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개성상인/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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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16~17세기
2.4.1. 베니스(델 로치 상사)
2.4.2. 피렌체
2.4.3. 나폴리(나폴리 왕립공작소)
2.5. 스페인
2.8. 오토만 제국(오스만 제국)
2.9. 교황청과 성직자들
2.10. 실존인물
3. 20세기
3.1. 한국(정명그룹)
3.2. 이탈리아(베니스)
3.3. 미국


1. 개요[편집]


오세영의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등장인물 일람.


2. 16~17세기[편집]



2.1. 조선[편집]


승업이 분의복수군으로 경상우수영에 배속되었을 때 고참 수졸과 싸움이 나기 직전에 말려서 그를 도와주었다. 유능한 수졸로 화포를 잘 다룬다.칠천량 해전 패배 후 사쓰마에 포로로 끌려가 동고동락을 하며 포로들의 질서를 잡는 역할을 했다. 탈출을 기도했다가 일본의 앞잡이인 신봉구의 고변에 걸려 죽기 직전에 승업을 대신해 죽는다.
  • 정낙일
승업이 사쓰마에 포로로 가서 알게된 친구.
  • 신봉구


2.2. 일본[편집]


  • 도모나카
조선인 포로를 관리하는 악역. 승업과 갈등하는 반동인물. 조선인 포로출신이었다.
  • 도시오
사카이의 거상. 사농공상 계급사회였던 일본에서 제일 낮은 사회계급이었지만, 상인으로서 눈치도 빠르고, 상업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면 행동하는 과감한 판단력도 대단하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자신이 사고파는 상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납치된 도자기 기술자 심씨가 구운 백자를 보고는 "가마를 닫고 구웠는지, 열고 구웠는지"를 물어볼 정도로 상품지식이 대단하다. 노련한 상인인 자신에게 패배했지만, 상업에 재능이 있으니 자신의 생각을 어김없이 읽어내었던 승업을 마음에 들어한 모양인지, 시골무사 우에스키를 이용하여 승업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기도 했다. 정치를 읽는 감각이 어김이 없어서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내전이 있을 것임을 내다보고는, 전쟁에 필요한 화약을 사들였다. 훗날 안토니오가 세빌라 주재 대리인으로 있을때 그곳에 방문한 일본인들에게 그의 소식을 듣게 된다. 도시오 대신 이노우에라는 이름을 쓰고 있고, 도쿠가와 막부의 실력자가 된 듯하다. 도시요가 아니다
  • 이치로
승업이 사카이에 끌려간 후 창고지기로 같이 일한 친구. 글을 막힘없이 읽지를 못해, 장부를 우에스키에게 보고할 때마다 승업의 도움을 받았다.
  • 서여 스님 : 조선의 동래에 있을 적에 송방(개성상인들이 개소한 지방대리점) 노동자였다. 젊은 혈기에 살인죄를 짓고는 일본으로 도망했다. 글을 알고 불교신자였기 때문에 불교승려가 되었다. 승업이 상업에 재능이 있음을 읽고는 "떠나게, 자네가 능력이 없어서 허드렛일이나 한다면 마음은 편하겠지. 그런데 자네가 일본에 자리를 잡고 살다보면, 고향이 그리워서 힘들어질 것이네. 일본에 의대리아(이탈리아)상인과 중국 명나라 상인인 담신민이라는 분들이 있는데, 의대리아 사람들의 노예로 가는 형식으로 중국으로 가게. 아마 자네 몸값으로 시골 사카이의 무사인 우에스키가 놀랄 정도로 돈을 주었을 것이야. 담대인이 계획을 하여 자네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려고 할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네."라고 말해주었다.
  • 우에스키
일본의 시골무사. 성격이 고지식하기만 할 뿐이지 상인으로서의 능력이 없어서 도시오에게 휘둘리기 일쑤이다.


2.3. 명나라[편집]


  • 담대인
본명은 담신민. 신안상인. 주인공 유승업이 일본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베니스로 가는데 매우 큰 도움을 준 대인배. 과거 송상에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풍랑을 만나 겨우 살아남았는데, 송상인 최씨가 파수(지급기일이 150일인 어음)을 내주어 인삼장사를 하였다고 했다. 담대인은 아무 재산이 없었지만, 최씨가 담신민의 정직한 마음을 눈빛을 보면서 읽어낸터라 기꺼히 상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예수회 선교사인 스테파노 수사가 천주실의를 한자로 옮기는 문서선교 활동을 돕기 위해 한문을 배운 승업을 소개하였다.


