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한국군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베트남 전쟁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베트남 전쟁/미군



주월한국군사령부
파일:주월한국군사령부.jpg
주둔 기간
1965년 9월 25일 ~ 1973년 3월 23일
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소속
대한민국 국군
규모
55,000명
본부
사이공
사령관
채명신 (초대)
이세호 (마지막)

1. 개요
2. 파병 이전: 이승만 정부의 파병 추진
3. 파병 배경
3.1. 미국의 입장변화와 베트남 전쟁 상황의 악화
3.2. 한미관계와 한국의 안보적 측면
3.3. 경제적 이해관계
3.4. 한국내 정치적 문제 고려
4. 북한의 외교 정책
4.1. 북한의 베트남 전쟁 파병
4.2. 북한의 대남 침략 공세 강화
5. 파병 이후
5.1. 전쟁 특수
5.2. 군인과 노동자들의 희생
5.3. 파병을 위한 설계
6. 주월한국군의 파병 근거 및 지위
6.1. 파병의 법적 근거
6.2. 주둔군 지위
7. 파병 부대
8. 주요 전투 기록
9. 인명 피해
10. 전과
11.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
11.1. 베트남전 발발 당시의 평가
11.2. 현대의 평가
12. 파월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
14. 파병 사진
15. 관련 인물
16. 기타
17. 매체에서 등장
17.1. 영화
17.2. 드라마
17.3. 게임
17.4. 음악
1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베트남 전쟁대한민국과도 연관이 많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대한민국의 최초이면서 최대의 해외 파병이었으며, 한국이 경이로운 수준의 경제 성장을 일으킬 수 있게 한 사건이다. 본 사건으로 인해 미국과의 외교적 관계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이득을 얻을 수 있었고, 한국의 국제적 지위와 외교 역량을 전반적으로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현대 한국 지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 중 하나로, 한국 현대사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전쟁 특수의 핵심 인물인 근로자나 파병 전사들에 대한 문제는 주목받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당시 전투 병력이 모자라게 된 미국은 당시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중 제2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베트남에 파병하려고 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부담이 증가하자 한국에 투입되는 자원을 줄이는 차원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 감축'과 '주한미군 병력 수준 감소'를 고려하고 있었다. [1]

당시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이러한 기조를 감지했다. 미군이 빠져나가 전력에 공백이 생겨 벌어질 안보 부담의 증대와 북한의 침공 위협을 우려한 박정희 정부는 미국 측에 먼저 "우리가 너희 대신 병력을 보내줄게!"라고 제안하게 된다. 미국이 이를 승낙하면서 1964년 9월 의무대와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1967년 8월까지 4차례에 걸쳐 국군이 베트남에 파견되었다. 한국도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전투 병력을 보내고, 뒤이어 육군 9사단(백마부대)을 파견한다.

당시 미국은 단독으로 월남전을 치르기에는 국제여론이 좋지 않았기에 명목상 연합군 형태를 취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대의명분이 명확해야 했고, 이에 미국이 미군 부대를 철수시켜 월남에 투입하거나, 한국 측이 병력을 투입하는 대신 미국이 주한미군을 잔류시키거나 양자택일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개발도상국인 한국 입장에선 1960년대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북한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주한미군 철수는 국가안보상 엄청난 위협이었다. 군대 안 보내고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는 상황과 돈 받고 한국군이 참전하는 대신 북한이 침공하려고 하면 미군이 즉시 투입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한국 측에게 유리하게 개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대한민국은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한국은 원래 처음에는 육군 수도사단만 보내려고 했는데, 해병대 측이 참전 의사를 강하게 표명한 데다가 파월 사령관 채명신이 해병대도 전투 경험을 갖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상부에 건의해서 해병대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파월 결정이 나자, 박정희 대통령이 각 군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주한미국대사를 불러놓고 "파월에 며칠이 걸리냐"고 물어보았을 때, 육군참모총장이 "최소 3개월은 필요하다"고 하자 해병대사령관이 "중대급은 즉각, 대대급은 24시간, 연대급은 48시간, 사단급은 72시간이면 충분하다." 라고 말하여 해병대도 참여하게 되었다. 9사단의 추가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게 5만 병력 규모의 한국군(누계 합산으로 총 30만)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56만 3,387건의 작전을 수행했다.

북한도 비밀리에 베트남 전쟁에 파병한 적이 있다. 전투기 조종사 및 정비병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공군 부대 위주로 파견했다. 이들은 공식적으론 북베트남 공군에 소속되어서 활동했다. 북한은 지금도 파병을 부인하고 있지만, 북한에 전승기념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2. 파병 이전: 이승만 정부의 파병 추진[편집]


사실 베트남 전쟁이라고 하면 모두 북베트남 + 베트콩 vs 남베트남 + 미국(+ 한국군 + …)의 전투만 생각하지만, 실제 베트남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군과 베트민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에 있는 전쟁이고, 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한국이 개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954년 1월 막 6.25 전쟁을 마친 이승만 정부는 1개 사단을 파병할 의사를 보였는데, 이는 6.25 전쟁 때 타국들이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뿐만 아니라 해외 파병을 통해 6.25 전쟁 이후 국군의 위상을 알리고 미국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미국이 남한에 주한미군 체제를 구축하고 대규모의 무상 지원을 하는 와중에 한국 군대를 해외 파병하도록 할 경우 여론의 반대가 일어날 것을 의식해서 중단시켰다고 한다. 정확히는 "만약 한국군이 외국에 나가 작전을 벌인다면 주한미군 병사의 어머니들에게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야 할 필요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2]하지만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민의 완승으로 끝나고, 결국 6월 제네바 회담에서 미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도미노를 우려해 이승만 정권과 협의해 한국군 3개 사단의 파병을 고려했다. 그러나 식민지 문제의 당사국인 프랑스 측에서 이를 거부해 한국군의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

제네바회담의 휴전결정 이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계속 한국군 파병을 미국 측에 제안했으나 이미 늦은 시점이기도 하고, 한국군 파병이 이익보다는 군사적, 정치적 불이익이 더 크다고 보아 거절했다.[4]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전쟁과 휴전협정 과정에서 이승만과 반목한 것으로 유명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였고 이 시점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여전히 한국전쟁 재개와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인도차이나 전쟁 파병 제안은 한반도 북진통일 구상과 맞물려 있다고 보아 부담을 느끼고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미 북베트남이 거의 넘어간 상황에서 미국 국민들에게 약속한 군축을 군축은 시켜야워 행정부 입장에서는 이승만의 전쟁도 불사하는 반공행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파병 논의가 실패한 이후로도 꾸준히 베트남과 연계를 모색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방문하여 응오딘지엠 대통령과 군사 및 경제 협력을 논의했고, 1959년에는 태권도 시범단이 남베트남에 방문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베트남 파병 논의는 흐지부지 되었으나, 이승만 정부 시기의 베트남 파병 논의는 훗날의 박정희 정부 때 실행되는 파병논의와 구상에 단초를 제공했다 할 수 있다.


3. 파병 배경[편집]




1980년대 이전 연구들 대부분은 미국이 주도적으로 요청과 압력을 가해 한국이 응했다고 파악했다. 하지만 이후 미국 국무부 문서 및 한국 외교문서가 연구되고 성과가 축적되면서 미국 요청 이전부터 한국이 먼저 파병을 제안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근래에는 한국이 일정 수준 이상 능동적으로 파병을 추진했음이 강조되고 있다.[5]


3.1. 미국의 입장변화와 베트남 전쟁 상황의 악화[편집]


월남전 초기만 해도 미국은 한국군 파병 제안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월남전 상황이 시궁창으로 흘러가면서 미국의 입장은 달라졌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B. 존슨은 베트남에서 베트남 중립화보다는 군사행동 강화를 해결책으로 판단했다. 존슨은 1964년 4월 기자회견에서 동맹국들에 베트남 전쟁 참여를 요청하며 이른바 '더 많은 깃발 정책(more flags campaign)을 표방했다. 결정적으로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고 미국 의회가 존슨 대통령에게 군사행동 권한을 부여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존슨 대통령의 '더 많은 깃발' 정책은 단순히 병력이 필요하여 추진된 정책이라기보다는, 여러 국가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선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추진되었다.

1961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파병할 의사가 있음을 피력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적극적인 의사를 보였으나 미국은 거절했다. 하지만 존슨 대통령의 정책으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했고,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번디(William Bundy)가 한국 정부에 비전투부대에 국한된 파병 요청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64년 9월 한국 정부는 130명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남베트남에 파병하는 1차 파병을 추진했다.

이후 남한과 미국 사이의 파병은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1964년 12월 19일 브라운 대사는 박 대통령을 만나 존슨 대통령의 비전투 병력 파병 요청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1965년 3월 2,000명 규모의 공병대 등 비전투 병력을 '비둘기 부대' 명칭으로 파병했다.[6]

박정희 정부는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 전투부대도 파견하겠다는 제안도 한다.[7] 하지만 1964년 말 이전까지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의 확대를 꺼리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전투병 파견 제의는 마냥 좋지 않았다.[8] 베트남에서의 상황은 점점 악화했고, 미국은 급해짐과 함께 한국 정부의 전투부대 파견 제의에 대한 존슨 행정부의 생각도 변했다.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이승만 대통령이 파병 의사를 피력했을 때처럼 국가가 주한미군 어머니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할 틈은 없었다. 1965년 4월 1일과 2일에 열린 국가안보회의연석회에서 미국과 한국군은 15만 병력과 한국군 2만 1,000여 병력을 남베트남에 파병할 것을 결정한다.

1965년 5월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박정희를 미국으로 초청해 성대한 퍼레이드까지 해주는 등 둘 사이의 관계는 더 가까워졌다. 존슨은 당시 한국군의 전투병력 1개 사단을 파병해 줄 것 요청했다. 당시 한국은 태권도 교관단, 후방시설 건설을 위한 공병대 등 비전투병력은 이미 파견되어 임무 수행 중이었다. 린든 존슨은 1개 사단급의 병력을 우선 증파해달라고 한국에 요청하면서 주한미군과 한국군 유지와 감축 시 협의할 것을 약속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위한 특별지원까지 약속한다. [9]

한국 전투부대 파병은 미국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이 잘 맞물려 이루어진 정책 결정이었다. 한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원했고, 미국은 전쟁 지원을 원했다. 주목할 점은 1차 전투부대 파병 이후 미국은 지속해서 파병을 요청해 왔으며, 이러한 관계는 한국이 '갑'의 위치에 서 있을 수 있게 만들었고, 이득을 얻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3.2. 한미관계와 한국의 안보적 측면[편집]


한국 정부가 요구한 것은 단지 ‘돈’만은 아니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서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자동 개입 조항을 넣어줄 것, 주한미군의 주둔군 지위 협정을 맺어줄 것, 그리고 주한미군 감축을 중지해줄 것 등을 요청했다. 이는 1953년 정전협정 후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미국에 요구했던 숙원 사업이었다.

