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천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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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의 감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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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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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62


파일:lgv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감독

1990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75 NPB 퍼시픽리그 수위타자[1]

파일:KBO 리그 로고.svg
1982 KBO 리그 타격왕

파일:KBO 리그 로고.svg
1982 KBO 리그 출루율왕

보유 기록
단일 시즌 최고 타율
0.412[2][3]

MBC 청룡 등번호 2번
팀 창단

백인천(1982~1983)

최정기(1984~1986)
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2번
팀 창단

백인천(1983~1984)

김호근(1985)
LG 트윈스 등번호 2번
팀 창단

백인천(1990~1991)

김동수(1992~199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0번
양일환(1992~1995)

백인천(1996)

오오시오 신이치(2006~200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7번
이상훈(1990~1995)

백인천(1997)

장호연(1998~200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90번
김용희(1994~1998)

백인천(2002)

이명진(2013)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1번
손민한(1997)

백인천(2002~2003)

이철성(2007~2009)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1062200292_0.jpg

이름
백인천(白仁天)
생년월일
1942년 9월 27일[1] (80세)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출신지
중화민국 난징시[2]
학력
경동고등학교
종교
불교개신교(예장통합)[3]
포지션
포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스 입단(NPB)
1982년 MBC 청룡 창단 멤버 겸 감독(KBO)
소속팀
농협 (1961)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4] (1962~1974)
다이헤이요클럽 라이온즈 (1975~1976)
롯데 오리온스 (1977~1980)
긴테쓰 버팔로즈 (1981)
MBC 청룡 (1982)
삼미 슈퍼스타즈 (1983~1984)
지도자
MBC 청룡 감독 (1982~1983)
삼미 슈퍼스타즈 플레잉 코치 (1983~1984)
LG 트윈스 감독 (1990~1991)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6~1997)
연세대학교 타격 인스트럭터 (1998)
한화 이글스 타격 인스트럭터 (1999)
삼성 라이온즈 타격 인스트럭터 (2000)
한화 이글스 타격 인스트럭터 (2001)
SK 와이번스 타격 인스트럭터 (2002)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02~2003)
해설자
SBS/SBS Sports(1999~2001/2006~2010[5])

1. 개요
2. 평가
5. NPB 해설자 시절
6. 그 이후
7.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이자,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선수 겸 감독을 맡은 인물. 오랜 기간 SBS Sports일본프로야구 담당 해설자로 활동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외야수.


2. 평가[편집]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야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로,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선수, 감독 등을 맡아 여러 팀을 거치며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후술할 문제의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이후에는 지도자로서 커리어를 이어나가지 못했고, 해설가로 활동하며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발언을 남겨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삼청태 팬들의 평가가 없는 건 활동 기간도 길지 않았고 간통죄로 중도에 은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유니콘스로 인한 팬덤 와해로 인해 그냥 잊혀졌고...

지도자 시절의 평가는 LG와 삼성에겐 애증의 대상이요[6], 롯데 팬들에게 있어서는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다. 자세한 이유들은 아래에 정확히 후술하겠다. 인천 팬들에게도 삼미 시절에 터진 간통 사건 때문에 감정이 좋을 리 없을 듯.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대한민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3. 선수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백인천/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백인천/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NPB 해설자 시절[편집]


요시!! 그란도시즌!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 아주 그냥

임용수와의 NPB 경기 중계중 터진 감탄사.


NPB 해설위원 시절에는 야구판 예송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2006년, SBS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영입되었는데, NPB(일본 프로야구) 전담 해설위원이 되어 2010년까지 활동했다. 자신의 수제자 이승엽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르며, 캐스터와 함께 대놓고 승빠 기질을 보이고 있다.

다만 해설위원으로서의 역량은 아주 형편없기 짝이 없다. NPB에서 20년 가까이 현역으로 뛰었으니만큼 한국에서 가장 NPB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장점은 있는데, 그게 끝. 처참한 한국어 발음(+웅얼웅얼한 말투)과 흥분하면 튀어나오는 일본어 때문에 제대로 된 중계가 힘들 지경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요시!" "그란도 시즌!" "라지에타" "스고이!" 특히 그란도 시즌반말 때문에 해설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당시 같이 중계를 맡았던 임용수 캐스터조차 '요시 그란도 시즌'에 대한 질문을 받자 "백인천 위원님이 오랫동안 일본 생활을 하셔서 일본식 어투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아요."라고 답변하였다. 바로 옆에 있는 캐스터조차도 대관절 뭔 소린지 도통 모르겠는 마당에 하물며 시청자는... 게다가 이승엽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해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거의 없어졌다.