2.4. 이탈리아[편집]



2.4.1. 베니스(델 로치 상사)[편집]


델로치 상사의 대표. 정확하게 말하면 델 로치 상사를 지배하는 가문이다. 자신의 조카인 스테파노 수사의 추천에 안토니오를 사원으로 받아들인다. 과묵한 스테파노 수사가 "라틴어에 능통하다"라고 쓰는 등 승업의 장점들을 말했기 때문에 믿을만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은퇴 후엔 별장에서 한가롭게 지낸다.
  • 조르지오 델 로치
루이지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은 델로치 상사의 대표. 북방무역부에서 부친의 장사를 도왔으며, 스테파노 수사의 사촌동생이다. 처음 대표가 되던 해 부동산의 값이 올라 장부상으로나마 큰 돈을 벌어서 행운아로 여겨졌다.
안토니오가 신대륙 개척을 구상할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안토니오와 알베르토가 경쟁하도록 부추,긴다.
특히 30년 전쟁 때는 비밀리에 갈로를 시켜 캄파넬라 상사를 설립해, 개신교가톨릭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으로 알베르토와 안토니오 둘 중 지는 사람을 몰아내려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개신교 쪽에 승부를 걸었던 터라, 30년 전쟁 후 델 로치 캄파넬라 상사의 총지배인이 안토니오로 실권을 잡고 명목상의 대표가 되었다.
7년간 조용히 있다가 인쇄소 수주를 위해서 뛰는데 처음엔 어느 정도 재미를 보다가 읽기 쉬운 고딕체가 아닌 예쁜 이탤릭체를 선택한 실수(안토니오가 지금도 개최하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에서 책들을 읽어보니 이탤릭체가 아닌 고딕체로 인쇄한 책이 많았다. 예쁜 이탤릭체가 아닌 읽기 쉬운 고딕체로 인쇄한 글을 독자들이 읽고 싶어한다는 뜻인데, 조르지오는 이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에 이어 교황청성경 인쇄마저도 네덜란드의 인쇄업자에게 넘어가면서 위기를 맞는다. 안토니오, 포르타와의 불화 끝에 처음엔 자신의 지분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지만 나중엔 아예 자기 지분을 다 빼내서 투자해서 델로치 캄파넬라 상사와는 완전히 남남이 되었다. 간신히 프랑스 왕국에서 군함 수주를 받은 안토니오의 배려로 또 다시 명목상의 대표가 되어 경영에는 일체 관여하지 못하게 되었다.[1]
  • 카토 총지배인
안토니오가 델 로치 상사에서 처음 만나본 델 로치 상사의 높으신 분. 회계 출신. 자수성가한 루셀라니와는 달리 이쪽은 베니스의 귀족출신으로 행동에는 품위가 있으나, 고생을 해본 적이 없어서 사원들의 실수를 이해하고 감싸주는 너그러움이 전혀 없다. 델 로치 상사에서 계획한 사업이 실패하면 아랫사람에게 가차없이 책임을 물었다. 실제 델로치 상사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사용할 유리를 납품한 사업에서 로셀리노가 메디치 가 기슬란티의 회유공작에 휘둘려서 기밀을 유출하자, 나폴리 왕국을 통해(명의만 빌림이 아닌 로렌제티 나폴리 공작소 총재가 입찰에 응했음)성물입찰에 낙찰하여 델 로치 상사의 신뢰를 얻은 안토니오의 변호에도 책임을 물었다. 나중에 은퇴하여 10인위원회 보좌관으로 발탁되어 베니스정청으로 간다.
  • 루셀라니 수석부지배인
안토니오의 후견인. 베니스로 온 안토니오의 회계능력(고향인 조선에서 배운 복식부기인 사개송도치부법을 사용하여, 델 로치 상사의 경영상태를 알 수 있는 장부를 만들었다. 장난삼아 만든 장부가 회계부에서 작성한 장부에 끼어들었고, 월말에 장부가 실제 창고에서 상품이 드나드는 내역과 같은지 검사를 하던 루셀라니가 읽었다.)을 인정하여,창고가 아닌 자신의 집에서 살도록 했다. 이탈리아의 시골 알비 태생. 아내와 사별한 후 갓 태어난 외동따님 줄리에타를 데리고 베니스로 와 기업 경영인에 준하는 직위인 지배인으로 자수성가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같이 일하는 상업노동자들에게 책임을 함부로 물게 하지 않아, 사람들이 어려워하기는 해도 인기가 더 좋다. 영업출신. 안토니오가 이스파한 대리인 시절 공을 세우자 자신의 시대는 갔다고 생각하고 그와 알베르토 등 젊은이들에게 후일을 맡기고 은퇴해 고향 알비로 내려간다. 안토니오에게 자신을 뛰어넘는 훌륭한 상사원이 되어달라는 말을 남기는데, 안토니오는 이를 은인의 부탁으로 여기고 끝없이 도전한다.
  • 갈로 부지배인
큰 비중은 없다. 금융가문인 후거 가 파산 때, 총지배인 카토에게 잔소리 듣는다. 루이지 델로치와 카토 은퇴 후 총지배인이 되지만 하는 거 없이 루이지의 말벗이 되었다. 그러다가 30년 전쟁 때 비밀리에 조르지오의 명령을 받아 캄파넬라 상사를 설립하고 그곳의 총재로 있었다.
  • 줄리에타 루셀라니
