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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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기원전 58년 9월 14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과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수에비족이 갈리아 중부의 패권을 놓고 맞붙은 전투이다.

2. 상세[편집]


기원전 72년경, 갈리아 중부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이두이족은 이웃 부족인 세콰니족과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두 부족은 아라르 강의 소유권과 강을 건너는 물품에 대한 세입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세콰니족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베손티오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에 하이두이족이 공세를 가했고, 세콰니족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라인 강 건너편의 강력한 게르만 부족인 수에비족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는 영토를 할양해 자기 부족민들이 이주하는 걸 용인하는 조건으로 구원 요청을 받아들이고, 라인 강을 건너 하이두이족과 대결했다. 기원전 63년, 양측은 세콰니족의 마게토브리가 마을에서 격돌했는데, 수에비족이 대승을 거두었고 하이두이족은 공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하이두이족의 지도자 디비키아쿠스는 로마에 찾아가 구원을 요청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로마인의 친구"라는 칭호를 부여할 뿐, 원군을 보내주지는 않았다. 이는 하이두이족이 갈리아에서 패권을 확립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오비스투스는 하이두이족을 물리쳐준 대가로 세콰니족으로부터 영지의 1/3을 할양받고 게르만족을 받아들였다. 이후 게르만인 15,000명이 그의 명망을 전해듣고 추가로 라인 강을 건너오자, 아리오비스투스는 세콰니족에게 이들을 정착시킬 영지가 필요하니 땅을 추가로 할양하고 공물을 더 늘리라고 요구했다. 세콰니족은 이로 인해 심한 압박을 받게 되었고 원군을 요청했던 걸 후회했으며, 하이두이족을 비롯한 다른 켈트인들도 갈수록 강해져만 가는 수에비족의 영향력에 위협을 느꼈다.

그러던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헬베티족의 대이동으로 위험에 처한 하이두이족의 구원 요청을 수락하여 6개 군단을 이끌고 헬베티족과 대결해 아라르 전투비브라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본토로 강제 귀국시켰다. 하이두이 족장 디비키아쿠스를 비롯한 갈리아의 유력 인사들은 로마군의 강력한 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들이라면 수에비족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에 군대를 숙영시키고 있었던 카이사르를 찾아가 승리를 축하하면서, 아리오비스투스의 만행을 설명하며 그를 축출해달라고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을 물리쳐주면 갈리아인들이 로마군의 위용에 복종할 것이라 여겼고, 이대로 방치했다가 수에비족이 갈리아를 제패해 버리면 로마에게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디비키아쿠스 등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아리오비스투스는 지난날 원로원으로부터 "로마인의 친구" 칭호를 수여받았기 때문에, 다짜고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카이사르는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그동안 확보한 영역을 인정할 테니 더 이상 게르만인들을 불러들이지 말고, 하이두이족을 비롯한 로마의 동맹 부족들과 전쟁을 벌이지 말라"

고 권고했다. 그러나 아리오비스투스는

"로마는 로마의 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된다. 로마가 왜 우리 일에 간섭하느냐?"

라며, 원한다면 무력으로 해결하자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군대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위협도 덧붙였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친구인 하이두이족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아리오비스투스의 행위로 인해 그가 로마인의 친구가 될 자격을 상실했다고 선언한 후, 그와 대결하고자 행군했다. 아리오비스투스 역시 로마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역시 진군했다. 양측은 세콰니족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베손티오(오늘날의 보주)를 점령하고 밀과 무기 같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려고 했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보다 먼저 도착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은채 강행군했고, 그 덕분에 수에비족보다 먼저 도착했다. 이후 베손티오에 수비대를 배치한 뒤 인근 평원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게르만인들의 키가 어마어마하게 크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맹하고 검술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공포에 떨었다. 과거인 기원전 105년 80,000명에 달하는 로마군이 게르만족의 분파인 킴브리족에게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몰살당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지만, 로마인들은 여전히 그때의 공포를 간직하고 있었다. 군단병들 사이에는 암울한 분위기가 흘렀고, 몇몇 장교들은 유언장을 작성했다. 카이사르는 이 분위기를 읽고 나서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호통치며,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킴브리족을 물리쳤던 일, 앞서 그들에게 패배한 헬베티족이 게르만족과 여러번 싸워 물리친 일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무서우면 도망쳐도 좋다. 나는 10군단만 이끌고 게르만인을 상대하러 가겠다. 10군단은 내 심복이니, 이제부터 내 호위병으로 삼을 것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에 군단병들은 부끄러워하며 사령관을 따르겠다며 서약했고, 10군단 장병들은 카이사르의 신뢰에 감사를 표하며 영원히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다.

