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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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2.1. 기씨 일파 숙청
2.2. 정동행중서성이문소 폐지
3. 결과 및 평가


1. 개요[편집]


丙申政變

1356년(공민왕 5년) 병신년에 일어난 공민왕의 반원(反元)정변.

1259년 고려는 제24대 국왕 원종이 직접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여 사대를 맺은 뒤로 황금씨족인 원나라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황실의 부마(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국이 되어 내정 간섭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제30대 왕 충정왕이 국정을 농단하고 어리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고[1] 그 삼촌이자 충숙왕의 3남인 강릉대군 왕전이 새 임금으로 즉위하니 그가 제31대 왕 공민왕이다. 하지만 뿌리깊은 친원세력이 아직까지 조정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마음대로 정사를 펼치지 못했다.

이에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을 타파하고자 반원 개혁을 시도했지만, 고려 내의 친원 세력 및 원나라의 권력을 잡은 기황후 때문에 제대로 시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공민왕은 때를 기다리며 반원정변을 준비하게 된다. 드디어 1356년 음력 4월에 98년간 이어진 원나라의 간섭을 벗고 친원세력을 숙청하며, 옛 땅을 수복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2. 내용[편집]



2.1. 기씨 일파 숙청[편집]


부원배들 중 핵심 세력으로써 각종 전횡을 휘두르며 국정을 농단했던 기황후의 오빠 대사도 기철과 태감 권겸, 경양부원군 노책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고 그 일당들은 죄다 도주했다.[2] 궁성을 삼엄히 경계하는 한편 정지상을 석방하고, 순군제공으로 임명해 국왕을 경호하게 했다.

홍언박을 우정승으로, 윤환을 좌정승으로, 원호를 판삼사사로, 허백·황석기를 찬성사로, 전보문·한가귀로 삼사우·좌사로, 김일봉·김용·인당을 첨의평리로 각각 임명했다. 얼마 후 고의로 기철·권겸·노책의 일당을 놓아준 혐의로 원호·한가귀와 면성군 구영검을 하옥시켜 처형한 다음 그 가산을 적몰했다.


2.2. 정동행중서성이문소 폐지[편집]


정동행성은 원래 원나라가 일본 가마쿠라 막부 정벌을 위해 고려에 설치했던 기구였다가 이후 고려와 원나라의 연락기관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대로 존속되었다. 정동행성의 소속 기구인 이문소는 기본적으로 원나라라는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였으며, 부원세력의 양성소로 기능했다. 때문에 정동행성이문소의 혁파는 원나라의 정치적 영향력과 친원세력을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내려진 조치였다.


2.3. 쌍성총관부 수복[편집]


평리 인당, 동지밀직사사 강중경을 서북면병마사로, 사윤 신순 유홍, 전 대호군 최영, 전 부정 최부개를 부사로 각각 임명해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고토 수복 작업을 개시했다. 또 밀직부사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전 대호군 공천보, 전 종부령 김원봉을 각각 부사로 임명해 쌍성 등지를 수복하게 했다.[3] 인당이 먼저 출발했는데 강중경이 술에 골아 떨어졌다가 뒤늦게 와서 객기를 부렸다. 인당이 제지했으나 듣지 않자 신순에게 눈짓해 처형해 버린 후 왕에게 “강중경이 역심을 품었으므로 군법에 따라 처치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온 나라 사람들이 처형한 이유를 알지 못해 물의가 분분했다.[4] 과거 고려가 동북 9성을 세웠던 여진족들의 땅 함주에도 이때 비로소 진출했다.


3. 결과 및 평가[편집]


병신정변의 결과로 고려 조정 내 친원파 세력은 사실상 없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병신정변이 비록 원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빠른 시일 내[5]에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의 반발을 강하게 사게 된다. 당장 분노와 증오로 가득찬 기황후덕흥군 왕혜(王譓)을 고려 왕으로, 조카인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고려 왕세자로 책봉하여 최유를 포함한 10,000명의 대군을 동원해 침공했으나, 다행히도 고려군은 명장 최영이성계의 활약으로 이를 막아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공민왕은 자신의 최측근인 김용의 전횡, 즉 홍건적 퇴치에 큰 공을 세운 안우정세운의 죽음을 제대로 막지도 못했으며, 1363년에는 결국 이 김용이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하는 시도를 벌이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왕 자신이 잦은 외침으로 인해 정처없이 해매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는 추후에 신돈의 등용으로 이어졌다.

사실 이후 명나라가 건국되었지만 공민왕 사후 우왕 시기까지 고려는 원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하면서 명나라의 눈치까지 봐야 했으며, 조정 역시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했다. 왜냐하면 명나라는 서해 바다 건너에 있었지만 원나라는 북쪽에 바로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민왕의 반원자주개혁정책은 시기가 좀 빨랐고, 잦은 외침으로 효과가 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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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에는 신하들이 국정 회의롤 통해 이를 결정한 후, 원나라에 요청하여 정식으로 국왕 교체가 이루어졌고, 이후 원나라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사실상 공민왕이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2] 이 때 부원세력인 기철 일파가 일거에 처단되었다. 공민왕은 조일신의 반란으로 무산되었던 개혁을 부원세력인 기철 일파를 제거하면서 재개했다. 공민왕의 부원세력 제거는 고려 내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공민왕의 지지세력의 존재, 원나라의 정국 변화 등이 결합되어 현실화될 수 있었다. 조일신의 난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을 지지하던 이제현과 같은 유신 세력, 연경 호종 세력, 외척 세력 등은 고려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원나라 정국의 동향은 공민왕에게 보다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원나라는 하남과 안휘성에서 시작된 홍건적의 봉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원나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메르키트 토크토아가 고우성의 반적 장사성을 정벌하러 나선 것을 틈타 반대파들이 토크토아를 제거했다. 그리고 장사성을 토벌하러 간 고려 군사들이 귀국하면서 원나라 정국의 동향을 비교적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공민왕은 5년 5월에 전격적으로 부원세력을 제거하고, 본격적으로 반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때 제거된 부원세력은 기철, 권겸 등을 필두로 25명이나 되었다. 공민왕의 이러한 반원 개혁정책은 원나라의 자존심에 커다란 스크래치를 냈지만, 원나라는 당장 눈앞에 닥친 홍건적의 진압도 힘에 겨워 연경조차 제대로 수비하지 못했다.[3] 쌍성총관부의 수복은 원나라의 쇠퇴와 쌍성 지역의 정국 변화에 의해 보다 용이하게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쌍성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온 원나라 세력이 쇠퇴하면서 쌍성 지역에서는 새로운 권력관계의 변화로 나타났다. 원나라의 쇠퇴는 쌍성총관부 지배세력의 분열로 이어졌다. 쌍성총관부는 고려를 배반한 조휘탁청이 지배하다가 조휘의 증손자인 조소생대에 와서 조씨 일가 간에 분열이 발생했다. 조소생은 원나라의 지원하에 계속 고려와 대립하여 왔다면, 조휘의 손자이자 조소생의 숙부인 조돈은 원나라의 위기를 감지한 후 친고려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의 문제는 쌍성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숙•질 간의 대립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씨 일가의 분열은 공민왕이 쌍성 지역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 이 때문에 인당은 공민왕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고, 압록강 영토 수복이 끝난 후 군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했다.[5] 당장 명나라의 건국 시기가 1368년으로, 병신정변이 있었던 1356년은 명나라 건국보다 무려 12년이나 앞선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