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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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looded Seven Army.jpg

1. 개요
2. 형주의 중요성
2.1. 형주 공방전의 단계
3. 형주 정복
3.1. 남군 공방전
3.2. 논공행상과 유비의 형주 대여
3.2.1. 논공행상
3.2.2. 주유의 죽음과 형주 대여
3.2.2.1. 노숙은 언제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는가
3.2.2.2. 형주의 어느 부분을 빌렸는가
3.2.3. 형주 대여는 없었다는 주장
3.2.3.1. 조익의 주장
3.2.3.2. 리둥팡의 주장
3.3. 번외: 손권의 주유 견제?
3.3.1. 반론
4. 청니대치와 익양대치
4.1. 손권과 유비의 익주 진격
4.2. 청니 대치
4.3. 유비의 유장 정벌
4.4. 익양대치
4.4.1. 단도부회
4.4.2. 노필의 의견
4.5. 결말
5. 219년, 삼국의 충돌
5.1. 발단
5.1.1. 후음의 난
5.1.2. 한중 정복
5.1.3. 관우와 손권
5.2. 양번 전역
5.2.1. 번성 포위와 수엄칠군
5.2.1.1. 관우의 수공 논란
5.2.1.2. 칠군의 규모
5.2.2. 천도를 고려하는 조조
5.2.3. 역전되는 전세
5.2.3.1. 손권의 칭번
5.2.4. 서황이 번성을 구원하다
5.3. 남군 전역
5.3.1. 오나라의 준비
5.3.2. 한편 그동안 관우는
5.3.3. 여몽의 형주 점령
5.3.4. 여몽의 심리전
5.3.5. 육손의 유비 잔당 처리와 촉의 군사활동
5.3.6. 관우의 최후
5.4. 결과
5.4.1. 관우의 패인


1. 개요[편집]


삼국시대에 형주를 두고 위촉오 삼국이 벌인 삼파전 양상의 전쟁.

당시 조조관우의 북진과 7로군 궤멸에 진심으로 천도까지 논의할 수준이었으며, 이때 손권은 가만히 유비를 지켜보다가는 주도권까지 빼앗기는 상황, 거기에 유비는 관우의 북진이 성공하게 된다면 한 번에 주도권을 잡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때문에 아직 익주와 한중 쪽을 수습 중이던 촉을 제외한 삼국이 각자 주력군까지 내보내서 치열하게 맞붙었던 것이다.

적벽대전 이후부터 관우가 죽은 219년까지 형주에서 관우를 비롯한 유비군과, 조인을 필두로 한 조조군 그리고 손권군이 격돌한 형주의 정벌과정, 익양대치, 관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상황. 특별한 명칭은 없으나 이 문서에선 편의상 '형주 공방전'으로 명명한다. 이 전투에서 촉이 패배함에 따라 제갈량천하삼분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유비가 관우의 죽음에 분노하여 손권을 공격하나 이릉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촉의 국력이 기울었다.


2. 형주의 중요성[편집]


파일:attachment/형주 공방전/Jingzhoumap.jpg
형주(荆州)는 후베이성 남쪽 후난성과 경계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우한(武汉), 서쪽으로 싼샤, 북쪽으로 징먼과 접한다. 양쯔강 유역의 평야지대로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이며 호수와 강이 밀집된 지역이다.

중국의 중앙부에 위치해서 서의 익주, 동의 양주, 북의 사주를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로 유비, 조조, 손권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지닌 땅이었다. 또한 위가 차지하고 있던 이북 지역을 제외하면 그나마 개발이 잘 되어있던 땅이었다.[1]

제갈량원대한 계획의 기본적인 밑그림은 형주와 익주를 얻어 양쪽에서 동시 북벌로 위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고, 손권은 강북으로 진출하기 위해 유표 때부터 호시탐탐 강하 등을 노렸을 만큼 오랜 시간 탐내온 땅이었다. (합비에서 번번이 진출이 막히자 그 중요성은 더욱 더 커지게 된다.) 위의 입장에선 형주를 손아귀에 넣게 되면 유비와 손권의 명줄을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조조 생애 그 세력이 다른 제후들에 비해 가장 압도적이었던 때가 적벽대전 직전의 형주를 막 손에 넣었을 당시였다.

상업의 요충지였던 데다가 영토의 넓이만으로 따져도 한반도 전체를 웃도는 넓이다. 또한 형주를 제외하고 보면 유비는 익주만을, 손권은 양주 각각 한 주만을 가지게 되는 상황이니 둘 모두에게 형주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땅이었다.[2]


2.1. 형주 공방전의 단계[편집]


'형주를 빌리는 것'은 적벽대전 이후의 사건으로 손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줬고, 노숙은 손권에게 남군을 빌려 유비를 주라고 권유하는데 성공해 형남 4군을 나눠 형주를 감독하게 한 사건이다.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자, 손권은 사람을 파견하여 장사군, 영릉군, 계양군 삼군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군사를 보내어 삼군을 함락시켰는데, 당시 조조가 한중을 공격할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유비는 익주를 잃을것을 걱정했고, 사신를 보내 손권에게 화합을 구하고, 상수를 그어 형주를 공평하게 나누었다. 후세에는 "형주를 빌린다"는 말이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1. 배경
적벽대전 후, 손권은 유비와 연맹을 결성하여 승승장구하여, 1년에 걸쳐 조인군을 강릉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조조군은 남양군 및 양양으로 퇴각했고 손유 연합군은 무주공산이 된 형남 공략에 나섰다. 전후 동오대도독 주유는 형주자사부의 치소인 남군의 태수(太守)로, 유표 사후 형주목(荆州牧)을 칭한 유기가 죽은 후 유기의 후견인이던 유비가 형주목이 되었고[3], 주유는 강남의 지역을 유비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비는 장강 남안의 유강구에 진을 치고 공안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손권이 유비를 두려워했고 동생인 손부인을 유비에게 시집보내 우호를 다졌다.

2. 땅을 빌리다
후에 유비는 주유가 그에게 준 땅이 적어서, 무리를을 수용하기에 부족하였기에 친히 경구에 가서 손권을 만나, 자신에게 관리를 맡기고 형주를 감독할 것을 청구하였다. 주유는 상서를 올려 반대하고 유비의 가택연금을 건의하였다. 이에 여범도 찬성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으로 손권은 형주를 빌려주지도 않았고 유비를 가택연금도 하지 않았다.

이듬해(210년) 주유가 병사하고 노숙이 대독을 계승하자 노숙은 "남군을 유비에게 빌려준다면, 형남 4군을 다르게 나누어 가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確認他分得荊南四郡), 유비가 형주를 전권하도록 하는 건 조조를 상대로 적을 세우는 것과 같으니 동오가 조조와 대치하는 동안 조조의 압력도 분산시킬 수 있다"고 설득했고 손권을 납득시켰다. 이로써 손유연맹은 공고해졌다. 조조는 손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붓까지 땅에 떨어뜨렸다.

(이전에) 주유, 감녕은 손권에게 익주를 공격하라고 권했다.손권이 유비에게 공동 진출을 요청하자 유비는 혼자서 촉을 취하려 하여 종실 유장을 차마 공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 쌍방은 의심을 품게 되었다.

3. 형주토벌
건안 20년(215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 손권은 제갈근을 파견해 유비에게 약조대로 장사, 영릉, 계양 삼군을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유비는 "량주를 얻은 뒤에 형주를 꼭 드리겠소"라고 답하였고 손권은 이를 유비가 거짓말로 시간끄는 일이라고 보고 장사, 영릉, 계양 삼군에 장리를 임명했지만 입촉한 유비를 대신해 형주를 관리하던 관우에 의해 추방당했다. 손권이 크게 노하여 여몽이 2만군마를 이끌고 삼군을 탈취하였다.

여몽이 삼군을 공략하자, 유비 역시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나왔고 이윽고 두 군대는 익양에서 대치를 하였다. 형주 문제에 관해 전권을 맡고 있던 노숙과 관우가 회담하고, 회담에서 관우는 "오림(烏林)의 전투에서, 좌장군(左將軍, 유비)께선 주무시면서도 갑옷을 벗지 않으시고, 힘을 모아 조조를 격파했는데, 어찌 헛되이 수고만 하고 한치의 땅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족하께선 왜 땅을 빼앗으려 하는 겁니까?"라고 반박했다. 노숙은 우리가 성심껏 자본과 땅을 빌려 준 것은, 너희의 병사들이 장판에서 패하고 먼 곳에서 와도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관우를 꾸짖었다. 이제 너희는 익주를 받아서 갚을 생각도 없고 우리는 지금 삼군만 구하고 있는데 돌려줄 생각도 하지도 않는다고 꾸짖었다. 아직 노숙이 말을 다 마치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땅은 인덕이 있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말참견을 하고, 노숙은 악을 쓰며 호통을 치고, 말과 얼굴색이 모두 엄했다. 관우는 칼을 들고 일어나 "이것은 나라의 일인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눈짓으로 그에게 떠나라고 했다.

4. 상수의 맹약
그런데 이 무렵 조조가 한중을 공격하려 했기 때문에 유비는 익주를 잃을 것을 염려하여 사신을 보내 손권에게 화해를 구했다. 손권은 제갈근을 파견하고 유비와 쌍방이 화해하고, 상수를 경계로 형주를 분할하였다. 강하, 계양, 장사 이동은 손권, 남군, 영릉, 무릉 이서는 유비에 속한다.

5. 후속 쟁탈
219년 관우가 북쪽 번성을 공격했다, 손권의 대도독 여몽이 틈을 타 '백의도강'으로 기습해 남군, 영릉, 무릉 3군을 차지했다. 221년, 유손 쌍방은 이릉대전를 벌였다. 손권이 다시 이겼고 그 후로 쌍방은 다시 대전이 없었다.


3. 형주 정복[편집]



3.1. 남군 공방전[편집]


조인은 행(行)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되어 강릉(江陵)에 남아 주둔하며 오장(吳將) 주유(周瑜)를 막았다. 주유는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고 전봉(前鋒) 수천 명이 처음으로 당도했다.

『삼국지』 「조인전」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江陵)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유와 정보는 또 남군으로 진군하여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각군은 대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주유전」


선주는 오군(吳軍)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南郡)에 이르렀다.

「선주전」


적벽대전 이후, 조조는 조인을 강릉에 남겨두고 퇴각한다. 그리고 주유와 유비의 군대가 남군으로 진군하여 조인과 대치하는데 아직 장강을 건너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감녕은 주유를 수행해 오림(烏林)에서 조조를 대항하여 무찔렀다. 남군에서는 조인을 공격했지만, 공략시키지는 못했다. 감녕은 먼저 곧장 이릉으로 진군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가서 그 성을 얻었으며, 들어가서는 고수했다.

「감녕전」



이해, 또 주유와 노숙 , 정보 등이 서쪽으로 오림(烏林)에서 조공을 격파하고, 남군에서 조인을 포위했다. 익주의 장군 습숙(襲肅)이 군대를 들어 내부(來附)하니, 주유가 표를 올려 습숙의 병사를 여몽에게 더해주라고 했는데, 여몽은 습숙이 담력이 있어 쓸 만하다고 크게 칭하고 또 귀화를 사모해 멀리서 내부해 왔는데 의리상 마땅히 늘려주었으면 늘려주지,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손권이 그 말을 칭찬하며, 습숙의 병사를 돌려주었다.

주유가 감녕을 시켜 이릉(夷陵)을 앞서 점거하게 하자, 조인은 군사를 나눠 감면을 공격하니, 감녕은 곤궁하고 위급해져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병사가 적어 (이 병사를) 족히 (구원하기엔) 나눌 수 없다고 하니, 여몽이 주유와 정보에게 말하길

"능공적(凌公績; 능통凌統의 자가 공적公績입니다.)을 남기고 저와 당신들이 가면, 위급한 포위를 푸는 것은 세력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제가 보장컨대 능통은 능히 10일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라 했다. 또 주유에게 병사 3백인을 나눠 파견해 땔나무로 험한 길을 끊어버리면, 적이 패주할 때 적의 군마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주유가 이 말을 따랐다.

군대가 이릉에 도착하자, 그날로 교전이 벌어졌는데, 죽인 자가 절반이 넘으니, 적이 밤에 도망쳤다. 가다가 땔나무에 막힌 길을 만나니 기병들은 모두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다. 병사들이 추격하여 말 3백 필을 얻었고, 배에 싣고 돌아왔다. 이에 장수와 병사의 형세가 절로 배가 되었고, 이에 강을 건너 둔영을 세우고 적과 서로 공격했다.

「여몽전」


병사들이 아직 싸움을 하기도 전에 주유는 감녕을 보내 공격하여 포위당했다.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주유전」


이때 익주의 습숙이 와서 손권에게 귀부한다. 주유가 손권에게 표를 올려 습숙의 군대를 여몽에게 더해주라 하나 여몽은 사양하고 손권이 여몽을 칭찬하며 습숙에게 군대를 돌려주었다.

주유는 감녕의 계책을 써서 이릉을 먼저 점거한다. 이에 조인은 군사를 나눠 이릉을 공격하고, 감녕은 주유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부족하여 나누기 어렵다고 했으나, 여몽은 능통이라면 10일은 충분히 지킬 수 있다 말하고 주유는 이 조언을 따른다. 이릉의 교전에서 주유군이 승리하고 마침내 강을 건너 적과 서로 공격했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결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주유전」


주유는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고 전봉(前鋒) 수천 명이 처음으로 당도했다. 조인은 성에 올라 이를 보고 3백 명을 뽑고는, 부곡장(部曲將) 우금(牛金)을 보내 거꾸로 싸움을 걸게 했다. 적이 많고 우금(牛金)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마침내 포위되었다.

장사(長史) 진교(陳矯)가 함께 성 위에 있었는데 우금 등이 거의 몰살되려는 것을 보고 좌우(左右-주변사람들)가 모두 안색을 잃었다. 조인이 의기(意氣)로 매우 분노해 좌우에 일러 말을 가져오게 하니 진교 등이 함께 조인을 말리며 말했다,

“적의 군사가 흥성하니 당해낼 수 없습니다. 설령 수백 명을 버린다 한들 큰 손해가 아닌데 어찌 장군께서 몸소 가려 하십니까!”

조인이 응낙하지 않고 마침내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고는 휘하의 장사(壯士)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성을 나섰다. 적과 백여 보 떨어진 곳의 해자(溝)에 접근했다. 진교 등은 조인이 응당 해자 가에 머물며 우금을 돕는 형세를 취할 것이라 여겼으나 조인은 해자를 뛰어넘어 곧바로 전진해 적의 포위망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이에 우금 등이 풀려날 수 있었다. 남은 군사들이 모두 빠져나오지 못했으므로 조인이 다시 돌아가 돌진해 우금의 군사를 벗어나게 하고 여러 명을 잃었으나 적이 이내 물러났다.

진교 등은 당초 조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두려워했는데 조인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자 감탄하며 말했다,

“장군은 실로 천인(天人)이십니다!”

삼군(三軍)이 그 용맹에 감복했다.

「조인전」


이어지는 전투에서 주유가 부상을 당하고 조인은 수십 기를 거느리고 우금을 구원하는 등 혈투가 펼쳐진다.


오록吳錄에서 이르길 : 유비가 주유에게 이르길 :

“조인이 강릉성을 지키는데, 성 안에 양식이 많아, 괴로운 재앙이 되기에 충분하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夏水)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주유전」, 배송지의 주석


이 때 유비는 주유로부터 2000명의 군사를 받아 하수로 들어가 조인의 후미를 끊고자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있지 않다.

태조를 수행해 형주(荊州)를 정벌했는데, 별도로 번(樊)에 주둔하여 중려(中廬-형주 남군 중려현), 임저(臨沮-남군 임저현), 의성(宜城-남군 의성현)의 적(賊)을 토벌했다. 또한 만총(滿寵)과 함께 한진(漢津)에서 관우(關羽)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江陵)에서 주유(周瑜)를 쳤다.

「서황전」


적벽대전에 참가하지 않고 번성에 주둔하며 기타 세력을 평정하던 서황과 당양에 주둔하던 만총이 한진에서 관우를 상대로 승리한 기록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조인의 후미를 끊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이통은 부대를 인솔하여 관우를 공격하고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는데,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이통전」


이통전에도 관우가 조인의 후미를 끊으려 했으나 이통이 관우를 공격하여 포위를 풀어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4년(209년), 주유와 조인이 서로 대치한 지 1년이 넘어,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오주전」


이때 또한 질역(疾疫-역병)이 돌아 북군(北軍-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선주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또한 남쪽으로 4군(四郡)을 정벌했다. 무릉(武陵)태수 김선(金旋), 장사(長沙)태수 한현(韓玄), 계양(桂陽)태수 조범(趙範), 영릉(零陵)태수 유도(劉度)가 모두 항복했다.

「선주전」


강릉의 공성은 1년 넘게 진행되었다. 전황이 불리하고 심지어 역병까지 돌자 결국 조인은 강릉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물러난다.

한편 유비는 형남 4군을 정벌했는데, 남군에서 주유와 조인이 대치 중일 때 일인지 조인이 물러난 후에 일어난 일인지 명확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무제기에는 208년 12월(적벽대전)과 209년 3월 사이에 일어난 일로 나오나, 적벽 이전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다고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건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며 오주전의 묘사와 달리 고작 4개월 만에 유비가 형주와 남군의 여러 군을 차지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일단 선주전에는 조조군이 물러난 뒤에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형남 4군을 정벌한 것으로 나온다.

조인이 강릉을 포기하고 돌아가자 주유는 강릉을 점령했고 유비가 형남 4군을 정벌하면서 강릉 이남의 형주 땅은 손권-유비 연합군의 소유가 된다.


3.2. 논공행상과 유비의 형주 대여[편집]



3.2.1. 논공행상[편집]


적벽과 남군의 승리 이후, 손권군과 유비군 내에서는 논공행상이 이뤄진다.

  • 손권군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領南郡太守)토록 했다. 하준(下雋), 한창(漢昌), 유양(瀏陽), 주릉(州陵)을 그의 봉읍으로 삼게 하고, 강릉에 주둔하여 지키도록 했다.

「주유전」


비장군(裨將軍)에 배수되고 강하태수를 맡아 사이(沙羨)현을 다스리니, 식읍이 4현이었다.

「정보전」


편장군에 배수되었고, 심양(尋陽)령을 맡았다.

「여몽전」


무봉(武鋒) 중랑장으로 배수되었다.

「황개전」


후에 중랑장으로 주유 등과 함께 조공을 막아 격파하고 또한 여몽과 함께 남군을 습격해 취하니,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하고, 영창(永昌)태수가 되었다.

「한당전」


조조가 적벽에 이르자, 여범은 주유 등과 함께 공격하여 무찔렀으므로 비장군으로 임명되고 팽택태수를 겸임했으며, 평택•시상•역양을 봉읍으로 삼았다.

「여범전」


주유 등과 함께 오림(烏林)에서 조공을 막고 격파하도록 하니, 마침내 조인을 공격하였고, 승진하여 교위가 되었다.

「능통전」


형주가 평정되자, 병사를 거느리고 잠(岑)에 주둔하였다.

「주태전」


  • 유비군

주유가 남군(南郡)태수가 되자 (장강) 남쪽 기슭의 땅을 갈라 유비에게 주었다. 유비는 따로 유강구(油江口)에 영채를 세우고 그 이름을 공안(公安)으로 고쳤다. - 「강표전」

유기가 병들어 죽자 군하(群下-뭇 부하)들이 선주를 추대해 형주목으로 삼고 공안(公安)을 다스렸다.

「선주전」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封拜)하니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관우전」


선주가 강남을 평정한 뒤 장비를 의도태수(宜都太守)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임명하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했고, 그 뒤 남군(南郡)(태수)로 전임시켰다.[4]

「장비전」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올랐다.

「조운전」


선주는 마침내 강남(江南-장강 남쪽)을 거두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賦稅)를 거두어 군실(軍實-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제갈량전」


유비가 공안에 주둔한 것은 다른 전에서도 보인다.

유비는 형주목(荊州牧)을 맡아 공안(公安)에 주둔했다.

「오주전」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領荊州牧)하고 공안(公安)에 주둔했다.

「주유전」


한편 유비는 손권을 행거기장군, 영서주목으로 추대한다.

유비는 표를 올려 손권에게 거기장군(車騎將軍)을 대행하도록 하고 서주목(徐州牧)을 겸임하도록 했다.

