재호
(1993)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4번
서창기
(1990~1992)

백인호
(1993)


송태일
(1994~1995)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14번
이광섭
(1993)

백인호
(1994~1996)


김미호
(1997)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9번
최향남
(1996)

백인호
(1997~1998)


엄병열
(1998)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번
박지영
(1997~1998)

백인호
(1999)


최길성
(2000)
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84번

결번

백인호
(2001~2002)


곽현희
(2009~2016)
KIA 타이거즈 등번호 85번
결번

백인호
(2003~2007)


최태원
(2008~2011)
{{{#fff [[우리 히어로즈|우리]] / [[서울 히어로즈|서울 히어로즈]] 등번호 75번}}}
팀 창단

백인호
(2008~2009)


김용국
(2010)
KIA 타이거즈 등번호 71번
김종모
(2008~2009)

백인수
(2010~2018)


김상훈
(2019~2020)
KIA 타이거즈 등번호 83번
김지훈
(2019)

백인수
(2021)


홍세완
(2022)




파일:99981_2021-03-18_153017.png

백인수
In-Soo Paek
[1]
출생
1963년 5월 19일 (60세)
전라북도 군산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군산남초 - 군산남중 - 군산상고 - 동국대
포지션
유격수, 2루수, 3루수, 포수[2]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7년 1차 지명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7~1992)
쌍방울 레이더스 (1993~1996)
해태 타이거즈 (1997~1999)
지도자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0)
해태-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01~2002)
KIA 타이거즈 1군 작전·수비코치 (2003)[3]
KIA 타이거즈 2군 작전·수비코치 (2003)[4]
KIA 타이거즈 1군 작전·수비코치 (2004~2007)[5]
KIA 타이거즈 2군 작전·수비코치 (2007)[6]
우리-서울 히어로즈 1군 수비코치 (2008~2009)[7]
KIA 타이거즈 1군 작전·주루코치 (2010~2012)[8]
KIA 타이거즈 2군 작전·주루코치 (2012~2013)[9]
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14)
KIA 타이거즈 2군 수비코치 (2015~2016)
KIA 타이거즈 3군 총괄코치 (2017~2018)
홍익대학교 야구부 코치 (2019)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0)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21)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2~)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연도별 성적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해태 타이거즈에서 주로 활동한 야구 선수. 前 KIA 타이거즈의 코치.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해태 타이거즈[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1125000015268.jpg


1987년에 해태 타이거즈 1차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루키 시즌부터 서정환-차영화 키스톤 콤비를 잇는 후계자 역할로 낙점되어 1군에서 뛰었는데 첫 해부터 주전 유격수를 맡아왔다. 1989년 6월 1일 빙그레와의 경기에서는 김준환, 백인호, 박철우 순으로 연속 홈런을 날리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것은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3타자 연속 홈런이였다.


그 후 1990년 윤재호에게 자리를 내준 뒤 2루수로 전향했다. 전향한뒤 1991년 삼진율 5.0% 기록하였다. 이후 30년동안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1980~1990 년대 삼진율이 더 낮은 선수들이 있지만 투수들의 구속이 빠르지 않았고, 타자들은 장타를 치는것보다 방망이에 공을 갖다 맞춰 인플레이 시키는게 가장 미덕인 시기이였다. 하지만 2022년 이정후의 삼진율 5.1%를 기록하며 31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하였다. 이종범, 홍현우 혹은 김종국으로 이뤄진 키스톤 콤비가 등장하기 전 윤재호와 콤비를 이루어 막강 해태의 주전 2루수로 활약하다 91년 9월 교통사고를 당해 양쪽 허벅지가 모두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이 교통사고로 1992년을 뛰지 못한 데다가 이종범이 입단하고, 홍현우가 성장하자 1992 시즌 후 박노준과 함께 고향 팀인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한다.

2.2. 쌍방울 레이더스[편집]


쌍방울에서는 3루수로 있었다. 그러나 부상 때문에 외야수로 전향한다. 하지만, 당시 정영기 수비코치의 도움을 받아 다시 3루수로 전향했고 양쪽 허벅지가 모두 부러진 선수가 누구도 재기하리라는 예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94년 2할8푼1리의 성적을 냈고 당당하게 골든글러브 3루수부문 후보에도 올랐었다.

2.3. 해태 타이거즈 2기[편집]


1996년에는 석수철의 입단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되자 시즌 후 쌍방울에서 방출당했고, 때마침 내야 백업의 필요성을 느낀 해태 타이거즈는 쌍방울에서 자유계약 공시 된 백인호를 다시 데려간다.

그리고 1997년 다시 우승을 하고, 1999년을 끝으로 은퇴한다.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직후에는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1년만에 2001년 김성한 타격코치가 감독으로 부임하자[10], 수비코치가 되어 2007년까지 KIA 타이거즈에서 코치를 한다.

2008년에는 선배 이순철의 부름을 받고 장채근과 같이 우리 히어로즈로 옮겨 2009년까지 수비코치를 했다.

2010년에 다시 KIA 타이거즈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2012년,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이건열 타격코치와 2군으로 내려갔다. 내려간 자리에는 김종국 코치가 1군 작전코치로 올라왔다. 2012 시즌 후 이강철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이건열동국대학교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2013 시즌 후 김태룡이 2군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1군으로 올라왔다.

