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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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백제(百濟)는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던 한국의 고대 왕국이다. 고구려, 신라와 마찬가지로 초반에는 연맹 왕국 단계, 그 이후에는 귀족 회의가 영향을 미치지만 연맹에 소속된 다른 거수국들에 대한 강제력과 지배력은 강화된 귀족제, 그 다음에는 전제군주제 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가야를 포함한 한반도 고대 국가 중 백제만 기이하게도 난생 설화 등의 건국 신화가 없다. 그 이유는 백제의 건국신화가 동명신화-혹은 주몽신화-와 서사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건국 시기가 기원전 18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문헌상으로는 660년 멸망할 때까지 678년간 31명의 왕이 다스린 걸로 되어 있다. 영토는 주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 걸쳐 있었으며 최대 판도를 자랑한 근초고왕 때 황해도 중북부까지 진출했고, 후기에는 경상남도 서부까지 권역에 넣고 있었다.
자료가 가장 부족한 고대 한반도 국가로 그 기록이나 사적 발굴도 어려운 상태이며, 백제 해상국가설, 요서경략설 등이 등장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14] 흔히 고구려는 광활한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 신라는 삼국통일과 황금, 그리고 가야가 풍부한 철기로 대표된다면,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섬세하고 세련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강조된다.
2. 국호[편집]
3. 역사[편집]

4. 정치[편집]
일단 백제의 마한 장악 과정은 비교적 손쉽게 하극상 없이 진한을 통합한 신라와는 달리 꽤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이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은 출발 단계부터 진한의 명목상 수장국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로 수장국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면서 나머지 소국들을 명분으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국은 사로국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마한 목지국 휘하의 일개 거수국들 중 하나로 출발했기에, 한때 마한 목지국을 수장으로 섬겼던 나머지 동료 거수국들에게 권위와 합의를 받아내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지배계층 자체도 문헌사학으로든 고고학으로든 그 기원이 이원적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고, 왕통 자체도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다른 계통일 개연성이 매우 높은 상태다. 고고학적으로 한성백제의 기원은 고구려 유민으로 보이는 적석총 집단과, 침미다례 세력과 유사한 문화양식을 가진 토돈분구묘제 집단으로 이뤄져 있음이 규명되었기 때문. 백제 건국 설화에서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가 미추홀계 집단과 연합하여 국가를 세운 것은 그것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마한 자체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까지 꽤 넓은 영역에 중첩되어 있었고, 낙랑군, 대방군 등에게 꾸준히 견제받았으며 진한이나 변한 등의 정치적 도전이나 알력이 없진 않았기에 마한의 정치적 통합은 그 난이도가 꽤나 높았다고 해석된다. 이후 대방군은 백제와 고구려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이미 오래 전에 소멸했고, 낙랑군은 더욱 약소하여 한반도인을 왕과 지배자들로 섬기고 있었지만 고구려가 낙랑군을 정복하자[23]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 대립이 더 심해지게 되었다. 마한의 원래 수장국인 목지국이 상대적으로 짧은 반세기만에 갑자기 부쩍부쩍 힘을 키운 부하 소국 백제국에게 어어하다가 순식간에 타도당한 게 바로 그 증거 중 하나이다. 물론 목지국을 타도한 시점의 백제는 적어도 경기도 전역을 직접 지배 지역으로 거느리고 있었기에 마한 내에선 가장 강력한 국가가 분명했지만, 다른 나머지 마한 소국들의 역량을 다 합친 만큼 강하진 못했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우선은 해로나 육로를 통해 가까운 지역부터 우호 관계 수립, 그 다음은 간접 지배 전환, 그 다음은 직접 지배 전환이란 과정을 거쳐 이전의 각 마한 소국 지배층을 다독여야 했으며, 그 와중에도 주요한 교통로만큼은 장악하면서 말을 듣지 않고 정면도전하는 소국은 직접 손봐줘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때문에 지방 마한 소국의 이전 지배층은 직접 지배로 전환된 지역이라도 그 나름의 기득권은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마음대로 원하는만큼 그 지배 지역 인력과 물자를 징발하는 게 보다 쉬웠던 신라에 비해선 상당한 약점으로 작용했다. 문제는 외척의 난맥상이었다. 백제는 왕족 부여씨가 토착 세력 출신인 해씨, 진씨 등의 왕비족 세력에게 휘둘렸다. 이 두 강력한 왕비족은 둘 이상 있었는데, 야당 왕비족 입장에서 권력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현 국왕을 죽이고 자기편의 왕비와 결혼한 새 왕을 세워야 했기 때문에 틈만 나면 왕을 갈아치우려 했고 이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으로 인해 대부분의 왕들이 제명에 죽기 전에 반대파 왕비족들에게 살해당했다. 같은 이주민 계통이자 백제 왕족의 근원인 고구려 고씨 계루부가 왕비족을 연나부(=절노부) 하나로만 한정했던 것과 대조된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 백제의 중앙 정치가 무조건적으로 난맥상이었다고만 보면 안 된다. 고구려나 신라에는 없는 단점만 있었다면, 잠깐 전연에게 망신당했을 망정 태왕호를 자칭하고 막 전성기를 구가하려던 시점의 고국원왕의 고구려에게 일격을 가하고, 가야 일대를 흡수한 데다 고구려[24] 의 선진문물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중국과 통교하며 그전과는 완전 다른 존재로 거듭난 6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와의 접전에서도 버텨냈을 리 없다.[25] 고구려 같은 경우 중앙집권체제 완비는 백제와 신라보다 200여 년 정도 빠른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최종 관직 및 관등을 장남이 승습하는 매우 좋지 못한 관습이 있었는데 이는 적어도 백제와 신라에는 없었던 악습이었다.[26] 그리고 신라는 관직은 만들어도 골품제의 관습이 워낙 강해 원칙적으로는 고위 관직에 취임할 수 없는 관등이더라도 진골이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악습이 있었는데, 이러한 관행은 김춘추가 반대파를 물리적으로 숙청한 후 아예 그런걸 못하게 금지 규정을 만들기 전까진 제대로 고쳐지지 못했다.[27] 한편 백제는 적어도 그런 악습이 내내 없었다는 점에서 관직 체제의 운용이 조금은 더 기강이 잡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개로왕 당시 신라군이 지방군보다 먼저 온 건 그 당시 신라가 정예군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던 곳이 마침 충북-경북 일대 추풍령 일대라서 가장 빨리 올 수 있는 군대라서 먼저 온 것이지, 지방군 동원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개로왕 당시 문제는 개로왕이 지방 호족들을 너무 많이 중앙 정치 무대로 데려온 까닭에 중앙 귀족들이 분개한 데 있었지 지방에 근거를 둔 귀족들의 비협조가 원인은 아니었다. 이는 훗날 의자왕 대에도 마찬가지인데 호남을 백제와 별개로 보는 이상한 인터넷발 낭설과 맞물려 호남 귀족들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에 불만을 품고 나당연합군에 협조를 안했다는 헛소리가 각 사이트에서 만연한 편인데 이는 절대 사실이 아니다. 일단 사료상에 귀족들이 협조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없고 백제 조정이 지방군의 도착 이전에 웅진성 성주였던 예식진의 반역으로 항복해서 멸망한 것이다. 지방군은 건재하여 백제부흥운동은 3년 가까이 이어진다. 단지 당군의 상륙에서 예식진의 반역으로 인한 의자왕의 항복까지 고작 9일밖에 안 걸렸고, 파발마가 호남 일대의 귀족들에게 전해져 지방군을 모아 수도를 구원하러 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한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원흉 웅진성 성주 예식진이 눈길을 끈다. 그의 형 예군의 묘지명에 의하면 선조가 중화(중국)와 조상을 같이한다고 했고, 서진 말기 영가의 난을 계기로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백제의 웅진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나오는 건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한 예식진의 손자 예인수는 묘지명에다 예씨 가문의 선조가 《삼국지》에 독설가로 나오는 예형이라고 기록했다. 다만 이걸 갖고 중국계 이주민이 혼자 백제를 다 멸망시켰다고 보는 건 잘못된 분석이다. 애초에 동북아시아 각국의 왕실이나 귀족 가문들이 스스로를 중국계 혈통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매우 흔했다. 훨씬 후대에 세워진 고려의 왕실 가문인 개성 왕씨도 자신들이 당나라 황제인 숙종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바 있고, 흉노 역시 자신들을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이계의 후손으로 주장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기자조선에 대한 전설이 널리 퍼지면서 자국을 상나라의 왕족이자 현자인 기자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례가 생기기도 했다. 고대에는 이런 식으로 자국을 다른 강대국의 군주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는 일이 흔했고, 따라서 예식진 가문이 스스로를 예형의 후손으로 자칭한 것은 이런 숭조사업의 흔적일 가능성도 있다. 다만 반론을 제기하자면 예형은 황족이나 귀족 같은 고귀한 혈통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고 삼국지에서도 당대 권력자들(조조, 유표, 황조)에게 악담을 퍼붓다가 죽임을 당한 인물인데 과연 숭조사업을 할 정도의 가치를 지닌 인물은 확실히 아니다. 거기다 당고종은 예식진을 좌위위대장군의 벼슬을 내렸는데 이는 수도를 방위하고 당나라 황제를 경호하는 막중한 실직이었다. 그러니까 백제왕을 팔아넘긴 공적이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자기 주군을 팔아넘긴 매국노를 당나라 황제는 명예직도 아니고 자신의 경호대장으로 임명하는 실직을 내리는 행동을 보였는데 이는 오히려 예식진이 정말로 중국계라고 볼 수도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예식진 가문이 조상 때부터 관리한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 무덤양식을 띠고있다. 신라는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긴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꾸준히 중국 한족 이주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애초에 백제 자체가 마한 목지국 휘하의 거수국이었던만큼 토착 백제인과 마한인을 따로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5. 경제[편집]
애초에 백제는 서울특별시 인근에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경제력이 풍부한 편이었다. 인천광역시 일대에 잡은 비류는 얼마 못 가 온조에게 합류했으며, 인천은 바닷가라서 그런지 어업은 굉장히 발달했지만 토지에 염분이 많아 국가의 근간이 되는 농업과 축산업이 부실했다. 반면 서울은 드넓은 강남 평야를 통해 농업과 축산업 등이 풍부하게 발전될 수 있었으며 한강을 끼고 있어서 어업도 어느정도 발달되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온조가 비류보다 우월한 조건에서 국가를 다스려 나갈 수 있었다.[28]
6. 영역과 행정구역[편집]
한성백제 및 웅진 천도 초기에는 담로제(擔魯制)를 시행했다. 이는 사료 《양서》, 《북사》 백제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號所治城曰固麻謂邑擔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擔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백제는) 도성을 고마라고 부르며 속읍을 담로라고 부르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제와 같은 것이다. 그 나라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백제는 중앙집권화를 시도한 성왕대에 이르러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와 5방으로 나누었으며, 각 방에는 방령이라고 하는 지방관을 파견했다. 방령은 달솔(達率)[29] 의 관등을 가진 자에게 임명되었으며 아래에 두 명의 방좌(方佐, 차관)를 둘 수 있었다. 사비 천도기 이후로는 5방 체제가 더욱 굳어지고 요새화되어서, 방령이 군정권과 군령권을 행사하는 등 도시의 요새화가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22담로 역시 일반적인 군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멸망 당시에는 전국이 5부(部) 37군(郡) 2백 성(城)에 76만 호(戶)였다고 되어있다. 한편 백제가 멸망한 직후 소정방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백제를 정복한 일을 기록했는데, 거기서 백제의 행정구역을 5도독부[30] 37주 250현으로 개편한다고 적었다. 이에 따라 부=도독부, 군=주, 성=현으로 대응됨을 알 수 있다.