「오주전」



3.2.2. 주유의 죽음과 형주 대여[편집]


  • 이 항목은 형주를 대여했다는 의견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반대의 의견을 보고 싶다면 아래 항목을 봐주세요.

북군(北軍-조조군)에 복종한 유표의 관원, 병사 중 다수가 배반하고 유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유비는 주유가 나누어 준 땅이 작아 백성들을 안돈하기에 부족하다 하여 다시 손권에게서 형주의 몇 개 군(郡)을 빌렸다. - 「강표전」

「선주전」


손권이 점차 이를 두려워해 여동생을 시집보내 우호를 굳건히 했다. 선주가 경(京-경구京口)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고, 은기(恩紀-은정)를 주무(綢繆-끈끈히 얽어맴)했다.

유비가 돌아와 좌우에게 말했다.

“손거기(孫車騎-거기장군 손권)는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으니 그의 아랫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나는 다시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밤낮으로 길을 서둘렀다. - 「산양공재기」

「오주전」



한편 주유와 여범은 손권에게 유비를 구류해야 한다고 조언하나 손권은 듣지 않았다.

유비가 경(京)까지 와서 손권을 알현했을때 주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불러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그들이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함께 변방 땅에 있도록 한다면, 아마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어 끝내 연못 속의 물건이 안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까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유전」


유비가 수도로 돌아와 손권을 알현할 때, 여범은 유비를 구류할 것을 은밀히 요청했다.

「여범전」



한편 유비가 손권으로부터 땅을 빌렸다는 내용은 「노숙전」에 나온다.

후에 유비가 경구(京)로 와서 손권을 알현하고, 주를 관할하기(都督荊州)를 청했을 때. 오직 노숙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함께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손권에게 권유했다.

「노숙전」


주유는 경(京)으로 돌아와 손권과 익주 정벌을 의논한다. 손권도 주유의 의견에 동의했으나 주유를 강릉으로 돌아와서 행장 준비를 하다가 파구에서 사망한다.

주유는 경으로 가서 손권을 알현하고 말했다.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분위(奮威)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襄陽)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주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주유는 강릉으로 돌아와 행장 준비를 하고 파구(巴丘)를 지날 때 병사했다.



주유가 죽고 노숙이 뒤를 주유를 대신하고 정보가 남군태수가 되었다. 하지만 손권이 남군을 유비한테 빌려주면서 정보는 강하에, 노숙은 육구에 주둔하게 된다. 이후 노숙은 한창태수로 제수된다.

즉시 노숙을 분무교위(奮武校尉)로 임명하고, 주유를 대신해 병사들을 다스리게 했다. 주유의 병사4천명과 봉읍 네현도 노숙에게 예속시켰다. 손권은 정보(程普)에게 남군태수를 겸임(領南郡太守)하도록 했다.

노숙은 처음에는 강릉에 주둔하였고, 후에 내려와서 육구(陸口)에 주둔했다. 그가 다스린 곳은 위엄과 은혜가 크게 시행되었으므로, 수하의 사람들은 1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그는 한창태수(漢昌太守), 편장군(偏將軍)으로 제수되었다.

「노숙전」


주유가 죽으니, (그를) 대신해 남군태수(領南郡太守)를 맡았다. 손권이 형주를 나눠 유비에게 주자, 정보는 다시 돌아와 강하(領江夏)를 다스렸고,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승진하였고, 죽었다.

「정보전」



3.2.2.1. 노숙은 언제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는가[편집]

여기서 문제점은 오에서 형주의 부분들을 유비에게 빌려준 시기다. 자치통감에서는 주유가 죽고 노숙이 권력을 잡은 후에 손권에게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조조를 함께 막자"라고 주장한 다음 한창태수가 되어 육구로 옮기고 손권은 노숙의 의견에 따라 장사와 예장을 분할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노숙전에는 유비가 경구로와서 땅 좀 더 달라고 요구할 때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조조를 함께 막자"고 주장하고 손권이 이를 따른 일로 되어있고 건강실록도 이때로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 윗 부분에서는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라 경구에서 유비가 형주를 감독하겠다고 하고 주유가 죽은 이후 노숙이 땅을 빌려주자 주장하여 남군이 온전히 유비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장사와 예장을 분할한 것으로 합의한 것으로 작성하였다.

일단 노숙전에 따르면 주유의 대에 빌려준 남안을 제외한 강릉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 주유가 죽자 정보가 남군태수가 되었고 노숙은 처음에는 강릉에 주둔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형주 땅을 유비에게 빌려준) 후에 내려와서 육구에 주둔했다고 기록한다. 정보전에 따르면 정보는 남군태수로 있다가 유비에게 형주를 나누어 주자 이때 다시 강하로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볼 때, 자치통감의 기술대로 남군의 나머지 부분은 주유가 죽은 다음에 강릉에 있던 노숙이 빌려준 것이 확실하다.


3.2.2.2. 형주의 어느 부분을 빌렸는가[편집]

선주전만을 봤을 때에는 손권이 남군을, 유비가 강남 4군(장사, 무릉, 계양, 영릉)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서와 그 주석에서는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말이 나오고, 또 손권이 실제 강남 4군 일부에 어떤 영향력을 나타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기록과 그런지 아닌지 논쟁거리가 되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각 군별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 남군(강릉)
남군(강릉)의 경우는 209년 주유조인을 물리친 다음에 주유쪽이 차지하였다. 유비에게 강릉의 강남 쪽을 주자 공안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기록이 선주전 주석의 강표전에 있고 자치통감에서는 남안[5] 땅을 나누어서 유비에게 줬다(周瑜分南岸地以給備)고 기록했다. 이 두 기록을 볼 때, 주유가 즉흥적으로 유비와 땅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유비군의 공적이 명확히 기록된 것은 없으나 유비가 참여했다면 그 보답일 것이다. 정사상으로는 유비군이 남군 전투에서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어 남형주를 차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남군의 나머지 부분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주유가 죽고 노숙이 뒤를 이은 후 빌려줬다는 것을 정보전, 노숙전에서 관직의 이동으로 알 수 있다. 정보가 남군태수를 지내다가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주자 강하태수를 지낸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송서 지리지와 진서 지리지에서도 손권과 유비가 형주를 나누면서 남군이 유비에게 속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 무릉
몇몇 오 측 기록 때문에 논란이 되는 부분. 황개전에 무릉만이를 무찌르고 그곳의 태수가 되었다는 기록이 시기에 관한 정보도 어디의 태수인지도 안 나와있어 이곳이 무릉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수많은 의견이 난무하는 상황. 무릉이 손권 쪽에 들어가게 되면 익양대치 때 손권이 무릉을 요구하지 않은 것도 말이 된다는 의견도 있고 사실은 215년에 장사태수로 임명이라는 의견도 있다. 자세한 것은 황개 문서 참조.

주태전에 주태가 형주를 평정한 이후 잠(岑)에 주둔하였다.는 문구가 있는데 이 잠현 땅은 무릉군에 속하며 남군과의 경계에 있는 상수 서쪽의 땅이다. 사실 이건 유비가 무릉을 점령하여 주둔할 때 무릉 일부인 이쪽 땅은 주태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호삼성의 의견대로 주유가 공안을 줄 때 같이 줬다고 볼 수도 있다.

  • 장사
장사군은 유비가 장사태수 한현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기에 치소(임상현)는 유비가 장악했다. 그러나 장사군의 전 영역을 유비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주전에 따르면 210년에 손권이 장사군을 분할하여 한창군을 세웠기 때문이다. 장사군 북쪽 경계는 장강이며, 바로 이웃하여 주유가 주둔한 파구가 있다. 따라서, 손권 역시 장사군의 일부 영역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땅을 빌려줬기 때문에 행정구역을 분할했다고 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유비가 갖고 있던 영역과 손권이 갖고 있던 영역을 나누어, 유비가 갖고 있던 영역은 장사군으로 손권이 갖고 있던 영역을 한창군으로 독립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사군은 처음부터 유비 소유였다가 강릉과 한창군을 교환한것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 일단 손권은 예장군의 일부를 나누어 파양군을 세웠고, 원래 남군태수인 정보를 강하태수로 옮기고 노숙을 한창태수로 삼았으며 (장사군의 북쪽 경계이자 예장군에 인접한) 육구에 주둔한다. 자치통감에서는 이 모든 행정구역 조정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자는 노숙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기술하고 있다. (魯肅勸權以荊州借劉備,與共拒曹操,權從之。乃分豫章爲番陽郡,分長沙爲漢昌郡;復以程普領江夏太守,魯肅爲漢昌太守,屯陸口。)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동오의 군부 우두머리격이 주유에서 노숙으로 바뀌면서 동오의 대전략도 크게 변하게 되는데 주유는 익주 점령을 시도하려 했었다, 유비가 도움을 안 주니 아무 소용 없었지만. 반면 노숙은 손유동맹을 최우선시하면서 대 조조 방어전선의 길이를 줄이고 방비를 튼튼히 하려 한다. 주유의 강릉태수 시절, 강릉과 공안의 위치를 보면 양양방면에서 조조의 육군이 남하할 경우 동오가 유비를 지켜 줘야 한다. 반면 강릉을 유비에게 주면 어떻게 될까?

손권이 장사군에서 한창군을 분할한 게 210년인데 이후로도 장사는 여전히 유비의 세력하에 있었다. 노숙은 처음에 강릉에 주둔했다가 한창태수가 되어 육구로 옮겼다. 전후경과를 보면 장사군의 일부였던 한창군과 남군의 일부였던 강릉일대를 양 세력이 교환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결과, 동오는 장강을 기반으로 하는 수군중심의 방어라인을 구축하게 된다. 강릉방면의 육로 방비는 대신 유비가 맡게 된다. 한창군은 강릉 동남쪽이다. 유비가 있는 강릉을 격파하지 않는 이상 조조의 군사는 육로로 한창군까지 내려올 수 없다. 주유시절과 비교해서 입장이 정반대가 된 것이다.

동오의 이득은 이 점이다. 방어라인을 좁히고, 꽤 부유한 땅인 장사군 일부를 얻고, 자신없는 육지 지역의 방비를 유비에게 맡기게 된다. 잃은 것은? 군사적 요지 강릉을 잃은 건 결국 형주 방면에서 북쪽 양양이나 서쪽 익주로 진출하는 걸 포기했다는 뜻이다. 강릉 없이는 대규모 원정부대를 뒷받침할 수 없으니까. 결국 노숙은 주유의 공세적인 대전략을 수세적으로 고친 셈이다. 물론 완전히 수비에만 전념한 건 아니다, 형주 방면 대신 다른 방면의 공격로가 있으니까. 바로 합비다.

그리고 유비의 이득은 무엇인가? 제갈량의 융중대 계책을 실행하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말해 형주에서 필요한 곳은 두 곳이다. 익주에서 형주로 나오는 통로인 의도군(남군 서쪽). 그리고 북진하는 대규모 원정대의 보급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군사적 거점인 강릉. 유비가 진정 천하를 꿈꿨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강릉을 얻고자 했을 것이고, 그렇게 했다.

  • 강하
익양대치 때 손권쪽으로 분할했다는 말과 연의에서 유비가 손권에게 넘겨주는 것을 보고 유비가 빌렸거나 얻은 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인을 물리친 후에 정보는 강하태수에 임명되어 사이(沙?)현[6]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고 주유가 죽은 후 잠시 남군태수로 임명되었다가 유비에게 형주를 준 후에는 다시 강하태수로 임명되는 등 자기네가 다스린 지역을 유비군에게 넘겨준 적은 없다. 정보가 죽은 후 하구를 관할하는 것은 손교라는 기록까지 쭉 이어지는 것이 확인 가능. 물론 위나라가 다스리고 있는 문빙이 태수로 있는 강하 쪽은 한 번도 함락되지 않으니 관계 없다.

파일:attachment/형주 공방전/riversouth.jpg
오른쪽 위에 네모 친 것이 사이성, 그 오른쪽 아래가 夏口亦沔口
파일:attachment/형주 공방전/rivernorth.jpg
위의 지도의 서쪽부분. 가운데에 네모 쳐진 것이 하구다.

다만 하구 쪽은 강하태수로 유기와 유비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손권이 가지고 있는 강하는 208년에 황조를 죽이고 함락시킨 악현, 사이현을 비롯한 장강 남쪽 지역이다. 사이는 원래 강하군의 치소인 서릉 대신 황조가 거성으로 삼은 곳인데, 손권은 그 성을 함락하고서 도륙하였다(屠其城). 악현은 황조를 토벌하고 호종이 악현장이 됐다. 이 지역들은 사이현의 하구를 포함한 곳을 빼면 장강 남쪽이다. 거기다가 추가적으로 감녕은 이후에 당구(當口)에 주둔했는데 조일청은 여기에 주석을 달아 당구는 반드시 손교가 다스히던 하구와 가까운 곳이라고 했는데 손교는 정보의 뒤를 이어 하구를 다스렸고 정보는 사이현을 다스렸으니 감녕의 당구는 하구(夏口亦沔口) 주위가 되고 이를 보아 손권은 사이현 주위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기가 유비와 함께 하구로 갔다는 것에서 유기가 가지고 있던 강하의 땅은 하구와 석양을 비롯한 강북의 강하의 땅이 된다. 여기서 유기가 하구에 주둔했다는 것이 논란이 되어 연의에 따라 손권이 강하를 버렸음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기가 황조가 죽은 이후에 하구에 갔음을 보고 하구가 하구(夏口亦沔口)라며 지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손권은 사이성을 버린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수경 면수주를 보면 알 수 있듯 유기와 유비가 간 하구는 양수와 면수를 거쳐 가는 곳이니 아래에 그림에서 揚水, 沔水를 찾아보면 알겠지만 유기가 있는 하구는 사이성에 비해 훨씬 서쪽에 있는 상류의 지역으로 아래 그림에 해당한다. 즉, 사이성이 함락되자 유기는 하구에 주둔하게 된 것.

정리하면, 적벽대전 당시 유비와 유기는 하구를 중심으로 강하군의 서쪽과 남쪽을 지배하고 있었고 본래 강하군 산하인 기춘후국은 손책과 손권의 꾸준한 공격으로 사이현과 함께 동강하군으로 분리된 상태다. 북쪽의 조조는 기존의 안륙현(安陸縣), 남신후국(南新侯國), 208년에 신설한 석양현(石陽縣) 중심으로 유비는 하구성(夏口城), 운두현(雲杜縣), 경릉현(竟陵縣), 하이현(下雉縣), 주현(?縣)을 중심으로 손권은 기춘후국(?春侯國), 사이현(沙羨縣)을 중심으로 강하를 삼분했다. 가장 큰 부분을 먹은 건 유비지만 조조와 손권이 점거한 부분을 합치면 여기에 육박한다.

어쨌든, 유비, 유기가 가지고 있던 강하는 이후 소리없이 손권에게 넘어가는데, 다만 유비가 공안땅을 받은 것은 주유가 남군태수가 된 이후이며(강표전) 따라서 형남 4군 평정 당시까지는 유비, 유기가 하구지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설이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이후 유비는 공안땅을 받고 그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손권은 유비가 옮겨간 이후 하구를 가져간 것으로 보이고 이에 대해선 유비가 땅을 빌리고 하구땅을 손권에게 사실상 넘겨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기춘후국과 사이현을 중심으로 한 손권 측의 동강하군은 이후 기춘군으로 변했고 210년경 유비가 손권으로부터 남군을 대여받았으며 210년경 남군태수 정보가 강하태수로 전임했다. 손책 시절 주유가 태수를 역임하고, 손권 시절 정보가 태수를 역임한 동강하군은 210년 당시엔 손권이 기춘군을 설치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보가 태수로 임명된 강하군은 어디일까? 원래 유비가 점거하고 있던 하구 쪽 강하군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유비가 남군을 얻으면서 자리를 비워주고 손권이 하구 쪽 강하군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냥 계속 유비가 하구를 가지고 있다가 익양대치 당시 유비가 남군을 가져가는 대신 강하를 손권 땅으로 넘긴다는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동강하군이 기춘군으로 바뀐 시점이 210년경 어느 시점인지 확실하지 않은 이상 정보가 우선 (동)강하태수로 부임하고 그 다음 기춘군으로 바뀌었다고 봐도 상관이 없다. 중국어 위키백과 손오행정구역(孫吳行政區劃) 문서에 따르면 '동한의 구군인 강하는 건안 15년(210년) 손권이 정보를 강하태수로 두었는데, 이때에서야 비로소 강하군 강남쪽 여러현을 갖게 되었다, 건안 20년(215년)에 오나라와 촉나라의 형주분할안 이후에야 강하 전군을 소유했다'고 되어 있다.(東漢舊郡,建安十五年(210年)孫權以程普為江夏太守,始有江夏郡江南諸縣,建安二十年(215年)吳蜀分荊州後據有江夏全郡) 애시당초 남군 공략 이후 공략에 참여한 유비가 본인의 지분으로 공안을 가져간 것이라면 첫 번째 가설은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선주전 본전에도 4군 점령 후 유기가 죽자 유비가 공안을 다스렸다는 얘기뿐이다. 이때 유비가 강하태수를 누구를 임명했는지는 나오진 않으나 적어도 이렇게 볼 시엔 하구 땅은 익양대치 이전까지 유비의 땅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후 손권은 새로이 축성하여 하구를 새 중심지로 삼았다.

  • 계양
손권이 거기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전종의 아버지인 전유가 계양태수로 임명되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209~219년이기에 익양 이후의 사건일 가능성이 없다. 어쨌든 이 지역은 조운이 계양태수가 되면 알 수 있듯 촉이 점령한 과정이 자세한 편.

  • 영릉
한참 위에서 언급한 호삼성이 쓴 강남 지역을 이미 얻었는데 강한 지역 네 군을 유비가 달라고 요구했다를 빼면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여기를 손권이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관우가 쌀을 가져간 상관이 있던 곳이다.

  • 양양
원래 이곳은 조조가 점령한 이후 쭉 조조의 땅이었다.

연의에는 제갈량이 남군을 얻고서는 양양도 얻었다고 하지만 연의의 설정오류다. 나중에 유비가 주지도 않았는데 조조 땅으로 나오기 때문.

나중에 220년에 손권이 서쪽으로 오자 조비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인을 시켜서 양양과 번성에 불을 지르고 번성으로 오게 하는데 그때 잠시 손권이 진소라는 듣보잡을 이용해 점령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조인한테 털리고 뺏긴다.


3.2.3. 형주 대여는 없었다는 주장[편집]


이 주장은 청나라 고증사학의 명사인 조익이 쓴 《이십이사차기》의 주장을 골조로 한다. 조익은 대학자이지만 그가 주장한 바가 "『삼국지』의 오나라 기록은 날조라 믿을 수 없다"인 만큼 결국 조익의 사견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유교적 사관에서는 마냥 허구로 취급되지 않았으며 청 이후 중국의 반일 애국주의 역사학[7]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기에 항목을 따로 만들어 기술한다.

3.2.3.1. 조익의 주장[편집]

다음 링크는 이십이사차기의 형주 대여 부분을 링크로 달아놓은 것이다.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되어서 서점이나 도서관 등지에서 볼 수 있지만 그걸 가져오면 저작권법 위반이기에 유저 번역본을 올린다. 원본 링크 참고로 여기서 게시글을 올린 사람이 노숙전에서 찾을 수 없다는 부분은 노숙전에 주석으로 딸린 오서의 기록으로 관우가 저런 주장을 하고 노숙이 반박하자 아무 말도 못했다는 부분이다. 위치로 치면 노숙전의 후반부. 아마도 당시 참고할 수 있던 김원중의 정사 삼국지 번역본에 주석 번역이 안 실려 있어서 못 찾은 모양이다.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설은 오나라 사람의 사후 견해로부터 나왔고, 당일의 상황이 아니었다.

...

이것은 유비가 조조를 막는 주체고, 손권 자신은 협력자로 가담하고자 한 것이다. 제갈량이 또한 이르길 "장군께서 예주와 같은 마음으로 조조를 격파할 수 있다면, 형오(荊吳)의 세력은 강해져 정족(鼎足)의 형세를 이룰 겁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때 이미 천하삼분의 설이 존재하고 있어, 손권에게 형주를 취하라 의뢰하고 이를 빌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이제 병력을 논하면, 제갈량이 처음 손권을 보며 이르길 "예주(豫州-유비)의 군이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했으나 지금 전사들 가운데 귀환한 자들과, 관우 휘하의 수군이 정병을 합하여 일만이 되고, 유기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또한 손권이 주유 등의 수군을 파견함이 3만 명에 불과했음이 제갈량전에 있다.[8]

...