과거편의 히로인. 루셀라니 수석부지배인의 외동딸. 안토니오가 그녀의 집에 식객살이 하면서 정을 쌓는다. 아버지가 바쁜 상사원 생활을 해서 외로움엔 강한 편. 발랄하면서도 차분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 나중에 청년이 된 안토니오한테 반해서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고 아이 2명을 낳고 베니스에 머물다 안토니오 은퇴 후엔 함께 아버지의 고향 알비로 내려가 여생을 보낸다. 안토니오에게 반한 이유 중에 하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과 안토니오가 일하는 모습이 닮았기 때문. 묵묵히 안토니오를 이해하고 내조한 반려자.
델로치 상사 내의 안토니오의 최측근. 산 마르코 창고지기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다. 신항로 개척, 30년 전쟁 등 여러 고난을 안토니오와 함께 한다. 프랑스 군함 수주건에서는 잉글랜드 정보부서의 정보수집을 우려한 프랑스의 속임수에 걸려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어 충격에 기절하기도 하였다. 안토니오 은퇴 후 그의 후계자로 꼬레아 캄파넬라 상사의 총지배인이 된다. 포르타는 라틴어로 문을 뜻함.
  • 팔라디오
델로치 상사 내의 안토니오의 측근. 신대륙항로 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세빌라 주제대리인. 포르타와 마찬가지로 안토니오를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특히나 30년 전쟁에서는 안토니오를 따라 캄파넬라 상사로 이적하지는 못했지만 해고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일본산 조총을 안토니오에게 빼돌려주기도 했다. 안토니오 은퇴 후에는 포르타의 보좌를 맡았으니 아마도 꼬레아 캄파넬라 상사의 수석 부지배인 정도는 했을듯.
  • 구에르치노
안토니오의 직장선배. 로셀리노와 입사 동기이다. 작중 묘사를 보면 거의 회계부 대리인으로 되어 있다. 성격은 참 좋은 듯. 나중에 30년 전쟁 때도 안토니오를 도왔다. 그후 안토니오의 밑에서 이제는 제대로 일 좀 해보나 했더니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안토니오는 포르타의 보좌로 그를 생각했으니 아까운 죽음이다. 사망 직전 최종 직책은 델 로치 캄파넬라 상사 부지배인. 그의 뒤를 이어 포르타가 부지배인 말석으로 들어간다.
  • 미모 로셀리노
안토니오의 직장 선배. 교황청 유리입찰 때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했다. 인품은 좋지만 평범한 능력의 인물. 피렌체 측에 있던 옛 친구의 회유에 나폴리와의 계약조건을 말하기도 하였다. 한 것 없이 해고되고, 한참 안 나오다가 후반부 군함 수주편에서 인쇄소에서 재등장한다. 이탤릭체의 몰락을 예감한 안토니오의 예감에 확인사살을 시켜준다.
  • 스테파노 수사
델로치 상사 대표 루이지 델 로치의 조카로 조르지오에게는 사촌 형이다. 한때 상인을 꿈꿨지만, 신학이 제 갈 길이라고 생각하여 예수회 수도자가 되었다. 루이지에 따르면 남을 잘 칭찬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조카의 말을 믿고 안토니오를 고용한 것. 안토니오와의 첫 만남은, 그가 명나라에 머물 때 방에서 나오다가 부딪쳐서 우연히 만난 것. 그 뒤 공부를 좋아하는 안토니오에게 가톨릭 교리, 라틴어, 로마법같은 서양학문 공부를 가르치고, 한자 필담을 나누며 토론도 한다. 그의 소개장으로 안토니오는 델로치 상사에 입사하게 되니 그 역시 은인이라 할 수 있겠다. 성 클레멘스 수도원에서 사는 미카엘 수사와는 절친. 중국 명나라에서 예수회 선교사로 살았으며, 중국의 말과 글인 한문에 능통하다. 매우 신중하고 엄격한 성품이라, 서양종교라고 하여 천주교를 배척하는 사대부들은 물론, 교리도 잘 모르면서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피해 천주교 신자가 되려는 하층민들도 경계한다. 이는 조선에서 활동하던 개신교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여서, 음주, 흡연, 축첩, 미신등을 버리지 않으면 공동체밖으로 배제하고, 성서교육에 천착하는 등의 엄격한 권징을 했다. 중국에서 개신교회의 도움을 받기 위해 기독교인 행세를 하려는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들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 구스토디
델 로치 캄파넬라 상사의 대주주. 안토니오와 조르지오간의 다툼에서 뚝심있게 안토니오를 지지한다. 조르지오가 캄파넬라 상사를 떠나 상사의 이름을 개명해야될때, 구스토디 캄파넬라대신 꼬레아 캄페넬라 상사로 개명한다.


