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두앵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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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의 제7대 국왕
즉위명
보두앵 4세(Baudouin IV)
이름
보두앵 당주(Baudouin d'Anjou)
출생일
1161년 초여름
출생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사망일
1185년 3월 16일 - 5월 16일 (24세)
사망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매장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성묘교회
가문
앙주 (House of Anjou)
부모
부친 아모리 당주
모친 아녜스 드 쿠르트네
종교
가톨릭
재위기간
1174년 7월11일 ~ 1185년 3월 16일 혹은 5월 16일 (10년 8개월 5일 혹은 10년 10개월 5일)

1. 개요
2. 생애
2.1. 어린시절
2.2. 재위
3. 평가
4. 인간관계
5. 이야깃거리
6. 주요참고문헌
7. 창작물
7.2. 이외 창작물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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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한센병 증세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묘사한 그림

프랑스어
Baudouin IV (보두앵 4세)
영어
Baldwin IV (볼드윈 4세)
라틴어
Balduinus IV (발두이누스 4세)

나병왕 보두앵[1]

예루살렘 왕국의 7대 국왕. 그의 통치기에 살라딘의 등장으로 위기에 처한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덕분에 잠시나마 구원받게 되었다. 그는 적수인 살라딘마저 인정했을 정도로 유능했던 국왕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4세 그 한 사람에 의해 유지되는 상황이었고, 그의 사후에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2. 생애[편집]



2.1. 어린시절[편집]


예루살렘아모리 1세아녜스 드 쿠르트네 사이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친누나 시빌라는 그와 1살 터울이다.

Amalric elder brother, King Baldwin III, stood godfather to his nephew who was named after him, and the story was later told that when a member of the court asked what christening present he intended to give the child he laughingly replied. ''The Kingdom of Jerusalem'' it must have seemed a frivolous remark at the time, for Baldwin was only thirty-one and had recently married a young and beautiful wife, so that likelihood of his nephew's inheriting the throne appeared remote. Yet less than two years later Baldwin died childless. His death had important consequences for his little nephew, for not only did his father become king, but his parents' marriage was dissolved.

아모리의 형인 (당시의) 국왕 보두앵 3세는 그의 이름을 딴 조카의 대부가 되어 있었고, 그 이야기는 나중에 궁정의 한 사람이 아이에게 어떤 세례 선물을 줄 생각이냐고 물었을 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예루살렘 왕국'' 그 때는 시시한 말처럼 보였음에 틀림없는데, 당시 국왕 보두앵은 서른한 살밖에 되지 않았고 최근 젊고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했기 때문에 조카의 왕위 계승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러나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보두앵은 자식이 없이 죽었다. 그의 죽음은 그의 어린 조카에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님의 결혼도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Bernard Hamilton, Professor of Crusading History, University of Nottingham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보두앵 4세가 아직 두 살도 안 된 시점에 아버지인 아모리 1세와 어머니인 쿠르트네의 아녜스는 아모리 1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보두앵과 시빌라의 적자로서의 지위는 인정을 받는다.[2]

Baldwin cannot have known his mother during his childhood He was less than two years old when his parents separated an thereafter he would only have seen Agnes on public occasions as the wife of Hugh of Ibelin. He probably saw very little of his sister either, for Amarlic sent Sibyl to live in the convent of Bethany near Jerusalem of which his aunt Yveta was abbess. When Baldwin was six his father married again. Amalric's new wife was a Byzantine princess, Maria Comnena, Great-niece of the Emperor Manuel. There is no evidence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queen and his young stepson was ever more than formal; certainly Baldwin showed little affection for her in later life. Maria subsequently proved to be very ambitions woman and this may account for the coolness between her and Baldwin who, as the legitimised son of Amarlic's first marriage, would always have taken precedence over her own children.

보두앵은 어린 시절 동안 어머니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부모가 헤어졌을 때 두 살도 채 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이벨린의 위그의 아내로서 단지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녜스를 보았을 것이다. 아모리가 시빌라를 그(아모리 왕)의 이모인 여자 대수도원장 이오베타에게 보내어 예루살렘 근교의 베타니 수녀원에 살게 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누이도 거의 보지 못하였다. 보두앵이 여섯 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다시 결혼했다. 아모리의 새 부인은 마누엘 황제의 조카인 동로마의 공주 마리아 콤네나였다. 왕비와 그의 어린 의붓아들 사이의 관계가 형식적 이상이었다는 증거는 없는데, 확실히 보두앵은 후년에 그녀에게 거의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마리아는 매우 야망이 있는 여자라는 것을 증명했고 이것은 그녀와 보두앵 사이의 냉정한 관계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보두앵은 아모리의 첫 번째 결혼의 합법적인 아들로서, 항상 그녀의 자식들보다 우선했을 것이다.

Amalric recognised that his heir needed a good education and when Baldwin was nine he appointed as his tutor William, archdeacon of Tyre, one of the most learned men in the kingdom. ... The prince went to live in the household of this cultivated cosmopolitan churchman, but the archdeacon soon diagnosed illness in his young ward.

아모리는 그의 후계자가 좋은 교육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했고 보두앵이 아홉 살이었을 때 그는 왕국에서 가장 많이 배운 사람 중 한 명인 티레의 부주교인 윌리엄을 가정교사로 지명했다. ... 왕자는 이 교양 있는 국제적인 성직자의 집에 살러 갔지만, 그 부주교는 곧 그의 어린 피보호자에게서 병을 진단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이렇게 스승이 된 기욤 드 티레의 서술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상당한 능력과 성품을 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자께서는 아홉 살쯤에 내게 맡겨져 여러 학문들을 배우셨다. 나는 제자를 위해 헌신했다. 왕자께서는 용모가 아름다우셨고, 학업에 끝없는 발전을 보이셨으며, 사랑스러운 기질이 날로 더해가서 그 전도가 끝없이 밝았다. 왕자님은 뛰어난 기병이었다. 왕자님의 지성은 날카로웠다. 또한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윌리엄(기욤 드 티레)은 “왕자께서는 부왕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크게 관심을 가졌으며 충고를 따를 줄 아는 좋은 성품을 갖고 계셨다.” 라고 덧붙였다. 윌리엄의 충고는 말할 것도 없었다. 소년은 활발했고, 바로 거기서 왕자의 교사는 그의 비극을 발견했다.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보두앵 4세가 9살 때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그만 서로의 손을 할퀴어 다쳤는데 보두앵만이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충신 기욤 드 티레가 즉시 보두앵을 의사에게 데려갔다. 의사가 진찰한 결과, 보두앵은 심각한 피부병인 나병에 걸렸으며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보두앵의 나병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몸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While he was under my charge, I devoted myself to my royal pupil with vigilant care and watched over him with the solicitude befitting his exalted position. I endeavored to train him in the formation of character as well as to instruct him in the knowledge of letters. He was playing one day with his companions of noble rank, when they began, as playful boys often do, to pinch each others’ arms and hands with their nails. The other boys gave evidence of pain by their outcries, but Baldwin, although his comrades did not spare him, endured it altogether too patiently, as if he felt nothing. After this had occurred several times it was reported to me. At first I supposed that it proceeded from his capacity for endurance and not from a lack of sensitiveness. But when I called him and began to inquire what it meant, I discovered that his right arm and hand were partially numb, so that he did not feel pinching or even biting in the least.

그가 내 지도를 받는 동안, 나는 왕실 제자에게 경각심을 갖고 헌신했고, 그의 높은 자리에 걸맞은 배려로 그를 지켜보았다. 나는 그를 인성 형성에 있어서 훈련시킬 뿐만 아니라 학문에 대한 지식에서도 가르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가 어느 날 귀족 계급의 동료들과 놀고 있었는데, 장난기 많은 소년들처럼, 그들은 서로의 팔과 손을 손톱으로 꼬집기 시작했다. 다른 소년들은 부르짖음을 통한 고통의 증거를 제시했지만, 보두앵은 비록 그의 동료들이 그를 봐주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너무 참을성 있게 참아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일어난 후에 나에게 보고되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그의 인내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지, 감각의 부족에서 진행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락을 하여 무슨 뜻인지 캐묻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오른팔과 손이 부분적으로 무감각하여 조금도 꼬집거나 물어뜯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It is impossible to refrain from tears while speaking of this great misfortune. For, as he began to reach years of maturity, it was evident that he was suffering from the terrible disease of leprosy. Day by day his condition became worse. The extremities and the face were especially attacked, so that his faithful followers were moved with compassion when they looked at him. Nevertheless, he continued to make progress in the pursuit of letters and gave ever-increasing promise of developing a lovable disposition. He was comely of appearance for his age, and far beyond the custom of his forefathers he was an excellent horseman and understood the handling of horses. He had a retentive memory and loved to talk. He was economical but always remembered both favors and injuries. In every respect he resembled his father, not alone in face but in his entire mien; even his walk and the tones of his voice were the same. His intellect was keen, but his speech was halting. Like his father he eagerly listened to history and was well disposed to follow good advice.

이 큰 불행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가 몇 년의 성숙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한센병이라는 끔찍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날이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사지와 얼굴은 특히 공격받아서 충실한 추종자들은 그를 바라볼 때 동정심을 가지고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학문 추구에 진전을 이루었고, 사랑스런 기질을 발전시키겠다는 점점 더 많은 약속을 했다. 그는 나이에 비해 외모가 아름답고, 선조들의 관례를 훨씬 뛰어넘은 훌륭한 기수였고 말의 취급도 이해했다. 그는 기억력이 좋아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검소했지만 항상 호의와 무례 모두를 기억했다. 모든 면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를 닮았다. 얼굴뿐만 아니라 풍채 전체에서도, 그의 걸음걸이와 목소리 톤도 같았다. 그의 지성은 예리했지만, 그의 발언은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는 역사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 좋은 충고를 따르기 위한 마음가짐을 잘했다.

Baldwin’s father, King Amalric, also challenged the idea that his son’s disease might make him unfit for leadership. He sought out Abu Sulayman Dawud, a Christian Arab doctor, to treat Baldwin’s illness, but at the same time, he also engaged Abul’Khair, Abu Sulayman’s brother, to teach Baldwin to ride. This skill was mandatory for a knight and ruler, but was difficult for Prince Baldwin since he needed to control the horse with his knees while using his good hand to wield a sword. He was apparently an excellent rider until he became too ill to mount his horse.

보두앵의 아버지인 아모리 왕도 아들의 병이 그를 지도자로 부적합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그리스도인 아랍 의사 아부 쉴레이만 다우드를 찾아 보두앵의 병을 치료했고, 그리고 그때와 동시에 아부 술레이만의 형제인 아불케르를 보두앵에게 승마 교육을 하도록 종사시켰다. 이 기술은 기사나 통치자로서는 의무적인 기술이었지만, 보두앵 왕자는 건강한 손을 이용해 칼을 휘두르면서도 무릎으로 말을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어려운 기술이었다. 그는 병이 나서 말을 탈 수 없을 때까지는 분명히 훌륭한 기수였다.

Marx, Francesca Ann <Transformation and Medieval Aristocracy: Werewolves, Lepers, and the King’s Body>



2.2. 재위[편집]


아모리 1세1174년 7월 11일 사망하자 보두앵은 7월 15일 왕위를 이어받았다. 예루살렘 왕국은 귀족들이 여러 파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대의 적인 살라딘의 지도 아래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에서 시리아까지 그 영향권을 넓혀가면서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에 국가의 존망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특히 가장 염려되는 것은 그의 건강이었다.

The lad’s father was informed of his condition, and physicians were consulted. Repeated fomentations, oil rubs, and even poisonous remedies were employed without result in the attempt to help him. For, as we recognized in process of time, these were the premonitory symptoms of a most serious and incurable disease which later became plainly apparent.

그 사내아이의 아버지는 그의 상태를 알렸고, 의사들의 상담을 받았다. 반복된 찜질, 기름 마사지, 심지어 독성 치료약까지 그를 도우려는 시도의 결과로 기용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인식한 바와 같이, 이것들은 나중에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 가장 심각하고 불치병인 질병의 전조 증상이었기 때문이다.

Marx, Francesca Ann <Transformation and Medieval Aristocracy: Werewolves, Lepers, and the King’s Body>


이 저주받은 어린 왕이 고통 속에서 보여준 우아하고 고귀한 용기는 쉽게 그 예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의 헌신적인 교사는 보두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하루하루 왕의 상태는 악화되었고 얼굴과 손, 발이 특히 심해서 충직한 신하들은 왕을 바라보며 측은함에 마음이 아팠다.”

“사랑할 만한” 새 왕 보두앵 4세는 윌리엄과 함께하는 학업에 탁월함을 보였지만 사혈, 사라센 기름 마사지, 관장 등 온갖 치료들을 견뎌내야 했다. 그의 건강은 아랍인 의사 아부 술레이만 다우드(Abu Sulayman Dawud)가 담당했는데 다우드의 형은 보두앵의 병이 악화돼가자 그에게 한 손으로 말 타는 법을 가르쳤다.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또한 그런 시기에 왕이 된 보두앵 4세는 국정을 맡기에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그의 오촌 아저씨트리폴리의 레몽 3세[3]와 플랑시의 밀(Miles de Plancy) 등 두 명의 섭정이 집권했다. 1175년 레몽 3세는 예루살렘 왕의 대행자로서 살라딘과 조약을 맺었다.