동시에 또한 남으로 4군을 정벌하니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모두 항복했다. 유기가 죽고, 많은 신하들이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했음이, 촉지 선주전에 보인다.

유비가 곧 제갈량을 파견해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거느리게 하고, 그곳에서 조세와 부역를 거둬 군수물자로 올리게 했음이 제갈량전에 보인다.

또한 관우를 양양태수, 탕구장군(蕩寇將軍)으로 삼아, 강북에 주둔하게 한 것이 관우전에 있고, 장비가 의도태수,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삼아, 남군에 있음이, 장비전에 있다. 조운을 편장군(偏將軍), 영계양태수(領桂陽太守)로 삼은것이 조운전에 있다. 이렇게 장수들을 파견해 각지에 주둔케 함은, 오직 유비가 지휘한 것으로, 애초에 손씨에게 아뢰지 않았던 것은 이곳 형주가 본래 손권의 땅이 아니었기에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비가 필시 손권에게 아뢰지 않았고 손권 또한 와서 유비를 전혀 막지 않았다.

...

그 후, 오 촉이 세 군을 두고 쟁탈하는 형국이 되었으나, 형세가 일변하여 상수를 경계로 화의를 맺고, 장사, 강하, 계양을 나눠 오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촉에 속하게 했으니, 가장 공평하고 타당한 것이었다.[9]

그래놓고선 오의 군신들은 관우의 북벌을 노리고, 형주를 습격해 이를 가지고는, 도리어 오로지 형주를 빌려줬다는 설을 날조하여, 그들이 형주를 취한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즉 오의 군신이 간교하게 거짓을 말하나, 형주를 빌려줬다는 명분은 마침내 지금까지 세상에 널리 퍼져 전해져, 모두 한결 같은 이야기를 하게 돼, 견고해져 깰 수 없게 됐고, 오히려 이러한 곡해가 거듭되어 촉에까지 흘러 들어갔으나, 이는 남의 말을 귀로만 듣고 받아들인 견해다.


즉 적벽대전에서의 유비의 공이 매우 크며, 형남 4군은 유비가 독자적으로 얻은 영토이고, 손오가 관우의 북벌을 기회삼아 형주를 탈취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익은 형주를 빌려주었다는 언급이 있는 선주전, 강표전, 노숙전을 부정하였다.

근대사학자인 여사면은 《삼국사화》에서 그는 형주는 손권의 것이 아니므로, 나중에 유비에게 빌려준다는 말은 헛소리라고 하며 조익의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3.2.3.2. 리둥팡의 주장[편집]

재미 중국인 사학자이자 대중 강연을 업으로 했던 리둥팡(黎東方; Orient Lee; 1907년 ~ 1998년)의 경우 자신의 저서 세설삼국[10]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유비는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유기가 병으로 죽었을 때도 부하들에게 자신을 형주목으로 추대하게 했습니다. 사전에 손권과 어떠한 상의도 하지 않았지요. 손권은 유비가 갈수록 심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조조를 쫒다가 강릉성까지 갔을 때 일찍이 손권은 강릉의 맞은편 기슭인 유강구에 주둔하겠다는 유비의 계획에 동의한 바 있습니다. 이 유강구는 작은 곳이며 무릉군 잔릉현에 속합니다. 법률적으로 이 땅은 유비에게도 속하지 않았고 손권에게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엄밀하게는 당시 이미 조조에게 투항했던 형주자사 유종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땅은 이미 손권과 유비 연합군의 통제하에 있었지요.

유비에게는 유강구에 군대를 주둔시킬 자격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새로운 성을 쌓고 공안이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손권이 주객전도의 입장에서 유기의 강하군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정보를 강하태수로 임명한 것에 비하면 유비의 행위는 동의적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고, 감정으로나 실질적으로 손권에게 어떤 폐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손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지요. 이 형주 몇 개 군의 기반을 위해 두번이나 유비와의 평화를 깹니다. 나중에 손권 휘하의 문인들은 곧 '형주를 빌렸다'는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손권이 동맹을 저버리고 관우를 습격했던 악행을 은폐하려 들지요.

당시 한 왕조는 아직 망하지 않았고 천하는 여전히 한 왕조의 천하였습니다. 영토는 당연이 황제의 영토였지요. 한 헌제 본인이 그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사람은 형주나 다른 어떤 주라도 남에게 상으로 주거나 빌려줄 권리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권이 형주 전체를 유비에게 빌려주지 않았고 유강구와 남군 강릉현의 일부만을 빌려주었다고 말합니다. 강릉은 남군의 수현이고 손권 측이 점령한 형주의 수현이기도 했지요(조조측의 형주는 이미 양양현을 수현으로 삼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서 강릉과 남군은 하나로 혼동되었으며 형주와 하나로 혼동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형주를 빌렸다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강릉을 빌렸다는 말입니다. 강릉을 빌렸다는 것은 사실 유강구를 빌렸다는 것이지요.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어쨌거나 '형주를 빌렸다'는 말이 억지로 통하기는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엄밀히 말하자면 받아들이기 힘든 종류의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사람을 기만하는 느낌을 줍니다. 유강구는 절대 남군 강릉현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무릉군 잔릉현에 속했지요 손권은 이 유강구를 점령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유비에게 빌려줄 수 있습니까?(중략)

삼국지 노숙전은 거듭해서 그가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사실일까요?

노숙은 한동안 남군에 주둔하다가 육구로 주둔지를 옮겼습니다. 육구는 육계에서 장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오늘날 호북성 가어현의 서남쪽이자 적벽의 동쪽이지요.

왜 노숙은 남군에 머물지 않고 육구를 물러나 주둔했을까요? 이일은 좀 미심적습니다. 예전에 저는 자치통감 권67의 어떤 단락을 읽고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략) 자치통감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손권은 일찍이 주유와 감녕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사를 보내 익주를 취해고자 유비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그의 동의를 구했다. 유비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손권은 조조가 적벽에서 패했다고 해서 '창해에서 말의 물을 먹이고, 오나라의 수도에서 군사를 시찰하겠다'는 생각을 접었거나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둘째, 나 유비와 익주목 유장은 일가붙이의 먼 형제이니 만약 그가 손 장군께 지은 죄가 있다면 이 사람의 낯을 보아 용서해주시지요.' 손권은 유비의 반대를 중시하지 않고 숙부 손정의 큰아들 손유를 파견해 여러 수준을 이끌고 하구로 가서 주둔시키며 성급한 태도를 취했다. 유비는 손유의 수군이 공안성 북쪽의 장강을 통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관우를 강릉에 주둔시키고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며 제갈량은 남군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잔릉에 머물렀다. 손권은 하릴없이 손유를 소환했다"[11]

삼국지 손유전에는 손유가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했다가 유비의 대규모 공세에 서진을 저지당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관우전과 정보전에는 손유가 수군을 이끌고 서진한 일이 전혀 언급되지 않지요. 게다가 관우가 강릉의 방어를 맡게 된 것은 정보가 강릉을 떠나 강하태수의 임지로 돌아간 건안 20년 여름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12]

당시 손권과 유비는 사이가 좋아져서 형주의 각 군을 다시 나누고 재배치해 상수를 경계로 삼었습니다. 손권은 남군을 유비에게 주었고, 유비는 장사군에 계양군을 더해 손권에게 주었습니다. 건안 19년 4월에 이미 장비와 제갈량, 조운은 모두 오늘날 호북과 호남지역을 떠나 유비를 도와 유장을 치러 갔습니다.

그래서 자치통감의 그 단락을 전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중략)유비는 노숙과 관우 두 사람과 익양에서 단도부회의 상황을 연출한 뒤 자진해서 손권에게 장사, 영릉 계양 3개군을 양보하기로 합니다('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양보였습니다.) 오직 남군 하나만을 교환조건으로 걸면서 말입니다.(후략)


한마디로 리둥팡의 주장은 유비가 형남 4군과 공안을 가졌고 손권이 강릉을 가졌는데 유비가 공안, 나아가서 형주 전체를 빌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며 강릉은 손권이 계속 가지고 있었고 익양대치 때 남군과 장사, 계양을 바꾸고 상수를 경계로 했다는 것이다. 이 설은 유비에게 땅을 빌려 줬다는 오주전, 노숙전, 노숙전 주석 한진춘추를 부정해야 성립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리둥팡의 주장에 따르면 자치통감의 해당기록이나 이런 주장들은 단순한 소문과 야사의 결합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다른 기록을 부정하는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손권은 유강구(공안)를 점령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유비에게 빌려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타당성이 있으며 유비가 설령 땅을 빌렸다고 해도 (리둥팡은 억지로 말이 통하긴 한다면서) 강릉만 빌렸을 뿐이며 헌제춘추의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거기에 관우의 북벌을 기회로 삼아 손권 측이 불시에 습격하여 형주를 탈취하였고 이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원래 형주는 빌려준 땅이었다'라는 설을 날조한 것이라는 주장은 리둥팡도 하고 있다.

그외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면 관우가 악진과 대치했던 청니대치의 경우 선주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음해(212년), 조공이 손권을 정벌하자 손권은 선주에게 구원을 청했다.

"조공이 오(吳)를 정벌하니 오(吳)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손씨(孫氏)와 고(孤-나)는 본래 순치(脣齒-입술과 이)의 관계입니다. 또한 악진(樂進)이 청니(靑泥)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州)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즉, 오나라가 조조세력의 공격을 받는 와중에 악진이 남군을 쳤고, 남군의 오나라 군대가 공안에 주둔해 있던 관우에게 지원 요청을 보냈고, 관우가 이를 도와 청니에서 대치했다고 하면 말이 된다.

또 관우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封拜)하니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이 기록의 시기는 유비가 형남 4군을 거두어 들인 시점 직후라고 볼 여지가 있다. 따라서 당시는 남군공방전이 한창 진행중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유비가 관우를 북쪽으로 보내 북쪽길을 끊어놓도록 주둔시킨 것이다. 선주전과 관우전의 두 기록이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고 가정하면, 앞뒤가 맞는다.

유봉전에는 '유장은 부풍의 맹달을 법정의 부장으로 파견하고, 각기 병사 2천 명을 인솔하게 하고 강릉에 남아 주둔하도록 했다'라고 했다. 유장전에 따르면 장송이 조조에게 모욕을 당하고 조조가 적벽에서 패배한 후 장송이 돌아온 후에 장송이 유장에게 '유비는 유장의 지친이니 통교할 수 있다고 했으며 유장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법정을 보내 유비와 우호관계를 맺고, 곧장 또 법정 및 맹달에게 영을 내려 병사 수천을 보내어 유비를 도와 수비토록 하였는데 법정은 마침내 돌아왔다'고 한다. 따라서 유장전의 말을 신뢰한다면 한창 남군 공방전을 치루고 있을 유비에게 병력을 보낸것이고 남군공방전 전역이 끝나고 주유가 강릉을 차지하자 법정이 이끄는 익주군이 돌아왔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 자치통감에서는 211년에 병사 4천 명을 파견하여 유비를 맞이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3.3. 번외: 손권의 주유 견제?[편집]


적벽대전에서 승리하고, 형주 일대를 흡수한 후 손권은 자신의 영향권에 들어온 형주 일대를 분리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는 주유를 남군태수에 임명하고, 유비에게 나머지 형남 일대를 점령하도록 묵인하는 한편, 유비와 혼인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손권과 주유의 유비 견제'를 뚫고, 유비가 교묘하게 움직여서 형남과 손부인이라는 이득을 취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즉, '손권&주유 vs 유비'라는 정치적 도식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실제로 주유의 움직임은 유비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손권은 과연 어떨까?

주유의 견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손권은 유비에게 지나칠 정도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것이 남군공방전 이후의 현실이었다. 주자사, 형주목 선포와 같은 정치적 퍼포먼스도 묵인하고, 형남은 거저 먹도록 방치하는 등, 어떻게 보면 거의 호구처럼 느껴질 정도.

'적벽 직후의 손권'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볼 경우 이 것은 이전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손권이 이 이시점에서 자신의 세력 내부에서, 누가 자신의 가장 큰 잠재적인 '내부 경쟁자'으로 보일까? 망명객인 '유비'가 아니라 손책때부터 손오 내부에서 군권을 잡고있던 '주유'라고 볼 여지가 다분하다.

당시 시점에서 주유는 명백하게 적벽대전의 주역이다. 이때, 주유는 당대 최고의 전략가로서 적수가 없었던 조조를 정면에서 꺾었으며, 형주에 주둔하던 조조군 역시 순식간에 정리하여 형주를 집어삼켰다, 본래부터 주유는 손책의 친구였으며, 손권은 어머니의 권유로 주유를 형님처럼 모시기로 하였으니, 형식상 부하이긴 했으나 결코 단순한 부하라고 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적벽대전에서 노숙과 함께 대표적인 주전파였고, 실제로 전투에 나서서 승리와 빛나는 전과를 거뒀다. 손오 내부에서 주유의 정치적 위상은, 정황상 급상승했을 것이며 그러므로, 손권은 주유에게 새롭게 흡수한 형주의 핵심지인 남군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주유는 군사적 능력은 조조 격파로 검증이 되었고, 마흔도 되지 않은 젊고 패기 넘치는 장수인 데다가 유장의 파촉 정벌 같은 야심만만한 대계획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유가 앞으로 더욱 군사적 성공을 거둔다면, 완전히 날개를 달고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주유라는 인물을 고작 '강동 6군'을 직할지로 두고 있는 손권이 감당할 수 있을까?

따라서 이 시점에서 손권에게 견제해야 하는 상대가 있다면, 유비가 아니라 주유가 되지 않을까는것이 손권의 주유견제론의 주장이다. 유비가 "오랫동안 다른 사람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건의를 받았을 때 손권의 내심은 어떨까. "그럼 주유, 당신은 어떨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적벽대전 직후, 유비에게 좀 비상식적으로 보일 만큼 과도하게 퍼주는 손권의 행보는 지나치게 갑자기 위상이 올라가버린 주유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토록 했다.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


주유가 남군(南郡)태수가 되자 (장강) 남쪽 기슭의 땅을 갈라 유비에게 주었다.


유비는 따로 유강구(油江口)에 영채를 세우고 그 이름을 공안(公安)으로 고쳤다.


기록을 이렇게 대비해서 보면, 주유와 유비를 대치시키는 구도가 나타난다. 물론 우리는 주유는 손가의 충직한 부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유의 일생을 보고 '사후평가'하는 것이다. 적벽대전 직후의 주유는 그 엄청난 공적을 세운 것 만큼이나, 손권에게는 잠재적으로 위협적인 상대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 불안감이 유비에게 형남점거를 허용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비는 그에 부합하듯이 주유는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못된다고 손권을 부추기기까지 했다.교활한 유비

손권의 주유 견제론은 손권은 주유가 이렇게 일찍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쓸데없이 키워줘버린 유비와 마찰을 빚으면서 자신이 벌인 짓을 '설거지' 하는 것이, 이후 유비와 손권의 형주공방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드라마 신삼국에서 채택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3.3.1. 반론[편집]


유비를 손권이나 주유가 쉽게 조종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제한다는 게 조금 사실과 다르다 여겨지긴 한다. 손권 역시 유비를 끝내 제어 할 수 없으리라는 예측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까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주유전.


또, 손권의 지배권이라는 게, 주유-정보를 필두로 한 회남 출신의 군대를 기반으로 강동사족들을 통제하는 형태기 때문에, 강동사족을 완전히 누르지 못한 시점에서 주유를 견제한다는 건 너무 이르다. 또한 유비가 커진 건 형북에서 조인과 1년넘께 대치하느라 형남을 유비가 먹어버린 게 컸고, 유비가 커졌는데 유비세력과 다투는 건 북방의 조조가 있는데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조조가 실제 군사원정까지 보낼 능력이 209,210년에 없었더라도 손권이 장희의 1천 명을 4만 명 뻥튀기로 적은 서신 하나에 속은 것을 보면 조조의 공격가능성을 손권입장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게 현실이라는 점, 조조가 실제로 초군에서 합비까지 209년 3월부터 12월까지 실제론 방어목적이라었다 하더라도 군대를 움직인 점 등 조조의 공격가능성을 손권입장에서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또 유비와 손권의 세력차이가 형남 4군+공안+여강의 수만명 항복까지 받고 자리보전 할 명분이 확고 한 유비의 세력을 고려시 단기간에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등이 손권이 유비를 경계하게 할 요인으로 있었다.

또 합비에서의 대 실패, 남군공방전에서의 손실 구강현, 당도현 반란도 적벽대전 종료 이후에 진압해야 했던점, 입촉 시도 역시 결국 공동작전으로 계획해야 했어야 했으며 유비의 동의 없이 단독 행동을 하지 못했던 점을 고려하면 분명해진다. 유비가 굽신대는 이유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남군대여를 통해 유비군의 세력확대 및 손권과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손권이 유비와 세력 차이가 나더라도 이를 쉽게 제압할 입장이 아니었다. 주유전의 손권이 생각한 끝까지 유비를 제압하지 못할거라는 인식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또 노숙전을 보면 노숙은 손권에게 말할 때 유비에 대해 '(우리의) 당파'라고 칭하면서 이를 늘려야 한다고 봤지 유비를 부하 뉘앙스로 본 적은 없다.

따라서 손권과 유비의 동맹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어준다기보단 일단 힘의 우위가 손권에게 있는 이상 결혼동맹 등을 통해 유비를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통제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확고한 아군인 주유를 견제한다는 건 사리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도 손권이 유비를 통제하는 것은 유비를 위협하는 손부인의 군사를 유비 측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외에는 감지되지 않고 유비는 그러거나 말거나 입촉과 천하 삼분을 완료한다. 이런 유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선 손권의 입장에선 주유의 힘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주유 견제론을 수용하자면 그것은 일단 유비를 손권이 제거할 명분이 없고 유기를 앞세워 형주를 점령하는 유비를 강대한 조조가 있는 상태에서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손권이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주유나 견제하자는 심리로 유비를 좀 더 밀어주었다가 맞을 것이다. 유비 역시 세력비에서 밀리는게 사실이었으므로 납작 엎드려서 손권에게 기면서 세력을 키울 때까지 명분을 주지 않으며 독니를 숨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결국 손권이 유비에 비하면 세력비가 압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손권-노숙이 조조와 대치하는 유비에 대해 입촉 상황을 이용해서 마구 흔드는 것이라고만 봐도 충분하다. 그렇게 손가락 튕기면서 계산하며 유비를 남군까지 떼주면서 키워주었고, 이 과정에서 손권은 유비를 자신의 사냥개로 시험해 볼 수 있는지 실험해 봤다고 봐도 타당하다, 결과적으로 손권 본인은 호구가 되긴했지만.

또 강표전만 살펴 보자면,

劉備之自京還也,權乘飛雲大船,與張昭、秦松、魯肅等十餘人共追送之,大宴會敘別。昭、肅等先出,權獨與備留語,因言次,歎瑜曰:「公瑾文武籌略,萬人之英,顧其器量廣大,恐不久為人臣耳。」

유비가 경에서 돌아가게 되매 손권은 비운대선에 타고 장소, 진송, 노숙 등 10여명과 함께 그를 따라 전송하며 대연회를 열었다. 장소, 노숙 등이 먼저 가자 손권 홀로 유비와 함께 남아 얘기를 나눴는데 유비는 얘기를 하다가 주유를 찬탄하며 말했다. "공근의 문무주략은 만인의 영걸이라, 그 기량이 광대함을 돌아보면 오랫동안 남의 신하로 있지 않을까가 두려울 뿐이오."


瑜之破魏軍也,曹公曰:「孤不羞走。」

주유가 위군을 깨뜨리자 조공이 말했다. "주유에게 패했으니 고는 (패하여) 달아남이 부끄럽지 않구려."

後書與權曰:「赤壁之役,值有疾病,孤燒船自退,橫使周瑜虛獲此名。」

뒤에 손권에게 편지하여 말했다. "적벽싸움에서는 마침 질병이 있어 고가 배를 태우고 스스로 물러났는데 주유가 이렇게 이름을 헛되이 얻게 할 줄이야."

瑜威聲遠著,故曹公、劉備咸欲疑譖之。

주유의 위엄과 명성이 멀리 떨친 까닭에 조공, 유비가 모두 그를 의심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렇듯 당시 오나라 역사가들은 오히려 조조와 유비가 먼저 손권과 주유를 이간시키고자 했다고 보고 있었다. 따라서 손권과 주유의 관계는 외부에서 이간시키려고 할 정도로 오히려 탄탄했다는 얘기가 된다.