2.4.2. 피렌체[편집]


제1권 물의 도시로, 천국의 열쇠 장의 여장부. 토스카나 대공국의 공녀로, 언니가 프랑스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치이다. 교황청에서 주관하는 성 베드로 대성당 유리납품 입찰에 피렌체 지역 유리회사인 아카데미아 델 치멘토를 이끌고 안토니오와 맞선다.
당대 유럽의 양대 금융자본이자 교황 4명, 프랑스 왕국 왕비 2명을 배출한 명문가의 영애답게 기품도 있고 배포도 크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인 로렌제티 총재와 은밀히 만나서 나폴리가 빠지면 합스부르크 가문이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융통한 채무의 이자 200만 두카트 변제를 이월시켜주겠다고 제안할 정도로 모략과 협상에도 능하다.
그렇지만, 그녀의 제안은 그가 직접 소속된 나폴리에는 직접적인 이익이 안 됐고[2], 안토니오가 말한 이 입찰에 꼭 나서야 하는 이유[3]에 대한 설명보다 설득력이 약해서 오히려 로렌제티가 안토니오에게 설득되어 교황청 납품 성사여부에 상관없이 베니스 유리를 인수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입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서 마주친 안토니오에게 "대단하군요. 안토니오 코레아. 그 완고한 로렌제티 자작을 공짜로 부려먹다니... (손수건을 건네주며)이것은 비르투오소[* 어느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전문가를 부르는 칭호. 우리나라식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이라고 할 수 있겠다.]를 만난 것을 기념하는 증표예요."라면서 패배를 인정하고, 비르투오소를 만남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메디치 가의 문양이 그려진 손수건을 그에게 주며 마차를 타고 돌아간다. 서술자에 의하면 17세기 유럽에서 손수건은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손수건을 준다는 것은 굉장힌 신뢰를 뜻한다고 한다. 감정과 생각표현이 솔직한 서양사람과 달리, 겸손과 절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아시아 사람인 안토니오가 겸손해하자,"아니오. 당신은 정말 비르투오소라고 불릴 자격이 있어요.로렌제티 자작의 마음을 읽는 것 하며, 규소 가격을 산출해서 정확한 입찰단가를 셈한 것하며... 비르투오소라고 불릴 자격이 있겠지요."라고 칭찬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피렌체가 베니스의 유리산업 독점시대에 종언을 고하였음을 내다보도록 하는 복선이며, 훗날 안토니오가 상사 총지배인이 됐을 때 베니스 유리공장에서 투자금을 철수시키고 그 자본의 신규투자처를 고민하다가 의도찮게 은퇴 전 마지막 승부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다.