존슨 행정부의 대답은 자동 개입 조항은 불가, 주둔군 지위 협정은 필리핀 수준으로 가능, 주한미군 감축 시 한국 정부에 사전 협의 가능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더 이상의 양보를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미국의 대한 원조를 더 보상받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국 정부가 꺼낸 카드는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수출 물량을 늘려주는 것이었다.

한겨레, 파병군은 박정희에게 '알라딘의 램프'였나

이제는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베트남전에 투입된 병력과 전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쟁 중에 미국 행정부가 교체되면서 후임 국방장관이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미 행정부는 의회 승인 없이 유럽 주둔군 등 타 지역에 투입되어야 할 물자와 자금까지 베트남에 쏟아부었다. 한마디로 한가하게 한국 사정 봐 줄 시기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군 일부가 가지 않았다면, 미군이 더 많이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한번 빠져나간 병력이 다시 돌아온 적은 없었다. 즉 주한 미군의 베트남 이동을 막기 위해 한국이 선제적으로 파병을 미국에 제안했다고도 볼 수 있다.

파병하는 경우의 이점

1. 미국이 원하는 대로 무조건 순종하기 때문에 미국의 호감을 살 수 있음.

2. 월남 수호 문제를 한국의 국방과 결부시킬 수 있음. 만약에 미국이 월남을 포기하는 경우, 미국의 아세아전략에 변경을 초래하여 한국수호의 의욕이 감퇴될 우려가 있음.

3. 국내적으로 반공의식이 약화되고 반공구호가 실감을 잃고 있는 현재, 월남에 파병한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구체적인 적으로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국내적 단결과 반공의식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4. 파병은 아세아 반공국가의 결속에 박차를 가하게 될 것임.

'월남파병문제'에서 고려되어야 할 문제점

대통령비서실 문서, 보고번호 65, 제7호, 1964년 1월 6일, 박태균(2000: 47)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서 작성된 문서를 살펴보면 베트남 파병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의도는 미국과의 관계와 한국의 국방을 주로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 또한 3차 파병까지는 한국 정부의 파견 목적이 군사적 목적에 집중돼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10][11]

국내 여론 역시 비전투병 파견인 1차 파병 당시에 특히나 파병에 우호적이었고 베트남전에 대한 위기의식 또한 존재했다. 당시 베트남전에 대한 구호는 '월남 전선은 휴전선의 연장'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가 밀던 도미노 효과에 근거한 구호인데, '남베트남이 공산화되면 한국도 무사하지 못하다'라는 뜻과 '베트남전은 6.25전쟁의 평행적인 연장'이라는 두 가지 논리를 담고 있다.

베트남 공화국의 막장스러운 실상은 미국이나 한국 정부조차 알 수 없던 시절이었고 불과 10년 전에 6.25 전쟁을 겪은 한국 국민에게 이런 파병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당시의 남베트남 정부는 한국과 서로 대사관을 두고 반공을 표방하던 우방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 한국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남베트남인들을 북베트남 공산도당에게 핍박당하는 선량한 민주주의자로 보았다. 10여 년 전에 자신들 스스로가 북한에 당해봤으니 안 그러는 게 이상한 것. 따라서 "미국이 우리를 6.25 전쟁 때 도와줬으니 이제 우리도 미국을 도와주자" 또는 "이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를 공산주의자의 야욕으로부터 지켜주자!"라는 주장이 자연스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밑에서 서술하겠지만, 이후 파병이 이루어졌던 1970년대에는 국민들의 이데올로기적 반감에 의해서만 파병의 정당성을 가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단적인 예로 1차 파병 당시 파병동의안은 국회를 거쳤었는데 만장일치 로 통과되었다. 당시 여야 간에 비상계엄 해제가 합의됨에 따라 원래 험악했던 국회 분위기가 크게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민정당황인원은 자유우방의 월남이 공산 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지원하는 것이 당연하며, 6.25 전쟁 때 각국이 지원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소위 '의리론'이라고 불렸다.

3.3. 경제적 이해관계[편집]


한국이 이렇게 외교관계에서 미국에 대해 갑의 위치에 서게 된 덕분에, 1966년 3월 4일에는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한 협조에 관한 주한 미 대사 공한"을 통해 막대한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약속받기에 이른다. 해당 문서는 당시 한국 언론에서 통용되던 이름(https://mnews.joins.com/amparticle/1135147)으로 윈스럽 길먼 브라운 주한 미 대사의 이름을 딴 '브라운 각서(Brown Memorandum)'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문서는 사실 정부간 외교문서이긴 했지만 특정 조치들을 이행할 용의(用意)만을 대사를 통해 전달한 것인만큼 국제법적 구속력은 없었다. 하지만 공한이 문서로 남겨졌고 미국 대통령도 참전 대가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약속#한 만큼 미국 정부가 입을 씻을 수는 없었으며, 1970년 사이밍턴 청문회에 주한 미군 사령관 마이켈리스가 제출한 문서에 "The only plan to reinstate the MAP Transfer Program is that implied in the Brown Memorandum"이라고 쓰여있듯, 비록 시차가 있지만 'Brown Memorandum'이란 표현은 미국측 인사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즉 미국측 당사자들도 이행해야 할 약속을 담은 각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약속의 내용 중 군사원조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자면, 한국군이 전투병력을 파견하면 미국은 한국군 17개 주력사단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와 자금 지원을 한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추가로 전쟁특수로 미국은 한국에 여러 특혜들을 베풀었고, 참전한 한국군의 보급에 미국이 돈을 대주면서 한국에서 쓸 전쟁물자들을 한국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하면서 한국 산업도 활기를 띄었다.

3.4. 한국내 정치적 문제 고려[편집]


베트남 파병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세력이 미국의 지지를 획득해서 보장받기 위한 조치였다는 설이 있다. 1961년 11월, 5.16 군사정변 직후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원한다면 병력을 월남에 파병할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군이 월남에 파병되면 중국과 소련을 자극할 것이라 우려했기에 이를 거절했다. 대신 미국 정부는 경제원조를 약속하면서 사실상 군사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리고 1963년 국민의 직접 투표로 치뤄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파병하는 경우의 단점

(중략)

5. 월남에 파병했을 때, 결과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 못하거나, 또는 한국군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면, 국내정치상 문제가 초래될 것임.

'월남파병문제'에서 고려되어야 할 문제점

대통령비서실 문서, 보고번호 65, 제7호, 1964년 1월 6일


베트남 파병을 위한 장단점을 분석했을 때, 박정희는 월남에 파병 시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이 올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는 박정희 정부가 당시에 정치적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베트남 파병 정책을 실시했다는 주장이 다소 신뢰성이 떨어짐을 보여준다.

또한, 실제 파병이 이루어진 시점은 이미 박정희 정부가 선거를 통해서 출범한 이후이며 처음 파병당시 박정희 정부의 지지율은 70%에 달했기 때문에 정권의 정당성을 위한 파병이었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파병 자체도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정말 안할 수도 있었지만, 진짜 확전된 베트남의 전황과 함께, 처음에 파병을 제안했다 거절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린든 존슨이 확전을 결의하고 밀어붙인 만큼. 정권의 정당성이나 영속성이 아니라 박정희 본인이 미국에 빚을 지우기 위해 밀어붙였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실제로 수많은 기록에서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이나 지원단은 군사목적과 함께, 마치 해외 노동자처럼 전투수당이나 각종 현지 지급 수당을 한국에 송금하느라 휴가도 거의 못즐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어느정도는 상술한 국가적 수익사업과 함께 정치적인 이익을 얻기위한 파병이었던 것.

게다가 파병 말기에 미국의 반전여론 물결에 영향을 받은 여론 때문에 오히려 정권의 지지율에 해가 되는데도 남베트남과 대한민국의 유사성과 '베트남전선은 휴전선의 연장' 이라는 명분 때문에 끝까지 철수하지 않았다. 물론 파병말기의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지지율은 상관없는 정권이 되어 있었다


4. 북한의 외교 정책[편집]


베트남 전쟁은 냉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반도에서의 이념적 대립으로 인한 냉전이 계속되던 와중 베트남에서의 새로운 냉전 전선과 한국군의 파병은 북한으로써는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본 장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북한의 외교 정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다룬다.

4.1. 북한의 베트남 전쟁 파병[편집]


2000년 4월 13일, 연합뉴스 하노이 특파원 권쾌현 기자에 의해 베트남전 북한의 참전이 확인됐고, 베트남 정부가 이 기사에 대해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 사실을 시인하면서 베트남전 종전 25년 만에 북한의 참전이 확인됐다. [12]

북한의 군대 파병에 대한 정치적 명분은 냉전적 요소가 짙었다. 사회주의 나라들을 단결시키고, 미국의 힘을 약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김일성의 발언들로부터 확인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예로 김일성은 1997년 10월 19일 제203 군 부대를 찾아 비행사들에게 파병이 '숭고한 국제주의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북베트남은 당시 중소 갈등으로 인해 많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일성은 북한이 북베트남에 파병함으로써 사회주의권을 자극하고 단결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냉전적 요소 외에도 '북한과 북베트남의 친밀함'이 파병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양국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관계를 계속해서 발전해 왔었다.

