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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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Land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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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
주장(州章)




베를린의 위치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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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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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UTC+1/+2
하위 행정구역
12구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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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891.68km²
인구
3,866,385명[1](2023년 6월)
6,340,918명(2023년 4월, 대도시권)
인구밀도
4336명/km²
ISO 3166-2
DE-BE
홈페이지
시청, 관광청(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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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카이 베그너

주의회[1]
여당



52석 / 159석




34석 / 159석

야당



34석 / 159석




22석 / 159석




17석 / 159석

연방의회



7석 / 29석




7석 / 29석




5석 / 29석




4석 / 29석


[[자유민주당(독일)|
자민당
]]


3석 / 28석




3석 / 29석

연방상원
4석



1. 개요
2. 설명
3. 기후
4. 역사
4.1. 고대와 중세
4.2. 근세
4.3. 근대
4.4. 분단기
4.5. 통일 이후
5. 정치
6. 관광
6.1. 명소
6.2. 박물관
6.3. 음악
6.4. 분단과 대안문화의 성지
7. 교통
7.1. 주요 도시 이동 소요시간
8. 주민
8.1. 튀르키예계 베를린 주민들
9. 행정구역
10. 브란덴부르크 주와 통합 떡밥
11.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베를린의 전경
독일수도이자 최대도시. 브렉시트 이후로는 유럽연합의 최대도시이다.[1]

도시주브란덴부르크 주 내부에 둘러싸여 있으며 독일의 나머지 도시주들인 함부르크브레멘의 정식 명칭이 자유 한자[2]인 데 반해, 베를린의 정식 명칭은 베를린 [3]이다. 다만, 하위 행정구역은 여타 도시주처럼 구(Bezirk)로 구획되며, 단체장의 직함도 시장[4]이다. 따라서 한국의 특별시 취급과 비슷한것이라고 보면 된다.


2. 설명[편집]


파일:external/travelhdwallpapers.com/Rotes-Rathaus-10.jpg
베를린 시청사 (Rotes Rathaus)

'베를린'은 독일어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것이고 실제 발음은 한글로 표기할 경우 베얼린(/bɛɐ̯'liːn/, 표준 독일어 기준)[5]에 가깝다. 영어로는 벌린(/bə(ɹ)ˈlɪn/)이라고 읽으며, 프랑스어로는 베를랭(/bɛʁlɛ̃/)이라고 읽는다. 한자음역하면 백림(伯林)이라고 읽는다.[6] 대한민국의 활자매체에서 동백림, 서백림하면 각각 독일의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지칭하는 것이며 과거 동백림 사건의 동백림도 동베를린을 의미한다.

'베를린(Berlin)'이라는 이름은 과거 이 지역에 살던 서슬라브계 민족인 폴라브인의 언어로 '물기가 많은 땅'을 가리키는 'Birlin' 또는 'Berlin'에서 유래했다.[7] 하지만 오랫동안 '새끼곰'을 뜻하는 말로 잘못 알려져 왔던 탓에 이미 1280년부터 쓰였던 도시 문장에도 새끼곰이 들어가게 되었다.

독일이 현대 미술디자인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클럽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유럽 각국의 예술가들과 젊은이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야말로 유럽에서 가장 쿨한 도시. 이 때문에 베를린의 몇몇 낙후 지역은 뜨는 동네가 되어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등 젠트리피케이션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그레이터 런던, 일드프랑스 등 수도권 과밀화가 진행되고 있는 파리런던에 비하면 주거 부담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저렴해서 여전히 역동성을 유지하고 있다.[8] 이는 경제 중심지에 세계에서도 물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파리, 런던과 다르게 베를린은 경제력이 독일 평균을 조금 넘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2015년을 기점으로 베를린이 쿨함을 잃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쏟아진 적도 있었다. 다른 유럽 주요국가 수도와 달리 치안은 상당히 좋다.
파일:external/www.telegraph.co.uk/berlin.jpg
파일:external/www.guiadealemania.com/Catedral-de-Berl%C3%ADn.jpg
베를린 대성당(Berliner Dom). 뒤편에 TV타워와 붉은색의 베를린 시청사가 보인다. 대성당(Dom)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루터교회이다. 가톨릭 베를린 총본산은 운터덴린덴 거리를 낀 성 헤트비히 대성당(St. Hedwigs-Kathedrale)이다.
파일:external/ebnwu.com/1280px-Reichstag_building_Berlin_view_from_west_before_sunset.jpg
독일 연방의회(Deutscher Bundestag)[9]. 2차 세계대전 전후 유리로 재건된 돔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예약 후 방문 가능하다.
파일:external/img07.deviantart.net/berlin___potsdamer_platz_by_modi1985-d4dknrj.jpg
포츠담 광장(Potzdamer Platz). 분단 당시에는 베를린 장벽이 서있던 곳이다. 오른쪽 초고층 유리궁전 건물은 독일철도공사의 본사인 반타워이고, 그 옆에 붙은 기념관 같은 건물은 베를린 장벽 기념 박물관 건물로서 해당 자리에 장벽이 있었다는 표시이자 기념관으로서 세운 것이라 한다. 반타워 뒤에는 한때 국민연금공단 소유였던 센터 암 포츠다머 플라츠(Center am Potsdamer Platz)[10]가 있다.[11][12]
파일:external/blog.radissonblu.com/friedrichstrasse-street-berlin.jpg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
운터덴린덴과 더불어 베를린의 간판급 도로 역할을 하는 도로. 체크포인트 찰리도 이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에 위치해 있다.


3. 기후[편집]


겨울이 매우추운 서안 해양성 기후(Cfb) 기후이다. 최한월 평균기온은 0.6℃로 대구와 비슷하다.
전반적인 겨울 날씨는 기온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습도가 높고 일조량이 적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체감기온은 매우 낮다. 여름 날씨는, 기온은 한국보다 낮고 습도가 낮아 건조한 날이 많아서 그늘에 들어가면 매우 시원하다.
전체 강수량은 적은 편이지만 1년 내내 꾸준히 비가 내리기 때문에 여름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절에는 건조하지 않고 습한편이다. 겨울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때문에 눈이 내린다.
해양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의 특징이 모두 나타난다.


4. 역사[편집]



4.1. 고대와 중세[편집]


기원전 7~8세기 스칸디나비아 반도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게르만족이 남하하여 현 독일을 중심으로 한 게르마니아 일대에 퍼져 살게 되었다. 베를린을 위시한 브란덴부르크 지역은 롬바르드족, 수에비족 등이 살았다.

375년 훈족이 유럽에 당도하자 잔혹한 훈족을 피해 100여 년에 걸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대이동의 결과 원래 엘베강 동쪽에 살았던 게르만족들은 대부분 엘베 강 서쪽으로 이동했다.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지역에 살던 수에비족과 롬바르드족 등도 훈족을 피해 각각 이베리아 반도이탈리아 반도 등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 정착했다.

453년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가 죽고 훈족이 갑자기 멸망하자 엘베 강 동쪽의 드넓은 동유럽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그러자 5~6세기에 걸쳐 그자리에 슬라브족이 내려왔고 베를린을 비롯한 브란덴부르크 일대에는 슬라브의 일파인 벤드족 등이 정착했다.

10세기 독일 왕국신성 로마 제국이 잇달아 세워진 후, 오토 대제마자르족의 침공을 종식시켰고, 이후 작센 공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등을 중심으로 당시 슬라브인들이 살고 있는 엘베 강 동쪽을 수복하려는 동방식민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100년대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브레히트[13]를 위시한 독일인들이 벤드족이 살고 있는 엘베 강 동쪽 지역을 공략했고 1157년 신성 로마 제국이 브란덴부르크 일대를 복속하면서 베를린 지역은 다시 게르만의 영향권에 들어왔다. 이때 베를린이 형성되었으나 초기에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고, 슈프레 강의 북동쪽 둑에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때에는 슈프레 강의 섬에서 쾰른(Kölln)[14] 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었고, 통상의 중심지였던 쾰른이 1237년 도시로 승인되었으며, 1244년 베를린 또한 도시법으로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1307년에는 베를린과 쾰른이 그들의 공동 방어를 위한 연합을 설립, 공통의 시청사를 지었다. 그뒤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상업도시로 발전하였고, 다른 한자동맹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상거래의 자유, 도시자치를 위해 영주와 싸우면서 14세기에는 통상과 제조업의 중심지로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1415년 호엔촐레른 가문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6세가 독일왕 지기스문트로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된 뒤부터 변경백의 권력이 약화되기도 했으나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15] 때 베를린-쾰른은 자치도시로서의 특권을 빼앗기고 다시 분리되어 군주의 행정 아래 들어갔다. 그 뒤 베를린과 쾰른은 상업도시로서의 지위는 떨어진 반면, 쾰른 북부에 호엔촐레른 가문의 성[16]이 세워짐으로써 왕궁·관청도시로 발전하였다. 1486년 선제후 요한 치체로가 베를린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로 선언하면서 본격적으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 개혁 시기인 1539년에 선제후 요아힘 2세는 베를린 근처 슈판다우(Spandau)에서 마르틴 루터의 주관으로 루터파로 개종[17]하였고, 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가 공인되면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전체에 종교개혁을 실시했다. 요아힘 2세의 아들 요한 게오르크 선제후는 서부 독일의 루터교도 및 유대인 등을 받아들였고, 상공업을 발전시켰다.


