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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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중앙 고문위원회 부국장
한문
薄一波
한국식 독음
박일파
영문
Bo Yibo
본명
보수춘(薄書存)
출생
1908년 2월 17일 청나라 산시성 오태현
사망
2007년 1월 15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산시성 국민 사범학교 졸업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없음(무신론)

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2.5. 문화대혁명의 시련
2.6. 말년
3. 가족 관계
4.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1925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이래 중국 공산혁명을 위해 산시와 타이위안의 공산당 및 공산군에서 활약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후 북중국 국무부 비서관, 국가 건설위원회 국장 등을 역임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살아남았고 덩샤오핑 시기에 중공 8대 원로 중 한사람으로서 존중받았으나 천안문 사태 때 강경 진압을 요구해 '신 4인방' 중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2. 일생[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파일:Boyiboandhisfather.jpg
젊은 시절의 보이보와 아버지 보창푸(薄昌福, 박창복)

보이보는 1908년 2월 17일 산시성 오태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보창푸는 산시 일대를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이었다가 1900년 즈음에 오태현에 정착하여 종이 가게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독자적으로 가게를 차렸다. 보이보가 태어날 무렵엔 가게 운영이 잘 되서 약간의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보이보는 7살 때 소학교에 입학했고 1922년에 딩샹현의 제1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산시성 국민 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는 얼마 안가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하고 중국을 공산 혁명으로 인도하겠다고 결심했다.

1925년, 그는 중국 공산당 청년 연맹에 가입했으며, 그해 5월에 타이위안 시민들의 반 토지세운동 투쟁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말, 그는 중국 공산당의 일원이 되었다. 이듬해, 그는 중국 공산당 지부를 정규 학교에 설립하고 지부 장관을 지냈으며, 후에 중국 공산당 타이위안 지방위원회 북부 위원회의 부장관으로 임명되어 노동운동과 학생 운동에 종사했다.

그러던 1927년,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해 공산당 간부들을 체포하면서 국공합작을 파괴했다. 같은 해 6월,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산시성의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보이보는 신분을 숨기고 추적을 피하다가 1928년에 공산당 천진시위원회와 중앙 군사위원회 북부국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31년 6월, 보이보는 베이징에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6월, 보이보는 "고백"이라는 제목의 전향서를 제출하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 전향서는 훗날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는 근거가 되었다.

다만 마오쩌둥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혁명적 무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는 단체를 조직하고 몰래 공산주의 교재를 공부했다는 보이보의 보고서를 보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보이보가 영웅적인 투쟁을 했다고 찬사를 보내며 그가 교도소를 학교로 변모시켰고 혁명이론을 공무함으로서 정신적으로 무장했다고 칭찬했다. 훗날 보이보가 비판받았을 때, 마오쩌둥은 "보이보 동지는 적에 대한 투쟁에 용감했다."고 옹호하기도 했다.

감옥에서 석방된 뒤, 보이보는 산시지방 실무위원회의 비서가 되어 타이위안으로 향했다. 그는 옌시산의 항일 민족 구국 사업에 참여하고 항일 군사 및 정치 훈련 강습에 협력했다.

2.2. 중일전쟁 시기[편집]