4. 청니대치와 익양대치[편집]



4.1. 손권과 유비의 익주 진격[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비의 입촉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2. 청니 대치[편집]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남군(南郡)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臨沮長) 두보(杜普), 정양장(旌陽長) 양대(梁大)를 모두 대파했다.

「악진전」


악진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를 격퇴하고 전공을 올려 연수정후에 올랐고, 봉역장군의 관위가 더하여졌다.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수에서 공격, 그 배를 형성에서 불태웠다.

「문빙전」


선주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공이 오(吳)를 정벌하니 오(吳)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손씨(孫氏)와 고(孤-나)는 본래 순치(脣齒-입술과 이)의 관계입니다. 또한 악진(樂進)이 청니(靑泥)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州)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선주전」



4.3. 유비의 유장 정벌[편집]


한편, 214년 유비가 갈 곳을 잃은 마초까지 끌어들여 위용을 갖추자 유장은 마침내 항복하여 유비는 서천을 점령한다. 그리고 유장을 형주로 내쫓아 버린다. 신의를 잃어버릴 수 없다며 치는 걸 반대한 인물이 도움을 요청한 유장의 뒤통수를 쳐서 날려버린 다음에 형주로 내쫓아 버린 것. 이런 유비의 움직임에 손권은 유비가 한창 서천에 가 있을 동안 손부인을 시켜 유선을 볼모로 삼기 위해 끌고 오게 하지만 제갈량의 명령을 받은 장비조운에 의해 실패한다. 관우는 이 사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지 불온한 행동을 자주했고 형주와 오의 경계지역 분쟁에서 노숙은 이러한 촉의 적대감을 높이지 않기 위해 항상 우호적으로 잘 덮으려 했다. 결국 이 사건은 익양대치로 이어진다.[13]


4.4. 익양대치[편집]


이 해, 유비가 촉(蜀)을 평정했다.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益州)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諸葛瑾)을 시켜 형주(荊州)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涼州)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취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돌려주겠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南三郡長吏)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關羽)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呂蒙)을 파견해 선우단(鮮于丹), 서충(徐忠), 손규(孫規)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巴丘)(주)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陸口)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零陵太守) 학보(郝普)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益陽)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孫皎), 반장(潘璋)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침 조조가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마침내 형주(荊州)를 나누어 동쪽 지역인 장사(長沙), 강하(江夏), 계양(桂陽)을 손권에 속하게 하고 서쪽 지역인 남군(南郡), 영릉(零陵), 무릉(武陵)을 유비에 속하게 하였다.

「오주전」


건안 20년(215년), 손권은 선주가 이미 익주를 얻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형주를 돌려받고자 한다고 통보했다. 선주가 말했다.

“양주(涼州)를 얻으면 형주(荊州)를 주겠소.”

손권이 분노하여, 여몽을 보내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의 세 군(郡)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선주는 군사 5만을 이끌고 공안(公安)으로 내려가고, 관우에게 익양(益陽-장사군 익양현)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해, 조공이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선주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강주(江州-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선주전」


이후에 유비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유장을 병탄하려고 도모하며, 관우를 남겨 지키도록 했다. 손권이 말했다.

"교활하게 포로(猾虜)가 감히 속이다니(挾詐)."

관우는 노숙이 경계를 인접하고 있게 되자, 자주 의심이 있었으므로 경계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났는데 노숙은 항상 우호적으로 그들을 진무시켰다. 그러나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권은 장사(長沙), 영릉(零), 계양(桂)의 반환을 요구했다. 유비는 이 요청을 거절했기에,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진격하여 취하도록 했다.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직접 공안으로 돌아와서 관우를 파견해 세군을 쟁취하도록 했다. 노숙은 익양(益陽)에서 관우와 서로 대항했다.

「노숙전」


이 때 유비는 관우에게 영을 내려 진수하면서 형주를 독점하고 있으니, 손권이 여몽에게 명을 내려 서쪽으로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楊) 3군으로 공취하라고 했다. 여몽이 2군에 편지를 보내 귀복해 올 것을 바랬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普)만이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다 유비가 촉에서 친히 공안으로 와, 관우를 파견 3군을 쟁취하도록 했다.

손권은 이 때 육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노숙에게 1만 명을 거느리고 익양에 주둔하며 관우에게 대적케 하고, 여몽에게 편지를 급히 보내 불러들이고 영릉은 버리고 급히 돌아와 노숙을 돕게 했다.

처음에 여몽이 장사를 평정하고, 마침 영릉으로 가다가 영현을 지나면서, 남양(南陽)의 등현지(鄧玄之)를 수레에 태워 주었는데, 등현지는 학보의 옛 친구라 (그를 통해) 학보를 회유하려 했다.

돌아오라는 글월을 받게 되자, 이것을 비밀로 하면서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계획을 일러주고 새벽이 되자 성을 공격하는데 등현지를 돌아보면 말했다.

"학자태(子太; 학보의 자가 자태)는 세상에 충의의 일이 있음을 듣고, 또 이를 행하고자 했으나, 때를 알지 못하오. 좌장군(유비)은 한중에 있으면서 하후연(夏侯淵)에게 포위되었소. 관우는 남군에 있으나 지금 지존께서 몸소 직접 대하고 있소. 근자에 번성에 있는 본래 주둔지를 격파하여 영현을 구하려다, 오히려 손규(孫規)에게 격파되었소. 이것은 모두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며 그대가 직접 본 것이다.

저들은 막 머리와 꼬리가 거꾸로 매달려 목숨을 구하려하나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여력이 남아 이 군영을 회복하겠소? 지금 나의 군사들은 모두 정예로써 사람마다 목숨을 바칠 것을 생각하고, 지존은 병사를 보내어서 (이어진 것이) 길에서 끊어지지 않고 있소.

지금 자태가 아침저녁에 달린 목숨으로 바랄 수 없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으니, 소 발자국에 물고기가 밟힌 것과 같고, 장강과 한수에 힘입기를 바라지만, 믿을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하오. 만약 자태가 사졸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여 고립된 성의 수비를 보전하고 오히려 아침저녁으로 시간 끌어 구원할러 올 자들을 기다릴 것은 가(可)하오. 그러나 지금 나의 힘과 생각을 헤아려 보건대, 이곳을 공격하면 채 하루도 안 되어 성은 기필코 파괴될 것이고, 성이 파괴된 후에 자신이 죽어 무슨 이로운 일이 일을 테며, 백세가 되신 노모에게 백발을 엎고 주살 당하게 한다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소? 이를 헤아려 보면 그는 바깥의 소문을 못 듣고 원병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오. 그대는 만나볼 수 있으니, 화복에 관해 얘기해 보시구려"

라 했다.

등현지가 학보를 만나, 여몽을 뜻을 갖추어 말해주니, 학보는 두려워하며 이를 따랐다. 등현지가 먼저 나와 여몽에게 보고하길, 잠시 후 학보가 뒤따라 올 것이라 했다. 여몽이 4 장수에게 미리 명령해, 각자 1백 명을 뽑아, 학보가 나오면 곧장 들어가 성문을 지키게 했다.

잠시 후 학보가 나오자, 곧장 성문으로 들어가 지키고, 여몽은 환영하며 그의 손을 잡고서는 그와 같이 배에서 내렸다. 말이 끝나자, 편지를 꺼내 보여주고선, 손을 치며 크게 웃었는데, 학보가 그 글월을 보고 (지금 유비와 관우가 쳐들어오니 영릉에 있는 학보 같은 것은 내버려두고 빨리 되돌아와 익양에 있는 노숙을 도우라는 손권의 편지) 유비가 공안에 있고 관우는 익양에 있음을 알아 부끄러워 땅 속에 숨고 싶어 했다. 여몽은 손교(孫皎)를 남겨 뒷일을 맡겼다. 그날로 군대를 이끌고 익양으로 갔다.

유비가 동맹을 청하니, 손권이 이에 학보 등을 돌려보내고, 상수(湘水)를 분할해 영릉을 돌려주었다. 심양과 양신(陽新)을 여몽의 봉읍으로 삼았다.

「여몽전」


후에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을 진무시키고 관우에게 대항했다. 관우는 3만 명이라 칭하고,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한다고 말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 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 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 양신(陽新)ㆍ하이(下雉)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감녕전」


여몽 등과 함께 서쪽으로 3군을 공취하고, 익양(益陽)에서 돌아와 합비로 가서, 우부독(右部督)이 되었다.

「능통전」


건안(建安) 20년(215), 여대는 손무(孫茂) 등 10명의 장수를 인솔하여 장사(長沙)의 세 군(郡)을 취하는 일에 참가했다. 또 안성현(安成)ㆍ유현(攸)ㆍ영신현(永新)ㆍ다릉현(茶陵)의 관리가 모두 음산성(陰山城)으로 들어가 무리를 규합하여 여대에게 대항했다. 여대는 이들을 공격하여 즉시 항복시켰고, 세 군은 평정되었다. 손권은 여대를 남겨 장사를 지키도록 했다. 안성현(安成)의 장(長) 오탕(吳碭)과 중랑장(中郎將) 원룡(袁龍) 등이 관우(關羽)와 결탁하여 또 반란을 일으켰다. 오탕은 유현을 점거하고 있었고, 원룡은 예릉(醴陵)에 있었다. 손권은 횡강장군(橫江將軍) 노숙(魯肅)을 파견하여 유현을 공격하도록 했다. 오탕은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여대는 예릉(醴陵)을 공격하여 마침내 원룡을 붙잡아 참수시켰다. 그래서 여대는 여릉태수(廬陵太守)로 승진했다.

「여대전」


건안 20년(215)에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주의 남쪽에 위치한 세군(장사ㆍ영릉ㆍ계양)을 급습하도록 했다.

요립은 탈출하여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유비는 평소부터 그를 알고 있었으므로 예우해 주고 심하게 문책하지 않았으며, 파군태수(巴郡太守)로 임명했다.

「요립전」



4.4.1. 단도부회[편집]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여 각각 병마를 백보 밖으로 주둔시키고, 단지 장군들만이 단도를 갖고 함께 만났다. 노숙은 관우를 여러 차례 질책하여 말했다.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요.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소.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소."

노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한사람이 말했다.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

노숙은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 질타했는데 언사와 안색이 매우 절절했다. 관우는 칼을 잡고 일어나서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눈빛으로 떠나가도록 했다.

「오서」에 이른다. 노숙이 관우와 회담하려고 하던 때, 제장은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주의를 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노숙이 답해 말했다.

"오늘과 같은 사태에 있어서는 서로 뱃속을 드러내 보이고 대화치 않으면 아니 되오. 유비는 국사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시비를 바로 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또한 관우가 더불어 명령에 거스를 수 있겠소!"

그리고는 관우를 만나러 나갔다. 관우가 말하기를

"오림(烏林)의 전역에서는 좌장군(左將軍 유비)은 군중에 몸을 두시고, 주무실 때에도 갑주를 풀지 않으셨으며, 협력하여 위를 격파하였던 것이오. 어찌 우리가 고생한 것을 무로 돌려 한 뼘의 땅이라도 빼앗길 수 있겠으며, 족하(足下 노숙)는 무슨 연유로 (우리의) 토지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오?"

라 하였다. 노숙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지 않소. 본시 장판에서 예주(豫州 유비)를 살펴보았을 때, 예주의 군세는 일교(一校 한 부대)를 이룰 만한 병력에도 차지 않았고, 계략과 사려는 이미 다하였으며 전의도 기세도 모두 무너진 상태로, 멀리서부터 도망쳐 숨고자 생각할 뿐으로, 도저히 그것(위군을 격파하여 형주를 손에 넣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소.

주상은 예주가 몸을 둘 곳조차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토지나 휘하의 힘을 보태 주시기를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며, 그가 세력을 돌볼 수 있도록 비호를 더하여 그 곤란을 구제하셨소. 헌데도 예주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은의에 등을 돌리고 호의를 저버렸소. 지금 이미 서쪽의 주(익주)를 (스스로 몸을 기댈 곳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주의 땅까지 차지하려 하다니. 이는 범부라 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행위로, 어찌 군주란 자가 할 바이겠소!

내 듣기로는 탐욕을 따라 움직이며 의를 버리는 것은 필시 재난을 불러오는 것이라 하였소. 그대는 중임을 맡았음에도 분수를 모르면서 도리를 지키거나 의를 받들어 보필하지도 못하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군세를 의지하여 힘을 겨루고자 하나, 부곡(군대)이 이미 흐트러졌음에도 어찌 겨루어 이길 거라 생각하오?"

관우는 이에 답하지 못했다.

유비는 상수(湘水)를 경계로 하여 나누었으며, 쌍방의 군대는 대결을 끝냈다.

「노숙전」



4.4.2. 노필의 의견[편집]


앞서 유비가 땅을 빌리러 왔다는 강표전 배주를 보고 삼국지집해의 편찬자 노필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낸바 있었다.

노숙전에서 이르길 유비가 경구(京口)에 이르러 손권을 보고, 형주를 모두 거느리길 청하니, 오직 노숙만이 손권에게 이를 빌려줘, 함께 조공을 막으라고 권했다. 조공이 손권이 토지로 유비에게 기반이 되게 함을 듣고, 바야흐로 글을 쓰다, 붓을 땅에 떨어트렸다. 또한 노숙이 관우를 꾸짖길 "국가가 각각 다르나, 본래 토지를 그대들에게 빌려준 것은, 그대들의 군이 패해 멀리서 와, 의지할 곳이 없는 까닭이었소."

배주(裴注)에서 인용한 한진춘추(漢晉春秋) 에서 이르길 노숙이 손권에게 마땅히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라고 권했다. 다시 오서(吳書)를 인용해 이르길, 노숙이 관우에게 이르길 "주상께서 예주의 몸이, 머물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셔, 토지와 사인의 힘을 아깝게 여기지 않으시고, 두둔하여 보살펴 주게 함이 있으셨소."

여몽전(呂蒙傳)에서 손권이 이르길 "자경이 나에게 현덕(玄德)에게 땅을 빌려주라 권한 것이, 그의 한 가지 결점이었소." 제갈량전에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하길 "예주께서 달아나 여기에 이르셨으니, 장군의 힘을 헤아려 이를 대처하십시오." 이상의 이러이러함에 근거하면, 선주가 형주의 여러 군을 가진 것은, 진실로 손권이 빌려준 것이다.

그러나 본전(선주전)의 아랫 글을 상고하길 "선주가 남으로 4군을 정벌하니, 4군이 모두 항복했다.", 또한 제갈량전을 상고하길 "조공이 적벽에서 패해, 선주는 마침내 강남을 거둬들여, 제갈량에게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거느리게 했다." 이 두 열전에 근거하면, 4군은 모두 선주가 자력으로 정복한 것으로, 오가 빌려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일의 정세를 추구하면, 선주는 기울어진 채 한진(漢津)으로 달아나, 오회(吳會)에 구원을 청하여, 진실로 자경이 이른 바와 같이, 적벽전의 승에서 공이 없지 않았기에, 손권이 그가 직접 형주의 여러 군을 취함을 허락해도, 저항하지 않았으니, 임시로 빌린 것과 다를 게 없어, 마침내 각각 일설(一說)을 믿었고, 또한 유, 손의 후일 분쟁의 발단 원인이 됐다. 이에 제각기 여러 군을 다퉈, 조씨가 마침내 중원에 웅거했으니, 제갈승상표(諸葛丞相表) 안에서 "오가 다시 맹약을 어겨, 관우가 실패하고, 자귀(秭歸)에서 넘어져, 조비(曹丕)가 황제를 칭했습니다."라 일렀다.


즉, 유비는 형주를 다 돌려주겠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익양대치로 3군을 가져가고 분쟁을 끝낸다. 이는 유비가 스스로 형주에 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 증거로 막상 익양대치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형주를 방어하려고 했고 익양대치 이후 협약에서 형주를 분할하는 형태로 소유하려고 했다. 위에서 나온 노필의 말마따나 유비는 당시 정세상 자신이 형남 4군을 차지했으니 형주의 일부(남군)만 빌렸다고 생각했고 손권은 당시 정세상 유비가 자신들이 아니었다면 형남 4군을 먹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여 전부 빌려줬다고 생각했다 보는 게 타당하다.

노필의 말 따라 유비는 정세가 자신에게 따르는 걸 보고 형남 4군을 자력으로 얻은 것이고 이미 손권이 유비를 형주목으로 인정했으니 형주의 영유권은 내심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고 새삼 손권과 경구에서 만나 형주를 감독하겠다고 요구한 것도 유비 통제 밖이던 강릉을 빌리기 위해서 한 말일 것이다. 반면 노필의 말 따라 손권은 애당초 자신이 적벽에서 공이 있다고 여겨 유비에게 형남 4군을 취하는것을 허락했고 유비가 그에 저항하지 않았으니 형주 전체를 임시로 빌린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유비가 확실하게 반박하지 못한 것을 보면 형남 4군 정벌은 손오 측의 묵인하에 이뤄졌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이렇게 유비가 형남 4군을 차지하는걸 막을 생각을 못 냈다가 나중에서야 형주 전부를 빌려갔다면서 익양대치를 일으킨것이 사실에 부합한다. 물론 이는 적벽대전과 남군공방전은 주유와 유비가 동맹으로서 동시에 같이 치룬 전쟁이고 유비 측의 공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손권이 간과한 것이다. 애당초 당시 손권이 형남 4군을 먹을 여력이 되는지부터가 의문으로, 손권세력은 강릉과 합비전선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유비가 힘을 보태어 강릉에서 같이 싸웠을 정도로 후달리는 상황이었는데 유비가 형남 4군을 먹은것을 방치했다면 모를까 시혜적 의미로 기회를 베풀었다는건 손권측 입장만 반영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니 형주 전체를 주기도 싫고 현실적으로도 융중대의 가장 중요한 퍼즐인 데다가 촉한의 2인자 관우가 형주에 단독으로 부임해있었기 때문에 주기도 어려웠다. 또한, 손권이 하는 짓이 얄미웠던 것도 사실이다. 유비는 익주를 얻고 안정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었고 북쪽의 조조와 맞서 한중을 얻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형주 전체를 요구하는 손권의 입장에 맞서 동맹인 손권을 자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량주를 얻으면 형주를 주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로 립서비스를 했지만 정작 익양대치가 일어나자 유비의 복심(腹心) 중 하나인 관우는 대놓고 "오림(烏林)의 전투에서, 좌장군(左將軍, 유비)께선 주무시면서도 갑옷을 벗지 않으시고, 힘을 모아 조조를 격파했는데, 어찌 헛되이 수고만 하고 한치의 땅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족하는 왜 땅을 빼앗으려 하는 겁니까?"라고 대놓고 노숙에게 반박했다.

비록 노숙의 말마따나 동오의 도움은 받았지만 유비군은 손오와 동등한 동맹으로서 같이 조조를 격파했으니 남형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게 유비의 본심이었을 것이다. 또 이 말이 나올 당시엔 일단 입촉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아 익주를 안정시켜야 할 이유가 유비에게 있었다. 북쪽으로는 조조가 한중정벌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데 이거에 신경 안 쓰고 익주를 놔둘수는 없었다. 실제로 당시 상황은 유비가 형주를 감독하러 경구에 오기 이전부터 형주목이었고 형남 4군과 공안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강릉을 얻기 위해 형주 전체를 감독한다는 명분하에 강릉을 지배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오주전에서 유비가 '돌려주겠다'라고 말했다고 손권 입장에서만 쓰인 글과는 달리 자치통감은 선주전이 더 맞다고 보고 형주 여러군을 달라는 손권의 요구에 '량주를 얻으면 형주를 다 주겠다'라고 쓰여졌다. 이는 유비가 형주를 빌린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돌려주는 게 아니라 그냥 주겠다는 것이며 어차피 일단 익주를 안정시켜 한중을 얻을 시간을 벌고자 하는 말일 뿐이다. 이렇게 한중을 얻어 융중대의 조건이 갖추어지면 영유하고 있는 남형주와 함께 진군해 량주와 북형주를 손에 넣고 상용을 손에 넣어 량주-한중-상용-북형주의 루트를 완성시키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반면, 노숙이 손권의 입장을 대변하여 관우의 말을 반박하며 말하는 대로 손권 입장에서 보면 유비 이놈은 참 나쁜 놈인 셈인데 적벽에서 구원해주고(사실은 같이 싸운거지만), 남군을 빌려주어 결과적으로는 익주까지 얻었음에도 형주를 반환하지 않는다.(물론 이것은 철저히 결과론적인 생각이다.) 참다못해 사신을 보내 유비에게 재촉까지 하지만 유비는 '량주를 얻으면 형주를 주겠다'고 한다. 사실 이말은 시간을 끌면서 당장 반환하지 않겠다라는 얘기니까. 량주를 언제 얻을지도 모르고 얻을수 있을지도 모르고 얻는다해도 말이 또 바뀔 수가 있다. 그러니 분노한 손권은 무력을 동원하여 남군과 무릉군을 제외한 3군을 무력으로 뺏는다. 노숙은 오나라가 은혜를 주어 의탁할 곳도 없었던 유비가 강하 하구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 말은 틀렸다, 노숙이 은근히 강하는 유기, 유비 소유였다는 걸 빼버린 것이다.

