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핑 탈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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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핑 탈환전
중일전쟁의 일부
파일:북평천진일본군.jpg
중국군을 격파하고 환호하는 일본군
날짜
1937년 8월 6일 ~ 8월 26일
장소
중화민국 평진 지역
교전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svg 탕언보
파일:대만 국기.svg 푸쭤이
파일:대만 국기.svg 유여명
파일:대만 국기.svg 쑹저위안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데라우치 히사이치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도조 히데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이타가키 세이시로
결과
일본군의 승리
영향
일본군의 평진 지역 점령 고착화.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중국의 항전태세
3.2. 탕언보의 패배
3.3. 중국군의 붕괴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37년 8월 6일부터 8월 26일까지 행해진 국민혁명군베이핑 탈환 시도. 군벌들의 비협조와 기본적인 전투력 차이, 제2차 상하이 사변의 개막으로 인한 지원 부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2. 배경[편집]


7월 30일, 베이핑과 텐진이 함락됨에 따라 하북성은 사실상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하북중국 문명의 발상지이며 청나라북양정부가 오랫동안 수도로 삼아온 곳이니만큼 중국 민족의 자존심 차원에서 대단한 타격이었는 것은 물론이었고 막대한 세입과 농업 생산량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도 중국이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일본은 하북, 산서, 산동, 하남 4개 성을 묶어 괴뢰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나 일찍이 1931년 만주사변과 1933년 열하사변, 1935년 기동사변으로 동북지역의 세관 수입이 끊긴 국민정부는 경제 붕괴 직전까지 몰리는 아찔한 경험을 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전국적인 항일여론이 들끓고 있었으니 정치적으로도 일본군의 하북 점령을 좌시할 수는 없었다.

기존의 학계는 중국군이 전투를 회피했다거나 기껏해야 진지방어에만 몰두했다고 폄하하곤 했으나 중국군은 남북에서 평진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여 베이핑을 수복하는 반격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3. 전개[편집]



3.1. 중국의 항전태세[편집]


7월 26일, 국민혁명군 수뇌부는 화북 방어계획을 확정하였다. 이는 바오딩 주둔 부대를 영정하 일대로 추진시켜 베이핑을 증원하고 후방의 중앙군을 바오딩으로 진격시켜 화북을 방어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군사위원회는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기 위해 평수선 방면에서 15개 사단, 9개 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차하얼 방어에 투입, 관동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평진에 주둔한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8월 2일, 국민정부 주석 린썬이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여 전 국민에게 정부를 신뢰하고 항전에 임하라고 호소했고 8월 7일 국민당 전당대회가 항일전쟁을 정식으로 결의했다. 8월 11일, 장제스를 주석으로, 왕징웨이를 부주석으로 하는 국방최고회의가 설치되었고 8월 15일에 국가 총동원령이 선포되었다. 8월 20일, 전국이 5개 전구로 분할되어 장제스가 1전구와 5전구 사령관에 취임했고 2전구는 옌시산이, 3전구는 펑위샹이, 4전구는 허잉친이 맡았다.

8월 1일, 군사위원회는 차하얼에 주둔하던 수원성 주석 겸 35군 군장 푸쭤이를 7집단군 총사령관에, 유여명을 부총사령관에 임명하고 13군 군장 탕언보를 7집단군 전적총지휘로 삼았다. 또한 평지천에 주둔하던 탕언보는 차하얼의 거점인 장자커우로 이동, 주력인 89사단을 동원하여 8월 6일 베이핑 북방의 거용관을 통과하여 남구로 진주하여 베이핑을 북방에서 위협하였다. 공군도 탕언보를 지원하기 위해 140대의 항공기를 뤄양과 지난에 배치하여 육군의 공격을 지원할 준비도 하였다.

일본군은 원래 중국군의 집결 지점인 바오딩을 먼저 공략하려 했으나 탕언보가 베이핑을 심각하게 위협함에 따라 참모본부가 바오딩 공략을 중단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우선 독립혼성 11여단과 5사단을 북상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로 하였다.


3.2. 탕언보의 패배[편집]


8월 8일, 탕언보의 13군과 일본군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탕언보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본군은 거용관을 뚫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8월 10일에는 쑨롄중이 지휘하는 27사단이 베이핑 남서쪽 5킬로미터 지점의 독점까지 점령하여 베이핑을 위협했다. 8월 11일 이타가키 세이시로 중장이 지휘하는 5사단과 혼성 11여단이 남구를 공격했다. 또한 5사단 일부 병력이 거용관으로 우회하여 남구의 배후에 진출했다. 8월 14일에는 도조 히데키 중장이 지휘하는 도조 병단이 장자커우로 진격하여 탕언보의 13군을 포위했으나 탕언보는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잘 버텼다.

