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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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1] FRS[2]
The Right Honourable
러셀 백작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

파일:bertrand-russell.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195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3]
본명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작위
제3대 러셀 백작
3rd Earl Russell
출생
1872년 5월 18일
웨일스 몬머스셔
사망
1970년 2월 2일 (향년 97세)
웨일스 귀네드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직업
수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 비평가
서명
파일:Bertrand_Russell_signature.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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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졸업 / 1893년 학사, 1890~93)
소속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수상
드모르간 메달 (1932)
실베스터 메달 (1934)
노벨 문학상 (1950)
칼링가 상 (1957)
예루살렘 상 (1963)
배우자
앨리스 페어살 스미스 (1894년 ~ 1921년, 이혼)
도라 블랙 (1921년 ~ 1935년, 이혼)
페트리샤 스펜스 (1936년 ~ 1952년, 이혼)
에디스 핀치 (1952년 결혼)
종교
무종교(불가지론)


1. 개요
2. 생애
2.1. 가문
2.2. 성장기
2.3. 첫 결혼
2.4. 초기 경력
2.5. 1차 세계 대전 후
2.6. 2차 세계 대전 후
2.7. 말년
3. 학문에서의 업적
4. 주요 저서
5. 어록
6. 여담



1. 개요[편집]


1952년 인터뷰 영상 [4]

영국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역사가, 사회 개혁 운동가,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일생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다.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긴 대학자일 뿐 아니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걸출한 제자를 배출한 교육자였으며 말년에까지 지치지 않고 사회운동(반핵, 반전 운동 등)을 계속했던 당대 최고의 명사이기도 했다. 195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또한 현대의 주류 철학적 흐름인 분석철학을 창시하였다. '시드니 훅'은 러셀을 가리켜 50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 평하였다.

2. 생애[편집]



2.1. 가문[편집]


러셀의 증조부는 6대 베드퍼드 공작 존 러셀이며 러셀의 조부는 러셀 공작의 둘째 아들이자 빅토리아 여왕 치세에 영국 총리를 2차례 역임했던 1대 러셀 백작 존 러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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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1대 러셀 백작 존 러셀
부친 앰벌리 자작 존 러셀

러셀 가문은 튜더 왕조가 부상함에 따라 작위와 권력을 얻기 수세기 전부터도 영국에서도 상당히 잘 알려진 명문이었다. 휘그당을 결성했던 가문 중 하나이며 1536-40년의 수도원 해산부터 1688-89년의 명예 혁명,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 이르기까지 영국에서 일어났던 모든 정치적 대사건에 참여해왔다.

러셀의 어머니 캐서린 루이사는 앨더리 가문의 에드워드 스탠리 남작의 딸이며 칼라일 백작부인 로잘린드 하워드의 자매이다.

러셀의 부모는 당대의 기준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인물들이었다. 러셀의 아버지 앰벌리 자작은 무신론자였으며 아내가 아이들의 가정교사 더글러스 스폴딩과 저지른 불륜을 승낙했다. 이 두 사람은 당시에는 얼토당토 않은 일로 여겨졌던 가족 계획(산아 제한)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러셀의 대부는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러셀이 태어난 이듬해에 사망했지만 그의 저작들은 러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형제로는 7세 연상의 형 프랭크 러셀과 4세 연상의 누이 레이철 러셀이 있다.

2.2. 성장기[편집]


1874년 6월 러셀의 어머니와 누나 레이철이 디프테리아로 사망했으며, 1876년 1월에 아버지 또한 기관지염으로 사망했다. 당초 러셀의 부모는 자녀들이 무신론자인 친구들에게서 양육되길 바랐으나 조부모들은 유언을 엎고 자신들이 법적 후견인이 되었다.

러셀에게는 휠체어에 앉은 자상한 노인으로 기억되는 존 러셀 백작도 1878년에 사망함에 따라 러셀의 할머니인 러셀 백작 부인은 가문 중에서는 러셀의 유년 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백작 부인은 독실한 청교도이면서도 다윈주의를 받아들이고 아일랜드 자치 운동을 지지할 정도로 열린 사람이었으며 사회적 정의에 대한 러셀의 견해와 러셀이 평생 견지한 원칙들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성경 구절,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출애굽기 23:2)는 러셀의 주문이 되었다.

러셀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가정교사들에게 교육받은 탓에 러셀의 청소년기는 매우 고독했다. 그는 자신의 가정교육에 대해서도 회의했고 정치를 제외한 모든 문제에서 가족들과 견해가 달랐다.

그의 형 프랭크는 그에게 유클리드의 저작을 소개해주었는데, 이것이 러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러셀은 훗날 자서전에서 당시 그의 취미는 , 종교, 수학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오로지 수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소망만이 그를 자살하지 못하게 했다고 술회했다.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에 들어가자마자 뛰어난 지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대학에서 그는 연하의 무어와 교류하였으며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소개로 외부인들이 '사도회'(The Apostles)라고 부르던 배타적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5] 1893년 수학 졸업시험(우등시험)에서 7등으로 졸업한 뒤 전공을 철학으로 바꾸었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 형이상학자 맥태거트의 영향으로 몇 년 동안 관념론자가 되었다. 1894년 윤리학 학위를 우등으로 취득했다.

2.3. 첫 결혼[편집]


러셀은 17세 때 처음으로 미국 퀘이커교도 앨리스 피어솔 스미스와 만났다. 그는 곧 피어솔 스미스 가문과 친해졌으며 — 그들은 러셀이 '존 백작의 손자'임을 처음부터 알았고, 그에게 과시하길 즐겼다. 그들과 함께 유럽 대륙을 여행하기도 했다. 이들은 1889년의 파리 박람회에 방문하였으며 막 완공된 에펠탑을 오를 수 있었다.

그는 곧 앨리스와 사랑에 빠졌으며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94년 12월 13일 앨리스와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1901년 러셀이 아내에게 관심을 잃으면서부터 순탄치 않게 흘러갔다. 앨리스가 러셀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자 러셀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또한 러셀은 장모를 독선적이며 지독하다고 여겨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앨리스와 별거하는 동안 러셀은 열정적으로 - 때로는 동시에 - 여러 명의 여인과 불륜을 맺었는데, 그럼에도 앨리스는 러셀을 애타게 그리워했으며 평생 그를 사랑했다. 1921년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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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정부(情婦)였던
오톨라인 모렐. 1902년, 28세.
마찬가지로 러셀의 정부(情婦)였던
배우 콘스탄스 맬러슨.

2.4. 초기 경력[편집]


러셀은 앨리스와의 결혼 직후 2년 동안 미국에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독일로 건너가 경제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배웠으며 그 결과 런던 정치경제 대학의 수석강사로 임명되었다. 1896년에는 런던정경대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강의했으며 (1937년 가을학기에는 science of power에 대해 강의)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출간했다.

1898년 당시 트리니티 칼리지의 대표적 철학자였던 무어와 함께 관념론에 반기를 들었으며,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자·실증주의자가 되었다. 철학자로서의 나머지 생애 동안은 철학자들이 보통 물리적 실재론자라고 부르는 태도(일상적인 문제에서는 보통 유물론자라고 부르는 태도)를 견지했다.

1905년, 러셀은 철학 저널 《Mind》에 발표된 에세이 《On Denoting》을 썼다.