또 손권 입장에서는 유비가 자신을 입촉하지 못하게 속인 것까지 더해 입촉 때까지 유비의 꼭두각시처럼 놀아난 것에도 분노했을 것이다. 유비가 위기에서 벗어나 성장했으니 형주는 사실상 자기들 땅이라고 하는 것이고 관우 역시 유비군이 위급한 상황에서 오나라의 도움을 받아 조조를 격파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이에 대해선 반박하진 못한다. 이로서 오나라와 손권은 '왜 은혜를 갚지 않느냐? 우리는 너희 사정봐주면서 3군만 반환하라고 했다.' 라고 주장했다.

애당초 손권이 유비가 유기의 뒤를 이어 형주목이 되고 형남 4군과 공안을 차지한것을 두려워해 여동생을 바쳤고 그 후에야 유비가 손권을 방문했다는 선주전의 기술로만 봐도 손권이 유비가 차지한 형남 4군과 공안에 대하여 실제 지배권을 행사했다거나 유비가 손권의 밑이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보는것이 합당할 것이다. 유비에게는 또한 유기를 이었다는 확고한 명분이 있기까지 했다. 또한 노필은 제갈승상표(후출사표)를 인용해 오나라가 다시 맹약(익양대치 후 3군을 분할한 것)을 어겨 관우가 실패한 것(형주를 차지한 것)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익양대치 후 서로 여러군을 다투다가 맹약으로 형주를 분할한 것으로 분쟁이 끝났음에도 오나라가 형주를 쳤음을 말하고 있다.


4.5. 결말[편집]


이로써 형식적으로 형주 소유권에 대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이제부터는 땅을 빌렸느니 돌려주느니 이런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오 측은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4]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해 큰 불만을 품었다.

또한, 형주를 기반으로 유비가 폭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손권 측에서는 유비를 부려서 조조를 막겠다는 주유 - 노숙의 전략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노숙의 뒤를 이은 대도독 여몽. 한편 유비 측에서도 관우는 손권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이는 또 다른 파국을 낳는 원인이 된다.[15]

한편, 노숙이 217년에 사망하고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된다.


5. 219년, 삼국의 충돌[편집]



5.1. 발단[편집]



5.1.1. 후음의 난[편집]


겨울 10월, 완(宛)의 수장(守將) 후음(侯音) 등이 반란을 일으켜 남양태수를 붙잡고 관원과 백성들을 겁략(劫略)하여 완을 보전했다. 당초 조인(曹仁)이 관우(關羽)를 토벌하기 위해 번성(樊城)에 주둔했었는데 이 달에 조인에게 완을 포위하게 했다.

24년(219) 봄 정월,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했다.

이때 남양인들이 요역(繇役)에 고통스러워하자 후음이 태수 동리곤(東里袞)을 붙잡고 관원, 백성들과 더불어 모반하고 관우와 연합했다. 남양의 공조(功曹) 종자경(宗子卿)이 후음을 찾아가 설득하며 말했다.

“족하께서 민심에 순(順) 하여 대사를 일으키니 원근에 그 풍채를 우러러 보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군(郡)의 장령들을 붙잡은 것은 역(逆)하는 것으로 무익한 일입니다. 어찌 그를 보내지 않으십니까? 내가 그대와 힘을 합치면 조공(曹公)의 군이 와도 겨룰 수 있고 관우군 또한 당도할 것입니다.”

후음이 이 말을 좇아 태수를 풀어주었다. 종자경은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달아나 태수와 함께 남은 백성들을 거두어 후음을 포위했고, 때마침 조인군이 도착하자 함께 힘을 합쳐 후음을 멸했다. - 「조만전」

「무제기」


다시 조인을 행(行) 정남장군(征南將軍), 가절(假節)로 삼았고 번(樊)에 주둔하며 형주를 진수하게 했다.

후음(侯音)이 완(宛)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주변 현의 무리 수천 명을 초략하자 조인이 제군을 이끌고 후음을 공파하여 참수하고는 번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정남장군(征南將軍)에 임명되었다.

「조인전」


후음(侯音), 위개(衞開) 등이 완성에서 모반하자, 방덕은 수하를 이끌고 조인과 더불어 완성 공략에 나서 이 둘을 참했다.

「방덕전」


218년 10월, 완에서 후음이 반란을 일으키자 번성에 주둔하던 조인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떠났고 219년 정월에 조인과 방덕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하고 다시 번으로 돌아왔다.


5.1.2. 한중 정복[편집]


건안 24년(219)에 맹달에게 명하여 자귀(秭歸)로부터 북쪽으로 방릉(房陵)을 공격하도록 했다. 방릉태수 괴기(蒯祺)가 맹달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맹달이 장차 진군하여 상용(上庸)을 공격하려고 하자, 유비는 맹달이 독자적으로는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은근히 걱정했다. 유비는 곧 유봉을 보내 한중으로부터 면수(沔水)를 따라 내려가 맹달의 군대를 통솔하도록 하여 맹달과 함께 상용에서 결합하도록 했다.

상용태수 신탐(申耽)은 사람들을 인솔하여 투항하고 처자와 종족 사람들을 성도로 보내 인사하도록 했다. 유비는 신탐에게 정북장군(征北將軍)의 지위를 주고, 상용태수(上庸太守) 원향후(員鄉侯)를 이전처럼 겸임시켰으며, 신탐의 동생 신의(申儀)를 건신장군(建信將軍)ㆍ서성태수(西城太守)로 임명하고, 유봉을 부군장군(副軍將軍)으로 승진시켰다.

「유봉전」


여름, 조공은 과연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선주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 유봉(劉封), 맹달(孟達), 이평(李平) 등을 보내 상용(上庸)에서 신탐(申耽)을 공격했다.

가을, 군하(群下)들이 선주를 올려 한중왕(漢中王)으로 삼고, 한나라 황제에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렸다.

「선주전」


219년 여름 5월, 한중에서 유비와 대치하던 조조가 회군하고 마침내 유비가 한중을 차지한다. 이후 유비는 맹달, 유봉, 이평 등을 보내 상용까지 정복한다. 이후 스스로 한중왕에 등극한다.


5.1.3. 관우와 손권[편집]


이때 손권은 관우에게 관우의 딸[16]과 자신의 아들의 혼담을 주선하지만 관우는 이를 단박에 거절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하고 오 내부에서도 관우를 공격하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5.2. 양번 전역[편집]



5.2.1. 번성 포위와 수엄칠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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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7월,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曹仁)을 도와 관우(關羽)를 공격하게 했다.

8월, 한수(漢水)가 범람해 우금군에 물이 흘러들어 군이 수몰했다. 관우가 우금을 사로잡고는 이에 조인을 포위했다. 서황(徐晃)에게 조인을 구원하게 했다.

「무제기」


관우가 번을 공격하고 이때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 등 7군이 모두 물에 잠기고 우금이 관우에게 항복했다. 조인은 인마(人馬) 수천으로 성을 지켰는데 성에서 물에 잠기지 않고 남은 부분이 수 판(板)[17]

에 불과했다.

관우가 배를 타고 성으로 와서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안팎이 단절되었고 양식이 떨어지려 하고 구원병은 도착하지 않았다. 조인이 장사(將士)들을 격려하고 필사의 각오를 보이자 장사들이 감복하여 모두 하나가 되었다.

「조인전」


건안 24년(219년), 선주(先主)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前將軍), 가절월(假節鉞)로 삼았다.

이 해,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번(樊)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조공이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비가 내려 한수(漢水)가 범람하고 우금이 이끌던 7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양(梁), 겹(郟), 육혼(陸渾)의 군도(群盜)[18]

들이 혹 멀리서 관우의 인호(印號)[19]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고 관우의 위세가 화하[20]를 진동시켰다(羽威震華夏).

「관우전」


건안 24년(219년), 태조가 장안(長安)에 있을 때 조인으로 하여금 번(樊)에서 관우를 치게 하고 또한 우금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장마비가 내렸다. 한수(漢水)가 범람해 평지에 물이 차올라 수 장(丈)에 이르렀고 우금 등의 칠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고,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투항하고, 오직 방덕(龐德)만이 절의를 굽히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태조가 이 일을 듣고 오랫동안 애탄(哀歎)해 하며 말했다.

“내가 우금을 30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위난에 처하자 오히려 방덕보다 못하리라는 것을 어찌 짐작했겠는가!”

「우금전」


마침내 관우는 그 틈에 형주의 군세를 이끌고 양양, 번성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한다. 이에 대해선 무제기에 따르면 조인이 먼저 관우를 치기 위해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위의 선제공격을 막기 위해 북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21] 조인은 이미 봄 정월에 후음을 참하고 번성에 돌아왔고, 관우는 여름/가을에 북진을 했으므로 후음과 연계했다기보단 반란을 틈타 북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조조는 우금에게 7군을 주어 조인을 도와 관우를 공격하게 하고(遣于禁助曹仁擊關羽) 서황을 완에 주둔시켰다.


그대로 남쪽으로 진군, 번성에 주둔하고 관우를 토벌했다. 번성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방덕의 형이 한중에 있었으므로 이를 의심하였다.

그의 사촌형의 이름을 방유(龐柔)라 하며, 이때 촉에 있었다. - 「위략」

방덕은 거듭 말하기를

"나는 국은을 입은 몸이니, 죽음으로 의를 다하겠소. 내가 직접 나서서 관우를 치고자 생각하고 있소. 올해 안에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관우의 손에 죽겠소."

라 하였다.

이후 직접 관우와 교전하여 관우를 노리고 화살을 날려 그 이마에 적중시켰다. 그 무렵,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으니, 관우의 군중에서는 그를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모두 두려워하였다. 조인은 방덕을 번성에서 북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주둔시켰으나, 십여 일 계속된 비에 한수가 범람하여 번성의 평지는 5, 6장 정도 수몰되었으므로 방덕은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제방에 올라 물을 피해다. 관우가 배를 타고 이를 공격해왔는데, 큰 배에서 사방으로부터 제방 위에 화살을 쏘아댔다. 방덕은 갑주를 몸에 두르고 활을 잡고 나섰으니, 쏘는 화살마다 빚나가는 것이 없었다. 장군 동형(董衡), 부곡장 동초(董超) 등이 항복하려 하였으므로, 방덕은 그들을 붙잡아 베어 죽였다.

일출시부터 전력을 다하여 정오가 지나도록 싸웠으나, 관우의 공격은 점점 격렬해졌다. 방덕이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다. 방덕은 독장 성하(成何)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양장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도망치 않고, 열사는 절개가 꺾이면서까지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이 내 제삿날이니라."

싸움에 성냄이 더해지고, 기운이 점점 커져갔지만, 물이 높게 차오르니, 관병(吏士) 모두가 항복하였다.

방덕은 휘하의 장수 한 명, 오백(伍伯오장) 두 명을 거느리고 활을 당기며 작은 배에 올라 조인의 진영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물결에 배가 뒤집혀 활과 화살을 잃어 버렸고, 전복한 배에 매달려 물속에 있던 중에 관우의 포로가 되었으나, 당당히 서있었다.

관우가 말했다.

"경의 형은 한중에 있소. 나는 경을 장수로 세우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찌 빨리 항복하지 않았소?"

이에 방덕은 관우를 질책하며 말했다.

"꼬마야, 어찌 항복 따위를 논하느냐! 위왕께는 정병 백만이 있으며, 위의를 천하에 떨치고 계신다. 네 유비 따위는 범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대적이나 가능할 줄 아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귀신이 될 생각이니, 적의 장수 따위가 되지는 않을 셈이다."

결국 관우에게 죽임을 당했다.

「방덕전」


건안 24년(219),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는데, 이때 각 주에서는 모두 병사를 변방 지역에 주둔시켰다. 온회가 연주자사 배잠(裴潛)에게 말했다.

“이 시기는 비록 적이 있지만 걱정할 가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남방을 정벌하는 군사에게 변고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강물은 불어나고 조자효(曹子孝 : 조인)는 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우는 효예(驍銳-용맹하고 정예함)하여, 이로운 형세로 진군해오면 장차 근심이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과연 그 다음에 번성에서 일이 생겼다.

「온회전」


관우가 양양(襄陽)을 포위했을 때, 만총은 정남장군(征南將軍) 조인(曹仁)을 도와 번성(樊城)에 주둔하여 그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좌장군(左將軍) 우금(于禁) 등의 군대는 폭우로 물이 불어나서 관우에게 전멸되었다. 관우는 급히 번성을 공격하였다. 번성은 물에 잠겨 자주 붕괴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안색을 잃었다. 어떤 사람이 조인에게 말했다.

"지금의 위험은 우리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관우의 포위진이 합쳐지지 않는 틈을 타서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달아나십시오. 비록 성을 잃을지라도 생명은 보존할 수 있습니다."

만총이 말했다.

"산으로부터 흐르는 물은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관우가 파견한 다른 군대는 이미 겹현(郟: 허창 인근 하남성의 지명) 아래에 주둔해 있으며, 허성(許) 남쪽 지역의 백성들은 불안해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관우가 지금 감히 즉시 진격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 군대가 그들의 뒤를 끊을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만일 도주한다면 홍하(洪河) 이남 지역은 다시는 위나라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잠시 기다려야만 합니다."

조인이 말했다.

"알겠소!"

만총은 백마(白馬)를 물속 깊숙이 잠기게 하여 (제품으로 삼고는) 군사들과 함께 맹세했다.

「만총전」


다시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宛) 에 주둔했다. 때마침 한수(漢水)가 크게 범람하여 우금 등이 물에 잠겼다. 관우가 번(樊)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또한 양양(襄陽)에서 장군 여상(呂常)을 포위했다.

「서황전」


선제[22]

가 또 이르길,

"형주자사 호수(胡脩)는 거칠고 난폭하고 남향태수 부방(傅方)은 교만, 사치스러워 둘 다 변경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고 했으나 위무제가 이를 살피지 않았다.

촉장 관우(關羽)가 번(樊)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 등 7군이 모두 패몰하자 호수, 부방은 과연 관우에게 항복하니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욱 위급해졌다.

『진서』 「선제기」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되어 처음으로 육구에 이르러서,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후에 관우가 번(樊)성을 토벌하는데, 병사를 남겨 장차 공안과 남군을 수비하도록 했다.

「여몽전」


자치통감에 따르면 7월에 관우 스스로는 무리를 인솔해 조인을 번에서(於樊) 공격하였고 조인은 좌장군 우금과 입의장군 방덕 등에게 번성의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23][24] 조인이 이렇게 우금과 방덕을 북쪽에 주둔하게 한 것은 조인 역시 자신의 군대가 외떨어진 현군임을 인식하고 번성을 둘러싸고 있는 면수를 통해 관우가 번성을 포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북쪽을 보완한 포진으로 보인다. 성에 남아 있던 조인이나 만총이 방덕처럼 따로 성을 나서서 번성 인근 면수 물가를 방어했다는 말은 없으므로 면수를 장악한 관우의 선봉이 도착하면 번에서 공성전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은 성에 의지해 번에서 공격하는 관우를 상대하고 북쪽은 방덕, 우금에게 맡겨 수비하게 한 것이며 그래서 번을 완전히 포위하려는 관우와 그를 막으려는 방덕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던 것이다.

「만총전」을 보면 관우의 본영이자 포위망의 시작은 면수 남쪽인 양양부터였다. 당시의 전투에서 번성에 주둔하던 방덕은 자기가 직접 관우와 싸워 관우를 죽이겠다고 맹세했으며 그 말대로 친히 관우와 백마를 타고 교전해 백마장군이라고 불리며 관우군의 두려움을 샀으며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맞추기도 하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 이렇게 번성에서의 싸움이 벌어지기를 한달, 8월 장장 십여일간 계속된 비에 한수가 범람하였으므로 방덕은 번성에서 북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주둔했는데도 수몰되었고, 우금의 칠군 역시 수엄칠군고지가 방덕보다도 더 번성 북쪽에 있었음에도 마찬가지로 수몰되었다. 수해를 피한 관우는 배에 타서 허우적대거나 제방으로 올라간 위군을 모조리 화살로 쏘아 죽였다.

「우금전」을 보면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다고 하는데 수엄칠군고지 자체는 평지에 가까운데 여기서 북쪽으로 몇km 이동하면 물을 피할수 있는 해발 100m가 넘는 구릉지 언덕이 나온다.[25] 양양 남쪽에 보면 현산이라고 고지대가 있는데 관우는 미리 이곳을 선점하고 군사들을 뺐을 가능성이 있다. 아예 처음부터 양양-번성의 고지감제가 가능한 현산에 진을 쳤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관우가 번성에 주둔하고 있던 방덕과 직접 싸우고 있었다가 방덕이 북쪽으로 이동했으므로 관우도 번성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관우와 우금의 차이는, 관우는 양양에서 번성으로 올 때 강을 건너와야 하지만, 우금은 북쪽에서 오기 때문에 배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우금의 경계 부족이라기보단 마침 관우에겐 배가 있었고 우금에겐 없었던 것이 주요 원인일 것이다. 번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물이 갑작스럽게 불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우금은 피하지 못했다.

수해를 피한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궁지에 몰려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형주자사 호수와 남향태수 부방도 관우에게 항복하였다.

살아남은 3만 군사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여기서 남향군은 본디 형주 남양군의 일부인데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접수하면서 남양의 서쪽을 갈라 새로 만든 군이다. 서쪽으로는 무관, 상용이 있고 동쪽으로는 얼마전 후음이 진압된 이 있다. 이 곳의 태수가 투항할 정도로 관우의 위세가 대단했던 것이다. 후일 육손에게 격파된 남향태수로 곽목이 나타는 걸 보면 관우는 따로 남향태수를 임명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조조 치하 형주는 얼마전에 있던 반란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남쪽의 관우 말고도 서쪽의 상용에서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괜히 관우가 유봉맹달에게 번성으로 지원을 오라고 한 것이 아닌 것이다.

24년(219년), 관우(關羽)가 양양(襄陽)에서 조인(曹仁)을 포위하자, 조조(曹公)는 좌장군(左將軍)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구원하도록 했다. 때마침 한수(漢水)가 불었기 때문에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江陵)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오주전」

「오주전」에 의하면 관우는 포로를 강릉으로 압송했고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방덕전」에 의하면 관우는 물을 피해 제방에 올라간 방덕을 비롯한 조조군을 사방에서 큰 배로 화살을 쏘아 모조리 쏴 죽이고 일출 때부터 아침을 넘어 정오가 지날때까지 온종일 격렬하게 방덕의 군세와 싸웠고 방덕이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으며 방덕은 항복하려는 동형, 동초 등의 목을 베고 분전했으나 결국 장수 한 명과 오장 두 명을 거느리고 조인에게 돌아갈 목적으로 탄 작은 배가 뒤집혀 그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관우는 방덕의 사촌형이 한중에 있다며 자신의 장수가 될 것을 정중하게 권유했지만, 방덕은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고 투항을 거부하다 처형된다.

한편 이에 맞추어 허도 인근 양(梁)[26], 겹(郟)[27], 육혼(陸渾)[28]의 군도, 반 조조세력들이 혹은 멀리서 관우의 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다. 특히 육혼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손랑이 관우에게 귀속되어 관우의 관인을 받았으며 관우는 그에게 병사들까지 주어 위와 대적하게 했다.