이후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존속을 위해 지속적으로 살라딘과 분쟁을 치르면서도 한편으로 협정도 맺기도 하는 등 아슬아슬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나름대로 개혁적인 성향도 있어서 허례허식을 없애거나 이유 없는 탄압과 폭정은 최대한 자제하려 하였고 예루살렘 왕국 내부의 아랍인들에게도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려 하였다.

다음이 재위 초기 보여준 대립의 상황이고

One of Baldwin’s first actions as king was not to ratify the peace treaty with Saladin that Raymond had initiated. This policy had proven disastrous, for it had allowed Saladin to surround the Franks unopposed. That same month, Baldwin led a raid into the lands around Damascus. .In August he led another raid to the Beka'a valley and defeated a garrison of Damascus led by Saladin’s nephew, Shams al-Daula Turan-Shah.

왕으로서 보두앵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레이몬드가 시작한 살라딘과의 평화 조약을 비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살라딘에 저항하지 않고 프랑크인들을 포위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손해가 큰 것으로 판명되었다. 같은 달(7월 : 보두앵 4세가 성년으로 인정받은 월)에, 보두앵은 다마스쿠스 주변의 땅을 급습했다. 8월에는 다시 베카 계곡으로 급습을 지휘하여 살라딘의 조카 Shams al-Daula Turan-Shah가 이끄는 다마스쿠스의 수비대를 격파했다.

Marx, Francesca Ann <Transformation and Medieval Aristocracy: Werewolves, Lepers, and the King’s Body>


다음이 협정의 상황이다.

1184년 보두앵 4세의 나병은 말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수족이 흐물흐물해졌고 앞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용기와 선의만은 잃지 않았던 왕은 살라딘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는 트리폴리스 백작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해 다마스쿠스를 찾았던 안달루시아의 여행자 이븐 루바이르는 전시 상황인데도 대상들이 프랑크인들의 영토를 지나 카이로와 다마스쿠스를 자유로이 왕래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 교도들은 지나치지 않은 세금을 무슬림들에게 부과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도 상인들도 무슬림 영토를 지날 때에는 그 대가를 지불했다. 이들 사이의 협정은 완벽했으며 공정하게 지켜졌다. 전쟁 당사자들은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민간인들은 평화롭게 지냈다.”고 확인해 주고 있다. 살라딘은 굳이 이 공존 상태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아민 말루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그는 라틴어를 비롯해 이슬람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세계화된 인물이었고 그리스도인과 유대교, 이슬람교도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던 지역 전문가였다. 그의 능통한 언어 실력은 살라딘과의 1대1 회담을 가능하게 했다.

채준 <말의 전쟁, 최강 기마대의 기록>


A twentieth-century observer would tend to judge the health of s society less by it religious vigour than by its economic vitality. in this regard also the Latin East was in flourishing condition. Under Frankish rule the ports of the Syrian coast had developed into important commercial centres. The fleets of the great Italian maritime powers came there each year to trad with the Franks and with the Muslim hinterland of Aleppo and Damascus. It is also possible that commerce in the Frankish East benefited towards the end of Baldwin IV's reign from the dislocation of Italian trade with the Byzantine Empire. Which resulted from the massacre of the Latins in Constantinople in 1182, for th e loss of access to the luxury trade of the East through Constantinople would have made their trading relations with the crusader states more important to the Italian maritime cities. as Ibn Jubayr bore witness, war did not disrupt trade between the Italians working out of the Syrian ports and merchants from Saladin's empire.

20세기 관찰자는 사회의 건강을 종교적 활력보다는 경제적 활력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또한 라틴 동부는 번창하고 있었다. 프랑크의 통치하에서 시리아 연안의 항구들은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위대한 이탈리아 해양 강대국들의 함대는 매년 프랑크 족과 이슬람의 배후인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와 교역하기 위해 그곳에 왔다. 또한 프랑크 동부에서 보두앵 4세 통치 말기에 비잔틴 제국과의 이탈리아 무역이 단절되면서 무역이 이익을 얻었을 수도 있다. 118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라틴인 학살의 결과로, 콘스탄티노플을 통한 동양의 사치스러운 무역에 대한 접근의 상실 때문에, 그들의 무역 관계는 이탈리아 해양 도시들에게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이븐 주바이르가 목격했던 것처럼, 전쟁은 시리아 항구에서 일하는 이탈리아인들과 살라딘 제국의 상인들 사이의 무역을 방해하지 않았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다만 이 휴전 상황에서 케라크의 영주인 르노 드 샤티용은 후술할 몽기사르 전투 등에서 왕을 군사적으로 보좌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왕이 지적하거나 나서야 하는 사안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다.

성전은 살라딘의 오랜 다짐이었지만 이번에도 그것의 직접적 원인은 샤티용의 레지날드가 제공했다. 카라크의 영주는 조약 위반에는 정말이지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이집트나 메카로부터 시리아로 넘어오는 대상 행렬이나 순례자들을 덮치는 일은 크나큰 낙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짓을 평화조약이 아직 발효 중이던 1179년에 저질렀다. 대상들은 그를 믿고 그의 성 밑에 캠프를 쳤다. 그런 그들을 상대로 레지날드는 남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을 포로로 잡고, 가축과 20만 디나르 상당의 재물까지 빼앗았다. 보두앵 4세가 항의조로 그에게 사절을 보내 빼앗은 물건과 포로들을 돌려주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왕의 사절들에게 조롱만 퍼부었다. 1182년에도 그는 휴전 기간에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라비아로 진군, 신성한 예언자(무함마드)의 유골이 묻힌 성지에서 불과 하루거리인 곳까지 밀고 들어갔다.

스탠리 레인 폴 <살라딘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이슬람교도들의 감옥에 갇혀 수년 동안 옥살이를 한 레이널드는 광신도였다. 그는 이교도에게 한 맹세 따위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슬람교도는 물론,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강도짓을 하고 죽였다. 레이널드가 이슬람교도 상인들을 공격해 살라딘과의 정전 협정을 깨뜨린 적이 있었다. 살라딘은 그의 성을 포위했지만 보두앵 왕이 이를 물리쳤고 살라딘은 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정전 협정에 서명해야 했다.

윌리엄 위어 <세상을 바꾼 전쟁>


몹시 분개한 살라딘이 보두앵에게 배상을 요구했다. 왕 자신도 그 일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으므로 르노에게 약탈한 물건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르노가 거절하자 보두앵은 얌전히 물러서고 말았다. 심지어 아무 영문도 모르고 다미에타에 들어왔던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살라딘이 인질로 잡았을 때조차도 르노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결국 그의 고집은 지친 나라가 수행할 능력도 없었던 전쟁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희생자를 낸 교전이 몇 번 있었지만, 어느 쪽도 분명히 유리한 고지를 점하지 못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질질 끄는 소모전의 양상에서 언제나 인력이 절실한 문제였던 프랑크인들로서는 전쟁을 차선책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17년간 알레포에 억류되었다 풀려난 르노 드 샤티용은 트란스요르단의 영주가 된다. 모아브성과 몽레알성을 이용해서 그는 살라딘에게는 아주 중요한 노정인 이집트를 경유하여 다마스쿠스에서 메카로 가는 길목을 막는다. 약탈을 일삼고 호전적이며 광신적인 한 기사 때문에 뻔뻔하고 경솔한 국지전이 일어난다. 1181년, 그는 휴전협정의 폐기를 선언하지도 않고 습격 대상으로 정한 메디나에 인접한 타이마의 오아시스를 향해 전진한다. 한 번의 견제 공격으로 후퇴하게 된 그는 도중에 부유한 대상들을 약탈, 금괴 20만 개를 빼앗는다. 보두앵 4세의 명령을 어기고 그는 살라딘에게 이것들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조르주 타트 <십자군 전쟁 성전탈환의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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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어린 나이지만 대단히 용맹스러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1177년 그의 나이 16살에 그는 카이로에서 북상하여 아스칼론과 예루살렘을 노리던 아이유브군과 몽기사르 전투를 개시했는데, 2만 6천 명의 살라딘 군에 겨우 580명에 불과한 기사들을 이끌고 한 덩이가 되어 돌격한 적이 있었다. 비록 숫자가 턱없이 적다고 해도 그 당시 중무장한 기사들이 뭉쳐 돌격하는 파괴력은 말 그대로 무시무시했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장을 한 살라딘 군은 어린 왕과 그의 기사들에게 순식간에 도륙당했다.[4] 살라딘의 쿠르드족 친위대들까지 달아나려 하자 자신의 안위까지 위험해진 살라딘은 군대를 후퇴시켰다.[5]

이처럼 용맹스러운 기사이기도 했지만, 아직 어려서인지 앞뒤 안 보고 혼자 돌격한 적이 많아서 항상 주변의 기사들이 왕을 지키기 위해 긴장하고 있었다. 1179년에는 돌격했다가 적들에게 둘러싸여 거의 죽을 뻔했는데 보두앵의 최측근이었던 토론의 영주인 험프리 2세가 사실상 자기 몸으로 칼을 다 맞아가며 왕을 구해냈지만 상처가 심해 죽는다.

살라딘의 조카 페루크 샤는 1179년 매복 작전으로 프랑크 족에게 한 번의 승리를 거둔 바 있었다. 그는 벨포트(셰키프 아르눈) 부근 험한 바위 계곡에서 수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보두앵 4세를 생포했으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왕의 구출을 시도한 토론의 험프리 때문에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 용감무쌍한 기사의 죽음으로 프랑크 족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어떤 말로도 훈파리(험프리)를 묘사할 수 없다”고 아랍 역사가(이븐 알 아티르)는 쓰고 있다. “그의 이름은 용맹과 전술의 대명사였다. 그는 진정 무슬림들을 벌주기 위해 신이 퍼뜨린 역병이었다.”

스탠리 레인 폴 <살라딘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By the springs of 1179 the Franks were looking reasonably strong and Baldwin IV led some of his men to the forest of Banias to pillage the cattle of Damascus that were sent to graze there. Saladin's nephew; Farrukh Shah, came upon the Franks by chance and in the ensuring fracas the king's horse bolted and, while trying to rescue him, the elderly constable, Humphrey of Toron, was mortally wounded. The king escaped unharmed, but Humphrey died a few days later. He had been constable for twenty-seven years and one of the ablest Frankish commanders. A generation later the great Islamic historian Ibn-al-Athir wrote of him:' His name was byword for bravery and courage in battle. He was a kind of affliction unleased by God against the Muslims.

1179년 봄까지 프랑크인은 상당히 강력해 보였고, 보두앵 4세는 그의 부하들 중 몇 명을 바니아스 숲으로 이끌고 가서 다마스쿠스에서 보내져서 방목되고 있던 가축들을 강탈했다. 살라딘의 조카인 파루크 샤는 우연히 프랑크족과 마주쳤고, 왕의 말이 싸움에서 너무 튀어나와 있다는 찬스를 확인하였는데, 그를 구하려고 시도하는 동안, 늙은 사령관인 토론의 험프리가 치명상을 입었다. 왕은 무사히 도망쳤지만 험프리는 며칠 후에 죽었다. 그는 27년 동안 사령관이 되었고, 가장 유능한 프랑크족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한 세대 후에 위대한 이슬람 역사가 이븐 알-아티르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의 이름은 전투에서 용맹과 담력의 대명사였다. 그는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신의 가호가 없는 일종의 질병이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이후 보두앵 4세는 그의 복수를 하기 위해 곧바로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와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을 통솔하여 살라딘이 기다리는 시리아로 깊숙히 진격했는데, 이때 낙마하고 만다. 당시에 이미 지병인 한센병이 심해진 탓에 스스로 일어날 수조차 없었으나 병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179년, 살라딘이 시리아를 공격하는 동안 보두앵은 매복을 했는데, 갑자기 그의 말이 뛰어올랐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소년을 구한 늙은 성주(험프리 2세)의 용기 덕분에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특유의 용기를 회복한 후 보두앵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살라딘의 군대와 맞섰다. 리타니 강(Litani river) 가까이까지 갔을 때, 보두앵은 말에서 떨어졌고 끔찍한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는 온몸이 서서히 마비되어서 말에 다시 오를 수 없었다. 전장에서는 한 기사가 그를 등에 업고 다녔다.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A few weeks later the king, learning that Syrian Beduin were raiding the lordships of Beirut and sidon where the harvest had just been gathered mustered the host and marched to Toron to intercept them. Saladin sent a party of cavalry to raid outskirts of Sidon on to June. The led the king to march to the hills of Marj Uyun, accompanied by the master of the Temple and Raymond of Tripoli. Although this force had no difficulty in routing Saladin's raiding party as it was fording the Litani river, the Franks were themselves routed by Saladin who brought his main army against them. The royal bodyguard succeeded in fighting its way to safety, although the king was unhorsed during battle and, being unable to remount without help, had to be carried from the field on the back of a Frankish knight. The count of Tripoli escaped to Tyre, while other Frankish fugitives were rescued by Reynald, lord of sidon, but many Franks were taken prisoner, including Odo of st Amand the master of the Temple, Baldwin of Ibelin and Raymond of Tripoli's stepson, Hugh of St Omer.

