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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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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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부흥운동

660년~
663년

백제부흥운동 ( 부여풍 )

664년

사비산성 반란

822년

김헌창의 난*

900년~
936년

후백제 ( 견훤 )

1237년

이연년 형제의 난
*백제부흥을 표방하진 않았으나 백제 유민들의 분리주의를 이용




백제
百濟

존속기간
660년 ~ 663년
900년 ~ 936년
정치체제
부흥운동(군주제)
주요 인물
지수신
흑치상지
부여풍
귀실복신
부여충승
견훤
이연년
주요 사건
660년 백제 멸망, 부흥 시도
663년 백강구 전투
663년 소멸[1]
900년 후백제 건국
936년 후백제 멸망
1237년 이연년 형제의 난
중심지
주류성[2], 피성[3], 임존성[4], 두량윤성 등
멸망 이전
백제
소멸 이후
통일신라
부흥 이후
후백제
소멸 이후
고려

1. 개요
2. 목록
2.1. 일반적으로 말하는 백제부흥운동
2.1.1. 발단
2.1.2. 전개
2.1.3. 부흥운동 소멸 후
2.1.4. 왕사
2.1.5. 주요 지역
2.1.6. 관련인물
2.1.7. 관련항목
2.2. 후백제
2.2.1. 개요
2.2.2. 후백제와 백제부흥운동과의 연관성 문제
2.3. 이연년 형제의 난
3. 유사사례
4.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삼국시대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멸망한 이후 백제를 부활시키려 했던 일련의 정치적 움직임을 뜻한다. 국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백제부흥운동은 멸망 직후 부여씨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을 일컫는 표현이지만, 후백제나 고려시대의 이연년 형제의 난까지 그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는 신라와의 약조를 깨고 구(舊)백제 지역에 백제도호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통치하여 백제 지역을 당나라의 기미주로 만들려고 했다. 단, 잘못 알려진 바와는 달리 당나라의 초기안이 오히려 백제인들에겐 유리했다. 군사권과 행정권이 일부 제한되고 외교권만 박탈한채 나머지 자치는 인정해주는 체제였으나,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진군하면서 행한 패악질이 워낙에 도에 넘쳤던지라 이는 당나라에게 먼저 포로가 된 의자왕 일가 외엔 나머지 백제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었다. 물론 백제부흥군 중 남은 세력은 신라에게 포섭되어 나당전쟁에서 신라 편에 서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 얘기고, 적어도 백제부흥운동 초반에 백제부흥군의 공격 대상은 당나라와 신라 둘 다였음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한편 신라는 지혜롭게도 백제부흥군과의 과도한 투쟁은 자제하고, 직접 지배 영역을 서서히 늘려 백제부흥군을 천천히 말려죽이는 한편 백제부흥군과 당군 양측의 전력 소모를 기도했고 후술하지만 이 전략은 성공했다.[5][6]

백제부흥운동 지도부는 왜국에 망명해 있던 왕자 부여풍을 군주로 내세웠지만 이후 지도부 사이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내분이 발생하며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2. 목록[편집]



2.1. 일반적으로 말하는 백제부흥운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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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발단[편집]


660년 백제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한 이후 의자왕사비성에서 빠져나와 도망가자 사비성에선 부여태가 왕을 자칭한 다음 사비성을 지키려 했으나 함락되었고 며칠 후인 7월 18일 웅진성까지 함락되면서 백제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 도독부 및 백제도호부를 설치하게 된다. 다만 아직 이 단계에서는 백제 고토에 제대로 된 통치를 한 적은 없었고 당나라 군대가 딱히 신라군보다 더한 행패는 부렸는지 도저히 알 길은 없으나, 나당 연합군이 사비도성을 함락한 직후 단계에서 엄청난 학살, 약탈, 강간 등의 만행을 저질렀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도침, 귀실복신 등과 오간 서신과 이후 선동에서 이들이 백제부흥의 대의로 주로 들고 있는 얘기는, 사비성에서 벌어진 참극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사비성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연합군의 손을 용케 벗어난 난민들이 백제 전역으로 달아나 소문을 퍼뜨린 게 봉기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걸로 추측된다.[7] 이에 백제의 잔존 세력들이 백제의 부흥을 시도하게 된다. 귀실복신과 도침 등은 백제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고 에 있던 백제의 왕족 을 왕으로 추대하여 당나라와 맞서 싸웠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역은 초반에는 주로 사비성 인근을 중심으로 한 금강 서부 지역 일대였다. 이후 부흥 운동이 점차 커지면서 신라 쪽 국경 인근 지역이나 전북 일대도 부흥군에 호응하게 된다. 전남 지역은 거병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어서 전투는 비교적 적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신라나 당이나 지배 조직은 어디까지나 명목이었지 세금이나 인력 징발은 나당전쟁 단계 이전까진 제대로 하질 못하고 있었으므로, 부흥군이 활동하지 않은 지역들 또한 소극적인 저항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부흥 운동의 당면한 목표는 사비와 웅진에 각기 백제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꾸려서 웅거한 당나라 잔존 군대의 축출 혹은 몰살이었고, 신라는 사비 함락 후 군대를 물려 백제와의 옛 국경 지대부터 먹어 들어가고 있었으니 부흥 운동의 주적은 당군이었던 게 맞지만, 신라 또한 초반에는 당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했다. 백제 멸망 직후 당군이 웅진과 사비 등지에서 거의 고사 일보직전에 몰리고 아예 사비성을 포기해버릴 단계에선 신라도 당군을 꽤 적극적으로 돕기도 했다. 신라가 당군에 대해 품은 불신을 현실로 나타내서 지원에 소극적으로 나오게 되는 건, 당나라가 약조를 깨고 백제에 5도독부를 설치한 이후다. 일단 그 단계부터 신라는 당나라군과 직접 연합 작전을 펼치기를 꺼리고 주로 변경 지대에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펼치며 해당 지역을 신라 직할 영토로 삼으며 실리를 챙겼다.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백제부흥운동 막판에 가서야 연합하여 본거지인 임존성 함락전을 펼치고 백강 전투를 치루게 된다.