이에 중국군은 평한선의 부대를 평수선으로 이동시켜 남구의 일본군을 섬멸하고 평진으로 반격하고자 했다. 제2집단군 총사령관 유치는 장제스에게 주력부대를 베이핑으로 진주시켜 탕언보와 협동하여 베이핑의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건의했고 장제스는 이를 즉각 승인하였다. 8월 19일 장제스는 스좌장 행영 주임 쉬융창과 제2집단군 사령관 유치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웨이리황의 부대를 이미 북진시켰다. 평한로와 진포로 양군은 전일 쉬융창 주임이 계획한 방안대로 여러 로에서 유력한 부대 일부를 차출하여 평한로로 공격 전진시켜 적군의 선두와 후미가 서로 협조하지 못하도록하여 웨이리황의 부대가 임무를 달성하도록 하라. 만약 진포로 상의 부대가 출동하지 못하게 되면 평한로 상의 부대라도 단독으로 전진시켜라."


하지만 8월 16일 남구진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고 일본군은 즉각 5사단을 이곳에 증원시켰다. 탕언보는 부대를 재배치하여 일본군을 지형지물을 이용하려 저지하려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에 장제스는 옌시산웨이리황, 유치에게 탕언보를 지원하라고 지시했으나 지원부대가 장신점에 도착하였을 때인 8월 25일 거용관이 함락되었다. 결국 8월 26일 탕언보는 전 부대에 퇴각명령을 내렸고 2만 6천명의 사상자를 낸 13군은 철수길에 올랐다.


3.3. 중국군의 붕괴[편집]


탕언보가 철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푸쭤이와 유여명은 즉각 퇴각길에 올랐다. 이에 일본군은 평한-진포선을 향해 진군했다. 평한선은 베이핑에서 한커우를 잇는 중국 남북교통의 대동맥과 같은 중요한 교통로로 만약 이곳이 함락된다면 중국은 사실상 병력 운용의 허리가 끊어지는 것과 다름없는 대타격을 입을 것이었고 반면 일본군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핏줄을 이식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일본 제국은 9월 2일 북지사변을 지나사변으로 개칭하는 한편 일본군은 평한선 확보를 위해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의 지위 계통을 통일하여 지나주둔군을 북지나방면군으로 개편하고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1], 9월 4일 바오딩 방면을 공략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국민정부는 8월 20일 화북 방어게획을 수정하여 바오딩-창현을 1차 방어선으로 삼고 안양-지난을 2차 방어선으로, 뤄양-정저우, 카이펑, 쉬저우, 회음을 3차 방어선으로 삼아 일본군을 축차적으로 방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진포, 평한철로 북쪽 구간과 하북 중부지역에 1전구 소속 10개 군, 29개 사단을 투입했으며 유치의 2집단군에게 평한선 방어를, 쑹저위안의 1집단군에게 진포선 방어를, 웨이리황의 14집단군에게 산서, 하북 방어를 명령함으로 45만 대군을 배치하였다. 또한 9월 17일 6전구를 추가로 편성하여 펑위샹을 사령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적전도주하는 군벌들의 태업으로 인하여 전선은 계속 붕괴되었다. 8월 27일, 일본군이 차하얼의 성도 장자커우를 함락하고 9월 4일 찰남자치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9월 12일 대동을 점령하여 수원성으로 진공했다. 9월 14일 유리하가 함락되어 중국군 1방어선이 격파되었고 9월 24일에는 바오딩이 함락되었다. 쑹저위안과 유치는 일본군과의 결전을 회피하여 퇴각해버렸고 일본군은 바오딩과 창현을 점령한 후에 2군 소속 108사단을 평한선으로 보내 1군 소속 3개 사단과 함께 스좌장을 공격하게 하여 10월 10일 스좌장을 점령했다. 10월 14일에는 수원성의 성도 수원이 함락되었고 10월 17일 바오터우가 점령되면서 차하얼과 수원 전역이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국민정부는 6전구 방어에 동원된 쑹저위안, 한푸쥐 등이 펑위샹의 옛 부하였기 때문에 펑위샹의 명령에 잘 복종할 것이라 여겼지만 이들은 오히려 펑위샹의 명령을 무시하고 적전도주를 일삼았다.


4. 결과[편집]


결국 베이핑, 톈진의 탈환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일본군은 중국군 방어선이 무너진 틈을 타서 차하얼, 수원성을 점령하고 장제스 라인이라 불리던 중국군 1차 방어선을 돌파하여 화중, 화남으로 파죽지세로 전진하게 되었다. 마침 상하이, 난징이 함락됨에 따라 화중전역도 붕괴되었고 중국은 우한으로 주력 부대와 정부기관을 옮겨 항전을 준비하게 된다.


5. 참고문헌[편집]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일본 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태평양 전쟁사 1권, 일본역사학연구회, 채륜.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제2차 세계 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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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한 마쓰이 이와네 대장을 중지나방면군 사령관에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