몇 주 후, 왕은 시리아의 베두인이 베이루트와 수확을 막 거두어들인 시돈의 군함을 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군대를 무찌르고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토론까지 진군했다. 살라딘은 6월에 시돈 외곽을 급습하기 위해 기마대를 보냈다. 왕은 성전 기사단장과 트리폴리의 레이몬드를 대동하고 마지 우윤의 언덕으로 진군하였다. 비록 이 군대는 살라딘을 습격할 군대를 진군시키면서 리타니 강을 건너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프랑크군은 그들에 맞서 그의 본대를 이끌고 온 살라딘에 의해 패배하였다. 왕실 근위대는 안전하게 전투에 성공했지만, 왕은 전투 중에 낙마하였고, 도움 없이는 말에 다시 탈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크 기사의 등에 업혀 들판으로 옮겨져야 했다. 트리폴리 백작은 티레로 탈출했고 다른 프랑크 탈출자들은 시돈의 영주 레이날드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많은 프랑크인이 포로로 잡혔는데, 그 중에는 성전 기사단장 성 아만드의 오도, 이벨린의 볼드윈과 트리폴리의 레이몬드의 의붓아들 성 오메르의 위그가 있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하지만 레몽 3세와 보두앵 4세를 제외한 예루살렘 왕국과 기사단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살라딘의 포로가 된다. 이들 대부분은 석방되었지만 성전 기사단장은 다마스쿠스의 감옥에서 남을 것을 고집하여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이후 살라딘이 알레포모술 지역을 공략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은 아이유브 왕조의 공격 선상에서 벗어났고 6년간의 평화가 도래한다. 이후로도 보두앵 4세는 말 안장 위에 몸을 묶어서라도 전장에 나섰다.

이렇듯 현명하고 용맹하였으나 한센병 환자였던 보두앵 4세가 오랫동안 재위하거나 혼인해서 후계자를 낳을 가망은 없었다.

젊은 왕은 결혼을 할 수 없었다. 나병이 성적으로도 문제를 일으켰고 군대도 이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던 것 같다.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보두앵 4세는 자식을 낳을 가망성도, 오래 살 가망성도 없었다.

토머스 F. 매든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Baldwin could not marry and beget a legitimate heir because it was believed that leprosy could be sexually transmitted.

보두앵은 결혼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합법적인 상속자를 낳을 수 없었는데, 한센병이 성적으로 전염될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그리하여 신하들과 영주들은 다음 왕위의 강력한 후보자로 떠오른 보두앵의 누이 시빌라 공주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는데, 시빌라는 하필 뤼지냥의 기와 재혼하게 된다(...). 처음에는 보두앵도 이 혼인에 호의적이었지만,[6] 갈수록 지도자로서는 무능한 모습만 보이는 기에게 크게 실망하여 기에게 준 섭정의 지위를 박탈하고 다시 왕국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Although physically weak and impotent, yet mentally he was vigorous, and, far beyond his strength, he strove to hide his illness and to support the cares of the kingdom. When he was attacked by the fever, however, he lost hope of life. He summoned his nobles before him and, in the presence of his mother and the patriarch, he appointed as regent of the realm Guy de Lusignan, count of Jaffa and Ascalon, his sister' s husband, who has been so often mentioned in the preceding pages. He retained the royal dignity, however, and kept for his own use only the city of Jerusalem, with an annual revenue of ten thousand gold pieces.

비록 신체적으로 약하고 무력하지만, 정신적으로 그는 활발했고, 그의 힘을 훨씬 뛰어넘어서, 그는 병을 숨기고 왕국의 통치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열병을 앓았을 때 그는 삶의 희망을 잃었다. 그는 그의 귀족들을 그의 앞에 불러들였고, 그의 어머니와 총대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앞의 페이지에서 자주 언급되어온 그의 누이의 남편인 자파 백작인 기 드 뤼지냥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위엄을 유지하였고, 예루살렘 성은 그의 소유로 유지하려 했는데, 이곳에는 연간 만 피스의 금이 수입으로 되어 있었다.

기욤 드 티레 <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


보두앵 왕은 너무 아파서 거동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1183년 살라딘이 다시 공격해왔을 때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기 드 뤼지냥에게 군대의 지휘권이 맡겨졌는데 이는 그토록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힘겨운 도전이었다. 한동안 양측은 상대를 노려보기만 할 뿐 어느 쪽도 먼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군대 내에서 많은 강경론자들이 전면 공격을 재촉했지만, 좀더 신중한 다른 사람들은, 특히 트리폴리의 레몽은 이에 반대했는데 결국 그들의 제안이 채택되었다. 기의 조심스러운 전술은 강경론자들의 비탄을 샀는데, 이는 그로부터 몇 년 후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된다. 프랑크인들이 싸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살라딘은 돌아서 시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프랑크인들은 이 숨 돌릴 여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병이 위중해지자 보두앵은 예루살렘을 기에게 넘겨주고 기가 보유하고 있던 티레의 해안 도시로 살러 갔다. 그런데 병에 차도가 보이자 왕은 예루살렘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건방지게도 기는 이를 거절했다. 아프든 아프지 않든 보두앵은 이런 종류의 반항을 묵인할 수 없었다. 몹시 노한 보두앵은 귀족회의를 소집하여 기를 물러나게 할 것을 요구했다. ... 한동안, 그는 병마와 싸우며 자신이 직접 통치하려고 결심했다. 이에 기는 발끈하여 아스칼론으로 가버렸고, 왕에 대한 모든 가식적인 충성을 벗어던졌다. 그에게는 강력한 동맹군이 있었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기를 복위시키도록 왕에게 호소했지만 보두앵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King Baldwin recovered from his fever and returned to Jerusalem, but he soon asked Guy to exchange Jerusalem for Tyre. Sir Steven Runciman is assuredly right in his suggestion that the king found the climate of the coast more congenial to his health; certainly he had spent most of the previous year, since he had become dangerously ill, at Acre and Tyre. Guy refused this request this request, perhaps because Tyre, a great commercial centre, was an important source of royal revenue, which Jerusalem was not, but his conduct appeared churlish and the king who was sensitive about his honour, did not take this insult lightly.

보두앵 왕은 열병에서 회복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곧 기에게 예루살렘을 티레와 바꾸자고 부탁하였다. 확실히 해안의 기후가 그의 건강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왕이 알게 되었다는 스티븐 런치만 경의 제안은 옳았다. 확실히 그는 그가 위험한 병에 걸린 이후 전년의 대부분을 아크레와 티레에서 보냈다. 기는 이 요청을 거절했는데, 아마도 거대한 상업 중심지인 티레가 왕실의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무례해 보였고 그의 명예에 민감한 왕은 이 모욕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Baldwin dismissed Guy from the regency and resumed sovereignty. Although Guy had offended him by his refusal to exchange Jerusalem for Tyre. Baldwin was not motivated solely by personal animosity. it was matter of record that while Guy had been in command during the campaign of La Tubanie the other leaders had refused to work with him. For that reason he could not responsibly be left in charge of the army sent to relief of Kerak. Yet the fortress was in urgent need to help and was vital to the security of the kingdom. it was also important that the king's sister and her guests should not fall into the hands of Saladin. The removal Guy form the regency was a public admission that he was not fit to be the king.

보두앵은 기를 물러나도록 시키고 지배를 다시 시작했다. 비록 기가 예루살렘을 티레와 바꾸기를 거부하여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보두앵은 단지 개인적인 적대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라 투바니의 군사 활동 동안 기의 지휘를 받는 다른 지도자들은 그와 함께 일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 기록된 문제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케락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진 군대를 책임 있게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요새는 긴급히 도움을 필요로 했고 왕국의 안보를 위해 필수적이었다. 또한 왕의 여동생과 그녀의 손님들이 살라딘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섭정에서 기를 제거한 것은 그가 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다만 전투에 대해서 기의 작전이 나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내용도 있다.

1183년 9월, 살라딘이 대병력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베트세안(Baisan)을 약탈했다. 기는 재빨리 십자군을 소집해서 왕국 방어에 나섰다. 1만 5천 명 이상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살라딘이 여러 차례 도발을 해왔으나, 기는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살라딘의 의용군이 장기간 전쟁터에 머물 수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떠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살라딘의 군대가 퇴각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보두앵 4세는 살라딘을 공격할 기회를 그대로 넘겼다며 기를 반역자에 겁쟁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는 섭정의 지위를 박탈하고 스스로 왕국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심지어 기와 시빌의 이혼까지 추진했으나, 이는 두 사람 어느 쪽도 원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기는 왕에게 노골적으로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

토머스 F. 매든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그리고 시돈의 르노, 레몽, 그리고 다른 많은 봉신들의 지지를 받아 아직 5세에 불과한 자신의 어린 조카 보두앵 5세[7]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또한 자신 사후에는 당시 기와 대립하고 있던 레몽이 보두앵 5세의 보호자로서 보두앵 5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도록 하였다. 또한 보두앵 4세는 통치를 계속하면서 보두앵 5세를 1183년 11월 20일 공동 지배자로 내세워 자신이 사망하더라도 기에게 왕위가 가지 않도록 했다.

1183년 보두앵 4세는 그에게 섭정을 맡긴다. 그러나 매제의 무능과 교만에 너무나 빨리 실망한 보두앵 4세는 그를 파면하고 대신, 그의 적수이며 왕국에서 가장 총명한 인물로 인정되고 있던 트리폴리 백작 레몽을 그 자리에 앉혔다. 레몽은 시빌이 첫 결혼에서 낳은 아들을 보두앵의 후계자로 지명한다. 보두앵 4세의 임종시 겨우 대여섯 살에 불과한 보두앵 5세가 왕위에 오른다.

조르주 타트 <십자군 전쟁 성전탈환의 시나리오>


1185년 초에는 끔찍한 질병에 대한 보두앵의 힘겨운 투쟁도 거의 종말에 가까워온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 그의 유언이 궁정회의에서 발표되었다. 절대로 기는 섭정이 될 수 없었다. 그 영예는 트리폴리의 레몽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고, 조카인 보두앵이 성년이 되면 왕이 될 것이었다. 그 후견인 역할이 레몽에게 제의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만일 소년이 죽기라도 한다면(그리고 실제로 약골이었다.) 분명히 의심이 후견인에게 쏠릴 테니 레몽은 이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신 조슬랭 드 쿠르트네에게 그 자리가 돌아갔다. 그 공개 유언은 아주 시기적절했다. 그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아 이 용감한 왕이 영원한 안식을 위해 하늘로 불려갔기 때문이다.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Perhaps Raymond of Tripoli was attempting to us the council to have himself designed as Baldwin's heir, with the support of Behemond III and the Ibeins. If so, he was foiled by Agens of Courtenay who, as William of Tyre relates, suggested that the king's nephew, Baldwin, the son of Sibyl and William of Montferrat, should be crowned co-king. This met with general approval, since, apart from his mother, Prince Baldwin had the best claim to the throne. On 20 November 1183 he was crowned and anointed co-king in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was acclaimed by the assembled clergy and people, and received the homage of all the royal vassal except his stepfather, Guy of Lusignan.

아마도 트리폴리의 레이몬드는 보에몬드 3세와 이벨린 부부의 지지로 보두앵의 후계자를 구성하기 위해 이 협의회를 시도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에 의해 좌절되었을 것이며, 그는 티레의 윌리엄과 연대하여 시빌과 몬페라트의 윌리엄의 아들인 보두앵을 공동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것은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면 보두앵 왕자가 왕위에 대한 최고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찬성을 받았다. 1183년 11월 20일, 그는 성묘교회에서 왕위에 올랐고, 모인 성직자들과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고, 그의 의붓아버지 뤼지냥의 기를 제외한 모든 왕실 신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된 내용대로 1184년 초에 보두앵은 시빌라와 기가 맺은 혼인까지 무효로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는 이에 반발하여 보두앵의 엄중한 경고를 무시한 채 아내 시빌라를 데리고 자신의 영지인 아스칼론으로 돌아갔으며[8] 이미 예루살렘 왕국에 귀순하여 보호를 받던 베두인족을 대량 학살하기까지 하였다.

Meanwhile the hatred between the king and the count of Jaffa, nourished by secret causes, continued to grow stronger day by day. ... the king seemed openly to be seeking reasons for separating his sister from her husband and annulling the marriage. In pursuance of this intention, Baldwin went without disguise to the patriarch and demanded that, as he intended to make complaint against the marriage, a day be set when the annulment might be solemnly pronounced in the presence of the patriarch.

한편, 왕과 자파 백작(기 드 뤼지냥) 사이의 증오심은 비밀스러운 원인들로 길러지면서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 왕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누이를 그녀의 남편과 떼어놓고 결혼을 무효로 하는 이유를 찾는 것 같았다. 이러한 의도에 따라, 보두앵은 총대주교에게 숨김없이 다가가 결혼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려는 의도로서, 총대주교 앞에서 엄숙하게 결혼 무효가 선고될 수 있는 날을 정하라고 요구했다.

기욤 드 티레 <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


Heraclius, who was a friend of Guy's may have forewarned him of the king's intention to have his marriage annulled, and this may have so, but in any case the king had made no secret of his aims. Baldwin, it would seem, had reckoned without sibyl's great attachment to her husband, which was constant throughout her life. She joined Guy at Ascalon in 1183 and because the both refused to attend the patriarch's court no action could be taken about annulling their marriage.

