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삼국지)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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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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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유이목전(劉二牧傳)」
2권 「선주전(先主傳)」
3권 「후주전(後主傳)」
유언 · 유장
유비
유선(禪)
4권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
5권 「제갈량전(諸葛亮傳)」
감부인 · 목황후 · 경애황후 · 장황후 · 유영 · 유리 · 유선(璿)
제갈량 ,제갈교, ,제갈첨, ,동궐, ,번건,
6권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7권 「방통법정전(龐統法正傳)」
관우 ,관흥, · 장비 ,장포, · 마초 ,마대, · 황충 · 조운 ,조통, ,조광,
방통 ,방굉, ,방림, · 법정
8권 「허미손간이진전(許糜孫簡伊秦傳)」
9권 「동류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
허정 · 미축 · 손건 · 간옹 · 이적 · 진밀
동화 · 유파 · 마량 ,마속, · 진진 · 동윤 ,진지, · 여예
10권 「유팽요이유위양전(劉彭廖李劉魏楊傳)」
11권 「곽왕상장양비전(霍王向張楊費傳)」
유봉 ,맹달, · 팽양 · 요립 · 이엄 · 유염 · 위연 · 양의
곽준 ,곽익, ,나헌, · 왕련 · 상랑 ,상총, · 장예 · 양홍 ,하지, · 비시
12권 「두주두허맹래윤이초극전(杜周杜許孟來尹李譙郤傳)」
13권 「황이여마왕장전(黃李呂馬王張傳)」
두미 · 주군 · 두경 · 허자 · 맹광 · 내민 · 윤묵 · 이선 · 초주 ,초수, · 극정
황권 · 이회 · 여개 · 마충 · 왕평 ,구부, · 장억
14권 「장완비의강유전(蔣琬費禕姜維傳)」
15권 「등장종양전(鄧張宗楊傳)」
장완 ,장빈, ,장현, ,유민, · 비의 · 강유
등지 · 장익 · 종예 ,요화, · 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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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正
법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aZheng.jpg
시호
익후(翼侯)
작위
관내후 (關內侯)[1]
최종직위
상서령(尙書令)
성씨
(法)

(正)

효직(孝直)
생몰 기간
(176년 ~ 220년)
고향
사례 부풍군 미현
조부
법진(法眞)
아버지
법연(法衍)
1. 개요
2. 생애
2.1. 유장 휘하
2.2. 유비의 입촉
2.3. 유비 휘하
2.5. 죽음
3. 평가
4.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유장, 유비 휘하의 책사. 자는 효직(孝直). 사례 부풍군 미현 사람.
후한서 법웅전에 따르면 증조부는 전국시대 제나라 양왕(襄王)의 후손인 법웅, 삼복결록주에 따르면 조부는 법진, 아버지는 법연.

2. 생애



2.1. 유장 휘하


196년, 천하에 기근이 들자 법정은 같은 군 사람인 맹달과 함께 촉으로 들어가 유장에게 의탁했다. 오랜 뒤에 광한군 신도현의 현령이 되고 그 뒤 군의교위에 임명되었다. 중하게 임용되지 못한 데다 또한 그의 주읍 사람으로 함께 타향에서 손님 노릇하는 자들에 의해 바른 품행이 없다고 비방 받으니 그 뜻을 펼치지 못했다.
익주별가 장송이 법정과 서로 친했는데 유장이 함께 큰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며 늘 남 몰래 탄식했다.

2.2. 유비의 입촉


장송이 형주에서 조조을 만나고 돌아온 뒤 유장에게 조조과 관계를 끊고 유비와 결탁하도록 권했다. 유장이 말했다.

누가 사자로 갈 만하오?