백제는 행정 구역이 바로 군사 제도와 직결되는 군사 행정 제도 체제였다. 따라서 행정 체제가 군사 편제라고 볼 수 있다. 중앙은 달솔이 지휘하고, 지방인 방은 방령이 지휘관을 맡았다. 즉 좌평 혹은 지휘관 → 달솔 → 방령 체제였는지는 애매한 편이다.
아래는 백제의 성들의 위치. 아래 표는 《삼국사기》에서 확인 가능한 백제 시대의 군이다.
한편 신라는 군현제를 확립해나가게 될 때 여력이 되면 아예 초반부터 군수는 물론 현령까지 중앙에서 파견하여, 중앙의 지배력을 말단 단위까지 철저하게 관철시킬 수 있었다. 한편 백제는 신라와는 달리 군수와 군수 아래 현령 1인까지만 중앙에서 파견하고, 나머지 현령은 현지 호족에게 겸임시켜주어 신라에 비해선 지배력의 강도가 낮은 편이었으나, 그만큼 상대적으로 지방자치를 더욱 보장해주는 편이라 옛 마한 거수국 거수들의 후예기도 한 지방 호족들의 기존 권력을 어느 정도 더욱 보장해줬다고도 할 수 있다.[32]
7. 백제의 문물, 제도, 사회[편집]
7.1. 사회와 계급[편집]
백제의 형벌은 엄격하여, 반역자, 전쟁터에서 도주한 군사, 살인자는 참수에 처했다. 도둑은 귀양을 보내고 훔친 물건은 2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게 하였다.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종신형에 처하고, 3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도록 했다.[33]
백제의 신분은 크게 지배 신분층, 평민층, 천인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의 최고 지배층은 왕족 부여씨와 대성팔족이라 불리는 7개 왕비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성팔족은 왕실과의 혼인이 허락되어 외척이 될 수 있는 왕비족이었다. 당대의 왕비를 배출하면 '길사'라고 했으며,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이 되었다. 왕비를 배출하게 되면 해당 씨족이 관직을 독점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왕권을 능가하는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때문에 왕비족인 대성팔족들은 정권을 잡기 위해 왕들을 시해했고 실제로 백제 왕의 대다수가 암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다. 원래 위례성 시절에는 해씨, 진씨 2개 외척 세력이 있었으나 웅진으로 급히 피신하여 해당 충청도 토착 세력의 도움을 받아 정권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왕비족이 7개로 대거 확대되었다.
이러한 대성팔족에 의한 지배체제가 공고화되어 있는데 이러한 대귀족들은 고구려나 신라에도 있었던 것으로 애초에 대성팔족 자체에 사비, 웅진 토착 호족들일 개연성이 높은 성씨들이 있었는데, 이걸 갖고 신흥세력이 없었다고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백제는 지역별 토착세력 같은 경우 신라보다 오히려 꽤 우대하는 편이었다. 대성팔족 중 상당수는 공주와 충남 일대를 본거지로 두는 신진 귀족 세력이었으며 4~5세기 무렵부터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에 등장하는 마한계인 사씨, 연씨, 백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남래(南來) 귀족 세력인 해씨(解氏)와 진씨(眞氏) 또한 대성팔족으로, 이들은 시조 온조왕의 십제 시절부터 온조와 동행한 세력으로 추정되며 한강 일대의 경제권을 장악한 호족으로 파악된다. 반면에 신라는 토착 호족들이 촌주급까지만 할 수 있었으나 백제는 현령 같은 경우, 상당 부분 호족들에게 겸임시켜주는 편이었다.[34]
신분제는 관등, 관직제를 규정하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관등, 관직, 복색, 대색에도 구별이 있었다. 왕은 금화로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색의 비단신을 신었다. 지배 신분층 가운데 좌평 계열과 솔 계열은 자복을 입고, 은화로 장식한 관을 썼다. 덕 계열은 비복을 입었고, 자대에서 황대까지의 띠를 띠었다. 무명 계열은 청복을 입되, 황대에서 백대까지의 띠를 둘렀다. 이를 보건대 백제도 기록 부재일뿐 신라와 거의 동일한 골품제급 신분제도를 유지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강하다.
백제의 귀족층은 중국과 교류가 빨랐으며, 중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 서적을 즐겨 읽었으며,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투호와 바둑, 장기 등의 오락을 즐겼다.
7.2. 관직[편집]
4색 공복의 색상배치를 그대로 따라서 노란색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신라의 골품별 배색과 동일하다. 진골과 ○솔은 보라색, 6두품과 ○덕은 빨간색, 5두품과 나머지는 파란색.
- 상좌평
- 좌보(左輔): 백제 초기 관직.
- 우보(右輔): 백제 초기 관직. 을음, 해루, 흘우, 진회, 질, 진충이 이 관직을 역임했다. 고이왕 때 폐지되어 좌평으로 전환되었다.
- 북문두(北門頭): 《삼국사기》 〈직관지〉에 언급되는 관직.
- 방령(方領): 백제 지방 행정조직의 행정 및 군사 최고책임자. 6세기 중반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35]
- 방좌(方佐): 방령을 보좌하는 관직.
7.3. 군사[편집]
백제는 행정 구역이 바로 군사 제도의 형태의 군사 행정 제도 체제였다. 따라서 행정 체제가 군사 편제라고 볼 수 있다. 중앙은 달솔이 지휘하고 지방인 방은 방령이 지휘관을 맡았다. 즉 좌평 혹은 지휘관 → 달솔 → 방령 체제였는지는 애매한 편이다.