하지만 북한의 정치적 명분만을 가지고 해외 파병을 하는 것은 타당치 않았다. 국제관계 속에서 '해외 파병', 그리고 특히 전투 병력 파병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하다. 따라서 북한도, 북베트남도 서로의 필요성이 대두돼야 했다. 이 필요성은 북한의 공군 전력과 북베트남의 공중전 상황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의 주전장은 남베트남지역이었지만, 미국은 1965년 3월부터 북베트남 지역에 공중폭격을 가하면서 북베트남 지역을 '공중전장'으로 만들었다. 북베트남은 이에 반격할 수 있는 공군력의 수준은 절대적 열세에 놓여있었다. 소련과 중국은 항공기만 지원할 뿐, 전쟁의 확전을 우려하며 조종사를 파병하지는 않았다. 소련 지도하에 조종사를 양성하고 있기는 했지만, 당장 싸울 수 있는 인력은 없었다. 반면 북한은 한국전쟁을 미리 겪으면서 공군이 형성됐었고, 이들의 전력을 소련과 중국의 지도하에 키우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높은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전력은 '양'적으로 높았지만 '질'적으로는 아직 낮은 수준이었지만 북한이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과의 실전경험이 있다는 점과 공군 전력이 높다는 점만으로도 북베트남에게는 매력적인 요소였다. 결국 북한과 북베트남은 공감대를 형성했고, 북베트남의 요청으로 북한은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파병에 대한 시기와 규모는 모두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구체적인 요소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연구조차 힘든 상황이다. 북한과 베트남이 2000년 이전까지 사실을 숨겼으며, 자료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탈북조종사들의 증언과 베트남 측 자료, 북한 측 자료가 상이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더더욱 힘든 상황이다.[13]

이외에도 북한의 베트남 전쟁 참전 의도는 다양하게 분석된다. 조선혁명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하고, 중소 분쟁 당시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구축하고 반미 공동투쟁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북한의 파병을 당시 급변하고 있는 세계 정세, 중소 분쟁 격화, 사회주의 진영 분열 심화, 한미일 삼각동맹 출현, 일본 군국주의 부활 등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껴 방어적인 대응책으로써 선택한 정책이라는 분석도 존재한다.[14] 대외적으로 2000년대까지 베트남 전쟁 참전 사실은 숨겼던 북한은 2000년대 이후로 참전 사실이 밝혀지자 이를 다시 숨기지 않고, 베트남과의 외교적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활용했다. 북한은 외부에 공개되기 전부터 대내적으로 베트남 전쟁광을 개설, 참전 조종사 강연 개최 등 참전 사실을 교육하기 시작하면서 선군정치의 '성공 사례'로서 활용했다고 알려졌다.[15]

4.2. 북한의 대남 침략 공세 강화[편집]



북한은 베트남 전쟁 당시 1.21 사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다소 과격한 대남 침략 공세를 진행했다.

조선혁명을 완수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북반부혁명력량을 강화하는것과 함께 반드시 남조선에서 강력한 혁명력량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중략) 남조선인민들은 결코 적들의 거짓선전에 속지 않을것이며 오늘의 사태를 보고만 있지 않을것입니다. 윁남전쟁이 오래가면 갈수록, 거기에 끌려가는 괴뢰군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남조선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미제와 박정희도당의 파병책동을 반대하는 세력이 점점 늘어날것입니다. 시간이 감에 따라 남조선인민들은 더욱더 각성될것이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원쑤들을 반대하는 혁명투쟁에 떨쳐나서게 될것입니다(김일성, 1983b: 245).


김일성은 베트남전쟁으로 남한 국민들이 반전/반정부 의식이 생겨 남조선혁명에 유리한 환경이 마련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각급 당 책임비서들에게 "남조선에서 혁명조직을 잘 꾸리고 선전 사업을 강화하여 남조선 인민들을 하루라도 더 빨리 각성"시키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1.21 사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이 일어나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다.[16] 북한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의도는 무력 적화통일 기도의 일환으로 파악하는 '한국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연구와 베트남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미국의 시각'으로 나뉜다. 연구에 의하면 '한국의 시각'이 더 타당한 분석으로 판단되고 있다. [17]

한편, 북한의 이러한 도발 중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대응 차이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 균열을 내기도 했다. 1.21 사태에 대해 존슨 대통령은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에는 적극적인 대응을 보였다. 이런 차별적인 대응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해 미국과의 동맹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도 '한국의 시각'과 '미국의 시각'을 찾아볼 수 있다.[18]


5. 파병 이후[편집]


본 장에서는 베트남 전쟁 파병을 돌아보며 주목할 점들에 대해 다룬다.


5.1. 전쟁 특수[편집]


베트남 전쟁은 한국에 '전쟁특수' 효과로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줬다.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에 진출해 눈부신 성장을 겪는다. 토목, 건설업 기업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졌는데, 대체로 해외에 주둔한 미군 기지와 관련된 공사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해외에서 많이 성장한 기업은 가장 대표적으로 현대건설이 있다. 현대건설은 지역 공사, 건설공사 등 건설 도급을 통해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총 1,95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둔다. 타이에도 발을 넓혀 고속도로 공사를 하는 등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며 엄청난 외화를 한국에 벌어다 줬다. 토목, 건설업 기업들은 대체로 1965년에 해외에 진출했고, 1968년에는 베트남, 타이, 일본, 미국에서 활동하며 계약액이 무려 2,570만 6,000달러에 이르게 된다.

토목, 건설업 이외에도 미국에 대한 수출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기업이 성장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계획으로 인한 경공업 중심의 수출이 주를 이뤘다. 대표적으로 신발, 의류, 합판, 가발이 있다. 이중 섬유 수출과 합판 수출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1969년에 대미 섬유 수출로만 1억 달러를 최초로 찍을 만큼 섬유 수출의 성장이 굉장했다. 또한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전, 한국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중화학공업을 포함할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때 한국 정부에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는 한국이 무기 산업을 중심으로 중공업 육성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아가 국방과학연구소, 무기개발위원회,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설립됐고, 외국에 전문가들이 파견돼 군수산업을 배워오는 등 한국 정부는 군수산업의 발전도 이룰 수 있었다.

월급 350 ~ 400 달러. 별도의 숙식비 180달러 포함해 총 530 ~ 580 달러의 월급

1966년 4월 13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술자 광고


외국 기업에서 종사하는 한국인 근로자들의 월급 송금도 전쟁특수의 역할을 똑똑히 했다. 당시에는 신문에 국내 종사자들보다 상당히 높은 월급의 기술자 광고가 실렸고, "베트남에서 1년만 일하면 한밑천은 거뜬히 마련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한국 사람들에게 베트남은 '꿈의 도시'였다. 기술자 파월의 경쟁률은 초기부터 10:1을 보일 만큼 뜨거웠다. 그렇게 외국계 기업에 취직해 활동하는 기술자와 근로자들의 수가 매년 1만 명이 넘었고, 한국에 월급을 송금했다. 또한 미군으로부터 받는 파병한국군들도 전투 수당을 본국에 송금했다. 파병 군인의 군납과 기술자 송금을 합산할 경우 대베트남 경제활동 수익의 39.1%에 해당하는 정도의 규모이다. [19]

한편, 한국이 '직접 번' 외화 외에는 미국의 군사 원조가 경제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전쟁특수는 다양한 경로로 한국 경제의 지대한 발전 원천이 됐다. [20]

5.2. 군인과 노동자들의 희생[편집]


베트남 전쟁은 대한민국이 도약할 수 있었던 사건이지만, 눈부신 성장에 가려진 어두운 사실들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군인과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가 있다. 이들은 낮은 임금과 불리한 상황,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현실을 생각하며 묵묵히 그들의 일을 했고, 한국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부적절한 대우는 '한국계 회사'에서 많이 나타났다. 외국계 회사에 취직한 사람들은 조건이 괜찮았던 반면, 당시 베트남에 위치한 한국계 회사에서의 노동 모습은 당시 한국의 노동과 비슷한 양상을 가져갔다. 장비는 24시간 운용됐고, 1일 12시간 맞교대로 일을 했으며 휴일은 없었다. 신문에서는 높은 임금을 홍보했지만, 이는 모두 외국계 회사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외국계 회사와 한국계 회사의 임금 차이는 컸다. 특히 초과근무수당을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한진'은 초과근무수당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베트남 진출 회사 중 300달러라는 가장 낮은 임금을 지급했다. 외국계 회사인 PA&E의 임금은 868달러인 것과 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근무 환경 또한 열악했다. 기술자 파월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즈음에는 건물이 없어서 군용처막에서 생활했으며 시간이 흐르자, 목조 막사에서 생활하게 됐다.

68년 1월 15일부로 제대 명령이 났어요. 그래서 제대해가지고 근무를

하는데 참 분위기 험악해요. 전장이니까 민간인이라도 철모를 쓰고, 방탄조끼를 입고, M1 소총을 옆에다 놓고, 실탄을 240발 옆에다 놓고 이렇게 운전해요. … 운송 중에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죽기도 하고 별짓 다하더라고. … 민간인이라도 … 완전히 군인이요(문정환 구술).

한진의 경우, 미군 측의 군수 보급물자를 수송하는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이는 북베트남의 우선적인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했고,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하나의 '전장'이기도 했다. 불가피한 기술자들의 희생도 잇따랐다. 1966년에는 사망 3명, 중상 5명이라는 인명피해를 낳았고, 1969년 초까지 16명의 희생자도 발생했다.

“내가 여기 돈 벌러 왔으니까, 죽지 않으면 돈을 벌 거다. …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생각하고 꾸준히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견디고” (문정환 구술)


하지만 근로자들은 열악하고 위험한, 고도의 긴장을 요구하는 환경 속에서도 절박한 현실을 생각하며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버텨냈다. 한편, 근로자들은 저항이나 쟁의에 대해 '침묵할 수 있는 교육'을 받기도 했다. 한진 측에서는 파월 기술자들을 선발한 후 해외개발공사에서 주관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실시하는 소양 교육을 받게 했다. 이는 정부와 한진 측이 함께 베트남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저항과 쟁의를 봉쇄하기 위한 교육으로, 노조 운영 금지 / 친목 단체 운영 금지 등을 교육했으며 불만 사항은 귀국 후에 해결해 주겠다고 얘기하며 베트남에서의 불만 야기를 철저히 막았다. 노동계약 또한 불공정하게 이뤄졌다. 근로자들은 출국 전날에 근로계약을 체결하거나 공항에서 도장을 찍어야 했다. 이는 당사자가 근로 계약서를 검토할 시간이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근로 계약서는 예상할 수 있듯이 파월자들에게 불리한 조항들로 구성됐다. 예를 들어 회사가 기술자들을 마음대로 귀국 조치시킬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근로자들은 한진을 상대로 최초 노사분규를 벌였지만, 상황이 개선됨과 함께 노사분규를 주동한 사람들은 해고돼 귀국 조처됐다. 결국 근로자들은 회사를 상대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149억 원에 해당하는 임금이 4,000명의 기술자, 근로자들에게 지급되지 않았고, 억눌렸던 감정은 끝내 폭발해 미불임금에 대한 투쟁인 'KAL 빌딩 방화 사건'[21]에서 드러나게 되며, 노동자들은 정부-자본 결탁에 대해 대항하게 된다. [22] KAL 빌딩 농성자들 13명은 징역 1~5년을 받았으나 한진 쪽은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베트남 특수로 인해 10대 재벌은 개편됐고, 한진은 1975년대 10대 재벌로써 새롭게 등장했다. 한진의 성장에는 근로자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이들에 대한 대우는 적절하지 않았다. 베트남 특수는 노동자들의 희생과 침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술자들뿐 아니라 군인에 대한 대우도 적절하지 않았다. 파병 군인들의 월급과 전투수당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가장 많이 파병돼 전쟁에 직접적 참여를 한 하사관과 사병들은 38~125달러의 전투 수당을 받았고, 월급 또한 준장이 177달러, 이병이 1달러였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파병 군인을 보냈지만, 타국가(남베트남, 타이, 필리핀)군보다도 낮은 수준의 전투 수당을 받았다.[23] 가정에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해 파병 왔던 군인들은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 상황으로 인해 현지에서 전혀 돈을 쓸 수 없었고, 대다수의 돈을 본국(한국)에 송금해야 했다. 이들은 죽거나 다쳐도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전사자들은 1인당 평균 60만 2,300원이 지급됐고 부상자는 1인당 평균 44만원[24]이 지급됐다.

