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불전쟁(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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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
장소
프랑스, 독일
기간
1870년 7월 19일 ~ 1870년 11월경
(파리공방전 종결)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짐.
교전세력
프랑스 제국
프로이센 왕국
지휘관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4세
루이 베르그송
빌헬름 1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
헬무트 폰 몰트케
병력
중앙군 13만 명, 파리방위군 16만 명
침공군 수십만 명 추정
침공군 50만 명, 방위군 27만 명
피해 규모
12만 사망 1만 포로(스당 전투)
작성중
10만 사상(스당 전투)
40만명 괴멸(파리공방전)
결과
패전을 거듭하던 프랑스의 결정적 역전승, 프로이센군의 괴멸[1] 및 프로이센 왕국의 붕괴
영향
근대전의 시작과 유럽의 국력 균형 붕괴, 원래 역사보다 훨씬 이른 제1차 세계 대전의 개전
1. 개요
2. 배경
3. 진행 과정
3.1. 프랑스의 패배와 스당 포위
3.2. 나폴레옹 3세의 최후의 도박
3.3. 황제의 최후와 그 분노로 복수에 눈이 뒤집힌 프랑스
3.4. 루이 베르그송의 파리 방어 사령관 부임과 요새화 된 파리
3.5. 파리 공방전과 프로이센군의 전멸
4. 전후 처리



1. 개요[편집]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나오는 가공의 전쟁. 작중에서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전쟁이며 작중 최초로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이기도 하며 원래 역사의 보불전쟁과는 180도 다른 양상과 결과를 보인 전쟁이다.

2. 배경[편집]


이 소설에서 프랑스는 조선[2]과 최초로 통상을 하게 된 서역 열강이지만 다른 국가와 다르게 조선을 수탈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먼저 총칼을 들고 쳐들어가기 전에 조선이 먼저 개항을 했기 때문인데 이에 프랑스에서는 조선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제법 많다. 허나 조러전쟁에서 조선이 러시아에게 뜻밖의 압승을 거두자 나폴레옹 3세는 자국의 황색언론들이 이형에게 자신의 삼촌 이미지를 덧씌우고, 이에 프랑스의 국민들 또한 나폴레옹 3세에게 삼촌과 같은 위대한 장군의 모습을 기대하여 엄청난 심적 부담감을 떠안게 된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내치로는 훌륭한 군주일지라도 군사적인 부분은 범인 수준에 지나지 않은데다 상대가 명장으로 칭송받는 대 몰트케 였기에 더더욱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폴레옹 3세는 엠스 전보 사건을 계기로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게된다. 그렇게 프랑스와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발발한다.

3. 진행 과정[편집]




3.1. 프랑스의 패배와 스당 포위[편집]


전쟁 발발 후 나폴레옹 3세는 국민들에게 등이 떠밀린 형태로 별 수 없이 몸소 병사들을 이끈 채로 친정을 감행한다. 하지만 황제가 지휘하는 프랑스 중앙군은 프로이센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한 끝에 스당에서 포위를 당했고, 계속되는 된 패배로 인해 프랑스의 장군들은 황제에게 실망감을 드러낸다. 그래도 몇몇 병사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황제가 천재적인 계책으로 이 난관을 타개해줄 거라 굳게 믿었지만 상황은 거듭 악화될 뿐이다.

3.2. 나폴레옹 3세의 최후의 도박[편집]


결국 나폴레옹 3세는 동방의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이형과 비교되는 스트레스를 못이겨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최후의 발악이자 이후의 세계를 뒤흔드는 결정을 내리고야 말았다. 이형처럼 나폴레옹 3세도 자신의 근위대인 흉갑기병대를 이끌고 샴페인과 모르핀 같은 마약까지 빨아제껴서 프로이센의 포위를 돌파하려 한 것이다!

물론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의 황제를 포로로 삼아 최대한 빠르게 종전을 하려고 했지만 중무장을 떡칠한데다가 술과 마약 등 할 수 있는 건 다 빨아제끼고 미친 돌격을 하는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에 포위망을 이루던 보병들이 갈려나가며 붕괴되기 직전까지 가게 되고 결국 적국의 황제가 있건 말건 하는 수 없이 마구잡이로 방아쇠를 당겼고, 프랑스 기병대 최후의 발악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3]

결국 황제를 따르던 흉갑기병대는 최후의 1인까지 돌격을 멈추지 않다가 전부 전멸당한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는 가장 선두에서 돌격하다가 말에서 낙마하여 중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최후까지 용맹하게 칼을 휘두르며 돌격하다가 고간과 왼쪽 넓적다리, 오른쪽 어깨에 총알을 맞고 과다출혈로 장렬하게 전사하기까지 한다.