백제에 싸울아비 - 무절이라는 조직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지만, '싸울아비'라는 말 자체가 20세기에 튀어나온 용어이며 '무절'이라는 용어도 위서(僞書)의 용어이기에 백제에 고구려와 같은 경당(扃堂) 체제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백제도 고대 국가들처럼 기병 - 보병 - 궁수의 병과 체제가 있었고, 주력이자 정예병은 기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나 상대적으로 영토가 목축 지대가 아닌 지역인 경기 - 충청 - 전라도에 분포해 있었기에 기병보다는 보병이 주력이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이는 훗날 후백제의 사례에서도 유사하게 볼 수 있다. 백제도 북방에서 내려와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찰갑을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형태였다. 물론 한반도 남부의 보편화된 갑옷이었던 판갑도 나오며, 고구려와 다르게 혼용으로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아래 길이가 크게 비대칭인 일본활(유미)과 비슷한 형태의 목궁이 출토되었으며 북방계 민족들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한반도에서도 목궁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백제의 활 형태가 일본과의 교류 과정에서 일본 활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는 주장도 있지만,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제군의 총 병력은 확인되기 어려우나 최대 30,000명 규모까지 원정에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성기인 근초고왕 시절과 중흥을 이끈 백제 성왕 시절의 동원 능력을 보면 30,000명 규모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산성 전투 당시 성왕이 이끌던 병력은 총 30,000명에 좌평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적으로 계산하면 좌평 4명이서 30,000명이니 30,000 / 4 = 7,500명이므로, 6좌평이 거느린 총 병력은 45,000명이 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치일 뿐이며, 좌평들이 모두 동일한 병력을 거느렸을 리도 없고, 예비대도 존재했을 것이므로 백제군의 총 병력이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대중들에게는 백제가 "해상 왕국"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데, 환황해권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는 만큼 해상 활동 기반이 잘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 여러 왕조와 교역도 활발했으며, 후기 신라와 당이 가까웠던 것 이상으로 바다 건너에 있는 일본과 무척 밀접했고, 심지어 성왕 대의 승려인 겸익은 중국 내륙를 통하지 않고 해로를 통해서만 중인도로 건너가 인도 불승 배달다삼장과 함께 불경을 싣고 오기도 했다. 백제선은 외국에도 알려져, 일본에서도 야마토노아야노아타히아가타(倭漢直縣) 등을 파견해 백제선을 만들게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수군 또한 융성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백제의 수군 역시 그 규모가 명확하지 않으며, 백제가 강력한 해상 통제력을 발휘했다고 뒷받침할만한 사료는 부족한 편이다. 백제의 수군과 관련된 기록은 아신왕이 관미성을 탈환하려 했다[36] 는 기록과 동성왕 시기 북위와의 전투[37] , 탐라 정벌계획[38] 등등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이는 백제에 수군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될 뿐 수군이 강력했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남은 백제의 전투 기록을 봐도 수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 수준이며, 대부분이 육전에 대한 기록이라, 백제군의 주력은 육군이며 수군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에 의해 서해의 해상 통제권의 영향을 받았던 점이나 백제 멸망 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편 북송 시대 왕흠약(王欽若)과 양억(楊億) 등이 편찬한 방대한 백과사전인 《책부원구(冊府元龜)》라는 책에는 "당 태종 이세민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산문갑(山文甲-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金漆, 황칠)을 요청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서 금칠이란 정말로 갑옷에 황금을 칠하거나 도금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황금색 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 결과, 백제에서는 황칠(黃漆)나무에서 흘러나오는 황금색을 띈 수액을 갑옷에 발랐던 것으로 밝혀졌다. #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물론 여기서 황색 깃발이 단순 의장기인지 왕실의 상징인지 백제의 국기인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
7.4. 언어[편집]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초기 고구려계 유이민들의 영향으로 고구려계 언어를 썼을 것이고, 충청도, 전라도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마한어까지 혼용되어 후대로 갈수록 마한계 언어적 성향이 짙어졌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일단 6세기 중국의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대략 같다.
《양서》 권54 〈열전〉 48 제이(諸夷)
중국의 사서인 《주서》에 의하면, 백제의 귀족들은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고,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이유로 백제의 지배층들은 부여계 언어를 사용했고, 백성들은 한(韓)계 언어를 사용했으므로, 백제는 지배층들과 백성들의 언어가 서로 달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승학은 해당 기록이 거리가 매우 먼 중국 기록이며 또한 중국의 기록에 단 한번 나오고 있어 진위가 의심스럽고 백제의 지배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일본 야마토 정권에서는 백제의 왕을 전부 "코니키시"(건길지)로 부르고 있어 백제의 왕족과 지배층들도 자신들을 "건길지"라고 부른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김승학은 건길지 또한 거서간과 같은 "간"의 호칭이며 신라의 "간"의 경우 일본에서 "간기"라고 불렸기 때문에 건길지는 백제어로 "간"의 발음이 "건"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여 백제, 신라 모두 삼한으로서 "간"에서 나온 호칭으로 불렸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신하들은 왕을 주상, 전하로 불렀고 백성들은 나랏님, 임금님으로 불렀으므로 왕을 일컫는 어휘만 보고 언어가 다르다고 속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 백제가 망한 후 일부 왕족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자신들의 성씨를 코니키시라고 했다고 한다. 코니키시는 건길지의 일본식 발음으로, 어라하와 건길지의 구분이 그렇게 확연하지 않았거나 후대에 들어 모호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백제인들의 인명, 백제의 지명을 통해 백제어를 유추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명으로 그 나라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39]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백제 목간이 발견되었는데, 서울시립대 국어국문학과 김영욱 교수는 이를 근거로 백제의 향찰이 신라보다도 이른 시기에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는 '목간에 기록된 고대 한국어'라는 서적에서 猪耳라는 목간 기록을 다루며 耳가 음을 빌려 말음을 표기한 것이 아닌 훈독자였을 것으로 보고 '돝귀'라고 재구하는 설을 지지하였다. 다만 확실한 가설은 아니므로 현재 교육과정에는 백제가 신라와는 달리 '말음 표기'를 하지 않았다고 소개한다.
7.5. 연호[편집]
백제는 일반적으로 연호를 써서 년도를 표기하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60갑자로 연호를 표기했다. 《한원(翰苑)》에서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서 "연도를 기록할 때 따로 연호를 쓰지 않고 60갑자로만 차례를 삼는다(其紀年, 無別號, 但數六甲爲次第)"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후에 발견된 사택지적비도 "갑인년(甲寅年)"이라 하여 60갑자가 사용되었다.
다만 칠지도의 "태화" 연호에 대해 근초고왕 또는 전지왕의 연호가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설, 동진의 연호라는 설 등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7.6. 종교, 문화, 역사[편집]
해안가에 위치하다보니 고구려처럼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유학이 발전하였으며 고흥이 《서기》를 편찬했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의 역사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이 백제삼서를 참고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사서들 자체는 현존하지 않는다. 왕인을 왜에 파견하여 《천자문》과 《논어》를 전수했고, 무령왕 대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성왕 대에는 오경박사 왕유귀(王柳貴)를 왜에 파견하여 왜가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백제 불교는 침류왕 시기인 384년에 서역승 마라난타가 남북조의 동진으로부터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침류왕은 한산성에 불사를 이룩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성왕 이후 백제에서는 많은 승려와 예술가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불교 문화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불교 사상에 심취한 법왕은 불교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는 방생을 명령하였다. 민간에서 기르던 매를 야생에 풀어주고, 고기 잡이와 사냥을 하는 도구들을 불태우도록 했다.
백제 불교는 계율 연구가 활발했다. 백제 승려 겸익은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또한 백제에서는 6세기 이후부터 미륵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미륵사, 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 등의 절이 세워졌고, 미륵반가사유상의 제작이 성행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미륵선화설화(彌勒仙花說話)에 의하면, 위덕왕 때 신라의 승려 진자(眞慈)가 미륵화신(彌勒化身)을 직접 뵙고자 웅진성의 수원사(水源寺)를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의 미륵신앙이 현 공주시 일대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후에 이 미륵신앙은 후삼국시대에 전국적으로 히트를 치게 된다.[40]
도교는 사비 도읍기에 성하여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 뚜껑 쪽에 새겨진 문양은 주제가 신선이 살았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익산 왕궁면 왕궁리에서 발굴된 원지는 우리 나라 고유의 산악 숭배와 더불어 신선 사상 및 도교 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7.7. 건축[편집]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건축물들은 분묘나 석탑 종류에 불과하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 탑, 고분[41] 등이 있다.
한성 백제 시대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돌무지 무덤이 대표적이다. 돌무지 무덤은 고구려 초기 고분(졸본 부여 시기)과 유사한 양식이다. 웅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시 송산리에 있는 여러 고분들[42] 은 백제 중기를 대표하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후기의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 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한성백제 시기를 대표하는 집 유적지로서는 여·철자형 주거지가 있다.
백제 건축물들의 남은 터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대부분 상당히 장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주로 백제의 옛 도읍지였던 공주시, 부여군 일대에서 그나마 백제의 옛 흔적을 찾을수 있다. 무령왕릉이나 미륵사지가 대표적인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일본이 적극적으로 백제의 건축을 도입했었다 보니 일본의 고건축이 백제 양식을 가장 많이 닮아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의 나라, 아스카 시기 건축물에 백제의 흔적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남아있는 백제 건축물이 없으므로 일본의 고건축을 주로 참고하여 복원하고 있으며 때문에 동아시아 고대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왜색 논란이 빚어지기도 한다. 67년 부여박물관 왜색 논란
7.8. 시가[편집]
작자·연대가 미상인 백제 노래 〈정읍사〉가 《악학궤범》에 전해지며, 능산리 고분 근처에서 발견된 목간에서 작자 미상의 〈숙세가〉가 발견되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24876 이외에도 《고려사》 〈악지〉에 제목만 등장하는 〈지리산가〉, 〈무등산가〉, 〈방등산가〉, 〈선운산가〉 등이 있다.