1907년에는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6] 러셀은 1907년 선거에서 자유무역, 여권신장을 외치며 출마했는데 (영국 여성에게는 1928년까지 투표권이 없었다.) 반대파의 난동이 얼마나 거셌는지 1차대전 시기 반전운동을 했을 때 부딪힌 반발보다도 훨씬 심했다고 술회했다. 특히 이때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들 중 여성이 있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남자들이 자기들의 지위를 잃을까봐 위협을 하는 야만적 행동은 이해할 수 있으나, 여자들이 자신들의 모욕을 그대로 지속해 나가려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았다."

1908년에는 왕립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에는 화이트 헤드와 공저한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전3권)[7]의 첫 권이 출간되었다. 난해한 수학공식으로 넘쳐나는 원고를 읽어본 케임브리지 출판부에서는 러셀과 화이트 헤드가 출판비를 대는 조건으로 출간했다. 즉, 작가로서는 최대의 굴욕을 당한 셈이다. 정확히는 출판부에서 600파운드 정도 손실이 날 것 같은데 자기네들은 300파운드까지만 감당할 것이고 나머지는 왕립학회에다가 문의하라고 했다. 그래서 러셀과 화이트 헤드가 왕립학회에 300파운드를 지원해달라고 하자 왕립학회에서는 200파운드까지만 손실을 떠안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머지 100파운드는 러셀과 화이트 헤드가 반반씩 냈다. 러셀은 이 상황에 대해 유머를 던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10년 동안 마이너스 50파운드를 벌었다."[8] 이 저작은 그보다 먼저 출간된 『수학의 원리(Principles of Mathematics)』와 함께 러셀을 그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만들었다. 또한 같은 연도에 저명한 작가 오털라인 모렐과 만났으며 그녀와 오랜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수학원리 1권의 경우엔 현대에도 철학자들이 여전히 관심을 가지는 책이라고 한다. 2권과 3권의 경우엔 형식적인 증명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러셀 왈, "2권과 3권을 읽은 사람을 딱 여섯 명 알고 있었는데 그중 세 명은 폴란드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히틀러에게 제거된 것 같다. 나머지 셋은 텍사스 사람인데 나중에 사회생활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1911년에 그는 Principia Mathematica 하나만 읽고 무작정 맨체스터에서 기차를 타고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찾아온[9] 오스트리아인[10] 공학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난다. 러셀은 무작정 자신의 강의를 청강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무실에 쳐들어와 코뿔소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그 청년[11]에게 애증을 느끼게 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공포증과 여러 차례 일어나던 절망 따위와 씨름하며 시간을 보냈다. 후자는 종종 러셀의 기력을 앗아가곤 했지만 러셀은 계속해서 비트겐슈타인에게 매료되었으며 그의 학문적 발전을 격려했다. 러셀은 무명시기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자서전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일종의 사회 부적응자로 희화화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면에서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보인 태도에는 일종의 이중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래도 애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러셀은 인싸 성격이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성격 자체가 인싸 성격과는 거리가 많이 멀어서 유명세를 얻고나서도 러셀이 기껏 만든 세미나 형태의 모임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만드는 일들이 있었고, 러셀은 이에 반감을 가졌었다.

『수학 원리』를 출간한 뒤 러셀의 철학연구는 주로 논리적 분석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분석철학 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러셀은 뒷날 이 운동에 공감하지 않았다. 논리적 원자론 철학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제자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기본학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학설에 따르면, 하나의 명제는 그 명제가 주장하는 사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명제는 사실과 동일한 구조를 가져야만 한다. 러셀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줄곧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실제로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에서는 '구조의 유사성' 개념을 기준으로 하여 인과관계를 추론했다. 그러나 러셀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요저서 『철학적 탐구』와는 의견을 달리했다.

2.5. 1차 세계 대전 후[편집]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활동한 혐의로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로 인해 트리니티 칼리지 강사직에서 해고되었다. 1918년에는 6개월 금고형을 받아 브릭스턴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 8월, 러셀은 영국 정부가 러시아 혁명의 파급 효과를 조사하기 위해 보낸 공식 파견단의 일원으로서 러시아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나 1시간가량의 대화를 나누었다. 훗날 자서전에서 러셀은 당시 레닌과의 만남이 예상보다 실망스러웠으며 레닌에게서 "개구쟁이의 잔혹함"을 느꼈었다고 술회했다. 러셀의 레닌에 대한 평가는 이곳을 참조. 러셀의 애인 도라 블랙 또한 같은 시기에 개인적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도라는 혁명에 열광했지만 러셀의 경험은 그 이전에 혁명을 지지하려던 생각을 완전히 접게 했다. 이 해에 러셀은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을 출간했다. 이 책은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강조하고 후에 스탈린주의라 불린 많은 측면을 예언·비난한 소련정권에 대한 뚜렷한 비판서였다. 이후 러셀은 자신을 친소주의자로 몰아가는 메카시주의자들의 공격을 근거 없다고 반박하게 된다. 도리어 러셀은 독재국가인 소련이 핵무기를 가지게 해서는 안된다면서 서방이 소련을 선제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러셀은 도라와 동행하여 베이징에서 1년간 철학을 강의했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러셀이 폐렴으로 인해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일본에서는 그가 사망했다는 오보가 났다. 귀국 여행 중 일본에 방문한 이 커플은 세계에 이렇게 발표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버트런드 러셀 씨는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일본 언론인들과 인터뷰를 할 수 없다." 일본 언론은 이 세련된 야유를 전혀 재미 있어 하지 않았다. 러셀은 이와 같은 야유섞인 농담을 매우 즐겨 사용했다. 같은 사건에서 일본 언론을 인용하여 러셀의 죽음을 보도한 선교사 신문이 "세계 각지의 선교사 여러분들께서 러셀 경의 죽음에 대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하더라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논평한 데 대하여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 쉬게 된 선교사들에게 사과한다고 논평하거나, 당시 중국인들이 러셀이 사망할 경우 파양호변에 러셀을 추모하는 사당을 세울 계획이었던 데 대하여 "무신론자 러셀이 신격 러셀이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대답하였으며, 자신의 부고 기사를 읽는 즐거움에 대하여 이야기 한 바 있다. 영국식 농담의 아주 좋은 예.

이 커플이 1921년 8월 26일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 도라는 임신 6개월이었다. 러셀은 앨리스와 급하게 이혼하고는 이혼 절차가 완료되고 난 6일 후인 1921년 9월 27일에 도라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이들은 존 콘래드 러셀 백작[12](1921년 11월 16일 출생), 캐서린 제인 러셀(1923년 12월 29일 출생)이 있다. 러셀은 이 시기에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물리, 윤리, 교육에 대해 설명하는 대중서를 주로 썼다. 어떤 학자들은 이때 러셀이 엘리엇의 아내 비비언 엘리엇과 불륜을 가졌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도라와 공동으로 러셀은 1927년에 실험적으로 비콘힐 학교를 설립했다. 1932년 러셀이 학교 운영에서 손을 뗀 뒤로도 도라는 1943년까지 이 학교를 운영했다.

1931년, 형 프랭크 러셀이 죽자 러셀은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러셀은 그의 작위가 호텔 방을 잡는데 쓸모가 많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러셀은 자신의 작위에 대하여 냉소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작위 같은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있느냐" 친구의 힐문에 대하여 작위를 내놓는 방법은 대반역죄를 짓는 것뿐인데 그 경우 작위를 버리는 것은 좋으나 런던 탑에서 목이 달아날 염려가 있다고 대답한 바 있다. 그러나, 러셀이 집회 참여 중 봉변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가 세계적인 철학자라는 말에는 반응하지 않았던 경찰이 백작의 동생이라는 말을 듣자 구하기 위해 달려든 적이 있었다 한다!