전쟁은 군인들에게 반영구적인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남긴다. 군인들은 베트남에서 미군 비행기가 뿌리는 고엽제를 맞았고, 베트콩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아 민간인도 죽일 수밖에 없었고, 아군에게 총기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의 국민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베트남에 파병됐고, 실명, 신경 마비, 양팔 절단 등의 장애나 외상후 스트레스 같은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으면서 국가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기술자들과 군인들은 나라를 지켰다. 나라는 이들을 지켜줬는가? 미국, 호주, 뉴질랜드의 참전 군인들은 고엽제 제조회사로부터 보상금을 받았지만, 고엽제 피해를 입은 한국군들은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 부상자들을 위한 '새마을'이라는 자영활농을 할 수 있는 전상자촌을 만들어줬지만, 이들은 신체적 피해로 노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기술자들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저항했으나, 정부와 기업은 같은 마음으로 이들을 제압했다.[25]

5.3. 파병을 위한 설계[편집]


베트남 파병은 '사회적 동의'가 필요했다. 당시 한국은 스스로 안보를 지키지 못해서 미군이 주둔해 있던 상황이었는데, 다른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는 것을 국민들이 동의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1960년대 1차 파병 당시에는 한국 전쟁으로 인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퍼져있던 때라 쉬운 편이었지만, 1970년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특히나 베트남은 한국과 인접한 국가도 아니어서 한국 안보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고, 국민들의 파병 동기는 부족한 상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 국민적 동원 체제'를 만들어 모든 국민들이 함께 동원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정부는 파월장병지원위원회를 설치해 적극적으로 파병을 홍보하고 지원했다. 위문사업도 적극적으로 진행됐다. 위문편지를 위한 엽서를 비싼 가격에 판매하고 학교에서 성금을 걷었다. 파병을 장려하기 위한 여러 운동도 진행됐다. 파월장병 환송국민대회, 파월개선장병 환영국민대회, 파월교체장병 황송영행사를 개최하고 파월 장병 가족, 부상병들을 대상으로 한 봉사 활동들도 열렸다. 연예인 공연단 파견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정부는 전투 파병으로 인해 생긴 군대 공백을 채워야 했다. 한국 전쟁의 영향으로 당시 입영 대상자들이 상대적으로 적기도 했다. 또한, '파병'은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국방부는 스물한 살 이상 서른 살 이하의 청년들에 대해 징병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1967년부터 징병 기피자들을 모두 형사고발 해 입영시켰다. 1968년에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징집을 철저히 진행했다. 스물네 살 이상의 학생들과 장기 휴학자들을 대상으로 징집영장을 발부시켰고, 제대한 예비역을 재입대 시키기도 했다. 예비군도 창설됐다. 이는 언제나 병역의무를 마친 예비역들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군대에 동원할 수 있는 특정 세대들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자 전 국민에 대한 통제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주민등록법을 강화했다. 이러한 사회 통제 시스템은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에 대한 반대를 철저히 통제하고, 유신 체제를 선포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되기도 했다. [26]

6. 주월한국군의 파병 근거 및 지위[편집]



6.1. 파병의 법적 근거[편집]


2차 파병부터 정규군이 파견되기로 결정되면서 당시 47회 임시국회에서는 1차 때와 달리 파병동의안 통과를 두고 여야간 이견이 발생했다. 정규군이 파견되는 것은 향후 국제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또한 원래 헌법 제1장 총강 6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는 것으로, 국군의 임무는 국토방위에 한정되어있었다. 이 부분은 베트남전 파병을 염두에 둬 1963년 박정희 정부의 개헌 당시 헌법 4조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불인한다"는 내용으로 고쳐졌다. 이부분은 헌법 개정시 공론화 및 토론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2차 파병당시 헌법이 개정되었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국회의원들도 많았다!

하지만 개정된 헌법 4조의 내용만으로 국군을 파병할 법적 근거가 되는지 문제제기가 이루어졌었다. 법적 근거 외에도 야당의원들은 미국의 대베트남정책이 모호하며 일관성이 없고 명확한 목표가 부재하다는 점, 그리고 남베트남 정부가 쿠데타로 정권이 계속 바뀌어 매우 불안정한 점 등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다.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종결되었는지 아는 현 시점에서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적들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서 파병을 위한 국제법적 근거 역시 문제가 되었다. 당시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을 실시할 조약 또는 집단안보기구 등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제네바 휴전협정의 위반 가능성도 존재했다.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은 야당 의원뿐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역시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2차 파병 논의 당시 양달승 대통령 정무비서관이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한국이 남베트남과 군사협정을 맺지도 않았고 한국군 파병은 유엔 또는 집단방위기구인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27] 등을 통한 조치도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었다.[28] 이렇듯 한국군 파병에 관련하여 국내 및 국제법적 근거는 뚜렷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규군의 파견은 꽤 부담스러울 수 있었고, 파병 초기 단계에서는 의용군의 형태로 파견되는 것이 고려되기도 했다.

다만 파병 자체에 관해 당시만해도 국민여론은 나쁘지 않았고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 성과 및 미국의 경제 원조안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법적 근거와 문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버렸고 묻혀버렸다.


6.2. 주둔군 지위[편집]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본격화되면서 한국정부는 남베트남 및 미국과 파병에 관련된 각종 협정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베트남에 주둔중인 미군, 호주훈련단, 뉴질랜드군은 남베트남과 협정에 따라 심지어 치외법권을 비롯한 외교관에 준하는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한국 측은 주월한국군 역시 같은 지위를 부여받길 원했다. 남베트남 측은 좀 난감해했지만 결국 1964년 10월 31일, "주월한국원조단의 지위에 관한 협정"을 통해 주월한국군을 남베트남에서 외교사절단으로 간주하기로 합의되었다. 한국군의 이같은 지위는 1973년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할때까지 적용되었다. 오늘날 UN 평화유지군이나 다국적군 구성시에도 이런 대우를 항상 보장받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조치라 할 수 있겠다.[29]



7. 파병 부대[편집]


파병 전 준비과정으로 강원도 화천군 소재 오음리에 훈련장을 만들어 파병부대의 사전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이 훈련장은 오늘날까지 일부 시설이 보존되어서 기념 시설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파월 직전 이곳으로 찾아와 면회를 신청한 가족, 친지, 연인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공식 환송행사에서 파월장병이 가족을 만날 시간이 보장되기 어려울 뿐더러 심리적으로 흔들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오음리 훈련장은 부대 역사가 직접 연결되지 않으나 사실상 현재의 KCTC의 전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베트남전 총사령부 주월한국군사령부
  •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 (파견 특전사 요원 포함)
  • 수도사단 맹호부대 (파견 특전사 요원 포함)
  • 건설지원단 비둘기부대
  •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
  • 해군수송전대 백구부대 (파견 UDT/SEAL, SSU 요원 포함)
  • 공군 제55항공수송단 은마부대
  • 제100군수사령부 십자성부대
육군의 파병부대중 백마와 맹호에는 '백마공수특전대' 혹은 '공수지구대'라는 이름으로 특전사 요원들이 예속되어 작전에 참가했었고, 해군의 백구부대에도 함정경비 및 수로탐색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UDT/SEAL 대원들과 SSU 대원들이 파견되어 작전에 참가했다. 특히 백구부대의 UDT대원들은 메콩 델타 수색작전에도 참가했었다고 한다.


군가 - 맹호들은 간다. 가수 마야가 부른 버전도 있다.


군가 - 우리는 청룡이다(청룡은 간다)


군가 - 백구부대가. 군가만 나오는것이 아닌 당시 백구부대의 모습과 활동상도 같이 나온다.


8. 주요 전투 기록[편집]


경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 백마부대 28연대 3대대 11중대가 베트콩의 매복에 중대전술기지가 뚫릴 뻔한 아찔한 상황이였다. 당시 경계를 맡은 병장이 조는 바람에 베트콩이 쉽게 진입했고, 다행히 기지를 사수했지만 많은 중대원들이 전사하고 부상을 입었다. 오작교 작전 중에 일어난 일이다. 짜빈박 전투와 비슷하게 국방부에서 오작교 작전의 성공 선전과 함께 묻어가는 식이었지만 참전용사들의 수기로 밝혀졌다.
위 문단에 서술된 십자성부대가 실시한 작전이 아니다. 십자성부대는 파월사령부의 군수지원부대였으며 이 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해군의 상륙함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해군에 직접 하달한 명령에 따라 패망한 남베트남 내 잔류교민과 대사관 인원에 대한 구출작전으로 미군의 프리퀀트 윈드 작전과 관련이 있다. 주월한국군 사령부가 철수한 후 LST 계봉함, 북한함이 투입된 작전이며 구출 대상인 현지 교민들을 포함하여 일부 현지 난민들까지 함께 탈출하여 작전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으나 시기상의 문제 때문에 당시 참전한 해군 장병들이 다른 참전군인과 같은 보훈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기사프리퀀트 윈드 작전 문서 참조.

9. 인명 피해[편집]


중복으로 파병된 병력을 포함해 1964년 9월에서 1973년 3월 철수시까지 약 9년간에 걸쳐 비전투 병력까지 포함하여 한국군이 투입한 병력은 총 346,393명이다. 이중에서 육군이 304,760명이다. 전쟁 기간동안 약 5만 명(육군이 4만 명 가량) 정도의 군대 규모를 유지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 전사자 및 사망자(순직자, 변사자, 자살자 및 행방불명자 포함)는 공식전사에 따르면 5,099명이다. 이 중 일부가 실제로는 포로인데 전사자로 처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중 전사자가 4,663명이며 사망자 외에 1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의 추산에 따르면 주월한국군의 전사율은 참전한 총병력의 1.4%에 해당되며 미군의 경우에는 전사율은 2.3%에 달했다고 언급했다. [30]

인명손실 중 육군이 전사자 및 사망자 3,859명으로 손실률은 1.2% 정도인데 반해 해병대는 손실이 1,240명으로 3.4%에 달한다.[31] 육군 병력은 비전투병력(비둘기부대같은 전투근무지원부대) 비율이 높았던 것을 고려해야하지만 청룡부대의 병력손실률은 맹호, 백마 사단이나 미군보다도 높았다. 해병대는 중부지역으로 작전지역을 이동하며 작전 빈도가 잦았기 때문으로 연유된다.