그의 명대사(?)인 요시 그란도 시즌야갤을 시작으로 많은 곳에서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실제 발언은 '요시! 그란도 시즌!'이 아니라 '역시! 하나둘셋이야!'라는 주장이 나왔고, 모든 야구 사이트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해설자 백인천은 한국어 발음도 부정확했고 바로 옆에 있는 캐스터도 이해하기 힘든 자신만의 일본식 표현을 쓰곤 했는데, 그로 인해 나타난 해프닝이다. 무엇이 정답인가는 본인이 직접 진실을 밝히지 않는 이상,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6. 그 이후[편집]


2010년 8월 20일, 일간스포츠이대호는 날 미워할지도 모르겠다라는 기사가 떴다. 내용인 즉, 이대호는 사직구장에서 쪼그려뛰기 같은 걸 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것. 때문에 가뜩이나 폭염주의보가 내려 더워 죽겠는 와중에 백주 대낮부터 롯데빠들의 혈압을 제대로 올리고 있다. 그래도 당사자 이대호는 "전혀 미워하지 않는다. 분명 나를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시킨 훈련이었다."라는 내용의 마음 넓은 인터뷰를 했다.[7]

2010년 6월부터 일구회 산하의 은퇴선수 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2012년에는 한일유소년야구육성기금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뇌출혈 후유증 예방운동을 전개중. 동시에 동아일보에서 회고 인터뷰도 했고 김영덕, 박영길 감독과 삼자 인터뷰로 프로야구 30년을 회고했다.

2013년 7월 29일, 정재승 KAIST 교수와 58명의 공동 저자가 함께 집필한 과학 논문인 <백인천 프로젝트>가 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되었는데, 백인천 본인이 직접 책 추천사를 썼다. # 논문의 내용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로 모여 한국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분석했으며, 스티븐 제이 굴드의 가설이 한국프로야구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검토했다고 한다. 본인이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4할 타자인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상징성을 갖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8] 당시 공동저자로 참여했던 천관율 시사IN 기자는 본인이 롯데 팬이라 프로젝트 이름을 처음 듣고 기겁했다고 한다.

2014년 12월 5일,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의 날' 시상식에 참여한 뒤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과 관련해 프런트는 성적을 이유로 감독을 경질하기보다는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 발언을 접한 팬들은 '맞는 말이지만 백골퍼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듯', '믿고 맡겼더니 8888 찍냐' 등의 실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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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했다. 자신이 초대 감독을 역임했던 원년 청룡의 모자를 쓴 채, 마운드를 밟고서 투구하였다. 물론 롯데빠들은 매우 못마땅해 하는 반응이었고, 나머지 구단 팬들의 현장 호응도 미미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9] 또한 올스타전 시구 당시에도 병의 후유증 때문인지 시구를 마치고 나갈 때 다리를 몹시 쩔뚝거렸다.

2019 WBSC 프리미어 12 한국 vs 호주 개막전에서도 시구를 하였다. 여전히 몸이 불편한지 스탭의 부축을 받았다.

2021년 9월 30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홀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평택시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며, 자신을 보살필 만한 가족이 국내에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볼 때 정황상 현재의 후처와도 별거 중인 것으로 보인다.


7. 기타[편집]


  •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고교/대학야구 타자상 이름은 백인천의 타율이었던 0.412를 딴 'BIC 0.412상'이다.

  • 이승엽최익성이 가장 존경하는 야구인이다. 실제로 이승엽은 자신의 스승으로 박흥식, 박승호 코치와 함께 또 하나의 은사인 백인천 감독을 꼽았으며,[10] 최익성은 백인천 감독이 본인의 야구인생에서 인생을 꽃을 피운 은인이라고 언급했다. 사실 최익성이 코치와의 트러블 속에서도 지금까지 버텨왔던 인물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백인천 감독이 최익성 본인의 재능을 극찬받은데다가 늘 항상 버팀목이 되어줬기에 백인천 감독을 자신의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최익성은 은사인 백인천이 있는 한은회에 가입할 정도로 백인천 감독을 잘 따른다고 한다.