러셀과 도라의 결혼 생활은 점점 위기에 치달았으며 도라가 미국의 저널리스트 그리핀 베리와의 사이에 아이를 둘 가지면서 한계점에 치달았다. 그들은 1932년에 별거하였으며 결국 이혼했다. 1934년 1월 18일 러셀은 퍼트리샤 스펜스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그녀는 1910년생으로 38살 연하이며, 당시 옥스퍼드 대학교 학부생이었고, 1930년부터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다. 러셀과 스펜스 사이에는 저명한 역사가이자 자유민주당의 지도층 인사가 된 콘래드 서배스천 로버트 러셀 백작이 태어났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러셀은 시카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UCLA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그는 1940년 뉴욕 시립대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성적 부도덕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법원에 의해 취소되었다. 존 듀이를 위시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러셀에게 내려진 처우에 반발했다. 러셀은 곧 반스 재단에 가입하여 다양한 청중에게 철학사를 강연했다. 이 강연은 『서양철학사』의 기초가 되었다. 기인 앨버트 C. 반스와의 관계는 곧 소원해졌으며 러셀은 1944년 영국으로 돌아와 다시 트리니티 칼리지의 교수가 되었다.

1940년대부터 러셀은 학계 외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BBC 방송의 〈브레인스 트러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BBC 〈리스 강좌〉의 첫 번째 강연자가 되었다. 1948년 10월 트론헤임으로 강의하러 가는 도중에 비행기 사고[13]를 당했지만 살아남았다(43명의 승객 중 24명이 생존)[14]. 『서양철학사』 (1945)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러셀의 여생에 고정적인 수입을 제공했다.

2.6. 2차 세계 대전 후[편집]


1949년 6월 9일의 국왕 탄생 기념일에 러셀은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이듬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러셀이 메리트 훈장을 받을 때, 조지 6세는 정중했지만 왕년의 죄수에게 훈장을 수여한다는 데 약간 당혹해하며 "각하는 때때로 보통 사람이라면 그리 하지 않을 방식으로 처신하셨지요."라고 말했다. 러셀은 그저 웃고는 "맞습니다. 폐하의 형님처럼 말이지요."라고 응수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러셀이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렇게 응수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자제했다고 한다.[15] 역시 자서전 내용에 따르면 러셀은 조지 6세의 당혹감에 대해 《사람마다 각자의 처지에 입장에 따라 적절한 처신은 다르다》고 해명하며 《보통 사람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초인종을 눌러댄다면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겠지만, 우편배달부에게는 그것이 정당한 행동이다》는 예시를 들었다고 한다. 즉 조지 6세의 말처럼 자신이 종종 보통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방식으로 처신했지만, 스스로는 그러한 행동이 사회를 위해 자기 책임을 다한 것이라 여기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해명한 셈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했던 행동을 진지하고 정중하게 소명한 이 일화를 통해 우리는 러셀이 자국의 국왕에 대해서는 특유의 시니컬하면서도 날카로운 유머감각을 발휘하는 것을 꾹 참는 나름의 타협적인 사회성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1952년 러셀은 퍼트리샤 스펜스와 이혼했다. 스펜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콘래드는 이혼 후 1968년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콘래드는 어머니와 불화가 생기자 아버지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러셀은 이혼하자마자 1952년, 네 번째 아내 이디스 핀치와 결혼했다. 이들은 1925년에 서로를 알았으며 이디스는 펜실베이니아필라델피아 인근의 브린마워 칼리지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러셀의 오랜 친구 루시 도널리와 20년간 동거했었다. 이디스는 러셀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에 있었으며 어느 면으로 보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고 친밀하며 사랑스러웠다. 러셀의 장자 존은 심각한 정신병을 앓았는데, 이 병의 원인은 러셀과 도라 사이에서 진행된 분쟁이 주요 원인이었다. 존의 아내 수잔 또한 정신병을 앓았는데, 결국 러셀과 이디스는 세 손녀의 법정 후견인이 되었다.[16]

러셀은 1950, 60년대를 다양한 정치적 사건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냈다. 러셀의 주된 활동 영역은 핵 군축과 반 베트남 전쟁 운동이었다. 1955년의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은 핵 군축을 촉구하는 문서로, 저명한 핵물리학자이자 당대의 지성이었던 11명의 학자들이 서명했다. 러셀은 이 기간에 세계 지도자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편지들을 썼다. 러셀은 나중에 반전(反戰) 영화 《Good Times, Wonderful Times》를 찍게 되는 라이어널 로고신 감독과 접촉하기도 했다. 러셀은 신 좌파 청년들의 영웅이 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 러셀은 미국 정부의 준-집단 학살 정책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1963년에는 예루살렘상의 초대 수상자가 되었다. 1965년 10월 그는 노동당이 베트남 전쟁에 미국 측의 지원군을 파병하기로 한 것에 울분을 토하며 노동당 당원증을 찢어버렸다.

2.7. 말년[편집]


러셀은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세 권 분량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러셀은 허약해지긴 했지만 사망하던 날까지 명료하고 분명한 사고를 유지했다. 88세의 러셀이 대중집회로 인하여 구류형을 선고받았을 때 고령의 노인에게 실형을 선고한 재판부가 비판받자, 그 비판에 대하여 러셀은 "고령은 면죄부가 아니며 오히려 그만큼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철저히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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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중국의 언어학자 겸 수학자 자오위안런(趙元任 1892.11.03~1982.02.25) 선생과. (안경 쓴 사람이 자오)

1969년 11월 러셀은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고문과 학살들을 조사하기 위한 국제 전쟁 범죄 위원회를 세울 것을 UN 사무총장 우 탄트에게 촉구했다. 다음 달에는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소련 작가 연맹에서 제명한 것에 항의했다.

1970년 2월 2일, 러셀은 웨일스 메리오네이셔 주 펜린드래스에 있는 자택에서 독감으로 인해 향년 97세로 생을 마감했다. 러셀의 유해는 1970년 2월 5일 콜윌 만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어떠한 종교 의식도 행해지지 않았다. 화장하고 남은 유골는 웰시 산에 뿌려졌다.

3. 학문에서의 업적[편집]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 중 한 사람. 철학에서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제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유럽대륙 쪽의 논리실증주의자[17]들에게 영향을 주어 분석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만들어지게 된다.[18] 하지만 러셀 자신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19]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사실 러셀은 철학사적으로 그리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으나 그것은 러셀의 저술이 너무 많아 딱 잘라 얘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그가 현대철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지금도 그가 남긴 연구에 대한 분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단지 러셀이 본인의 주장을 자주 변경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분석이나 논의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는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달리 러셀은 휙휙 바뀌는 편이라 러셀의 어떤 주장이 어떻고 이런 식으로 간단히 논의하기는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리고 주된 관심사인 수리철학이 19세기말에 비해 인기가 식은 분야이기도 하고.

이외에도 주로 사회학, 교육에 대해서도 여러 저술을 남겼다.