10. 전과[편집]


파월 한국군은 적군 시체가 아닌 적군의 무기, 또는 보급품 노획을 통하여 전과를 확인하고 인정받았다. 이는 소수의 시체를 여러 번 돌려 사진 찍어서 실적을 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미군이나 남베트남군 등에서 종종 있었던, 민간인이나 신원불명자 등의 시체를 끌고 와서는 전과로 보고하는 사태를 막으려 했던 의도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참전 용사들은 적군의 귀나 손가락 등을 잘라왔다고 증언하기도 하나, 공식적으로는 적군 사살 사진과 무기 두 가지로만 확인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암시장에서 무기를 돈 주고 사와서는 적군 사살로 얻은 것으로 보고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부이며, 한국군이나 미군 헌병도 바보는 아닌지라 엄중히 조사했기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게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개망신이라 쉬쉬하면서 처벌했다고. 김형배의 베트남전 만화 '황색 탄환'에서도 이 소재를 다룬 바 있다. 사실 전과 기록은 기록으로서의 가치로도, 군전략 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느 지역의 어느 적군이 전투로 얼마만큼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는 자료는 훗날 군사전략을 짜는데 큰 정보가 될 뿐더러 작전 수행에 있어 문제점은 없었는지 등등을 남길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그러다 무기 노획으로 바뀌었는데 당시 참전 용사들의 수기집을 보면 떨어져 있는 총을 줍기 위해 "저기 훈장이 떨어져 있다!"라며 무모한 짓 하다가 다치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즉 이 당시에는 적을 사살하는 게 아니라 총기를 노획해야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베트콩은 총기 부족으로 반드시 전사자의 총을 들고 갔기 때문에 총기 노획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베트콩들은 총기 부족으로 총 없이 예비로 따라 다니는 병력들도 있었고, 특히 베트콩 4~5명 마다 여자 베트콩 1명이 따라 붙어 빨래, 세탁 등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에겐 총이 없었다. 결국 노획 총기를 통한 전과 확인이 기존의 시신을 통한 확인보다 그 기준이 매우 엄격해졌다.

한국군은 이 전쟁에서 5천 99명이 전사하였는데 베트남 전쟁이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는 점과 베트남으로 파병된 한국군의 총인원이 32만 명 정도임을 감안해볼 때 한국군이 입은 피해는 아주 크지는 않지만 6.25 전쟁 때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했던 연합군들이 그랬듯이 5천여명의 청년들이 타국에서 남베트남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11.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편집]


이미 일어난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파병된 만큼 파월 한국군을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11.1. 베트남전 발발 당시의 평가[편집]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는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려는 베트남 민족과 외세(프랑스, 미국 등)의 대결로 보는 구도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대한민국의 좌파 인사들'이 제기한 관점이다. 애초에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가 변화된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베트남을 계속 식민지로 유지하려다가 시작된 것이고, 남베트남은 사실상 프랑스가 만든 괴뢰국가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의 패배로 베트남을 포기하고 떠난 뒤 남북 간에 합의된 1956년 남북통일총선거를 남베트남 정권이 차일피일 거부한다. UN이 주최한 총선거를 남베트남이 거부했기때문에 유엔의 개입 명분이 없어졌고 결국 베트남전쟁에선 유엔군을 파병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베트남의 입지가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 관점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은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내전이며, 미국의 개입은 당연히 명분이 없다.

베트남처럼 식민지였다가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제3세계 신생국들은 당연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들을 포기한 서유럽 국가들에도 이런 관점에 동조하는 정치세력들이 상당수 존재하였다. 때문에 UN의 승인과 대다수 서유럽 국가들이 미국을 따라 참전한 한국전쟁과는 달리 미국은 베트남전에는 자신들의 서유럽 동맹국들을 참전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둘째는 공산 북베트남자유 남베트남의 대결로 보는 것으로, 당연히 남베트남과 미국, 프랑스, '대한민국의 우파 인사들'이 강력하게 제기한 관점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은 반공을 외치면서 전 세계 각지에서 공산주의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무조건 적대시 하였다.이 때문에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하고 베트남을 포기하자,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북베트남은 같은 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침략국이고, 미국의 개입은 자유 진영을 수호하고 아시아 공산화를 막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다.

실제 베트남 전역이 북베트남으로 통일된 이후, 인접국인 라오스캄보디아도 공산화되었기에 도미노 이론이 맞아 떨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물론 미국의 개입에 대해 잘못된 방향으로 도미노 현상을 부채질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11.2. 현대의 평가[편집]


베트남전 자체가 워낙에 복잡한 전쟁이기에 평가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방증하듯 베트남전에서는 그 어떤 국가도 일방적으로 침략국으로 규정받지 않았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이 베트남의 혼란한 상황에 충분한 지정학적, 역사적 검토 없이 이념논리로 개입을 결정한 것은 실책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은 북베트남이 중국과 프랑스를 경계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북베트남을 포섭하기보다 배척하기만 하였다. 또한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맹목적으로 믿고 갈등의 외교적 해결보다는 군사적 해결을 선호하였다. 미행정부가 어떤 의사결정과정을 거쳐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는지는 데이비드 헬버스템 저 '최고의 인재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기에 베트남전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평가는 '냉전 체제의 대리전으로 빚어진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남북 베트남 국민, 미군, 한국군을 포함한 동맹군이 사망했으며 그 후유증은 부분적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월남 파병에 대한 평가 또한 가해자는 당연히 아니지만 불합리했던 국제정치사의 한 장, 그 중에서 최고조로 모순이 넘쳐났던 냉전시대에 일어난 일이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12. 파월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편집]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보급과 수당 면에서 미군은 물론이고 다른 참전 연합국에 비해서도 좋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당시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파병 수당을 책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9대 1을 쌈싸먹는 25대 1의 사상자 교환 비율을 비롯하여 파병 한국군의 전과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전쟁 후반기의 작전에는 100대의 1의 교환비를 보여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참전 정글전 베테랑들로 이루어진 파월 호주군의 전과에 근접한 수준이다.[32]

실제로 베트콩 및 북베트남 내부에서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경우 절대로 한국군과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식의 명령을 내린 정황도 꽤 되며 한국군의 용맹함은 동맹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다. 장비나 신체조건 상으로 보면 미군보다 활약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도리어 정반대 결과가 나왔기 때문.

한국군보다 높은 교환비를 보인 이들은 최정예 중 최정예만 엄선해서 보낸 ANZAC이나 미군 특수부대인 그린베레네이비 씰, 그리고 이들을 주축으로 한 블랙옵스인 MACV-SOG 같은 최고급병력 뿐이다. 네이비 씰의 경우, 베트남 전쟁에서 제 1중대와 제 2중대의 경우, 평균 1대 200이라는 교환비를 냈다.출처.

한국군이 잘 싸운 이유로는 첫째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 교대할 병력을 보낼 때 전투력 최우수자를 우선적으로 뽑는 식으로 철저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이고, 둘째로 사령관 채명신 장군부터 해방 이후 6.25 전쟁, 그리고 전쟁 후에도 오랜 기간 이어온 공산군 잔당인 빨치산 토벌 등의 전훈으로 당시 미군은 거의 경험이 없던 정글, 산악지형의 게릴라를 상대하는 법을 아주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미군이 화력은 대신 해줄순 있어도 베트콩들과 직접 맞닥뜨려 전략적 승리를 하기 위해선 게릴라전 대응이 필요했는데 당시 한국군은 그 실전경험이 충분했던 것.

게릴라는 민심을 얻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만큼 대게릴라전에서도 민심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것도 한국은 6.25의 경험을 통해 선례로 배운것이다. 한국군은 민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대민작전과 지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한국군은 참전기간 중 대민진료 352만 3,364명, 식량 1만 9,640톤, 의류 46만 1,764점,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 태권도 보급 90만 2,060명, 경로잔치 및 어린이잔치 6,848회, 연예공연 2,304회 등 대민사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한국군이 전투력보다 민사작전능력이 더 널리 알려질 정도가 되었으니, 한국군이 베트콩을 상대로 전공이 높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혹자는 한국이 베트남과 똑같이 농사문화권이라서 베트남의 농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한국군의 적지 않은 수가 농사짓던 청년이었다는 점도 대민작전 하기가 쉬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군은 지금도 해외 파병시에 현지주민 진료, 대민지원사업을 우선시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민사작전은 유엔에서도 인정받고 있고 현재 민사작전에서는 세계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군은 원래 구식 무기인 M1 개런드를 들고 있었으나 채명신 장군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한 끝에 미군이 막 보급받던 M16 소총을 약간 받아온 것을 시작으로 몇 년이 지나고 나서는 전군이 M16 등의 신예 미군 병기로 무장하였다. 따라서 병사 개개인의 화력에서도 미군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령관의 제대로 된 지휘 덕에 지구방위대 미군보다도 오히려 더 잘 싸우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초창기에는 미군의 헬리콥터나 포병지원을 잘 안 해준 데다 한국군에게 주둔지역을 넘기고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나와서 꽤 어려움을 겪은 면이 있다. 이는 채명신 장군과 미군이 한국군의 소속 문제와 작전권 문제로 크게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채명신 장군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한국군이 미군의 예하 병력으로 들어가버리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소속과 작전권 문제를 절대 미군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전쟁 초창기, 해병 청룡부대의 첫 대규모 작전 "청룡 1호" 작전이나 맹호부대의 "비호 6호" 작전은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이 었다. 물론 후반부 대규모 작전도 한국군의 단독 지휘와 한국군 위주 작전이었지만 미군 헬리콥터 지원은 기본이었다. "청룡 1호" 작전은 투이호아의 혼바산 등의 험난한 산악전을 벌여야 했고 고지나 산 속에 숨어있는 베트콩 기지들을 산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두자 미군들이 대대적으로 지원을 해주기 시작한다. 후반 작전들에서는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의 헬리콥터를 타고 고지에 투입된 병력이 함께 앞뒤에서 적을 포위시켜 섬멸하면서 더욱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주월 한국군은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 등의 임무가 많았다. 따라서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부수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게릴라 소탕이라고 하는 게 헬기로 공중강습하고, 미군의 빵빵한 화력지원에다가 포위망도 갖춘 정교하고 대대적인 작전인 데다가 영내수비란 것도 따지고 보면 두코 전투짜빈동 전투처럼 스케일이 크기도 하다.