2.1.2. 전개[편집]


충북대 양기석 교수는 백제부흥운동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누었다.

  • 제1기 : 660년 8월부터 661년 8월까지. 좌평 정무, 달솔 부여자신, 귀실복신 등이 백제유민을 규합해 초기 부흥군을 이끌고 나당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시기다.
  • 제2기 : 661년 9월부터 663년 2월까지. 왜국에 체류하던 부여풍이 귀국해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 신라의 2차 대공세가 시작될 때까지다. 백제부흥군은 풍왕을 옹립해 정통성을 확보했고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당연합군의 군량보급로를 차단하였다.
  • 제3기 : 663년 3월부터 664년 3월까지. 부흥군 지도층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백강 전투 패배, 주류성과 임존성 함락 등 백제부흥군이 몰락한 최후 항전기다. 마지막은 664년 3월 일어난 사비산성의 봉기다.

660년 8월 2일에 공식적으로 의자왕의 항복식이 열렸으나, 그 순간에도 좌평 정무 등이 이끄는 부흥군이 부여 외곽의 석성산성, 왕흥사잠성 등에서 농성하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통 태종 무열왕은 전쟁을 장수한테 맡기는 편이었는데 이 때는 상황이 급하다 느꼈는지 직접 신라군을 이끌고 11월까지 이례성, 왕흥사잠성 등 부여 근처의 백제부흥군을 토벌했다. 11월 중순 백제부흥군의 기세가 한 풀 꺾였다 보았는지 무열왕은 장수들에게 백제 땅을 맡기고 서라벌로 돌아갔지만 사비 바깥의 서천, 청양, 논산 같은 각 지방에서는 백제부흥군이 순조롭게 힘을 모았고 661년 2월 들어 다시 사비성에 본격적인 공격을 재개한다.

백제부흥군은 초반에는 꽤 좋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약 10일만에 200개의 성을 탈환하는 기염을 토하는 한편 왜국과 힘을 합쳐 웅진도독부의 아성이자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포위하여 당나라 군대의 보급을 끊어버리고 당나라 군대가 철수를 고려하기까지 했던 저력을 보여주었기 때문. 이 단계에서 백제도호부는 설치된 지 1년도 못가서 없어지고 웅진도독부만 남게 된다. 신라에서도 장수들이 지고 돌아온 자가 많아 벌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661년은 백제부흥군의 전성기였다. 게다가 고구려도 660년 말부터 뇌음신 장군을 지휘관으로 해서 신라 북쪽 한강 유역을 줄기차게 공격해(칠중성 전투, 북한산성 전투) 백제 땅에 신라군 정예가 쏠려있는 상황에서 후방 견제해주어 백제부흥군에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모든 백제 유민의 힘이 합쳐지지 못해 충상, 상영, 자간 등은 신라군에, 부여융 등은 당나라 웅진도독부 소속으로 들어가 부흥군과 싸웠다. 이는 전력 누수이기도 하고, 백제의 왕자나 고위 대신이었던 이런 자들이 부흥군의 적으로 등장한 상황은 부흥군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곧이어 당나라 본토에서 토벌군이 순차적으로 파견되면서 전세가 뒤바뀌기 시작한다. 당나라의 증원군은 육로가 아닌 수군으로 주로 파견되어 신속하게 백제 땅에 도착했다. 의자왕의 맏아들이자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도 당나라군의 지휘관이 되어 돌아와 유인궤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토벌하는 당나라군을 이끌었다(...) 고구려도 661년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이 벌어지자 백제를 지원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부흥군 내에서 부여풍과, 귀실복신도침 등 부흥운동 지도자 간에 내분이 벌어졌다. 《일본서기》에는 부흥운동 세력의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내분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8]