3.3. 황제의 최후와 그 분노로 복수에 눈이 뒤집힌 프랑스[편집]


스당에 포위된 프랑스군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있었다. 그런데, 자국의 황제가 자신들을 위해 직접 노구의 몸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모습을 보게 된 순간 그야말로 졸병부터 지휘관까지 문자 그대로 눈이 뒤집힘과 동시에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에 대한 분노로 사기충천이 일어났고, 황제의 복수를 위해 착검 돌격을 개시하게 된다. 그러니까, 13만의 프랑스군 전체가 황제처럼 약과 술을 할 수 있는건 다 털어서 빨아제끼고 졸병, 지휘관 할 거 없이 20만의 프로이센군을 향해 일제히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달려들었다!

가뜩이나 머스킷 총이 도입된 이래로 총검돌격을 중시하여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온 데다, 노구의 황제가 장렬히 전사한 탓에 병사들을 통제해야 하던 장군들마저 총검돌격을 외치며 최소한의 체계도 안 갖추고 돌격할 정도로 광분한 상태에서 나오는 프랑스군의 함성+지축을 울리는 진동까지 겹치면서 프로이센을 비롯한 북독일 연방군은 크게 동요했지만, 대 몰트케가 나서서 "쫄지 마라, 그깟 난쟁이 하나가 뒈진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쪼는 거냐?"라고 일갈하여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몰트케도 말은 저렇게 했어도 이런 사태를 염려했기에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망했다.'며 속으로 식겁하고 있었고, 그의 우려대로 프랑스군은 나폴레옹 3세의 영웅적인 죽음으로 고무된 나머지, 모르핀과 샴페인에 취해 윙드 후사르 빰치는 미친 총검돌격을 통해 결사 항전하였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군은 반 이상의 사상자가 생긴 끝에야 1만여 명의 프랑스군만을 포로로 잡고, 나머지들은 모조리 섬멸시키게 된다.

하지만 반 이상의 사상자로 인한 공세 종말점에 도달한 프로이센군은 진공을 멈추고,[4]이제 한계에 도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대 몰트케는 빌헬름 1세에게 '조속히 프랑스를 외교 협상장으로 끌어들일 것.'을 요청한다. 이미 이 시점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군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이 완벽하게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허나 몰트케의 요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한 비스마르크는 "극동의 괴팍한 난쟁이 황제(고종)"를 탓하며 프랑스인들의 이성이 날아가지 않길 바랄 뿐이라고 펑펑 울었다. 육군만 프랑스에게 앞서고 나머지는 다 뒤쳐진 프로이센이라 장기전으로 가면 필패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비스마르크는 어떻게든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와 접촉하려고 애를 써보지만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그 어떤 외교적 협상을 할 생각이 없어서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5]

이 때 프랑스는 전 국민들이 황제의 복수를 위해 들고 일어섰다. 심지어 보나파르트 황가를 반대하는 코뮌 세력과 부르봉 왕조 충성파, 공화주의자들까지 황제 만세를 외치며 주전론을 외쳤고,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근 30년 만에 처음으로 완벽한 국론일치를 달성해냈다.(...)

이후, 프로이센군이 스당에서 병력들을 재정비하는 동안, 벨기에로 피난간 만 14세의 황태자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가 파리로 돌아와서 나폴레옹 4세로 즉위하게 된다. 대관식 당일, 그는 섭정의회의 연설에서 선황의 복수를 천명하였고, 섭정의회는 만장일치로 결사 항전을 선호했고, 군복무기간을 5년으로 연장하고, 적정 연령대의 청년들을 모조리 징집하는 강도 높은 징병제를 실시하였으며 그 외에도 프로이센이 점령한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의용군들이 들고 일어나 게릴라전을 실시했다.

이런 프랑스를 상대로 프로이센군은 철도망을 통한 기동전을 시도해보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프랑스의 철도망은 그렇게까지 빼곡한 상태가 아니고, 프랑스의 기관사와 역무원들이 프로이센군에게 협력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철도망을 파괴하는 사태도 벌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이센군은 2주간 재정비를 한 후, 다시 진공을 시작하였지만 다수의 독일계 주민들이 거주하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포함한[6]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저항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르세유에서는 프랑스 남부군, 브르타뉴 등지에 주둔하던 북방군까지 프로이센군에게 반격을 가하려고 파리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대 몰트케는 빌헬름 1세에게 후퇴를 요청하였지만 비스마르크가 이를 거부해버렸다. 이번 전쟁에서 패배하면 각 독일의 제후국들이 프로이센의 지도력을 의심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힘들게 꺾어버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다시 회복하게 되어 독일 통일이 더욱 늦춰지는 결과가 낳을 수 있기에 거부한 것.