7.9. 예술[편집]
백제 시기의 그림 예술 역시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 관계로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다. 다행히 백제 역시 고구려와 비슷하게 고분에 벽화를 그리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43] 천마도와 나머지 몇몇이 고작인 신라보다 남아있는 회화는 오히려 더 많다. 능산리 고분에는 연화문(연꽃 무늬), 운문(구름 무늬), 사신도를 그린 벽화가 있으며, 송산리 고분이 있다. 백제 시기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로는 아좌태자, 하성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는 고·각·공후·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하며, 5∼6세기 중국 남북조시대의 유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의 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악사가 왜국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7세기 초 백제 사람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 음악을 배워서 왜에 전했다는 기록이 유명하다. 참고로 백제 대표 문화재인 금동대향로를 들여다 보면 5인의 악사가 연주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백제시대의 악기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음악들인 고려악(高麗樂, 코마가쿠)[44] 에서 소리코(蘇利古)라는 춤곡은 백제인 수수허리(須々許理, すすこり, 스스코리)가 오진 덴노(270~310) 시기 일본으로 전해주었다고 한다.[45] 착용한 가면은 잡면(雑面, ぞうめん, 조멘)이라고 하는데 눈, 코, 입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서예 작품으로는 사륙변려문으로 쓰여진 사택지적비, 남조 대 전형적 해서체로 쓰여진 무령왕릉 지석 등이 있다.
조경 면에서는 도교식 인공 정원을 당나라로부터 수입하여, 무왕이 궁남지를 만들고, 백제인들이 왜국으로 건너가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준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의 안압지도 여기서 영향 받았을지 모른다.
7.10. 교육[편집]
2013년 발견된 백제유민 진법자(615년 ~ 690년) 묘지명에서 국립대학인 태학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정확한 설립시기는 불명이나 진법자의 증조부인 진춘이 태학의 정(正)을 지냈다는 언급으로 보아, 적어도 6세기 무렵에는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46] 중국과 근접성을 이점으로 활용하여 중국 문화와 학문을 수용하였다. 일례로 흑치상지의 묘지석에는 어린 시절부터 중국 고전을 즐겨 읽었다고 언급했고, 막고해는 노자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해서 근구수왕을 설득하기도 했다. 개로왕이 북위에 쓴 상소문을 보면 수많은 중국 고전을 인용하고 있다. 다만 이것이 중국계 백제인에 의해 쓰여졌을 가능성도 있다.
2012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서 출토된 목간을 2016년에 연구해 본 결과 이 목간은 구구표(구구단)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황상 관청에서 교육 혹은 참고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7.11. 장례[편집]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른 것으로 추정한다. 무령왕릉의 지석에서 발견된 사실에 의하면 무령왕릉은 붕어한 후 3년(만 27개월) 동안 상을 치루고 묘지에 묻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또한 중국의 사서에 따르면 3년상의 관습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장수왕도 부왕인 광개토왕을 위해서 약 3년(만 24개월) 동안 상을 치루고 묘지에 묻은 것으로 파악된다. 자세한 내용은 삼년상, 광개토대왕릉비 문서로.
8. 외교[편집]
8.1. 고구려와의 관계[편집]

건국의 주체가 비류와 소서노 등 고구려에서 남하한 이주민이었던 만큼, 건국 초기부터 백제는 고구려와 깊은 관계를 가졌다. 백제의 전성기 때는 고구려의 왕을 전사시키는 등 전쟁을 하던 원수지간이었지만 신라의 중흥 이후 고구려와 손을 잡게 되었고 이는 멸망 때까지 유지되었다.
8.2. 신라와의 관계[편집]

혈맹과 숙적 관계를 넘나 들던 관계였다. 고구려가 중흥할 때는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어 손을 잡고 고구려에 대항했다. 그러나 후에 나제동맹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한강유역까지 북진을 하게 되고 한강유역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백제는 한강을 유지 할 힘이 없어, 스스로 한강 하류를 포기하고 신라가 백제군이 철군한 하류를 차지했다. 자세한 것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참조. 양국의 긴장 관계는 이어지다 얼마 안가,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의 전사를 계기로 불구대천의 원수사이가 되었다. 이때부터 나제양국은 치열한 접전을 꾸준히 치뤘고 이러한 대립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8.3. 가야와의 관계[편집]

백제와 가야는 지리적으로 접해왔던 만큼 지속적인 교류를 유지했다. 다만 백제의 체급이 더 크다보니 영향력은 백제가 더 우위였다.
8.4. 마한과의 관계[편집]
백제는 상술했듯 시초부터 마한의 일부였고, 관념적으로나마 성왕 때까지 그러했다. 고이왕 혹은 책계왕 때부터 백제의 군주는 마한왕까지 겸하게 되었으니[47] , 때문에 마한과 백제가 일방적인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관계였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다만 마한은 진한과 변한과는 달리 수계가 대여섯 개나 되는데다 면적도 인구도 몇 배나 되었기에 통합 난이도는 훨씬 높은 편이었다. 일단 지배력이 미치는 기준으로만 보면 마한 영역 전체에 그 위령이 미친 건 372년도 근초고왕 때부터지만, 마한 영역을 직접 지배화한 기준으로 보면 5세기 초반 무령왕 때다. 게다가 무령왕 때도 사실, 근초고왕 때는 엄연히 직접 지배지이자 옛 마한의 영역 일부였던 충북 일대가 빠져 있었고 경기도 일대도 겨우 수십 년 수복한 끝에 고구려와 신라에게 내주어야 했으니, 한성백제 당시 고이왕 혹은 책계왕이 목지국을 타도했을 때부터 염원했던 마한 전체의 직접 지배화는 결국 이뤄지지 못한 꿈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쉽지 않았던 백제의 생존 투쟁과 어려움이 읽히는 대목이다.
8.5. 왜국(야마토)과의 관계[편집]
백제와 왜국(야마토)의 관계는 각별했다. 4세기 이후까지 일본 열도는 아직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한 채 기나이의 야마토 정권을 주축으로 하여 호족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에 백제가 왜국에 전해준 문물은 건축, 토목, 제철, 목마, 양초, 직조, 양응, 의약, 음악 등 매우 다양했는데, 생활에 필요한 분야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왜국의 사회가 일상생활에 필요하면서도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문물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선진문물들을 바탕으로 하여 야마토 정권은 당시 일본 열도에 위치한 타 국가들에 비해서 강대한 국력을 갖추게 되어 당대에 존속해 있던 주변 국가들을 하나 하나 병합시켜 나갈 수 있었고, 서기 7세기 무렵이 되면 규슈에서부터 간토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야마토로 통합시키는 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왜국은 또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이념으로 기능하는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였다. 백제가 유교를 왜국에 전수해 주었다는 것은 근초고왕이 아직기와 박사 왕인을 왜국에 파견하고 또 한자, 《천자문》과 《논어》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372년, 404년). 참고로 근초고왕 때 칠지도 또한 일본에 내려주었다. 이후 백제는 무령왕 때 오경박사 단양이, 고안무 등을 왜국에 파견하여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516년).
불교는 사비 도읍기에 성왕이 왜국에 '노리사치계'를 파견해 전해주었다(552년). 이후 백제는 많은 승려와 사찰 건립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계율을 가르치고, 사찰 건립을 도왔다. 한편 승려 관륵은 승관 조직을 정비하여 교단의 기율을 바로 잡았을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 둔갑, 방술 등 도교 사상도 전해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왜국이 유교, 불교, 도교 등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 데 백제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스이코 덴노 시절에는 "스이코 왕과 만조백관들이 '백제옷'을 입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했다"라는 기록도 나온다. 이는 당시 왜국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백제의 선진 문물들을 전해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증거[48] 이다.일본 한국 도래인 사실로 인정
백제가 왜국에 선진 문물을 전수하는 방법은 기술자들이 도왜[49]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들 도왜인들은 자신의 학문이나 기술 등을 바탕으로 왜국의 지배층에 편입되어 들어갔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왜국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백제와 왜국의 관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문화 교류가 왕성했기 때문에 야마토 정권에서 백제계 도래인 출신도 많이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왜국에서 정식으로 일본으로 발족한 뒤 일본 황실과도 혈족적 연계를 갖는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는 나중에 모계 혈통적인 입장에서 백제계 2세가 천황이 되는 경우까지도 나올만큼 왜국과 백제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으며 백제 부여씨 왕족들이 왜국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다만 이들이 인질이었는지 아니면 백제와 왜국 간의 외교대사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조정에서 백제계를 대표하는 존재였는지는 여전히 학계의 논란거리다.
백제 왕자들이 속국의 인질이었다는게 비록 1차 사료인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만들어진《일본서기》가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백제와의 관계를 왜곡한 프로파간다적 서술이 많기 때문에 써있는 그대로 신뢰하기는 곤란하다. 물론 일반 왕자도 아닌 왕위계승권 1위인 왕의 장자가 몇 년씩 외국에 거주하는 건 일반적인 외교 관례는 아니다. 통일 중국 상대로도 한반도 국가가 태자나 세자를 직접 사신으로 보낸 사례조차 드물고, 그들이 몇 년씩 중국에 거주한 건 몽골간섭기를 제외하면 한손으로 꼽는 희귀 사례다.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백제에게는 군사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어떤 형태로든 태자를 왜국에 파견해 우호를 최대한 다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왜의 군사 지원이 필요하고, 왜는 백제의 선진 문물이 필요해서 서로 윈-윈이 되는 관계였을 가능성도 높다. 애초에 그 당시 시점에서 사람을 외국으로 보내는 건 난파되거나 해적과 만나거나 풍토병에 걸리는 등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정적의 위협에서 피한다거나 왜국의 사회적 상황을 시찰하는 등의 목적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심지어 비다츠 덴노와 조메이 덴노 시절에는 아예 왕도에 ‘백제궁(百濟宮)’이라고 호칭하는 왕궁(王宮)을 짓고 살았을 정도였다. 거기다 조메이 덴노는 백제궁(百濟宮)에서 사망하였는데 붕어 후에 ‘백제의 대빈’이라고 부르는 백제 왕실식 장례를 치루었을 정도였다.