, 에치노하타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9]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10]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하타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그러나 이 당시 부여풍은 실권이 거의 없이 귀실복신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던 시절이라, 사실 저 천도안은 귀실복신 혼자의 주장이었을 개연성이 높고, 부여풍의 뒷배였던 일본군 장수가 반대 의견을 내놓은 게 실은 부여풍의 의중이었을 소지가 높다. 부여풍과 귀실복신 간의 대립은 부흥운동의 노선 갈등이 원인이었다. 부여풍은 되도록 일본측에 외교력을 집중해서 일본의 원군을 더 많이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부여풍이 데려오는 일본 군세가 많아질수록 영향력이 떨어지는 귀실복신 입장에서 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이 있었는데, 일단 부여풍이 백제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장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천황에게 책봉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부흥군 장수들이 눈물을 흘리는 사건이 있었다. 부여풍이야 일본의 지원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필요악으로 여겼겠지만, 다른 부흥군 장수들이 보기엔 이건 백제사에서 단 한 번도 벌어진 바 없는, 그 아신왕도 광개토대왕한테 해본 바 없는 대굴욕이었다. 귀실복신에게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귀실복신에게 문제는 없었는가? 귀실복신은 백제에서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명망이 높았던 고승 도침을 살해하고 그 병력을 빼앗은 바 있었는데[11], 이렇다 할 구실도 없었고 순전히 그냥 본인의 권력욕과 야심이 이유였다. 이 사건 때문에 부흥군 내부의 결속이 흔들려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동구(대전) 일대의 중요한 산성과 요새들을 죄다 신라에게 빼앗겨 원군과 식량 보급을 웅진성의 당군에게 허락하는 바람에, 웅진성 탈환에 실패하는 큰 군사적 실패를 겪은 바 있었다.[12] 이와 같은 사정은 나당 연합군에게도 잘 알려져 공개적으로도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판이었다. 부흥 운동 중간에 전남북 일대는 물론이고 충남에서도 적지 않은 성이 당군이나 신라군에게 순순히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건 이 원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결국 귀실복신은 파견나온 왜국측 지원군 장수들의 의견을 씹고 자기 뜻대로 피성(避城)[13]이란 곳을 부흥운동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천도한 직후에 김흠순천존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 남부로 쳐들어와 지금의 전라북도 동부 및 경상남도 서부인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을 함락시키는 사태가 벌어지고,[14]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4개성을 신라에 빼앗긴 후 피성과 국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위험했으므로 결국 2달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하게 된다.[15]

(663년) 2월에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한 [백제의]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 7십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2년(663) 봄 2월 乙酉 초하루 丙戌 백제가 달솔 금수(金受)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개주를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安德)[16]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피성(避城)이 적과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주류성에 돌아와 살았으니, 타쿠츠(田來津)[17]가 헤아린 바와 같았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이런 진행 과정에서 귀실복신이 먼저 선수쳐 풍왕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돼서 풍왕이 귀실복신을 처형해버렸다. 기록에 의하면 귀실복신이 (본인이) 병이 났다는 것을 핑계로 거짓말하면서 누워 있었다가 풍왕이 병문안을 오면 죽여버리려고 했다가, 오히려 발각되는 바람에 본인이 먼저 처형돼 버렸다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패턴은 귀실복신이 도침을 죽인 실수와 정확히 일치했다. 바로 이 사건 직후 신라군이 대전 유성구-서구 일대에서 여전히 웅진으로의 보급을 방해하던 백제군 요새들을 모조리 함락하면서 오늘날의 대전 전체를 완전 장악했고, 그것은 옛 백제 핵심지에 웅거한 당군의 보급에 방해될 요소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뜻했다. 이후 풍왕은 왜국의 구원군과 함께 나당연합군과 백강 전투를 치르는데, 이 백강 전투에 이와 같은 대실패가 크게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결국 백제부흥군은 대패하여 부여풍고구려로 망명하였고, 부여자신 등은 왜군과 함께 왜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구심점인 왕이 사라지자 남아있던 다른 지역의 백제부흥군도 사기가 꺾이고, 부흥군도 서로 갈라져버려 따로 버티고 있던 흑치상지당나라로 망명하였으며 지수신은 홀로 부흥운동을 진행하다 고구려로 망명, 마지막까지 저항한 주류성임존성은 함락되고 부흥운동도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664년 3월 사비산성에서 백제부흥군 잔당들이 봉기를 일으켰지만, 웅진도독 부여융에게 진압당했다.[18]

일단 이 시점에서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고, 백제의 수도권은 당나라의 지배를 받는 웅진도독 부여융이 다스리고 그 외 백제 외곽의 각 지방은 신라군이 차지한 상태가 된다.[19] 남은 백제의 잔존세력은 왜국이나 고구려로 도주하거나 신라당나라의 괴뢰국이라 할 수 있는 웅진도독부에 붙어 나당전쟁에서 서로 싸우게 된다.