  • '백골퍼'라는 별명에 걸맞게, 실제로 골프를 좋아하는 골프 애호가라고 한다. 롯데 감독을 맡기 전에도 골프 사업을 한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다만, 롯데 감독 시절 인터뷰에서 뜬금없이 골프 얘기를 하는 등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비판받으면서 백골퍼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여진 것일 뿐.

  • 일본프로야구 선수 시절 20홈런 20도루를 1번도 기록한 적이 없는데 일본통산 200홈런 200도루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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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적상에서는 1943년 11월 27일 생이라고 한다.[2] 현재의 대만이 아니라 중국 대륙에 있는 난징이다. 난징은 백인천이 태어났을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이자 직할시였던 난징(남경)시였다. 단 당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충칭시가 임시 수도였다. 중화민국이 현재 존치시켜 놓고 있는 명목상의 행정구역에서는 난징이 여전히 직할시로 남아 있지만, 현지를 실제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으로는 직할시에서 장쑤성 산하의 시로 격하되어 장쑤성의 성회(省會: 성의 수도)가 되어 있다.[3]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거룩한빛광성교회에 출석한다.[4] 같은 팀인데 팀 매각에 따라서 이름만 바뀌었다. 1972년까지는 도에이 플라이어즈, 도에이가 부동산 회사인 닛타쿠홈에게 매각해 1973년에는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닛타쿠 홈이 1년만에 다시 팀을 닛폰햄에게 매각해서 닛폰햄 파이터즈가 됐다. 그리고 1974년 시즌 후 닛폰햄 사장으로 취임한 미하라 오사무가 전임 감독이자 라이벌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취임 1년만에 대규모 트레이드를 감행하며 소위 '미즈하라 인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섰다. 장훈과 백인천도 이 과정에서 팀을 떠나게 되었다.[5] 2기 시절에는 요미우리 홈 경기 중계 전담 해설.[6] 양팀 팬들한테는 정말로 애증의 대상인데, LG 트윈스의 전신인 MBC 청룡 시절에는 삼성을 상대로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개막전 승리를 이끌었고 시즌 중 선수 신분으로는 공포의 4할타자로서 타선을 이끌었으며 LG 감독 시절에는 삼성을 상대로 구단 역사상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안겨주었다. 이후 삼성에서 감독을 맡을 시절에는 1995년부터 2년 연속 팀을 가을야구로 이끌지 못했고 대구 야구의 슈퍼스타였던 이만수강기웅을 내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으나 삼성 핵타선의 주축 멤버가 된 이승엽, 정경배, 최익성 등의 젊은 스타들을 잇달아 발굴하며 삼성 특유의 공격야구 색깔을 더함과 동시에 리빌딩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백인천이 키워낸 그 삼성의 핵타선이 LG를 제대로 떡실신시켜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LG 트윈스 천보성 LG 감독이 삼성 타자들이 사용한 미즈노사의 배트를 규정 위반인 압축 배트라고 주장한 압축 배트 의혹 사건도 있었고(이 과정에서 정경배의 방망이가 두동강났다.) 그 때문에 경기 도중 백인천이 LG 주루 코치이던 조 알바레즈와 멱살잡이까지 가는 난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MBC와 LG 시절 사제관계를 쌓아온 김용달 LG 타격코치와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7] 사실 한국 스포츠계 특성상 웬만큼 원한이 깊고+선수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이상 대선배+전 감독에게 나쁜 말을 하기 힘들다. 특히 현역은...그 대선배가 전리그적인 왕따가 아닌 이상 야구계에 이런 저런 연줄로 엮여있기 때문에 어떻게 꼬일지 모르고(예를 들어 씹은 사람의 후배가 감독으로 온다던지...) 또한 우리나라는 감독을 "지도자, 스승"으로 보는 경향이 커서 그런 비판 자체를 안 좋게 보기 때문이다.[8] 만약 메이저리그에서 같은 주제로 책을 썼다면 '테드 윌리엄스 프로젝트'라고 했을 것이다.[9] 사실 올드팬이 아니면 백인천을 기억하는 팬들도 별로 많지 않은데다 또한 요즘 젊은 세대들은 백인천이 누군지도 모르거나 롯데에서의 기행들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10] 실제로 이승엽의 성공 비결 이유 중 하나를 언급했을 때 백인천 감독은 반드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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