여기서 말하는 '백제의 대빈'이란 백제 본국 왕실의 3년상 '국장의례'를 가리킨다.[50] 어째서 조메이 덴노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진 건 아직 없지만 적어도 조메이 덴노 시절 백제계들의 영향력이 왜국 조정 내에서 매우 컸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즉, '백제궁'과 '백제의 대빈' 모두 당시 왜국에서 백제계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들이다.冬十月己丑朔丁西, 天皇崩于百濟宮. 丙午, 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겨울 10월 9일에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하셨다.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百濟の大殯)'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백제와 왜국의 밀접한 혈맹관계나 다름없는 모습은 신라를 공격할 때 백제에 지원 병력을 파병하여 적극적으로 돕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백제 멸망기 때에는 백강 전투처럼 왜국의 국력을 대거 쏟아부어서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 백제계 유민들이 나라를 잃고 상당수가 새롭게 정착한 곳도 일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관계가 좋았던 것만은 아닌데, 대표적인 시기가 백제 무왕 초기로, 《일본서기》 스이코 덴노 16年(608) 6월 조에 따르면 수나라에 갔던 왜국의 사절 오노노 이모코가 (수양제가 왜왕에게 보내는) 국서(返書)를 소지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백제에 이를 강탈당했다고 되어 있다. 오노노 이모코가 당에서 보낸 국서를 백제인에게 탈취당함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당시 왜국의 대중국 독자 외교에 대해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 백제가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51]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와 왜국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 등 의외로 백제와 왜국의 외교관계가 좋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수나라보다 이전 시대인 438년 유송의 기록 또한 왜와 백제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때 왜왕 진(珍)이 송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六國諸軍事(육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으로 칭하고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유송에게 요청한 일이 있다. 이 무렵은 신라나 고구려와의 전쟁에 왜국이 군대를 파견하면서 백제와 한창 우호관계가 돈독하던 사이였음에도, 중국에 사신을 보내면서 왜 자신들이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지배자임을 자칭하면서 인정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만약 한국 민족주의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이 시기의 왜국이 백제의 충견 같은 속국이었다면' 당연히 절대 있을 리가 없는 행동이었다. 최소한 자기들이 백제를 상대로도 주도권을 쥐고 싶어하던 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유송 입장에서는 백제는 이미 자국과 조공-책봉을 맺은 나라이므로 백제에 대한 관작은 인정해주지 않았고 나머지 신라와 가야 등에 대한 관작은 인정해줬다. 백제와는 달리 그 지역들과는 유송이 직접 교류가 없었기에 '난 모르는 땅이니까 뭐 니 권위 세우는 데 써먹든가'하고 인정해준 것이다. 백제 또한 이와 비슷하게 중국에 사신을 보내 신라와 가야가 자신의 속국이라고 주장해 인정받은 적도 있다.[52] 또한 유송은 왜가 요청한 안동대장군이 아니라 더 낮은 관직인 안동장군 직만 인정해줬는데, 이는 유송이 백제에게 이미 인정해준 진동장군보다 낮은 관직이다. 즉 유송이 왜보다는 백제에게 더 외교 의전서열을 높여줬다는 뜻이라, 백제가 왜의 속국이라는 일본 민족주의적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어주기도 한다. 양국이 우호관계일 때도 서로 이렇게 신경전이 있었다.
사실 백제에 대한 일본 기록들은 전부 왜국을 우위에 놓고 백제를 속국으로 기술해 놓았으나, 잘 읽어보면 자기들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는 걸 과장하려다보니 현대인 시각에서는 대놓고 왜곡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백제와의 첫 만남부터 근초고왕이 대뜸 바다 건너에 귀한 나라인 일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너무너무 섬기고 싶다면서 가야를 통해 소개를 받고 귀한 보물을 잔뜩 가지고 찾아와 조공을 바치며 일본의 속국을 자처했다는 식으로 써놨는데(...),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나라가 생판 남인 외국에게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벌벌 기면서 찾아와 속국을 자처할 이유가 있겠는가? 현대인 입장에서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믿을 이유가 없을 정도로 개연성이 낮다. 자기네가 근초고왕과 그 아들인 근구수왕에게 막대한 영토를 하사했다느니 하는 등등 다른 부분의 신뢰성 또한 마찬가지로 한없이 낮다.
고대 백제어가 일본어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는 《고사기》, 《만요슈》 등 고문서 고어를 연구하며 백제인이 전해준 이두가 일본 가나 문자의 원형이 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승재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는 고대 일본어는 백제 도래인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백제어와 일본어의 계통에 대해서는 백제어와 일본어는 별 상관없고 언어동조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란 쪽이 일단 통설이다.《일본서기》에는 '신라 사람이 표류해왔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백제 출신을 데려와 통역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백제어 목간이 발굴되며 한국어 수사와 같은 계통이란 게 증명되었고[53] 무엇보다도 당장 일본 기록에서 백제어는 통역이 필요한 외국어라고 떡하니 적혀있다.[54]
다만 백제가 왜국에게 준 영향을 과장해서 "일본은 백제의 속국이었으며 일본의 모든 것은 백제의 표절"라고 주장하거나 반대로 축소해서 "백제는 일본에게 중국 문물을 전달해주는 창구 역할을 하던 속국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양국의 주장은 둘 다 잘못된 시각들이다.[55] 문화, 기술, 정치, 외교에서 앞서 있었던 건 백제가 맞으나 왜국이 대규모 군대를 보내서 한반도로 파병한 사실을 봐도 단순히 백제나 가야의 속국으로 지배받을 정도로 미약했던 수준은 아니다. 이 시기 왜가 일본 열도를 완전히 통일한 안정적인 중앙집권국가를 세우진 못했지만 일본 열도 내에서는 제일 강력한 세력이었다는 걸 추론할 수 있다.[56] 고구려-신라와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고 있었고 한성 지역을 뺏긴 후로는 수세를 면하기 힘들었던 백제에 비하면 왜는 훨씬 유리한 조건 하나를 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의 유물과 사료에서 보이는 백제와 왜국의 행정 시스템 수준을 보면, 바다 건너 먼 외국에 속국이나 식민지라 부를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건 서로 불가능했다. 이 시기엔 양국 다 아직 중국의 행정 시스템[57] 을 다 받아들이진 못했고, 한반도와 왜의 국가들은 여전히 이념에 입각한 시스템보다는 왕실과 귀족들간의 혈연에 크게 의존한 폐쇄적인 신분 제도로 통치하던 고대국가들이었다. 만약 거리가 너무 먼 지역을 이런 원시적인 시스템으로 통치한다면 처음 1~2대는 지배가 유지될지 몰라도 금방 관계가 멀어지고 통제에서 벗어나기 마련이다.
여담으로 <예군 묘지명>을 근거로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기는데 백제의 영향이 있었다는 가설이 나오기도 했다.
9. 멸망 이후의 백제인들[편집]
나당연합군의 백제 정벌 및 부흥운동 진압, 그리고 신라의 승전으로 결판난 나당전쟁의 결과로 백제는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당이나 왜국으로 끌려가거나 망명한 극히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절대 다수의 백제인들은 통일신라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최종적으로 오늘날 현대 한국인, 더 나아가 한민족의 원류(原類)가 되었다. 다만 통일신라 내에서도 백제인들은 서로 거취를 달리하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상당수가 신라의 내지(內地)로 사민되었지만 다수가 고토(古土)에 잔류해 훗날 후백제 건국에 참여하게 된다.
- 통일신라 ➪ 후백제
- 왜국
- 당나라 ➪ 발해
10. 역사귀속과 계승인식[편집]

11. 왕조[편집]

12. 인물[편집]
개국 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 공신 중 한 명.
- 마려(생몰 미상)
개국 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 공신 중 한 명.
- 해루(기원전 55년?~34년)
온조왕 대의 대신. 최초로 확인되는 해씨 출신의 인물이다.
- 2세기
- 부여질(생몰 미상)
왕족. 기루왕의 아들.
- 길선(생몰 미상)
신라 귀족으로, 아찬을 지냈다. 1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백제로 망명한 것을 개루왕이 받아줘 대접해줬다. 이 일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배신할 지도 모르는 길선을 받은 개루왕이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다음 백제 왕인 초고왕 시기에는 길선의 송환 문제로 신라와 백제는 감정의 골이 파이기 시작했고, 신라가 백제를 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나기도 했다.
- 3세기
- 보과 부인(생몰 미상)
책계왕의 왕비. 대방군(帶方郡) 태수의 딸.