기의 친구였던 헤라클리우스(총대주교)는 그에게 그의 결혼을 무효화하려는 왕의 의도를 미리 경고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왕은 그의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보두앵은 남편에 대한 시빌의 큰 애착은 그의 고려에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그녀의 일생 동안 변함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1183년 아스칼론에서 기와 합류했고, 두 사람은 총대주교의 법정에 출두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을 취소하는 것에 대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Baldwin summoned Guy as his vassal to attend him in Jerusalem. Guy excused himself on the grounds of ill-health and after this procedure had been followed several times, the king, in accordance with Jerusalem custom, was carried to Ascalon, attended by members of the High Court, to require the count' attendance in Jerusalem in person. Guy closed the gates of the city against him and the inhabitants stood on the battlements and towers to watch as the king raised his hand to knock on the gates and demand admission, but the gates remained shut. King baldwin had observed the legal forms and his vassal had defied him The king then went straight to Jaffa where the citizens received him ceremonially, and he installed a royal governor in the castle thus depriving Guy of half of his fief.

보두앵은 기를 예루살렘에 그의 신하로 불렀다. 기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면제를 요청했고, 이 절차가 여러 번 이어진 후, 왕은 예루살렘의 관습에 따라, 백작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고위 어전회의에 참석하라는 것을 직접 요구하기 위해 아스칼론으로 향했다. 기는 성문을 닫고, 백성들은 성벽과 탑 위에 서서, 왕이 손을 들어 성문을 두드리고 입장을 요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성문은 닫힌 채로 있었다. 보두앵 왕은 법적 형식을 준수했고 그의 신하는 그에게 반항했다. 왕은 곧바로 시민들이 그를 맞이하는 자파로 가서, 성안에 왕실의 관료를 설치했고, 기의 영지의 절반을 빼앗았다.

Patriarch Heraclius, flanked by the masters of the Temple and the Hospital, knelt before the king and begged him to receive Guy back into favour. This was sound political sense, since it was obvious that Guy would only surrender Ascalon if forced to do and the kingdom could not afford a civil war. The king would not allow this proposal to be considered, This does not imply that illness had warped his judgment: no twelfth-century king could have pardoned a vassal who had so publicly defied him. Nevertheless The patriarch and the masters, who evidently thought that some compromise should be possible, were exasperated by the king's intransigence, stormed out of the assembly rode away from Acre; but it would appear that their intervention had swayed the curia generalis for the king took no futhermore action against Guy who remained in undisturbed possession of Ascalon.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는 성전기사단, 병원기사단의 단장들과 나란히 서서 왕 앞에 무릎을 꿇고 기에게 다시 환심을 사달라고 간청했다. 기에게서 강제로라도 아스칼론을 항복시킬 것이 분명했고 왕국은 내전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건전한 정치적 의미였다. 왕은 이 제안이 고려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병이 그의 판단을 뒤틀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2세기 왕은 그렇게 공개적으로 반항했던 신하를 사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타협이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 총대주교와 단장들은 왕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화가 나서, 의회를 벗어나 아크레를 향해서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개입이 왕을 위한 curia generalis를 동요시켰던 것처럼 보이는데, 왕은 아스칼론의 소유를 방해받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기에게 더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The king received the news of Count Guy of Jaffa's raid on the Beduin in the fief of Darum. Who were under his protection as he was returning from Acre to Jerusalem, He was very distressed by this, and subsequently contracted the illness which caused his death.

왕(보두앵 4세)은 자파 백작이 다룸의 영지에 있는 베두인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그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한편 그는 아크레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그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9]


왕실의 내분이 벌어지는 가운데 살라딘으로부터 케락(Kerak) 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두앵 4세는 좋지 못한 몸으로 군사 원정을 강행했고, 가마에 실려 움직이면서도 전장에 나섰다. 그 결과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됐다.[10]

실제로 말년에는 온몸으로 전이된 나병 때문에 스스로 몸을 못 가누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나병균이 눈까지 침투해서 시력까지 잃었다고 하니 그 고통을 짐작케 한다.

By his early twenties, muscle weakness makes him unable to walk. He gets blinded, probably due to keratopathy related to facial nerves involvement. Repeated attacks of fever lead to progressive worsening of his disease. He finally dies in Jerusalem, aged twenty-five, probably due to a septicaemia from infected sores.

20대 초반이 되면 근육이 약해져 걸을 수 없게 된다. 그는 눈이 멀었는데, 아마도 안면 신경과 관련된 광선각막병증 때문일 것이다. 열이 반복되면서 그의 병은 점차 악화되었다. 그는 마침내 25세의 나이로 예루살렘에서 사망했는데 아마도 감염된 상처로 인한 패혈증 때문일 것이다.

Guerrero-Peral AL <Neurological evaluation of the leper king Baldwin IV of Jerusalem>


그의 이러한 책임감에 대해서는 기욤 드 티레의 한 서술이 있다. 위의 내용이 그의 서술을 해당 책에서 인용한 것이고, 아래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내용이다.

The leprosy which had affected him since the beginning of his reign ... became much worse than usual. He had lost his sight and the extremities of his body became completely diseased and damaged, so that he was unable to use his hands and feet. Yet although some people suggested to him that he should abdicate and lead a retired life, drawing and income from the royal demesne, he had refused to surrender either the royal office or the government to kingdom, for although his body was weak and powerless, yet he was strong in spirit, and made a superhuman effort to disguise his illness and shoulder the burdens of kingship.

그의 재위 초기부터 그에게 영향을 끼친 한센병은... 평소보다 훨씬 심해졌다. 그는 시력을 잃고 몸의 끝부분이 완전히 병들고 손상되어 손발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퇴위하고 왕실 영지에서부터 이끌어진 수입을 얻으며 은퇴 생활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었지만, 비록 몸이 약하고 힘이 없었지만 그의 정신은 강했기 때문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고귀한 직무나 왕국의 정부 둘 다 모두 내주는 것을 거부했고, 병을 위장함과 함께 왕의 존엄을 어깨에 짊어지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Because of his illness Baldwin must have found his royal duties very burdensome ; even if his civil functions were chiefly ceremonial and the main business of state was discharged by his ministers, he had to preside at meetings of The High Court, give audience to foreign envoys, receive the homage of vassals and carry out all the normal public duties of a king. This must have been troublesome even in his early years when his leprosy first apparent, but towards the end of his reign, when he could no longer see, or walk unsupported, or use his finger, such state occasions must have been intolerable.

그의 병 때문에 보두앵은 그의 왕실의 의무를 매우 무겁게 여겼음에 틀림없는데 비록 그의 민사 업무는 주로 의례적이고 그의 장관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고위 어전회의를 주재하고,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고, 신하들의 경의를 받고, 모든 정상적인 공공의 의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왕의 나병이 처음 나타났던 그의 초창기 시절에도 이것은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 그가 더 이상 앞을 볼 수도, 걷지도, 손가락을 사용할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러한 국가적인 행사는 견디기 힘들 만큼 컸을 것이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인간적 고통을 프랑스의 왕인 루이 7세에게 토로한 적도 있었다. 여기에는 왕국을 이끌어갈 후계자를 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To be deprived of the use of one's limbs is of little help to one in carrying out the work of government. If I could be cured of the disease of Naaman, I would wash seven times in Jordan, but I have found in the present age no Elisha who can heal me. It is not fitting that a hand so weak as mine should and when my sickness increases the enemy's daring ... I therefore beg you immediately choose one of the to take charge of this Holy Kingdom. For We are prepared to receive with affection whomever you send Us, and We will hand over the kingdom to a suitable successor.

팔다리의 사용을 박탈당하는 것은 관직을 수행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아만의 병이 나을 수 있다면 요르단에서 일곱 번이나 씻을 텐데, 지금의 시대에는 나를 치료할 수 있는 엘리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손만큼 약한 손과 내 병이 적의 대담성을 증가시키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즉시 이 성지의 왕국을 책임질 사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를 간청한다. 우리는 너희가 누구든지 우리에게 보내면 애정을 가지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고, 우리는 왕국을 적당한 후계자에게 넘겨주겠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여담이지만 사망하기 몇년 전부터는 나병으로 얼굴이 심하게 망가져서 상해 제례 때 쓰는 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공식 석상에 나왔다고 한다.[11][12]

이 상황에서 프랑크인들은, 그리고 그는 서쪽의 유럽 사회에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

1184년,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단장들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의 왕들과 독일 황제에게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서 서유럽으로 간다. 그러나 그들의 호소는 빛을 보지 못하고 원조의 손길은 없었다. 프랑크족은 다시 홀로 살라딘과 맞서게 된다.

조르주 타트 <십자군 전쟁 성전탈환의 시나리오>


In early 1185, Baldwin IV decreed that the Pope, the Holy Roman Emperor and the Kings of France and England were to be approached to choose between his sister, Sybilla, and their half-sister, Isabella, if Baldwin V died before reaching the age of majority.

1185년 초, 보두앵 4세는 보두앵 5세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할 경우, 교황, 신성 로마 황제,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에게 그의 누이 시빌라와 그들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교섭하라고 명령했다.

영어위키 Aimery of Cyprus


He had sent to ask for help from western rulers and specially from his Angevin Kinsmen, to care for the realm during the minority of his nephew, and had made a superhuman effort to remain head of state until that help arrived but his bodily strength had not proved commensurate with his strength of will. When he knew that he was dying he had tried to ensure that the government would continue to function smoothly after his nephew came to power.

그는 그의 조카가 미성년자인 동안 서구의 통치자들, 특히 그의 앙주 가문 국왕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고, 그 도움의 손길이 도착할 때까지 국가 원수로 남으려는 초인적인 노력을 했지만 그의 체력은 그의 의지력에 걸맞지 않았다.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그의 조카가 집권한 후에도 정부가 계속해서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노력했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1184년에 모후인 아녜스가 아크레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불과 몇달 후인 1185년 봄에 보두앵 4세 역시 악화된 나병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사망했다. 향년 24세. 어린 시절부터 병마로 고통받으면서도 일평생을 왕국을 위해 헌신했던 군주가 안타깝게 요절한 것.[13]

트리폴리 레몽 3세는 1184년 여름에 케락에서 보두앵 4세와 마지막으로 살라딘과 전투를 치르고 케락을 구한 후 이어지는 겨울에 살라딘과 4년간의 평화 협정을 맺어놓아 대외적인 정세에서 후대를 대비해두기도 했다.

It was he who relieved Kerak in the summer of 1184 and in the following winter made peace with Saladin for four years. For a time all went well.

이것은 그가 1184년 여름 케락을 구해주었고 이어지는 겨울에 살라딘과 4년간 평화 협정을 맺어둔 것이다. 한동안은 모든 것이 잘 되었다.

Stevenson, W. B., <The Crusaders In The Eas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07.


After Baldwin V's crown-wearing the members of the High court stayed in Jerusalem since it was evident that the leper king was dying Even Prince Bohemond came there from Antioch. On the day he died the king summoned his vassals for the last time, and they came to pay their respects to the young man who had ruled Jerusalem for eleven years. The good-looking child whom William of Tyre had tutored and who loved riding and become blind, crippled and deformed Yet he had never sheltered behind his illness in order to escape form the duties of state: he had led his army in battle until he could no longer ride and had then been carried in a litter at the head of his host. Until within a few days of his death he had been present at meetings of the High Court and been concerned with arrangements for the succession. Few rulers have remained executive heads of state when handicapped by such severe physical disabilities or sacrificed themselves more totally to the needs of their people.

보두앵 5세가 왕관을 쓴 후, 나병 왕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고위 어전회의 구성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심지어 보에몬드 공작도 안티오크에서 그곳으로 왔다. 그가 죽은 날, 왕은 마지막으로 신하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은 예루살렘을 11년간 다스린 그 젊은이에게 경의를 바치기 위해 왔다. 티레의 윌리엄이 가르쳤으며, 말을 타는 것을 좋아했고 그리고 장님이 되고, 몸이 불구가 되어 볼품없어진, 그 잘생긴 아이는 국가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병 뒤에 숨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을 때까지 전투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다가, (그 후에는) 가마 위에 누워 있으며 그의 군대에서의 수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 며칠도 안 될 때까지 그는 고위 어전회의의 회의에 참석하여, 세습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한 심각한 신체적 장애로 인해 기능할 수 없을 때, 혹은 그들 사람들의 필요에 더욱 전적으로 그들 자신을 희생하면서, 국가 원수로 남아 있는 통치자들은 거의 없었다.

He was buried near his father in the chapel of the Latin kings in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at to foot of Mount Calvary, the most holy place in Christendom. Which he had striven successfully to defend throughout his reign. He was not quite twenty-four years old.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거룩한 곳인 캘버리 산기슭에 있는 성묘교회의 라틴 왕들의 예배당에서 그의 아버지 근처에 매장되었다. 그것은 그가 통치 기간 내내 성공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는 아직 완전하게는 스물네 살이 아니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만일 그가 한센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생존해서 여느 왕처럼 혼인하고 후사도 두었다면, 예루살렘 왕국은 더 오랫동안 존속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동네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 애초에 왕국이 멸망을 면하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그가 장수하고 후사를 남겼으면 왕국이 그토록 빠르고 어이없게 멸망하진 않았을 터이다.[14] 그의 사후 왕위는 조카 보두앵 5세가 물려받았으나 요절했고, 또 그 뒤를 이은 누나 시빌라는 어리석고 무능한 기 드 뤼지냥에게 왕권을 넘겨 버린데다 그나마도 오래 살지 못하고 30대에 병으로 요절했다. 그 다음 계승자는 이복 여동생 이자벨이었는데, 이자벨은 왕위 계승권을 노린 남자들에게 이리저리 팔려 다니다가 역시 30대에 죽었다. 보두앵 4세의 정치 철학이 유지되기는커녕 왕통의 계승조차도 안정적이지 못했던 것. 이런 판국이었으니 국가의 존속을 바랄 수가 없었다.