결국 참모총장인 대 몰트케보다 수상인 비스마르크의 손을 들어준 빌헬름 1세지만 그는 크게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본디 '문관'이었고, 군 경력이라고 해봐야 예비역 소위로 평시에 후방에서 1년 복무한 것이 전부였다. 즉, 비스마르크는 사태가 안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얼마나 더 악화될 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대 몰트케는 총 4주 안에 철도없이 도보와 마차로만 파리로 진격하고 포위해서 항복을 받아내라는 가히 살인적인 임무를 부여받고, 울며 겨자먹기로 파리로 향하게 된다.

3.4. 루이 베르그송의 파리 방어 사령관 부임과 요새화 된 파리[편집]


그런 와중에 대한제국에서의 군사고문단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프랑스로 귀국한 이가 있으니 그는 바로 신임 준장으로 진급한 루이 베르그송이었다. 하지만 관영언론의 보도에 따라 섭정의회는 그를 조러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프랑스의 장군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프랑스 장군들은 파리 공방전 실패에 대한 희생양으로 루이를 점찍어뒀었기에 그를 파리 방어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루이는 이를 받아들였고, 그는 본인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현실을 마주하고 좌절하게 된다. 비록 의용군들이 파리로 집결하고 있었고, 파리 시민들도 전투에 협조하는 모습이었지만, 프랑스의 주력군들은 대부분 나폴레옹 3세와 함께 전멸당한 이들이었고, 정규군 병력들은 남아있지 않는 상황이다. 그나마 있는 정규군 병력들은 다른 프랑스 장군들이 루이에 대한 거부감과 파리 요새의 방어력을 과시하고 있는 탓에 프랑스 내의 프로이센군 격퇴를 위한 반격 작전에 동원해야 한다는 이유로 병력 차출을 거부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의용군들의 다수는 크림전쟁 참전 경력을 가져서 실전 능력을 기대할 수 있는 참전용사들이었지만 이들조차도 숫자만 많은 예비 전력들일 뿐이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루이는 자신이 5년 동안 가르쳐준 대한제국의 학생들에게서 오히려 배우고, 느꼈던 참호전을 떠올리게 된다. 루이의 삽과 망치를 들라는 명령에 의용군들은 "조국을 위해 싸우러 온 자신들은 이까짓 허드렛일이나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혹은 "우리 같은 용감한 군인들이 겁쟁이처럼 흙더미 뒤에 숨으라니요! 있을 수 없습니다!" 라며 낭만 넘치는 반발을 보냈지만, 루이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는 있으면서 조국을 위해 삽질을 할 각오는 없는 건가? 이제 우리들의 전장은 낭만 따위는 없는 그저 살육을 위한 장소일 뿐이며, 난 그런 전장에서 그대 개새끼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을 할 뿐일 것이다. 진정 조국을 위한다면 조국을 위해 비겁자가 될 불명예를 짊어질 용기도 갖도록 하게나."라는 냉소적인 대답으로 딱 잘라 무시했다.[7]

그도 그럴 것이 조러전쟁 시절, 1만의 러시아군이 고작 1시간 반만에 전멸당한 광경에 루이는 현시기의 전쟁의 패러다임인 라인배틀이 얼마나 무의미한 짓거리요, 러시아군이 자랑하던 제2 기병사단이 개틀링 포대도, 참호선도 진입하지 못하고 끝장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상태이기에 자신의 최고의 학생(고종)이 그랬던 것처럼 이 모든 반발을 무시하고, 철저한 측량을 통해 심혈을 기울여 참호선을 세웠다. 고종처럼 솔선수범하여 직접 삽을 들고 땅까지 파자 불만을 품은 사람들 모두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참호 공사를 시작했다.

여기에 루이는 고종이 선보였던 좌우 일직선 형태의 단순하고 원시적인 참호가 아닌 측량 기사와 건축 설계사, 기하학자, 수학자들을 총동원하여 파리 도시를 전부 에워싼 형태로 조러전쟁에서 조선이 만들어낸 것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참호망을 만들어낸다. 이 참호망은 무려 좌우 길이 수십 킬로미터 이상의 방위선에서 수십 만의 병사들이 수백 일 동안 생활하면서 참호선 하나가 적에 의해 함락되어도 전방을 방어하는 병사들은 바로 샛길을 통해 후퇴하면서 후방의 참호선에서 새롭게 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사시에 다시 탈환하기 쉽게 설계해놓은 지성의 집합체 그 자체였다. 비록 개틀링은 없었지만 미트라예즈가 파리 무기고에 가득 차있는 상태였고[8] 이것으로 토치카를 구축한다. 물론 루이는 개틀링의 성능을 확실히 잘 알고 있는 덕분에 그보다 훨씬 못한 미트라예즈를 굉장히 저평가했지만[9] 꿩 대신 닭이라고 당장 아쉬우니 별 수 없이 그거라도 쓰기로 한다. 그렇게 파리는 완전히 요새화된 파리그라드가 되어 40만 프로이센군을 맞이하게 된다.