2.1.3. 부흥운동 소멸 후[편집]


나당전쟁 종결로 패배한 웅진도독부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일단 백제 왕실이 주도하는 백제 부흥운동은 끝나게 된다.[20]

신라는 백제인에게 신라 관등을 주고 신라 지방 지배층의 일부로 편입시켰다.[21] 문무왕 13년인 673년 백제인에게 수도와 지방[內外]의 벼슬을 주었는데 그 관등(官等)을 백제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주었다. 경관(京官)인 신라의 대나마(大奈麻)는 본국(백제)의 달솔(達率)이었으므로 대나마에 임명하였다.

흔히 백제 유민에게 주어진 최고 관등이 5두품이라는 점에서 진골까지 준 고구려계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은 일단 사실이다. 고구려계, 백제계 모두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주려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백제계 귀족들이 신라가 주는 벼슬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나라가 혹시 있을지 모를 부흥운동의 씨앗을 차단하기 위해 사비성에 있던 백제 왕족들은 모조리 당나라로 압송했고, 나머지 왕족들 중 왜국으로 도피한 부류도 많았지만 상당수는 탈출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후 떠나지 않고 머무르고 있었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부여풍을 데려온 건 본토에 왕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자왕의 아들, 즉 정통성이 가장 강한 왕자가 그 뿐이어서지 사비성 함락 후 백제 왕족이나 귀족이 다 증발해서인 건 아니었다. 나머지 고위 귀족들이 왜국으로 집단 도주하긴 했으나 그 규모가 수십만을 헤아린다는 건 근거 없는 추측이다. 이와 더불어 애초에 항해술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고 정세가 혼란했던 당대의 상황을 감안하면 고위 귀족들을 포함한 수십만 명의 백제 유민이 중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신라를 피해 대한해협을 건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장 백강 전투만 봐도 왜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선 천 척과 함께 투입한 병력의 최대 추정치는 4만, 최소 추정치는 2만 7천을 왔다갔다하고 있다. 이들이 궤멸된 상황에서 다시 왜국으로 돌아갈 선박도 엄청나게 불태워진 상황이었다. 전투의 생존자들이 꽤 많이 도주했지만 다는 못가고 상당수는 남은 게 확실하다. 신라가 부흥운동 진압 과정에서 기회만 되면 대단히 많은 백제인을 원신라 지역으로 사민했던 것도 특기할 일이다.

그렇다면 백제계 성씨들은 이후 다 어떻게 된 것일까? 통일신라 시대에 성씨를 쓸 수 있었던 건 6두품 이상이었는데, 남은 백제계 귀족이나 세력가들은 6두품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씨를 아예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원래의 지위에 맞게 관품을 받은 건 저항하다가 항복해서 의자왕 시절 다스리던 고을의 태수로 그대로 임명받은 몇 가지 예외 외엔 거의 없었고, 나중가선 아예 백제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했더라도 품계는 5두품으로 한정되어 적용받게 된다. 백제 출신으로 신라에 투항하여 장군으로 맹활약한 상영(常永), 충상(忠常), 자간(自簡) 같은 백제인들은 과거 백제 16관등 중 1순위인 좌평이나 2순위인 달솔의 벼슬을 가지고 있었던 고위 귀족들이었음에도 투항 후 비교적 낮은 경위 6등 아찬이나 경위 7등 일길찬의 관등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마저도 다른 조치들에 비하면 꽤 우대받은 케이스일 정도. 고안승(高安勝), 고연무(高延武)를 따라 신라에 합류한 고구려 유민들도 신분을 막론하고 신라계가 아니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높은 관등을 제수받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직 가야 금관국의 왕족인 김해 김씨들이 거리낌없이 신라 지배층에 사실상 수용된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그리고 심지어 이들도 신라 하대로 가면서 뒤를 봐주던 무열왕계가 권력을 잃고 내물왕계가 집권하게 되자 권력층에서 밀려나게 된다.