기원전 58년 8월 초 진군을 재개한 카이사르는 6일간의 행군 끝에 정찰병들로부터 수에비군이 약 24마일 떨어진 곳에 진영을 세웠다는 보고를 받았다. 아리오비스투스는 로마군이 근처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5일 후에 회담을 갖자는 제안을 했고, 카이사르는 수락했다. 회담 장소는 꽤 높은 언덕 기슭의 넓은 평야에서 열렸다. 둘은 기병대를 이끌고 만나기로 했지만, 카이사르는 갈리아 기병대를 신뢰하기 힘들었기에 제10군단 병사들을 말에 태워 회담장에 데려갔다. 이에 장병들은

"카이사르가 우릴 호위병으로 삼겠다더니, 한술 더떠서 에퀴테스(기사 계급)로 만들어줬다."

라고 농담했다. 그 후 평원에서 서로 마주 본 카이사르와 아리오비스투스는 장병들을 200보 뒤로 물러나게 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이사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는 로마 공화국이 작년에 그에게 수여한 혜택을 상기시키면서, 하이두이족과 전쟁을 해서는 안 되며 인질을 돌려보내고 다른 게르만인이 라인 강을 건너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이에 아리오비스투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갈리아인의 요청과 초대로 라인 강을 건넜다. 나는 갈리아에서 영지를 정당하게 받았다. 인질들은 자발적으로 넘겨졌으며, 승자가 패자에게 행하는 관례에 따라 공물을 받았다. 나는 한 전투에서 내 영토를 침략하려 든 자들을 격퇴하고 패배시켰다. 나는 로마인들보다 먼저 갈리아에 도착했다. (중략) 내가 당신을 죽인다면, 로마의 많은 귀족들이 기뻐할 것임을 잘 안다. 당신의 죽음으로 그들 모두의 은총과 우정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대가 갈리아를 자유롭게 차지하도록 허락해준다면, 나는 그대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고 고통이나 위엄없이 당신이 원하는 모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

