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베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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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베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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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er of the Year 1989
수상
루드 굴리트

2위
마르코 반 바스텐

3위
베베투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브라질 민주노동당

Partido Democrático Trabalhi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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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베베투
Bebeto

본명
주제 호베르투 가마 지올리베이라[1]
José Roberto Gama de Oliveira
출생
1964년 2월 16일 (60세)
브라질 바이아 주 사우바도르
국적
[[브라질|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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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체격
177cm / 71kg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정치인
소속
선수
CR 플라멩구 (1983~1989)
CR 바스쿠 다 가마 (1989~1992)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2~1996)
CR 플라멩구 (1996)
세비야 FC (1996~1997)
EC 비토리아 (1997)
크루제이루 EC (1997)
보타포구 FR (1998~1999)
토로스 네사 (1999)
가시마 앤틀러스 (2000)
EC 비토리아 (2000)
CR 바스쿠 다 가마 (2001)
알 이티하드 (2002)
감독
리우데자네이루 유스 (2005)
아메리카 FC (2009~2010)
정치
브라질 민주노동당
국가대표
75경기 39골[2] (브라질 / 1985~1998)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수상
4.1. 우승
4.2. 개인 수상
5. 여담



1. 개요[편집]


브라질축구 선수 출신 정치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

호마리우와 더불어 1990년대 셀레상의 공격진을 책임지며, 1994 미국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클럽에서도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서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명성을 떨쳤다.

또한 1990년대에 열린 월드컵[3]에서 가장 많은 공격 포인트[4]를 기록한 브라질 선수이기도 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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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 커리어에 비해 베베투의 클럽 커리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가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췄던 호마리우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임팩트 있는 클럽 커리어를 보냈다.

베베투는 20대 대부분을 브라질에서 보냈다. 비토리아를 거쳐 플라멩구에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80경기 34골, 바스쿠 다 가마에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53경기 28골을 득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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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데포르티보 시절

1992년 여름, 만 28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처음 유럽 무대를 밟았다. 행선지는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라리가 91-92 시즌 간신히 강등을 면한 무명 구단에 불과했다. 베베투가 오기 전까지 데포르티보는 이렇다 할 트로피도 하나 없었고 2부 리그에 머물던 정말 보잘 것 없는 팀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베베투의 이적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전문가들은 '갸날픈 베베투가 라리가의 피지컬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라며 의구심을 품었지만 베베투는 데포르티보 그리고 라리가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1992-93 시즌에 베베투는 37경기 29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을 차지한 동시에 데포르티보를 3위까지 견인했다. 이는 데포르티보 구단 역사상 1950년 준우승 이후 가장 높은 순위, 첫 유럽 대회 진출, 첫 득점왕 배출이었다.

1993-94 시즌에 34경기 16골을 기록했고 데포르티보를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준우승은 데포르티보 팬들의 한이 깃들어 있는데 우승 목전에서 바르셀로나에게 트로피를 내줬기 때문이다. 리그 마지막 경기 발렌시아 전에서 데포르티보는 경기 종료 직전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성공시킨다면 FC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상황이었다. 페널티킥 전담 키커였던 베베투는 부담을 느끼고 미로슬라프 쥬키치에게 양보했는데 듀키치가 실축하면서 우승을 코 앞에서 놓친 것. 만약 베베투가 나서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고 우승을 확정지었다면 그의 평가는 훨씬 더 높아졌을 가능성이 높다.

1994-95 시즌에 26경기 16골을 넣었다. 마침내 발렌시아를 누르고 데포르티보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끌었다. 아쉽게도 리그는 2년 연속 준우승. 그래도 데포르티보의 구단 역사상 그리고 베베투에겐 유럽 무대 진출 이후 첫 트로피를 획득했던 특별한 시즌이었다.

1995-96 시즌에 34경기 25골을 넣었다. 데포르티보는 UEFA 컵위너스컵[5] 4강까지 진출했으나 리그는 9위로 마감. 베베투는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데포르티보를 떠나 브라질로 컴백했다.

무명 클럽 데포르티보를 라리가의 신흥 강호로 거듭나게 만든 장본인으로 괜히 데포르티보 팬들 가슴 속엔 호마리우보다 위대한 공격수가 아니다. 베베투 세대의 일원들이 기반을 닦아놓지 않았더라면 데포르티보의 99-00 시즌의 리그 우승 및 제2의 전성기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라리가에서 영구결번 시스템이 있었더라면 데포르티보 역사에 베베투 이후 11번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브라질 국적이지만 베베투의 조상은 데포르티보의 연고지인 갈리시아 출신이었다. 본인 역시 "나의 조상은 갈리시아 출신이다. 나는 여러분의 가족이다"라며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훗날 구단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데포르티보를 떠나 브라질로 컴백한 것을 제일 후회한다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후 베베투는 보타포구 FR, CR 바스쿠 다 가마, EC 비토리아 등 브라질 리그의 주요 클럽 및 J리그가시마 앤틀러스에도 몸 담았다. 이후 알 이티하드 FC에서 뛰다가 2002년 11월에 은퇴했다.