이에 장송이 법정을 천거했는데 법정이 사양했으나 부득이하게 가게 되었다.
유봉전에 따르면 당초 유장은 부풍의 맹달을 법정의 부장으로 파견하고, 각기 병사 2천 명을 인솔하게 하고 강릉에 남아 주둔하도록 했다.
화양국지 유선주지에 따르면 손부인은 재주있고 호탕한 인물로 오라비들의 풍모가 있었다. 백 명의 시비는 모두 검을 쥐고 도열하여 유비는 수레에서 내릴 때 겁을 먹었다. 이에 법정은 유비에게 손부인을 오로 돌려보내도록 권하였다.
법정이 돌아온 뒤 장송에게 유비가 웅대한 계략을 갖추었다고 칭찬하여 말하고 은밀히 협력하며 유비를 추대하여 받들길 원했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 뒤 유장은 조조가 장수를 보내 장로를 치려 한다는 것을 듣고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를 틈타 장송이 유장을 설득하길 유비를 맞아들여 그로 하여금 장로를 치게 하고, 다시 법정에게 명을 받들게 했다. 법정은 유장의 뜻을 전한 뒤 은밀히 유비에게 계책을 올렸다.

명장군(明將軍)의 영명한 재주로 유목(유장)의 유약함을 틈타십시오. 장송은 주(州)의 신임 받는 중신으로 내부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익주의 풍성함을 기반으로 하고 험조함에 기대면 쉬운 일입니다.

유비가 이를 옳게 여기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쪽으로 가서 광한군 부현에서 유장과 만났다. 북쪽으로 광한군 가맹현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와 유장을 공격했다.
팽양전에 따르면 마침 유비가 촉나라로 진입하여 장강을 따라 거슬러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팽양은 유비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유세하기 위해 곧바로 방통에게 가서 만났다. 방통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법정은 이전부터 팽양의 재능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정도가 유장을 설득했다.

파서와 재동의 백성들을 내수와 부수 서쪽으로 모두 내몰고 그곳의 창고와 들의 곡식을 모두 불태운 뒤 보루를 높이고 해자를 깊게 판 채 조용히 그들을 기다리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저들이 당도하여 싸움을 청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오래도록 군량을 얻을 곳이 없으니 백일이 되기 전에 필시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 달아날 때 공격하면 틀림없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유비가 이를 듣고 증오하여 법정에게 물었다. 법정이 말했다.

끝내 이 계책을 쓰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과연 법정의 말과 같았으니 유장이 그 수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적에 맞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말은 들어 보았으나 백성들을 움직여 적을 피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소.

그리고는 정도를 내치고 그 계책을 쓰지 않았다.
군(軍)이 낙성을 포위하게 되자 법정이 유장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보냈다.

저 법정이 본래 재주가 부족해 맹호(盟好)가 훼손되게 하였으나, 좌우(左右-주변)에서 본말(本末)을 분명히 하지 않고 모든 잘못을 제 탓으로 돌려 모욕을 입혀 내 몸을 망치고 그 욕됨이 집사(執事-귀하)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우니, 이 때문에 바깥에서 몸을 상하면서도 감히 반명(反命-복명. 일을 보고함)하지 못했습니다. 성청(聖聽-귀한 사람이 귀로 듣는 것)이 제 말을 싫어할까 두려워 그 사이 전(牋)을 올리지 않았으나 예전의 대우를 돌이켜보면 첨망(瞻望-우러러봄)하며 슬플 뿐입니다. 그러나 앞뒤로 오로지 복심(腹心-진심)을 피력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속마음을 감추며 최선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으나 다만 제가 어리석고 꾀가 부족하며 정성(精誠)으로 감복시키지 못해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국사(國事)가 이미 위태롭고 화해(禍害-화란, 재난)가 곧 닥칠 것이기에 비록 바깥에 버려진 신세로 제 말이 증오를 더할 수도 있으나 소회(所懷)를 극진히 토로해 남은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명장군(明將軍-유장을 지칭)의 본심은 저 법정이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구구하게 좌장군(左將軍-유비)의 뜻을 잃고 싶지 않았으나 창졸간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좌우에서 영웅의 종사지도(從事之道)에 통달하지 못해 신의를 어기고 맹세를 욕되게 해도 된다고 말하며, 의기(意氣)로 서로 맞추어(意氣相致) 해와 달이 서로 바뀌듯 하고(日月相遷) 귀로 듣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즐거운 것(順耳悅目)을 추구(趨求)하여 아첨하는 말로 뜻에 맞출 뿐. 원려(遠慮-앞일을 헤아리는 깊은 생각)로써 나라를 위한 심원한 계책을 도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태가 이미 변한 뒤에도 또한 강약의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니, 좌장군이 멀리 외떨어진 군사로 양곡의 비축이 없다 하며 다수로 소수를 공격해 광일(曠日-많은 날을 허송세월함)하며 서로 대치하려 합니다. 그러나 관(關)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곳은 번번이 격파되었고 이궁(離宮), 별둔(別屯)은 날마다 절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비록 낙성(雒城) 아래에 만 명의 군사가 있지만 모두 군진이 무너진 병졸들(壞陳之卒)이며 격파된 군의 장수들(破軍之將)이니 만약 하루아침의 싸움을 치르려 한다면 그 군사와 장수의 세력으로는 실로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멀리 기약하여 각각의 군량을 헤아려본다면, 지금 이쪽 둔영의 수비는 이미 견고하고 곡미(穀米-곡식)가 이미 쌓여 있으나, 명장군의 토지는 날로 깎이고 백성은 날로 곤궁해지니 적대하는 자들이 많아져 곡식을 공급해야 하는 곳은 멀리까지 확대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제가 헤아려봐도 필시 (그쪽이) 먼저 곡식이 고갈하여 장차 다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헛되이 서로 지키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지금 장익덕(張益德-장비)의 수만 군사가 이미 파동(巴東)을 평정하고, 건위(犍爲)의 경계로 들어와 군을 나누어 자중(資中-건위군 자중현), 덕양(德陽-광한군 덕양현)을 평정하며 세 갈래 먼 길로 침범하고 있습니다. 장차 이를 어찌 막으시렵니까?