카이사르가 반론을 제기하려 할 때, 일부 게르만족 기병들이 언덕에 접근하여 로마인들에게 돌과 다트를 던졌다. 카이사르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회담을 끝낸 후 본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리오비스투스가 회담을 다시 갖자고 제안하자, 카이사르는 함정을 의심해 통역을 보냈다. 갈리아인 통역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수에비족 진영에 인질로 끌려갔다. 그 후 아리오비스투스는 진영을 걷고 로마군의 진영으로 6,000보를 이동했다. 그날 밤, 그는 다시 숲속으로 행군해 로마군의 배후로 들어가서 로마군의 진영에서 2,000보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이리오비스투스는 로마군이 식량을 자유롭게 수집하지 못하도록 6,000명의 기병과 6,000명의 보병을 파견하여 견제했다. 수에비족은 상당히 독특한 기병 전술을 사용했다. 기병과 보병은 따로 편성되지 않고 함께 움직였으며, 기병이 전투 중에 위험이 생기면 보병 근처로 대피했고, 기수가 중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지면 보병들이 그를 둘러싸 지켰다. 또한 보병들은 기병들이 바삐 움직일 때 갈기에 달라붙은 채 말의 걸음걸이를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질주했다고 한다. 수에비족은 이러한 독특한 전술을 구사했고, 로마군은 이들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며칠간의 교착 상태 끝에, 카이사르는 이대로 가다간 식량 보급을 받지 못한 아군이 기아에 시달려 패망할 것이라고 여기고, 2개 군단을 차출해 새 숙영지를 인근 언덕에 건설하여 보급로를 지키게 했다. 세 번째 대열이 숙영지를 건설하는 동안, 첫 번째와 두 번째 대열은 언덕 위에 전투 대형을 편성하여 수에비족의 접근을 막았다. 아리오비스투스는 16,000명의 병력을 그쪽으로 보내 숙영지 건설을 막으려고 했지만 로마군의 저지로 실패했다. 이리하여 새 숙영지를 건설한 카이사르는 2개 군단과 일부 보조 부대를 그곳에 남겨두고, 나머지 4개 군단을 이끌고 본래의 숙영지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리오비스투스는 로마군의 새 숙영지를 재차 찔러봤지만 공략이 쉽지 않자 물러났다. 카이사르는 전군을 평원에 인솔하여 전투 대형을 갖추고 결전을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아리오비스투스는 진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아리오비스투스가 왜 이리 소극적으로 나오는지 궁금해 했는데, 탈주병으로부터 그가 달이 바뀔 때까지 전투를 미뤄야 한다는 점쟁이의 예언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의 진영에 바짝 다가가 진영을 차린 뒤 아침마다 진영에서 나와 수에비족의 코앞에서 병력을 포진시키는 일을 벌였다.

로마군이 5일마다 계속 나와서 도발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아리오비스투스는 기원전 58년 9월 14일 군대를 이끌고 진영 밖으로 나와 로마군과 대치했다. 그는 수에비 군대의 후방에 전차를 가득 놓아서 도망칠 공간을 주지 않았고, 전차 위에 올라탄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자신들이 로마인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카이사르는 군대를 편성하고 우익 부대를 친히 이끌었다. 이윽고 전투 신호가 올라오자, 수에비족이 갑작스럽게 달려들었다. 워낙 빨리 달려들었기 때문에, 로마 병사들은 필룸을 던질 여유가 없어서 필룸을 떨어뜨린 뒤 검을 들고 맞서 싸웠다.

전투는 몇 시간 동안 격렬하게 진행되었는데, 로마군은 수에비족의 밀집 대형에 뛰어들어 그들의 방패를 낚아챈 뒤 찌르는 방식으로 싸웠다. 이윽고 카이사르가 친히 지휘하는 로마군의 우익 부대가 수에비족의 좌익 부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지만, 수에비족의 우익 부대는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로마군의 좌익 부대를 거의 압도했다. 이때 기병대장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3열에 포진한 로마군을 쪼개 좌익에 합류시켰다. 이리하여 좌익 부대는 군세를 회복했고, 좌익이 돌파당한 수에비족은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하고 패주했다. 로마군 기병대는 약 5마일 떨어진 라인 강까지 추격해 대거 살육했고, 많은 수에비족 장병들이 라인 강을 건너다가 익사했다. 아리오비스투스 본인은 소수의 신봉자들과 함께 가까스로 강을 건너 달아났다.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이리하여 수에비족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세콰니족을 해방시킨 카이사르는 세콰니족의 영토에 숙영지를 세우고 겨울 동안 그곳에서 병사들을 쉬게 한 뒤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돌아가 총독으로서의 공무를 처리했다. 카이사르가 수에비족을 무찌른 후에도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고 갈리아에 그대로 남겨두자, 많은 갈리아인이 로마가 갈리아의 지배자가 되려 한다고 의심했다. 그들은 벨가이인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를 타도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를 감지한 카이사르가 벨가이의 영토를 향해 진군하면서, 악소나 전투가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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