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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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부장관 (1948~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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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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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 (1994~1998)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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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나웅배
제3대
한승수
제4대
강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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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경제부장관 (1998~2001)

초대
이규성
제2대
강봉균
제3대
이헌재
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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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2001~2008)


초대
진념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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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김진표

제4대
이헌재
제5대
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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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예산처장관 (1999~2008)


초대
진념
제2대
전윤철
제3대
장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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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흠
제5대
김병일

제6대
변양균
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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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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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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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2013~현재)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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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최경환
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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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김동연
제5대
홍남기

제6대
추경호
임시정부 재무부장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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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6대 기획예산처 장관
변양균
卞良均 | Byun Yang-kyun


파일:BYK.jpg

출생
1949년 9월 25일 (74세)
경상남도 통영군 산양면 삼덕리
(現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1])
본관
초계 변씨
현직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회장
대통령 경제 자문위원
재임기간
제4대 기획예산처 차관
2003년 3월 3일 ~ 2005년 1월 27일
제6대 기획예산처 장관
2005년 1월 28일 ~ 2006년 7월 3일
참여정부 제5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2006년 7월 4일 ~ 2007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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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박미애
자녀
2남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학력
부산고등학교 (졸업 / 21회)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 / 학사)
예일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경제학[1] / 박사[2])
종교
불교개신교(예장합신)[3]
약력
제14회 행정고시 합격
경제기획원 예산 총괄과장
재정경제원 경제예산심의관
기획예산처 재정관리국장
기획예산처 기획관리실장
제4대 기획예산처 장관
제6대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1. 개요
2. 생애
3. 신정아 스캔들과 그 이후
4.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기업인. 노무현 정부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을 지냈다.

현재는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회장을 맡고 있다.


2. 생애[편집]


1949년 11월 15일(음력 1949년 9월 25일), 경상남도 통영군 산양면(現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에서 태어났다. 1969년 부산고등학교(21회)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졸업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해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2003년 2월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에서 미시경제학 전공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재학 시절인 1973년에 제1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 2000년 기획예산처 재정기획국 국장, 2002년 기획예산처 기획관리실장 등을 역임하며 경제관료로 일했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 경선 당시 민주당 수석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워낙 힘이 있는 자리여서 대선후보들이 경쟁하듯 그에게 밥을 샀는데, 대선후보 이인제, 김근태, 김중권이 밥을 샀을 때는 후보들 연설하고, 참석자들 알아서 밥 먹고 형식적으로 박수치는 자리여서 실망을 했다고 한다. 반면에 노무현 후보가 밥을 샀을 때는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의 희망'이라며 휘파람 소리, 박수 소리가 대단해서 그때부터 노무현의 편이 되기 시작했다. 당시 경제 전문가로서 ‘국가 재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물음의 답을 주었기 때문.

그 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참여정부에서 2003년 기획예산처 차관을 거쳐서 2005년 기획예산처 장관, 2006년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참모로서 노무현 정부의 경제사회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노무현에 의해 '보기 드물게 진보의 철학을 지닌, 유능한 경제관료'로 평가되었다. 노무현 정부 후반부의 청와대는 ‘문재인 비서실장(정무) - 변양균 정책실장(정책)’ 투 톱 체제였다고 할 정도.

여기까지가 변양균의 빛나던 시절이었다.

3. 신정아 스캔들과 그 이후[편집]


그러나 2007년, 신정아 큐레이터와의 불륜 스캔들 및 직권남용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2009년 1월, 대법원에 의해 직권남용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그리고 사회봉사 160시간에 처해졌다. 개인 사찰인 흥덕사[2]에 특별교부세가 배정되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가 인정되었기 때문. 나머지 혐의[3]에 대해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에게는 신정아의 남자, 똥아저씨[4]라는 치욕스러운 별명이 붙어버렸다.

그 후 국내 중견 기업인 (주)옵티스 회장을 역임하면서 쏠리드 - 옵티스 컨소시엄을 결성해 국내 3대 휴대폰 기업인 팬텍의 인수를 추진하였다. 현재는 경제정책 평론가이자 정보통신기술 벤처기업을 발굴·투자하는 중견 창업투자사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다만, 일종의 얼굴마담이라는 설도 있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 문재인 1기 경제팀에 발탁된 주요 관료들이 ‘변양균 라인’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청와대 정책실장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과 호흡이 잘 맞았는데, 그 인연 덕분인지 문재인 1기 경제팀에 그와 가까운 인사들(김동연 경제부총리, 홍남기 국무조정실장, 이정도 청와대총무비서관 등)이 요직에 대거 등용되었던 것. 물론 본인이 직접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이로써 문재인 정부에서도 막강한 위상을 보여준 셈이 되었다.

2017년 6월 19일 문재인 정부 출범에 맞춰 우리나라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정책제언을 담은 책 ‘경제철학의 전환’을 출간했다. 갈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수십 년간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골간을 이뤘던 ‘케인즈주의(금융ㆍ재정확대를 통한 수요창출)’에서 벗어나 이제는 ‘슘페터주의(공급 혁신)’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게 책의 요지.# 그를 위한 실천방법으로서 네 가지 자유(노동, 토지, 투자, 왕래)를 제시하였다. 가히 전방위적인 혁명적 규제완화론.# 물론 단지 규제완화만은 아니고 국민기본수요의 충족 등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 또는 패키지딜을 제시하였다.

2022년 7월 14일,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의 경제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윤석열 대통령은 신정아 사건이 터졌을 때 대검찰청 중수부 검사로서 수사에 참여했었다. # 변양균은 같은 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이 제 저서인 '경제철학의 전환'이라는 책을 두 번이나 읽었던 것으로 안다"며 "제 책이 이번 인사의 중요한 이유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


4. 기타[편집]


  • 신정아와의 추문으로 물러나지만 않았다면 노무현 정부 말기의 경제 정책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이후 민주당 진영에서 보다 큰 역할을 맡았을 거라는 말이 많다. 워낙 능력이 뛰어나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신정아와의 잘못된 인연으로 큰 손해를 본 셈.

  • 그림에 조예가 매우 깊다. 고2 시절까지 미대를 가려고 입시 준비를 하기도 했으나,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뜻을 접어야 했다. 그래도 대학 시절에 이젤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그림을 그릴 정도로 미술 사랑이 유별났다. 2005년에 기획예산처 장관 땐 첫 기자간담회를 서양미술 400년사가 전시된 예술의 전당에서 하기도 했다.[5]

  • 신정아와의 추문에도 불구하고 이후 현재까지 아내와 원만한 가정 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1] #[2] 동국대학교에서 신정아를 비호하던 동국대 이사장 영배 승려가 주지로 있던 사찰. #[3] 신정아가 근무하던 성곡미술관에 재정 지원을 하도록 요구한 혐의, 그리고 김석원의 사면 복권 대가로 3억 원을 받았다느니, 주거용 호텔 비용이 뇌물이라느니 하는 혐의들.[4] 성이 변()씨인데, 卞의 음이 배설물을 뜻하는 便과 같아서 생긴 것으로 보이며, 신정아가 붙인 별명이라고 한다(...).[5] 다만 이런 속성 때문에 사회 고위층에게 접근하던 신정아에게 낚였고 큰 곤혹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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