4.2. 근세[편집]


그러나 3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베를린은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하며 도시 건물의 1/3이 파괴되었고, 시민의 절반 이상이 도망가거나 사망했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베를린은 인구가 6천 명으로 줄어들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30년 전쟁 말기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大)선제후(Großer Kurfürst)[18]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재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선제후는 슈프레 강과 오데르 강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여 함부르크브레슬라우 등의 상업도시와의 사이에 수송로가 열려 상공업이 진흥되고 인구수는 5만 5천 명으로 증가했다. 대선제후 치세 말기인 1685년, 프랑스루이 14세위그노에 대한 재산 몰수령을 내리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이것을 기회로 여겨 즉시 위그노에게 종교와 언어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칙령을 내렸고, 위그노들이 대거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우수한 새로운 시민을 합친 베를린은 상업·공업이 급속히 발전하여, 북동부독일의 지도적인 도시로서 문화적으로도 개화의 기운이 넘치는 신흥 도시가 되었다.

이후 1701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고, 베를린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제치고[19]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더욱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바로크 건축 양식의 궁전과 귀족들의 저택 등이 건설되고, 고전주의 양식으로 된 도시경관이 갖추어졌다. 또 중상주의 정책에 입각한 국왕의 산업보호에 힘입어 모직, 면직, 견직 등의 직물업과 은행업이 크게 일어났다. 지금도 여러 일화, 심지어 성문기본영어에도 등장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비록 다른나라들로부터 병정놀이에 심취한 괴짜왕 취급을 받았지만,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고, 베를린을 주기적으로 시찰하면서 근무가 태만한 공무원을 직접 매질하는 등 공직 기강을 바로 잡아 그의 아들대에 이룩한 프로이센과 베를린의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위하면서 프로이센과 베를린은 번영기에 접어들었다. 물론 초창기에는 말도 안되는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프리드리히 대왕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녀 마리아 테레지아계승에 딴지를 걸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및 후속전인 7년 전쟁이 일어났고, 7년 전쟁의 와중에 한때 크게 수세에 몰려 1757년 오스트리아군, 1760년 러시아 제국군에게 파괴되었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는 잡히기 전 자살하려고 독약까지 지니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두 전쟁에서 연속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프로이센은 비옥한 슐레지엔을 획득하여 번영하기 시작한다. 전쟁이 잦아든 프리드리히 대왕 재위 중반 이후 베를린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상수시 궁전 등을 건축했다. 또 프랑스식으로 개조된 프로이센 학사원이 자리잡았다.[20] 또한 문화적인 특색으로 프랑스에서 전파된 계몽주의적인 경향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궁정문화로 시작되어, 극작가 레싱 등의 활약으로 시민 사이에 뿌리를 내렸는데, 그 새로운 문화경향은 가톨릭적이고 복고적인 경향이 짙은 남부 및 서부 독일의 문화에 비해 이색적으로 작용하면서 통상의 중심지이면서 예술과 과학이 번창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 때문에 베를린은 Spree-Athen(Spreeathen, 슈프레강의 아테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4.3. 근대[편집]




프리드리히 대왕 사후 프랑스 혁명기를 거쳐 나폴레옹 전쟁으로 접어들게 된다. 1806~10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 전쟁 와중인 1810년 알렉산더 폰 훔볼트 남작,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등의 노력으로 베를린 대학교가 세워졌는데, 베를린 대학교는 "훔볼트식 모델"이라 하여 근대 대학시스템의 표본으로 자리잡았다. 우리가 현재 구분하고 있는 전공 학부구분과 박사학위 시스템등이 베를린 대학교에서 실험적으로 도입되었다.[21] 당대의 일류 석학들을 모아 독일 각지의 역사깊은 대학들을 능가하는 명성을 얻음으로써 독일의 학문·예술의 중심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빈 체제하에서 전화의 피해를 복구하기 시작,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인구 20만에서 1861년에 55만이 되었다. 이에 따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30년 전쟁 직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가 구축했던 성벽을 해체하여 도심을 확장시켰다.

1871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프로이센 왕국을 주축으로 한 독일 제국이 출범하자 신생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인구 82만 6천 명이 되었다.



1910년대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의 모습.



1936년 나치 독일 시기와 패망 직후 연합군 군정 시기의 모습.

빌헬름 2세 치세 말기인 1910년, 베를린의 인구는 207만 6200명으로 늘어났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1920년 10월 수도 대확장을 통해 원래 면적의 12배가 넘는 면적으로 확장되었다. 관련 영문 위키백과 문서 베를린 대확장 법령 독일어 원문[22][23]

1920년대 초 독일과 베를린은 막대한 배상금으로 큰 고통을 받았고 살인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렸지만 20년대 중반부터 빠르게 회복해 나갔다. 1920년대 말 베를린은 이전처럼 유럽 문화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회복했다. 이 시기 베를린에는 놀렌도르프플라츠(Nollendorfplatz)를 중심으로 지식인과 예술가, 소수자들이 모여들었다. 베를린에 수백개가 들어선 카바레는 전후 도발적인 문화의 상징이었고, 성소수자들이 잡지를 내는 등 양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4.4. 분단기[편집]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나치의 심장부 베를린 또한 드레스덴이나 쾰른과 같은 독일의 다른 도시들처럼 연합군의 공습을 받으며 전쟁 내내 파괴되었으며 특히 유럽전선 최후의 전투인 베를린 공방전(1945년 4월 16일 ~ 5월 8일)에서 소련군과의 치열한 시가전을 통해 베를린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24] 베를린 공방전이 끝난 직후 베를린 인구의 무려 70%가 여성이었으며, '잡석 여성들(Trümmerfrauen)'이라 불린 이들이 거리의 잔해들을 치웠다. 잔해가 어찌나 많았는지 폐허와 잡석들을 모아올린 더미가 베를린에서 2번째로 높은 산[25]이 됐다!

파일:Berlin_1949-1990.png

서베를린
동베를린
시기(市旗)
파일:베를린 주기.svg
파일:동베를린 시기.svg
면적
479.9㎢
409㎢
인구(1946)
1,996,250명
1,174,582명
인구(1989)
2,130,525명
1,279,212명
점령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구(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노이쾰른(Neukölln)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쇠네베르크(Schöneber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슈테글리츠(Steglitz)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템펠호프(Tempelhof)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첼렌도르프(Zehlendorf)
파일:영국 국기.svg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
파일:영국 국기.svg 티어가르텐(Tiergarten)
파일:영국 국기.svg 빌머스도르프(Wilmersdorf)
파일:영국 국기.svg 슈판다우(Spandau)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라이니켄도르프(Reinickendorf)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베딩(Wedding)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미테(Mitte)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프리드리히스하인(Friedrichshain)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헬러스도르프(Hellersdorf)[26]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호헨쇤하우젠(Hohenschönhausen)[27]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쾨페니크(Köpenick)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마르찬(Marzahn)[28]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팡코(Pankow)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프렌츨라우어 베르크(Prenzlauer Berg)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트렙토(Treptow)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바이센제(Weißensee)

이후 소련군의 점령 양상과 별도로 베를린 자체가 독일의 수도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연합국 4개국, 즉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해 분할되었다. 냉전기 동서 베를린은 각기 미국과 소련의 원조로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단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옛 베를린의 모습들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49년 독일 정부 두 개가 병립하자 소련 점령지구인 동쪽 지구(동베를린)는 사실상 동독에, 나머지 3개국 점령지구(서베를린)는 사실상 서독에 속하게 되었다. 사실상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는 연합군 군정기를 벗어나 동서독 양국이 세워진 이후에도 베를린은 연합군 점령지대로 취급되어, 공식적으로는 서독의 영토도 동독의 영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29] 다만 서베를린의 행정권을 서독이, 동베를린의 행정권을 동독이 행사했을 뿐이다. 동독은 동베를린을 '독일민주공화국의 수도(Hauptstadt der DDR)'라고 칭했지만, 서방 연합국들은 공식적으로는 동독의 사칭 취급했다. 소련을 포함한 제2세계 국가들은 그냥 동독 영토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서베를린에서는 서독 연방의회 의원을 선출하지만 직접 뽑는 게 아니라 서베를린 시의회의 간선으로 선출될뿐더러, 이들은 표결권이 없었고, 서독 기본법이나 서독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도 서베를린에서는 그 효력이 제한되었다. 그리고 징병제였던 서독 본토와 달리 서베를린에서는 징병제가 적용되지 않아 병역을 피하려는 젊은이들이 유입되기도 했다. 심지어 동독 집권당이던 사회주의통일당서베를린 지부가 존재했다. 이 상황은 1990년에 연합군이 철수하고 통일과 함께 정식으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이 합쳐져 베를린 주가 세워지고 나서야 해소되었다.

이렇게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은 공식적으로는 서독과 동독에 속하지 않았지만, 동베를린이 공식적으로 동독의 영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수도라는 모순되는 상황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1974년 서독 월드컵 때 상당수의 경기가 공식적으로 서독의 영토가 아닌 서베를린의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편 서독에 속한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에 완전히 둘러싸인 '육지의 섬'이 되었다. 1948년 독일의 전후 처리 등을 두고 소련과 서방 국가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소련은 서베를린까지 완전히 먹어버릴 요량으로 서베를린을 소련제 탱크로 완전히 둘러싼 채 베를린 봉쇄를 감행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아사 위기에 처한 서베를린이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상상을 초월한 대규모 베를린 공수작전으로 인해 소련의 베를린 봉쇄는 실패하고 말았고 서베를린은 계속 서방 자유주의 세계의 도시로 남게 되었다. 한편 당시 서독과 비교 대상이었던 동독을 육성하기 위해 소련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고, 동베를린은 동구권 국가 도시 중에서는 가장 발전된 도시였다.