의외로 한국과도 접점이 있는데 가시마 앤틀러스를 떠난 2000년에 전남 드래곤즈울산 현대 입단이 타진된 적도 있고, 2003년 3월 10일 한국과 브라질 클럽 친선경기 참가차 한국을 방문한 베베투는 K리그1 진출의사를 밝혔지만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85년에 국가대표를 데뷔한 베베투는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안타깝게도 부상으로 낙마했다. 그리고 열린 198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6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고 브라질을 우승시키기도 했으며, 그 활약으로 1989년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에도 선정되었다. 당시 호마리우는 3골을 넣었고, 이 당시에 이미 베베투 - 호마리우 콤비는 세계 최고 수준의 위용을 과시한 바 있다. 비록 첫 월드컵이었던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조별 리그 2차전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 후반에 교체 투입되어 7분을 뛴 게 전부였고, 브라질도 16강에서 탈락했다.[6]

하지만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전경기에 출전하여 3골 2도움을 기록, 그야말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때 베베투는 호마리우와 환상의 투톱으로 뛰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했다. 베베투가 골을 넣었던 경기는 조별 리그 2차전 카메룬전, 16강 미국전[7], 8강 네덜란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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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미국 월드컵 결승전에서 드리블하는 베베투
여담으로 베베투는 이탈리아와의 결승전 당시 승부차기에서 브라질의 5번 키커였다. 비록 바조가 실축해서 그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그래도 바조가 실축하자마자 클라우지우 타파레우 골키퍼에게 처음으로 안긴 선수가 바로 베베투였다.

이후 국가대표에서 차출되지 않았던 베베투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기점으로 다시 브라질 대표팀에 뽑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브 공격수로 1997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에 기여했다. 물론 이때 주전 공격수는 호마리우호나우두였기 때문에 다시 베베투가 주전 공격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1998 프랑스 월드컵 직전에 호마리우가 부상으로 월드컵에 뛰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결국 이를 틈타 베베투는 다시 주전으로 도약, 호나우두와 투톱으로 7경기에 나와 3골 2도움을 기록하며 브라질의 준우승을 이끌었다.[8] 이때 베베투는 지난 월드컵에 비하면 도움 능력이 노쇠화하긴 했지만 조별 리그 1차전 스코틀랜드전부터 8강 덴마크전까지 5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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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패한 후 호나우두를 위로하는 베베투
2대회 연속 월드컵 우승은 실패했으나 그래도 전경기 출장은 베베투에게 의미있는 기록이였고, 월드컵 직후 미련없이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국가대표로서 최종 스탯은 75경기 39골 8도움. 의외로 올림픽에서도 나름 족적을 남겼는데, 1988 서울 올림픽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출전해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

여담으로, 대표팀 내에서는 약간 시니컬하지만 정상인 기믹을 맡아서 팀을 추스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표적 또라이인 호마리우와는 오래 같이 공격진에서 뛰며 발을 맞췄지만 지극히 사무적인 사이였고,[9] 주장인 둥가는 지나치게 수비 중심적이었으며 독선적인 모습으로 팀을 통솔했다. 이에 대해 다른 팀원들이 불만을 가지면 베베투는 "짜증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저 놈을 따라가야 된다"고 팀원들을 추슬렀다고 한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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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베투는 브라질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173cm의 스트라이커로서 상당히 왜소한 체구를 가졌지만 반대급부로 날렵한 움직임 덕분에 상당히 민첩했으며 발(스피드)도 빨랐다. 여기에 브라질리언 특유의 테크닉과 축구 지능은 덤. 1경기에 2골, 3골 몰아치고 3경기, 4경기 득점하는 선수가 아니라 꾸준히 골을 넣어줄 수 있는 공격수기도 했다. 여기까진 왠만한 B급 공격수도 해낼 수 있는 수준이지만 베베투가 아직까지도 기억되는 이유라면 바로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 골 냄새를 맡는 것 뿐만 아니라 높은 수준의 기술, 넓은 시야와 뛰어난 볼 키핑을 바탕으로 동료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도 능했다. 사실 베베투는 커리어 초반엔 공격형 미드필더 내지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본인은 하얀 펠레라 불리는 지쿠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때로는 특출난 플레이 스타일이 아니라서 인자기과 취급을 받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인자기와는 다르게 낮은 위치에서 플레이를 할 줄 알았고, 윙플레이도 되던 선수였다. 또한 테크닉이 좋아서 개인기도 좋았으며, 뛰어난 위치 선정 능력과 골 결정력으로 훌륭한 득점력까지 갖추었다. 지금으로 치면 다비드 비야, 앙투안 그리즈만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장점들 덕분에 그는 데포르티보에서는 에이스 역할을 맡았으며,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호마리우와 호나우두의 서포터 역할까지 A급 이상으로 잘 수행했다.