사서가 아닌 족보상의 기록이긴 하지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을 본관으로 하는 신평 이씨(新平 李氏)의 기록을 보면 백제 멸망 이후 백제계 귀족 및 호족 가문들이 대략 어떻게 역사를 거쳐왔는지가 얼핏 보인다. 신평 이씨의 시조는 백제 사평현(沙平縣)의 호족이었던 이인수(李仁壽)로 이인수의 아들인 이주(李珠) 역시 백제의 호족이었고 이주의 증손자 이석덕(李碩德)은 신라의 지방관을 지냈다고 한다. 전라북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전주 류씨(全州 柳氏) 또한 삼국시대부터 이미 백제의 호족이었다고 추정되는데 류방헌(柳邦憲) 묘지명(墓誌銘)에 따르면 증조부 류기휴(柳基休)는 신라의 지방관을 지냈고 조부 류법반(柳法攀)은 후백제(百濟)의 우장군(右將軍)이었으며 아버지인 류윤겸(柳潤謙) 때 고려에 귀의해 대감(大監)을 지냈다고 한다. 류방헌의 어머니인 승화군대부인(承化郡大夫人) 담양 이씨(潭陽 李氏)는 신검의 정변을 예견하고 몸을 숨긴 이염악(李廉岳)의 딸이라 하는데 전라남도 담양군이 본관인 담양 이씨는 신평 이씨에서 분관한 가문으로 역시 백제계 가문이었다. 즉 왕국이 두 개나 멸망하는 혼돈 속에서 고구려나 백제의 호족들은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머나먼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아니면 본거지에 그대로 남아 새로운 당나라, 발해 혹은 신라 정부에 충성하여 원래 영역의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으며 남북국시대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에는 백제계 호족들이 후백제의 관직을 역임하거나 신검의 정변에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각자 지역에 따라 새로운 정권인 고려나 후백제나 요나라에 충성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라인 갈아타기에 몰두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사서에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적게나마 기록된 모습만으로도 많은 연구자들의 예상처럼 삼국시대 토착민의 후예들이 변화하는 상황과 시대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음이 드러난다.


2.1.4. 왕사[편집]


대수
왕호

재위기간
비고
32대
풍왕(豐王)

660년 ~ 663년
백제 31대 의자왕을 계승했다고 자처. 풍장왕(豊障王)이라는 이칭이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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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주요 지역[편집]


  • 주류성 - 백제왕 부여풍이 전시 수도로 삼은 성. 오늘날의 위치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 피성 - 주류성에서 이 곳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라군의 공세로 실패. 오늘날의 전라북도 김제시 등으로 비정된다.
  • 정현 - 진현성
  • 두량윤성 - 좌평 정무가 지켰다.
  • 임존성 - 지수신, 흑치상지 등이 지켰다.
  • 구마노리성 - 좌평 부여자신이 지켰다.
  • 남잠, 이례성 - 부여 금성산
  • 왕흥사잠성 - 부여군 울성산성
  • 궁례성- 위치미상. 백강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인들과 일본 수군이 궁례성에 잠깐 있다가 일본으로 향했다.

2.1.6. 관련인물[편집]



2.1.7. 관련항목[편집]




2.2. 후백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후백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1. 개요[편집]


통일신라는 백제 유민들을 체제의 한계 탓에 온전히 신라인으로 포섭하는데는 끝내 실패했고 결국 백제는 망한지 약 230년 만에 다름아닌 신라 장수의 손으로 이 땅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견훤 이전에 김헌창의 난에서 엿볼 수 있듯 백제지역은 유민의식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으며 김헌창은 무열왕계가 백제지역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들을 근거로 백제지역의 민심을 얻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는등 폭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직 여력이 남았던 신라조정과 김헌창의 낮은 군사적 식견이 겹쳐저서 규모에 맞지 않게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는 견훤이 백제건국에 있어서 참고할만한 좋은 사례가 되었다.[22]

880년대 말부터 이 지역에서 크게 세력을 모아왔던 견훤은 마침내 892년 왕을 칭하고 수천 명의 세력을 모아 군사(반란)를 일으켰다. 칭왕 8년 후인 900년 견훤은 백제 계승을 주장하며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23]

견훤의 후백제는 단순히 편의상으로 붙이는 명칭에 지나지 않으며 당대의 정식 국호는 그냥 백제였다. 역사에 익숙하지 못해 한반도 국가들이 본디부터 하나였다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일쑤인 현대 한국인들은 이러한 망한 나라의 재등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나, 정체성이 완전히 죽지 않으면 망한 나라는 백년이든 이백년이든 계속 다시 등장하며 오히려 이런 경우가 흔한 사례에 속한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다름 아닌 신라도 망한지 백수십 년 뒤에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세계로 발을 넓히면 그리스, 아일랜드, 베트남, 이스라엘 등이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물론 9세기 후반 신라 말기에 진성여왕 등의 실정으로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고 지방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유력 호족들이 독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분위기 가운데 송악궁예와 더불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광주에 부임한 무관 출신으로서 세력을 키운 견훤이 깃발을 들어올려 후백제 건국이 가능했던 건 맞지만, 그러한 중앙 정권에 대한 도전이 왜 망한 나라의 이름을 붙여서 일어났어야 했는가? 그때까지도 유민 의식이 불식되지 못한 채 그 영역 속에 깊게 남아 있었기에 설득력이 있어서 다름아닌 신라 장수 출신인 견훤이 야심을 그러한 식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24] 백제 유민들의 부흥 운동과는 '전혀 시대적으로 다른 것'이란 견해는 망한 나라를 부활시키려면 모름지기 망한지 시간이 얼마 안 지나야 한다는 대단히 자의적인 전제를 깔고 하는 주장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신라 정부에 크게 대항한다면 구태여 백제의 이름을 차용하지 않고도 방법은 많았는데 굳이 그걸 택하는 것 자체가 백제인, 고구려인 등이 완전히 신라에 통합되지 못했음을 상징한다.