그러나 냉전의 긴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서방과 동구권의 경제적 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동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주자가 늘어났다. 매년 수십만명이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주하자 이러다가는 50년 이내에 동독 인구가 0명이 될 판이었다. 이것은 동독과 소련의 큰 골치거리였다. 사실 동독의 수장 발터 울브리히트는 1950년대부터 베를린 장벽을 세우자고 줄기차게 스탈린과 흐루쇼프를 졸랐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의 건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확립한 포츠담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이는 전쟁의 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스탈린과 흐루쇼프는 울브리히트의 간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흐루쇼프 입장에서도 베를린 탈주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동독 체제 자체가 붕괴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 문제로 늘 고심을 거듭했다. 결국 후르쇼프는 1958년 베를린에서 연합국 4개국이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했고, 그렇지 않으면 모종의 조치(전쟁)를 취할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했으나 아이젠하워를 필두로 한 연합국 지도자들은 포츠담 협정 위반이므로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흐루쇼프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물러나며 망신을 샀다. 그러나 1961년 미국 대선에서 약관 43세의 케네디가 아이젠하워의 부통령이었던 닉슨을 꺾고 최연소 미 대통령에 당선되자, 흐루쇼프는 이를 기회로 여겼다.[30] 결국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 야밤에 기습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그리고 흐루쇼프의 예상대로 케네디는 아무런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31][32] 그러자 이때야 소련의 본색을 깨달은 케네디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강경대응으로 돌아섰고, 흐루쇼프는 철수하며 이후에는 더 이상의 도발을 자제하였다. 이후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베를린 장벽 건설 후 동독은 장벽에 죽음의 구역 (Todesstreifen)를 설치하여 지뢰, 철조망, 감시탑, 군견 등을 설치하고 탈주자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즉각사살하라는 명령(Schiessbefehl)을 내렸다.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의 무자비한 자유과 인권 탄압의 상징이 되었다.

한때 세계 정복을 꿈꾸던 베를린이었던 만큼, 서베를린만으로도 서독 제1의 인구를 가진 큰 도시였다. 그러나 분단기는 베를린을 크게 쇠퇴시켰다. 동독 한가운데 콕 박힌 서베를린에서 기업의 중추 업무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연히 베를린에 있던 지멘스와 알리안츠의 본사가 뮌헨으로 떠나갔다. 축구라고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전쟁 전까지만 해도 꽤나 강팀으로 먹어주던 헤르타 BSC 역시 분단으로 인한 접근성 저하가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비실거리는 약팀으로 몰락하고, 대신 남부의 바이에른 뮌헨이 독일을 대표하는 거의 유일한 강팀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뮌헨으로 이사간 알리안츠는 바이에른 뮌헨알리안츠 아레나라는 선물을 안겨주게 된다. 아무튼 간에 이런 식으로 냉전 시기 서베를린에는 제대로 된 산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동베를린은 공산주의 정권의 수도가 되어 온갖 삽질과 실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베를린 대학교 또한 동베를린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와 서베를린의 베를린 자유대학교로 쪼개져버려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베를린 장벽 건설 이전에는 주요 동독 탈출 루트이자 도심 교통의 중추였던 베를린 지하철베를린 S반 또한 장벽 건설과 함께 동과 서로 분리되어 무정차 통과하거나 유령역이 되는 역이 나오는 등 파행 운행되었다. S반은 동독 DR이 서베를린 구간까지 계속 운영하여 서독 측의 보이콧 대상이 되었고, U반은 서베를린측 노선망이 동베를린측 노선망보다 훨씬 충실했던 관계로 U반이 계속 교통의 중추로 기능했고, 함부르크처럼 노면전차를 버스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구 동베를린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U반 노선이 부실하던 관계로 미테 구 대부분의 역들이 유령역으로 전락했다. 이때의 흔적으로 지금도 베를린에서 노면전차는 구 동베를린 지역을 위주로 운행된다.


독일 분단 시절인 1980년대 영국 왕립 군사경찰에서 제작된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통행하는 방법이 나온 안내 영상.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상으로 주의사항에 대한 안내가 나와있다. 서베를린으로 이동하기 위해 동독 아우토반을 이용하는 동안 주차시설에 소련군, 동독군 또는 경찰이 있는 경우 해당 주차시설을 사용하지 말 것, 휴게소에서 정차하거나 사용하지 말 것을 안내하고 있다. 주요 사고시에도 동독 경찰에게 접근하지 말것과 중대한 경우가 아니면 소련 구급차나 동독 구급차를 이용하지 말라는 안내가 있다.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서는 육로로 동독의 아우토반을 이용할 수 있었다. 동독 국적자가 아니라면 정해진 구간만 통행해야 했다. 따라서 해당 아우토반에는 동독과 서방의 자동차가 동시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서독에서 온 이용자들을 위한 휴게소가 따로 지정되어 있어서 서방인과 동독인들이 서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이를 위해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에 막대한 사용료를 지불했다.

그런데 문제는 동독의 아우토반은 시속 80km의 속도제한이 있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에 설계된 모델을 마이너 체인지해가며 1980년대까지도 그대로 생산하던 트라반트바르트부르크 등의 동독 승용차들에게는 시속 80km도 상당한 고속이었고, 상당수의 동독 자동차는 시속 80km로 달리는 것도 무리였다. 하지만 속도무제한 아우토반을 달리던 서독의 운전자들에게는 시속 80km 속도제한은 큰 문제가 되었다. 서독 정부는 이에 대해 동독 정부와 협상했고, 엄청난 추가 비용을 내고 서독 자동차에 한해 시속 100km 속도제한을 적용시켰다. 같은 도로를 놓고 서독 자동차와 동독 자동차에 다른 속도제한이 적용되는 상황은 동독 주민들이 보기에도 이상하게 느껴지기 충분했다. 아우토반을 달리는 메르세데스-벤츠, BMW 같은 고성능 승용차가 바로 옆에서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동독인들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다고 한다.

철도로 서독과 서베를린을 이동하는 경우에는 동독 내 무정차하는 Transitzüge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동독 출경 시 동독측이 경비하기 쉬운 한적한 역에서 승객 전원이 심사를 받았다.

이후 1989년 동베를린 시민들 손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동서독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또한 분단된 지 45년 만에 재통합되었다. 이후 1991년에는 정부를 서독의 임시수도 에서 베를린으로 옮기기로 결정, 이후 지금까지 통일 독일의 수도로 기능한다.


나치 독일 시절과 현재의 베를린 비교.[33]

1990년에는 독일 내에서 정부 기능을 베를린으로 환도할지 아니면 반세기 동안 실질적인 행정수도였던 본에 그대로 둘지를 두고 갈등이 많았다. 이원복현대문명진단에 보면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는데[34] 천도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베를린 환도를 지지하는 타블로이드 신문인 "빌트(Bild)'는 독일 국민의 52%가 베를린을 지지한다고 대문짝만하게 실었으며, 본 잔류를 지지하는 타블로이드지 "엑스프레스(Express)"[35]는 53%의 국민이 본 잔류를 지지한다고 역시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문제는 이 두 신문이 같은 날 발행되었다는 것(...) 아무리 4~5%가 오차범위 내라고는 하지만 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두 신문이 아전인수 격으로 써제낀 결과였다.

결론적으로는 베를린으로 환도가 결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4.5. 통일 이후[편집]


통일 후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베를린은 수도임에도 다른 독일 대도시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편이다. 2010년대까지는 독일 평균 1인당 GRDP를 밑돌았고[36], 2022년 기준 1인당 GRP가 4만 8,147유로로 독일 전체 평균 4만 5,993유로보다 조금 높다. 반면 세금 투입량은 최고라 세금 먹는 하마이다.

베를린의 구(區)는 2001년 1월 1일부로 개편을 통해 대거 통합되었다. 베를린의 구는 1920년 베를린 대확장 당시 20개였고, 동베를린에서 3개가 늘어 개편 직전인 2000년에 23개(구 서베를린 12, 구 동베를린 11)였으나, 통폐합을 거쳐 현재의 12개로 줄였다.

2000년대 들어서 베를린은 잃어버린 40년을 되찾기 위한 대규모 개발계획들을 속속 추진했다. 크고 아름다운 스케일의 수도 이전부터 시작해서, 베를린의 잡다한 공항들을 폐쇄하고 새 공항을 지었고, 중앙역 또한 새로 만들어 영업 중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동쪽 파리 광장에서 슐로스 다리까지의 베를린의 중심축 거리인 운터덴린덴(보리수나무 아래)거리 양 옆으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를 비롯해 왕궁, 도서관, 오페라하우스가 있었지만 분단되면서 소련식으로 마개조당했는데,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복원이 이루어졌다.

베를린 왕궁도 복원공사를 마치고 2021년 7월에 재개장하였는데, 크기로서는 파리의 루브르급에 달할 정도로 큰 프로이센 왕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2차대전 기간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동독에서 봉건주의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강조하면서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킨 뒤 그 자리에 공화국 궁전(인민의회의사당컨벤션센터국민문화회관)을 세웠다.