4. 수상[편집]



4.1. 우승[편집]











4.2. 개인 수상[편집]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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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미국 월드컵 8강 네덜란드전 득점 후 펼친 요람 세리머니[10]
베베투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요람 세리머니'의 원조로 유명하다. 1994 미국 월드컵 8강 네덜란드전 직전에 아내가 아들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경기에 출전해 아들의 탄생을 자축하는 골을 넣은 뒤 호마리우, 마지뉴와 함께 아기를 어르는 이른바 '요람 세리머니'를 펼쳤다.[11] 이후 축구선수의 아내가 출산을 하게 되면 이 축하 세리머니를 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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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세레모니의 주인공인 막내 아들 마테우스[12]는 성인이 되었고 2014 브라질 월드컵 기념으로 부인, 아들과 세레모니를 재현했다. 그리고 아들 마테우스는 브라질 청소년 축구대표팀에도 뽑혔고, 브라질의 CR 플라멩구를 거쳐 포르투갈 2부리의 팀인 에스토릴에서 프로 선수로 활동 중에 2017년 5월 17일,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CP와 2022년까지 6000만 유로의 바이아웃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스포르팅에서 자리를 못잡고 비토리아 SC로 임대를 가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면서 두 시즌 동안 4골 6어시스트의 그럭 저럭 괜찮은 스탯을 올리게되고 다시 스포르팅으로 돌아갔지만 전력외 취급을 받으며 한 경기도 출전을 못하고 한 시즌을 날리게된다. 또 다시 2020년 9월 브라질 세리A의 코리치바 FC로 다시 임대로 가 활약중이다.

배구 선수 출신인 Denise Oliveira와 결혼해 2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둘째 딸인 스테파니에는 모델로 활동하다가 프로 축구 선수인 카를로스 에두아르도와 2019년 결혼했다.[13]

전술했듯이 1994 미국 월드컵 결승전에서 바조의 실축으로 경기가 끝나서 가려졌지만, 브라질의 마지막 5번 키커는 베베투였다. 2018년 5월, 베베투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마지막 키커였던 본인이 승부차기를 성공시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고 싶었으나[14] 바조의 실축으로 경기가 끝나는 바람에 아쉬웠다고 밝혔다.

현재 베베투는 브라질에서 중도좌파인 민주노동당의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년에 근황이 공개됐는데, 정말 멋지게 늙었다. 베베투 근황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대표팀 역대 득점 6위.[3] 1990, 1994, 1998[4] 6골 4도움[5] 현재 UEFA 유로파 리그 통합[6] 당시 호마리우도 1경기 밖에 뛰지 못했다.[7] 이 경기에서 후반 27분경 호마리우가 드리블로 어시스트를 하고 베베투가 마무리한 후 격렬하게 얼싸안을 때 브라질 사람들 모두 감격했다.[8] 물론 노장이였기 때문에 후반전 중반쯤 데니우손과 교체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나마 프랑스와의 결승전은 풀타임으로 뛰었다.[9] 호마리우 曰: "나는 카레카와 베베투를 합한 것보다 낫다."[10] 베베투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티아고 알칸타라, 하파에우 아우칸타라의 아버지 마지뉴이고 왼쪽에 있는 사람은 호마리우다.[11] 사실 조별 리그 2차전이었던 카메룬과의 경기에서도 골을 넣고 요람 세리머니를 했었다. 다만 조별 리그의 세리머니는 네덜란드와의 8강전 자체가 워낙이나 명경기였고, 또한 당시 베베투와 호마리우와 사이가 나쁘다는 말이 있었는데 호마리우가 달려와서 함께 세리머니를 하는 등 더욱 강렬한 임펙트가 있어서 아무도 기억을 못한다.[12] 실제로, 독일의 전설적인 축구선수 로타어 마테우스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13] 포지션은 공미. FC 포르투의 벤치 자원으로 있다가 2014-15 시즌 프랑스 리그 1의 OGC 니스로 임대를 가 10골 5도움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좋은 활약으로 니스는 완전 이적을 바랬고 AS모나코에서도 이적 문의를 했지만 포르투는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하고 임대에서 복귀 시켰다. 거상답게 포르투는 에두아르도를 2천만 유로(263억)의 금액으로 사우디의 명문 클럽 알 힐랄 FC로 팔아 넘기게된다. 에두아르도는 알 히랄에서 다섯 시즌 동안 총 75골을 기록하였다. 이는 알 히랄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외국인 선수로 기록되기도 했다. 2020년 여름 이적 시장때 아랍에미레이트의 샤바브 알 아흘리 두바이 FC로 이적해 활약중이다.[14]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winning goal(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의 우승을 확정짓고 싶다" 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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