2015년엔 김민호가 1군 수비코치로 부임하고, 김태룡이 1군으로 올라오면서 김성규와 같이 2군 수비코치를 하게 되었다.

2017년에는 3군 총괄코치로 선임되었다. 시즌 중반부터 이름을 백인수로 개명을 했다. 그래서 역대 등번호 목록에서도 현재 등번호 이전의 등번호는 백인호로, 현재 등번호는 백인수로 표기한다. 2018년에도 3군 총괄코치로 일했으나, 정회열 수석코치, 김태룡 수비코치, 신동수, 홍우태 투수코치 등과 같이 해임되었다.

2019년에 장채근이 감독으로 있는 홍익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다. 2020년에는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2021년 KIA 타이거즈로 다시 복직해 2군 타격코치가 되었다. 그러나 이 2군 타격코치 부임이 논란이 되었는데, 타자는 2군에서 어느정도 담금질이 필요한 만큼 2군 타격코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반면, 20년에 가까운 프로 지도자 경력에서 타격 지도를 해 본 적이 없었던 백인수가 느닷없이 2군 타격코치로 복직한 것은 상식적인 인선으로 보기 어려웠기 때문. 이런 의외의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조계현 단장의 군산상고 동문(1년 선배)이라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었는데, 2021년 정규리그 종료 후 나온 박흥식증언으로 보아, 그 추측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즌 후 공식 발표된 2022 시즌 코칭스태프 명단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복귀했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87
해태
95
302
0.272
82
10
4
3
25
31
21
20
19
.316
.361
.677
1988
96
280
0.261
73
12
4
3
22
38
14
33
21
.337
.364
.701
1989
103
379
0.266
101
17
1
3
26
58
11
50
25
.351
.340
.692
1990
94
337
0.297
100
13
3
8
34
51
9
60
50
.403
.424
.827
1991
103
358
0.232
83
12
1
3
26
44
18
50
21
.325
.296
.621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93
쌍방울
40
100
0.200
20
1
0
0
6
7
0
13
17
.290
.210
.500
1994
108
356
0.281
100
17
0
7
49
30
3
31
30
.334
.388
.722
1995
106
352
0.244
86
13
2
7
40
36
3
34
54
.309
.352
.662
1996
49
125
0.232
29
5
0
2
10
14
1
19
23
.333
.320
.65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97
해태
62
106
0.245
26
5
0
1
16
9
0
12
24
.322
.321
.643
1998
70
133
0.278
37
6
0
3
12
9
2
8
21
.319
.391
.710
1999
27
25
0.240
6
0
0
0
4
2
0
3
7
.321
.240
.561
KBO 통산
(12시즌)
953
2853
0.260
743
111
15
40
270
329
82
333
312
.336
.352
.688


5. 기타[편집]


  • 야구계의 전설로 전해지는 유격수 직선타 홈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친 타구가 상대 유격수가 점프를 해서 잡힐 뻔 했는데 글러브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서 그대로 홈런이 되었다고. 정철우 기자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로사리오가 훈련 때 유격수 직선타 홈런과 비슷한 장면을 선보여서 깜짝 놀랬다고 한다.

  • 최동원선동열의 마지막 맞대결인 1987년 5월 16일 사직 경기에서 김일환이 9회말 대타로 나와 동점 2루타를 쳤다. 문제는 이 타순이 이미 주전포수인 김무종을 교체시킨 자리에 들어와 있던 장채근의 자리였고, 동점은 만들었지만 공을 받을 포수가 한 명도 없게 된 상황이었다.
이때 김응용 감독이 포수를 맡도록 지시한 선수가 입단 첫 시즌을 치르고 있던 백업 내야수 백인수였고, 그는 10회부터 무승부로 끝나는 15회까지 선동열과 배터리를 이루어 홈플레이트를 지켰다. 백인수를 포수로 기용한 이유는 단지 덩치가 커보여서 포수 같았다고. 백인수 자신의 회상에 따르면 공이 손에서 놓기 전에 보였다가 사라지더니 미트 안에 들어왔다고 하며, 이런 공을 어떻게 받나 고민하였으나 다행히도 선동열의 제구가 너무 좋아 다행히도 15회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주심이었던 김광철 심판은 백인수에게 '네가 실수하면 내가 죽는다'면서 백인수 뒤에 바짝 웅크린 상태로 판정을 봤다고 한다.[11] 더욱 놀라운것은 도루 저지에도 성공했다는 것이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고교 선배 김성한, 고교 후배 최해식이 술회하기를 체구가 작아서 체구가 큰 선수를 선호하는 김응용 감독의 눈에 들지 않았느나 작은 체구로도 홈런을 때려내자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고 했다.


6. 관련 문서[편집]



[1] 개명 전 이름은 백인호.[2] 1987년 5월 16일 경기에서 포수 자원이 소진되자 10회부터 15회까지 6이닝 동안 포수를 소화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3] ~5월 18일[4] 5월 19일~[5] ~6월 17일[6] 6월 18일~[7] 6월 10일~[8] ~6월 12일[9] 6월 13일~[10] 이 당시 여러 코치가 부임한다. 서정환, 이건열, 백인호, 최해식 등이 모두 이 해에 코치로 부임한다.[11] 그리고 선동열은 포수 자리에 백인수가 들어온 후부터 경기 끝날때까지 변화구 하나 안던지고 오로지 패스트볼 하나만으로 나머지 이닝을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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