3.1. 논리학수리철학[편집]


화이트헤드와 공저한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필두로 한 러셀의 저작은 비록 후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스스로도 완전한 논리 위에 수학을 올려놓으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고백했으나 논리적 분석을 통해 수학을 재건설함으로써 현대수학과 논리학의 기초를 한층 더 엄밀하게 만드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수학원리』가 집합론을 기초로 해서 수학의 나머지 분야를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논리적 작업이기 때문에 오늘날 고등 수학교육의 가장 첫 페이지에 집합론이 등장하는 것도 러셀의 영향 때문이다.[20] 이런 이유로 피터 왓슨은 《생각의 역사》 2권[21]에서 러셀과 화이트 헤드를 "소프트웨어의 할아버지쯤 된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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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원리』의 1+1=2임을 증명한 페이지의 사진. 『수학 원리』에서는 수학을 공부하다 보면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수식에 대해 증명하기도 했다. 그 유명한(?) '1+1=2'를 증명한 것. 문제는 아래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이 수학 원리란 책이 이해하기 어렵기로 악명높은 책이라서, 엉뚱하게 '1+1=2'를 증명하는 것 또한 대단히 어렵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집합론, 자연수, 논리기호 등에 대한 정리를, 그것도 최소한도로 끝내고 나서야 '그러므로 1+1=2다'라는 증명을 하는데 이게 무려 300페이지 넘어가서야 나온다. 이 증명에는 페아노 공리계가 사용되었으며 증명 자체는 아주 쉽다. 페아노 공리계를 소개하고, 덧셈이라는 연산을 정의한 뒤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 부분은 수학 소설인 '수학 귀신'에도 나온다. 물론 쉽다고 해도 전문 수학의 관점에서 쉽다는 뜻이지, 앞서 말한 수학 귀신의 독자인 어린이와 같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준은 아니다.

이처럼 전문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기호의 나열들이 빈틈없이 들어찬 페이지가 성서의 3배 두께에 가까운 분량으로 1권부터 3권까지 가득 들어 있다. 그래서 『수학 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읽은 인물은 저자인 러셀과 화이트 헤드 그리고 후배 논리학자 겸 수학자인 쿠르트 괴델 달랑 세 명뿐이라는 농담도 있었다.[22] 철학자들 중에서도 집합론이나 논리기호에 까막눈인 경우는 이 저서에 접근할 수 없었다.

한편 러셀은 독일의 고틀로프 프레게가 평생에 걸쳐서 쌓아올린 수리철학을 20대 후반에 밟아버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게오르그 칸토어에 의해서 정립된 집합론을 러셀의 역설로서 그 모순을 증명했다. 프레게뿐만 아니라 주세페 페아노, 다비트 힐베르트 등 집합론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생각해왔던 친집합론자들에게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 그것만 해도 거대한 업적. 러셀의 저서 '서양철학사'와 '수리철학의 기초(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등에서 "내가 프레게의 업적을 발견하고 비판하기 전까지만 해도 프레게의 이론은 매우 중요한 이론임에도 약 20년간 철저하게 사람들의 관심 바깥에 있었다."며 여러번 자찬하는 것을 보면 프레게 발굴과 비판은 러셀 본인에게도 꽤 큰 프라이드였던 것 같다. 프레게는 <산술의 기초> 2권을 끝낸 직후에 러셀의 역설을 편지로 받아듣고 충격을 받아 책의 부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자마자 그 체계의 토대가 흔들리는 것을 보는 것 만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산술의 기초 2권을 완성하기 바로 직전에 버트런드 러셀 씨의 편지로 인해 바로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버트런트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쌓아올린 수학의 궁극적인 이상에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큰 타격을 주었고, 중요한 수학적 문제였던 연속체 가설이 이에 해당되었다는 사실로 막타를 맞아 큰 훼손을 입었다.

3.2. 언어철학[편집]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현대 언어철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특히 영어의 "the ~"에 해당하는 명사구인 한정기술어구(definite description)에 대한 러셀의 분석은 21세기 초 현재까지도 표준적인 이론 중 하나에 해당한다.

다만 러셀의 언어철학적 입장은 지속적으로 바뀐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명제' 개념에 관한 러셀의 견해이다. 다만 현재 언어철학계에서 "러셀주의 명제(Russellian Proposition)"라고 부르는 것은 러셀이 1903년에 출판한 『수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Mathematics)』에서 제시한 초기 입장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4. 주요 저서[편집]


러셀은 《수학의 원리》, 《수학 원리》, 《라이프니츠의 철학》 등 전문적 학술 서적도 많이 냈지만, 유명한 《서양철학사》를 위시하여 대중 교양 서적이나 수필집도 많이 냈다. 생전에 출간한 책만 60권이 넘는다(...)[23]

  • 수학의 원리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 1903)

  • 수학 원리 (Principia Mathematica, 1910~13) : 화이트헤드와 공저.

  • 철학이란 무엇인가 (The Problems of Philosophy, 1912)
철학적 주제들에 관해 쓴 에세이이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논리실증주의자로서의 모습이 드러나있으며 철학 입문서로 평이 좋다. 러셀의 칠면조로도 알려진 닭(chicken)의 이야기[24]가 나온다. 예측에 관한 상관관계인과관계상관관계와 인과관계 문서 참조.# 인터넷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Why Men Fight, 1916)
원제목은 '행복한 사회 재건의 원칙'이나 미국의 출판사가 멋대로 제목을 바꾸었다고 자서전에서 언급했다.
러셀 본인이 생각하기에,벤담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철학을 제시한 본인의 역작으로 평가했다.

  • 자유로 가는 길 (Proposed Roads to Freedom, 1918)

  • 상대성 이론의 참뜻 (The ABC of Relativity, 1925)
상대성 이론의 '기초' 쯤으로 번역해야 적절할 책 제목을 요상스럽게 번역했다. 수식은 거의 없고 비유적인 설명만 있는 책. 상대성 이론은 이 책이 쓰여질 당시에는 최신 물리학 이론이었고 철학계에서도 핫이슈였다. 아마 상대성 이론을 잘못 이해하고 헛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쓴 책으로 추측된다. 현재 한국에서는 절판.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1927)
이 책은 가수 신해철이 고등학생 때 읽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철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 대해 "언어가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꽃이 되지만, 철학자의 손에 들어가면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가 되더라"고 말했다.[25] 이 책은 러셀이 출판 목적의 단행집으로 구성해서 쓴 것이 아니라, 러셀의 강연이나 기존의 글들 중에 종교에 관련된 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책 말미에는 코플스턴과의 대담 녹취록도 수록되어있다.

  • 결혼과 도덕 (Marriage and Morals, 1929)

  • 행복의 정복 (Conquest of Happiness, 1930)
저자 서문에서 밝힌대로 행복에 대한 자기계발서다. 당시의 사회에 대한 비평을 예로 담고 있다. 러셀이 쓴 책들 중 가장 잘 팔리고 잘 읽히는 책일 듯하다. 그러나 몹쓸 제자 비트겐슈타인은 이걸 보고 구역질난다고 씹어댔다(...).

  • 과학의 미래 (The Scientific Outlook, 1931)

  • 자유와 조직 (Freedom and Organization, 1934)

  • 게으름에 대한 찬양 (In Praise of Idleness, 1935)
러셀의 사회 비평 에세이이다. 행복의 정복이 히트를 치자 집필한 책으로 추정된다.

  • 권력 (Power: A New Social Analysis, 1938)

  • 서양철학사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
전체 제목은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and Its Connection with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로 '서양철학사 그리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과 서양철학사의 연결관계'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흔히들 러셀이 쓴 서양철학사의 특징으로 꼽는 것이 1. 철학과 시대상(정치, 사회, 문화 등)과의 연결관계가 유기적이고 2. 자신의 철학에 치우쳐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지 못한다[26]는 두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첫번째는 러셀이 쓴 서양철학사의 장점으로, 두번째는 단점으로 여겨지며 이는 러셀 본인도 인정한 대목이다. 그런데 역으로 첫번째의 '장점'은 지나치게 당대의 역사를 언급하여 정작 철학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은 세세하게 못했다는 '단점'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있으며 두 번째의 '단점'은 러셀의 생각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나 분석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장점'이 될 수 있다. 결국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2020년 12월 기준 을유문화사에서 번역이 개정 3판까지 출간되었지만 번역 평이 매우 안 좋다.

