삡...
삡...
삡...
~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타이젠 관문 부두는 비릿한 바다내음이 가득했다. 켄세이는 하역 작업을 서두르는 인부들의 고함을 헤치며 화려한 도시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의 손엔 만물상에서 산 지도 칩이 들려있었다. 타이젠 관문은 중계 무역과 교역으로 번창한 곳. 무분별하게 개발된 도심 뒷골목은 지도 없이 들어가기엔 너무 벅찬 곳이었다. 켄세이가 지도 칩을 홀로그램 기계에 꽂으니 허공에 오밀조밀한 타이젠 관문의 지도가 나타났다. 그의 손가락이 홀로그램을 스치듯 지나가자 평화의 신전과 그곳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반짝였다.
가만, 분명 켄세이는 과거에 이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 무엇이 일어날지도...데자뷰...
번쩍!
순간 도시의 모든 물체가 정지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보던 관광객도, 거드름을 피우며 가마 위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아우레리엄 귀족도, 모두 석상이 된 듯 그 자리에 멈췄다.
~
삡...
삡...
대체 무슨 일이?
경계심을 거두세요. 그대는 심하게 다쳤답니다. 꽤 오랜 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
켄세이가 놀라서 돌아보자 호리호리한 체구의 여인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
그대는 누구요?
키네틱. 제 이름은 키네틱입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당신은 지금 실타래를 풀고 있습니다. 기억의 실타래를...
~
켄세이가 홀로그램 장치를 끄자 목석같았던 거리의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켄세이는 자신의 장검이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하며, 음침한 하수구와 쓰레기 더미 가득한 뒷거리를 뚫고 평화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신전에 방문해 봉헌함에 동전을 넣으며 기도를 외었다.
저의 정신과 육신을 단련할 시련을 내리소서...
타이젠 관문의 학교 지구는 비행선을 타고 들어가야 했다. 속속들이 들어오는 비행선을 타고 내리는 어린 학생들은, 배낭에 각자 좋아하는 타이젠 두목의 캐리커처를 새겨두었다.
비행선 탑승장 뒷골목에는 기모노를 입은 아름다운 마담들이, 저마다의 도박장에서 즐기고 가라며 켄세이를 유혹했다. 얼핏 설핏 보이는 도박장 내부에는 왁자지껄한 소음과 매캐한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어른들은 바쁘게 손을 놀리며 마작 패를 쌓는 데 여념이 없었고, 아이들은 그사이를 오가며 각종 심부름과 허드렛일을 도왔다.
켄세이는 온갖 인간군상의 욕망이 뒤엉킨 그곳을 지나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행여나 실수로 불타는 만으로 이어지는 매캐한 골목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조심하며...
~
삡...
삡...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이것들은 대체 뭔가?
전자기 최면이라는 치료법입니다. 현실에서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을 겪었을 때 발생하는 충격을 완화해주죠.
으윽... 맞아... 그때 분명 폭발이 있었고...
서두르지 마세요 검의 달인이여. 천천히. 천천히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세요.
~
타이젠 관문 밖, 매캐한 도시의 공해가 잦아들고 맑은 공기가 심신을 쓰다듬는 곳. 평화로운 오솔길이 과수원 사이로 이어지고, 고즈넉한 저택 사이의 논에 황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곳.
켄세이는 그곳에 있는 세 번째 두목의 도장(道場)을 방문했다. 그가 정문에서 검을 휘두르자 도장의 결계가 찢어졌다.
'삐잉삐잉'
즉시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지고 각종 날붙이와 총기류를 꼬나쥔 도장 생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생도들 뒤에서, 무예복을 입은 단단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천천히 켄세이에게 다가왔다. 그의 상의엔 "배"라는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고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은 켄세이를 꿰뚫듯 노려보았다.
"무인의 대결을 원하는가?"
"그렇소."
켄세이가 정중히 두목에게 인사를 건넸다.