파일:external/si.wsj.net/BN-EB632_0815sc_G_20140812131454.jpg
파일:external/www.judgmentofparis.com/064.jpg

2차대전 전 베를린 대성당과 베를린 왕궁의 모습

파일:external/dic.academic.ru/Palast_der_Republik_2003.jpg

공화국 궁전의 모습

파일:external/blog.acis.com/042613-blog-f.png

복원 후 조감도

독일 슈피겔은 2016년 7월 21일에 베를린의 인구가 350만 명을 넘었고 동시에 주택난도 동반되고 있다고 밝혔다. # 2023년 기준으로는 386만이다. 이와 동반하여 월세 및 부동산값 또한 유럽 주요도시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 중이다. 독일은 주택 소유율이 50% 이하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임대주택에 거주한다. 동베를린을 포함한 구 동독 지역은 주택 대부분이 통일 후 민영화 과정에서 수만채 단위로 민영 임대업체에 매각되었다. 결국 보다 못한 베를린 시 정부가 2020년 2월부터 2014년 이전에 건축한 집은 5년간 월세를 올리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 독일 안에서도 상당히 찬반이 갈리는 정책 중 하나로, 당시 시의회 야당이었던 기독교민주연합은 이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반대파들은 위헌심사를 제기한다고 한다. 결국 14개월 만에 위헌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임대주택를 국영화 여부 주민투표를 주의회 선거와 같이 치른다.#

베를린 시민의 과반수가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민간 부동산회사가 보유한 주택 24만여 채를 몰수하는 데 찬성했다.#

동서독 통일 이후, 베를린시에서 첫 여성 시장이 탄생했고, 2023년 4월까지 재임했다.#


5. 정치[편집]


파일:베를린 주의회 로고 하얀색.png
베를린 주의회의 원내 구성

[ 펼치기 · 접기 ]
연립여당
[[독일 사회민주당|파일:SPD 베를린 로고.svg
사회민주당

36석
]]
[[동맹 90/녹색당|파일:베를린 녹색당 로고.png
동맹 90/녹색당

32석
]]
[[좌파당(독일)|파일:베를린 좌파당 로고.png
좌파당

24석
]]
야당
[[독일 기독교민주연합|파일:CDU 베를린 로고.png
기독교민주연합

30석
]]
[[독일을 위한 대안|파일:AfD 베를린 로고.jpg
독일을 위한 대안

13석
]]
[[자유민주당(독일)|파일:FDP 베를린 로고.png
자유민주당

12석
]]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f; font-size: .8em"
160석



연방정부의 14개 부처 중 외무부와 재무부를 포함한 8개 부처가 베를린에 소재한다. 나머지 6개 부처는 구 서독의 임시 수도였던 에 있다.

주의 수장은 베를린 시장(Regierender Bürgermeister von Berlin)이다. 현재 시장은 기민련의 카이 베그너이다.

전통적으로 좌파 세력에 대한 지지가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었는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독일 사회민주당독일 공산당이 늘 1, 2당을 차지했으며 1946년부터 1989년까지 서베를린 시절 진행된 선거 13번 중 1975년부터 1985년까지의 4번의 선거를 제외하고는 사회민주당이 1당 지위를 가져간 곳이었다.[37] 2010년도 이후로 녹색당도 약진하며 사민당을 위협한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1999년까지 베를린 주 총선 3차례에선 기민련이 승리하기도 했으나, 통일의 부작용으로 기민련에 대한 지지가 시들해진 뒤인 2001년부터는 다시 사민당의 지지세가 강해졌다. 2001년 이후 주의회 의석은 항상 사민당이 제1당을 차지하는 구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그렇다고 완전 과반은 아니라서 다른 정당과 연정을 하고 있다. 총선 이후 사민당이 좌파당, 동맹 90/녹색당과 R2G 연정[38]을 구성했다.

그러나 2021년 베를린 시의회 선거과정에서 선거관리의 중대한 부실 등의 있었다는 사유로 독일 헌법재판소에서 선거무효 판결을 받고 2026년까지의 잔여임기를 채울 새 시의회의원을 뽑기 위한 재선거가 2023년 2월 실시되었다. 그 결과, 여전히 기존 R2G연정을 꾸린 범좌파 3당의 의석을 합하면 시의회 과반을 넘었으므로, 이론적으로는 사민당 주도의 베를린 시정부를 계속 운영할수 있었다. CDU는 이 선거에서 직전선거 대비 정당득표를 10%나 끌어올려 총 159석 중 52석(28.2%)를 얻은 제1당이 되어 압승했다. 반면 사민당은 2001년 이래 단 한번도 베를린 시의회 1당의 지위를 놓친적이 없었지만, 이번 재선거에서는 녹색당과 득표수가 불과 '53표'차에 의석수는 동률로 2당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에 제1당 CDU 주도의 새 베를린 시정부 구성이 당연시되었다. 녹색당과 좌파당은 사민당 주도의 기존 연정의 지속을 희망했지만, 2023년 3월 기준으로 CDU 주도의 대연정 구성을 위한 협상이 CDU사민당 사이에 이루어졌다. 베를린 사민당은 CDU와의 대연정 구성을 위한 협상이 만일 결렬되면 본인들은 현 R2G 연정의 새 버전을 택하지 않고 야당이 될것이라며 CDU와 녹색당 사이의 연정구성이 이루어지는것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현 R2G 연정의 해체는 확실시 되었다.[39] 그에 따라 4월 27일에 CDU사민당의 대연정이 최종 성립되었고 카이 베그너(Kai Wegner)가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베를린은 도시 규모에 걸맞게 구마다 정치적 성향의 차이도 제법 나는 편인데, 예를 들어 미테구프리드리히스하인-크로이츠베르크구, 판코구, 노이쾰른 구역 등 시내 중심부에서는 녹색당이 강세이고, 샤를로텐부르크-빌메르스도르프구, 슈테글리츠-첼렌도르프구, 라이니켄도르프구 등의 외곽 지역에서는 기민련이 강세이며, 리히텐베르크구, 트렙토-쾨페니크구 등은 좌파당이, 마르찬-헬러스도르프구에서는 독일을 위한 대안이 상당한 지지율을 확보하는 편이다. 사민당은 전통적으로 슈판다우구노이쾰른구에서 강세였지만, 2023년 재선거에서 이들 지역에서 대부분 패배하여 딱히 강세 지역이 남아있지 않다.

6. 관광[편집]


영어가 상대적으로 잘 통하는 편인 독일 내에서도[40] 베를린은 영어가 상당히 잘 통하는 도시이다. 독일어를 못해도 영어를 잘하면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는 수준. 한국인이 식당이든 매장이든 가면 처음부터 영어로 질문하는 경우도 있으며, 어지간한 버스기사들, 택시기사들도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영어는 간단한 주문이나 일상회화 정도 수준이지 좀 더 복잡하게 들어가면 막힐 수도 있다.

6.1. 명소[편집]


명소로는 베를린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과 그 근처에 있는 국가의회의사당, 소련군 전승기념비, 홀로코스트 추모공원, 다국적기업 유럽지사들의 빌딩들이 있는 포츠담 광장, 동서 베를린 경계의 연합군-소련군 초소 중 가장 유명한 체크 포인트 찰리, 티어가르텐, 그리고 연합군의 폭격으로 유명한 베를린 초역(Zoologischer Garten) 앞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 등이 있다. 시내에서 빤히 보이는 TV타워(Fernsehturm)는 독일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다. 위치는 알렉산더 광장에 있다. 티어가르텐에는 보오전쟁, 보불전쟁 승전, 독일제국 수립 기념으로 1873년에 지은 전승기념탑 및 독일제국 수립의 주역 3인방(룬, 비스마르크, 몰트케) 동상이 있다. 100번 버스를 타면 전승기념탑 앞에 세워 준다. 매년 2월에는 베를린 영화제도 열리며, 수여되는 상은 황금상. 종교시설로는 베를린 대성당(베를리너 돔)이 웅장하다.
알렉산더 광장에 갤러리아 백화점도 있는데, 특색이 있진 않으나 나름 쇼핑할 만한 게 있는 편이다.

메세 베를린이라는 전시장IFA가 개최되는 곳으로 유명하고 1936 올림픽올림픽 스타디움이 소재한다.

포츠담 회담으로 유명한 포츠담RE(레기오날 익스프레스)로 약 30분 거리. 포츠담까지 가기 위해서는 C구간 티켓을 끊어야 한다. 기차로 한두 시간 안에 폴란드도 갈 수 있다. 오더강 부근에 있는 폴란드와의 국경 도시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 역(Frankfurt an der Oder)은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는 열차의 필수 정차역이자 국경역이다. 독일 서부에 있는 흔히 프랑크푸르트 하면 생각나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과는 전혀 다른 도시이니 주의할 것.[41]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 동부에서는 아무 말도 없이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표를 달라고 하면, 십중팔구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행 표를 끊어 주니 주의할 것. 프랑크푸르트 오더 역에는 ICE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행 ICE 표 달라고 하면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으로 가는 걸 주겠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다.

베를린 동물원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쿠담 거리라고 부르는 명품거리가 있다. 독일어 정식 명칭은 Kurfürstendamm이며, U반으로 접근할 수 있다. 명품거리가 약 1 km 길이로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데, 베를린에서 쇼핑한다면 필수. 독일에 몇 개 없는 애플 스토어도 여기에 있다. 마약과 매춘으로 유명한 Kurfürstenstraße와는 전혀 다른 거리이니 유의할 것. 동물원역 기준 쿠담거리와는 반대 방향인 동쪽에 있는 유서 깊은 카데베 백화점도 쇼핑에 좋다. 특히 식품관이 볼거리가 많다.

독일 주요 도시들은 과거 자신들의 역사[42]를 조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베를린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의 문화유산보다는 통일 독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문화유산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프로이센의 부정적인 면 때문이라기보다는 독일의 수도이다보니 현대 통일 독일의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43]

6.2. 박물관[편집]


박물관이 굉장히 다양하고 볼거리가 풍성하다. 대표적으로는 페르가몬 박물관, 보데 박물관, 구 박물관, 신 박물관, 구 국립미술관, 이집트 박물관이 한 데 모인 박물관섬(Museumsinsel)이 있다. 페르가몬 박물관은 근동의 유적들을 통째로 옮겨온 것으로 유명하다.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과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이 가장 유명한 유물. 구 국립미술관에 대응하는 신 국립미술관은 박물관섬이 아니라 포츠담광장 남쪽의 쿨투어포럼(Kulturforum)에 위치해 있다. 신고전주의 이전까지 회화를 모아둔 회화박물관(Gemäldegalerie) 또한 이쪽에 있는데, 꽤 큰 미술관인데도 잘 안 알려져서 다른 박물관보다 한산하다.

