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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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백초월.jpg

1940년 5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아명
백학명(白學明)
본명
백인영(白寅榮)
이명
백최승(白最勝)·백의수(白義洙)
법호
초월(初月)
법명
동조(東照)

구국당(龜國堂)
본관
수원 백씨[1]
출생
1878년 2월 17일
경상도 진주목 영이곡면 성곡리
(현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 금산마을)[2]
사망
1944년 6월 29일 (향년 66세)
충청북도 청주군 청주읍 탑동정 대전형무소 청주지소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탑동)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48판-8면-109호[3]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일생
3. 미디어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승려. 불교계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일생[편집]


백초월은 1878년 2월 17일 경상도 진주목 영이곡면 성곡리(현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 금산마을)에서 아버지 백하진(白河鎭)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두해(金斗海)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백학수(白學洙), 아래로 동생 백규수(白圭洙)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가족들과 함께 진주목 지공면 여물동(현 진주시 정촌면 관봉리)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고,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4]

1890년 14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지리산 영원사에서 주지 이남파(李南坡)의 상좌가 되었는데, 30대의 나이에 고승이 될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던 중 지리산 부근의 의병 활동을 목격하고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불교계를 이끌던 한용운백용성이 체포되자, 초월은 그들의 뒤를 이어서 「승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의용승군제를 추진했다. 또 중앙학림(현재 동국대학교) 안에 한국민단 본부를 설치하여 독립군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을 모았고,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하였다. 또한 단군 건국일을 기념하고 3.1 운동 1주년 만세운동, 일본의회 독립청원 등의 활동도 펼쳤다. 그리하여 1919년과 1920년에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한편, 초월은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항일 이념을 알렸는데, 특히 새내기 승려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그는 일심(一心)이라는 사상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모두의 마음을 합쳐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독립운동 사상인 '일심교'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심회(一心會)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일제가 중일전쟁으로 침략을 시도하자, 초월은 만주행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써넣는 거사를 주도했다.[5] 이 일로 그와 일심회 회원들들이 체포되었고, 1940년 10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50일 통산)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3년 3월 3일 출옥한 후에도 군자금 모집에 힘쓰다가 재차 투옥되었고, 1944년 6월 29일 충청북도 청주군 청주읍 탑동정(현 청주시 상당구 탑동) 대전형무소 청주지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용운 선생도 같은 날짜에 순국하였다고 한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본래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 청주형무소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50년 6.25 전쟁 이후 소실되어 현재 그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만 2017년 9월 4일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가 봉안되었다.

3. 미디어[편집]


다음에서 초월의 이야기를 주제로 웹툰이 연재되었고 5화로 완결되었다. 그림은 이현세, 글은 이상훈
초월(初月)

오마이뉴스에서도 연재를 했고 30화로 완결되었다.
독립운동가 백초월스님의 삶


4. 여담[편집]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진관사라는 절이 있는데, 보수공사 도중 3.1 운동 당시에 만들어진 '태극기'와, 신채호 선생이 발간한 '신대한', 독립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등 독립운동에 관련된 물품들이 발견되어서 잊혀졌던 백초월 선생의 업적이 드러났다.[6] 그 뒤 은평구청에서는 백초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현세 작가에게 웹툰을 그릴 것을 부탁했다. 위에서 언급한 다음 웹툰 "초월"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브랜드 웹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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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별좌공파-좌윤공계 26세 수(洙) 항렬. 족보명은 백도수(白道洙).#[2] #[3] 본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 청주형무소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50년 6.25 전쟁 이후 유해가 소실되어 현재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4] 이후 형 백학수(白學洙)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본적을 옮겼다.#[5] 이 때 주소지는 경기도 경성부 마포정(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 414-2번지였는데, 현재 이곳에는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진관사 소유의 극락암(極樂庵)이라는 절이 남아 있다. 실제로 백초월은 진관사와 이 사찰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의 불교계 연락본부로 사용했다고 한다.#[6] 현재 태극기는 보물, 같이 발견한 신문류들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 사찰에서 관리하고 있다. 여담으로 해당 신문들은 그동안 국내에서 이름만 알려졌거나 실물이 많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