"후후. 명성이 자자한 검성과 칼을 섞을 수 있다니 영광이군. 그럼 차나 한잔하며 대결을 논해볼까?"
"좋소."
"경보 해제."
두목이 명령하자 경보음이 잦아들고 생도들도 켄세이에게 겨눴던 저마다의 무기를 내렸다.
~
"내 기억으로... 그때 분명 새하얀 눈이 내렸소."
"타이젠 관문에 눈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
고즈넉한 다방(茶房)의 고풍스러운 탁자를 앞에 두고 두 사내가 마주 앉았다. 도장 생도들은 신경을 곧추세운 채 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타이젠 관문은 본토와 분리된 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소. 대륙의 무사들이 떠받드는 무사도 따위 여기서는 한낱 공염불에 불과하지."
두목이 향기로운 차를 다기에 가득 따르며 켄세이를 바라보았다.
"안타깝군."
"그렇게 생각하는 그대도 마찬가지라오. 당신은 케케묵은 구시대의 유물. 이제 무사들의 세계는 힘이 지배하지. 뜬구름 잡는 명예 따위가 아니라."
"각설하고, 단 일격에 승부를 가리지."
켄세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두목의 말을 끊었다.
“아니. 승부는 어느 한쪽이 죽어야 나는 법이오.”
"죽음이라. 대체 나의 죽음으로 그대가 얻는 게 무엇인가?"
"구태의연한 명예에 눈이 먼 켄세이를 격파하고 진정한 검성이 되는 것이지."
두목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군. 진정 어느 한쪽이 죽어야 승부가 나겠구려. 서로의 무기는 오로지 검으로만?"
"그렇지. 오직 검으로만!"
"알겠소. 그럼 연무장으로 가시겠소?"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켄세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두목의 단검이 날아들었다. 첫 번째 단검은 켄세이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고, 두 번째 단검은 그의 뺨에 옅은 상처를 냈다.
켄세이도 빛살처럼 장검을 뽑아 반격에 나섰다. 두목의 손에서 단검이 추가로 날았으나 켄세이의 검술에 막혔고, 튕겨 나간 단도는 주변의 애꿎은 생도의 목숨만 앗아갔다.
"내 생각보다 훨씬 민첩하구려."
"암습이라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린가!"
켄세이가 움직임에 방해되는 외투를 벗으며 꾸짖었다. "말했지 않소. 무사도? 명예? 모두 다 쓸데없는 것. 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적의 목숨을 취할 뿐이라오. 비열하다? 후후 죽은 자는 말이 없지."
"개소리. 모두 개소리다. 내 검이 너를 벌하리라!"
두목과 켄세이는 본격적으로 대결을 시작했다. 두목의 단검이 재차 허공을 가르며 켄세이를 노렸고 켄세이의 검은 미려한 궤적을 그리며 두목의 목을 찔렀다. 두 고수의 격렬한 대결에 한지로 세워놓은 다방의 벽면이 사정없이 찢어지며 흰 눈처럼 사방에 흩날렸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뒤, 켄세이는 한 발짝 물러나며 장검을 눞이며 중단세를 취했다. 두목의 눈이 커지고 방어하려는 순간, 엄청난 위력의 참격이 켄세이의 검에서 뻗어 나와 두목의 몸을 갈랐다. 누가 봐도 승부가 갈린 그 순간,
켄세이의 코에 알싸한 마법의 향기가 아렸고 두목의 손에서 새파란 빛이 퍼져 나왔다.
"쾅!"
엄청난 충격이 도장을 흔들었고 켄세이의 의식도 흐려졌다.
~
제가 하나까지 세면 당신은 눈을 뜹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자 눈을 뜨세요.
~
시야에 흐릿한 방이 들어온다. 휘황찬란한 달빛이 고층건물과 높은 탑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밤이다.
규칙적인 기계음. 현실과 과거를 오가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계속 들렸던 소리다.