또 이 틈을 타 조조의 본거지인 에선 위풍이 많은 사람이 연루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비에게 진압되었다. 위풍의 난은 사료가 없어서 어떤 성격의 반란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관우 진격 이후 혼란한 틈을 탄 시도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금석문인 위광해장군여군비(魏橫海將軍呂君碑)에서 이르길 관우가 변방을 흔들며, 유씨의 백성을 공경하였고, 홍수가 퍼지고 넘쳐 번성을 띄우고 가라앉게 해, 평원의 모든 병사는 겉으론 깔보나 몰래 내통했고, 맹장의 날랜 기병들은 물에 빠져 잠기거나 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재앙을 일으켜, 악한 이들이 들끓어, 어떤 이는 성을 유지하며 배반했고, 어떤 이는 무리를 거느리고 깃발을 등에 지며, 스스로 곧 문에 대적했다. 중인(中人) 이하는, 모두 다른 마음이 생겼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관우는 면수 인근에서 여상이 지키는 양양과 조인, 만총이 지키는 번성을 수륙양면으로 모두 포위하였다. 조엄전에 따르면 조엄이 서황을 따라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다. 정남장군 조인은 포위당해 인마 수천으로 버티고 있었으며 구원을 보낸 병력은 폭우로 인해 수몰되어 총사령관까지 사로잡혔다. 추가로 관우의 북벌에 호응하는 무리들이 수도인 허도 근방에 산재할 정도로 관우는 화하, 즉 중원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29][30]


5.2.1.1. 관우의 수공 논란[편집]

자치통감온회전에는 아예 이전부터 온회가 관우를 경계하면서[31] (자치통감에 따르면 큰비, 장마비(潦)에 따라) 지금 강물은 불어나는데 조자효(조인)가 현군(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있는 군사)으로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우는 용맹하여 예리하므로(자치통감에 따르면 용맹하고 교활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위험하다며 이 기세를 타고 들어오면 근심이 될 것이라고 홍수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 「만총전」, 「서황전」, 「방덕전」 등에서 모두 폭우로 인해 한수가 범람했다고 나오지 관우가 수공을 했다는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우가 수공을 했다기 보다는 역사서에 적힌대로. 조인이 장래의 위험(홍수)에 대비하지 못한데 반하여 관우는 용맹하여 예리하기에 이 위험을 이용하여 승기를 잡아 승리하였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5.2.1.2. 칠군의 규모[편집]

자치통감을 번역한 권중달 교수는 중국의 고대병제를 적용해 101,500명 정도의 대병으로 추측했으나 이는 좀 높게 잡은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편 화양국지에 따르면 7군의 규모가 30,000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거의 전군이 사로잡힌것이 된다.

중국어 위키백과 번성지전(樊城之戰) 문서에선 1군의 규모를 12,500명으로 보는데 이는 조조가 직접 펴낸 손자병법의 주석 손자략해(孫子略解) 4권에서 조조 스스로 말하길 《사마법(司馬法)》에 이르길 12,500명을 군이라 할 수 있다(曹操曰:《司馬法》曰:「萬二千五百人為軍。」)이라고 적었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면 7군은 87,500명이다.

다만 이 설은 설득력이 낮다. 조조가 216년에 하후돈을 26군의 도독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1군 12500명 설에 의하면 32만 5000명이 된다. 문제는 26군이 회남전선에 있었다는 것으로 당시 조조군에겐 이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1군 12500명 설은 신빙성이 낮으며 조조가 손자의 주석에서 언급한 것은 춘추시대 이전의 1군의 규모에 대한 언급으로 봐야할 것이다.

조조군의 편제를 명확하게 알 수 없기에 추측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삼국지』 「오주전」에 우금의 보병과 기병 3만을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3만명 이상인 것은 확실하다.

5.2.2. 천도를 고려하는 조조[편집]


조조는 번성이 함락되면 허도가 위험해질 것을 우려해 도읍을 옮기는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이때 사마의와 호군 장제는 조조의 의견에 반대하며 간언한다.

관우가 번성과 양양(襄陽)을 포위했다. 태조는 한 헌제가 허창에 있어 적과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다. 사마선왕과 장제가 태조에게 권하여 말했다.

“우금 등은 홍수에 빠져 죽었는데, 결코 공격하여 싸운 과실이 아니므로 국가의 원대한 계획에 손해될 것은 많지 않습니다. 유비와 손권은 겉으로 친하지만 속으로는 소원합니다. 관우가 생각한 바를 얻는 것을 손권은 반드시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파견하여 그 배후를 습격하도록 권하고, 장강 이남지역을 분할하여 손권을 봉하도록 허락하면 번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태조는 그의 말대로 했다.

「장제전」


당시 한나라 황제가 허창에 도읍하고 있었는데 위무제는 적이 가깝다 하여 하북으로 천도하고자 했다. 선제가 간언했다.

“우금 등이 수몰당한 것은 나아가 싸우거나 물러나서 지키다 실책한 것이 아니며 국가 대계(大計)에 손실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천도한다면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며 또한 회수(淮水), 면수(沔水) 인근의 백성들을 크게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손권, 유비가 겉으로는 친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손권이 할 바를 깨우쳐주어 그로 하여금 관우의 배후를 협공하거나 견제하게 하면 번(樊)의 포위는 절로 풀릴 것입니다.”

위무제가 이에 따랐다.

『진서』 「선제기」


유비와 손권의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에 조조는 용기를 얻고 손권에게 연락을 취하는데, 「장제전」에 의하면 손권은 '즉시' 움직였다고 한다. 동맹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번성의 조인은 필사적으로 수성 중이었다. 번성은 완전히 물에 잠겨서 도저히 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군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지원군 역시 수몰되었으므로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에 번성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자도 있었으나 만총은 물은 금방 빠질 것이고 만일 지금 도주한다면 다시는 이 지역을 수복하지 못할 것이라며 반대한다. 조인은 그 의견을 받아들인다.

조인의 이런 끈질긴 항전에 관우는 섣부른 북진을 하지 못하였다. 번성에 발이 묶여있던 시간은 당시 7군이 수몰되어 참패했으며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던 조조에겐 천금같은 시간이 되었다.


5.2.3. 역전되는 전세[편집]


관우는 번성(樊城)ㆍ양양(襄陽)을 포위한 이후부터 유봉과 맹달을 여러 차례 불러 병사를 일으켜 자신을 돕도록 했다. 유봉과 맹달은 산속의 군이 막 종속되기 시작하여 동요시킬 수 없다고 말하고 관우의 명령을 수락하지 않았다. 결국 관우는 패배했고, 유비는 이들을 원망했다. 또 유봉과 맹달은 다투며 화합하지 못했고,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았다. 맹달은 죄를 지은 것을 두려워하고, 또 유봉의 행위에 대해 분노하여 유비에게 표를 올려 이별을 고하고 부하들을 인솔해 위나라로 투항했다.

「유봉전」


한편 관우는 상용에 있는 유봉맹달에게 구원군을 여러차례 요청했으나 유봉과 맹달은 아직 점령하지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보낼 여지가 없다고 말하며 수락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는 등 둘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또 남군태수 미방(麋芳)이 강릉(江陵)에 있고 장군 사인(士仁)이 공안(公安)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관우전」


미방사인이 병량보급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관우는 3만 포로의 식량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영릉군의 상관에 있던 병량까지 마음대로 취해가면서 포위망을 유지시켜 점령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

조인(曹仁)이 관우(關羽)에게 포위되자, 조조는 서황(徐晃)을 파견하여 그를 구하도록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조조는 직접 남정하려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신하들은 모두 말했다.

"대왕께서 빨리 출발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패할 것입니다."

환계만은 이렇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조인 등이 사태에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조조가 대답했다.

"할 수 있소."

환계는 또 질문했다.

"대왕께서는 두 사람이 힘을 다하지 않을까 걱정하십니까?"

조조가 말했다.

"아니오."

환계는 질문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친히 가려고 하십니까?"

조조가 대답했다.

"나는 적의 무리가 너무 많은데 비해 서황 등의 형세가 불리한 것이 걱정될 뿐이오."

환계는 말했다.

"지금 조인 등은 겹겹의 포위속에 있으면서도 죽음을 맹세하여 대왕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먼 곳으로부터 위세를 떨치십시오. 무릇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면 반드시 죽을 각오로 싸우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내심 죽을 각오로 싸울 생각이 있다면 밖으로부터 강력한 원조가 있어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육군을 인솔하여 여력을 나타내셨는데, 하필 실패를 걱정하여 친히 가려고 하십니까?"

조조는 그의 말을 가상히 여기고, 군대를 인솔하여 마피(摩陂)에 주둔하자, 적은 곧 철수했다.

「환계전」

8월, 조조는 서황을 파견하지만 포위를 풀지 못했다. 이에 친정을 나서려 하나 환계만이 반대했다. 조조는 환계의 조언을 듣고 친정을 포기한다.

겨울 10월, 군(軍)이 낙양으로 돌아왔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상서(上書)하여, 관우를 토벌하는데 자효(自效-스스로 힘을 다해 노력함)할 것이라 했다. 왕이 낙양으로부터 남쪽으로 관우를 정벌했다. 미처 이르기 전에 서황이 관우를 격파하고 관우는 달아나니 조인에 대한 포위가 풀렸다. 왕이 마피(摩陂)에 주둔했다.

「무제기」



태조가 다시 (낙양으로) 돌아와 장군 서상(徐商), 여건(呂建) 등을 서황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병마(兵馬)가 집결하기를 기다려 함께 전진하라.”

적은 언성(偃城-번성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황이 도착하여 궤도(詭道-속임수)로 참호를 파며 적의 배후를 끊으려 하는 것처럼 과시하자 적이 둔영을 불사르고 달아났다. 서황이 언성(偃城)을 점령하고 양면으로 진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공격하기 전에 태조가 그 앞뒤로 은서(殷署), 주개(朱蓋) 등 모두 12영(營)을 서황에게 보냈다.

「서황전」


우금 등이 당신의 포로가 되자,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그대를 존경하고 찬탄하였으며, 장군의 공훈은 세상에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비록 옛날 진문공(晉文公)이 성복(城濮)의 싸움에 참가시킨 군대나 회음후(淮陰侯 ; 漢信)가 조(造)나라를 공격한 계략일지라도 그대를 넘을 수는 없을 것이오. 서황(徐晃) 등이 적은 수의 기병을 진지에 주둔시켜 당신의 동향을 엿보고 있다고 들었소. 조조는 교활한 적이오. 그는 실패한 분노 때문에 어려움을 생각지 않고 아마 은밀히 병사를 늘려 그 뜻을 이루려고 할 것이오. 비록 그의 군대는 강하지 않을지라도 용맹하고 강인한 장수는 여전히 있소.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항상 적을 경시하는 생각이 생겼소. 고인의 용병술에 의지하여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는 더욱 경계고, 장군이 다방면으로 방침을만들어 완전하게 승리하기를 희망하오. 나는 서생으로 재능이 소원하고 학문이 얕으며 행동은 더딘데, 감당하지 못할 직무를 맡게 되었소. 나는 위엄과 덕행이 있는 당신과 이웃이 되어 기쁘고, 나의 마음을 전부 기울이고 싶소. 비록 당신의 계책에 부합되지 못할지 라도 여전히 그리워할 것이오. 만일 당신의 관심을 얻게 된다면 이런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오.

「육손전」


10월, 조조는 낙양으로 돌아와 서황에게 여건 등을 보내며 병마가 집결하기를 기다리라고 명한다. 그리고 마침내 서황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육손전」에 의하면 그 이전에도 서황은 마냥 가만있었던 것이 아니라 척후를 풀어 관우의 동향을 지켜 보고 있었다고 한다. 여건이 합류한 후, 서황은 참호를 파며 언성의 배후를 끊으려는 듯한 행동을 취하자 촉군은 둔영을 불사르고 후퇴했으며 서황은 언성을 점령하고 영을 연결시키면서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곳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지원군이 속속히 도착한다.


5.2.3.1. 손권의 칭번[편집]

관우가 번(樊) 에서 조인을 포위했고 때마침 손권이 칭번(稱藩-스스로 번국으로 칭함)했으므로 장료와 (그에게 남겼던) 제군(諸軍)을 불러 조인을 구원하게 했다. 장료가 미처 도착하기 전, 서황이 이미 관우를 격파해 조인에 대한 포위가 풀렸다. 장료는 태조와 마피(摩陂)에서 회합했다.

「장료전」


건안 24년(219년), 태조가 마피摩陂에 주둔했을 때 하후돈을 불러 항상 함께 수레를 타고 특히 친밀하고 중하게 대하여 침소에 출입케 하니 다른 여러 장수들 중 이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하후돈전」


조서를 내려 배잠(潛)과 예주자사(豫州刺史) 여공(呂貢) 등을 불렀는데, 배잠 등은 느긋했다. 온회는 배잠에게 비밀스럽게 말했다.

“이것은 반드시 양양(襄陽)에서 위급한 상황이 나타난 것이니 그곳으로 달려가야만 합니다. 긴급하게 회합을 하지 않은 이유는 먼 곳에 있는 백성들을 놀라게 하여 동요시키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루 이틀 동안에 반드시 밀서가 있어서 그대에게 서둘러 오도록 할 것이고, 장료 등도 소집될 것입니다. 장료(張遼) 등은 평소 군왕의 마음을 알고 있으므로, 후에 불릴지라도 먼저 도착할 것입니다. 그대는 죄를 받을 것입니다!”

배잠은 온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군용물자를 남겨놓고 가벼운 복장으로 바꾸고 빨리 출발하였는데, 과연 재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장료 등은 오래지 않아 각기 소집되었고, 온회가 예측했던 것처럼 되었다.

「온회전」


10월, 사마의와 장제의 제안처럼 손권이 번국을 칭하며 관우를 토벌하겠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조조는 이에 동남방면의 장료를 관우쪽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양주 26군의 사령관 하후돈도 후일 조조가 주둔한 마피에 장료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하후돈도 소집되었다.

『자치통감』과 「온회전」에 따르면 219년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고 있었으며 회남에는 여러 주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온회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양주자사였던 온회는 연주자사 배잠에게 적(손권)은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오히려 장료마저 소집될 것을 확신하였다. 온회전에 따르면 이후 조서가 내렸고 배잠과 예주자사 여공 등을 불렀다. 온회는 지금 긴급하게 회합을 하지 않는 건 먼 곳의 백성들을 동요하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 곧 (소집) 밀서가 당도할 것이라고 했으며 느긋하게 있던 배잠에게 서두르라고 말했고 과연 그 말대로 과연 재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온회는 아예 서둘러 가지 않으면 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회남에 있던) 장료 등은 오래지 않아 각기 소집되었고, 온회가 예측했던 것처럼 되었다.

이것은 물론 오와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 오군이 합비로 올 일은 절대 없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면 이 조치는 대들보 빼서 기둥으로 쓰는 모양밖에는 안된다. 심지어는 자신마저 서황의 뒤를 이어 남하하기 시작한다. 조조는 회남전선을 박박 긁어 모아 이곳을 텅 비우고 형주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관우가 조인(曹仁)을 번성에서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파견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군대를 서쪽 위로 보내어 몰래 관우를 습격하려고 합니다. 강릉(江陵)과 공안(公安)의 요충지는 겹겹이 이어져 있으므로, 관우는 두 성을 잃게 되면 반드시 멀리 달아나게 될 것이고, 번성의 귀군(貴軍)의 포위는 구원하지 않아도 스스로 해결될 것입니다. 이 일은 비밀을 구하니 장군께서는 누설하여 관우가 방비를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동소는 말했다.

“군사(軍事)는 임기응변을 숭상하므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합리적이고 마땅함을 기약해야 합니다. 마땅히 손권에게는 비밀로써 호응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누설해야 합니다. 관우가 손권이 서쪽으로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돌려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면, 번성의 포위는 속히 제거 될 것이므로, 우리 군은 곧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나라와 촉나라 두 적이 서로 대치하게 하여 앉아서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만일 비밀로 하고 누설하지 않으면 손권으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하는 것이 되니, 계책 중에서 상책(上策)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포위망 속에 있는 장수와 관리들은 구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매일 같이 곡식의 양을 계산하면서 두려워할 것이며, 만일 다른 뜻을 품기라도 하면, 위험스럽게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누설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게다가 관우는 사람됨이 비교적 정직하여, 스스로 두 성을 믿고 굳게 지킬 것이며, 재빨리 퇴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조가 말했다.

“좋소.”

즉시 칙령을 내려 번성을 구할 장수 서황(徐皇)에게 손권의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가 주둔해 있는 가운데로 쏘게 하였다. 포위된 조군(曹軍)은 이 소식을 듣고는 사기가 백배가 되었다. 관우는 과연 마음속으로 주저주저하면서 퇴각하지 않았다. 손권의 군대가 도착하여 그 두 성을 취해 버리자, 관우는 곧 산산이 무너졌다.

「동소전」



5.2.4. 서황이 번성을 구원하다[편집]


적은 위두(圍頭)에 둔(屯)이 있고 또한 별도로 사총(四塚)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양성(揚聲-널리 소문을 퍼뜨림)하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태조가 영을 내렸다.

“적이 참호와 녹각(鹿角)을 10중으로 에워쌌으나 장군이 싸워 모두 이겨 마침내 적의 포위를 함몰시키고 다수를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 내가 30여 년간 용병해왔고 또 옛적에 용병을 잘하는 자들에 관해 들어보았으나, 장구(長驅-멀리 말을 몰아 달려감)하여 곧바로 적의 포위망에 돌입한 자는 일찍이 없었다. 게다가 번, 양양이 포위당한 일은 거(莒), 즉묵(卽墨) 때 보다 더 극심했으니 장군의 공은 손무(孫武-손자)나 양저(穰苴-사마양저)를 뛰어넘는다.”

「서황전」


한편, 조공은 서황을 보내 조인을 구원했고 관우가 이를 이기지 못하자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관우는 서황과 더불어 예전부터 서로 경애했다. 멀찍이서 함께 대화했는데 다만 평생(平生-평소)의 일만 말할 뿐 군사(軍事)는 언급하지 않았다. 잠시 뒤 서황이 말에서 내리며 영을 내렸다.

“관운장의 머리를 얻어 오는 자는 금 1천근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관우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서황에게 말했다.

“대형(大兄), 이 무슨 말이오!”

서황이 말했다.

“이는 나라의 일이오.” - 「촉기(蜀記)」

「관우전」


서황(徐晃)의 구원군이 도착하고 물 또한 점차 줄어들었다. 서황이 밖에서 관우를 공격해 조인은 포위를 허물고 벗어날 수 있었고 관우는 퇴주(退走)했다.

「조인전」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북쪽의 지원군 또한 도착하여 힘을 합쳐 크게 싸웠다.

「조엄전」


마침 서황(徐晃) 등의 구원병이 도착했으므로 만총은 전력을 다해 싸워서 공을 세웠다. 관우는 곧 물러났다.

「만총전」

마침내 조조가 보낸 은서, 주개와 12영의 지원군이 모두 도착한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소문을 퍼뜨려 적군의 시선을 돌리다가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은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10겹의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촉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동시에 번성 내부에서도 호응하여 힘을 합쳐 공격하자 관우의 군대는 크게 패퇴하였다.

당시 관우군은 군세를 몇 갈래로 나눈듯한 정황이 보인다. 첫째가 번성 북쪽의 언성이고 둘째는 관우의 본진. 셋째가 사총과 위두라는 곳이다. 이때 기록을 보면 '관우가 몸소' 5천을 이끌고 서황을 역격하러 왔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관우의 본진 외에 병력을 이 세력들로 분산해 양번을 감싸고 있었던 걸로 해석 할 수 있다. 사총에는 10겹의 녹각과 참호가 있었으며 이를 보면 관우는 증원군만 아니라 포위를 풀려는 시도에 대해서 철저히 대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참호야 말로 방어에 있어 수비 보병이 큰 우위를 가지게 하는 요소. 허나 서황의 돌파 당시 이 곳은 관우가 겨우 지원한 5천 보기와 함께 결국 돌파당하고 마는 지점이 된다. 이것은 어찌된 것일까, 관우가 이 지역에서 수많은 지원군을 받은 서황을 상대로 급하게 5천 명의 보병과 기병밖에 동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관우는 이렇게 사방팔방 군대를 나눴다 각개격파당하고 만다.

번성의 포위를 푼 서황은 조조가 주둔 중이던 마피로 돌아간다. 그리고 조조는 서황을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서황은 진려(振旅-군을 거두어 개선함)하며 마피(摩陂-영천군 겹현의 동남쪽)로 돌아왔다. 태조가 7리 밖에서 서황을 맞이해 술을 마련해 큰 연회를 베풀었다. 태조가 술잔을 들어 서황에게 권하고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말했다.