또한 본래 점령전이 아닌 베트남에서는 사방이 베트콩으로 둘러싸인 전장 환경(지상전 한정)상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가 주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특수부대의 월경 작전도 따지고 보면 정규전을 치르려는 게 아니라 게릴라 활동을 차단하려고 하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구정 공세도 게릴라전의 스케일이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고, 케산 전투도 영내수비가 엄청나게 큰 판으로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군은 베트콩 이외에도 두코 전투, 안케패스 전투나 짜빈동 전투 등 월맹 정규군과 여러 차례 교전한 끝에 전과를 올림으로써 실제 정규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냈다. 그 외에도 주월 한국군은 독수리 70-1호 작전, 독수리 71-1호 작전, 백호 9~12호 작전, 홍길동 작전 등 월맹 정규군과 주월 한국군이 전투를 치른 사례가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짜빈동 전투'는 국군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라 할 수 있다. # 안케패스 전투의 경우는 베트남군을 다시 쫓아내기는 했지만 짜빈동 전투의 승리 방식을 그대로 돌려받은 졸전의 사례에 가깝다.

따라서 당시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환경 속에서 충분히 자기 가치를 드러냈다고 보면 되겠다. 비록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실제로 그 지원을 토대로 승전을 거두었지만 어디까지나 전투를 치르는 주체는 한국군이었던 것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에서의 무용담은 군사정권하에서 과장 및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측에서는 주로 베트남전을 시찰한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이 주월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에게 보낸 해병대 청룡부대(2여단)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그 근거로 드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한민국 해병대는 주요 전투에서 베트콩 등 적들에 대한 주요 군사행동을 주도적으로 취하기를 꺼렸으며 미군과 제대로 된 작전연계를 펼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특히 이 평가는 한국 해병대에서 같이 근무한 많은 미해병대원들이 반박했는데, 특히나 ANGLICO(미해병 항공함포 연락반)대원들은 한국 해병대 중대에 배속되어 같이 생활했으며 "처음에는 언어 장벽으로 대화가 힘들었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를 믿게 되었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이다."라고 증언할 정도였다. Thomas Petri 나 Scott Leis 등 대원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 청룡부대원들과의 생활을 책으로 출간했다.

다만, 당시 주월 한국군이 채택했던 중대전술기지의 교리 자체가 극단적으로 공세적 군사행위를 배척하는 특성을 보이므로 완전히 이해 못할 사안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당장 제안자였던 채명신 장군 이외에는 아무도, 심지어 같은 한국군 장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 나온다.

* 민간인 학살과 포로학살이 빈번하였으며 베트남 농민은 베트콩보다 한국군을 더 두려워하였다.

* 암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거나 물건을 훔치고 현지를 약탈하는 등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였다.

보다시피 제임스 맥은 한국군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에 대해 채명신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다만, 암시장에서의 부정행위는 일부 인정했다.

* 베트남전의 성격 규정에서부터 한국군에 독자적인 작전권 행사를 허용할지 여부 등 크고 작은 문제를 두고 주월미군과 주월한국군 사이에는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 미군이 아시아문화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 게릴라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나중에는 한국군이 채택했던 전술개념 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 해병대의 경우 적극적인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오히려 참전 초기 성급하게 공격에 치중한 나머지 베트콩들의 매복이나 기습공격에 다수가 사망한 사건 등을 허위보고하는 사례도 발견돼 3명 이상의 적군을 추격할 때는 사령관의 허가를 받으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려야 할 정도였다.

또한 제임스 맥의 평가는 해병 2여단 중 꽝남 성 이남 지역의 해병대에 대해서만 평가하고 있는 것이므로 모든 한국군이 이렇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 외의 미국 자료들은 대체로 한국군의 군사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33]

또한 제임스 맥은 외교 고문관이자 민간인이지 군사 고문관이 아니었다. 오히려 군사 고문관들은 한국 해병대가 적극적이면 너무 적극적이지 절대로 소극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암시장과 비리에 관한 관한 문제는 무기를 팔아먹는 것보다는 빈약한 지원 때문에 더 사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군수부대에서 근무한 한국군과 미군 참전용사들에 따르면 초반에 M16 소총을 보급받지 않고 빈약한 M1 개런드나 카빈 소총을 받은 한국군은 암시장에서 몰래 무기를 사오는 경우도 있었고, 신형 소총을 더 보급받기 위해 다른 부대에 빼돌려 버리고 전부 손실했다고 거짓말을 한 뒤 보급을 더 받은 일화도 유명하다.

또한 M113 장갑차도 비슷한 방법으로 보급을 더 받았으며 결국 국내로 밀수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쓰라고 미국이 공여한 무기들을 몰래 빼내 국내로 밀수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미군이 국군의 물자 이동을 감시했다는 말은 전형적인 인터넷 카더라고 M113 항목과 한국군 방산무기 수입사에서 언급되어 있다.

실제로는 그 400여 대는 본토의 국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 측에서 정식 지원해 준 것이다. 더구다나 밀수했다는 장비들 역시 미국 측에서 대부분 수량을 파악하였으며, M113와 마찬가지로 국군에게 공여된 장비 물량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적었다고 한다.

어차피 한국군은 본 전쟁에서 베트콩을 주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무기를 팔아먹으면 바로 적의 손에 들어가는데 개인이 무기를 팔 이유도 없었고 부대단위로 신형 무기를 다 팔아버리는 막장스러운 사태도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가뜩이나 군기와 구타가 심한 1960년대 군대에 군인이 전쟁터에서 무기를 팔아버리면/잃어버리면 끝장인 걸 모를 수가 없다.

다만 씨레이션이나 텔레비전, 냉장고 등 남은 것들을 군사들이 빼돌리거나 암시장에서 구입하여 집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6.25 전쟁 이후에 한국에서 미군 생필 군수물품들이 암시장에서 팔린 것과 비슷하게 베트남 암시장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팔렸다. 엄밀히 말해서는 불법이 맞지만 베트콩들에게 무기를 팔아먹는 미친 짓은 아니다, 그리고 당시 얼마나 한국이 가난했는지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사상자 비율이 1:24로 미국의 1:9보다 크게 앞선다는 것 역시 미국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The ROKs very much favored small unit operations, aggressive offensive raids on isolated targets, offensive ambushes, especially at night, and, because of their martial arts expertise, they felt they had a distinct advantage in close hand-to-hand combat, which was most certainly true.

한국군은 소부대 작전과 고립된 표적에 대한 호전적인 공세적 습격, 공세적 매복, 특히 야간매복을 매우 선호했다. 무술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백병전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이는 명백히 사실이었다.

They appeared to have a natural nose for picking up enemy weapons that were, as far as the enemy thought, securely cached away. Considered opinion was that it was good the Koreans were "friendlies."

베트콩이 안전하게 숨겨놓았다고 생각한 무기들을 찾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한국군이 동맹군이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의견이 주류였다.

An analysis of the over-all Korean contribution to the pacification program leads to the conclusion that Korean combat forces had their greatest success with small unit civic action projects and security operations within their Korean tactical area of responsibility. Complete success eluded the Koreans, however, because of their insufficient coordination and co-operation, and the initial impression they made in dealing with the Vietnamese.

한국군의 담당 지역 안정화 작업을 전체적으로 분석하면 한국군은 작전 담당 지역에서의 소규모 대민지원 및 보안 작전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다만 한국군의 성과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이는 한국군의 내부조율 및 외부협력이 부족했던 점과, 현지인들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제임스 맥이 그렇게 폄하하는 해병대가 바로 1:24 사상자 비율의 주인공이다. #

During Operation VAN BUREN, one the Korean platoons of about 13 Marines wipes out an elite North Vietnamese Army (NVA) regiment. There are only two Koreans dead and more than 400 NVA soldiers dead. The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 boasts a kill ratio of 24 to 1 in the Vietnam War.

Van Buren 작전 중 한국군 소대들 중 약 하나인 약 13명의 한국 해병들로 구성된 소대가 정예 월맹군 연대를 섬멸했다. 해병들은 2명을 잃었지만 400명 이상의 월맹군 사상자가 났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24 사상자 비율을 자랑했다.


전쟁 후반기의 작전에는 100대의 1의 교환비를 보여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제국군과 정글에서 싸운 호주의 베트남 파병병력의 전과에 근접한 수준이다. [34]

그리고 이런 평가들이 과장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 오히려 한국군 전투부대는 미군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특히 미군 전투부대원들과 같이 작전을 펼친 적이 많았다. 청룡부대의 경우 여단 규모라 담당지역을 이동하는 편이었다.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서 베트콩을 소탕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싸웠다. '깜란, 투이호아, 추라이, 호이안'. 그리고 평정 후 맹호부대나 백마부대에게 인계되는 식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푸옌성과 칸호아성은 청룡부대가 이동 후 백마부대의 담당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지원이 많이 필요했고 그 지원을 미군에서 받았다. 그러므로 합동작전뿐만 아니라 개개인 전투병들과의 교류도 많았으며, 그들에게서 명성도 아주 높은 편이었다.

특히 미 해병대 항공함포연락반(ANGLICO) 인원들이 청룡부대 전투부대 중대마다 배속되어 수많은 교전을 같이 겪었고 짜빈동 전투에도 ANGLICO 미해병들이 두 명이나 같이 있었다. 이들이 한국군 해병대와의 경험을 해외 베테랑 커뮤니티에 알렸고 대부분 월남전 당시 한국 해병대의 긍정적인 평가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제임스 맥이 평가한 청룡부대, 특히 꽝남 성에 주둔한 부대는 미군들과의 교류가 수없이 많았고 오히려 그들의 평가는 아주 긍정적이다. 물론 맥의 평가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직접 같이 싸우고 작전을 펼친 전투병들과의 평가는 그와 정반대이다.

물론 무조건 승리한 것만은 아니다. 공식적인 기록에도 남아있지만 한국군은 부대 규모상 미군이나 월남군처럼 정규 월맹군 상대로 대규모 작전을 실시한 적은 별로 없다. 있긴 있었으나 그렇다고 많지는 않았다는 것. 안케패스 전투 등. 또 연대-여단 규모 작전이 그나마 큰 편이었다.

오작교 작전이나 홍길동 작전, 황룡 작전등 스케일이 큰 작전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소규모 교전과 매복이었다. 이 가운데 큰 성과를 얻었지만 매복이나 부비트랩으로 손실을 겪은 적도 꽤 있다.