국적이나 소속만으로 보면 후백제의 구성원은 전부 신라인이고 태봉의 구성원 역시 대부분 신라인이었던 건 맞지만,[25] 그런 식이면 해방 직후 한국인들은 온전한 '조선인'이 아닌 다 국적이 일본 제국인 사람들이었다. 동로마 제국에게서 이백 년만에 나라를 찾은 불가리아 역시 비슷한 예시이다. 현상적인 국적만으로 보면 주모자는 그리스계였던 데다 주민은 얼마 전까지 동로마군에 복무하기도 했던 불가리아계 동로마인들이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어디까지나 원나라 사람이었으며 주원장 자신도 스스로가 원나라 황실에게 나름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했으나, 그렇다고 한족 중흥을 포기하진 않았다. 역사는 한 번 주역이 플레이에 실패하면 끝나는 오락실 게임 같은 게 아니고, 후세 누군가의 괴이한 국적 관념으로 재단될 수 있지도 않다.

여기서 하나 주목할 점은 영산강 유역, 즉 옛 침미다례 일대가 견훤의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인데, 그 이유는 있지도 않았던 마한의 반백제 정체성에 있지 않다. 영산강 유역 일대를 자꾸 전남이라고 오해하는데, 해당 세력은 그 최전성기인 한성백제 공함 직후에도 전남 ⅓밖에 차지하지 못한 데다 다른 전남 일대의 두 세력은 백제에 대한 노선에서 영산강 유역 세력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해 관계가 전혀 달랐다. 영산강 유역 세력과 마한, 백제 그리고 전남에 위치했던 다른 두 세력권과의 관계는 마한, 침미다례, 나주 공방전 문서 참조.

그리고 다른 주목할 점은 반신라 감정이란 면에선 오히려 영산강 유역 세력이 더했음이다. 일단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적어도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이뤄지기 전에 전남 일대는 세 다른 고고학적 계통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이 구분은 마한의 원래 수장국 목지국이 백제국에게 타도되어 나머지 마한 구성국이 그 향보를 결정해야 했던 3세기 후반부터 적어도 칠백 년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백제국 같은 경우 일본 전방후원분 세력까지 끌어들였다가 나중엔 가야한테도 손을 뻗는 침미다례를 제압하기 위해 일단은 전남 광주를 거점으로 키웠다가, 가야로 넘어가버린 전남 동부 섬진강 일대를 제압한 다음에는 침미다례에 전폭적인 지원과 회유를 거쳐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성했었다. 즉 그전에는 각기 따로 놀던 전남 일대가 한 국가 안에 전부 한 묶음으로 직접 지배 지역으로 묶인 적은 6세기 초의 웅진백제 시기, 정확히는 무령왕 재위기로 추정된다. 그러니 전남의 마한 VS 충청, 전북의 백제 구도는 아예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고, 통일신라 내 백제 유민 VS 통일신라와의 관계와도 전혀 비교될 수가 없다.

이후로는 통일신라가 해당 지역을 접수하면서 백제보다 강력한 직접 지배력을 관철하게 되는데, 이 단계가 되면 오히려 전남 일대 토착 세력들은 전부 기득권이 백제 시절보다 못하게 떨어지는 것이었다. 헌데 얄궂게도 이 과정에서 통일신라 또한 옛 백제와 똑같은 행보를 밟게 된다는 것. 통일신라 또한 원신라인들을 주로 섬진강 유역 일대, 광주 일대에 사민시키면서 해당 지역을 육성하는데, 이는 옛 마한 시기부터 독자성이 강해서 백제 또한 포섭에 애먹었던 영산강 유역 일대를 길들이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영산강 유역 일대의 반견훤 정서는 거꾸로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견훤은 백제부흥을 외쳤으며 그 구호가 적어도 옛 백제의 전역에 설득력을 발휘하였으나, 영산강 유역 세력 입장에서 보기엔 통일신라 때부터 이어왔던 재미없는 기조가 지속됨을 뜻했다. 게다가 견훤 자체가 원신라 지역 출신인 신라 장수였으니, 그들은 통일신라 시절과 마찬가지로 전남 중부 내륙부 및 동부 섬진강 유역의 기득권을 더욱 우선시하는 견훤의 백제부흥운동 따위에는 결코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26] 그렇다고 자신들을 보호해줄 힘도 없는데다 옛 백제보다도 호감이 적었던 신라에 충성한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가 없었으니, 영산강 유역 세력의 선택지는 태봉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견훤 자체는 백제 부흥을 한다고 하면서도,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는 충남 공주, 부여 일대보다는 경상도를 장악해서 신라 쪽으로만 진출하려 하였으니 영산강 유역 세력의 선택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견훤도 백제왕 노릇을 하도 오래하다보니 나름대로 신라 정규군 장수 티를 극복하긴 하지만, 적어도 거병 초반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2.2.2. 후백제와 백제부흥운동과의 연관성 문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후백제와 백제부흥운동과의 연관성 문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통일신라는 다른 국가에선 유례없는 민족융화정책을 실시하였으니 후백제는 백제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저 백제의 이름값을 활용해 신라인들이 세운 나라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제대로 된 역사 해석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한 조치가 다른 국가에서 유례없다는 주장 역시 근거가 없는 것으로 세계사적으로 살펴보면 신라의 민족융화정책과 비슷한 사례는 차고 넘치게 많다.