박물관 섬 건너편에 있었던 훔볼트박스는 2019년 초에 철거되었다. 철거되기 전에는 베를린 성 복원 공사 홍보관처럼 사용되었다. 2018년 5월 당시 박스 겉면은 스폰서인 삼성의 로고로 랩핑되어 있었다. 물론 이 광고비 중 일부는 베를린 성 복원 공사 자금으로도 사용되었다.

베를린 성을 기준으로 슈프레 강 건너편에 냉전시대의 동독 시절 생활상을 인터랙티브 전시를 통해 체험할 수 있는 동독 박물관이 있다. 전시 내용이나 체험방식등이 상당히 참신하고 재미있다. 베를린의 상징적인 음식이 되어 버린 커리부어스트 박물관도 있으며 호모섹슈얼 미술관도 있다. 유대인 박물관은 독특한 건축으로 유명하다. 좁고 어둡고 날카로우며 묘한 경사 때문에 어지럽기도 하다. 유대인들의 고통을 건축에서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구 게슈타포 본부가 있던 위치에 지은 '공포의 지형학(Topography of terror)'은 나치의 만행을 아주 자세하게 전시했을뿐만 아니라 베를린 장벽을 가장 진지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 이름이 높다. 베를린 장벽 아래 1933년 나치의 집권과 그 과정에서의 만행이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위의 박물관들과 달리 무료이며 화장실이 다소 외진 곳인 지하 1층에 있어서 그렇지 편하게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 박물관은 아니지만 베를린 필하모닉 건물 근처에 T-4 프로그램 기념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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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섬과 베를린 대성당(베를리너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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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가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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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박물관

박물관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베를린 박물관 패스'(Museum pass Berlin)라는 것도 판다. 공항에서 구입하지 못했다면 베를린 중앙역이나 TV타워에 있는 인포메이션에서 구입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베를린과 포츠담 소재 국립, 시립 박물관들을 3일간 무제한 이용가능한 티켓이다. 심지어 학생은 50% 할인까지 되니 젊을 때 많이 돌아다니자. (구입 후 패스 뒤에 이름과 사용시작 날짜를 꼭 기록해두자.) 박물관을 세 군데 이상 다닌다면 박물관 패스를 사는 편이 이익이다. 다만 사설박물관은 박물관 패스가 적용이 안되는 곳도 더러 있다.(이를테면 '전쟁반대 박물관' 같은 곳) 베를린 박물관 패스를 구입할 때 아예 적용가능한 박물관이 표시된 소책자를 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이밖에도 여행자 전용 투어카드인 '베를린 웰컴카드'도 필히 이용하자.

상수시 궁전이나 베를린 TV타워 같이 예약시간에만 입장할 수 있는 관광지가 많으니 동선을 고려해서 미리 예약하도록 하자.

6.3. 음악[편집]


세계 최정상급으로 평가받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관현악단관현악단들이 활동하고 있다. 오페라 쪽도 만만찮아서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 도이체오퍼(독일오페라극장), 코미셰오퍼(코믹오페라극장) 세 개 극장에서 경쟁적으로 수많은 오페라들을 상연하는 등 시즌마다 음악팬들의 지갑을 탈탈 털어가고 있다. 구 서베를린 지역의 베를린 예술대학교와 동베를린 지역의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 등의 정평있는 음악예술 교육 기관에서는 수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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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필의 상주 공연장인 필하모니의 외부와 내부 모습. 독특한 내부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이는 자리에 따라 계급이 나뉘고 음향이 크게 차이 나는 과거의 공연장에서 벗어나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형태의 구조를 고안하면서 이런 독특한 형태의 내부 구조가 설계되었다. 실제로 어느 자리에서나 좋은 음향과 괜찮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6.4. 분단과 대안문화의 성지[편집]


베를린은 런던과 쌍벽을 이루는 클럽 문화의 중심 도시인데, 베르크하인(Berghain)을 비롯한 테크노/하우스 계열 클럽이 유명하다. 또한 1989년부터 2010년까지 개최되었던 세계 최대의 테크노축제인 러브퍼레이드의 탄생지이다. 러브퍼레이드의 주최자들은 그 후속 축제인 레이브더플래닛(Rave the Planet)을 2022년 7월부터 1년에 한번씩 야외 집회 형식으로 개최하고 있는데, 여전히 20여만명의 관중들을 모을 정도로 테크노 음악의 인기는 식지 않고 있다.

1980년대 테크노 음악, 유럽 일렉트로니카의 중심지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서베를린은 인구 감소로 인해 큰 골치를 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인구의 유입은 지상과제가 되었다. 결국 서베를린 정부는 서베를린에서 음악, 파티, 마약에 관한 단속을 어느 정도 완화하는 초법적인 조치를 취했다. 독일은 연방국가이기 때문에 이런 조치가 가능했다. 거기에 더해 연합군 점령지라는 특수한 상황 덕분에 서베를린에서는 젊은이들의 병역이 면제되어 사회 주류에서 비껴간 젊은이들이 대거 몰려들기도 했다.[44]

물론 당시 서베를린은 공식적으로는 독일의 주가 아니었지만(연합군 점령지대이므로) 시장은 서베를린 주민들이 뽑았고 서독 연방의회에 표결권 없는 의원도 보내는 등 주처럼 취급받았다. 결국 여름만 되면 서베를린으로 모여드는 젊은이들이 많아졌고, 이 광란의 분위기에 취해 아예 눌러 사는 젊은이들도 등장했다. 게다가 당시 서베를린은 인구 감소로 인해 빈 건물이 많았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스쿼팅을 하여 빈집에서 멋대로 사는 경우도 많았다. 악기와 사운드 시스템을 철저하게 갖춰야 하는 록 음악과 달리, 일렉트로니카는 어느 정도 사운드 시스템만 갖춰지면 어느 곳에서든 연주가 가능했다. 결국 젊은이들은 차 한대에 믹서와 샘플러, 스피커를 싣고 다니면서 이곳 저곳에서 파티를 열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베를린은 유럽 일렉트로니카의 수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 당시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 예고편. 후방주의[45]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서베를린에 거주하던 나이 많은 독일인들은 "그야말로 세기말 적이고 광란이 가득한 도시"였다고 회고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스쿼터[46]들과 경찰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지곤 했고, 도시 전반적으로 먹고 살 길은 막막한데 다들 어떻게든 이상한 짓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의외로 덜 알려진 사실이지만 동베를린 역시 서베를린처럼 반체제적 문화가 융성했다. 동독은 소련에 전쟁 보상금을 내느라 동베를린의 오래된 건물들의 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대신 (당시로서는 최신식이던) 소련식 아파트 단지들이 대거 공급되면서 정상적인 가정들은 오래된 건물을 떠나 현대적 시설과 녹지, 학교 등이 잘 갖춰진 소련식 아파트로 대거 이주했다.[47] 이 덕분에 프렌츨라우어베르크처럼 폭격을 비껴간 구시가지의 허름하고 반쯤 비어가는 오래된 건물들에는 젊은이들과 예술인, 학생, 작가, 그리고 반문화, 반체제적 흐름들이 자리를 잡았다. 1980년대 프렌츨라우어베르크에서 비어가는 건물들은 펑크족들이 스쿼팅을 하는 모습은 예사였고, 스킨헤드들은 그런 펑크족들과 허구한 날 싸움이 붙었고, 예술인들은 당국 허가 없이 교회와 중정[48]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작가들은 반체제적 글과 문학을 대거 양산했다.

동베를린의 펑크족들은 초기 등장 당시에는 당국의 경계를 사 탄압의 대상이었으나, 점차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평화주의 운동(...)의 일환이라는 해석으로 프레임이 씌워져 극단적인 펑크족들을 제외하면 구속되는 일 없이 슈타지의 감시 및 공작 대상이 되는 정도로 용인되었다. 스쿼팅 역시 사회주의 사상의 특성상 차마 나쁘게 해석하기 힘든 행위이기도 했고.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독 라디오의 펑크 록을 접한 것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서구권 펑크들과 같은 사상적 기반은 부족한 편이었고, 펑크의 비주얼적 요소들과 행동 양상을 모방 및 재생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 동독 내 반문화 흐름이던 스킨헤드 또한 비슷하게 비주얼적 요소만으로 시작하여 한때 동베를린 펑크의 하위 문화 정도로 취급되던 적도 있었으나, 1983년 즈음 동베를린의 펑크들과 스킨헤드들이 각각 반사회적 극좌와 반사회적 극우 사상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갈라졌고, 7년 뒤 동독 통일 시점까지 서로 죽일 듯 반목했다. 양쪽 모두 슈타지의 정보원으로 점철되어 극단적으로 흘러가는 집단들은 구속되었다.

1987년 동베를린 지온 교회에서 열린 펑크 페스티벌을 동베를린 스킨헤드족들이 습격한 사건은 동독 내 하위문화들 간의 반목과 이를 이용하던 정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30명의 스킨헤드들은 파시스트 구호를 외치며 펑크 록 밴드 Firma와 Elements of Crime의 공연의 방문객들과 주변 행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고, 22명의 스킨헤드들과 4명의 펑크족이 검거되었다. 당시 슈타지는 공격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하위문화들 사이의 반목을 유도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동베를린의 펑크족들은 동독의 획일적인 주류 문화에 편입되기를 거부했고, 일반 동독 주민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함으로서 자유를 찾기를 원했다. 이들은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와 서구적 자본주의 양쪽을 모두 거부했다. 그 대신 이들은 자신들끼리의 끈끈한 유대와 공동체 형성을 중시했고, 이는 기물파손, 레스토랑 및 디스코텍[49] 습격과 같은 범죄 행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구속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로 꼽힌다.