  • 안토니오 카를레티, 프란체스코 카를레티 부자
담대인의 소개로 안토니오를 노예라는 명목으로 데려가서, 조선에 귀향시켜 주려던 안토니오의 은인.
안토니오 카를레티는 명나라에서 투병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난다. 이후 프란체스코는 안토니오를 해방시키려 했으나 조선의 사정이 좋지 않아[4] 해외 견문 차 고향인 이탈리아로 안토니오를 데려가지만, 도중에 프로테스탄트들인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가톨릭교도들인 카를레티와 안토니오가 나포되는 사고가 생겨 2년 정도 둘이 같이 노예생활을 하다가[5] 겨우 피렌체에 도착한다. 약속대로 자유민 신분증명서를 써 주고 헤어진다.


2.4.3. 나폴리(나폴리 왕립공작소)[편집]


  • 로렌제티 자작
나폴리 왕립 공작소의 총재.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 에스파냐 국왕인 펠리페 3세의 인척이다. 이 점 때문에 루시아니 공녀가 협상을 시도[6]했지만, 안토니오 꼬레아의 설득[7]에 더 높은 점수를 매겨 최종 낙찰자가 된다.
  • 고졸리에 법률고문


2.5. 스페인[편집]


  • 호세 곤잘레스
사르가소 해 횡단 때 안토니오가 도움을 받았던 노련한 항해사. 성격이 거칠어 선주들과는 마찰이 많지만, 선원들 사이에서는 신같은 존재. 안토니오와 첫만남 때 마찰이 있었으나,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막역한 사이가 된다. 실제 멕시코를 같이 다녀올 정도로 굉장한 실력을 가진 항해사이지만, 불같은 성미때문에 선주들과 자주 부딛혀서 배를 자주 타지 못했다. 심리학에서는 성격유형을 주도,사교,우호,분석으로 나누는데, 주도형의 장점(정확하고 빠른 판단,굳은 신념,장해물을 극복함,목표를 정하면 이룸.)과 단점(고집,직선적인 말투,불같은 성미)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호인으로 카리스마로 선원들을 휘어잡는다.
안토니오 왈, '앙길라 앙길라'(유럽 뱀장어)
  • 디에고
대서양 횡단 때 호세 휘하의 견습사관. 프랑스 군함 수주건 때 바사호의 약점을 예측해 역전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2.6. 잉글랜드 왕국[편집]


  • 알프레드 머레이
잉글랜드와 베네치아의 무역전쟁 시의 라이벌. 처음 등장했을 당시의 직책은 알비온&칼레도니아 상사의 지배인. 막판에 안토니오가 역전을 거두자 안토니오의 앞에 나타나 간지폭풍의 모습을 남기고 5년의 시간을 주겠다며 떠나갔다. 하지만, 정작 5년도 채 안 돼서 잉글랜드와 오스만 제국의 직교역이 열렸다.
이후, 잉글랜드 정부 재무경의 보좌관[8]이 되었고, 30년 전쟁 때도 안토니오에게 정보를 주는 등의 도움을 제공.[9]


2.7. 포르투갈 왕국[편집]


  • 로드리고
사르가소 해 횡단 때 도움을 받은 항해사. 개척을 함께 떠난 배인 엘도라도의 항해사를 맡았다.


2.8. 오토만 제국(오스만 제국)[편집]


  • 야유브타이
예니체리 사령관 브릴클라키의 부관. 이름에서 알 수 있겠지만 몽골계이며 외조모 가계가 고려인의 혈통이 섞여있다고 말하면서 이역만리에서 만난 같은 동아시아 사람인 안토니오 꼬레아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권력 싸움에 눈이 멀어 동맹을 맺어야 하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잡으려고 장차 더 위협적인 잉글랜드와 손을 잡는 궁정 대신들을 강하게 혐오하는 등[10] 예니체리 총사령관 부관[11]답게 대국을 읽는 식견도 갖춘 인물.
실제 역사에서 몽골계가 오스만의 고위 관직까지 오른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바로 아래에 서술할 데브시르메 제도의 주요 징집 대상은 발칸 반도 산골 마을들이었으며, 당시 몽골인 가운데 유럽이나 중동에서 활동한 경우는 거의 대부분이 무슬림이었는데 애당초 무슬림은 징집 대상이 아니었다[12]. 오히려 오스만의 신하국인 크림 칸국의 중신으로서 오스만의 정계 혹은 군부에도 선을 넣고 있었다는 설정이 보다 있을 법한 이야기.