- 4세기
- 우복(?~327년)
371년에 있었던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등장. 백제에 패배한 고구려 고국원왕이 도망가자 "뒤쫓지 마시고 여기서 만족하며 돌아가죠"라는 뜻으로 《도덕경》을 인용한다. 백제가 도교가 전파되었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근거 중 하나.
학자. 일본에 처음 말을 전파하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된다. 후에 왕인을 추천하여 왕인이 일본으로 오게 된다.
도미 부부 설화의 주인공.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고구려에 망명을 했다. 장수왕의 명령으로 백제를 침략하여 개로왕을 잡은 뒤 먼저 절을 한 후 다시 얼굴에 침을 뱉고 목을 배었다고 한다.
- 고이만년(생몰 미상)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재증걸루와 같이 행동했다.
- 목협만치(생몰 미상)
목례만치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이 죽은 뒤 조미걸취와 함께 태자 문주를 모시고 남쪽으로 피난간다. 그리고는 문주를 문주왕으로 옹립하여 웅진백제 시대를 연다. 그리고는 기록이 없다.
- 해구(?~478년)
문신. 병관 좌평.(최고위 관직인 좌평의 하나로, 군사 업무 관장) 해(解)씨는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 해구는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권력자였다. 왕이었던 문주왕을 살해했을 정도. 이후 삼근왕을 옹립하였고, 훗날 478년에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관광 당해 처형당했다.
- 곤지(생몰 미상)
왕족. 문주왕의 동생이며, 내신 좌평(왕명의 출납을 관장)이었지만 해구에게 살해당했다.
- 진남(생몰 미상)
좌평. 진로와 함께 해구의 반란을 진압했다. 진로와 함께 대성팔족 하나인 진(眞)씨 출신 귀족.
- 진로(?~497년)
병관 좌평. 진남이 왕명으로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진압하려 갔지만 이기지 못하자 진로가 500명으로 해구를 제압한다. 원래 덕솔(4등급)이었으나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482년에 병관 좌평까지 올라갔다.
- 연신(생몰 미상)
은솔(3등급). 대성팔족(大姓八族) 중의 하나인 연(燕)씨. 해구가 문주왕을 살해한 이후부터 쭉 국정을 맡다가 해구와 같이 반란을 일으킨다. 해구가 잡혀 죽자 혼자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가족들은 잡혀서 웅진 시장에서 처형당했다.
- 6세기
- 겸익(생몰 미상)
승려. 성왕 시기인 531년에 인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
- 노리사치계(생몰 미상)
달솔. 승려. 백제 성왕 시기인 552년에 일본에 불교 전파해준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만 등장.
- 7세기
- 선화공주(생몰 미상)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무왕의 왕비인 동시에 서동설화의 히로인. 그러나 미륵사에서 발견된 기록 때문에 실존했다는 것이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실존했다는 설에 의하면 무왕의 첫째 부인이다.
- 사택적덕(생몰 미상)
좌평. 사택왕후의 아버지.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 사택왕후(생몰 미상)
사택적덕의 딸로, 무왕의 왕비.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642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택 왕후가 의자왕의 어머니라는 가정을 하면 642년에 죽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미륵사 관련 기록 때문에 선화 공주에 이은 두 번째 부인이라는 추정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택 왕후가 실존한 것은 사실이다.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 사택지적(생몰 미상)
대좌평. 642년 일본에 갔다 왔으며, 654년에 은퇴. 642년의 일본 방문이 의자왕이 부여교기를 쫓아낸 것과 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존재.관련링크. 말년에 사택지적비를 세운 인물.
- 부여교기(생몰 미상)
의자왕의 동생. 642년에 (누군지는 정확히는 몰라도) 아버지 무왕의 왕비가 죽자 의자왕은 부여교기와 그를 따르던 신하 40여명을 일본으로 추방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흥군의 풍왕이 이 부여교기였다는 말이 있다.
- 성충(?~656년)
문신. 상좌평. 성은 부여. 일명 정충. 백제 3충신.
- 윤충(생몰 미상)
장군. 642년 신라의 대야성 등을 빼앗음.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살해. 그가 부여씨이며, 성충의 동생이라는 것과 누명을 쓰고 파직되어 홧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다.
- 아비지(생몰 미상)
건축 엔지니어. 645년에 신라로 건너가서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했다.
- 의직(?~660년)
백제의 장군. 의자왕 시기인 647년에 신라를 쳐서 전공을 세우다가 희대의 먼치킨 김유신과 붙어서 패배한다. 이듬해인 648년에 신라를 쳐서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으나 옥문곡으로 진격하다가 김유신에게 또 걸려서 대패하였다. 김유신이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자 김춘추는 이들과 자신의 딸과 사위의 유골을 교환하였다. 훗날 좌평이 되어 660년에 나당 연합군과 기벌포에서 2만명을 이끌고 싸우다가 소정방의 13만에게 패해 전사하였다. 운이 좀 부족했던 인물...(...)
- 흥수(생몰 미상)
문신. 성충과 함께 의자왕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하다가 유배. 백제 3충신.
승려. 부흥군이었으나 복신에게 제거당했다.
- 복신(?~663년)
왕족. 성은 부여. 부흥군으로 유명하나, 도침과 반목하다가 도침을 죽인다. 결국은 풍왕까지 제거하려다 역관광당하고 잡혀서 목이 베인다. 의외로 풍왕이 믿고 의지했었는지 복신의 처형을 망설였다는 기록이 있다.
- 덕집득(생몰 미상)
달솔. 풍왕을 모시는 부흥군의 한 명. 복신이 풍왕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잡혔는데, 풍왕이 마음이 약해서 복신을 죽일지 망설이자 덕집득이 죽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고 "이 썩은 개 못난 노예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좌평. <김유신 열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황산벌에서 계백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20여명의 부하와 함께 항복하였다. 후에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길앞잡이 노릇을 하며 출전하였다가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문책을 받았다.
- 융왕(615년~682년)
왕족. 성은 부여. 웅진 도독으로 왕을 자처하나 실패로 끝났다.
- 지수신(생몰 미상)
임존성의 부흥군. 배신한 흑치상지 등이 당나라 편에 붙어 공격해오자 포기하고 고구려로 망명갔다.
- 사타상여(생몰 미상)
백제 부흥군에 속해 있었으나 흑치상지와 함께 부흥군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당나라에 붙었다.
13. 백제부흥운동[편집]

14. 백제/문화재[편집]
14.1. 유물[편집]
-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
- 무령왕 금귀걸이
- 무령왕 금제 관식
- 무령왕 금제 뒤꽂이
-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 무령왕 발받침
- 무령왕비 금귀걸이
- 무령왕비 금목걸이
- 무령왕비 금제 관식
- 무령왕비 베개
- 무령왕비 은팔찌
- 반가사유상[81]
- 백제금동대향로
-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 부여 쌍북리 출토 목간
-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 사택지적비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 칠지도
-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14.2. 유적[편집]
- 공산성
- 몽촌토성
- 무령왕릉
- 미륵사지
- 백제역사유적지구
- 벽골제
- 부소산성
- 부여 나성
- 부여 왕릉원
- 서울 가락동-방이동 고분군
- 석촌동 고분군
- 송산리 고분군
- 쌍릉
- 왕궁리 유적
- 정림사지
- 풍납토성
- 수촌리 고분군
- 대통사
- 능안골 고분군
- 정지산 유적
14.3. 백제와 관련한 일본의 유물·유적[편집]
15. 현대 창작물[편집]
- 삼국기[82]
- 계백
- 근초고왕
- 서동요
- 황산벌
- 바람의 나라(게임) (백제(바람의 나라))
- 삼천 망국의 꽃
- 제왕의 딸 수백향
- 천년지애
- 역적전[83]
- 비흔[84]
- 천년의 신화
- 천년의 신화 2
- 불새/태양 편[85]
- 백제의 이름을 잇다[86]
- 명농전[87]
- 온새미로
- 한국사 RPG - 난세의 영웅
16. 같이 보기[편집]
17. 관련 사서[편집]
