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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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상세
3. 명칭
4. 고려 이후
5. 위치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고려시대 예성강 하류에 있던 국제 무역항이자 요충지이다.


2. 상세[편집]


6.25 전쟁 이전에는 남한 땅이었으나 현재는 북한 치하에 있으며, 광복 당시 행정구역 기준으로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벽란리 및 경기도 개풍군 서면 연산리 일대에 위치했다.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배천군 문산리 및 개성시개풍군 지역이다.

벽란'도'라고 해서 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나, (섬 도)가 아니라 (건널 도)를 쓴다. 渡에는 배가 드나드는 '나루'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는 북쪽에 유목제국이나 수렵채집사회 제국이 있었기 때문에[1][2], 조선 시대와 달리 중원과 교류하는 바닷길의 활용이 매우 활발했다.

벽란도는 당시 고려수도였던 개경과 거리가 가까웠고 수심이 깊어 밀물을 이용하면 크고 작은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에 고려시대의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중 가장 활발히 교류된 물품은 송이였다. 종이인삼·나전칠기 등을 수출하였고 비단·약재·서적[3]을 수입했다. 이 당시에는 개인과 개인의 무역보단 공무역이 중심이었다.

이곳에서의 무역이 상당히 활발하여 송나라, 일본의 상인은 물론이고 교지국, 섬라곡국, 마팔국에다가 대식국이슬람 상인들까지도 무역을 하러 왔는데, 이때 이슬람권에 '고려'를 '쿠리야(كوريا)' [4]라고 발음해 서양에 전하면서 우리나라의 영어 이름이 '코리아'가 되었다고 추측된다.[5] 물론 외국인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인이었으며, 최무선화약을 개발한 일화도 여기서 중국인 상인 이원(李元)을 통해서였다.

고려와 송나라의 교역 루트는 크게 2가지로, 북로와 남로가 있었다. 북로는 탕저우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벽란도로 가는 루트였고, 남로는 명주에서 흑산도와 군산도, 그리고 태안반도를 거쳐 개경으로 들어가는 루트였다.


3. 명칭[편집]


원 이름은 예성항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부근 언덕에 '벽란정'이라는 관사가 있어 송나라 사신들이 머물렀다. 하여 '벽란정'에서 따서 지명을 벽란도라고 바꾸었다.


4. 고려 이후[편집]


고려가 멸망된 뒤, 조선시대에는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잃어버리고 조세미 등을 운반하는 도선장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벽란도가 쇠퇴한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먼저 상술된 바와 같이 애초에 벽란도가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수도 개경과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수도는 그 특성상 왕궁도 있고 귀족들이 다수 거주하다 보니 사치품을 비롯해 이런저런 물품이 필요하여 무역이 번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고 보니 무역이 번성할 이유가 없어졌다[6]. 한편으로는 국제 해상 무역이 쇠퇴하고 그나마 중국과의 교역도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 위주로 변화했다. 명나라는 이전의 중국 왕조들과 달리 사무역을 철저히 규제했고, 그나마 명나라 수도가 남경이던 시절까진 조공을 바치러 갈 때 시간이 덜 걸리는 바다로 이동했었으나 영락제 이후로 명나라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겨서 거리가 짧아지자 사신도 육로로 교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뒤 일제강점기에는 철도 등 육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운송 기능을 상실해 버렸고, 남북 분단이 된 직후에는 38선 이남에 위치한 남한 지역이었으나 1953년 휴전 이후 지금은 북한에 속해 있다.


5. 위치[편집]


벽란도는 보통 예성강 하류에 위치해있으며, 벽란도의 옛 이름이 예성항이라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의견이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벽란도가 예성강 상류에 위치해있으며 벽란도와 예성항은 엄연히 다른 항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벽란도는 개성 선의문 서쪽에 있었고 예성항은 그 남서쪽에 있었다고 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예성항이 벽란도의 하류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에 따르면 '벽란도는 예성항 상류의 나루터'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예성항과 벽란도를 같게 보는 것은 고려 후기 여·송 양국 사이에 국교가 끊어진 다음 예성항 언덕 위에 있던 벽란정이 없어지고, 예성항도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한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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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표적으로 요나라(거란족)와 원나라(몽골족). 수렵채집국가로는 금나라(여진족)가 있었다.[2] 조선시대의 경우 북학의에 따르면 박제가가 살았던 조선 후기에는 황해를 건너는 해상 교역은 거의 차단되었고,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로 명나라, 청나라와 주로 교류했다.[3]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사용했다.[4] 페르시아어로는 쿠리예(کره).[5] 다만, 기록상으로 아랍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한 건 3차례에 불과한데,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여 3번만 왔을 거라 단정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다거나 있었던 기록이 소실되었다고 볼 근거도 없다. 무엇보다 송나라 상인의 방문 기록은 150여 건이나 남아 있다는 것에 미뤄보면 아랍상인의 방문은 매우 드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아랍권 외 다른 이슬람권인 중앙아시아와는 원 간섭기 이후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6] 실제로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던 시전들도 신라가 멸망한 이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