어느 나라나 타국을 지배해서 완전히 본국의 영역으로 삼고 싶으면 점령한 타국 기득권층의 반발은 잠깐 억누르거나 설득하면서 해당 국가의 지배층에게 상당한 특권과 이득을 보장한다. 페르시아고대 로마도, 헬레니즘 제국은 물론이고 그 불가리아 제국도 부활에 성공한 직후 그리스계에게 딱히 축출과 보복을 단행하는 일은 없었다.[27] 한일합방 이후 일본 제국도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한 조선의 왕족기득권층에게는 좋은 대우를 보장하였다.

왕족 일부는 그렇다치더라도 모든 지배층이 타국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는 가설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 역시 이러한 주장의 모순점이다. 당나라보다 더 악독하게 현지 지배층의 소멸에 열을 올린 아시리아바빌로니아의 경우도 이스라엘 왕국이나 유다 왕국에서 옮길 수 있었던 비율은 겨우 20%에 불과했고 상류층이나 지방 지배층도 상당 부분 세력을 유지했던 게 고고학적, 문헌적 조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신라에서 5두품 정도는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백제 귀족층이 통째로 도망가 아예 없어졌다고 단정하는 건 그냥 틀린 소리에 불과하다. 더불어 사방이 신라의 영토와 바다로 둘러싸인 백제에서 육로나 배편으로 그들을 모두 옮길 수 있을리도 만무하다.

게다가 백제의 지배층을 어느정도 대우해주는 정책도 문무왕 때에 한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족융화적인 조치와 기조는 통일신라 내내 지속되지 않았다. 삼국통일의 공이 있던 김유신 계열마저도 결국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는 정도였으니 옛 백제나 옛 고구려 지역에서 성장하는 지방 호족 세력이 신라라는 국가의 향방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런식으로 차별하며 민족융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후백제가 생기고 태봉이 일어났던 것이며, 다름아닌 중앙 정계에서 밀린 신라의 옛 김씨, 박씨 왕족들마저 신라를 저버리고 과거에 망한 나라들에게 충성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방에 이식된 옛 왕족마저 본국을 버리는 경우가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드문 케이스다. 역사의 섣부른 해석이 이렇게 위험하다.[28]

2.3. 이연년 형제의 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연년 형제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후백제가 멸망하고 300년이 지난 후, 여몽전쟁이 한창이던 고려 1236년에 전라도 담양[29]에서 이연년 형제가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경손의 고려 관군에게 진압되었고, 이를 마지막으로 백제부흥운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최씨 무신정권의 수탈이었으나, 그 명분이 백제 부흥으로 나타났다는 건 여전히 백제 유민 의식이 남아있었음을 나타낸다.[30]

물론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지방 세력을 나름대로 인정하였으며 오히려 통일신라보다도 삼한일통의 대의에 충실했기에 이 백제부흥운동은 그 전에 일어난 두 시기의 백제 부흥운동과 비교하면 성공과 호응도가 확실히 처져 단발로 끝나버렸지만 그걸 이유로 부흥운동이 아니라곤 할 수 없다. 어차피 모든 부흥운동은 지배국의 학정이나 정당하지 못한 통치 행위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직접적인 원인은, 이연년 형제의 조상이 후백제에서 견훤에게 후대를 받았으나 후백제가 망한 후론 바로 그 이유로 별 재미를 보지 못했음이 주된 이유로 지적된다. 굳이 말하면 직접적인 정체성은 후백제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후백제는 분명히 국호가 백제였고, 백제부흥운동의 결과로 통일신라에게서 떨어져나가 재건된 백제였기에 역시 백제유민의식이 이유 중 하나라고 보는 게 옳다.