안타깝게도 통일 이후 동베를린의 펑크들과 예술인, 작가들의 결말은 좋지 못했다. 반체제적 글을 쓰던 작가들은 동독 체제 하에서는 제대로 커리어를 펼치지 못했고, 서독의 작가들에 비해 실력이 낫다고 하기 어려웠던 동베를린 작가들은 통일 후 급속도로 잊혀지기 시작했다. 사샤 안데르손(Sascha Anderson) 이나 베르트 파펜푸스(Bert Papenfuß) 정도가 통일 이후에도 명성을 유지했던 정도. 동베를린의 펑크들 역시 통일 후 서독 펑크 록이 유입되면서 그 필요성이 급속도로 사라졌고, 통일 이후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동독 문화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조금씩 수요가 생기던 수준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구 동독 지역을 옛 스킨헤드에서 진화해 나온 네오나치가 휩쓸면서 펑크 씬을 지속적으로 위협했고, 서구권 펑크와 달리 근본적인 이념적 기반이 부실했던 동독 펑크들의 많은 수는 금세 극좌 이념을 버리고 스킨헤드네오나치에 합류하는 씁쓸한 결말을 맞았다.

7. 교통[편집]





베를린 S반, 베를린 U반, 트램과 페리까지 매우 다양한 교통수단이 있으며, 모두 표 한장이면 탈 수 있다. 일회권의 경우 이용기간은 2시간. KTX처럼 표는 구입을 하지만 개찰구가 없으며, 정기권이나 모바일 티켓이 아닌 경우에는 플랫폼에 있는 기계에서 스탬핑을 해야한다. 가끔 검표원이 다니면서 검표하는데 들키면 벌금 60유로를 내야 한다. 정기권으로는 1주일치, 한달치 패스가 있다. 대중교통은 A B C존으로 구획이 나뉘는데, AB구역은 베를린 시 경계 내를, C구역은 베를린 근교 도시까지 커버한다.

베를린 지하철, 베를린 버스만 타도 이 문서에 적힌 웬만한 관광명소는 한번에 데려다 준다. 특히 대놓고 관광객 타라고 만든 듯한 티가 나는 100번, 200번 버스만 타면 굳이 관광버스를 타지 않아도 싼 값에 좋은 구경을 할 수 있다.

일본특정도구시내구간처럼, 베를린 시내에서 Berlin ABC 승차권을 구입하면 시계외인 Potsdam AB구역에서도 쓸 수 있다. 일반 승차권 뿐만 아니라 패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리고 시내버스로 6정거장 이내나 S/U반으로 3정거장 이내를 환승 없이[50] 이동할 때에는 일반 승차권의 반값인 Kurzstrecke가 특례운임으로 적용된다. Kurzstrecke로 이동할 수 있는 정류장의 범위는 버스정류장에 표시되어 있거나, VBB 홈페이지#에서 경로검색으로 찾을 수 있다.

항공교통은 수도답지 않게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인데, 가장 큰 이유는 냉전 때문이다. 냉전의 여파로 베를린에 취항할 수 있는 항공사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베를린으로 가는 항공 노선 자체가 클 수 없어서다. 그래서 독일의 항공교통은 뮌헨과 프랑크푸르트 중심으로 발전한 것. 오랜 공사 끝에 2020년 10월 말에 신 공항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국제공항이 개항해서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의 유일한 관문 국제공항이 되었다. 이전까지 사용하던 베를린 테겔 국제공항은 폐항 후 연구단지로 재개발, 베를린 쇠네펠트 국제공항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국제공항 제5터미널로 변경되었다가 폐쇄되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이나 뮌헨 국제공항의 국제편이 많은 탓에 베를린 국제선 증설이 힘들다. 대한민국과 베를린 직항편은 없고, 같은 독일의 도시 프랑크푸르트뮌헨에서 국내선으로 환승 아니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오스트리아 을 경유한 방법을 택한 경우가 많다. 혹은 폴란드 바르샤바를 경유한 방법도 있을 법도 한데 잘 안나온다. 그래서 핀란드 헬싱키, 튀르키예 이스탄불 등 유럽 다른 도시를 입국한 뒤 환승 아니면 카타르 항공 등으로 서아시아에서 환승을 해주던지 혹은 ICE를 이용해야 한다.

또한 독일의 수도답지 않게 지하철 내에서는 무선 인터넷이 끊기고 전화나 문자만 할 수 있다. 독일의 대부분의 대도시들은 지하철 내에서도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데 유독 베를린과 뒤스부르크만 지하에서 무선 인터넷 사용의 제한이 있는 곳이다. 뒤스부르크 지하철은 지하철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하에 있는 구간이 얼마 되지 않고(4역 뿐이다!) 지상에서 다니는 게 대부분이라 그렇다 치지만 베를린은 수도에다가 지하철이 도시 전체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보통은 상단 바 통신 상태에 서비스에 따라 3G, H(+), 4G, LTE가 뜨지만 지하로 내려가면 얼마 있지않아 그냥 G로 바뀐다. 물론 지상으로 나오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2017년 현재 독일 주요 통신사인 텔레콤, 보다폰, O2 중 O2만 지하철에서 원활한 사용을 할 수 있다. 지상에서는 LTE보다 3G, H+가 뜨는 경우도 많지만 지하철 대부분 구간에서 LTE, 4G로 잡힌다. O2가 VBB와 독점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를린을 방문해 선불심을 구입할 예정이면 O2 선불심이나 같은 망(E-Plus, O2가 인수했다.)을 사용하는 알디톡(Aldi-Talk) 선불심을 구입하는 것이 좋다. 알디톡은 독일 대형 체인마트인 Aldi 가게에서 구입할 수 있다. 2017년 7월부터 법이 개정되어 유심 구매 시 본인 인증 절차가 까다로워졌다. 마트에서 선불 유심을 구입하였을 경우 화상채팅이나 우체국 방문 등을 통해 본인 인증을 해야 사용가능 한데, 대한민국 여권은 인증이 되지 않고 있다. 화상 채팅을 하면 우체국으로 가라고 하지만, 우체국에서도 인증이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미리 유심을 구매해야 한다. 현지에서 구매해야할 경우는 saturn 매장이나 대리점에서 바로 매장에서 등록이 가능한 지 물어보고 구매해야 한다. 알디톡은 화상통화로 인증을 해주는 경우도 있다.


7.1. 주요 도시 이동 소요시간[편집]


베를린에서 독일 내 주요도시로 이동할 때의 평균 소요시간이다.

도시명
소요시간(시:분)
소재지(주)
비고
포츠담
0:35
브란덴부르크
브란덴부르크의 주도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
1:07(철)
브란덴부르크
구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 주의 지청
할레
1:13
작센-안할트
작센-안할트의 주요 도시
라이프치히
1:14
작센
작센의 주요 도시
볼프스부르크
1:25(IC)
니더작센
니더작센의 주요 도시/폴크스바겐 본사 소재지
슈베린
1:25(ICE)
MV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의 주도
마그데부르크
1:33
작센-안할트
작센-안할트의 주도
함부르크
1:39(ICE)
함부르크
독일 제 2의 도시 및 주요 항구 도시
하노버
1:39(ICE)
니더작센
니더작센의 주도/ICE 주요 경유지
슈체친[51]
1:42
폴란드
구 프로이센 포메른 주의 주도. 할양 전에는 베를린의 외항(外港).
브라운슈바이크
1:47(철)
니더작센
니더작센의 주요 도시
에르푸르트
1:55(ICE)
튀링엔
튀링엔의 주도
드레스덴
1:58
작센
작센의 주도
로스토크
2:12
MV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의 주요 도시
고쥬프 비옐코폴스키[52]
2:17
폴란드
구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 주의 주요도시
빌레펠트
2:31(ICE)
NRW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요 도시
켐니츠
2:32
작센
작센의 주요 도시
카셀
2:37
헤센
헤센의 주요 도시/구 프로이센 헤센-나사우 주의 주도[53]
포즈난[54]
2:42
폴란드
구 프로이센 포젠 주의 주도
뤼베크
2:53
SH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최대 도시[55]
레그니차[56]
2:53
폴란드
구 프로이센 슐레지엔/니더슐레지엔 주의 지청

3:05(철)
SH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주도
뉘른베르크
3:20
바이에른
바이에른의 주요 도시 및 주 내부 프랑켄 지방의 최대 도시
도르트문트
3:20(ICE)
NRW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요 도시
코샬린[57]
3:20
폴란드
구 프로이센 포메른 주의 지청
브레멘
3:32
브레멘
독일의 주요 항구 도시
뮌스터
3:33(철)
NRW
구 프로이센 베스트팔렌 주의 주도
보훔
3:33(ICE)
NRW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요 도시
브로츠와프[58]
3:33
폴란드
구 프로이센 슐레지엔/니더슐레지엔 주의 주도
에센
3:45(ICE)
NRW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요 도시/티센크루프 본사 소재지
잉골슈타트
3:48
바이에른
바이에른의 주요 도시/아우디 본사 소재지
부퍼탈
3:50(ICE)
NRW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요 도시
뒤스부르크
3:58(ICE)
NRW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요 도시
겔젠키르헨
4:05(철)
NRW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요 도시
비드고슈치[59]
4:14
폴란드
구 프로이센 포젠 주의 지청
오폴레[60]
4:15
폴란드
구 프로이센 오버슐레지엔 주의 전기 주도
뒤셀도르프
4:16(ICE)
NRW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4:11(ICE)
헤센
독일 제 5의 도시/유럽중앙은행, 도이체방크 본점 소재지
쾰른
4:20(ICE)
NRW
독일 제 4의 도시/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최대 도시/루프트한자 본사 소재지
뮌헨
4:42
바이에른
독일 제 3의 도시/바이에른의 주도/BMW 본사 소재지