  • 브릴클라키
예니체리 총사령관으로 그리스계 출신. 예니체리 및 관료 징집제도인 데브시르메 제도를 고증한 설정이라 할 수 있으나, 이름이 튀르크어식이 아니라는 건 고증 오류다. 맘루크 잔당들의 반란을 베네치아가 지원하는 걸 빼면 베네치아와는 꽤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있으며, 루셀라니 부지배인과도 연이 있는지 코스탄티니예에서 은밀히 만나 잉글랜드의 무역공세 방어에 대한 방안을 의논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집트 맘루크 왕조가 갓 정복된 16세기 중반쯤이면 모를까 17세기 초, 중반인 당시에는 맘루크의 반란 같은 건 없었다. 오스만의 정복 이후에도 맘루크의 특권이 거의 대부분 유지되었기 때문으로, 이게 소멸한 것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그 뒤에 이은 무함마드 알리의 대대적인 개혁 이후. 게다가 예니체리는 어디까지나 오스만 황제의 근위병이었기에 우호관계든 적대관계든 총사령관 개인이 외국과 관계를 맺을 위치 자체가 아니었다[13].


2.9. 교황청과 성직자들[편집]


  • 미카엘 수사
스테파노 수사의 절친. 어릴 때부터 장난도 많이 치며 어울렸다고 한다. 성 클레멘스 수도원에서 살고 있다. 델 로치 상사가 교황청의 유리입찰에 참여하자,지혜를 구하러 온 안토니오에게 베네치아공화국의 유리사업자들이 공정하게 사전입찰을 했다는 증명서를 가져가도록 하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


2.10. 실존인물[편집]


사르가소 해 횡단 때 안토니오에게 수학지식을 전수해준다. 다만 자기가 만든 각도측정도구를 주기는 하는데, 그것의 정확도를 자신도 확신 못하는 상태에서 넘겨준다. 나중에 실제 항해길에서 써 본 결과, 경험이 많은 호세 항해사의 측량치와 별 차이가 안나는 걸 보면 역시 이름값은 한 모양.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14]
  • 틸리 백작
가톨릭군의 최고지휘관으로 안토니오 꼬레아를 갈구는 역할.
30년 전쟁편과 프랑스 군함 수주편에서 등장. 신비의 사나이로 사기꾼 취급을 받는다.
돈줄이 마른 안토니오에게 50만 두카트를 받아내서 먹튀하는줄 알았지만 신의를 지켜 공작을 통해서 사보이아 공국의 만스펠트 백작이 귀국하게 하여 안토니오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군함 수주편에서는 스웨덴 고위층을 매수해 바사호의 설계도를 구해온다. 그리고 이때 간지폭풍 명대사를 날려준다.
그의 활약을 보면 후반부 데우스 엑스 마키나.[15]
  • 에른스트 폰 만프레트
사보이아 공국의 용병대장으로 당시 개신교 측 최고의 명장이었다. 직접적인 대사는 없고 다만 발렌슈타인의 공작에 말려들어 '안개를 먹으면서 싸울 수는 없다.'는 말만 남기고 후퇴한다.[16]


3. 20세기[편집]



3.1. 한국(정명그룹)[편집]