3.5. 파리 공방전과 프로이센군의 전멸[편집]


얼마 뒤, 40만의 프로이센 군은 마침내 파리그라드 파리에 도착한다. 3중의 참호선으로 둘러싼 요새의 도시를 지키는 16만 명의 파리 수비군을 목도한 대 몰트케는 "여기가 미래의 전장인가?"라며 감동했지만, 이내 "그런데 이게 왜 베를린이 아니라 파리에 있는 건가?"라며 깊이 절망한다.[10]

그러나 프랑스 남부군단은 프로이센군을 포위하기 위해 우회기동을 보였고, 과거 보오전쟁에서 밀어낸 오스트리아가 국경에 대군을 집결시키며 전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후퇴해봤자 프로이센령과 북독일령 본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될 터였고, 몰트케는 마지막 한 수를 걸고 40만 대군을 참호선으로 총공격시킨다. 프로이센은 이대로 물러날수도, 차근히 방법을 고려할 시간도 없었기에 자신 이하 모든 간부들과 병사들의 목숨을 탄환으로 사용하여 일점 돌파를 목표로 하는 정공법을 택한다.

1주일간의 맹공 끝에 2번째 라인까지 뚫고 3번째 라인도 뚫기 직전까지 밀어붙였지만, 그 시점에서 40만에 달했던 병력이 완전히 고갈되고, 몰트케도 선두로 나서 공격을 진두지휘하다 호위병들이 모두 죽고, 자신도 왼손바닥에 검지손가락이 들락거릴 정도의 구멍이 뚫리는 부상을 입은 끝에 처량하게 원래 역사처럼 "10만만 더 있어도..." 한탄하며 프랑스군에 항복하고 만다. 얼마나 처절한 전투였는지, 프로이센에 이를 갈던 프랑스 의용군들조차도 프로이센 병사들을 동정할 정도로 미래의 전장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4. 전후 처리[편집]


양국 간의 전후처리는 없었다. 이미 복수에 눈이 뒤집힌 데다 확실하게 복수를 할 수 있게 된 프랑스 제국은 모든 국민여론이 프로이센, 나아가 북독일 연방을 역사의 뒤편으로 보내버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을 안 하려 들었기 때문.

이제 남은 건 독일 본령으로 쳐들어가는 일만 남았는데, 파리 공방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루이를 시기하고, 자신들이 도태당할 것을 우려한 군부의 원로들이 그를 모함하여 구금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이유가 가관인 게 "프랑스 대육군에게 명예로워야 할 전쟁터를 진흙탕으로 만들고, 시민들을 강제로 참호 공사에 동원했다!"라는 것.[11]

처음에는 낭만주의에 경도된 시민들도 이에 동조했으나, 구국의 영웅을 진짜로 잡아가둔 것에 아연실색하여 크게 반발하고, 문민통제 체제를 유지하려 한 섭정의회까지 군부를 압박한다. 결정적으로 루이를 기용한 나폴레옹 4세가 자신이 직접 임명한 장군까지 그렇게 가두면 누굴 믿고 전쟁을 치러야 하냐며 크게 격노하여 루이를 석방시키고는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킴과 동시에 자신을 대신해서 프로이센 침공군을 이끌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이 촌극이 벌어지는 사이에도 프로이센은 전장에서 생환한 패잔병들을 흡수하고, 남은 여력을 쥐어짜내서 라인란트 국경지대에 100km가 넘는 참호선 구축을 시작한 상황. 이 사실을 안 루이는 "우라질, 나도 꼬냑이랑 모르핀 빨고 들이박아야 하나?"라며 투덜거리지만, 헛되이 인명을 손실하고 싶지도, 그럴 자신도 없었던 탓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다가 가장 먼저 몰트케를 찾아간다. 어떻게든 불필요한 인명을 줄이고 싶었기 때문. 그렇지만, 몰트케에게서 "우리 프로이센을 온존시키겠다면 모를까, 그럴 생각이 없으면 베를린을 직접 점령해서 멸망시켜야 할 것이오."라는 냉소적인 답변을 듣고 한탄한다.