본래 명장군을 위해 계책을 꾸민 자는 필시 이쪽 군이 멀리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없고 궤운(饋運-운량)도 미치지 못하며 군사는 적고 뒤잇는 군사도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지금 형주로 통하는 도로가 뚫려 군사 수가 열 배인 데다 손거기(孫車騎-거기장군 손권)도 동생과 이이(李異), 감녕(甘寧) 등을 보내 뒤를 잇고 있습니다.

만약 주객의 형세(客主之勢)를 다툼에 있어 토지로써 승리를 결정한다면 지금 이쪽은 파동(巴東)을 전부 차지하고 광한(廣漢), 건위(犍爲)는 절반 이상을 평정하였고 파서(巴西) 한 군(郡) 또한 명장군의 소유가 아닙니다. 헤아려보건대 익주에서 의지하는 바는 오로지 촉군인데 촉군 또한 파괴되었습니다. 3분의 2를 잃은 데다 관원과 백성들은 피폐해져 난을 일으키려 생각하는 자가 열 호(戶) 중에 여덟 호나 됩니다. 적이 멀리 있어도 백성들이 노역을 감당하지 못하니 적이 가까워지면 하루아침에 주인을 바꿀 것이고, 광한군의 여러 현들이 그 분명한 예입니다.

또한 어복(魚復-파군 어복현)과 관두(關頭)는 실로 익주의 복화지문(福禍之門)이나 지금 두 문이 모두 열리고 견고한 성이 모두 떨어졌으며 제군(諸軍)들이 아울러 격파되어 군사와 장수들이 함께 소진되었습니다. 적이 여러 길로 아울러 진격하여 이미 심복(心腹-가슴과 배, 중심부)에까지 들어왔는데, 앉아서 도읍과 낙성을 지키고 있으니 존망지세(存亡之勢)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대략적으로 그 겉만 견주었을 뿐, 그 나머지 굴곡(屈曲-상세한 전말)은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저 법정의 어리석음으로도 오히려 이 일이 다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데, 하물며 명장군 좌우의 밝고 지혜로운 모사들이 어찌 이 이치를 알지 못하겠습니까? 아침저녁으로 총행을 탐하며 용납되기 위해 아첨부리고, 원대한 계획을 꾀하지 않으며 마음을 다해 좋은 계책을 바치지 않을 뿐입니다. 만약 사세가 궁박해지면 각자 살 길을 찾아 그들의 문호(門戶)를 구제할 뿐 언행을 뒤집어 지금 (그들이 말하는) 계책과 다를 것이니, 명장군을 위해 사난(死難-국가의 위난에 처해 목숨을 바침)을 다하지 않고 존문(尊門-상대방의 가문을 높여 이르는 말)이 오히려 그 우환을 뒤집어 쓸 것입니다.