  • 인기 없는 에세이(Unpopular Essays, 1950)

  •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 (My Philosophical Development, 1959)
자신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것이 자서전이라면 이 책은 학문적 일대기를 정리해놓은 것에 가깝다. 단, 학문과 관련되지 않은 점도 어느정도 섞여있다. 태도는 무척 담담하고 객관적인데 자신의 철학이 실패했음을 고백하는 대목에서까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있다. 주변인들(대표적으로 비트겐슈타인, 램지 등)에 관해서도 꽤 세세히 설명되어 있어 러셀이 본인의 주변 인물들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도 알 수 있다.

  • 서양의 지혜 (Wisdom of the West, 1959)[27]
위 《서양철학사》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차이점이라면 시간이 지난 만큼 몇몇 철학자에 대한 러셀의 관점에 변화가 있다는 점, 다루는 근현대 철학자들이 증가하였다는 점[28], 그리스 철학을 다루는 비중[29]이 증가하였다는 점[30], 삽화나 수식 등을 적극 활용해서 각 철학자의 철학을 간명하고 생동감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점, 드립을 좀 절제했다는 점 등이 있다. 유물/유적의 사진, 지도, 인물초상도 많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에 붙인 해설도 풍부하다. 러셀은 이렇게 《서양철학사》 이후 또다시 서양철학사 책을 내놓은 것은 1. "철학사를 간명하게 집약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조리있게 설명하는 책이 거의 없"고, 2. "오늘날 사람들이 점점더 맹렬하게 전문적 지식으로 치닫는 경향에 휘말려 지적 유산을 남겨준 선조들에게 진 빚을 잊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1에 따라 이 책이 서양철학사에 대한 보다 입문서적인 책임을, 2에 따라 "모든 서양 철학은 몇 가지 중대한 점에서 그리스 철학"임을 밝히고 있다.
서양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다면 《서양철학사》보다는 이쪽을 먼저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사실 먼저 나온 《서양철학사》는 전체적으로 축약적인 논조[31]라서, 어느 정도 논리적 사고 능력이 형성되어 있고 이미 서양사/서양 문화/영어[32]/과학/수학에 관해 어디서 개무시 당하지는 않을 정도로 교양지식이 깔려 있는 가운데 그것들을 더욱 견고히 해보려는 독자에게 적합하다.[33] 특히, 분석철학의 시조답게 수학적/과학적 지식을 들먹이는 일이 많아서 천생 문돌이가 보기엔 고통스러울 수 있다.[34] 다만 우리말 번역본 《서양의 지혜》의 경우 서광사, 동서문화사의 두 판이 있는데 둘 다 번역의 질이 썩 좋지 않고[35][36] 역자의 해설이 전무하다시피 하며 중요 용어에 대한 원어병기, 영어병기, 한자병기도 별로 충실하지 않다.[37]

  • 러셀 자서전 (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1951-1969)
말 그대로 자서전이다. 여느 자서전과는 다르게 자신에 대한 미화가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아내한테 못되게 굴었던 이야기나 아내를 배신한 얘기까지 써져있는 걸 보면... 몇몇 사람들은 러셀의 기억력이 말년에 많이 약해졌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5. 어록[편집]


머리가 가장 좋았을 때는 수학자를 하였고, 머리가 나빠지자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철학도 할 수 없을 만큼 머리가 나빠졌을 때는 평화 운동을 했지요.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나는 평생 동안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왔습니다. [38]


좋은 삶이란, 사랑으로부터 영감을, 지식으로부터 인도를 받는 삶입니다. [39]


쓸데없는 지식으로 얻는 즐거움도 많습니다. [40]


의견이 별나다고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의견은 한 때 별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41]


문명화된 삶은 너무 무기력해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회복되려면 우리의 먼 조상들이 사냥을 통해 충족시켰던 충동들을 무해하게 배출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야 합니다. [42]


단순하지만 압도적으로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삶을 지배해왔다 :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 이러한 열정들이 거대한 바람처럼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휘둘렀으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바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이르게 했다. [43]


만일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중국산 찻주전자 하나가 타원형 궤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하고 이 찻주전자는 너무나 작아서 우리의 가장 뛰어난 망원경조차로도 볼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이를 의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억측'이라고 내가 계속해서 말한다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되어질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찻주전자의 존재가 오래된 책들에서 확인되고, 매 일요일마다 신성한 진리로서 가르쳐지며, 학교에서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된다면, 이 존재를 믿기를 주저하는 것이 별남의 표시가 되어서 현대의 정신과 의사나 옛날의 이단 재판관의 관심을 받고 (당신은 찻주전자를) '의심하는 자'라는 칭호를 얻게 될 것입니다. [44]

러셀의 찻주전자 참조.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면, 하느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어떤 것이든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라고 할 바에는 차라리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확실히 나으므로, 저 주장에는 어떤 타당성도 없습니다. [45]


어떤 의견이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그것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46]


내 생각에는 그리스도의 도덕적 성품에 매우 심각한 결함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가 지옥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깊이 있는 인도주의적 사람이 영원한 형벌을 믿을 수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47]


만약 신이 있다면, 내 생각에 정말 그가 그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느꼈을 만큼 그런 걱정되는 허영심을 가졌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48]


우리 모두는 세상이 우리의 편견들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되는 견해는 약간의 생각하는 노력을 동반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보다는 죽고 싶을 것입니다. ㅡ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죠. [49]


문제의 근본 원인은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 어리석은 사람은 확신에 차 있다는 것입니다. [50]


문제의 본질은, 너무 간단한 것이라 똑똑하고 냉소적인 사람들이 내 말을 비웃을까봐 두려워서 하마터면 그것을 언급하기가 창피할 정도로, 매우 간단하고 구식입니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ㅡ 이 말을 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ㅡ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또는 연민입니다. 만약 이것을 느낀다면, 당신은 존재의 목적, 행동의 지침, 용기낼 이유, 지적인 정직함을 위한 절박한 필요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느낀다면, 당신은 누군가가 종교적인 방식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행복을 찾지는 못할지라도, 목적없이 공허한 삶들의 절망을 당신은 결코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끔찍하게 많은 인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51]

[52]


난 절대로 내 믿음을 위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53]


전쟁은 누가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아닌 누가 남을지만을 결정한다. [54]


그 어떤 것에 대해서라도, 오래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생각들에 가끔씩 물음표를 달아보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55]



6. 여담[편집]


  • 이 사람의 인생에 관해 자세히 다룬 그리스산 만화책이 나왔다. 제목은 로지코믹스. 로직+코믹스다. 이 사람의 인생과 같이 수리논리학의 목적에 관해 개괄적으로 다루면서, 비트겐슈타인이나 괴델, 힐베르트, 푸앵카레[56] 등 유명한 수학자들도 매우 많이 나온다. 20세기 초반의 수학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실증적인 러셀의 일대기는 아님에 유의하자. 서두에서 지은이들이 스스로 밝히듯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며, " 만화 형식의 소설"이다. 어디까지나 20세기 수리논리학의 발전 과정을 살피고 그 의의를 곱씹어 보려는 목적으로 핵심 인물인 러셀을 편의상 재구성한 측면이 많다. 예컨대 러셀과 몇 유럽 수학자들이 실제로는 편지 왕래 선에서의 교류에 그쳤으나 책에서는 그들 간 실제 만남이 있었던 것으로 각색하는 등이다. 그리고 러셀은 이 당시 실제로는 웃기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 칼 포퍼는 러셀을 '칸트 이후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추켜세웠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의 가장 큰 공헌자'라고도 찬양했는데 이는 존 폰 노이만의 차용으로 보인다. 노이만은 쿠르트 괴델을 가리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 러셀도 칼 포퍼를 언급한 것이 있는데, 《인기 없는 수필》 등에서 언급했다. 특히 《인기 없는 수필》에서는 포퍼가 일전에 러셀 자신이 《서양철학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플라톤을 멋지게 아주 잘 깠다며 칭찬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러셀 역시 사회주의자였다. 다만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소련식 현실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고, 국가의 기능을 축소하고 민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자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길드 사회주의'를 지지하였다.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당시의 좌파사상(마르크스주의, 아나키즘, 노동조합주의)와 러셀 자신의 정치사상을 정리한 책인 '자유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2020년에 부크크출판사에서 인간 해방의 꿈이라는 생뚱맞은 제목으로 공산당 선언을 동봉해 출간했다.