결국, 선택지가 하나 밖에 안 남은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죽어서 지옥에 갈 각오를 하고 나폴레옹 4세를 직접 알현하여 진언을 올린다. '흉갑과 산탄총, 개틀링 포를 재정이 허락되는 내에서 최대한 보급해 줄 것'[12]이었는데, 복수에 불타던 나폴레옹 4세는 이를 인가한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호엔촐레른의 굴종을 받고는 북진해 전선에 합류, 프랑스도 발칸반도를 비롯한 미끼로 오스만과 이탈리아를 끌어들여서 신성동맹군을 구성하고, 이에 질세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오러동맹을 체결해 러시아의 대군이 북독일까지 진군해온다. 이것을 본 영국도 그나마 타협여지가 있던 프랑스의 신성동맹에 가세해 전유럽과 아시아 상당지역이 엮인 본격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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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본토에 남아있던 소수의 군대와 장교진들은 프랑스의 추격을 피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로 망명하는데 성공했다.[2] 조러전쟁 이후부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꿨다.[3] 실제로 원역사에서의 스당 포위전 당시 최후의 흉갑기병대의 돌격은 맹렬했으며 독일에서도 진정한 용감한 사람들이라 말할 정도로 돌격이였다. 원 역사에서도 이렇게 미친 돌격이었는데 여기서는 무려 황제가 함께 선두에서 돌격한다는 것에서 나오는 사기에 더해 연초와 술까지 먹어서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얼마나 광적인 공격일지 말할 필요도 없을 지경.[4] 근대전으로 접어들면서 20% 손실도 전멸로 판정하니 절반 이상의 사상자가 난 것이면 공세는 커녕 작전 자체를 뜯어 고쳐야하는 피해이다.[5] 그리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그 극동의 괴팍한 난쟁이 황제 본인은 나폴레옹 3세의 죽음을 전해듣고는 "그 멍청이는 왜 뒤진 거야?"라고 황당해하면서도 단기전이면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가 이길 가능성이 있지만 장기전이 시작되면 결국 돈 많은 나라가 이긴다면서 프랑스의 승리를 점쳤다. 다만 원래 역사가 그 장기전으로 가지 못해서 벌어진 일임을 감안하면 나폴레옹 3세의 죽음으로 프랑스는 아주 갈 때까지 가보자고 나와 프로이센이 원치도 않던 장기전으로 가버렸으니 프랑스 입장에서는 잘 된 셈이다.[6] 독일어권 지역이지만 현실에서도 프랑스에 우호적이라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알자스-로렌 출신의 독일병의 탈영비율은 타지역에 비해 80배에 달했다.[7] 실제로도 현실의 역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괜히 전쟁에 대한 쓸데없는 낭만주의를 가진 젊은이들+엘랑 비탈에 푹 빠진 지휘관이라는 조합으로 정말 단기간에 프랑스군은 수십만이나 갈려나갔다.[8] 그 미트라예즈들은 부실한 철도망 때문에 프랑스군 병사들에게 보급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병사들에게 보급되지 못하고 보관되던게 오히려 지금에 와서 전화위복이 된 셈.[9] 그럴만도 한 게 미트라예즈는 기관총이 아니라, 화차마냥 총탄 구멍 여러개 뚫린 포에다가 탄을 장전해서 쏘는 볼리 건이라는 물건이다. 개틀링과 비슷한 크기와 무게인 주제에 장탄 수는 36발 밖에 안 된다. 프랑스 본토의 높으신 분들은 자국의 기술력의 절정이라며 극찬했지만 조선에서 개틀링의 연사력을 본 루이 입장에서는 쓰레기로 보여도 이상치가 않은 물건이었다. 다만 이 발언 때문에 군부 원로들에게 찍혀버려 파리 공방전 이후 체포되는 곤혹을 치렀다.[10] 몰트케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어질 일이지만, 일단 나중에는 베를린에도 참호선이 만들어져 프랑스군도 진격을 멈출 정도의 방어력을 보여주기는 했다. 마르크스의 내전으로 남독일에는 피를 흘린 프랑스군인데도 오히려 베를린에는 무혈에 가깝게 입성해버렸지만.[11] 추가로 앞서 루이가 미트라예즈를 개틀링에 비해 보잘 것 없다며 저평가를 한 것도 있어서 군부의 원로들이 그를 더욱 안 좋게 본 것이다.[12] 몰트케에게 거절당한 뒤, 거듭 고민한 것들이 바로 적을 효율적으로 죽일 방법을 연구한 것이었는데, 적이든 아군이든 무고한 희생을 경멸하고 혐오함에도 이에 반하는 궁리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비웃으며 괴로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