저 법정이 비록 불충하다는 비방을 받았으나 내심 스스로는 성덕(聖德)을 저버렸다 생각지 않으며 분의(分義-분수에 맞는 정당한 도리)를 돌이켜 생각하며 실로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좌장군께서는 처음 촉에 들어올 때처럼 옛 마음이 여전하며 실로 박대하려는 뜻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제가 생각건대 변화를 꾀한다면 존문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214년, 진격하여 성도를 포위했는데, 유장의 촉군태수 허정이 성을 넘어 항복하려 했으나 일이 발각되어 성사되지 못했다. 유장은 위태로움이 극에 달하여 망할 위기가 눈앞에 닥쳤으므로 허정을 죽이지 않았다. 유장이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했을 때 유비는 허정을 박대하며 임용하지 않았다. 이에 법정이 설득했다.

천하에 헛된 명예를 얻고도 내실이 없는 자가 있으니 허정이 바로 그러합니다. 지금 주공께서는 천하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으나, 허정의 헛된 명성은 이미 사방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만약 그를 예우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주공께서 어진 이를 천대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에 유비가 허정을 후대했다.
장비전에 따르면 익주가 평정된 후 제갈량, 법정, 장비와 관우에게 각각 금 5백 근, 은 천 근, 전 5천만, 비단 천 필을 하사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기 차이를 두어 포상했다.

2.3. 유비 휘하


목황후전에 따르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손부인은 오나라로 돌아갔으므로, 신하들은 유비에게 목황후를 맞이하도록 권유했다. 유비는 유모와 동족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으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법정이 진언하여 말했다.

만일 관계의 친함과 소원함을 논한다면, 어찌 춘추시대 진문공과 자어에 비교하겠습니까?

그래서 목황후를 맞이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과거 진문공은 진회공 자어와 가까운 종실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어가 죽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어의 아내인 회영과 결혼했다. 그러니까 목황후의 전 남편인 유모가 유비와 동족이라고 해도 진문공의 사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법정을 촉군태수 양무장군으로 삼으니, 밖으로 도읍과 그 주변를 통솔하고 안으로 주요한 모사가 되었다. 밥 한 그릇 얻어먹은 은혜나 눈 흘긴 사소한 원한을 되갚지 않는 법이 없었고, 자신을 헐어 상하게한 자 몇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어떤 이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법정이 촉군에서 지나치게 거침없이 마구 오가니 장군께서 의당 주공께 여쭈어 그의 위엄과 은혜를 내리는 권한을 억누르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주공께서 공안에 계실 때 북쪽으로는 조조의 강성함을 두려워하고 동쪽으로는 손권이 핍박함을 꺼렸으며, 가까이는 손부인이 곁에서 변고를 일으킬까 겁내시었소. 그러다 법효직이 주공을 다시 남의 제약을 받지 않게 했으니, 어찌 법정을 금지해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겠소!

요약하면

○○○: 법정의 행동이 선을 넘을 정도로 지나쳐서 어떻게 좀 하셔야겠습니다.

제갈량: 주공께서 여럿 작자들에게 시달리셨는데 법정이 시달릴 일을 없게 해준 공이 있으니 그 정도는 눈감아줍시다.

제갈량전 주석 촉기, 자치통감에 따르면 제갈량이 유비를 도와 촉을 다스릴 때 또한 자뭇 엄하고 준열하니 많은 이들이 원탄하였다. 이에 법정이 말했다.