이에 대해서 국방부는 승전보만 알리려고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은 사례에 대해서는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서 오히려 파월용사들의 수기로 가슴 아픈 사례들이 밝혀진 바가 있다. 예를 들어 짜빈박 전투는 "투망 작전"의 한 부분으로 해병대가 손실을 겪은 전투였지만 국방부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럭저럭 성과를 얻은 작전이기 때문에 작전 기간에 모든 전과만 언급하고 "부분적 성공"이라 칭한 뒤 그 특정 전투는 넘기는 식이었다.

또한 오작교 작전에서 백마부대의 도깨비 11중대가 보초병이 조는 바람에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은 사건이나 맹호부대의 혜산진 1대대 2중대에 베트콩이 침투하여 막사에 수류탄을 다수 투척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작교 작전 자체가 큰 성공이라는 이유로 전과만 홍보하고 다른 건 싹 덮어버리는 면도 있었다.

안케패스 전투 경우도 한국군이 이기기는 하였으나 사령부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점도 참전용사들의 수기에 의하여 밝혀졌다. 공식적으로는 북베트남군 700여명을 사살했고 한국군 전사자가 70여명에 부상자가 100여명이라고 하지만 일부 참전용사들은 그보다 많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사살한 북베트남군의 수도 다소 과장되어 있는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일단 638고지 전투에서 436명을 사살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의 진위여부가 상당히 의심스럽기 때문. 확인된 시체는 4구이며 나머지 시체는 어떻게 들고 탈출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해당 거점에 900여명은 있었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게다가 공격해서 부상자 없이 사망자만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들이 시체를 들고다니지는 못할테니 이것까지 고려하면 연대급 인원까지 들어가있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미군 참전용사들이 한국군을 바라본 시선도 독특하다. 당시에 군기와 가혹행위가 심해서 옆에서 보던 미군 참전용사들이 "하드코어하다"라며 손을 저을 정도였던 반면, 우리도 저렇게 해보자라는 싸이코들도 있었다는 것. 그러나 안그래도 사기도 낮고 사명감도 없던 미군 병사들이 그런꼴을 당하면 프래깅으로 갚아줬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당시 미군들은 징병되어 원치 않아도 끌려온 반면, 한국 파월장병들은 지원을 받아 선발해서 보낸 병사들이라 꽤 정예였다고 볼 수 있다.

미국측 장교단이 한국측 진지를 방문했을때, 병영을 안내하는 한국군 장교들이 지나갈 때마다 쉬고 있던 한국군 병사들이 큰 목소리로 충성! 하고 외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고, 그다음부턴 "우리도 저렇게 하고 싶다."라고 부러워 했다. 그런데 정작 전투 지역에 있던 미군 장교들은 부하들에게 경례하지 말라고 지시하는데, 베트콩 저격수에게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도 이와 관련된 장면이 있다. 자세한 항목은 경례구호 항목 참조. 당시 미군 1기병사단 중위였던 리처드 머레이는 사소하게 한국군 초소나 진지를 지나가면 병사들이 득달같이 일어나 자로 잰 듯한 경례와 떠나갈듯한 경례 구호를 외쳤고 본인도 경도되어 군인다운 자세로 답례했다고 한다. 머레이는 맹호부대 연락장교였고 2009년 타계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한국군은 뜀걸음시에 힘차게 군가를 부르는 전통이 있고 생활화되어 있을 정도로 일반적이다. 당시 미군은 기상과 동시에 일사불란하게 집결하여 군가를 부르며 뛰는 한국군을 보며 스페셜포스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이라크 주둔 자이툰 부대에도 이어진다. 당시나 현재나 미군은 아침조회식으로 끝내기 때문. 보통 미군도 케이던스라 불리우는 완보시 군가를 부르긴 하지만 한국군 식으로 속보에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부르지 않는다.


13. 부정적 평가 및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파병 사진[편집]


파일:파월 한국군 베트남 파병.png
1967년 휴식 중인 한국군 장병

파일:attachment/vietnamkr3.jpg
아이를 구해내고 있는 육군 백마부대 장병들. 아이를 안고 달려오는 병사는 M16A1을 소지하고 있다. 연출된 사진이다. 기관총에는 아예 탄약도 장전되어 있지가 않다.[35]

파일:attachment/vietnamkr2.jpg
해병대 청룡 2여단 1대대 의 통신병 이명수 하사. 이 사진은 관통당한 철모를 어루만지는 아래 부분이 잘려나간 사진이다.(당시 사진기사가 특이하다며 찍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해당 사진의 철모에는 정조준금지구역이라고 적혀있다. 사실 웃을 수만은 없는 게, 통신병저격수의 우선 목표 중 하나다. 사진의 주인공은 청룡 2여단 1대대의 이명수 하사로, 철모 외피의 저 글씨들은 당시 한국군의 복장 군기로 봐서는 이해가 안 가는 사진인데, 실제로 저격당하여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이후 부대장이 특별히 허가해 준 것이라고 한다. 다만 '보고 싶은 울산 큰애기 순이'는 귀국했더니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결국 이명수 하사도 다른 사람과 결혼하였다는 슬픈 뒷이야기가 있다. 2016년에도 사진의 철모를 보관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여담으로 이명수 하사는 전역 후 목사로 살아가다 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베트남 전쟁이 끝난지도 48년이나 흐른지라, 이제는 철모 외피도 낡고 글씨도 거의 탈색되어 흔적만이 있다.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BF%F9%B3%B2%C7%D8%BA%B4%B4%EB2.gif
해병대 청룡부대의 4.2인치 박격포 진지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1203073575_1679_photo.jpg
공중에서 본 중대방어기지다.손 치워

파일:attachment/vietnamkr1.jpg
출항을 준비하는 맹호부대청룡부대 장병들이다. 파월 청룡부대는 육군부대와 달리 덕헌터 얼룩무늬 군복을 착용했다.



15. 관련 인물[편집]


  • 박정희 - 당시 한국 대통령
  • 채명신 - 초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 수도사단(맹호부대) 사단장
  • 이세호 - 2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
  • 수도사단
    • 장태완 - 파월 수도사단(맹호부대) 부연대장으로 참전 복무.
    • 노태우 - 파월 수도사단(맹호부대) 제1보병연대 3대대장(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1기보여단 133기보대대(강재구 소령이 있던 부대이다. 재구대대)으로 파견된 백마부대의 연대장으로 복무.
    • 황정리 - 성룡과 함께 취권, 사형도수 등 무술영화에 출연한 황정리가 맞다. 맹호부대 소속 태권도 교관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 제9보병사단
    • 전두환 - 파견된 9사단 백마부대의 29연대장으로 복무. 상관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자세한 것은 전두환 문서 참조.
    • 박영한 - 백마부대 29연대 보도병으로 참전. 머나먼 쏭바강을 집필, 후에 SBS에서 드라마화 됨. 쏭은 강을 일컫는 베트남어다. 쏭바강은 '역전 앞' 식의 중어 반복.
    • 안정효 - 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 훗날 안성기 주연의 영화로 제작된, 하얀전쟁 집필
    • 허경영 - 1971년에 파병되어 냐짱 지역에서 복무하다가 죽을뻔 했다고 한다. '나챵' 내지는 영어식 표현인 '나트랑'이라고 불리는 곳. 베트남전 당시 미군 특수부대들의 양성소였던 리콘도 스쿨(RECONDO-RECONnaissance and commanDO- School)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딴지일보에 허경영과 같이 베트남 참전했던 용사가 수기를 쓰면서 허경영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백마부대 본부중대 법무참모부에 근무를 했으며 부대 밖으로 파견근무를 나갈 때 배낭에 양복을 챙겨가서 갈아입고 사진을 찍는 등(…)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 해병 제2여단
    • 황석영 - 소설가. 해병 제2여단 소속으로 참전.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다가 후방으로 전출되어 군 수사대로 복무했다. 누나 애인 빽 덕분에 뒤로 전출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출되기 이전까지 황석영은 전방에서 근무했으며 전투를 치렀던 경험도 있고 그 때문에 PTSD를 앓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 무기의 그늘 같은 소설을 집필했다. 여기서 탑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베트남 인민들의 토템을 두고 주인공이 속한 부대가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과 교전을 벌인다는 내용인데, 비슷한 내용이 논픽션인 그린베레에도 실렸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미군이 전투를 벌이며 토템을 두고 민족전선과 전투를 벌인다는 단편적인 요소만 빼면 별다른 유사성이 없다.
    • 남진 -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소속으로 참전. 당시 파병가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베트남에 돈 벌러 간 덕수를 구해주는 장면에서 출연한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리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는듯. 엘비스 프레슬리가 존경 받는 이유가, 인기가 절정일 때 군에 입대 했기 때문이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서독에서 군생활 했으며 이때 사귄 소녀와 결혼한다.
  • 기타
    • 김용관 -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70년 7월 파월 한국군 부사령관을 역임했으나 다음 해 1월 위암이 발견되어 귀국하고 동년 4월 별세하였다.
    • 김영일 -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69년 십자성부대 사령관으로 복무하였다.
    • 유학성 -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자 제12~14대 국회의원. 1968년 십자성부대 사령관으로 복무하였다.
    • 황영시 -12.12 군사반란 가담자. 주월한국군 야전사령부 참모장으로 복무.
    • 장세동
    • 서경석 - 소대장 및 중대장으로 베트남에서 복무. 이때의 경험을 실감나게 그려낸 '전투감각'이라는 수기가 유명하다. 여기서 볼 수 있다.
    • 김옥이 - 여군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사람이다. 예비역 대령이며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 하일성
    • 정동환
    • 박정환 - 1967년에 태권도 교관으로 파병되어서 포로가 되어 생환한 경험이 있고 생존귀환의 한국군 포로의 산 증인 출신이다. 그때의 경험담을 '느시'라는 제목의 수기집으로 집필했다.