파일:Boyiboatww2.jpg
1939년 1월경의 보이보.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무렵, 보이보는 희생구국동맹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며 산시성의 반일 분위기가 고조되도록 유도했다. 그리하여 1937년 3월 무렵 서문회 클럽 회원수는 20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1939년 여름 시멍 협회 회원 수는 3백만 명으로 증가하여 산시성 공산당의 중요한 활동 동력이 되어줬다. 또한 보이보는 옌시산의 지원에 힘입어 1937년 8월 "산시청년항적결사대(山西青年抗敵決死隊)"를 조직했다. 불과 1년만에, 이 결사대는 총 4개의 기동대로 증강되었으며 약 5만 명의 회원이 50개 그룹으로 구성되었다. 1937년 11월 초, 보이보의 부대는 산서 남동부 항일 전선으로 이동해 산시성 3대 행정구역의 정치지도자가 되었고 제8 국방군과 협력해 반일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그런데 1939년 11월 28일, 결사대와 옌시산의 국민혁명군 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했다.(진시사변) 보이보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여의치 않자 산시성 북서부로 퇴각했고 팔로군 제129사단의 지휘관을 맡았다. 1940년 4월, 보이보는 덩샤오핑이 주최한 지난(冀南), 타이항(太行), 타이웨(太岳)지역 군사 및 정치위원회 고위 간부회의에 참석해 민중 생계 안정, 질서 확립, 생산 증대를 위한 네가지 조치를 제안했다. 그후 그는 지남, 타이항, 타이웨 합동 사무소의 부국장을 지냈고 타이위안 항일 기지의 공산당 건설 및 군대 육성을 이끌었다.

1941년 1월, 보이보는 팔로군 군기 지휘관 겸 정치 위임관을 지냈으며 8월에는 타이위안 지부 정치위원직을 지냈다. 그리고 1942년 10월, 그는 중국 공산당 타이위안 당지부 비서관이 되었으며 중국 중앙위원회 타이항 분국위원을 역임했다. 그해 말에는 천청, 안즈원(安子文)과 함께 친위안현(沁源縣)을 포위해 일본군이 친위안현에서 철수하도록 유도했다. 이후 1943년 12월, 보이보는 중국 공산당 중앙당 대회 참석을 위해 엔안에 갔다가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3. 국공내전 시기[편집]


파일:Chenyi_songrenqiong_1945.jpg
1947년 12월 타이위안에서. 왼쪽부터 보이보, 쑹런츙(宋任窮), 천이(陳毅), 텅다이위안(滕代遠)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허난성, 산시성, 하북, 허난 군사위원회 중앙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보이보는 중앙 정보국 차관과 군부 정치위원을 역임하며 덩샤오핑을 보좌했다. 같은 해 8월, 그는 류보청(劉伯承)과 덩샤오핑을 지원해 상당전역(上黨戰役)과 핑한전역(平漢戰役)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1946년 3월, 보이보는 산둥, 허난 국경위원회의 제2차 연설에서 연사로 선출된 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토지 문제 지침"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1947년 7월, 공산군 제2야전군이 다볘산(大別山)에 진출한 후, 보이보는 진차지 중앙위원회의 제1 차관과 임시 서기를 지냈으며 공산당 진시 중앙위원회의 업무를 주재했다. 산둥과 허난을 방문한 후, 그는 허베이성의 시바이포로 가서 전국 토지 대회에 참여해 중국 토지법 개요 작성에 가담했다. 또한 그는 북중국 군사지역에서 인민 해방군을 조직할 계획을 세웠고 옌시산의 산시군벌과 격돌하는 쉬샹첸의 공산군을 지원했다.

1948년 4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설립되었을 때, 보이보는 제2 비서관을 지냈고, 나중에 제1 비서로 승진했다. 또한 그는 북중국 군사지역의 정치위원직을 역임했다. 같은 해 9월, 북중국 인민정부가 설립되었고 보이보는 제1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중국 북부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토지 개혁을 수행했으며 대규모 생산 운동을 개시했다.