지금 그대는 위력(威力)을 빌려 한 주(州)를 걸터앉아 점거하고 처음 그 나라를 소유했으나 은혜를 베풀어 위무하지 않았소. 한고조의 예를 따르고 주인과 손님의 예의로 서로 낮추어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금령을 늦추어 그들의 원망을 달래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구려. 진나라는 무도하고 정치가 가혹해 백성들이 원망하니 필부의 함성에 천하가 무너져내릴 지경이었고, 고조께서 이로 인하여 널리 구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장은 어리석고 나약한 데다가 유언 이래 누대에 걸쳐 은혜를 베풀어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서로 아첨하니, 어질고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지도 못하면서 위엄과 형벌도 엄숙하지 못했소. 촉 땅 인사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스스로 방자하게 되자 군신의 도가 점차 쇠퇴했소. 지위로써 총애하니 지위가 극에 다다르면 얕보게 되고, 은혜로써 순종시키니 은혜가 고갈되면 교만해졌습니다. 폐단이 실로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내가 법으로 위엄을 세울 것이니 법이 행해지면 은혜로움을 알 것이고, 작위에 한도를 둘 것이니 작위가 더해지면 영예로움(榮)을 알 것입니다. 이것이 아울러 다스려지면 위 아래에 절도가 있게 되니, 다스림의 요체는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갈량과 법정은 비록 좋아하고 숭상하는 바가 서로 같지 않았으나 공적인 도의로 서로 따랐고 제갈량은 늘 법정의 지모와 권술을 높게 여겼다. 유비가 촉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법정의 공이 컸으므로, 그는 법정의 죄를 묵인했는데 손성의 경우 제갈량이 법정의 전횡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은 법에 어긋난 것으로, 공정하고 깨끗한 명성에 흠이 되는 것이라 평했으나 실제 제갈량은 법정과 비슷한 지위에 있어 이런 문제를 처리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것은 유비가 처리할 사항이었으나 유비는 당시 법정에 깊이 의존했기 때문에 그에게 어떤 제재를 가할 가능성이 없었다.
동시에, 유비 집단은 처음으로 익주에 자리를 잡아 복잡한 상황에서 온갖 일을 처리해야 하니 많은 방면에서 법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계획을 어지럽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제갈량과 유비는 이를 매우 신중하고 냉정히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후일 청나라 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권도로서 일을 행하여야 한다 평하였는데, 즉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는 부득불 융통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때를 살피고 세력을 감안해 권도를 행하는 것, 이것은 제갈량이 처한 당시의 실제상황과도 잘 부합된다.
이적전에 따르면 이적제갈량, 법정, 유파, 이엄과 같이 촉과(蜀科)를 만드니, 촉과의 제도는 이 다섯 사람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2.4. 한중 공방전


본격 vs위장 두뇌싸움. 당시 한중을 지키던 위장은 전혀 지략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인원들이었다. 조홍, 장합, 곽회, 조진.. 당장 이 라인업만 하더라도 엄청난 라인업이다.
217년, 법정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조조가 일거에 장로를 항복시켜 한중을 평정하고도 이 기세를 틈타 파촉을 도모하지 않고 하후연, 장합을 남겨 자신은 황급히 북쪽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그의 지모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필시 내부에 우환이 닥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하후연과 장합의 재략을 헤아려보면 우리의 장수들보다 낫지 못하니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유비가 그 계책을 좋게 여기고 이에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병했고 법정 또한 수행했다.
양홍전에 따르면 그 당시 촉군태수 법정은 유비를 수행하여 북쪽으로 갔었다. 제갈량은 이 때문에 표를 올려 양홍에게 촉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219년, 유비가 양평으로부터 남쪽으로 면수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 흥세에 영채를 세우니 하후연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법정이 말했다.

가히 공격할 만합니다.

유비가 황충에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 등은 참수 당했다. 조조가 서쪽을 정벌하며 법정의 계책임을 듣고 말했다.

나는 예전부터 현덕(유비)이 이 같은 일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 필시 남의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알았다.

화양국지 유선주지에 따르면 또한 말했다.

나는 간웅이라고 할 만한 자들은 거의 다 수하에 두었으나, 법정만은 손에 넣지 못했구나.

유비가 조조와 함께 다툴 때 형세가 불리했다. 의당 퇴각해야 했으나 유비가 크게 화를 내며 퇴각하려 하지 않으니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데 법정이 유비의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유비가 말했다.

효직은 화살을 피하시오.

법정이 말했다.

명공께서 친히 화살과 돌을 당해내시는데 하물며 소인이겠습니까?

이에 유비가 말했다.

효직, 내가 그대와 함께 물러나겠소.

그리고는 퇴각했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법정을 상서령, 호군장군으로 삼았다.