16. 기타[편집]


베트남 정부나 국민들이 한국에 별 감정 없다는 서술들이 많은데, 피해주장자 등에서는 강한 비판 의식을 지닌 경우가 많으며 한국의 진보 단체나 한겨레, 오마이뉴스 같은 진보쪽 언론들이 연계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현 베트남 정권은 오히려 이들을 탄압하는 형편인데 왜냐하면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에 의해서 민간인 학살이 정말로 있었는지 아닌지를 파다보면 결국 자신들(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학살들(후에 대학살 등)이 만천하에 드러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베트남 공산당 입장에서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베트남 정부가 학살이나 전쟁범죄에 대한 보상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 전쟁 특성상 전방과 후방이 따로 존재하지도 않았고, 베트남 내에 베트콩들의 전쟁범죄에 당한 민간인 피해자들이 남베트남 북베트남 할 것 없이 너무 많고 이런 것들이 다 드러나면 공산당 정권 존립 자체에 위험이 될 뿐만 아니라 이 피해자들을 전부 보상해준다면 베트남 정부가 파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월남전 당시 베트콩은 남베트남에 협조하는 민간인들을 가차없이 살육하기로 유명했다. 그때문에 한국의 중대전술기지나 미국의 전략촌에는 남베트남 원주민뿐 아니라 베트콩을 피해 도망온 북베트남쪽 난민도 적지 않았고, 이들이 기지 밖으로 멀리 나가지만 않으면 훨씬 안전했기 때문에 철군 이전까진 신변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75년 이후에 이들이 어떻게 됐을지는 뻔하다. 이들의 사례가 발굴되면 정치적 피해를 보는건 베트콩의 후신인 베트남 공산당이다.

남베트남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당시 북베트남이 우리를 점령했을 때 우리한테 한 짓은 말하지 않고 한국이나 미국의 학살만 들먹이냐?"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적화통일 당시 피해를 본 사람들이나 그들의 후손들. 게다가 이 논란을 낳은 글은 베트남의 어떤 기자가 "만일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본군을 관련한 드라마가 방영되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으나 위에 서술했듯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 글을 쓴 쩐꽝티 기자는 하노이 출신, 즉 북베트남 출신이라 남베트남 출신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나왔다.

보통 영미권 국가들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항목들은 당사국보다 영어로 작성된 항목이 가장 상세한 경우가 많으며 위키백과에서 해당 문서들은 일본어버전이 제일 자세하고, 역시나 내용도 과장되거나 한국군의 잔혹성을 부각하는 것이 많다. 물론 난징 대학살 같은 구 일본군의 전쟁범죄 관련 문서와는 완전한 정반대 태도. 개막장 극우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정신줄을 놓은 일본 위키백과의 슬픈 현실이다. 인터넷 인구수 기준 한국에서는 위키백과에 관심이 적은 반면, 일본 위키백과는 특히 근현대역사나 정치 관련 항목은 굉장히 우익적이고 자세하다.

사특정 사건에 직접 연관되어 있는 국가들은 위키백과에서 중립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 싶다면 특정 사건이 왜곡된다고 해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중립적인 국가의 위키에 들어가서 구글번역기를 정성들여 돌리는게 좋다. 더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 싶다면 위키보다는 여러 책이나 심도있는 기사를 비교 대조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좋다.

베트남전이 끝난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제정된 법이 그 유명한 군인에 대한 이중보상 금지 조항이다. 정확히는 군무원과 경찰도 해당되며 직무 중 죽거나 다쳐도 국가에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고 법정보상금만 받을 수 있다는 제도.

이 조항이 만들어진 경위는 박정희 정권이 당시 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던 한국전쟁 상이용사에 대한 보상 제도를 정비하면서 보상금을 지급하는 대신 국가에 대한 민사소송이나 이중배상을 막아 정해진 액수만 받게하려는 취지였다.

당시 유공자나 상이군인(특히 한국전쟁 상이용사와 고엽제 피해자들)에게 2,000만원 가량의 돈을 연금형태로 지급하도록 제정했는데, 당시 서울아파트 1채의 가격이 1,000 ~ 2,000만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엔 악법이 아니었으나 40년간 물가가 백배가까이 오를동안 보상금 액수가 동결되어 있었다.

제1연평해전,제2연평해전 때에는 이미 물가가 50배가량 오른 시점이라 보상금의 액수가 터무니 없이 적었다. 그렇기에 헌법이 개정되는 중에서 끊임없이 폐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지금까지 존치되어 내려오고 있는 실정이다. 국회에서 이 법을 우회해서 보상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 전쟁 이후 사회적으로 유행어가 한국군을 중심으로 한동안 돌았는데, 바로 '짜웅'이라는 말로 아부하는 행위를 일컫는 속어다. 원래는 '짜오 옹'이라고 하는 직역하면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쯤 되는 베트남어가 변형된 것이다. 당시 남베트남의 부정부패가 심해서 로비할 때 로비하는 사람이 고관에게 예의갖춰 인사한 것이 와전되어서 한국에서의 '짜웅'에 이른것.#

한국 드라마 등을 통한 한류 열풍이 강한 곳 중 하나인 곳이 베트남이다. 그런데 2016년 인기 드라마인 태양의 후예 방영을 앞두고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다행히 <태양의 후예>는 베트남 국영방송국인 HTV2채널에서 Hậu duệ mặt trời(태양의 후예)라는 이름으로 별 문제 없이 방영되었으며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국내 마지막 방송이 4월 14일이었는데 베트남에서는 겨우 1주일 뒤인 2016년 4월 21일 첫 방송을 시작했고, 이는 30개국 이상 수출된 이 드라마가 해외 방송국에서 가장 먼저 방송된 것이다. 다만, 외국의 방송국에서 정식 수입 방영을 하기 전에 이미 해외 스트리밍 서비스 뷰(VIU)와 KBS WORLD, 유튜브등을 통해서 본 외국 사람들도 많았다.

이 드라마의 OST는 베트남에서 250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특히 태양의 후예를 패러디한 코미디 프로도 방송되는 등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연 베트남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부정적이었을지 의문이다.

1998년 11월 23일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파월했던 백마부대와 십자성부대편이 방송탔었다. # 오프닝에서 MC들은 충성을 외친걸 봐서 경례 구호가 충성이었다.


17. 매체에서 등장[편집]



17.1. 영화[편집]



17.2. 드라마[편집]



17.3. 게임[편집]



17.3.1. 도미네이션즈[편집]


'베트남 전쟁에서 공산주의 병력의 공격에 있어서 미국 다음으로 한국의 기여가 가장 컸습니다. 남한의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에서 총 30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으며, 이곳에서 이들은 북베트남군으로부터 매우 무서운 적이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1973년 철수 전까지 한국은 4만1천명의 적군을 사살하며, 단 3천8백 명의 병력만 잃어서 11:1이라는 비율을 기록했습니다.' 라는 추가 정보를 가진 한국의 냉전 시대 원거리 보병인 중장갑 공화국 소총수가 등장한다.


17.4. 음악[편집]



18. 관련 문서[편집]


[1]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갈등하는 동맹(서울: 역사비평사, 2010), 44-47[2]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갈등하는 동맹(서울: 역사비평사, 2010), 44.[3] 이상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을 참고해 서술[4] 송재경,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한국군 베트남 파병 추진과 국회의 대응: 의용군 파병논의를 중심으로,(역사와 현실 vol.116, 2020-06)[5] 민유기, 프랑스의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베트남 파병에 대한 인식(프랑스사 연구 vol.32, 2011)[6] 역사비평 편집 위원회, 갈등하는 동맹(서울: 역사비평사, 2010), 45[7] 사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초에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번디가 파병 요청을 했을 때부터 전투병 파견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1994년 1월 6일 자로 작성된 '월남파병 문제에서 고려되어야 할 문제점' 제목의 대통령 비서실 문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마상윤. "한국군 베트남 파병결정과 국회의 역할" 국제.지역인구 22, no.2(2013) : 64-66)[8] "미 국무부는 "현재 게릴라전 상황에서 지상군을 전투에 투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입장을 밝혔다.[9]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갈등하는 동맹(서울: 역사비평사, 2010), 44-47[10] 반면, 최근 공개된 자료에서는 한국 정부가 경제적 목적이 더 컸음을 밝히는 연구들도 나오고 있다.[11]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갈등하는 동맹(서울: 역사비평사, 2010), 48-49p[12]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25[13] 이신재. (2016). 북한공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현대북한연구, 19(3), 6-51.[14] 김진환. (2015). 베트남전쟁 시기 북한의 대외정책. 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05, 41-70.[15] 이신재. (2016). 북한공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현대북한연구, 19(3), 6-51.[16] 1968년 8월 통일혁명당이 발각되면서 이를 주도한 간부들은 모두 숙청당했다.[17] 김진환. (2015). 베트남전쟁 시기 북한의 대외정책. 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05, 41-70.[18]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갈등하는 동맹(서울: 역사비평사, 2010), 56p-61p[19] 윤충로. (2008). 베트남전쟁 시기 ‘월남재벌’의 형성과 파월(派)기술자의 저항 - 한진그룹의 사례를 중심으로-. 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79, 93-128[20] 박태균, 베트남 전쟁(서울: 한겨레출판, 2015), 221-229p[21] http://demos-archives.or.kr/content/274[22] 윤충로. (2008). 베트남전쟁 시기 ‘월남재벌’의 형성과 파월(派)기술자의 저항 - 한진그룹의 사례를 중심으로-. 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79, 93-128[23] 한국의 장군들은 더 많이 받긴 했지만, 대다수였던 사병들은 더 적게 받았다.[24] 3년 정도의 소득액[25] 박태균, 베트남 전쟁(서울: 한겨레출판, 2015), 230-239p[26] 박태균, 베트남 전쟁(서울: 한겨레출판, 2015), 211-220p[27] 동남아판 나토로 기획된 동맹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및 타이, 필리핀, 파키스탄의 8개국으로 구성되었다. 베트남은 가맹국은 아니었지만 조약기구의 관할범위에 해당되었다. [28] 송재경,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한국군 베트남 파병 추진과 국회의 대응:의용군 파병논의를 중심으로(역사와 현실 vol.116, 85pp)[29] 이신재,베트남 파병 한국군의 주둔군 지위와 민간인 피해보상(국방정책연구 vol.121, 2018)[30] 이상호, 베트남전쟁 파병 국군 전사자 현황과 국내 언론 보도, (역사와 현실 vol.116, 2020)[31] 오홍국, 베트남전쟁시 다국적군으로서 한국군의 역할 및 향후 과제, 군사연구 vol.130[32] (Stanley Robert Larsen and James Lawton Collins, Jr., 이주만 역, 『베트남 참 동맹군』,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군사참고 제24호,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2008)[33]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 Department of the Army(1985), 저자(Larsen, Stanley). # 이 책은 미군의 공식 평가로 제임스 맥이나 다른 고문관의 평가까지 합쳐서 낸 종합 평가다.[34] (Stanley Robert Larsen and James Lawton Collins, Jr., 이주만 역, 『베트남 참 동맹군』,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군사참고 제24호,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2008)[35] 당시 기자들은 전선에 나오는걸 극력 거부 하였으며, 찍은 사진들도 대부분 연출 사진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30 13:43:40에 나무위키 베트남 전쟁/한국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