It would appear that Baldwin judged rightly that there was nobody except himself who could hold the kingdom together unless some powerful western ruler would com and take on the task. For although william of Tyre tells us often how popular Raymond of Tripoli was, on both occasions when he tried to seize power he failed to command enough support. Nobody refused to serve Baldwin IV, who was the anointed king, and despite the divisions among the two years following his death show, not one else was capable of holding in check the divisions among the Franks which did and so much to facilitate Saladin's victory in 1187.

보두앵은 강력한 서구의 통치자가 와서 그 임무를 맡지 않는 한 왕국을 함께 지탱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올바르게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티레의 윌리엄은 트리폴리의 레이몬드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종종 우리에게 말해주지만, 그가 권력을 잡으려고 할 때 그는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아무도 왕으로 추대된 보두앵 4세를 섬기기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의 죽음 이후 드러난 2년간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1187년 살라딘의 승리를 돕는 데 기여한 프랑크인 사이의 분열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15]



3. 평가[편집]


''십자군 왕국은 마지막 순간에 가장 훌륭한 왕을 만났다.''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41부 십자군 전쟁 3편>


''16살에 권력을 손에 넣은 나병환자인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는 기묘한 책략으로 8년 동안이나 살라딘 대왕을 꺾었다.''

윌리엄 위어 <세상을 바꾼 전쟁>


''보두앵 4세 사망 후 그리스도교 진영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왕다운 왕을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류광철 <이슬람 제국(무함마드와 살라딘)>


''서방 사람들에게 ‘살라딘’으로 잘 알려진 쿠르드의 유능한 군주 살라흐 앗딘 이븐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와 카이로를 하나의 술탄 왕국으로 통일시키며, 예루살렘으로부터 프랑크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영토적 영속성을 이어가며 팔레스타인을 차지하려는 목표를 서서히 완성시켜 나갔다. 그 당시 왕위는 어렸을 때부터 나병을 앓고 있던 보두앵 4세(1161-1185, 1174년부터 왕)가 차지하고 있었다. 보두앵은 오랫동안 살라딘을 저지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음모와 대립의 분위기를 제압하고 있었다.''

움베르토 에코 <중세 2 : 1000~1200: 성당, 기사, 도시의 시대>


''Although he suffered from leprosy from childhood, yet he strenuously preserved the frontiers of the kingdom of Jerusalem and won a remarkable victory over Saladin at Mont Gisard, and as long as he lived he was victorious.''

''어린 시절부터 한센병을 앓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국경을 열심히 보존하고 몽기사르에서 살라딘에게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고,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승리하였다.''

이탈리아 역사가 크레모나의 시카르드


''What most commands our admiration is Baldwin's strength of will, which enabled him to discharge his royal duties despite the severity of his illness. His contemporaries admired his for that too, but they admired him even more, because, despite his disabilities, he was a successful ruler.''

''우리가 감탄할 만한 것은 보두앵의 의지의 힘인데, 그의 병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지로 왕실의 의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도 그에 대해 감탄했지만, 더 큰 존경을 표했다. 왜냐하면 그의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공적인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노팅엄 대학교 명예교수 버나드 해밀턴


''Baldwin struggled bravely to discharge his duties and accompany his troops in the field.''

''보두앵은 용감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그의 부대와 함께 전장에 나가기 위해 애썼다.''

스티븐슨 W. B.[16]


''Les historiens occidentaux se montrent en revanche bien plus généreux. L'historien britannique Steven Runciman considère le roi comme un modèle de courage et le décrit comme doté d'un sens politique aiguisé.''

''반면에 서양 역사학자들은 훨씬 더 관대하다. 영국의 역사가 스티븐 런치만은 왕을 용기의 본보기로 여기고, 그를 날카로운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했다.''

영국 역사학자 스티븐 런치만[17]


''Sa douleur et son contrôle de soi sont probablement les figures les plus nobles de toute l'histoire des Croisés.La figure héroïque du héros, couverte de pus et d'acné, porte l'image d'un saint.Je voudrais dessiner ce portrait pur du roi français de l'au-delà de l'oubli injuste, et le placer aux côtés du sage empereur Marcus Aurelius et du roi Louis."''

'“그 고통과 (거기에서) 자신을 이기려는 것으로 채워진 모습은 십자군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도 아마도 가장 고귀한 모습일 것이다. 영웅의 영웅적인 자태는 고름과 부스럼으로 뒤덮이면서도 성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프랑스가 낳은 왕의 순수한 초상을 부당한 망각의 저편에서 꺼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현제나 루이 성왕 곁에 두고 싶다.”''

프랑스 역사학자 르네 그루세


''Baldwin showed qualities of leadership and assumed full control when he came of age, but his leprosy became worse and it was clear he wold not live long.''

''보두앵은 리더십의 자질을 보였고 그가 성년이 되자 (그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취하였으나 그의 한센병은 악화되었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다.'

Faris GLUBB[18]


''The greatest of the Christian kings to rule Jerusalem during the Crusades began life as a hapless boy who seemed unfit to rule. ... Historians marvel that Baldwin overcame his sickness to become a wise and able ruler. He also proved an ace strategist who scored some of the kingdom's biggest triumphs against Saladin, the Saracen leader who had vowed to drive the Crusaders from the Holy Land.''

''십자군 전쟁 동안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그리스도인 왕들 중 가장 위대한 왕은 통치에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불행한 소년으로 삶을 시작했다. ... 역사학자들은 보두앵이 자신의 병을 극복하고 현명하고 유능한 통치자가 되었다고 경탄한다. 그는 또한 성지에서 십자군을 몰아내겠다고 맹세했던 사라센 지도자 살라딘을 상대로 왕국의 가장 큰 승리를 거둔 뛰어난 전략가임을 증명했다.''

DOUG TSURUOKA[19]


''In the end, the Muslims’ vast resources of wealth and manpower were far greater than the Crusaders’, and the final result of the civilisational clash was never in question. But it would take Saladin another 10 years to expel the Crusaders from Jerusalem, and others would spend another hundred years pushing the Crusaders out of the Near East completely. For the time being, the unlikeliest of teenage rulers had saved the kingdom.''

''결국, 무슬림들의 막대한 부와 인력 자원은 십자군을 압도했고, 문명 충돌의 최종 결과는 결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살라딘이 십자군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는 데는 10년이 더 걸렸고, 십자군을 근동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는 데 100년을 더 보냈다. 한동안은, 10대의 통치자로 가장 가망 없어 보이는 자가 왕국을 구했다.''

Dominic Selwood[20]


''Baldwin IV was perhaps one of the more remarkable kings in the medieval Christian world. He is not remembered for great military campaigns, despite the fact he beat the infamous Saladin on the battlefield on several occasions. Nor is his name associated with a long and illustrious reign as he died at young age. He is renowned because he developed leprosy. Perhaps more to the point, he developed leprosy and still maintained his position on the throne, becoming a successful ruler. Many kings over the ages have suffered with disease and continued to rule. Hardly any have managed to do so if their illness was leprosy. It was so feared in the medieval world and associated so closely with severe social consequences that to overcome these obstacles was an incredible feat.''

''보두앵 4세는 아마도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왕들 중 하나였다. 그는 전장에서 이름 높은 살라딘을 여러 차례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군사적 업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이름은 그가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길고 화려한 통치와는 관련이 없다. 그는 한센병에 걸려서 유명하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는 한센병에 걸렸으나 여전히 왕좌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며 성공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왕들이 질병으로 고통 받아왔고 계속해서 통치해왔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병이 한센병이었다면 거의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중세 세계에서 매우 두려운 것이었고 중대한 사회적 결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은 놀라운 업적이었다.''

의학사 전문가 피어스 D. 미첼


그의 품성과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로버트 페인[21]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He was kindly and solicitous toward others, he understood exactly what was demanded of him, and he was learned about all the affairs of the Levant, but what was most important about him during his brief reign was a certain style, a way of looking at life with eagerness and grace,

그는 남에게 친절하고 간곡하게 대했고, 자신의 책무를 정확히 이해했으며, 레반트의 모든 일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인생을 열망과 은총을 가지고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The Dream and the Tomb>[22]


그의 기사로서의 기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Baldwin initially enjoyed his role as battle lader but by the time his rode on his last long-distance razzias in 1182, when the disease had attacked his hand and feet, he must found the experience anything but pleasurable. when finally he had to be carried into battle in a litter slung between two horses, unable even to see what was occurring around him, as happened when he went he went the relief of Kerak in 1183 and again 1184. only sheer willpower can have enabled him to stay the course. ... Baldwin was by training and temperament a knight, whose primary vocation was to lead his army in battle and to fight in defence of the Holy Places. The most distinctive character traits that he displayed, according to the reports of eye-witnesses, were knightly ones : and physical courage and a highly developed sense of honour. He courage is shown in his willingness to ride into battle even though he was unable to remount if were unhorsed. His sense of honour is seen in his refusal for two years to be reconciled with Raymond of Tripoli after he had rebelled against him, and in his refusal over to be reconciled with Guy of Lusignan after he had denied him service.

보두앵은 처음에는 전장의 지도자로서의 그의 역할을 즐겼지만, 1182년 그의 마지막 장거리 원정들에서 말을 탔을 때와 질병이 그의 손과 발을 공격했을 때에 그는 그 경험이 결코 즐겁지 않다는 것을 발견해야만 했다. 마침내 그는 1183년, 그리고 다시 1184년에 케라크 요새를 구원하러 갔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그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두 말 사이에 놓인 가마 속에서 전투에 임해야 했다. 그는 오직 순수한 의지력만으로 이를 계속했다. ... 보두앵은 기사로서의 기질을 단련 받았고, 그의 주된 사명감은 전투에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성지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목격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보여준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은 기사도, 그리고 신체적 용기와 드높은 명예감이었다. 그의 용기는 비록 낙마하면 다시 오를 수 없음에도 기꺼이 전투에 임하려는 그의 의지에 나타나 있다. 그의 명예감은 그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트리폴리의 레이몬드와 그 후 2년 동안 화해하기를 거부한 것과, 뤼지냥의 기가 그를 향한 충성을 거부한 후에, 그와 화해하기를 거부한 것에서 드러난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살라딘은 보두앵 4세에 대해서 적이지만 훌륭한 지도자로 여기고 높이 평했다. 물론 그와 별도로, 보두앵 4세 생전에는 놔두었던 예루살렘 왕국이 그의 사후 망해가자 접수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살라딘은 자신보다 20년 이상 어린 보두앵 4세를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했고 진정한 군주로 대접했다. 마흔이 넘은 완성된 군주인 살라딘과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는 호적수로 서로를 인정했다.

채준 <말의 전쟁, 최강 기마대의 기록>


The defeat of Hattin and the loss of the kingdom have cast a shadow on the reign of Baldwin IV in the minds of historians ever since Ernoul wrote his Chronicle. Attention has focused on those aspects of the reign which contained the seeds of future Frankish weakness and aided Saladin's victory. It is important to remember that this is not a view which people living at the time would have shared. The leper king's subjects recognised that they faced great dangers, but they did not expect to be defeated, and, indeed, while Baldwin lived they were not. Under his leadership they frustrated for some six years Saladin's plans to take over Nur ad-Din's empire and encircle the crusader states ; while Saladin's direct attacks on Frankish territory were for the most part ineffective. He suffered a disastrous defeat at Mont Gisard in 1177, and a decisive defeat at Le Forbelet in 1182 ; his newly formed navy did not cause the Franks any serious problem, and when his tried to capture Beirut by a joint land and sea operation his driven off. He twice failed to capture the fortress of Kerak even though he brought huge forces against it. His victories in the forest to Banias and the Mari Uyun in 1179 were fortuitous and for that reason were not followed through. Indeed, the only important successes that he achieved against the Franks in Baldwin IV's reign were his capture and demolition of Le Chastellet in 1179, and the destruction of Prince Reynald's fleet in 1182, and neither of these victories led to any loss of Frankish territory.