  • 흑역사(?)로 그는 위험한 발언을 했는데 1929년 저서 결혼과 성에서 "정신적 결함이 있는 자는 단종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나치우생학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 위에 소개된 것처럼 러셀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만큼 문체가 매우 수려하다. 그래서 러셀이 쓴 책을 원서로 읽어보는 것도 영어를 공부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비록 그의 어휘력이나 문장구조를 보면 요즘 책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단어나 구조도 자주 튀어나오긴 하지만 수준높은 영어교재로 러셀의 저서를 쓸 수도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희한한 악몽을 꾼 적 있는데, 어떤 거대한 도서관의 한 사서가 책을 하나하나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쓰레기통에 버릴건지 그대로 둘 건지 결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지막에 집어든 책이 자신과 화이트헤드의 역작인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였는데, 이 책의 온통 알아볼 수 없는 내용들의 기호에 깜짝 놀란 사서가 이 책을 버려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러셀 백작가의 표어는 "케세라세라"다.# 정확히는 라틴어 Che Sera Sera인데 의미는 스페인어 Qué será será와 같다.

  • 어릴 적 러셀은 지구가 평평했다고 믿었다. 부모님과 선생님, 친구들 모두 지구가 둥글다고 이해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57] 그러나 러셀은 신부님의 말씀은 잘 믿는 성격이였다. 그래서 특별히 신부님께 부탁해 겨우 러셀을 설득시켰다고 한다. [58]

  • 동양철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 듯하나 그리 좋은 인상으로 보이진 않은 모양이다. 저작물 《나는 이렇게 믿는다》에 보면 노자의 자연사상을 그저 그가 구시대적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정확히 말하면 노자나 루소의 자연회귀 사상에서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그 작자가 익숙해 있는 것에 불과하고, 그들이 사악한 인위라 부르는 것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평했다. 즉, 노자는 길이나 다리, 나룻배로 통행을 편하게 하는 것이 인위로써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옷을 입거나 불로 음식을 익혀먹는 것과 같은 인위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므로 인위로 보지 않았다는 논리이다[59]. 사실 러셀의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노자 비판은 매우 온건한 편이다. 러셀은 논리가 없거나 논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온갖 비아냥[60]을 담아서 까던 사람인데 노자의 철학에 대해서는 "공감은 가지만 종국에는 동의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노자의 철학은 단지 일상적인 인위 무위라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 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정치철학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61].

  • 반면에 《러셀, 북경에 가다》라는 책에서는 동양철학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후 자신의 책에 서양 철학사라는 제목을 붙인 것만 봐도 동양철학에 대해 존중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얼핏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기존 유럽-영미 철학자들이 저술한 책의 제목은 예외 없이 '철학사'였다.[62]고대 그리스 철학-스콜라 철학-합리론과 경험론 등으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의 연쇄적인 역사를 철학의 역사 자체로 받아들였다는 것. 유럽의 역사를 기술한 다음 '세계사'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러셀은 중국을 방문하면서 동양에 독자적이고 심원한 철학 체계가 이미 성립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서양철학사를 기술하면서 굳이 '서양'철학사라고 강조한 것이다.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는 예수의 말이 이미 노자, 석가모니에 의해 벌써 나왔던 사상임을 강조했다. 성현들의 가르침이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학자들 역시 주목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러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복음서에 드러난 예수의 인간적인 약점을 지적하면서, 인격적 측면에서 볼 때 차라리 다른 성현들이 보다 성인에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번역은 나와 있고 분량도 적절하게 적지만 '무화과 나무에 저주를 내리다'의 예시는 현대 기독교파에서 반대의견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종교학자가 아니다 보니 근거 없는 소리도 꽤 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서양철학사에서 칼뱅이 천동설을 옹호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최초 원문 출처가 불명확한 카더라일 뿐이었다[63]. 러셀이 신학자가 아닌 만큼 종교적 지식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엉뚱한 주장을 한 건 비판받아 마땅하다.

  • 비틀즈 소속으로, 또한 싱어송라이터로서도 매우 유명한 폴 매카트니가 한 토크쇼에서 비틀즈 멤버들, 특히 존 레논의 반전주의, 평화주의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러셀은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주장을 하곤했는데 그 당시 런던에서 폴이 그를 실제로 만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날 밤, 스튜디오에서 비틀즈 멤버들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비틀즈는 이후에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했다.