  • 유명훈 : 실향민의 아들. 아기였던 유명훈은 1951년 1.4후퇴때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피난했다. 부친이 밀가루 장사를 하여 자리를 잡은 중산층이다. 대학교에서 사학을 공부했고, 취업이냐, 공부이냐를 고민하다 정명물산에 입사했다. 천주교 신자인 유명훈은 자신과 세례명이 같은 안토니오 코레아 이야기를 사학자인 친구에게 들으면서 동질감을 느낀다.
  • 김영주 과장
유명훈 편의 히로인. 작중 묘사는 영화배우 뺨치는 미인.
패션업계에서 일하는 탓에 계절을 앞서고 나올 때마다 옷이 바뀐다.
당차고 활발한 성격으로 그녀를 볼 때마다 유명훈은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어릴적에 부친이 별세하여 미국 뉴욕에서 새아버지, 어머니와 살았다. 영어불어에 능통하다. 프레젠테이션을 주도하는 장면은 빈틈없는 성격을 보이고 있다.
  • 정진철 대리 : 유명훈과 같이 열심히 일을 하다가, 적성에 맞는 금융연구소로 옮겼다.
  • 차명재 과장
이탈리아편에서 나온다. 일반인 주제에 정명그룹의 새로운 차량을 몰고(보조 드라이버 자격) 파리 다카르 랠리를 완주한다.
  • 박영일 부장 : 이탈리아 밀라노 지사장. 유명훈이 자동차 산업에 투자하려는 정명그룹의 경영방침에 따라 이탈리아 캄파넬라 상사에 오자 세심하게 돌보는 역할.


3.2. 이탈리아(베니스)[편집]


  • 피에트로 모란테(허규태)
캄파넬라 상사의 디자이너로 직책은 설계이사. 6.25 전쟁으로 인한 혼혈아. 어릴 때 한국에 산 적이 있었으나 당시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유명훈과 정명물산이 캄파넬라 상사를 인수하는 것을 도와주고 이탈리안 스탤리온을 디자인한다.
  • 페놀리오 사장
캄파넬라 상사의 사장. 이탈리안 스탤리온을 제작했지만, 그외 작품상 비중은 높지 않다.


3.3. 미국[편집]


  • 제이슨 리
미국 수출 의류 덤핑 제소건 때 등장한 재미교포 변호사. 공청회의 위원들에게 양도 없이 당돌하게 대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명그룹 인사들이 그 모습이 오히려 역풍 맞는거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
  • 맥킨지 조사관
  • 러스티
캄파넬라 상사 인수편에서 등장. 미국인으로 캄파넬라 상사의 이탈리안 스탤리온이 랠리에 출전할 때 네이게이터로 차명재 과장과 함께 출전했다. 처음엔 티격태격했지만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차명재를 형님이라 부른다.


3.3.1. 미합중국 해군[편집]