하틴에서의 패배와 왕국의 상실은 에르눌이 <연대기>를 쓴 이후부터 보두앵 4세의 치세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관심은 향후 프랑크인들의 약점과 살라딘의 승리를 도운 그 씨앗을 담고 있는 재위기간의 그런 면들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당대인들이 널리 공유했을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병왕의 신하들은 자신들이 큰 위험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패배하리라 생각지 않았고, 보두앵은 실제로도 지지 않았다. 그의 지도 아래 그들은 누르 앗 딘의 제국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를 포위하려는 살라딘의 계획을 좌절시켰지만, (반대로) 살라딘의 프랑크의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대부분 효과가 없었다. 그는 1177년 몽기사르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1182년 르 포블렛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는데 새로 결성된 그의 해군은 프랑크족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았고, 그가 육지와 해상의 공동 작전으로 베이루트를 점령하려 했을 때 그는 격퇴되었다. 그는 케락 요새에 맞서 거대한 병력을 이끌고 왔음에도 두 번이나 점령하지 못했다. 1179년 바니아스 숲과 마지 우윤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우연이었고, 그 행운은 계속되지 못했다. 사실, 그가 보두앵 4세의 치세에 살라딘이 프랑크족을 상대로 이룬 오직 중요한 성공은 1179년 라 체스텔렛을 함락하고 파괴한 것과 1182년에 레이날드 공작의 함대를 파괴한 것이었고, 이 두 승리 모두 프랑크인의 영토를 빼앗은 것이 아니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또한 살라딘의 전기 작가인 무슬림 학자 Imad al-din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In spite of [Baldwin's] illness the Franks were loyal to him, they gave him every encouragement ... being satisfied to have him as their ruler ; they exalted him ... they were anxious to keep him office, but they paid no attention to his leprosy.''

''[보두앵의] 병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인들은 그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들은 그를 통치자로 둔 것에 만족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들은 그를 고귀하게 대접하며 왕위를 유지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의 한센병은 못내 외면하고 있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다마스쿠스의 한 노인이 7차 십자군 당시 한 십자군에게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have seen a time when King Baldwin of Jerusalem, the one who was a leper, beat Saladin although he only had 300 armed men against Saladin's 3,000. But now your sins have come to such a pass that we round you up in the fields like cattle.''

''나는 한센병 환자였던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이 3,000명에 대항해 300명에 불과한 무장 병력으로 살라딘을 이긴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 너희의 죄악이 너무 깊어서 우리들은 너를 소떼처럼 들판으로 내몰았다.''

영어위키 Baldwin IV of Jerusalem


다만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The king is not such a man as can rule that land, since he, that is to say Baldwin who holds the government of the realm, is so severely afflicted by the just judgment of God, as We believe you are aware, that he is scarcely able to bear the continual torments of his body.

왕은 그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즉, 왕국을 지배하는 보두앵은 하느님의 틀림없는 심판으로 매우 심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그의 육체에 계속되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23]

[24]


또 보두앵 4세 말기에 예루살렘을 여행한 무어인 순례자 Ibn Jubayr의 평은 다음과 같았다.

This pig, the lord of Acre whom they call king, lives secluded and is not seen, for God has afflicted him with leprosy. God was not slow to vengeance, for the affliction seized him in his youth, depriving him of the joys of his world. He is wretched here, but the chastisement of the here after is severer and more lasting.

이 돼지, 그들이 왕이라고 부르는 아크레의 영주는 신께서 한센병 환자로 그를 괴롭히셨기 때문에 은둔생활을 하며 보이지 않는다. 신은 복수를 늦추지 않으셨다. 그 고난이 젊은 시절에 그를 사로잡아서, 그의 세상의 기쁨을 빼앗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비참하지만, 이후의 처벌은 더 가혹하고 더 지속된다.

Marx, Francesca Ann <Transformation and Medieval Aristocracy: Werewolves, Lepers, and the King’s Body>



4. 인간관계[편집]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2세와는 사촌지간이다. 헨리 2세의 조부인 앙주 백작 풀크 5세가 예루살렘의 멜리장드와 재혼하여 얻은 자식이 보두앵 3세와, 보두앵 4세의 부친인 아모리 1세이다. 일단 헨리 2세가 사촌형으로 보두앵보다 28세나 많다.

그의 신하였던 발리앙 디블랭과는 서양의 군신관계보다 동양의 군신관계에 훨씬 가까운 인상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서양에서의 충성 관념은 동양의 유교적 관념과는 많이 달라서, 주군이 권력을 잃으면 신하가 충성을 거두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발리앙은 병으로 오늘 내일 하는데다 후사도 없는 보두앵 4세에게 진심으로 충정을 바쳤고, 보두앵 4세 또한 발리앙을 매우 깊이 신임했다. 왕은 발리앙이 자신의 계모(즉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대비)이자 동로마 황제의 질녀인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하도록 주선했고, 죽기 전에는 후계자인 조카 보두앵 5세의 안위를 부탁하기도 했다. 이들은 서양판 최고의 협과사 조합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서양에서 올바른 군주와 신하의 관계로 묘사된다.


5. 이야깃거리[편집]


기욤 드 티레는 보두앵 4세의 외모에 대해 추측할 만한 기록을 남겼다.

His body was of pleasing stature, as if it had been measured proportionally so that he was taller than the average, but smaller than the very tall... His face was attractive... His eyes were bright, and somewhat protruding; his nose, like his brother's, aquiline; his hair yellow, and slightly receding; his beard covered his cheeks and chin with pleasing fullness.... He was fat beyond measure, in such a way that he had breasts like a woman, hanging down to his belt.... In every respect he resembled his father, not alone in face but in his entire mien; even his walk and the tones of his voice were the same.

아모리 1세의 몸은 평균보다 키가 크지만 아주 큰 키보단 작을 정도로 비례적으로 측정된 것처럼 보기 좋은 키였다. <중략> 그의 얼굴은 멋들어졌다. 그의 눈은 밝고 다소 돌출되었다. 그의 코는 그의 형제처럼 메부리였고 머리는 노랗고, 이마가 다소 벗겨졌고, 수염은 뺨과 턱을 보기 좋게 가득 채웠다. <중략> (말년에는) 그는 여자가 젖가슴이 달린 것처럼 그의 허리띠까지 늘어질 지경으로 뚱뚱했다 <중략> 모든 면에서 보두앵 4세는 그의 아버지를 닮았다. 얼굴뿐만 아니라 풍채 전체에서도, 그의 걸음걸이와 목소리 톤도 같았다.

기욤 드 티레 <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


킹덤 오브 헤븐에서 묘사된것처럼 광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실리주의자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구에 돈을 적극적으로 갖다바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Indeed, apart from his foundation of the abbey of St Catherine's in campo belli as thanksgiving for his victory at Mont Gisard, he was not a generous benefactor of the church.

확실히 그가 몽기사르 전투에 승리한 것에 감사드리며 캄포 벨리에 있는 성 캐서린 수도원을 설립하는데 돈을 보태기는 했지만, 교회의 인심 후한 후원자는 아니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6. 주요참고문헌[편집]


그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참고할 수 있는 도서 및 논문은 다음과 같다.
  •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문학동네, 2011.
  •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시공사, 2012.
  • 토머스 F. 매든,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루비박스, 2005.
  •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한길사, 2004.
  • 김능우, 박용진 편역, <기독교인이 본 십자군, 무슬림이 본 십자군>,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0.
  • Bernard Hamilton, , Cambridge University, 2005.
  • René Grousset, , Académique Perrin, 1936.
  • Marx, Francesca Ann, , University of California, 2015.

이와 함께 사전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는데, <The Leper King and His Heirs>의 Paperback Re-issue이다.

The reign of king Baldwin IV of Jerusalem (1174-85) has traditionally been seen as a period of decline when, because of the king's illness, power came to be held by unsuitable men who made the wrong policy decisions, Notably, They ignored the advice of Reymond of Tripoli and attacked Saladin, who was prepared to keep peace with the Franks while uniting the lslamic near east under his rule.

예루살렘의 국왕 보두앵 4세(1174-85년)의 치세는 전통적으로 쇠퇴기로 여겨져 왔는데, 왕의 병으로 인해 잘못된 정책 결정을 내린 부적당한 사람들이 권력을 쥐게 되었고, 특히 그들은 트리폴리의 레이몬드의 충고를 무시하고, 살라딘을 공격하였는데 살라딘은 그의 통치하에 동쪽에 가까운 이슬람 세력들을 단결시키고 있는 동안에는 프랑크족과 평화를 유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This book challenges that view, arguing that peace with Saladin was not a viable option for the Franks that the young king, despite suffering from lepromatous leprosy (the most deadly form of the disease) was an excellent battle leader who strove with some success to frustrate Saladin's imperial ambitions; that Baldwin had to remain king in order to hold factions in check; but that the society over which he presided was, contrary to what is often said, vigorous and self-confident.

이 책은 그러한 시각에 도전하는데, 살라딘과의 평화가 프랑크족에게는 실행 가능한 선택이 아니라고 하면서, 젊은 왕은 나종형의 나병으로 고통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질병의 가장 치명적인 형태) 살라딘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좌절시키기 위해 노고를 거듭하였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훌륭한 전투 지도자였다고 한다. 보두앵은 파벌을 제어하는 것을 수행하기 위해 왕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가 주재하는 사회는 흔히 말하는 것과는 달리 왕성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회였다고 한다.



7. 창작물[편집]



7.1. 킹덤 오브 헤븐[편집]


파일:external/planetejeanjaures.free.fr/baudouinIV.jpg
파일:external/rastafarirenaissance.files.wordpress.com/kingdom-of-heaven-character-baldwin-iv2.jpg
킹덤 오브 헤븐에서 묘사된 보두앵 4세

누구와 어떤 게임을 하건 간에, 영혼은 자네 것임을 명심하게


살라딘: 바라건대 기병을 물리시고, 이 문제는 나에게 맡기시오.

보두앵 4세: 병사들을 온전히 다마스쿠스로 돌려보내시기 바라오. 르노 드 샤티용은 반드시 처벌받을 것이오. 내 약속드리오. 철수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이곳에서 죽을 것이오. (침묵) 받아들이겠소?

살라딘: 알겠소. (침묵, 나병으로 힘들어하는 보두앵 4세) 당신에게 내 주치의를 보내주리다.

보두앵 4세: 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가 함께하길)

살라딘: 와알레쿰 살람(당신에게도 평화가 있길)


가혹한 상황에서도 냉철하면서도 훌륭한 군주로 나온다. 에드워드 노튼이 열연했으며, 극중 분량이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캐릭터이다.[25] 정의롭고 평화로운 '천상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국정에 임하며 종교에 따라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나병이 이미 심각할 정도로 진행된 상황이라 항상 가면을 착용해 얼굴을 가리고 있고 양손 역시 이미 부패가 심하게 진행된지라 약을 바르고 벙어리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극중에서는 옛 스승 고프리(리암 니슨 분)의 사생아인 발리앙(올랜도 블룸 분)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자 그를 알현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나병 때문에 가면과 장갑, 긴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자신과 마주 앉은 발리앙에게 "권력이 몸을 움직일 수 있어도 정신은 자신의 것이며 누가 시켜서 했다는 변명은 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며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겨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후 발리앙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성벽을 보완하는 등 위기의 시대에 국왕으로서 국토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나, 동시에 자신의 병이 갈수록 악화되어 더는 오래 살 수 없을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나 시빌라(에바 그린 분)의 두 번째 남편으로서 성전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기 드 뤼지냥(마르톤 초카시 분)과 기와 한통속이었던 케락의 영주 르노 드 샤티용(브렌단 글리슨 분)이 허구한 날 무고한 캐러밴을 기습하고 살해하여 왕국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었다.[26] 이 때문에 살라딘과 전쟁이 일어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군사 고문인 티베리아스[27](제레미 아이언스 분)가 "그 몸으로 가시다간 죽습니다." 라고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가겠다."며 기어이 위중한 몸으로 십자군을 직접 이끌고 케락으로 가면서 발리앙에게 성 밖 수비를 맡긴다. 발리앙이 소수의 기사들만 이끌고 일전을 벌이는 사이에 성 밖에 있던 백성들은 무사히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얼마 뒤에 십자군을 이끌고 도착한 보두앵 4세는 "르노는 반드시 처벌하겠다."며 살라딘을 설득하여 일촉즉발의 상태에서 전투를 멈추게 한다. 이때 이미 망토를 추스리는 것도 힘겨울 정도고, 말에서 내리는 것도 버거워서 옆에서 종자나 기사가 도와줘야 했다.[28] 그의 설득을 받아들여 철수하기로 결심한 살라딘은 "내 주치의를 보내주리다."라고 한다.[29][30] 아마 보두앵 4세 사망 후에는 정말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실감한 듯하다. 살라딘의 부하들도 보두앵 4세를 보며 "예루살렘 왕은 곧 죽을 거고 그럼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거다."라고 살라딘에게 간언했다.

그 직후에 르노 드 샤티용에게 간 보두앵 4세는 르노에게 접근하여 "내가 예루살렘이다.(I am Jerusalem.)[31]라고 선언하며, "충성의 맹세로 내 손에 입을 맞추어라."라고 말한 뒤 벙어리 장갑을 벗고 부패가 진행 중인 손을 내민다. 르노는 살아남기 위해 무릎을 꿇고 피고름이 흐르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지만, 보두앵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후련하게 두들겨 팬다. 허나 보두앵 4세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클로즈업 해주는 씬을 보면 또다른 가설이 세워진다. 왜냐하면 저 당시엔 몇몇 군주들이 끼고 있는 반지에는 보석 대신 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영화 속 장면에서 보이는 반지 역시 둥글넓적한 틀 안에 붉은색 보석으로 보이는 커다란 장식이 튀어나온 형태다. 이렇게 가정하고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이건 보두앵 4세가 이 반지에 키스하고 자결해 최소한의 명예는 지켜라. 라고 우회적으로 명령한 것을, 죽기 싫은 르노가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반지가 끼워지지 않은 부분을 핥아대다가 빡돈 보두앵 4세에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32] 하지만 무리한 탓에 다시 가마로 가 누워야 했다. 그러나 가마를 타고 떠나기 전에 발리앙을 잊지 않고 불러들여 "자네 오늘 참 잘해 주었다."며 그 공적을 치하했다. 발리앙에 대한 신뢰를 굳이 감추지 않는 이 모습에 보두앵 4세의 매형인 기는 당연히 불편함과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안 그래도 발리앙이 시빌라와 내연 관계였는데 이젠 처남이자 왕의 총애까지 받고 있었기 때문.