4:43(ICE)
NRW
구 서독의 임시수도 및 현 중요행정도시/도이체 텔레콤,도이체 포스트 본사 소재지[61]
묀헨글라트바흐
4:54(철)
NRW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요 도시
카토비체[62]
4:57
폴란드
구 프로이센 오버슐레지엔 주의 후기 주도
비스바덴
5:05(철)
헤센
헤센의 주도
마인츠
5:13
라인란트-팔츠
라인란트-팔츠의 주도/ZDF 본사 소재지
울름
5:31
BW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주요 도시[63]
코블렌츠
5:32
라인란트-팔츠
구 프로이센 라인란트 주의 주도
카를스루에
5:32
BW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주요 도시
슈투트가르트
5:43
BW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주도/포르쉐, 메르세데스-벤츠 본사 소재지
아헨
5:44
NRW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주요 도시[64]
그단스크[65]
6:07
폴란드
구 프로이센 베스트프로이센 주의 주도
자르브뤼켄
6:25
자를란트
자를란트의 주도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6:55(ICE)
BW
독일의 유명 대학 도시
콘스탄츠
7:08
BW
보덴제(콘스탄스 호)변의 중요 관광-휴양도시
올슈틴[66]
7:11
폴란드
구 프로이센 오스트프로이센 주의 지청
칼리닌그라드[67]
8:09
러시아
구 프로이센 오스트프로이센 주의 주도


8. 주민[편집]


이곳의 주민은 베를리너(Berliner)라고 한다. 동명의 도넛맥주도 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1963년에 독일을 방문했을 때 당시 했던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연설이 유명하다. [68]

베를린은 외국인 비율이 매우 높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출신국 별로 보면, 튀르키예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시리아인, 러시아인, 이탈리아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인도인, 베트남인 등의 순으로 많다.[69] 사실상 전세계 모든 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국제 도시라고 할수 있다. 이때문에 시내와 가까운 특정 구역에 가면 독일어보다는 다른 언어[70]가 주로 쓰이는 경우도 빈번하다.

독일이 분단되었던 1945년부터 80년대까지 베를린 시민들은 병역이 면제[71]되었는데, 이 점 때문에 징집연령대의 서독 남성이 병역을 피하기 위해 동서독 국경을 넘어 동독 영토를 지나 서베를린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8.1. 튀르키예계 베를린 주민들[편집]


베를린은 2차 대전 이후 유입된 튀르키예인들로 인해 튀르키예 문화가 상당히 많이 정착되어있다. 어느 정도냐면 튀르키예에서 반쯤 장난삼아 하는 농담 중에서 튀르키예인의 3대 주요 도시는 이스탄불, 앙카라, 그리고 베를린이라고 할 정도다. 오죽하면 튀르키예 인기축구팀인 갈라타사라이 SK가 베를린 갈라타사라이라는 자매팀을 만들 계획[72]도 있었을 정도이다. 그만큼 튀르키예인들이 많다는 뜻. 이렇게 된 까닭은 1950년대에서부터 60년대까지 노동력을 위해서 임금이 싼 사람들, 특히 가깝고 싸고 숫자 많은 튀르키예인들을 선호했기 때문이다.[73]

다만 튀르키예계 독일인들은 희한할 정도로 원주민인 게르만 계열 독일인들과의 문화가 분리되어 있다. 이유는 튀르키예계 이민자들 대다수가 세속화되던 튀르키예에 실망하여 건너온 보수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튀르키예는 2차 대전 이후 혼란을 정리하고 당시 튀르키예를 장악한 오늘날 튀르키예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주도하에 세속주의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이 반발하였지만 아타튀르크를 몰아낼 방법도 없다보니 차선책으로 자유를 찾아 독일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독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튀르키예 정부와 세속주의를 욕했고 당연히 서독에 와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집하였다. 이 때문에 현재도 독일 지역의 튀르키예인들은 아이러니하지만 본토의 튀르키예인들보다 오히려 더 보수적이고 종교적이다. 2016년에 재외교포의 투표권이 허용된 이후 집계된 해외교포 투표를 보면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을 띄는 보수정당인 정의개발당을 찍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이것 때문에 당연히 문화적 충돌도 존재했는데, 당연히 이슬람 전통 율법에 집착하다보니 익숙치 않은 원주민들을 불쾌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 대표적으로 전통 이슬람 방식으로 길거리에서 도축을 하다보니 원주민들 입장에선 원치 않게 송아지 공개 해체쇼를 강제 관람해야 했고 이것 때문에 마찰이 심해서 결국 도축은 정해진 장소에서만 하도록 강제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갈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로 인해 베를린에는 튀르키예 문화가 많이 유입되었고 이 덕분에 베를린은 튀르키예 못지 않게 케밥이 널리 퍼진 지역이기도 하며, 길거리에서 DÖNER라는 간판을 보면 십중팔구는 케밥집이다. 런던에서 음식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커리를 추천해주는 것처럼[74] 베를린에서 음식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케밥을 추천해줄 정도. 실제로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난민들이 어마어마하게 유입되었을 때 베를린 주민들은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거나 환영 집회를 갖는 등 난민 친화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75]


9. 행정구역[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29px-Berlin_Subdivisions.svg.png
1920년 베를린 대확장 때 20개 구가 설치되었고, 독일(그리고 베를린)이 분단되면서 서베를린에 12개, 동베를린에 8개 구가 귀속되었다. 동베를린에서는 1979년 마르찬(Marzahn), 1985년 호헨쇤하우젠(Hohenschönhausen), 1986년 헬러스도르프(Hellersdorf)구를 신설하여 통일 베를린에는 23개 구가 있었으나, 2001년 1월 1일부로 구를 통폐합하여 12개로 줄였다. 12개 구 중 6개는 구 서베를린, 4개는 구 동베를린, 베를린의 중구 격인 미테구를 포함한 2개는 구 동/서 베를린 지역을 혼합했다.

베를린은 총 12개 행정구(Bezirk)와 97개 구역(Ortsteil)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각 구역(Ortsteil)은 또다시 여러 개의 키츠(Kiez)로 나뉘어질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0. 브란덴부르크 주와 통합 떡밥[편집]


애초에 베를린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수도였고 여러모로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주가 엮여 있는 경우가 많아 아예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라는 하나의 주로 통합하자는 떡밥이 있다. 일부에서는 러시아폴란드에 갈라 먹히고 사라진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을 살려 통합 주를 프로이센 주로 명명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76] 실제로 1995년에 브란덴부르크 주와 베를린의 두 주 정부는 합병을 추진하기로 하고 이듬해 주민투표가 실시됐는데 부결돼서 무산되었다. 구 서베를린 시민들은 찬성했는데 구 동베를린 시민들과 브란덴부르크 주민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11. 대중매체에서[편집]


역사상 제2차 세계 대전 혹은 IF 가상물 나치 독일이 등장하는 대중매체엔 대부분 등장한다. 특히 대체역사물에서 원자폭탄의 표적으로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범죄자들의 거래처로도 많이 등장한다.
  • 서양권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루는 게임, 영화 등의 매체는 열에 아홉은 최종막에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다. 예외라면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다루지 않는다거나, 일본이 나와서 역사대로 일본 패망까지 가는 것 정도.

  • 대한민국의 대체역사 SF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1945년 베를린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단, 이 영화의 원안복거일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드레스덴브레멘에 각각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뭐 그냥 상징적인 의미로 그렇게 묘사했겠지만, 독일은 이미 45년 이전에도 이미 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핵폭탄을 베를린 같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유럽 대륙 한복판에 떨어트릴 일은 가상역사라도 상식적이라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핵폭탄을 쳐맞은 지구상 유일한 국가가 된 것은 당시 일본제국이 그만큼 비상식적으로 항복을 거부했었기 때문이다














  • 스파이 패밀리에서 베를린과 란트가 적당히 섞여서 베를린트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작중 배경이 되는 곳이다.