“번, 양양을 보전한 것은 모두 장군의 공이오.”

이때 제군이 모두 집결하여 태조가 제영(諸營)들을 순시했는데, 사졸들은 모두 군진을 이탈해 (태조를) 보려 했으나 서황의 군영은 정제(整齊-가지런히 정돈함)하여 장사(將士-장졸)들은 진(陳)에 머물며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태조가 감탄하며 말했다.

“서(徐)장군은 가히 주아부(周亞夫)의 기풍을 갖추었다 할 만하오.”

「서황전」


어쨌거나 아직 위군은 관우를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다.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나라의 배가 면수(沔水)를 점거하여 양양(襄陽)은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그때 손권(孫權)이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조엄전」

위와 같이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에도 촉의 수군은 여전히 면수를 장악 중이었고 양양성의 포위망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이 때 손권이 관우의 치중을 습격하니 관우는 마침내 남쪽으로 돌아간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조인은 장수들을 모아서 상의했는데, 모두 이렇게 말했다.

“지금 관우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쫓아가면 반드시 체포할 수 있습니다.”

조엄이 말했다.

“손권은 관우의 연이은 싸움의 어려움을 틈타서 그 배후를 습격하려고 했지만, 관우가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군대가 양쪽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순종하는 말로 봉공(奉公)을 원하고 나와서는 틈을 타고 변화를 이용하여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려고 할 뿐입니다. 지금 관우는 이미 고립되어 달아났지만, 또 그가 손권의 심복이 될 걱정거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만일 패하여 달아난 자를 깊숙이 추격한다면, 손권은 관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재앙을 일으킬 것입니다. 왕께서는 반드시 이 점을 깊이 헤아리셔야만 됩니다.”

조인은 그래서 전투태세를 풀었다. 태조는 관우가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추격할 것을 걱정하여 과연 긴급히 조인에게 칙령을 보냈다. 그것은 조엄의 계책과 같았다.

「조엄전」

한편 관우가 퇴각하자 조인 등의 장군들은 추격하려 한다. 하지만 조엄은 관우가 손권과 협력할 가능성을 들어 반대했고 조인은 전투태세를 풀었다. 그후, 추격하지 말라는 조조의 칙령이 도착하니 조엄의 계책과 같았다.



5.3. 남군 전역[편집]



5.3.1. 오나라의 준비[편집]


당시 여몽은 병을 핑계대어 전선과는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요양하고 있었다.[32] 그리고 당시 명성상 애송이나 다름없는 육손[33]을 후임으로 내세워 기만 전술을 사용했다. 후임이 된 육손은 대충 "나 초짜니 잘 봐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고 "적국이 패배한 것은 동맹국에는 이로운 일이므로 당신의 승리 소식을 듣고 손뼉을 쳤고, 중원을 석권하는 대업을 이루어 함께 조정을 보좌하고 기강을 유지시키기를 희망했었다.(혼자 싸우시려니 힘드시겠다. 나도 좀 보태주겠음)" 이라며 북벌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당시 관우의 병력은 4만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맞 상대하는 위군은 물경 10만이 넘어가는 최정예 병력이었다. 이 상황에서 육손의 연기에 속아 넘어간 관우는 한 시름 돌렸다고 여기고 남군에 주둔시킨 병력을 위군을 상대하기 위해 빼낸다. 여몽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여몽전에 나오는 처음 노숙의 뒤를 이어 부임하자마자 손권에게 말한 것에서 볼 수 있듯 노숙 등이 유비와 힘을 합칠 것을 주장한 것은 조조의 위협 때문이었는데, 여몽은 형주를 얻어 방어선을 더 굳게 만들 것을 청하면서 처음부터 형주를 공격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관우를 환대하면서 위장술을 펼쳤지만 관우도 경계심을 풀지는 않아 남군등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관우가 위군을 상대할 때 그는 다시 손권에게 자신이 병을 핑계로 물러나 적을 방심하게 한 후 공격을 하자고 한다. 손권이 이 일을 시의에게 물으니 그 또한 이 계획에 찬성하고 오범마저 이 일이 가능하다고 하는데다가 전종, 육손 또한 관우를 물리칠 수 있는 계책을 진술한터라 손권 역시 이 제안을 승낙하고 손교와 여몽을 좌우 도독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여몽이 정보과 주유의 예시를 들자 그만두고 손교에게 여몽의 뒤를 봐주게만 한다.

한편 관우가 계획대로 남군의 병력을 위군과의 전선으로 보내어 방비가 허술해졌지만 아직 형주를 공격할 명분은 없던 오군이라 적당한 구실만 찾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때 관우는 우금의 포로 때문인지 미방의 수송 때문인지 육손의 편지를 보고 육손이 협조적으로 나설거라 오판했는지 양식이 부족해져 상관(湘關)[34]에 보관되어있는 쌀을 빼앗았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오나라 군대는 지체없이 남군과 공안으로 공격을 가한다.


5.3.2. 한편 그동안 관우는[편집]


손권은 마지막에 공격하기 전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관우 공격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고 조조의 신하들은 이를 손권의 말대로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했으나 동소가 나서 이 사실을 번성과 관우의 본진에 편지를 쏘아넣게 하니 번성의 병사들은 용기백배. 아직 번성과 양양과 면수 일대를 점거한 상태였던 관우는 무슨 생각인지 이것을 보고도 주저할 뿐 돌아가지 않는다.

호삼성은 이를 보고

관우는 비록 손권의 편지를 보았으나 스스로 강릉과 공안의 수비가 굳어서 손권이 단시일 안에 뽑아버릴 수 없다고 믿었다. 또한 물의 기세를 통하여 번성에 다가갔는데 이를 풀어놓게 되면 반드시 앞서 세운 공로를 해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가 미루는 이유다.

라고 해석을 하였다.

과연 관우는 오나라의 국경에 둔영의 관측소를 세워둬 언제든지 신호가 오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성안에 병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생각은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몽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는 그의 예상을, 아니 당시 형주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5.3.3. 여몽의 형주 점령[편집]


윤달[35]

, 손권은 관우를 정벌하려고 먼저 여몽을 파견해 공안을 습격하도록 하여 장군 사인을 붙잡았다. 여몽이 남군에 도착하자, 남군태수 미방은 성을 버리고 투항했다.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오주전」


여몽이 심양(尋陽)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인의 복장을 해 입고 밤낮으로 가서,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士仁)과 미방(芳)이 모두 항복했다.

「여몽전」


손권은 은밀히 서쪽으로 군사를 파견하고, 육손과 여몽을 선봉 부대가 되도록 하여 공안과 남군을 신속하게 점령하도록 했다. 육손은 곧장 진군했다. 그는 의도태수를 겸임하고 무변장군(撫邊將軍)으로 임명되고 화정후(華亭侯)로 봉해졌다. 유비의 의도태수 번우(樊友)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각 성의 관리나 이민족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투항했다. 육손은 금. 은. 동.의 관인을 청하여 방금 귀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해는 건안 24년(219) 11월이다.

「육손전」


여몽은 정예 병사들을 모두 큰 배 안에 숨겨놓고 흰 옷을 입고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복장을 하고 침입하여 관우가 마지막으로 혹시 몰라 남겨둔 강변의 둔후들을 모조리 붙잡아 묶으니[36] 관우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이렇게 관우가 경계를 위해 세워둔 둔들을 들키지 않고 정복한 여몽은 예전에 익양대치에서도 편지 두 장으로 장사, 계양 두 군을 항복시키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등현지를 이용해 영릉을 얻은 것처럼 이번에는 기도위로 있다가 손권에게 쫓겨난 우번을 손권에게 억지로 부탁해서 끌고온 후 이용하기로 한다. 우번전에 의하면 우번은 의술에 능했으므로 여몽 본인의 지병 문제도 있긴 했을 것이다.

당시 수비 책임자는 남군의 미방과 공안의 사인[37]이었는데 당시 미방은 군량을 태워먹은 죄로 관우에게 심한 꾸짖음을 들었고 이에 두려움을 품고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우번이 사인에게 언급한 것처럼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여몽은 우번에게 사인을 설득하게 한다.

이렇게 우번이 만나게 된 사인. 정사 관우전에 따르면 사인은 관우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군수물자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는 등의 일로 관우에게 질책을 받은 상황이었는데 우번은 그를 직접 설득하려고 하나 의외로 사인은 공안을 지키면서 우번을 만나주지도 않는다. 우번은 그것을 보고 사인에게 편지를 쓰는데 편지 왈, '우리가 왔는데 척후도 없고 봉화도 오르지 않았으니 내응이 있었다는 거쯤은 알 수 있지 않아? 어차피 여몽 장군이 남군으로 육로를 끊으면 살 길이 막히는데 여기서 버텨봐야 니 가족만 망하고 싸워도 살 길이 없으니 항복하라고' 사인은 이 편지를 읽고 더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꼈는지 눈물을 흘리며 항복한다. 우번은 사인의 항복을 확인하자마자 이는 휼병[38]이니 응당 사인을 남군으로 데리고 가야 하며 군사를 남겨 (공안)성을 수비해야 한다고 하니 여몽은 우번의 말 대로 사인을 데리고 미방이 있는 남군으로 간다.

애시당초 상황상 협박편지로 항복한 사인 같은 사람에 비해서 서주부터 유비를 따르고 동생은 유비와 결혼도 했고 촉에 형 미축이 있는 미방은 남군태수로서 임명되어 관우와 같이 일을 맡아 처리했으나 두 사람 간의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좋지 않았고(불화했고) 이에 미방이 두 마음을 품고는 모반하여 손권을 맞이했다고 미축전에 전한다. 그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결정적으로 군수물자를 태워먹은 일 때문에 질책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움을 품어서 대놓고 이전부터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기에[39] 사인을 보자 별 미련도 없이 시원스레 성을 넘겨주고 만다. 그것도 쇠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대접까지 하면서. 정사 여몽전 주석 오록의 기록에 따르면 배반의 주체를 명백히 미방으로 한정짓고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의 항복은 미방 본인의 독단이었기에 남군성 사람들로는 "이게 뭥미?"의 상황. 우번 말대로 내응이 있어 척후도 없고 봉화도 오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오군이 나타나고 그 내응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40]이었으니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결국 몇몇 사람이 복병을 만들어 성급하게 연회를 여는 여몽을 공격하려 했지만 우번이 이를 예측하고 한창 성 밖에서 축하연을 벌이고 있던 여몽에게 경고를 하고 여몽 또한 우번의 말을 들어 관악을 장악한 탓에 성공하지 못했다.


5.3.4. 여몽의 심리전[편집]


그런 강릉 군민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몽은 그곳에 잡혀있던 우금과 관우와 그의 장수, 병사들의 가족들을 붙잡았는데 여몽은 그들 모두를 위로하고 보살폈으며, 군대의 약속을 하고 다음과 같은 명령까지도 내린다.

민가를 돌아다니며 요구하거나 빼앗는 일을 할 수 없도록 하라.

여몽은 그 말을 지켜 여몽과 같은 군 사람이 공적인 물건인 관의 갑옷을 지키기 위해 민가에서 삿갓 한 개를 빼앗아서 갑옷을 덮는 사건을 발생했을 때도 군령을 범했는데 고향사람이라고 용서할 수는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베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후 군영 안에서는 두려움에 떨면서 길에 떨어져있는 것조차 줍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다가 여몽은 아침저녁으로 측근들에게 기로[41]들을 구휼하고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묻고 병에 걸린 자에게는 의약품을,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내어주면서도 관우의 관부의 재물과 보화는 봉하고 손권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않는다.

그때 이제야 소식을 들은 관우는 돌아오는데 길에 확인차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여몽이 원하던 바.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안을 다니며 다른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과 만나보게 하고 편지까지 받아가게 한다.

이 병사와 장수들의 가족들이야 말로 여몽이 미친듯이 잘 대해주던 그 사람들인지라 그런 그들의 말을 듣고 편지를 받은 관우의 사자가 돌아와 가족들이 병사에게 보낸 편지를 모두 보여주고 얼마나 잘 지내는지를 말로 설명해준다. 그리고 병사들은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심지어 평소보다 더 잘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고 저절로 관우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5.3.5. 육손의 유비 잔당 처리와 촉의 군사활동[편집]


한편 여몽이 이렇게 형주의 문제에 심혈을 기울일 동안 육손은 남은 유비의 잔당들을 처리한다. 219년 11월 유비의 의도태수 번우가 의도군을 버리고 달아나니 여러 성의 장리와 만이 군장들이 모두 항복했다. 육손이 금은동의 관인을 청하여 이제 막 귀부한 이들에게 임시로 내려주고 병사 3천 명을 장군 이이에게는 수군을, 사정에게는 보병을 이끌고 험요지를 끊게하고 촉장 첨안(詹晏)[42], 진봉을 공격하게 해 첨안을 격파하고 진봉을 사로잡는다.

또한 방릉태수 등보, 남향태수 곽목을 공격해 대파했다.[43] 자귀의 대성[44]문포, 등개 등이 이병[45] 수천 명을 규합해 서방(촉한)과 서로 연결했지만 육손이 다시 사정을 거느리고 문포, 등개를 치자 문포, 등개가 달아나 촉에서는 그들을 장수로 삼았다. 그 후 육손이 사람을 보내 이들을 유인하자 문포가 무리를 이끌고 돌아와서 항복하는데 이 앞뒤로 참획하고 초항하여 귀부시킨 자가 모두 수만 명을 헤아렸다. 장흠 또한 면수를 장악하며 관우가 수로를 통해 움직이는 것을 차단하며 손환은 관우의 병사 50명을 잡고 수많은 말과 병기들을 얻었다.

한편 유비는 관우를 구하기 위해서 11월부터 성도에서 구원군을 보내고 장군을 임명하는 등 전선의 상황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자귀,의도 근처에서 관우의 잔당들을 받아들이고 이들로 하여금 육손을 공격하게 했고 육손은 이를 막았다...로 정리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황상 유비의 군사활동은 관우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잡혀 참수될 때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촉한의 행적은 관우군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알게 됨(11월 이후)-관우군 잔당을 모아 육손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 관우 사망(12월)으로 정리 될 수 있을 듯하다. 관우의 죽음 역시 즉시 알려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5.3.6. 관우의 최후[편집]


적을 몰아붙이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근거지를 잃고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관우는 양양의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 조인을 비롯한 위군은 그런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추격을 반대하였고 조조 역시 관우를 장수들이 추격할까 걱정하여 추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추격을 포기하고 손권에게 관우의 처리를 떠맡긴다.

수경주에 이르길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에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중국의 학자 전부생(田福生)은 자신의 저서 《관우전關羽傳》[46]에서 맥성은 수백 가지고는 수만의 오군에 한 달간 대항할 수 없다며 맥성에 2만 명이 주둔했을 거라 여겼다. 어쨌거나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급기야 관우는 거짓항복까지 시도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맥성과 임저의 위치를 보건대 관우는 이미 장악당한 영안 방면이 아니라 상용 방면으로 어떻게든 돌파할 작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7]

관우는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때는 12월,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반장의 사마 마충[48]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사로잡아 더 이상 도망 못가도록 붙잡았으며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했다.[49] 배송지는 손권이 있는 강릉과 관우가 죽임을 당한 임저는 200~300여 리나 거리가 된다며 손권이 직접 관우의 목을 치라 명령하진 않았을 것이라 평가했다. 그렇기에 관우는 현장에서 지휘하던 여몽이나 관우를 사로잡은 반장등의 최종적인 판단으로 인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은 참수당했고 그 수급은 허도의 조조에게로 보내진다. 관우의 시신은 제후의 예로서 장사 지내졌다. 이때 손권은 촉에 있다가 유비에 의해 공안으로 쫓겨난 유장을 얻고 그를 익주목으로 삼아 자귀에 주둔하도록 했는데 얼마 안 되어 유장은 죽었다.

관우가 최후를 맞은 직후에도 형주 일부에서 저항은 계속되었다. 손권이 강릉에 도착하니 모두 다 항복하지만 반준만이 항복하지 않았는데 손권은 직접 반준을 찾아가 설득시켜 아군으로 만들고 그를 이용해 무릉의 만이들을 규합한 패잔군 번주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게 한다. 또 거짓 항복했던 습진이 이끄는 패잔병들이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패한다. 그럼에도 습진은 영릉의 7개 현을 들어 스스로 소릉태수로 칭하며 촉을 섬기면서 저항했다. 요화 역시 포로로 잡혔으나 도주하여 동쪽으로 진군 중인 유비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릉대전에서도 살아남아 촉의 멸망까지 지켜본다. 한편 역시 촉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한 왕보는 유비의 이릉대전에 참가하나 실패하고 전사했다.[50]

하지만 손권이 강릉을 점령한 즈음에 대규모 역병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손권은 애써 점령한 형주의 조세를 면제해 주는 식으로 민심을 다독여야 했고 때마침 오나라 군대의 기둥이라 할만한 여몽과 장흠을 동시에 잃는 손실까지 겪는다.[51] 이런 질병과 더불어 중요한 상장들을 잃은 데다가 이후 곧이어 이릉대전과 조비의 남정으로 인해 손오는 이 방면에서 더이상의 확장을 이루진 못했다.[52]


5.4. 결과[편집]


관우는 죽었다. 촉은 형주를 잃었고 제갈량이 생각한 천하 삼분의 계획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말았다. 형주에서 유비가 북벌을 위해 구축하며 준비했던 인프라나 정예수군을 비롯한 수만 병력의 손실, 그리고 관우라는 최고 에이스를 잃은 참담한 결과로 인해 파죽지세였던 촉의 기세는 꺾였고 오히려 세력이 위축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유봉의 삽질과 그로 인한 맹달의 이탈로 인해 요충지 중의 요충지 상용을 잃기까지 했다. 상용이라도 보전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북형주를 견제할 수는 있었을테고 촉한의 북벌루트를 좀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촉한은 이후 이릉대전 이후 동맹이 된 오나라의 형주를 칠 순 없어 대신 상용 수복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된다.

제갈근은 후에 화친을 원하는 손권의 명에 따라 유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인 즉 다음과 같다.

문득 들으니, 깃발과 북소리가 백제(百帝)성에까지 이르렀다 하니, 혹자는 신과 의논하길 오왕이 이 주(州)를 침입하여 취하여 관우를 위해하여서, 그 원한이 깊고도 커서 화친에 의당 답하지 않을 것이라 걱정하니, 이것은 작은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이지 큰 것에 뜻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폐하를 위해 그 경중(輕重) 및 대소를 논해보자면, 만약 폐하께서 위세를 굽히고 분노를 버리시고, 이 제갈근의 말을 잠시 살피신다면 계책을 세워 결정할 수 있으니, 다시 후왕들에게 묻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관우와 친한 것이 선제(先帝)와 비교해서 어떻다고 보십니까? 형주와 천하 중 어느 것이 크고 작습니까? 모두 다 원수삼아 미워한다면, 어떤 것이 먼저고 어떤 것이 나중이 되겠습니까? 만약 이 수를 살피신다면,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이 말인 즉슨 오나라 입장에서도 형주를 통수쳐서 빼앗고 관우를 습격해 죽인것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것과 같다. 다만 유비에게 한실부흥의 대업을 상기시키며 오나라를 치는것보다 위를 먼저 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조비는 이후 양번까지 소개하고 완을 최남부거점으로 삼으려고 시도하는데 이때 성을 불태웠다는 묘사로 봐서는 성 자체를 한번 해체한 것일 것으로 추정된다. 적벽 전투 이후 해릉, 광릉 라인서도 비슷한 소개 과정이 있다. 손권은 조비가 버린 양양을 점거하고 손오 정권이 장강 이북에 있는 서주 남부의 무인지대를 요새화하는데 성공한 것마냥 양양을 요새화하는데 성공했다면 삼국의 정세가 또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유비가 복수를 위해 공격해오자 포기하고 위나라는 조인과 서황을 보내 양양을 수복한다.

이후 조비가 한조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자 촉한을 건국해 제위에 오른 유비는 분노에 휩싸여 4만 대군을 이끌고 오를 공격하지만 이릉 지역에서 말 그대로 입구컷 당하고[53] 수많은 무장들이 죽어 촉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릉대전의 대패로 실의에 빠진 유비 자신도 곧 관우를 따라가고 말았다.