3. 유사사례[편집]




4. 같이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30 08:04:46에 나무위키 백제부흥운동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664년 사비성 봉기도 있었지만 백제부흥운동 지도부 자체는 백강구 전투로 괴멸되었기에 663년을 종결 시점으로 본다.[2] 부흥운동 대부분 기간 동안 구심점이던 부여풍 정부의 거점이었다. 학계에서는 주류성을 현 전라북도 부안군에 위치한 우금산성으로 보고있다.[3]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천도를 시도했으나 신라군의 공세로 전선에서 너무 가까워져 2달만에 주류성으로 되돌아갔다 학계에서는 피성을 현 전라북도 김제시에 위치한 성산성으로 보고있다.[4] 흑치상지 등이 거점으로 사용했다. 학계에서는 임존성을 현 충청남도 예산군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있다.[5] 물론 백제 부흥운동 주체가 나라를 부활시키기도 전에 주도권을 놓고 다퉈서 자중지란에 빠진 게 가장 원인이 컸지만, 설령 목표대로 당군을 소멸시켰어도 대신라 국경에서 요충지들을 너무 많이 잃은 백제가 이후 신라를 상대로 얼마나 버텼을진 미지수다.[6] 훗날 후백제를 상대하던 신라가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렸던 이유는 추풍령 요새 일대를 처음부터 죄다 잃고 시작하는 황당한 차포 떼고 게임하기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백제부흥세력 또한 겉으로는 당군을 향한 투쟁에 성공하는 것 같아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 전성기 때도 신라군이 대전으로부터 차근차근 주요 요충지를 장악하던 중이었다.[7] 충청남도백제문화연구원 백제 멸망 편 참조.[8]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9]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다. 타쿠츠는 후에 백강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10]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11] 물론 부여풍에게도 보고도 없이 독단으로.[12] 이때 있었던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옹산성 전투로 김유신이 직접 투항을 권유하였으나 성주가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 패배해 수천 명이 죽고나서야 항복한다. 옹산성은 현재 계족산에 위치한 계족산성으로 비정된다.[13]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등으로 비정된다.[14] 백제부흥군의 4개성을 신라군이 점령한 것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나온다.[15] 반파국(대가야)이 예전에 백제가 어려울 때 진출했던 그 영역들이기도 했다.[16] 현재 위치는 불명이나 백제 5방중 한곳인 덕안(德安)의 오기로 보고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7] 왜군을 이끌고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한 왜측 장수.[18] 3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사비산성(泗沘山城: 현재 부소산성)에 머물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웅진(熊津) 도독(都督)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깨뜨렸다.(三月, 百濟殘衆據泗沘山城叛 , 熊州都督發兵, 攻破之. -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6 문무왕)[19] 정확한 정세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지금의 대전광역시 와 그 주변 그리고 전라북도 상당부분은 부흥전쟁 직후 신라 점령지였다. 이후 나당전쟁 때 당군을 몰아내면서 백제 영역 전체를 신라가 차지하게 된다.[20] 이후 웅진도독부의 친당 백제부흥세력은 고구려 건안성에서 잔존하다가 발해 건국기에 궤멸하여 자취를 감춘다. 자세한 내용은 웅진도독부 문서 참조[21] 삼국사기 직관지 신라 외관, 국보 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명문[22] 당시 분위기는 통일신라가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다. 구)고구려 지역의 호족들은 누가 이기나 방관하였으며 장안국은 백제뿐만 아니라 가야지역까지 장악하여 신라는 구)진한 영역에서만 병력을 동원할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공불락이라던 삼년산성까지 반란에 동참하기까지 하였다.[23] 초기 8년 동안 국호를 따로이 칭하지 않았던 이유는 견훤이 워낙 신라 장수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인물이었기에 신라 조정으로부터 모종의 대우나 교섭을 기대했을 거란 지적이 대두 중이다. 심지어 견훤은 초기 칭호 중 신라 대장군이란 의미의 '도통'이란 칭호를 백제왕이란 타이틀보다 중요시하는 기이한 모습을 꽤 오랫동안 보인다.[24] 신빙성은 낮지만 견훤의 후손이 지은 『이비가기(李碑家記)』란 책의 경우 견훤이 아예 진흥왕의 먼 후손으로 나온다. 다만 의자왕의 후손이라는 전승도 있다. 물론 이것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이고 인구 이동 등까지도 고려하면 견훤의 정확한 출자는 불명이다.[25] 태봉의 경우 후에 말갈인, 발해인 등도 상당수 받아들이게 된다.[26] 적어도 이는 그전 부여씨 백제 때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때도 처음에는 광주 일대부터 백제에게 포섭되기 시작하였으나 통일신라, 후백제 때처럼 직간접적 견제 시도는 없었고, 고고학적으로는 영산강 유역이 부여씨 백제로부터 오히려 더욱 많은 후대를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27] 스파르타의 전통은 그리스가 완전히 점령당한 헬레니즘 제국 때는 물론 로마 제국 때도 유지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아예 로마화된 그리스인들이 기반이 되어서 유지되었고 그래서 그리스어가 공용어였다.[28] 나말여초 정치제도사, 충청남도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 중 백제 유민 권 참조. 다만 후자는 비매품이기에 도서관에서 참조해야 한다.[29]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30] 이 난은 백제~후백제의 중심지였던 충남ㆍ전북 일대가 아닌 전남 끄트머리인 담양에서 발생했다. 전라도 내에서도 전북과 달리 전남은 백제와 전혀 관계없다는 일부의 인식을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