[1] 《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황색 깃발을 군기의 하나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나아가 이것이 의장기인지, 부여씨 왕실의 상징인지, 혹은 백제의 국기인지는 추정할 도리가 없다.[2] 남부 마한지역은 백제에 완전히 병합되지 않고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였으며, 고고학적 근거 및 침미다례 등의 기록으로 볼 때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부터 이 지역을 간접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3] 다만 건국년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건국" 문단으로.[4] 경신(庚申)년 갑신(甲申)월 정사(丁巳)일로, 음력으로 660년 7월 18일, 율리우스력으로는 8월 29일이다.[5] 멸망 직후 백제부흥운동, 웅진도독부, 보덕국이 들어섰다가 신라로 정립된다.[6] 성왕 시기 사비 천도 후에 '남부여'로 국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이 명칭이 언제까지 사용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이후 멸망할 때까지 계속 백제라는 국호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가 환원되었거나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구나 보통 정식 국호에는 방위명을 붙이지 않는다는 점. 부여와 백제의 연계성, 외교 활동에서의 사용 빈도 등으로 미루어, 공식 국호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남부여'라는 국호는 고구려보다 더 정통성있는 부여 후손이 백제임을 드러내기 위한 성왕 시대의 일시적인 이벤트성이 짙다.[7] 고려시대 이승휴가 1287년 출간한 《제왕운기》에 등장하는 이명이다.[8] 5세기 후반에 황해남도 동남부와 한강 유역, 영서 지역 등을 상실한다.[9] BC 18년~475년. 하북위례성의 위치는 하북위례성이 수도로 있었던 기간도 워낙 짧았기에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고, 가설만 분분하다. 하남위례성에 해당하는 지역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 고분군이 있는 오늘날의 서울 송파구 일대에 해당한다. 풍납토성 성벽 아래에서는 3중환호가 확인되어 성벽 축조 이전부터 해당 지역에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집단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난 후의 반격에 대비하여 '한산성(漢山城)'으로 옮기기도 했다.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및 하남시 일대(남한산성이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남한산성은 온조왕이 쌓고 수도로 삼았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었다.)가 한산성의 위치로 유력시된다는 견해가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남평양(북한산군의 별칭)을 빼앗아 수도를 북한성(北漢城)으로 옮겼다는 기록과 함께 북한성의 위치는 현 양주(고려의 부수도 남경이 양주에서 독립해 떨어져나갔다. 후의 조선의 수도 한성부가 남경의 후신에 해당한다)라고 적혀있기 때문에 한강 이북의 북한산군의 치소를 그대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대충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산성이 묶여서 백제의 한성으로 불린다(한성백제). 고려 시기에도 이 지역을 '한산'이라고 부른 기록이 나온다. 온조왕대에는 하남위례성이 한산성으로 잠깐 불리기도 했다.[10] 475년~538년[11] 538년~660년. 무왕 집권 당시 금마저 천도 기록이 존재한다. 위례성과 한산성의 경우처럼 일종의 별도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사비성-금마저 이중 수도 시스템은 고려의 개경-서경이나 원나라의 대도-상도와 유사해 보인다. 셋 모두 두 도시 모두를 수도로 삼았으나 앞에 표기된 도시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렸다.[12] 다만 편차가 있기 때문에 정확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13] 다만 언제부터 이 성씨를 썼는지 알 수 없다. 일단 초고왕계 왕가는 부여씨를 사용한 것 같은데 고이왕계 왕가는 우(優)씨였다는 설이 있다.[14] 삼국 연구에 있어서 백제는 사료 부족, 고구려는 고고학 연구의 한계 때문에 각각 어려움이 생긴다. 백제보다 유물이 많아 고고학 조사도 유리하고 고구려보다 사료가 많은 신라가 그나마 연구 상황이 가장 낫다. 그래봐야 그 신라조차도 국왕들 출생연도조차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지만.[15] 매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는 의미의 멸칭으로 보인다.[16] 신라와 다퉈대는 라이벌이라는 의미로 보인다.[17] 매처럼 기회를 엿보며 하늘 위를 빙빙 떠돌고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18] 여기서 '잔'은 殘(남을 잔, 잔인할 잔)자로, 흉악한 백제, 혹은 백제 잡것, 찌꺼기, 쓰레기라는 의미다.[19] 백제 초기의 한나라에서 사용한 상고한어로는 pˤrak(ts)ˤəjʔ, 백제 후기의 당나라에서 사용한 중고한어로는 paektsejX로 발음했다. 한글로 비슷하게 표기하자면 각각 "ㅃ락쩌-이" 및 "빠엑-쩨이" 정도.[20] 구다라와 곰나루의 발음이 비슷하며 일본어로 곰을 '구마'라 하기 때문이다.[21] 베트남어 위키백과.[22] KBS World.[23] 미천왕의 낙랑군 정복 이후 낙랑군 일대는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해 사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왕인이 낙랑인이라는 주장은 사서적으로 전혀 기록이 없으며, 한반도 영향을 줄이고 싶어하는 일본 넷우익의 주장이다. 다만 이 일대는 적어도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전까지는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어 전통적인 사서 해석과는 달라졌지만, 외교력이 완전 박탈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최근 연구에서도 공고해졌다. 침미다례 또한 자치는 유지했으나 외교권은 한성백제가 개로왕대의 한성 공함으로 잠깐 맛이 갔을 때 외엔 꾸준히 박탈되어 있었으니, 침미다례를 백제와 별개로 보는 인터넷발 왜곡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다시 드러난다.[24] 신라가 4~5세기 동안 집중적으로 받아들인 선진문물은 고구려의 것이었다.[25] 신라가 내부적으로 진흥왕 사후에 오히려 중국을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해 더욱 국가역량이 업그레이드되지만 백제한테는 군사적으로 크게 반격을 받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그 시기 사비백제 또한 영역 전체의 직접 지배화를 완료한지 한 세대가 지난 상황에다 무왕이라는 뛰어난 장군형 군주를 맞이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진흥왕 사후 신라가 기강이 해이해진 게 원인은 아니었다. 단 선덕여왕의 무능이 신라의 수세에 일조한 측면은 있다.[26] 훗날 등장하는 악명 높은 연개소문 가문의 집권과 귀족 가문 사이 혈투, 왕권의 지속적 약화는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다. 단 연개소문의 집권은 700년 고구려사에서도 비정상적인 행태였음은 감안해야 한다.[27] 이러한 골품제의 폐단은 통일신라 대에도 이어져 결국 후삼국 분열의 주요 원인이 된다.[28] 이 일대는 상당히 가치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삼국은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수백년간 각축전을 벌였고, 한강을 가진 시기는 해당 국가의 전성기였다.[29] 제2품. 좌평보다 한 단계 낮은 관직.[30]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5개 도독부[31] 〈지리지〉에는 그냥 임존성(城)이라고만 되어있지만, 〈흑치상지 열전〉에서 풍달군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지리지〉에 나타나는 군의 개수를 전부 세면 정확히 37개가 되는데 성왕 시기 수도가 된 소부리군을 빼고 풍달군을 포함해서 37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는 별개로 풍달군은 서방 소재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풍달군장이었던 흑치상지의 관등이 《주서》에 기록된 군장의 관등 덕솔이 아닌 방령의 관등 달솔이기 때문이다.[32] 단, 대가야에게서 전쟁으로 빼앗은 전라도 동부, 그리고 신라에게서 전쟁으로 빼앗은 경남 서부에 대해서는 현령까지 중앙에서 파견하여 그야말로 주도면밀한 신라식 지배체제를 관철했다. 얼핏 보기엔 다른 백제 지방보다 지배하는 강도가 높았던 것이지만, 백제 왕실이 해당 지역의 기존 지배 세력을 도저히 믿지 못해 그랬을 개연성 또한 부정할 수가 없다.[33] 혹은 평생 벼슬길을 막아버렸다고도 한다.[34] 전남 동부 일대는 그 일대 호족들이 대가야를 선택해서 백제에게 비협조적이었고, 경남 서부 일대는 백제가 옛 가야 소국 지배층이었던 호족들 자체를 믿을 수 없어, 전남 동부와 경남 서부 일대는 현령까지 전부 백제 중앙에서 파견했고, 군정 지배 형태를 관철했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였다.[35] 《일본서기》 에 기록된 관산성 전투 관련 기록에 의하면, 백제 동방령의 군대가 함산성(관산성)을 공격했다고 한다.[36] 관미성 탈환 시도 때 수군을 동원했다고 보는 이유는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였다(四面峭絶 海水環繞)'는 관미성의 지형 때문.[37] 뜬금없이 북위와 싸운 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자세한 것은 요서경략설 문서로.[38] 수군이 없으면 건너갈 수 없기 때문이다.[39] 지명이 가진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보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외국의 사례만 봐도 런던(London)은 고대 로마 시기의 론디니움(Londinium)에서 파생되었으며, 중동 지역의 많은 오래된 도시들의 지명이 옛날 지명을 그대로 따서 쓰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반도 중부의 고구려 지명들은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썼을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이유로 지명을 가지고 고대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감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40] 신라의 경우 통일 후 삼국 유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게 위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하는 정토신앙을 보급하려 했다.[41] 백제의 장례 양식은 독특한 측면이 있는데, 시체를 한 번 가매장한 다음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 파내며, 그 뼈를 깨끗하게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뒤 다시 매장하는 복장 형식이었다.[42] 무령왕릉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 도굴됐다.[43] 그러나 고구려에 비해 벽화의 수는 훨씬 적다.[44] 일본 궁중 음악인 '아악(雅楽, 가가쿠)' 중에서 한반도 계통 음악들을 가리킨다. 명칭 자체는 고(구)려악이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에서 전해진 음악들을 통합한 분류이다.[45] 일본으로 술 빚는 방법을 전해준 것도 이 사람이라고 한다.[46] 태학의 설립시기는 6세기 무령왕 시기로 보는 의견(百濟 박사제도의 운용과 변천, 2013, 양기석)과 4세기 후반으로 보는 의견(백제의 태학, 2015, 배재훈)이 갈리고 있다.