1948년 12월 8일, 보이보는 인민해방군 사령부의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화북국의 평진구 정책 및 양식"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9년 3월, 그는 "공동 강령(共同綱領)"의 수립에 참여했고 저우언라이의 지도하에 중앙 정부의 여러 부처와 위원회 구성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중국 인민정치협의회의 첫번째 본회의에 참석하여 중앙인민정부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편집]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보이보는 중앙인민행정부 행정위원회 위원장과 재무 및 경제위원회 부주임, 그리고 중앙인민정부 재정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북중국 사무국의 제1비서 직을 겸임했다. 그는 천이와 함께 중화인민국 창립 초기에 시장 가격을 안정화하고 재정 문제를 통합하기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1950년 1월, 보이보는 쑤이위안 성 군사지역의 정치위원직을 역임했으며 1951년 12월에는 중앙 인민정부의 경제 재검토 위원회의 국장을 지냈다. 또한 그는 삼반오반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북중국 일대에서 부패 관원 및 반공산주의 성향 인사들을 솎아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1954년 9월, 보이보는 건설위원회의 이사를 역임했으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156개의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그리고 1955년엔 녜룽전, 천이와 함께 원자력 산업의 준비 작업을 맡았다. 1956년 5월 국가 경제위원회가 설립되었을 때, 보이보는 이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9월, 보이보는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회에서 공산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의 대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에는 국무부 부총리로 임명되었다.

1962년 1월, 보이보는 당 중앙위원회가 개최된 확대실무회의에 참석했으며, 회의 보고서 초안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대약진 운동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비합리적인 경제 관련 법률 집행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후 1963년, 그는 국가 기획위원회의 부국장을 역임했으며 제3차 5개년 계획의 수립에 참여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가 찾아오면서, 그는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 운동을 강하게 비판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다.

2.5. 문화대혁명의 시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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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했을 때, 보이보는 "반동분자"로 간주되었고 장칭은 보이보가 1936년에 국민당에게 제출한 전향서를 폭로하며 그가 당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1967년 2월 9일, 캉성과 그의 동료들은 베이징 노동자 체육관에서 보이보를 비난하고 "투쟁하는" 집회를 조직했다. 보이보는 목에 그가 저지른 '죄악'을 적은 플랜카드를 씌운 채 체육관을 돌아다니며 홍위병들의 갖은 모욕과 폭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희생자들과는 달리 도전적인 태도로 맞섰다. 그는 행진하면서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 나는 공산당의 일원이다!"라고 울부짖었다.

이때 마오쩌둥이 사람을 보내 보이보가 충성스런 공산당원이니 당장 그만두라는 지시를 내려, 집회는 불과 3분만에 취소되었다. 그러나 보이보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베이징 교도소에서 수많은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고 검사들은 보이보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이보는 자신의 혐의를 끝까지 부인했고 이때문에 일상 내내 폭행을 당했고 음식, 물, 수면을 박탈당하는 등 다양한 고문에 시달렸다.

그는 투옥 기간 동안 신문을 스크랩하고 글을 써서 자신의 상황을 기록하려고 시도했지만, 간수들은 이를 압수해 보이보의 죄악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했다. 급기야 그는 손이 너무 떨려서 젓가락을 잡지 못하고 밥을 마루 바닥에서 긁어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간수들에게 "이런 짓거리는 공산주의 용사가 할 짓이 아니다!"라고 꾸짖었고, 간수들은 그를 더욱 가혹하게 폭행했다. 심지어 그는 둘째 아들 보시라이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기도 했으며 다른 자식들은 투옥되거나 시골로 보내졌고 아내는 홍위병들에게 맞아죽었다. 그후 보이보는 10여 년간 감옥에 갇혀 지냈다.

2.6. 말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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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린 후인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후야오방은 보이보를 석방하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1979년 3월, 보이보는 국무원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7월 1일 제5차 전국인민대표대회 2기 회의에서 부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지지하는 주요 인사로서 활동했다. 1980년, 그는 전국당 학교 노동회의에서 "지난 30년 동안의 경제건설 검토" 보고서를 작성했고 국무위원 기계 산업위원회의 이사를 역임했다.

1982년 5월, 보이보는 국가 경제시스템 개혁위원회의 부회장 겸 제1 차관을 역임하면서 계획 시장, 경제 개발 속도 및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간의 관계를 재조정했다. 1982년 9월, 제12차 중국 공산당 전당대회는 중국 공산당 중앙 고문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보이보는 중앙 고문위원회의 부국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선발 간부의 임기 체계 폐지를 관장하고 주요 간부들을 은퇴시켰다.

