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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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보리스 1세.jpg
이름
보리스 1세
(영어: Boris I, 불가리아어: Борисъ А҃ )
세례명
미하일(영어: Mihail, 불가리아어: Михаилъ)
출생
미상
사망
907년 5월 2일
직위
불가리아 제1제국
종교
불가리아 정교회

1. 개요
2. 치세
2.1. 9세기 중반의 동유럽 정세
2.2. 기독교의 전래
2.3. 메토디우스 제자들의 불가리아 망명
2.4. 퇴위와 서거



1. 개요[편집]


불가리아에 공식적[1]으로 기독교를 도입한 군주이자 슬라브 문화권의 대표적인 남자 이름인 보리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최초로 기록된 인물. 단, 많은 한국어 책들에서 '보고리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보리스 1세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제18대 군주로, 852년부터 889년까지 재위하였다.


2. 치세[편집]



2.1. 9세기 중반의 동유럽 정세[편집]


보리스 1세의 치세 초반에 현 체코 지역의 대 모라비아가 불가리아 국경까지 확장하자, 불가리아는 모라비아를 견제하기 위해 동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세르비아동로마 제국과는 긴장상태에 놓여있었다.


2.2. 기독교의 전래[편집]


이러한 상황에서 보리스 1세는 적국을 줄이고 내부를 통합하기 위해 기독교의 도입을 모색했는데, 처음에 보리스 1세는 동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가톨릭[2]을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의 세력확장을 경계[3]한 동로마의 황제 미카엘 3세가 863년에 불가리아로 함대를 이끌고 침공하여,보리스 1세에게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불가리아는 당시 주력부대가 북쪽으로 가있던데다 기근과 지진에 시달리고 있어 동로마를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받아들여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에서 세례를 받았고, 불가리아에는 동로마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동로마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돌려받았다. 이때 세례를 받아 미카엘 3세의 대자(代子)가 되면서 받은 세례명이 미카엘 3세와 똑같은 미하일(Михаил)이었다.

정교회로 개종한 보리스 1세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이러한 전례를 거행하고 싶어 했고, 포티오스(포티우스)에게 불가리아 총대주교를 임명하고 개종한 뒤에도 불가르 고유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포티오스가 요청을 거절하자, 보리스 1세는 교황 니콜라오 1세(니콜라우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가톨릭의 교리가 불가리아의 풍습과 충돌되는지를 묻는 서한을 보냈다. 니콜라오 1세가 보리스 1세에게 그에 대한 답[4]을 보내주자, 답변에 만족한 보리스 1세는 동로마에서 온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고, 가톨릭의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870년에 로마 교황이 보리스 1세가 요구한 총대주교 자리를 거부하자, 보리스 1세는 다시 동로마로 사신을 보냈고, 그해 3월 4일에 불가리아에 대주교 1명과 주교 몇 명이 임명되었다.


2.3. 메토디우스 제자들의 불가리아 망명[편집]


885년, 동프랑크의 지지를 받아 공작의 자리에 오른 대 모라비아의 스바토플루크 1세(Svatopluk I, 840–894, 재위 870–894)의 탄압을 피해 동로마 제국에 선교사로 가있던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이 불가리아로 왔다. 보리스 1세는 그들을 극진히 대접해 피난처를 제공하면서 선교를 맡겼다.

그들이 가져온 글라골 문자와 슬라브어 기도서는 보리스 1세의 기독교 정책을 한층 더 수월하게 했고, 이를 통해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불가리아에서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그리스어 예식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글라골 문자를 불가리아어에 맞게 변형하여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정교회권 슬라브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는 키릴 문자이다.


2.4. 퇴위와 서거[편집]


889년, 보리스 1세는 왕좌에서 내려온 후 장남인 블라디미르 라사테(Владимир Расате, 재위 889–893)에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삼남 시메온(Симеон)에게 주교 자리를 맡겼다.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동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매개로 불가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해 불가리아를 이전의 이교도 국가로 돌려놓으려 했다. 결국 블라디미르는 아버지 보리스 1세에 의해 눈이 뽑혀(...) 쫓겨났고, 블라디미르를 대신해 시메온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시메온 1세(Симеон I Велики, 864/865~927, 재위 893~927)다.

보리스 1세는 907년에 죽었는데, 사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1] 814~831 사이에 재위했던 오무르타그(Омуртаг) 칸의 장남 엔라보타(Енравота)가 기독교도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9세기 전반에 기독교가 불가리아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2] 가톨릭과 정교회의 본격적인 분열은 1054년 동서 대분열부터이지만, 이 문서에서는 편의상 이하 동방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정교회', 서방의 로마 교회를 '가톨릭'으로 칭한다.[3] 김차규 교수의 논문 《9세기 비잔티움의 불가리아 선교 의미》에 따르면 그 외에도 당시 동로마 제국의 상업발전을 위한 국경 안정화의 이유도 작용했다고 한다.[4] 이 답변문서는 지금까지도 남아있으며, 영역본을 이 링크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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