[47] 단, 적어도 침미다례는 372년 근초고왕 정벌 이전까지, 그리고 충북 일대 목지국 잔여 세력은 최소한 4세기 초반까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나[48] 신찬성씨록 문서에도 나오듯이, 552년에서 800년까지 일본의 주요 지배세력이 백제인 및 한반도인들과 중국인인데 그중 백제인 인구가 훨씬 많았다고 하지만 일본 열도의 당시 전체 인구는 약 800만 명이고, 하니하라 교수는 기원전3세기부터 7세기까지 1천 년 동안 일본에 건너온 한반도 도래인은 1백 50만 명이라고 추정했으나 당시 세계의 인구증가율을 토대로 계산하면 도래인은 3백 2만 명이 된다는 분석치를 제시했다.[49] 일본에서는 이들을 건너온 사람들이란 의미인 '도래인'이라 표기한다. 한반도 입장에서 이들은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므로 도왜인이라고 표기할 수도 있다.[50] 백제 제25대 무령왕(461~523)이 왕도(王都)였던 곰나루(웅진, 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을 치렀다는 사실이 1971년 출토된 무령왕의 ‘묘지명’을 통해 입증되었다. 백제 왕실의 성대한 장례 의식을 왜국에서도 똑같이 거행했다는 것은 당시 나라 지역에 거주하던 백제계 세력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음을 추찰케 한다.[51] 노중국 교수도 당시 '백제의 국서 강탈 사건'을 왜국의 독자적인 대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백제측의 불만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노중국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593년부터 603년까지 왜국과 백제는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나. 603년 이후 614년 사이에(실제로 《일본서기》에서도 602년 10월에서 615년 사이에 약 12년 동안 백제와 왜국의 외교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 당시 쇼토쿠 태자의 관위와 헌법(憲法) 시행과 조례(朝禮) 개정 등 일련의 정책, 607년 수나라에 전해진 왜왕의 국서에 ‘해 뜨는 곳의 천자(日出處天子)’라고 했듯이 왜국이 독자성을 강조한 점 등을 지적하면서(다만, 日出處天子은 당시 고구려 승려 혜자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자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고구려의 의도가 반영된 표현이었다는 입장이 만만치 않다), 국서탈취 사건은 왜국이 선진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 위해 대수 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이에 수나라도 사신을 파견하는 등 호응하는 상황에서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백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52] 물론 실제로는 속국은 커녕 적국이었다.[53] 백제어의 수사(數詞)와 관련하여 미륵사지 목간에서 5-刀士邑도사읍(다섭, 다섯), 7-日古邑일고읍(일곱), 8-今毛邑금모읍(훈독 이털읍, 여덟), 矣毛邑, 新台邑이라는 기록이 발견됐다.[54] 한어(韓語)라고 지칭하고 있다.[55] 백제가 왜국으로 전해준 문화와 기술 중에서는 (기원과는 별개로) 중국에서 전해진 것도 있었기에 일본의 고대 문명을 무작정 폄하하면 한국의 고대 문명도 그저 중국을 따라한 것이냐는 논리에 반박하기 어려워진다. 실제론 한반도와 일본 둘 다 중국 문명의 선도적인 영향을 받으면서도 서로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혐한 우익 일본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일본은 그저 한국을 통해 중국 문물을 받아들인 것 뿐'이라며 한국의 영향을 축소시키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들어온 서구 문물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일본의 영향을 강조하려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인다.[56] 몇만의 군대를 한반도로 파병해도 일본 본토내에선 정권을 위협할만한 큰 안보 위협이 없었다는 것이다.[57] 가장 혁신적인 통치 시스템 발전이었던 과거제도는 중국에서도 아직 생기지 못했지만, 국왕의 정통성을 강화해주는 논리적인 설명과 관료와 감찰 등을 다루는 시스템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58]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달솔 자간(自簡)과 조복(助服), 은솔 무수(武守), 인수(仁守), 그리고 파가(波伽) 등. 이들은 신라의 백제 정벌과 백제부흥운동 당시 투항한 뒤 신라군으로 종군한 백제 출신의 장수들로, 고구려 정벌과 백제부흥운동 진압에 참여하였다. 달솔(達率) 조복(助服)의 경우 전후 고타야군(古陁耶郡), 즉 오늘날 안동시에 해당되는 신라 내지(內地)쪽 지역의 태수(太守)를 역임하기도 하였다.[59] 일례로 나당전쟁의 개전과 함께 김품일, 김문영, 김천존, 김죽지 등을 필두로 한 신라군의 웅진도독부 정벌 당시 옛 백제 수도권이자 핵심지역의 82성(城)이 신라에 의해 순식간에 함락당하면서 성읍의 유력 민호와 하호(下戶)들이 모두 신라 내지(內地)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백제부흥운동 당시 미처 왜국으로 피난하지 못한 부여충지, 부여충승 등 임시수도 주류성의 백제부흥군 수뇌부 일동과 나머지 잔당들도 신라의 포로가 되면서 대가야인들처럼 신라 전역 곳곳에 뿔뿔히 사민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특기할만 건, 문무왕이 백제인들은 포로로 붙잡아두면서도 왜인들은 그대로 풀어줬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신라가 후방인 왜국과의 친선을 도모함으로써 훗날 있을 나당전쟁에 전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60]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등.[61] 백제 왕실인 부여씨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천 서씨도 시조인 서신일이 아찬(阿贊) 관등을 가졌음에도 서라벌과는 거리가 먼 남천주(南川州)의 일대 호족에 불과하였다.[62] 서원경(西原京), 국원경(國原京) 등.[63] 전주 류씨 등.[64] 신평 이씨 등.[65] 상당수가 신라의 탄압을 피해 획을 달리하는 개성(改性)을 통해서 기존의 성씨와 생김새가 유사한 것을 차용한 것으로 보고있다. 왕씨 몰살 당시 왕위에 가까운 왕씨들이 탄압을 피해 성씨를 옥(玉) 등으로 바꾼 것과 같은 맥락이다.[66] 여담으로 백씨(白氏)는 선원선계의 고증을 통해서 이성계와 전주 이씨의 모계 조상으로 자주 확인되고 있는 성씨이기도 하다.[67] 이외에도 백제계 귀족 성씨로 추정되는 성씨로는 길씨(吉氏)가 있다.[68] 미륵 신앙의 거물이자 시조로 평가받는 대성팔족 출신의 백제계 고승인 진표를 회유하고 백제의 고사(古寺)인 금산사를 확장했으며 미륵사 또한 후원하였다.[69] 이연년 형제의 난 문서로.[70] 대량의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왜국의 근본이 되었다는 대중적인 인식을 말한다. 김용운의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같은 책들이 이런 인식을 부추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어마저도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목간을 전후로 하여 신라어가 아닌 백제어의 수사가 현대 한국어와 판박이 수준으로 일치함이 알려지게 되면서 김용운의 주장도 자연스럽게 반박되었다.[71] 삼국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72] 좌평 부여자신(扶餘自信)과 귀실집사(鬼室集斯),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晉水), 억례복류(憶禮福留) 등이 있었으며 이외에도 사택소명(沙宅昭明)이라는 인물도 전해지고 있다.[73] 대표적으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 부여충승, 부여충지 등이 있었다. 다만 부여충승과 부여충지는 주류성의 함락과 함께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74] 멸망 이전부터 가야와 백제는 왜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도래인들이 왜국으로 이주한 바 있다.[75] 더군다나 백제부흥군의 수뇌부는 대부분 나당연합군에 투항한 상황이었다. 지수신이 여전히 지키고 있었던 임존성의 흑치상지나 사타상여는 당나라에 귀순했고, 주류성의 백제부흥군은 신라군의 포로가 된 것이다.[76] 백제부흥운동 당시 백제부흥군 수뇌부는 임시수도를 주류성에서 피성(避城)으로 잠시 천도하는데, 신라군의 진격으로 피성이 위태로워지면서 2달만에 다시금 주류성으로 환도한 바 있었다.[77] 일례로 부여자신(扶餘自信)은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백제인 남녀 700인과 함께 칸자키군(神崎郡) 인근 아후미노쿠니(近江國)로 옮겨졌다.[78] 왜국으로 도피한 백제인들 중에서 가장 높은 관등을 하사받은 부여자신(扶餘自信)은 왜국의 26관위 중 9위인 대금하(大錦下)의 관위를 하사받았다.[79] 오히려 신라의 문무왕은 스물여덟 명의 장수들을 직접 거느리고서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주류성을 몸소 함락시킬 때 붙잡은 왜군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동시에 사절단을 보내 친선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왜국은 이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전개였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면전을 눈앞에 두고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왜국은 방패막이가 없어질 시 당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덕왕이 대당(對唐) 외교를 정상화시킬 때까지 신라와 왜국은 나름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80] 태자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덕장의 딸인 부여태비의 묘도 전해지고 있다.[81] 78호 한정 논란. 83호는 신라의 것이라는 의견이 학계의 중론이고 118호는 공식적으로 고구려의 것으로 공인을 받았다..[82]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백제가 등장한 작품으로, 백제 말엽~삼국통일전쟁 시기를 다루었다.[83] 주인공 중 한 명인 사가노 파트의 주 무대가 백제.[84]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된 픽션 백제의 유민들의 삶을 그려낸 웹툰이다.[85] 주인공인 이누가미 스쿠네가 멸망한지 얼마안된 백제의 왕족이다.[86] 문피아에서 연재된 현대인이 빙의한 부여풍이 삼국통일전쟁 시기를 무대로 활동하는 소설이다.[87] 브릿G에서 연재중인 백제 성왕시기의 일대기를 다룬 역사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