1986년 말 중국 각지에서 민주화 열풍이 일었다. 허베이, 우한,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 천진 등 17개 주요 도시에서 학생 및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민주주의, 자유, 인권" 슬로건을 내거는 동시에 "반관다오(反官倒), 반부패"를 외치며 인민 정부를 압박했다. 이에 대해 후야오방 총서기가 시위대를 옹호하자, 보이보는 격노했다. 그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선동당한 어린애들이 국가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며 강경대처를 주장했다. 이후 후야오방은 시위대에게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보이보 등의 사퇴 압박을 받다가 결국 1987년 1월 총서기에서 해임되었다.[1]

한편 후야오방이 투병생활 끝에 1989년 4월 사망하자, 전국 각지에서 추모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고 이것은 곧바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거대한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바로 천안문 사태의 시작이다. 이때 보이보는 덩샤오핑에게 "현재 상황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으므로 사회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결정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결국 덩샤오핑은 보이보를 비롯한 중공 원로들의 진압 요구에 따라 군을 동원한 유혈진압을 단행했다. 이에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은 보이보를 양상쿤, 리펑, 왕전과 함께 '신 4인방'이라고 간주하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2007년 1월 15일 오후 8시 30분, 보이보는 베이징 의과대학 병원에서 98세의 나이를 끝으로 사망했다. 그후 1월 21일 아침,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묻혔다.

3. 가족 관계[편집]


파일:Boyibofamily.jpg
1960년 보이보 가족 단체사진

  • 보이보의 첫번째 아내 리루밍(李如明)은 쟝녀 보시잉(薄熙瑩)을 낳았다. 그러나 보이보는 비서 후밍과 간통을 저질렀다가 발각되었고, 결국 리루밍과 이혼했다.
  • 두번째 아내 후밍(胡明)은 보이보의 비서였으며 1945년에 보이보와 결혼해 둘째 아들 보시라이를 비롯해 두 딸과 네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인 1967년 1월 5일 홍위병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당한 끝에 죽었다. 홍위병들은 그녀가 자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맞아죽었다고 한다.
  • 장녀 보희옥은 중국 외교부 아프리카 지부 국장을 맡았고, 그녀의 남편은 전 주덴마크대사인 정야오원(鄭耀文)이다.
  • 차녀 보제잉(薄潔瑩, 1946년생)은 1980년 미국 의과대학에서 생물화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보건부 국제교류협력센터 부이사장을 맡았다.
  • 장자 보시융(薄熙永, 1947년생)은 리쉐밍(李學明)이라는 이름도 쓴다. 그는 칭화대학 기계과를 졸업했고 베이징노즐,오일펌프공장 공장장, 중국광다(光大)그룹 전무이사 겸 총책임자를 역임했다. 2012년 4월 25일 이사직에서 사임하고 더이상 집행위원회 위원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 차자 보시라이(1949년생)는 전 상무부 장관이며 공산당 충칭시 위원장 및 제17대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었다. 그는 다롄 시장으로서 막강한 권력과 명성을 누렸으나 2012년 왕리쥔 사건에 휘말린 뒤 수뢰죄, 탐오죄, 직권남용죄 혐의가 인정되어 종신형에 처해졌다.
  • 삼녀 보샤오잉(薄小瑩, 1950년생)은 북경대학 중국고대사 연구센터 및 역사학과 부교수이다.
  • 삼자 보시청(薄熙成, 1951년생)은 베이징 상다 원조재단 회장, 빈곤 퇴치 및 개발을 위한 중국 협회 부회장, 베이징 루허싱호텔 관리 의장 및 중신증권 이사 직을 역임했다.
  • 사자 보시닝(薄熙寧, 1954년생)은 류허싱그룹 회장이다.

4. 참고 문헌[편집]


[1]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배려로 정치국원 직함은 유지했지만, 이미 실권은 모두 상실한 상태였다. 거기에 건강까지 악화되면서 자연스레 정계에서 물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