  • 상술한 것처럼 러셀은 자신의 백작 작위를 냉소적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손자인 7대 백작이 아들 없이 죽으면 러셀 백작 작위는 단절될 예정이다. 사실 본가는 베드포드 공작이고 러셀 백작은 방계 집안 작위라...
[1] Order of Merit[2] Fellow of the Royal Society[3] 《서양철학사》로 수상하였다.[4] 내용은 자신을 키워준 조부모를 회상하고 있다. 조부가 엘바섬에서 나폴레옹을 만났던 일, 1800년대의 일화 등등을 얘기한다.[5] 19세기 후반 고등교육이 활성화됨에 따라 더이상 대학교 입학만으로 자신들의 '고귀함'을 과시할 수 없게 된 높으신 분들의 자제들이 만든 일종의 비밀결사. 이 사도에 가입했던 역대 멤버를 살펴보면 후덜덜한데, 화이트헤드,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해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존 맥태거트, 조지 에드워드 무어, G. H. 하디,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랭크 램지, 에릭 홉스봄 등등. 덧붙여서 이런 사도와 같은 비밀결사는 케임브리지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의 명문대라면 대개 존재한다.[6] 러셀은 총 세 번 하원에 출마했는데 싹 다 떨어지고 말년에 백작 작위 덕분에 상원의원직을 지냈다.[7] 원래 4권에서 기하학을 다룰 생각이었는데 무산되었다.[8] 이 시기 50파운드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엥간한 서민 계층의 한 달 생활비를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9] 책 머릿말에 저자들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들이라고 되어있는 것만 보고, 무조건 저자들을 만나겠다며 아무런 인맥과 인연도 없는 케임브리지대학교로 간 것이었다. 근데 막상 러셀보다 더 주도적인 역할의 저자였던 화이트헤드는 영영 만나지 못했다. 딱 그해에 런던대학교 교수로 부임해서 케임브리지에 없었기 때문이다.[10] 당시 영국 맨체스터 공대 기계공학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다. 이후 스스로 한학기를 휴학 후 케임브리지대학을 찾아가 러셀을 만나고 청강하다가 결국 공학박사의 길을 포기해버린다.[11] 당시 러셀은 자신의 연인에게 편지로 "그 독일인 청년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데도,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고 내가 하는 일이 다 틀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괴롭다."는 말을 남겼다.[12] '어둠의 심연'을 쓴 폴란드계 영국인 작가 조지프 콘래드의 이름에서 따왔다. 콘래드에게서는 매번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나.[13] 당시 사고기종은 쇼트사의 수상기인 S25 샌드링햄이었고 노르웨이의 트론헤임-호멜비카 국내선에서 운용되고 있었다. 사고는 호멜비카에 착륙하던 도중 조종사의 실수로 동체가 뒤집어져 발생했다. 사고기의 이름이 Bukken Bruse여서 버켄 브루즈 참사라고 한다.[14] 골초로 유명했던 러셀은 비행기에 탔을 때도 "나는 담배를 못 피우면 죽는다"고 주장하였으며, 결국 맨 뒷자리에 흡연하는 자리를 만들어 그곳에서 담배를 폈다. 이때 해당 비행기에서 금연석 탑승자는 전멸했고, 이후 러셀은 담배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농을 던지기도 했다. 여담으로 물속에 빠져있을 때에도 형이상학에 대하여 생각하였으냐는 질문에 대해 "물이 차갑다고 생각했다"고 대답하여 특유의 유머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15] 에드워드 8세는 1936년에 선왕 조지 5세가 사망한 후 잠시 왕위를 계승했다가 미국인 여성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1년도 못 가서 왕관을 내던졌고, 2차대전 중에는 친나치적인 태도를 보였다.[16] 훗날 이들 중 둘이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다.[17] 이들은 20세기 초반 유럽의 지식인들이 그러하듯 나치의 박해를 피해 해외로 망명하였다. 논리실증주의자들 대부분이 미국에 정착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나중에 또 철학자가 되어 스승들의 아이디어를 검토, 비판하고 다시 또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늘날 미국이 분석철학의 본거지가 되어 버린 것도 이 때문. 비트겐슈타인은 영국시민권을 획득한 후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18] 흔히 분석철학이 탄생하는 데 가장 기여가 큰 학자들로 러셀과 그의 동료철학자 조지 에드워드 무어, 그리고 동시대 독일의 수학자 고틀로프 프레게 이 세 명을 꼽는다.[19] 정확히 말하면 그의 후기철학[20] 그런데 책 이름이 '수학' 원리인데도 수학자들보다는 논리학자들이 러셀의 논리주의를 폭넓게 받아들였다고 한다.[21] 원제 《A Terrible Beauty: The People and Ideas That Shaped the Modern Mind》[22] 물론 이것은 수학원리가 심도있는 내용들을 다룬 책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한 과장된 표현으로, 수학원리는 오늘날에도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고 있는 명저다.[23] 그런데 사실 러셀의 대중서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기본적으로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면서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존 스튜어트 밀 등 영국 경험론적 전통에 서서 온건한 회의주의, 관용, 인류애, 자유주의 등을 일관되게 옹호하고, 그에 기초한 특유의 아동교육론을 설파하며, 역시 그에 기초하여 당대 사회의 어떠한 현상을 비평한다. 또한 기회만 되면 플라톤 이래의 귀족주의, 전체주의 사조, 루소, 피히테, 니체 식의 격정, 주관성, 비합리주의, 헤겔의 과대 포장 상태, 무논리성, 구데기 같은 문장, 덜떨어진 과학 지식, 망상, 반동 꼴통스러움 등을 신명나게 비판하고 조롱한다. 이렇게 책마다 내용이 겹치는 건 시대가 시대인지라(19세기 후반 ~ 20세기 초중반) 사회에 그같은 경종을 끊임없이 울려야 할 필요가 있었고, 어떤 책들은 여러 신문에 비슷비슷한 논조로 투고했던 글들(주로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에 쓴 것)을 나중에 출판사 제안으로 긁어 모아다가 엮었기 때문이다.[24] 러셀의 칠면조 : 경험론의 위험성 [과학으로 세상보기] '러셀의 칠면조'[25] 출처 : KBS TV문화지대 낭독의 발견 신해철 편 중 일부 영상[26] 러셀 서양철학사의 거의 모든 비판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러셀이 고대, 중세 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칸트 이후 대륙철학(특히 헤겔)을 대하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대충이라 지나친 단순화, 생략과 편파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러셀의 것보다 더 표준적으로 인정받는 9권짜리 서양철학사 책을 쓴 프레데릭 코플스턴 등이 이런 점을 지적한다.[27] 전체 제목은 'Wisdom of the West : A Historical Survey of Western Philosophy in its Social and Political Setting'이다.[28] 잠바티스타 비코, 토머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르도, 찰스 다윈, 베네데토 크로체,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 지크문트 프로이트, 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등 다수.[29] 분량이 아니다. 서양의 지혜는 전체 분량으로 치면 서양철학사의 1/3~1/2 가량이다.[30] 《서양철학사》에서 얼렁뚱땅 넘어갔던 엘레아의 제논에 대해서도 보다 상세히 다룬다.[31] 《서양의 지혜》에 비하면 개별 철학자에 대해서 넓고 깊게 다루긴 하는데 그걸 좀 급박하게 한다. 예문 하나 정도 넣어줘도 될 자리에서 그냥 다음 주제로 냉큼 넘어가 버리는 경향이 있다.[32] 번역판 읽는데 왜 영어도 알아야 하냐면 be동사 관련 지식이 없으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건드리기 전에 파르메니데스가 그딴 소리를 왜 지껄였는지 그 배경부터가 이해불능이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그리스어 지식이 있으면 영어 그까짓 거 알 필요 없는데 그런 사람 몇이나 되겠나[33] 애초에 45년 당대 영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다. 《햄릿》 정도는 아는 교양 수준을 암묵적 전제로 한다.[34] 이건 《서양의 지혜》도 마찬가지긴 한데 적어도 《서양의 지혜》는 부연 설명은 친절히 하려고 노력했다.[35] 둘 다 난역, 오역이 있다. 특히 동서 판은 러셀의 문장을 지 멋대로 간략화해 번역한 탓에 글맛이 훼손되고 문맥이 모호해졌으며, 중요 단어까지 '간략화'한 탓에 대놓고 나사 빠진 오역이 많다. 애초에 동서 판은 역자가 원전 문장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번역한 티가 나서, 간략화 핑계 댈 것도 없이 그냥 기초 역량 부족으로 인한 별의별 초보적인 오역이 무더기인 실정이다.[36] 서광사 판은 번역은 둘째 치더라도 또 디자인을 개떡으로 해 놨다. 원래는 멀쩡한 색감의 삽화들을 모조리 지 맘대로 알록달록 중구난방 무지개떡 색칠놀이로다가 치대겨 놔서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찔해진다.[37] 우리말 번역본으로 보려거든 위 《서양철학사》 번역본도 구해 두고 비교대조해 가면서 읽는 게 혼란이 적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말 《서양철학사》 들이 번역 질이 좋다는 건 아니다. 비교적 최근인 2017년에 집문당에서 《서양철학사》의 새 번역본이 나왔지만 이것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전 집문당 판의 표지만 갈아치워진 판일 수도 있고... 그냥 원판으로 보는 게 여러모로 이롭다.