  • 볼드윈 대령
CV-61 USS 인디펜던스 항공모함의 함장으로 걸프전에 참전하여 항공모함을 지휘하는 함장. 계급은 대령. 베트남 전쟁에서 라인배커 작전에 동원되어 미그기를 격추시킨걸로 나온다. 작중에서는 로버트슨 대위와 함께 이라크군 미그기를 한 기 격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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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안토니오는 자신을 델 로치 상사에 일하게 해준 루이지 델 로치의 은혜를 갚기위해 30년 전쟁에서 투자실패로 위기에 있었던 조르지오를 대표로 앉힌 것이다. 실권없이 그냥 남은 인생 편하게 보내라는 뜻으로. 하지만 조르지오가 끝내 다시 경영일선으로 복귀하고 사업구상까지 하자, 그때까지는 예를 갖춰 대했으나 그 후로 그의 뜻을 꺾기 위해 매우 냉정하게 대한다.[2] 로렌제티 자작이 "내가 에스파냐 왕실의 인척이기는 합니다만, 에스파냐 왕실의 일이 내 일은 아닙니다.라고 했음[3] 이 시기의 나폴리는 예술성이 뛰어난 곳이지만 산업화 등의 경제력에서 밀리는 까닭에 촌놈이라고 무시당했다. 그 때문에 번번이 로마 교황청 진출에 실패했으니 이번 기회를 계기로 베네치아 유리를 앞세워 유리납품에 성공한다면 이를 교두보 삼아 나폴리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4] 승업은 세례성사를 받은 가톨릭 신자이다. 만약 승업이 조선으로 돌아갔다면 분명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5] 이때 꽤 있던 노자도 날려 먹는다.[6] 로렌제티 자작이 정식으로 교황청 유리 납품 입찰 경쟁에 응하자,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3세 폐하"의 인척인 로렌제티 자작을 무시할 수 없고, 서류를 갖추어 교황청 사무처에 서류를 제출하여 트집을 잡을 수 없는터라 여장부인 루시아니 공녀가 로렌제티 자작을 설득하려는 협상을 나선 것. 교황청 유리 납품 입찰 경쟁에서 빠진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에 메디치 가에 변제해야 할 이자 200만 두카트를 조건 없이 내년으로 이월시켜주겠다는 것.[7] 성 베드로 대성당 유리 납품 입찰이 나폴리가 로마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것. 예술적 감수성은 풍부하지만 매번 경제 발전도에서 북부에 밀려 촌놈 취급 당하던 나폴리의 서러운 현실을 안토니오에게 제대로 짚히면서 루시아니 공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안토니오의 손을 잡았다.[8] 지금으로 치면 영국 총리의 보좌관이 된 것이었다. 이는 영국 총리의 기원이 재무장관이었기 때문. 총리라는 직책이 영국 정부 내에서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재무장관은 내각 장관들 중에서 수석장관이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총리 역할을 수행했었다. 지금도 재무장관의 의석 서열이 총리보다 높다.[9] 공짜로 준 건 아니고 안토니오의 사르가소해 횡단 정보와 맞교환하되, 은유적인 표현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에서 5만 플로린의 군자금을 개신교 연합에 매월 제공하고 있다는 걸 '최근 한 달 사이에 플랑드르만 다섯 번을 왔다갔다 했다.'라고 돌려서 표현한 것.[10] 고증 오류에 가깝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잉글랜드와 오스만이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일은 있으나 이것도 잉글랜드가 먼저 제안을 한데다, 관료들의 중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후의 자격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아들 메흐메트 3세를 대신하여 사실상 국정을 운영하고 있던 사피예 술탄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오스만은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둘러싸고 베네치아, 스페인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잉글랜드는 바로 그 스페인과 앙숙이었으니 동맹으로 얻을 이점도 명확했다. 단 1593년부터 1606년까지 합스부르크 제국과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같은 기독교도니 다 같이 못 믿을 놈들 아니냐' 라고 보는 관료들이 많아지고 있었던데다 1603년에 메흐메트 3세가 사망하고 손자 아흐메트 1세가 즉위하면서 사피예 술탄의 영향력도 끝났기 때문에 동맹이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11] 육군 참모총장 부관이나 비서실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맞지 않다. 오스만군 하면 예니체리만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정작 예니체리는 일종의 특수병으로, 전체 군사의 10퍼센트 안팎인 것이 불과했기 때문. 17세기 초, 중엽인 당시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고는 있었지만 그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주력군은 시파히였으며, 그 밖에도 전쟁 시 무슬림을 상대로 모집하는 자원병인 아자브, 비정규 민병 기병대인 아큰즈 등 다양한 병사들이 있었다. 따라서 예니체리군 총사령관의 부관을 육군 참모총장 부관이나 비서실장으로 생각하는 건 맞지 않으며, 차라리 특전사 부사령관에 더 가깝다.[12] 국교가 이슬람이었던 일 칸국이나 크림 칸국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추가로 데브시르메로 징집되어 교육받으면서 필수적으로 거치는 과정이 이름을 투르크어식으로 바꾸는 것이었기 때문에, 몽골어식 이름을 계속 쓴다는 건 빼도 박도 못 할 고증 오류다.[13] 당장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방부장관이 외교를 하는가, 아니면 외교부장관이 외교를 하는가? 더군다나 예니체리 사령관은 국방부장관보다도 낮은 자리로, 오스만 제국에서 딱히 대한민국의 국방부장관과 비교할 만한 지위는 없지만 굳이 들자면 부재상(Vizier) 정도가 있다.[14] 각각 30년 전쟁의 가톨릭 및 개신교의 우두머리다. 안토니오 꼬레아와 만나는 건 아니고 30년 전쟁의 프롤로그에만 등장한다.[15] Deus ex machina,기계장치로부터의 신, 기계장치의 신. 연극에서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와서 어려움이 겪는 등장인물을 돕는 역할을 뜻한다. 한국의 전래동화인 콩쥐팥쥐에서도 콩쥐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두꺼비, 황소, 참새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다. 그래서 독일의 루터교회 대신학자인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는 종교에 의존하는 인간을 비판하기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말을 썼다.[16] 이는 그의 고용주인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진작에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를 씹고 전쟁을 하다가 그 고용주로부터 보급이 끊기자 어쩔 수 없이 후퇴하면서 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