오는 손견 사후 장장 26년만에 형주 탈환의 숙원을 이루었으며, 장강의 수비라인을 구축하였는데 성공하고 양번까지 얻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유비가 침공해오자 양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유비의 침공을 별 피해없이 깔끔하게 방어하는데 성공했지만 뒤이어 조비의 남정으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워야 했다. 하지만 조비의 남정 또한 한때 큰 위기에 빠졌지만 주연, 주환 등의 활약으로 방어하는데 성공하면서 적벽 전역부터 시작된 독자 할거 노선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손오 정권의 형양겸병은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남조의 건강-무창 체제의 원안이었으며 이 정책을 벗어난 남조 정권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으며 성공적인 마무리였다.

한중 공방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데다가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아 흔들리던 위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형주-이릉으로 이어진 오와 촉의 싸움으로 두 나라가 시간을 허비했고, 특히 촉은 이릉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비도 이릉대전이 끝난 뒤에야 뒤늦게 오를 총공격하는 바람에 원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 삼국구도를 고착시켜 버렸고 위 역시 이 구도에서 결정적인 이득을 얻진 못했다. 만약 조비가 유엽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릉대전 도중에 촉과 함께 오를 쳤다면 오는 그대로 무너지고 역사적으로 파촉 땅만 가지고 버틴 정권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촉도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조비의 선택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새 왕조를 개창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원정을 진행하기보단 내부를 단단히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다. 화북을 통일한 전진비수 전투의 패배로 공중분해 된 것을 생각하면 내부를 다지는 것은 결코 악수가 아니었다. 이를 실책이라 말하는 것은 후일 조비의 남정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아는 후대인의 결과론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형주를 잃고 유비가 죽고 인재들이 손실된 뒤 제갈량의 북벌은 처절하게 진행된다. 형주를 잃었기 때문에 한중을 거점으로 옹양주를 공략하는 한정적인 전술을 쓸 수밖에 없었고 위는 단순화된 촉의 북벌을 방어할 수 있었다. 결국 제갈량은 234년 오장원에서 과로로 쓰러져 죽는다. 그전까지 적벽대전, 입촉, 한중전 승리 등으로 '드디어 유비가 팔자를 펴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보던 수많은 어린이들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시리어스함에 몹시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흔히들 관우가 죽을 때 삼국지를 처음 덮고, 유비가 죽을 때 삼국지를 두 번째 덮으며, 제갈량이 죽을 때 세 번째로 덮는다고 한다.[54] 장비가 죽을 때는 너무 황당해서 덮을 생각도 안 난다고. 형주 공방전 즈음으로 초반부터 고난을 함께 헤쳐나가던 유관장 삼형제가 다 죽어버리기 때문에 촉빠들의 눈물샘을 심히 자극한다.

근본적으로 제갈량이 융중대를 유비에게 처음 건의했을 때는 유표의 형주를 온전히 승계해 형익을 아우르는 대전략이었다. 하지만 이후 조조의 진공 및 유종의 항복으로 인해 이 대전략은 중도에 수정되어야 했고 유비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내려가느냐고 신속하게 남형주를 장악하지 못했기에 형주의 수복은 이전부터 형주를 노리던 손권과 같이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유비는 형남 4군과 남군까지의 점령을 동등한 동맹으로 보았고 형주에 있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만하다 여겼지만 손권은 유비를 한 수 아래로 보고 형주를 자신이 온전히 소유한 것이며 강릉에서 유비가 주유와 함께 공격한 공적은 온전히 손오의 공적이며 나머지 유비가 차지한 형남 4군 역시 자신의 영토로 여긴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기에, 노숙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유비가 이미 형주에서 인심을 얻었고 손권은 강릉을 얻었지만 아직 완전히 형주를 어우를 역량이 되지 못했기에 사실상 유비를 형주에서 방어선을 줄이고 조조의 탱커 역할을 하도록 강릉을 빌려주었다. 이후 손권은 대놓고 유비를 미혹시켜 포로로 삼으려 하거나 사실상 혼인동맹을 가장해 자신의 누이인 손부인에게 관리와 병사를 이끌고 유비가 주둔한 공안 옆에 성을 쌓고 유비를 핍박했고 종국에는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을 납치하여는 시도까지 해 유비와의 동맹은 완전히 파탄났다. 한편 유비 역시 원래의 대전략을 위해 형주가 필요했으므로 해당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빌린 남군을 돌려줄 마음이 전혀 없었고 역시 자신의 대전략을 위해 손권이 익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이렇게 양측의 목표와 명분, 대전략이 충돌했기에 익양대치로 이어졌고 결국 여몽이 형주를 정복(정확히는 형남 한정)하는데 성공하면서 마무리된다.


5.4.1. 관우의 패인[편집]


  • 병력과 보급이 충분하지 못했다. 상관의 군량미 탈취를 하든 안 하든, 수비병력이 없다면 동오는 무조건 기습공격을 할 작정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병력과 군량미가 부족한 상태에서 번성에 허도까지 점령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번성도 제대로 점령하지 못했고 상용의 유봉, 맹달은 현지 안정화를 이유로 지원을 포기했다.[55]

결국 관우는 물량을 모아 승부하는 위군을 회전에서 격파하기는커녕 오히려 대패하여 번성 포위망을 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조가 특별히 경계하는 바람에 위군 예비병력이 속속히 모여드는 중이었으니 번성과 양양을 점거하지 않고서는 이 병력을 막는 것은 힘들었다.
관우가 부하들에게 친절하고 사대부에게 엄했다는 말이 있는데 막상 여몽이 형주를 먹고나서도 반란가능성 높으니 바로 장악하라는 우번의 말과 엮어보면 형주 호족들이 관우랑 사이가 나빴다고 보기는 좀 모호하다.(유비가 서주를 장악했을 당시 조표 같은 도겸의 구장이 반란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눈물흘리며 나왔다는 사인은 그냥 일 때문에 욕먹은 감이 있고 사실상 사이가 나빴던건 반준과 미방이 전부인데 이 둘은 물자담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갑자기 생긴 포로 수만 명에 대해선 이들도 할 말이 있다. 지금처럼 먹고 살 식량이 풍족한 시대도 아닌데, 갑자기 밥먹일 사람이 두 배로 뻥 튀겨졌다, 거기다 얘들은 딱히 밥준다고 우리편 될 애들도 아니다. 느닷없이 포로 3만 명을 감시할 인원도 짜내야 하고 위랑 싸우기 전에 오나라에 3군을 준만큼 주변에 공출할 상황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큰 문제가 있는데 강릉 지역, 즉 남군의 중심지는 식량 생산량에 비해 소모량이 더 많아 외부로부터 식량 공급이 필요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요 식량 공급처가 파구, 즉 장사 일대였다. 문제는 익양대치 이후로 상수 동쪽이 전부 손권에게 넘어갔다는 것. 애초에 식량 생산량도 부족한데 포로가 3만 명이나 생긴 상태에서 원정군 보급까지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 동오의 기습공격. 물론 관우 측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이미 손-유 동맹의 관계가 물 건너간 상황에서 상관의 쌀까지 털어놓고 경계를 게을리 한 것, 여몽이 병을 앓고 있다고 여몽을 대신해서 온 육손 등을 얕본 것이 패착이었다.

  • 융중대(천하삼분지계)에서 언급된, 익주와 형주의 연계진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형주 남군이 넘어간 이후에 촉에서 계속 의도, 자귀, 무현등에 잔존한 관우 패잔병에 지원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물리적인 문제로 서로 연계가 안 되었다고 보긴 어려운 부분이고[56], 한중왕 즉위 이후 유비가 한중과 익주의 안정화를 위해 여러 정책을 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익주의 정비가 완전치 않아서 그랬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익주의 정비를 생각하지 않고 단독으로 조위의 중심부(+잠재적인 오)를 염두에 두고 출전한 것은 전략적인 실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예방전쟁 설이나 한중 공방전 조공설을 따른다면 칠군수몰 등으로 인한 전선 확대와 조조의 위기감은 촉으로서도 꽤 뜻밖의 일일 테니 참작의 여지도 크다.

  • 한중에서 얻은 승리와 반란을 사주해서 기세를 탄다는 점은 좋았지만 위의 이유 때문에 북형주 점령이 성공할 확률은 낮았다. 촉군이 위군에 특별히 동원병력이 많거나 병력 질이 압도적인 상황이 아니라서 공성은 물론 회전도 이긴다는 장담이 없었고 마침내 공성전과 회전 모두 실패했다.

  • 관우의 오판. 수몰되어 개판이 된 번성을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서황한테 진것에 대해 위군의 지원군이 계속 도착하여 물량에서 밀렸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서황이 처음 지원 온 시기는 신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지원군 12영이 도착하기 전에 서황을 야전에서 공격해보아도 괜찮았단 것이다. 하지만 관우는 그 시기를 놓쳤고 서황은 지원군이 도착할 무렵에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황의 간단한 페이크에 속아 넘어갔고, 또 총사령관인 관우 본인이 보병과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서황과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후퇴했고, 후퇴하는 중에 포위망이 붕괴되어 결국 참패로 이어졌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황을 공격했다면, 페이크에 속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병사를 데리고 가서 맞서 싸웠다면, 10중 녹각에 의지해 포위망 안에서 번성 공격에 집중하며 서황군을 상대로는 방어로 일관했다면 등 여러 다른 선택들이 가능했지만 관우가 선택한 길은 대패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이것이 일종의 예방전쟁으로 벌어진 전역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 설을 따른다면 관우는 병력을 빼야 될 시기를 놓쳤다고 봐야 한다(지나친 성공에 고무되든, 상황이 여의치 않았든). 사실 관우 스스로도 멧돼지에게 물리는 흉몽을 꿨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사서에 수록된 걸로 봐선 실패를 어느정도 자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예처럼 관우 본인도 적은 나이가 아니라서 조급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절월 역시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라는 것. 관우가 봉수대를 쌓고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런 예방전쟁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중에 집중된 조조의 압력을 풀어 내기 위한 조공의 성격으로 유비가 위군 견제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결과만 따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수 있으나 당대 전후에도 총사령관으로서 물리적인 우위를 점한 다음에 공격을 나간 사례가 적지 않으므로 이는 관우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관우가 독단으로 북형주 공격에 나선 것이 아니라 유비의 명에 따른 것이라면 결국 유비의 책임이라고 봐야 하겠다. 물론, 이 역시 한중전의 조공 성격이라면 이런 확전에 대해 완전히 유비의 책임이라고 보긴 어렵다.

6.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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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연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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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타 창작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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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장강 이북의 양양, 강릉, 남양 같은 곳을 가리킨다. 장강 이남의 4군은 그렇지 못하다. 무릉만으로 대표되는 이민족들이 많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후한서 지를 보면 인구는 꽤 있었다.[2] 물론 손권은 나중에 교주도 얻지만, 이 땅은 본래 사섭 일족이 다스리며 오나라에 신종하는 자치구역의 성격이 강했다. 후에 사섭이 죽은 후에야 손오 정권이 직접 다스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씨 일족을 숙청했기에 반란이 있었으나 쉽게 진압하였다.[3] 손권을 거기장군 서주목으로 올려 손권의 양주 지배를 확고히 해주었다.[4] 장비가 남군태수가 된 것은 주유가 죽고 유비가 남군을 빌린 후의 일로 추정된다.[5] 호북성 강릉현 양자강변.[6] 사선으로 읽어야할 것 같지만 한서 지리지에는 사이현으로 읽으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두었다.[7] 대표적으로 리둥팡(Orient Lee)를 들 수 있다.[8] 즉, 조익은 유비의 군사가 2만이며, 적벽대전의 주공 중 하나였음을 주장하고 있다.[9] 다른 번역: "이는 무릇 서로가 의논함에 있어 쉽게 성사되도록 한 것이다." (촉이 양보한 것이라는 뉘앙스)[10] 이름에서도 보이듯 엄밀한 논증을 다룬 책은 아니고, 그가 강연에서 주장한 바를 모은 것이다.[11] 이 기록의 원전은 오나라 사람 원엽이 쓴 선주전 주석 헌제춘추이다.[12] 리둥팡이 어떤 기록을 보고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세한 기록은 자치통감, 정사 삼국지를 통틀어 없다. 다만 정보전에 '손권이 형주를 나눠 유비에게 주자, 정보는 다시 돌아와 강하를 다스렸고, 탕구장군으로 승진하여 죽었다.'라는 기록은 있다.[13] 다만 손권이 개입했다는 정황은 없다. 유선을 납치하려던 게 정말 손권이 시켜서 벌어진 대사건이었다면, 훗날 이릉대전 발발 때까지 아귀다툼을 하는 양국의 관계상 이 문제에 대하여 이후에 거론이라도 할 법한데도 언급한 적이 없다. 거기다가 유비군의 눈이나 감시망 같은 것을 1차적으로 뚫어낸 것까지는 좋은데, 그 이후로는 뭐가 없고 제갈량이 장강을 봉쇄하라고 하니까 그냥 막혀버렸다. 정말 손권이 시킨 납치였으면 손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나온 다음에 추가 지원병력이라던가, 최소한 좋은 배와 뱃사람들 정도는 지원해줬을 법도 한데 당한쪽인 촉의 사료에서도 그런 얘기는 없다[14] 협상 시점에서 오는 형남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유비 측 잔당을 일망타진하는데 실패했으며 익양에서 관우와 노숙이 대치하고는 있었지만 후방엔 문제가 없었던 반면, 유비는 익주를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조조가 한중에서 장로를 공격하면서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었다.[15] 217~219년 즈음 오지의 여러 인물들의 기록을 보면 오나라 전체적으로 관우를 치려는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에 대해서 배신이라고 굳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일단 저 거슬리는 유비부터 치고 봐서 이득을 얻자는 시각이 팽배했던 것. 어차피 서로 감정 상할 대로 상해있었고 손권은 노숙이 죽은 이후 노숙이 남군을 빌려주라고 요청한 것은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16]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민간 전승에선 관은병이라고 한다.[17] 성의 높이 2척 = 1판 / 호삼성 주[18] 도적 무리[19] 관인과 봉호[20] 중국의 별칭[21] 절월 역시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라는 것. 관우가 봉수대를 쌓고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런 예방전쟁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2] 사마의를 말한다.[23] 조인은 방덕에게 장수와 군사를 이끌고 번성 북쪽 10리에 주둔하게 했다.[24] 관우가 처음 공격을 시작했을 때 '羽率衆攻曹仁於樊'라고 했는데 이는 자치통감의 기록이다, 관우전 본전에서도 '羽率衆攻曹仁於樊'이라고 동일하게 적고 있다.[25] 자세한 지도1, 더 자세한 지도1[26] 예주 양국이라 보는 의견도 있지만 다른 지역들이 낙양 인근이고 모두 현의 이름인 것으로 보아 멀리 떨어진 예주 양국보다는 하남윤 양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27] 영천군 겹현[28] 홍농군 육혼현[29] 참고로 현대에 와서는 번성(샹양 시)에서 허창(쉬창 시)까지는 중간에 (난양 시)를 거쳐서 차 타고 3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 그러니까 서울-대구 거리 정도다.[30] 그래서 이때의 위업을 가리켜 화하진동(華夏震動)이라 부르기도 한다.[31] 자치통감과 온회전에서는 이 당시 219년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였다고 한다.[32] 주전파인 자신이 전선에서 떨어져 관우를 안심시키려는 계략이긴 했으나, 실제로도 여몽은 지병이 심해 그해 219년 사망한다. 관우가 경계를 안한데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한다.[33] 나이가 적지는 않았다. 183년생이니 36살.[34] 상관은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청릉현 근방이다. 호삼성 주석에 따르면 '오와 촉이 형주를 나누며, 상수를 경계로 삼았기에, 관을 설치했다.'라고 하고 조일청이 말하길 '방여기요 75권에 오, 촉이 형주를 나눠,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해서,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다. 81권에 상구관(湘口關)은 영주부(永州府) 북쪽 10리에 있어, 소 潇, 상 두 물이 합류하는 곳이다.'라고 했으니 해당관은 촉한과 손오의 경계 지역, 혹은 완충지역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35] 219년의 윤달은 윤10월이다, 순서는 10월 → 윤10월 → 11월 → 12월.[36] 밑에서 우번의 말에서도 나오지만 내응자의 도움이 컸을 가능성이 크다. 호삼성은 미방과 사인이 배반하지 않았다면 관우가 알았을것이라는 설을 내세운다.[37] 부사인이 아니다. 여몽전, 손권전, 계한보신찬에는 모두 사인(士仁. 성이 사, 이름이 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직 정사 관우전에서만 부사인(傅士仁)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정황상 오기의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38] 譎兵, 기만술에 의한 군사행동[39] 실제로 정사의 주석인 오록 기록에는 미방이 남군성의 군사기물을 태워먹은 실수로 인해 손권과 내통했다고 기록했다.[40] 당연하다. 20여 년을 넘게 유비를 섬기고 군주의 인척이기까지 하고 그의 형은 유비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이 내통한다는 걸 예측하는 사람이 있었을 리가.[41] 60~70 이상 된 노인들[42] 자치통감에는 담안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주석에는 첨이 성이라고 기술돼있어 상충한다.[43] 방릉은 임저와 가까운 곳이고 남향군은 관우가 태수를 잡아 복속시킨 지역으로 상용의 동쪽이다. 게다가 방릉은 유봉과 맹달 소유의 상용군 일대이니 상용에서 군사를 내 관우를 구원하려고 했다는 정황증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맹달이 유비를 저버리고 위나라에 항복하면서 했던 '형주가 패배하여 괴멸되자, 대신은 통제하지 못해 백의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신만이 일을 찾아 스스로 방릉(房陵), 상용(上庸)에 이르러 몸을 구걸해 밖에서 자방(自放)했습니다.'라는 말은 맹달은 유봉과 불화하면서 여의치 않은 상황에도 뒤늦게나마 따로 최대한 여력을 내어 등보와 곽목을 보내 관우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변명하는 말일 수도 있다.[44] 大姓 명족, 호족[45] 夷兵, 이민족 군사[46] 田福生 著 《關羽傳》 中国文史出版社 2007年出版 ISBN 978-7-5034-2022-1 第十二章 孤立無援,飲恨千古 第三節 兵敗麥城,章鄉之難 之 困守麥城.[47] 이렇게 될 경우 상용에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유봉의 죄가 더해진다. 관우를 단순 돕지 않은 것 외에도 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48] 촉의 장수였던 마충과는 동명이인이다. 관우를 사로잡은 공으로 역사서에 쓰여졌는데 그 이전과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아 하급 장수로 추측된다.[49] 이런 기록을 보면 나관중 가정본 삼국연의나 신삼국을 비롯한 몇몇 매체에서처럼 관우가 저항을 포기하고 신선같이 태연하게 죽었다기 보단 창천항로나 삼국지 13 같은 매체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끝까지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고 주군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군세를 몇기의 기병만으로 돌파하려다가 오군에 둘러싸여 처절하게 난투전으로 끝까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잡혀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50] 연의에서는 맥성에서 관우와 관평의 목을 보고는 충격을 받아 자살한 걸로 나온다.[51] 여몽의 급사 자체는 이전부터 앓아온 지병 때문이라고 볼 여지가 있지만 장흠까지 동시에 죽은 만큼 장흠은 이 질병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형주 공격에 참전한 또다른 장수 손교도 이 때 사망. 감녕도 이 즈음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215년설과 219년설, 관우를 잡은 후 반장이 감녕의 군대를 이어받았다.)을 보면 역병의 영향이 상당히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관우의 최후에 대해서 오나라 장수들이 이 시점에 많이 죽어서 관우과의 교전으로 오나라 장수들이 죽었다는 의견도 있는데, 우선 여몽은 이전부터 지병이 심각했고, 손교는 후속 부대를 맡았으며 장흠은 면수에서 죽었고 감녕은 어느 년도에 죽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정작 최전방에서 관우를 추격한것은 주연반장인데 이 두 사람은 관우를 잡은 후에도 무사했다. 따라서 갑작스런 역병에 의한 잇달은 죽음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52] 사실 무릉 같은 경우에는 계속 반란이 일어나 오나라가 통제를 못하는 지경이었다.[53] 형주의 지형을 살펴보면 결코 비하적인 발언이 아니다. 이릉은 말 그대로 형주에 들어서는 입구다.[54] 다른 말로는 던진다는 과격한 말도 있다.[55] 맹달이 상용을 정복한 것이 219년 여름이다. 선주전에 의하면 조조가 한중에서 물러난 이후에 나오고 여름이라 나오니 6월 경에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상용 역시 최전선이다.[56] 당장 익양대치 때는 관우가 3군을 빼앗기자 유비가 곧바로 직접 지원을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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