저렇게 헌신적으로 왕국을 지켜냈건만 그렇지 않아도 심했던 병세가 더 악화되어 정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된다.[33] 건강 문제로 혼인을 못해 후사도 두지 못했던 보두앵 4세는 일단 어린 조카[34]의 즉위식을 준비하게 하면서도 유력한 계승자이자 많은 기사를 거느린 권력자 기 때문에 왕국이 위험해질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그 대안책으로 이미 시빌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총신 발리앙을 은밀히 불러들여 "시빌라가 혼자 되면 그 아이와 혼인할 생각이 있나?"고 제의한다. 기를 대신하여 왕위를 계승하라는 그 간접적인 제의에 발리앙은 그럼 기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고 곁에 있던 티베리아스가 "자네에게 반기를 드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처형된다."고 답변한다. 이에 발리앙은 보두앵 4세의 명을 따르라는 티베리아스와 시빌라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 때문에 그럴 수 없다면서 "전하께서 말씀하셨듯이 권력이 몸을 움직여도 제 정신은 제 것이다."라며 제의를 거절하며 예루살렘을 떠나 보두앵 4세와 티베리아스를 낙담하게 한다.

이후 임종을 앞둔 그는 시빌라를 불러들여 "열여섯살 때 살라딘을 이겼던 날[35]의 꿈을 꾸었다."며 과거를 회상한다. 이에 시빌라는 울음을 참으며 "너는 언제나 아름다웠다."라고 했고, 보두앵 4세는 "누나는 내 아름다운 모습만 기억해줘."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보두앵 4세의 사후에 시빌라가 그가 늘 쓰고 있던 가면을 기어이 벗기고 얼굴을 확인하는데, 이미 병세가 심하게 진행된지라 얼굴이 심하게 문드러진 상태였다. 워낙 심각해서 시빌라조차 그 모습을 보고 순간 놀라서 눈을 감았을 정도. 특수분장임을 아는 관객이 보기에도 다소 징그럽다. 물론 실제 나병 환자들의 신체 부패가 심각해지면 나중엔 사망할 때 저런 모습이 되기에 이것도 고증을 잘 살린 것이다.[36]

보두앵 4세의 사망 후 그의 조카이자 시빌라의 아들이 보두앵 5세로 즉위하나, 이 아이 역시 선왕처럼 나병 환자임이 드러나고[37] 이 사실이 퍼져나가 왕국이 흉흉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러자 절망한 시빌라는 동생처럼 아들이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아들을 독살한다. 이후 시빌라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데 대한 비탄과 왕국의 앞날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슬픔에 빠져, 남편 기에게 양위하고 기도실에 칩거한다. 한편 티베리아스는 발리앙에게 "그 아이(보두앵 5세)가 죽으면서 예루살렘도 함께 죽었다"고 비통하게 말한다.

그리고 보두앵 4세를 이은 기는 기어이 군대를 일으켜 살라딘을 공격하지만, 애초에 무리하게 강행한 탓에 아주 대패를 하며 예루살렘의 주력부대를 증발시킨다.[38] 그리고 기 본인은 살라딘 앞에 끌려가는데, 살라딘은 그야말로 한심하다는듯이 그를 보며 "그대는 선왕에게서 무엇을 배운 건가. 그분은 위대한 왕이었어."라면서 적임에도 어이없고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혀를 찬다.

여담으로 극중에서 그가 입은 의상들의 특징에 대해 말하면, 왕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보여주듯이 금실로 자수가 놓여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옷가지가 흰색, 혹은 흰색 계통이다.[39] 사슬 갑옷을 입을 때도 흰 망토를 사용한다.[40] 또한 사슬 갑옷에도 혼자만의 특징이 있는데 사슬 갑옷은 다른 인물들도 입지만, 다른 인물들이 입은 것과는 달리 나병 환자로서 피부와 건강이 좋지 않은 점 때문인지 비교적 가벼운 무게감을 가질 가는 형태의 사슬로 구성되어 있다. 투구 역시 다른 투구들과는 달리 군더더기 없이 만들어 그 디자인이 매우 간결하다.[41]

한편 상기한 흰색 색채의 의미를 더 분석해보면 한센병으로 인한 병약한 이미지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으로서 성지를 지켜야 하는 수호자 이미지를 둘 다 포용한 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르노 드 샤티용에게 손등 키스를 요구할 때의 상황에서는 그 깨끗한 이미지의 하얀색과 대조되는, 피부가 상하는 병에 걸린 처지를 색채로서 더욱 부각시키기도 한다. 다만 그가 사망할 당시 누이 시빌라를 대면하면서 왕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입은 옷은 진한 갈색 톤의 옷인데, 그의 죽음과 그 이후 도래할 예루살렘 왕국의 어두운 미래를 표현한 미장센 장치로 보인다.

또한 그가 극중에서 착용한 은가면은 평상복을 입을 때 쓰는 매끄러운 표면의 가면 하나와 갑옷을 갖출 때 쓰는 요철이 있는 문양이 새겨진 것 두 가지로 묘사된다. 이에 대해서는 가장 위에 첨부된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7.2. 이외 창작물[편집]