자신을 키네틱이라고 말한 여자가 내 머리맡에 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본 그녀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귀에 대고는 말했다.
"보고합니다. 최면 치료는 성공했습니다."
"그가 마법을 사용했소."
“세 번째 두목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부하는 것으로 유명해요. 우리들 사이에서 괜히 별명이 미친 개인 게 아니죠.”
“내 검은 어디 있소?”
“바로 옆에 놓아두었어요.”
침상 옆을 더듬어 보려 해도 팔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끙. 마치 내 몸이 아닌 것 같군."
"당분간은 그럴 거예요."
“내 부상이 심했소?”
"안타깝지만 그래요. 총체적 난국이었죠. 상태를 호전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어요. 치료를 위해서 전자기 최면도 동원했고요. 당신이 살아난 건 정말 천운이에요."
"아니. 난 운을 믿지 않소. 말해주시오. 대체 왜 신 아우레리엄이 내 목숨을 구한 것이오?"
키네틱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배 두목이 이끄는 조직원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찾아왔어요. 그 수는 백 명이 넘고 날마다 불어나고 있어요. 아직 타이젠 관문에서 무사도는 중요해요. 그들 중 상당수는 비열한 방법을 쓴 배 두목 대신 당신을 세 번째 두목으로 인정하고 있어요."
어쭙잖은 소리.
"흥. 내가 모를 줄 아시오. 경고하겠소. 나를 구해서 꼭두각시 두목으로 만들고 뒤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거라면, 번지수 잘못 짚었다 해두지."
나의 비아냥을 들은 키네틱은 꼈던 팔짱을 풀더니 자그마한 장치를 들어 단추를 눌렀다. 바로 기분 나쁜 기계음이 울려 퍼지고 온몸의 혈관을 잡아 뜯는듯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으, 으윽...!"
삐삐삐삐삐삐삐삐...
"계속 설명드리죠. 부상이 심해 당신의 팔과 다리는 절개해야 했어요. 대신 기계 의수와 의족을 달았죠. 최신 기술이 집약된 훌륭한 녀석들이지만, 처음 당신의 신경계와 접속할 때 상당한 고통이 따를 거예요. 그래도 금방 잦아드니 조금만 참으세요."
삐.. 삐.. 삐.. 삐.. 삐.. 삐..
난 고통 속에 헐떡이며 주먹을 쥐고 다리를 펴 보았다. 원래의 팔다리보단 어색하지만 썩 훌륭한 움직임이다.
삐..... 삐..... 삐.....
기계 팔로 조심스레 검 자루를 쥐어보니 단단한 감촉이 느껴진다.
"전화위복이라 했나요. 그 지독한 부상 후 우리의 기술로 당신은 새롭게 태어났어요. 더 강하고, 빠른 육신을 가지고요. 이젠 누구도 당신을 막을 수..."
난 그녀를 노려보며 순식간에 검을 뽑았다.
'챙'
누구도 피할 수 없을 속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일도양단을 날렸다.
하지만 키네틱의 잘린 부위에서는 피가 흐르는 대신 디지털 허상이 되어 흩어지더니 다시 모였다.
“막을 수 없죠. 오직 한 사람, 나만 빼구요.”
키네틱의 홀로그램이 조롱하듯 생긋 미소를 지었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휘두른 검이 병실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분노해서 외쳤다.
"난 그대들의 정치놀음 따위엔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날 타이젠 관문의 경찰에 넘겨다오!"
"진정하세요 켄세이. 우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타이젠 관문과 신 아우레리엄의 힘을 합쳐 저 악의 제국을 무너뜨릴 거라구요."
"대체 너희들은... 그러고 보니 키네틱이란 이름. 그것도 본명이 아닌 것 같군."
“피차일반이죠. 검.성.님.”
키네틱이 다시 손에 든 장치를 조작하자 의수와 의족을 통해 강렬한 전기 충격이 들어왔고 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또 몸부림쳤다.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키네틱의 홀로그램이 서서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