[38] It has been said that man is a rational animal. All my life I have been searching for evidence which could support this. (Unpopular Essays (1950))[39] The good life is one inspired by love and guided by knowledge. (What I Believe (1925))[40] There is much pleasure to be gained from useless knowledge. (In Praise of Idleness and Other Essays (1935))[41] Do not fear to be eccentric in opinion, for every opinion now accepted was once eccentric. (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1969))[42] Civilized life has grown altogether too tame, and, if it is to be stable, it must provide harmless outlets for the impulses which our remote ancestors satisfied in hunting. (What Desires Are Politically Important? (1950))[43] Three passions, simple but overwhelmingly strong, have governed my life: the longing for love,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 These passions, like great winds, have blown me hither and thither, in a wayward course, over a deep ocean of anguish, reaching to the very verge of despair. (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1967-1969))[44] If I were to suggest that between the Earth and Mars there is a china teapot revolving about the sun in an elliptical orbit, nobody would be able to disprove my assertion provided I were careful to add that the teapot is too small to be revealed even by our most powerful telescopes. But if I were to go on to say that, since my assertion cannot be disproved, it is intolerable presumption on the part of human reason to doubt it, I should rightly be thought to be talking nonsense. If, however, the existence of such a teapot were affirmed in ancient books, taught as the sacred truth every Sunday, and instilled into the minds of children at school, hesitation to believe in its existence would become a mark of eccentricity and entitle the doubter to the attentions of the psychiatrist in an enlightened age or of the Inquisitor in an earlier time. (「Is there a God? (1952)」) [45] If everything must have a cause, then God must have a cause. If there can be anything without a cause, it may just as well be the world as God, so that there cannot be any validity in that argument. (Why I Am Not a Christian (1927))[46] The fact that an opinion has been widely held is no evidence whatever that it is not utterly absurd. (Marriage and Morals (1929) )[47] There is one very serious defect to my mind in Christ's moral character, and that is that He believed in hell. I do not myself feel that any person who is really profoundly humane can believe in everlasting punishment. (Why I Am Not a Christian (1927))[48] if there were a God, I think it very unlikely that he would have such an uneasy vanity as to be offended by those who doubt his existence. (Bertrand Russell's Best: Silhouettes in Satire (1958), "On Religion")[49] "We all have a tendency to think that the world must conform to our prejudices. The opposite view involves some effort of thought, and most people would die sooner than think – in fact they do so." 『The ABC of Relativity (1925)』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의미는, 실제로 죽는 것을 선택한다는 말이 아니라, 평생을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결국엔 죽어버린다는 얘기다.[50] "The fundamental cause of the trouble is that in the modern world the stupid are cocksure while the intelligent are full of doubt." / Russell, Bertrand. "The triumph of stupidity." Russell and Harry Ruja. Mortals and Others, VII: American Essays 1935 (1931): 27-8.[51] The root of the matter (if we want a stable world) is a very simple and old-fashioned thing, a thing so simple that I am almost ashamed to mention it, for fear of the derisive smile with which wise cynics will greet my words. The thing I mean — please forgive me for mentioning it — is love, Christian love, or compassion. If you feel this, you have a motive for existence, a guide in action, a reason for courage, an imperative necessity for intellectual honesty. If you feel this, you have all that anybody should need in the way of religion. Although you may not find happiness, you will never know the despair of those whose life is aimless and void of purpose, for there is always something that you can do to diminish the awful sum of human misery. (Russell, Bertrand, and Tim Sluckin. The impact of science on society. Routledge, 2016, pp.148-149)[52] 인터넷에서는 이 구절의 번역을 미묘하게 비틀어놔서, 마치 기독교인이 아닌 러셀이 기독교의 필요성을 어필한 것처럼 인용하는 경우가 가끔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원문을 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식의 사랑, 연민을 가질 수만 있다면, 딱히 종교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53] "I would never die for my beliefs because I might be wrong." 이 말은 러셀이 한 말이 아니다. 러셀이 한 말은 "Of course not. After all, I may be wrong... (물론 아닙니다. 결국에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54] "War does not determine who is right - only who is left." 러셀이 한 말이 아니다. 출처가 없는 인용문이며 1932년 초 익명의 속담으로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55] "In all affairs it's a healthy thing now and then to hang a question mark on the things you have long taken for granted." 러셀이 한 말이 아니다. As quoted in The Reader's Digest, Vol. 37 (1940), p. 90 에 나오는 말.[56] 푸앵카레와 러셀은 20세기 초에 수학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두고 박 터지게 싸운 전력이 있다. (이때의 논쟁 때문에 푸앵카레가 수학적 직관주의의 시초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푸앵카레가 논쟁 도중에 죽자 러셀은 고인드립을 쳤다. 그러나 푸앵카레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비판 때문인지 수학의 기초에 관해서는 독단적이었던 러셀의 태도가 이후에 약간 부드러워졌다.[57] 고지능자의 특성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남의 말을 순순히 듣지 않는다. 충분한 지능과 지식이 갖춰져 있다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태도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똥고집이 될 뿐이다만. 물론 제대로 성장한 뒤의 러셀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전자의 경우가 되었다.[58] 이때 신부님이 수학자 화이트헤드의 아버지였다.[59] 사실 What I Believe 자체가 러셀에게 불리한 내용만 발췌되어 이리저리 써먹힌 글이기도 하다. 때문에 주의 요망.[60] 헤겔에서 정점을 찍는다,[61] 간단하고 이해하기 편한 예를 들어본다면, 노장 사상으로 대표되는 도가철학 자체가 (다른 제자백가의 철학들과 마찬가지로)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속에서 성립하여 발전한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즉, 제자백가에 속하는 대부분의 사상 체계들이 그러하듯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 철학 역시 '혼란과 고통으로 가득한 시대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에 대한 고민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 이 면에서 보면 노자가 비판한 인위란 다른 무엇보다도 '복잡고도화된 권력구조와 그 산물' 이다. 말하자면 "나라 다스리기 힘들다고? 니가 권력을 강화하려고 자꾸 복잡한 체제를 만드니까 다루기 힘들어지는 거지. 제대로 통제할수도 없는 복잡한 권력구조를 만들지 말고 단순한 구조(소국과민)를 유지하면 문제없이 자연스럽게 다스릴 수 있을걸? 그리고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고 억지로 선을 그어 구별하려고 들지 말고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면 전쟁할 일도 없어!" 라는 주장인 셈. 길이나 다리, 나룻배에 거부감을 드러낸 것 역시, 당시 사회에서 길을 뚫고 다리를 놓으려면 무엇이 필요했을지 생각해 보자. 당연히 백성들에게 부역을 강요해야 하고, 부역을 강요당한 백성들은 당연히 화를 낼 것이며, 어쩌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진시황의 대운하나 송휘종의 화석강 같은 예를 보더라도, 전근대 사회에서 부역의 강요는 반란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던 것. 이 쪽으로 보면 아나키즘 이나 야경국가론 같은 근현대 정치사상과도 상당한 공통점이 있는 명확한 정치사상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노장사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하나일 뿐이고 조금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면이 있긴 하지만... 어쨌건 노장사상은 '세상에 신경끊고 산에 들어가서 나물 뜯어 먹으니까 마시쪙!' 하는 현실도피적 사상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라는 것.[62] '기존' 뿐만 아니라 러셀 이후에도 이런식의 작명은 여전히 있다. 가령 서양철학사 서적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코플스턴의 철학사의 경우 western이라는 말 자체가 없고 그냥 'History of Philosophy'이다.[63] 꼴통 예수쟁이라는 인식이 있는 장 칼뱅은 오히려 그런 예수쟁이들이 피꺼솟하게 할 정도로 과학기술의 발전을 적극 옹호했는데, 그가 스위스의 시계 제작 산업의 첫 디딤돌을 놓은 사람이라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동설은 그때에는 아직 체계적인 근거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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