다키스트 던전 시리즈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나병환자가 이 영화에 나오는 보두앵 4세의 오마주이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미라처럼 붕대를 온몸에 감고 다니고 역사대로 유능하고 엄청난 인내력을 보여준다. 죽기 전에 기 드 뤼지냥은 후계자가 되면 안되는 유언을 남기나 기 드 뤼지냥은 아전인수격 해석으로 권력을 차지한다.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략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예루살렘의 군주로 등장한다. 나병 환자임을 고증해서 가면을 쓰고 있다. 능력치는 준수하나 안면 훼손문둥이 트레잇이 발목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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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어: Baudouin le Lépreux, 영어: Baldwin the Leper[2] 이들의 결혼은 두 사람이 너무 근친이라는 이유로 총대주교의 비난을 샀었다. 왕위를 얻기 위해, 아모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보두앵과 시빌라가 적자로 인정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이혼에 동의했다. 토머스 F. 매든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3] 레몽 3세의 어머니가 보두앵 4세의 친조모(예루살렘의 멜리장드 여왕)의 여동생이었다.[4] 실은 기사들의 숫자만 저 정도이지 총 병력이 아니다. 수천 명의 기병과 보병이 보두앵의 군대로 참전했고 천 명 이상이 전사했기 때문에 무쌍을 찍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살라딘 측보다 병력이 적기는 했지만.[5] 채준이 쓴 <말의 전쟁, 최강 기마대의 기록>에 따르면 몽기사르 전투에 대한 해석이 있다. 당시 중무장한 기마대는 최강의 공격 수단이었다. 그리고 말에 오른 기사들은 전투 전문가들이었고 중무장으로 방어력을 높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기사르 전투의 전공은 역사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당대는 제1차 십자군 원정 시절과 달랐다. 제1차 십자군들은 이슬람의 화살 비를 갑옷으로 튕겨 냈다. 하지만 몽기사르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이슬람 측에서 기사들의 중무장을 뚫을 수 있는 병기를 개발한 다음이었다.[6] In any case marriage to the heiress of Jerusalem was an important diplomatic asset. It is extremely unlikely that the king chose the new heir to the throne without any thought of the political consequences. What was significant about Guy of Lusignan was that he came from Poitou, which formed part of continental dominions of Henry II of England. Now the France had a boy king and was racked by internal divisions there was no likelihood of a new French crusade being launched for some years. The only western ruler who might realistically be exposed to come to the help of the Holy Land was Henry II of England, who owed a penitential pilgrimage there and who had deposited considerable sums of money with the military Orders in Jerusalem to defray his expenses when he reached Palestine. The presence of a Poitevin as heir to the throne of Jerusalem was arguably calculated to stimulate Angevin interest in The Latin East. It is true that the Lusignans were troublesome vassals to Henry II, yet when Richard I went to on the Third Crusade he supported the claims of the discredited Guy of Lusignan to the throne of Jerusalem against those of Conrad of Montferrat, until it became apparent that Guy lacked adequate local support. This would suggest that Baldwin IV and his advisors had sound political judgment: a western king would rather see on the throne of Jerusalem one of his own turbulent vassals than some other ruler's exemplary vassal. (어쨌든 예루살렘의 상속녀의 결혼은 중요한 외교 자산이었다. 왕이 정치적 결과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왕위 계승자를 선택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뤼지냥의 기에게서 중요한 것은 그가 영국의 헨리 2세의 대륙 지배의 일부를 형성한 푸아티에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제 프랑스는 소년 왕(필리프 2세)을 두었고 내부 분열이 명확해서, 몇 년 동안 새로운 프랑스 십자군이 출범할 가능성은 없었다. 성지의 도움을 받기 위해 현실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서구 통치자는 영국의 헨리 2세였는데, 그는 그곳에서 참회 순례를 하고자 했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했을 때 그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군사령부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예치했다. 예루살렘 왕좌의 후계자로서의 푸아티에 가문의 존재는 라틴 동부에 대한 앙주 가문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계산된 것으로 추측된다. 뤼지냥 가문이 헨리 2세에게 성가신 가신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리처드 1세가 제3차 십자군에 갔을 때, 그는 몬페라트의 콘라드(콘라드 1세)를 상대로 한, 당시까지 적절한 지역 지지가 부족했던, 예루살렘 왕위에 대한 불신임을 받고 있는 뤼지냥의 기의 계승권을 지지했다. 이것은 보두앵 4세와 그의 보좌관들이 건전한 정치적 판단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서부의 왕은 다른 통치자의 모범적인 가신보다 자신의 격렬한 가신 중 하나를 예루살렘 왕좌에서 보는 것이 더 나았다.) /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7] 시빌라의 아들, 첫 남편인 몬페라토 후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다.[8] 그는 시빌과 뤼지냥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다른 여동생 이자벨을 지방 상층 귀족계급인 옹프루아 드 토롱 4세와 당장 결혼시킨다. 끝으로 그는 기 드 뤼지냥을 왕정청에 출두하라고 소환하나, 뤼지냥이 피신해 있던 아스칼론의 성문을 열지 않자 그의 재산 몰수를 결정한다. 조르주 타트 <십자군 전쟁 성전탈환의 시나리오>[9] 사건에 대한 해석 - Guy's attack on the Beduin was a serious matter. A minor raid of this kind in the course of quarrel would have been unremarkable in his home in Poitou, but in the Crusader Kingdom it was an act of wanton folly which can only have confirmed his opponents in their belief that he was unfit to govern. Beduin were under the protection of the crown, and because they were well treated they were on the whole friendly towards the Franks, a fact which Saladin deplored but was unable to remedy. Draum was a royal Fief on the edge of the Sinai desert and the Beduin played a key role in its security by supplying the Franks with information about Egyptian troop movements It is entirely comprehensible the Guy's activities should have caused the king grave anxiety, (기의 베두인 공격은 심각한 문제였다. 분쟁 과정에서 이런 종류의 작은 공격이 푸아투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을 것이지만, 십자군 왕국에서는 그가 통치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그의 반대자들의 그들의 믿음을 확인시켜줄 수 있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베두인은 왕실의 보호를 받았고, 그들이 대접을 잘 받았기 때문에, 살라딘은 그것에 대해 개탄했지만 고칠 수 없었다. 다룸은 시나이 사막 변두리에 있는 왕실 영지였고 베두인은 프랑크인에게 이집트 군대의 이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것의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의 활동이 왕에게 심각한 근심을 야기했다는 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10] 살라딘은 마침내 요르단 강을 건너 진군해 케라크의 요새를 공격했다. 보두앵은 케라크에 지원군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다윗 탑에 봉화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살이 썩어 형체가 기괴하게 변하고 앞도 볼 수 없는 왕은 가마에 누운 채 케라크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그 모습은 참으로 용감했지만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11]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보두앵 4세로 분한 에드워드 노튼도 이 사실을 반영해 극중 내내 가면을 쓰고 나온다.[12] Andrzej Grzybowski, Jarosław Sak, Jakub Pawlikowski, Małgorzata Nita <Leprosy: Social implications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King Baldwin IV of Jerusalem was called the Leper or the Leprous and had to wear a silver mask due to the skin manifestations of leprosy.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는 한센병 환자 또는 한센병에 걸렸다고 불렸고 한센병의 피부 발현으로 인해 은색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했다.[13] 다만 보두앵 4세의 사망에 대해서는 제임스 레스턴의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당시 예루살렘의 왕은 보두앵 4세로 현명하고 지성을 갖춘 지도자였지만 불행하게도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이 멀었으며 결국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14] 토머스 F. 매든의 저서인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에서도 그는 똑똑했지만, 왕국 내 파벌과 섭정 문제는 그의 육체적 건강이 악화될수록 더욱 치열해졌다는 내용을 언급하여 그의 한센병이 정치적 문제를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W. B. 바틀릿의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에서도 다음과 같이 비슷한 내용을 지적하고 있다. 보두앵의 통치는 그것이 그의 개인적 탓은 아니지만 우트르메르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보두앵은 왕국의 대의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았지만 그의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그것은 불충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려 하던 왕국 내의 강력한 인물들과 싸울 힘을 갖추지 못했다. 왕국이 그토록 분열된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 우트르메르에는 경쟁을 일삼는 파벌들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던 강력한 통치자가 늘 있었지만, 이제는 그 통제력이 사라졌다. 이에 반해, 순니파 무슬림들은 통찰력과 인내력과 지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원을 갖춘 한 사람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이제까지 왕국의 어떠한 적들도 그처럼 강하지는 못했다. 사실상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트르메르는 멸망하게 될 운명이었다. [15] Saladin therefore was able to launch spirited attack on the Latin Kingdom secure in the Knowledge that the Byzantines would not retaliate and that the sicilians with who he was at peace would not attack Egypt. On 13 July 1182 a detachment of his army laid siege to the castle of Bethsan in southern Galilee. The king who had expected Saladin to invade, and who had already assembled the host at Saffuriya, marched to its relief. The Franks met with Saladin near Le Forbelet in south-eastern Galilee. His strength was formidable. William of Tyre reports that the older Frankish princes said that they had never before faced a Muslim army of such size. It is not known whether the king fought on his occasion, but he was certainly present at the battle. All sources agree that it was fought in intense ill as Baldwin to stay in the field; indeed, on the return march the canon of the Sepulcher who was carrying the Holy Cross collapsed and died from sunstroke. The Christian army was smaller than Saladin's force: William of Tyre reports that there were only about 700 knights present Nevertheless, although there was considerable slaughter of Christian infantry, few knights were killed, whereas Muslim losses were substantial. Saladin conceded defeat and withdrew across the Jordan, While the king ordered that host to return to the more temperate region of Saffuriya. This battle was fought on 15 July, the eighth anniversary of Baldwin IV's coronation, and although Muslim writers understandably tried to disguise the fact, Le Forblet was a Frankish victory: a far lager Muslim army had been forced to retreat with heavy losses by a determined Frankish cavalry force. Credit for this must be give, at least in part, to the leper king, for he commanded the respect and loyalty of all his vassals and was able to hold in check the factions that were to prove so damaging to the Frankish host once he became too ill to lead it. (따라서 살라딘은 비잔틴인들이 보복하지 않을 것이며, 시칠리아인들이 그가 평화를 누리는 이집트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라틴 왕국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1182년 7월 13일, 그의 군대는 남부 갈릴리에 있는 베트세안 성을 포위했다. 살라딘의 침공을 예상했던 왕은, 이미 사푸리야 성채에 병력을 집결해 두었고, 그 영지를 향해 진군했다. 프랑크인들은 갈릴리 남동부의 르 포블렛 근처에서 살라딘을 만났다. 그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티레의 윌리엄은 노련한 프랑크 영주들이 전에는 그러한 규모의 무슬림 군대와 마주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왕이 그의 (그러한) 상황에서 싸웠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확실히 전투에 참석했다. 모든 자료들은 보두앵이 현장에 머무르는 동안 극심한 병과 싸웠음에 동의한다. 실제로, 귀환 행진에서 성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던 성묘의 성직자가 쓰러져 일사병으로 사망했다. 그리스도교 군대는 살라딘의 군대보다 작았다. 티레의 윌리엄은 약 700명의 기사가 참석했다고 기재했다. 비록 그리스도교 보병이 상당히 학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거의 죽지 않았고 무슬림 군대의 손실은 상당했다. 살라딘이 패배를 인정하고 요르단을 건너 철수하는 동안, 왕은 그 영지에서 사푸리야 지역으로 철군을 명령했다. 이 전투는 보두앵 4세의 대관식 8주년인 7월 15일에 벌어졌고, 무슬림 저술가들은 당연히 사실을 위장하려 했지만 르 포블렛은 프랑크인의 승리였다. 훨씬 더 큰 무슬림 군대는 강인한 프랑크족 군대에 의해 큰 손실을 입어 후퇴해야 했다. 이것에 대한 공로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나병 왕에게 주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가신들에게 존경과 충성을 얻었고, 프랑크인의 군대에 피해를 입힐 파벌들을 저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이끌기에는 그가 너무 아프게 되고 있었다.) /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16] <The Crusaders In The Eas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07.[17] 프랑스어 위키백과 Baudouin IV de Jérusalem[18] <Jerusalem: the Central Point of Saladin's Life>, Journal of Islamicjerusalem Studies, 1999.[19] 기사 <King Baldwin IV Of Jerusalem’s Crowning Moments>[20] 텔레그래프 기사 <On this day : Crusader forces under the leper king Baldwin IV crush Saladin at Montgisard>[21] 영국 태생 저술가, 전기와 역사서를 집필[22] The Dream and the Tomb A history of the Crusades.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Stein and Day (published posthumously in 1984)[23] This was a matter about which Alexander felt strongly, for The Third Lateran Council had legislated about the need to segregate lepers. This bull must have been disheartening to Baldwin the Leper, who was remaining head of state at great personal cost in the interests of Frankish unity, While as a means of raising help for the Latin East it proved ineffective. (이는 알렉산데르 교황에게 민감한 문제였는데, 제3차 라테란 공의회가 한센병 환자들을 분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법제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엄청난 개인적 노력을 들여서 프랑크인들의 단결을 위해 국가원수로 남았지만, 십자군 국가에 대한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 교서는 보두앵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24] 평가에 대한 해석 - Although Pope Alexander III described Baldwin IV as stricken with leprosy by the just judgment of God, Baldwin's subjects did not share this view. One reason for this may have been that he remained chaste. It was widely believed by learned physicians as well as by the general public that lepers were extremely lecherous. Indeed, this became a literary topos. Moreover, when kings or great nobleman lived chastely this was regarded by their contemporaries as a sign of supernatural grace. That Baldwin, who was both a leper and a king, remained chaste, must therefore have been seen as evidence of unusual sanctity of life. Even more persuasive was Baldwin's success in war against the Saracens. The participants in the Frist Crusade had been convinced that they were fulfilling God's will, and the failure of subsequent crusades was attributed to the sin of those who took part, which incurred God's displeasure. It therefore followed That Baldwin's success against Saladin was a sign remembered as a last successful Christian defender of the Holy City of Jerusalem. (비록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보두앵 4세가 신의 틀림없는 판단에 의해 한센병에 걸렸다고 묘사했지만, 보두앵의 신하들은 이러한 견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정절을 지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센병 환자가 극도로 호색적이라는 것은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학식 있는 의사들에 의해서도 널리 믿어졌다. 실제로, 이것은 문학적 토포스(문학의 전통적인 주제나 사상)가 되었다. 게다가, 왕이나 위대한 귀족이 정숙하게 살았을 때, 이것은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초자연적인 은총의 표시로 여겨졌다. 한센병 환자이면서도 왕이었던 보두앵이 정절을 지켰다는 사실은 생애에서의 특이한 신성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였을 것이다. 더욱 설득력 있는 것은 사라센인들에 대항한 전쟁에서 보두앵의 성공이었다. 제1차 십자군원정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확신했고, 그 후의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참여한 사람들의 죄에 기인했고, 이는 하느님의 분노를 야기했다고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살라딘을 상대로 한 보두앵의 성공은 예루살렘 성소의 마지막 성공적인 그리스도교 수호자로 기억되는 표시였다.) /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25] 에드워드 노튼 본인이 대본을 읽어 보고 감독인 리들리 스콧에게 자신이 이 역을 맡고 싶다고 요청해서 해당 역을 맡게 되었다. 에드워드 노튼에게 원래 배정되었던 역은 기 드 뤼지냥.[26]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사를 자세히 들어 보면 나병 환자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살라딘과 그 사이에 맺어진 협정을 어기는 것을 정당화하는 장면도 있다.[27] 실제 역사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에 해당한다. 티베리아스는 원래 인명이 아닌 지명으로, 레몽의 아내인 갈릴리 공작부인 에시바의 영지였다.[28] 다만 위압감과 간지만큼은 압도적이었는데, 방금전까지 발리앙을 이기고 예전에 발리앙에게 자비를 받은 과거를 생각하여 그를 케락으로 도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그의 주군 살라딘이 도착했으니 거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무슬림 장군 나시르가 "주군 살라딘께 알려라. 예루살렘군이 당도했다. ("Tell My lord Saladin. The Jerusalem has come.")"며 긴장하는 모습을 보인다.[29] 작중 살라딘의 이후 대사를 보면 살라딘 본인이 열받아서 쳐들어간 것도 있었지만 이맘들의 강요로 인해 움직인 면이 강하며, 일단 긁어모아서 쳐들어가긴 했는데 준비는 덜 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보두앵 4세는 살라딘이 준비가 덜 됐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물러설 명분을 준 셈이다. 살라딘이 준비가 되지 않은 병력으로 십자군과 격돌하면 결국 남는 것은 패자뿐인 양패구상이다. 군대의 규모상 살라딘이 이기기야 했겠지만 피해도 매우 컸을 것이고 당초의 목적인 공성전을 치를 여력이 남지 않을 것이 자명함으로 이맘들의 지지도 잃었을 것이다. 대규모 병력은 그만큼 움직이는 데에 신경써야 할 것이 많은 법이다. 작중에서 살라딘 본인이 언급했듯 질병의 유무, 물 공급원의 유무, 병참 등.[30] 보두앵 4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왕의 상태를 수하에게 직접 확인케 하려는 의도 역시 있었을 것이다.[31] 이때 기 드 뤼지냥이 이 말을 듣고 처남인 보두앵 4세를 부러움이 섞인 시선으로 슬쩍 쳐다본다. 저 말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보두앵 4세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이자 자신의 의붓아들인 보두앵 5세마저 요절하여 결국 시빌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은 뒤에 살라딘의 사신을 죽이고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번엔 자기 입으로 "내가 예루살렘이다."라고 선언한다.[32] 실제로 자세히 보면 르노가 오른손가락으로 반지를 가리며 다른 부분만 핥아댄다.[33]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죽음을 앞두고 썩어들어가는 몸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보두앵 4세 옆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고해성사를 하셔야 되지 않겠느냐"고 묻는데. 보두앵 4세는 "내가 그분 앞에 서서 직접 할 걸세, 자네 말고(I shall confess to God when I see him, not to you)"이라고 일축한다. 이때 "자네 말고" 앞에서 뜸을 들이다가 그 말과 함께 총대주교가 있는 쪽을 한번 돌아보는데 총대주교가 고해성사를 빌미로 보두앵 4세 자신의 유언이라며 자신이 한 말을 왜곡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34] 시빌라가 첫 남편과 낳은 유복자인 보두앵 5세[35] 앞에서 서술한, 1177년에 580명의 기사들(다만 실제로는 수천 명의 보병의 지원을 받았다)과 함께 살라딘의 2만 6천 군대를 대파했었던 몽기사르 전투. 발리앙과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도 보두앵 4세 본인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데, "그때는 내가 백 살까지도 살 줄 알았는데, 이젠 서른까지도 힘들겠지."라는 쓸쓸한 대사로 이어진다. (문서 맨 위에 나와 있듯이 보두양 4세는 서른은 커녕 반오십도 못 채우고 죽었다.)[36] 이는 나병으로 인한 왕의 처참한 모습과 동시에 그런 병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왕으로서의 우아함과 위용을 지킨 성군 보두앵 4세를 향한 경탄을 함께 연출하기 위하여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보두앵 4세의 얼굴을 영상에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37] 이 부분은 극적 요소를 위한 창작. 실제 역사에서 보두앵 5세가 한센병 환자였다는 증거는 없다.[38] 보두앵 4세와 기가 예루살렘군을 이끄는 모습을 비교하면 두 사람의 군사적 역량이 확 비교가 되는데, 보두앵 4세가 예루살렘군을 이끌고 케락에 등장했을 때는 살라딘의 20만 군에 밀리지 않을 기세를 뿜으며 위풍당당했지만, 기가 하틴의 뿔로 예루살렘군을 이끌 때는 마실 물이 없어서 다들 기진맥진한 반시체였다.[39] 흑색 옷과 금빛 갑옷을 입는 살라딘과 달리 흰색 옷과 은빛 가면이 대조되는 점도 흥미로운 색채의 대조라고 할 만하다.[40] 다만 이 흰 망토는 다른 기사들도 착용한다. 그러나 왕이라는 신분을 보여주듯이 재질이 고급스럽고 망토 끝단에 금실로 길게 자수가 새겨져 있다.[41] 영화의 복식을 자세히 보면 기나 발리안 등이 입은 사슬갑옷의 사슬의 두께와 비교하면 확실히 사슬이 가늘다. 투구 역시 다른 군주인 살라딘의 투구와 비교해도 훨씬 간소하며, 또다른 군주인 리처드 1세가 왕관을 투구에 올려 화려하게 장식한 것과 비교해도 매우 간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