  • 히트맨 암살의 세계 무대 중 하나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에이전트 47이 소속되어있는 암살단체인 ICA에 깊숙히 침투해있는 위협 단체인 프로비던스에서 오히려 ICA에 에이전트 47의 암살을 의뢰하고 이것이 승인되면서 프로비던스를 무너뜨리려는 47이 자신의 동료들이나 다름없는 암살자들을 암살한다는 스토리의 주요 무대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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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일규모로 가장 크고 광역권으로 보면 파리에 이어 2번째다. 단 라인-루르 지역을 하나의 도시권으로 본다면 3위가 된다.[2] Freie (und) Hansestadt[3] Land Berlin[4] Regierender Bürgermeister. 영어로는 Governing Mayor. 도시주가 아닌 타 주들의 단체장 직함은 Ministerpräsident이다.[5] 사실 강세가 'ber'가 아닌 'lin' 부분에 오기 때문에 베얼린보단 '벨린' 내지 '벌린'에 더 가깝게 들린다.[6] 중국어로는 발음은 동일하게 Bólín이지만 한자 표기가 다른 柏林으로 표기한다.[7] Niemeyer, Manfred(2011), Deutsches Ortsnamenbuch, de Gruyter, p. 60.[8] 독일은 본래 봉건주의의 역사가 깊은 연방제 국가인데다 동서독 분단으로 동독 내의 베를린에 비해 구 서독의 도시가 번성했기 때문에 현재도 지방 분권이 매우 잘 된 편이다.[9] 실질적 용도는 연방하원의회지만 공식 명칭은 연방의회며, 해당 건물은 Reichstagsgebäude(라이히스타크스게보이데, 국회 건물)을 재건한 것이다.[10] 옛 소니센터[11] 파일:Sony Center.jpg[12] 센터 암 포츠다머 플라츠에 대해서 소개하자면,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소니가 부지를 불하받아 개발했다가, 2008년 소니가 모건 스탠리에 매각했고, 다시 2010년에 연금공단에서 5억 7천만유로에 매입했다. 그 후 2017년에 캐나다의 옥스포드 프로퍼티라는 기업에 11억유로에 청산했다. 그리고 센터 암 포츠다머 플라츠는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집합부동산이다. 사진에 보이는 반타워까지 포함해서 총 7개의 건물로 구성된다.[13] 원래 안할트를 통치하던 아스카니아 가문 출신으로 사후 아스카니아 가문은 작센계, 안할트계, 브란덴부르크계로 갈라졌다.[14] 서쪽의 대도시 쾰른과는 철자가 하나 다르다. 베를린이 확장하면서 노이쾰른(Neukölln) 구가 생겨났고 쾰른은 알트쾰른(Altkölln)이 되었다. 현재는 베를린 왕궁을 경계로 서쪽은 박물관섬(Museumsinsel), 동쪽은 어부섬이라는 뜻의 피셔인젤(Fischerinsel)로 불린다.[15] 프리드리히 대왕과 다른 인물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는 프리드리히 4세.[16] 이 성이 베를린 성(Berliner Stadtschloss)의 기원이다.[17] 단, 개인적인 개종이었고 브란덴부르크 국가 단위 개종은 황제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 보류하고 있었다.[18] 대왕, 대제에 해당하는 용례로 위대한 군주였다는 의미다.[19] 통념과 다르게 프로이센 공국-동프로이센프로이센 왕국 역사에서 단 한순간도 중심지였던 적이 없었다. 애초에 브란덴부르크와 베를린이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계 직계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대놓고 프로이센 공국 출신 융커들을 박멸해 베를린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완성했다.[20] 오일러, 라그랑주, 라이프니츠, 아인슈타인 등등 저명한 사람들이 많이 근무했다.[21] 미국캐나다의 유수 연구중심대학들이 모두 훔볼트식 모델을 북아메리카에 최초로 도입한 대학인 존스 홉킨스 대학교을 벤치마킹하여 성장했고, 오세아니아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인 호주국립대학교도 존스 홉킨스 대학교를 본따 설립됐음을 생각해보면 훔볼트식 모델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22] 이걸 이해하려면 1963년 1월 서울 대확장을 생각해봐도 될 듯하다.[23] 지금의 서울특별시 경계가 이때 거의 완성되었고, 이후의 추가 편입은 1973년에 이뤄진 구파발 일대에 불과하다.[24] 당시 베를린 사람들의 증언 따르면 재래식 무기로 공격한 소련군보다는 미 공군의 공습이 훨씬 두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연합군의 공습으로 민간인의 인명손실이 5만여 명이 나온 데 비해 베를린 공방전에서는 인명손실이 그 2배인 10만 명이었다.[25] 해발 120m인 토이펠스베르크(Teufelsberg). 서베를린에 있었으며 미군의 감청 기지가 있었다.[26] 1986년 승격[27] 1985년 승격[28] 1979년 승격[29] 독일 재통일 조약체결 당시 미영불소 4개국 정상의 서명이 들어간 것도, 베를린의 주권을 미영불소 4개국에서 통일 독일로 이양해야 했기 때문이다.[30] 케네디는 취임 직후 쿠바 피그만 침공에 실패하는 등 초기에 엄청나게 어리숙하고 삽질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흐루쇼프는 케네디를 얕보게 되었다.[31] 케네디는 전쟁을 하느니 베를린 장벽을 용인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발표했지만, 서방 시민들과 언론들로부터 무능한 자유세계 지도자라는 비판을 감내해야 했다.[32] 케네디가 베를린 장벽을 용인하면 소련은 이후 더 큰 도발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고, 예견대로 이듬해 소련은 쿠바 사태를 일으켰다.[33] BGM은 나치독일 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다운폴의 엔딩곡이다.[34] 현대문명진단 연재 당시 소스 상당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행되는 보수성향 신문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자이퉁에서 따왔다.[35] 이 신문은 쾰른에서 발행되기 때문에 쾰른에서 가까운 도시인 본을 밀었다.[36] 거의 모든 국가에서는 수도의 1인당 GRPD가 전국 평균을 상회한다.[37] 1989년 서베를린 선거 역시 기민련의 득표율이 사민당보다 높았지만 두 정당의 의석 수는 똑같이 55석으로 공동 제1당이었다.[38] 적색이 상징색인 사민당과 좌파당(R2), 녹색이 상징색인 녹색당(G)이 구성한 연정을 부르는 이름.[39] 출처2[40] 영어와 독일어는 유사한 점이 많은 언어이다.[41] 70년대 이원복의 유럽기행 만화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에서 주인공 일행이 암마인으로 가려다 오데르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서 동독영토에 들어갔다 간신히 나오는 에피소드가 있다. [42] 뮌헨비텔스바흐 가문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 왕국, 드레스덴이나 라이프치히작센 선제후국작센 왕국, 하이델베르크만하임팔츠 선제후국, 하노버하노버 왕국, 슈투트가르트뷔르템베르크 왕국 등.[43] 베를린 대성당,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복원된 베를린 성 등 프로이센 왕국의 유산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프로이센 왕국의 문화유산은 근처 포츠담에서 더 찾아보기 쉽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시절의 문화유산은 베를린 서남쪽 끝자락에 있는 그루네발트 궁전(Jagdschloss Grunewald) 뿐이다.[44] 이들 중 징집 기피자로 분류된 서베를린 이주자들은 독일 통일 이후 징집 통지를 받았는데, 다행히도 동서독 통일 시점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쉽게 이루어지던 시기라 많은 수가 서른 즈음 반강제로 남유럽 따뜻한 나라에서 대체복무 겸 봉사활동 겸 갭 이어 겸 장기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45] 영상에서 볼 수 있듯 닉 케이브같은 뮤지션들은 이런 자유분방한 베를린의 분위기가 좋아서 아예 이주하기도 했다.[46] 스쿼팅하여 사는 사람들. 주로 펑크족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이 많았다[47] 도시 외곽이나 폭격으로 싹 밀린 자리에 주로 들어섰다. 당시 동독의 자랑이던 카를-마르크스 알레가 대표적.[48] 길에 접하지 않은 블럭 내부 공간. 중앙정보부가 아니다 (...)[49] 동베를린에는 디스코텍 문화가 엄청나게 융성한 편이었다. 80년대에는 서베를린에서도 매일같이 국경을 넘어 놀러오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을 정도. 규정상 60-40 비율로 동구권과 그 외 국가 음악 비중을 맞춰야 했으나, 대개는 오후 4시쯤 열어서 해 떠있는 동안에 동독 음악을 주구장창 틀고 저녁에는 서구 음악 위주로 트는 식으로 규제를 사실상 회피했다.[50] S반/U반과 시내버스를 환승할 때만 환승으로 친다. [51] 독일식 이름은 슈테틴.[52] 독일식 이름은 란츠베르크 안 데어 바르테.[53] 매년 9월 독일의 만화행사 Connichi를 개최한다.[54] 독일식 이름은 포젠.[55] 사실 함부르크, 브레멘처럼 독립된 지위의 도시주였으나 그 놈의 히틀러에게 밉보인 탓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으로 흡수당해버린 곳이다(...).[56] 독일식 이름은 리그니츠.[57] 독일식 이름은 쾨슬린.[58] 독일식 이름은 브레슬라우.[59] 독일식 이름은 브롬베르크.[60] 독일식 이름은 오펠른.[61] 매년 독일의 만화행사 AnimagiC을 개최한다.[62] 독일식 이름은 카토비츠.[63] 덤으로 아인슈타인의 고향이기도 하다.[64] 독일의 서쪽 끝에 있다. 즉슨 독일 끝에서 끝까지 자동차로 가봤자 하루 안에 닿는다는 이야기.[65] 독일식 이름은 단치히.[66] 독일식 이름은 알렌슈타인.[67] 독일식 이름은 쾨니히스베르크.[68] 부정관사 ein을 붙인 바람에 "나는 베를리너빵(위에서 말한 동명의 도넛)이다"라는 뜻이 되어버렸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부정관사 ein은 직업이나 거주지를 말할 때에는 생략하지만, 이 연설에서 케네디는 실제로 베를린 출신이 아님에도 베를린과의 강한 유대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 말을 하였다. 이러한 의미로 문장을 구성하면 'Ich bin ein Berliner'는 문법적으로 옳을 뿐더러, 케네디의 취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문맥상 "나 역시 한 명의 자유인인 서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의미이므로. 영어로 치면, 'I am (also) one of Berlin citizens'라고 말한 셈이다.[69] 2023년 6월 현재. 출처[70] 예를 들어 영어, 튀르키예어[71] 서베를린은 서독군이 주둔할 수 없어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이 주둔해 서베를린 주민들은 병역이 면제되었고, 동베를린은 제도적으로 병역이 면제되었다. 참고로 현재 독일은 모병제 국가이다.[72] 사실 이런 게 많다. AFC 아약스남아공 케이프타운에 케이프타운 아약스라는 팀을 가지고 있는데 보어(네덜란드계 이민자)인들이 많이 환영했다든지 비스무리한 게 많다.[73] 한국의 파독 광부 / 간호사들도 이 시기에 주로 파견되어 외화를 벌어들였다.[74] 다만 런던의 경우 물가가 살인적으로 비싼 편이고 영국 요리의 악명도 있어서 정재형도 그냥 영국 요리 먹을 필요 없다고 라디오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75] 독일인들이 이슬람 이민자들을 적대한다는 관념이 퍼진 것은 먼나라 이웃나라의 영향이 크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히트한 먼나라 이웃나라로 인해 이 책에서 소개된 내용들이 모두 정설인 양 퍼져버렸기 때문에 이 책에 나온 대로 독일인들과 이슬람 이민자들이 서로 적대한다는 내용도 퍼졌다.[76] 프로이센이 통일된 독일의 기원이지만 훗날 독일 제국을 거쳐 나치 독일까지 이어지는 군국주의의 뿌리이기 때문에 독일 정부는 현대 행정구역에서 프로이센의 이름을 꺼리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