2.5. 죽음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익후(법정)은 훌륭한 책략을 사용하고, 세상의 흥함과 쇠함을 예측했다. 주상에게 몸을 던져 의탁하고, 의견을 서술하고 자문했다. 잠깐 생각하고도 바른 평가를 내리며, 사태를 보고 변화의 징조를 알았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고 1년 후인 220년, 법정은 45세로 죽었다. 법정이 죽었을때 유비가 슬퍼하며 그를 위해 며칠 동안 눈물을 흘렸고, 시호를 내려 익후(翼侯)라 했다. 아들 법막이 후사를 이었다.
조운전에 따르면 당초 선주(유비) 때에는 오직 법정만이 시호를 받았다. 공신들인 관우, 장비, 조운 등이 죽고 수십 년에 지나고 나서야 시호를 받았던 것에 비하면 대접이 남달랐다.
유비가 황제에 오른 뒤 장차 동쪽으로 손권을 정벌해 관우의 치욕을 되갚으려 하니 뭇 신하들이 여럿 간언했으나 하나같이 따르지 않았고, 이릉대전에서 크게 패하고 백제(白帝)로 돌아와 머물게 되었다. 이때 제갈량이 탄식하며 말했다.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주상(유비)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 하더라도 필시 형세가 위태로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3. 평가


후에 정사 삼국지의 편찬자인 진수가 방통과 법정에 대하여 평하기를, 방통은 순욱과 막상막하며 법정은 정욱, 곽가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당장 한중전투만 보아도 오히려 제갈량을 성도에 배치하여 후방 지원을 맡게했고, 법정을 핵심참모로 기용했다. 제갈량 역시 법정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후일 법정이 살아만 있었더라도 이릉의 대패는 없었을 것이라고 탄식했을 정도니 그의 지모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실제 제갈량이 연의에서 보여주는 비범한 군사적 전공들은 사실 법정의 모습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어쩌면 조조의 곽가, 유비의 법정이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뛰어났으나 짧은 수명이 안타까운 인재.
법정의 이런 지략은 한중 공방전의 유비의 퇴각 에피소드에서도 잘 드러난다. 익주 공략 당시 방통의 죽음은 파죽지세였던 유비군의 방심과 조금 앞서 있었던 양주에서의 마초 세력 완전 축출로 인한 초조감이 겹쳐 벌어진 비극으로, 그때까지 온갖 생고생을 하면서 가족은 잃어도 핵심 막료 집단은 어떻게든 거의 잃지 않았던 유비가 공세였던 유리한 전장에서, 장수도 아닌 책사를 전사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유비의 상처는 자책하는 유비를 달래기 위해 방통의 위상을 줄여보려는 장존의 발언과 방통을 잃은 슬픔으로 장존을 바로 내쳐버리는 유비의 반응을 보더라도 드러난다. 법정이 퇴각하지 않으려는 한중 공방전에서 화살과 돌을 직접 맞으려 했던 것도 방통과는 함께 익주 공략의 책사로서 협업하고, 어떤 의미 그 후계적 자리를 꿰찬 인물이기도 한 법정이 이런 유비의 심리를 알고 의도적으로 자기 목숨까지 걸고 그 트라우마를 자극해 제 목적을 이룬 셈이다. 참으로 그 성격이 베어나오는 지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방통처럼 떠나 보내지 않으려' 했음에도 결국 얼마 안 가 그를 잃고 만 유비, 그리고 그런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유비를 제지할 수 있었던 그의 부재를 아쉬워 한 제갈량의 심중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양희 역시 계한보신찬에서 법효직을 찬함(贊法孝直)이란 글을 쓰고 '익후(翼侯, 법정의 시호)는 훌륭한 책략을 사용하고, 세상의 흥함과 쇠함을 예측했다. 주상에게 몸을 던져 의탁하고, 의견을 서술하고 자문했다. 잠깐 생각하고도 바른 평가를 내리며, 사태를 보고 변화의 징조를 알았다.'하고해 법정의 지모를 높게 평가했다.

다만 법정의 각박한 성정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2]

4. 미디어 믹스



[1] 단 법정이 직접 받은 것은 아니고 그의 아들 법막이 받았다.[2] 기본적으로 진수는 인물을 평할 때 능력만 아니라 행실이나 성격까지 평가 기준점으로 잡아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공을 세웠어도 인격에 흠이 있으면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