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전자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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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普天堡電子樂團
영어: Pochonbo Electronic Ensemble(PEE)

1. 개요
2. 악단의 구성
2.1. 연주자 및 멤버 구성
3. 청소년 상대 사상 교육 전개
4. 주요 작품
5. 악단의 위상
6. 일본 공연
7. 악단의 해체
8. 공연 영상



1. 개요[편집]



보천보전자악단의 공연장소인 목란관
파일:전시가요연곡.jpg
왼쪽부터 김광숙, 이경숙, 전혜영, 이분희, 조금화[1]
보천보전자악단은 김정일의 지시에 1985년 6월 결성되었는데 왕재산경음악단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대표적인 혁명 전적지인 보천보에서 이름을 빌려 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 음악의 실태와 세계음악발전의 추세에 따라 전자음악을 우리식으로 발전시킬 것을 지시하여, 1960년대에 만수대예술단으로 하여금 전자악기의 특성에 맞게 여러 가지 음악을 연주하면서 경험을 쌓도록 하였다.[2]

이후 보천보전자악단은 이른바 주체음악 창작과 연주형상의 본보기집단으로 만수대예술단의 전자음악연주단을 분리해 조직되었는데 1985년 6월4일 보천보 전투 승리 48주년을 기념하며 결성됐다.

파일:Pochobo_Electronic_Ensemble.jpg
보천보전자악단의 앨범 제1집(1991년 발매)


2. 악단의 구성[편집]


파일:보천보일본공연.jpg
1991년 보천보전자악단 일본 공연
파일:보천보1만명.jpg
2015년 1만명 대공연[3][4]
창립 초창기 보천보전자악단은 혼성 기악단으로 구성되었다가 1991년 일본방문공연을 앞두고 남성 기악단과 여성 가수들로 개편되었다. 이후 악단 구성은 1995년까지 유지되다가 1996년부터 새로운 가수들이 편입되기도 하였다.


2.1. 연주자 및 멤버 구성[편집]


  • 작곡가
    • 리종오[A][5] - 전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전자악단장
    • 황진영[A][6] - 현 모란봉악단 부단장 겸 작곡가
    • 구승해[7]
    • 우정희[A][B] - 현 모란봉악단 창작실 실장 겸 작곡가
    • 안정호[A][B] - 현 모란봉악단 창작실 부실장 겸 작곡가
  • 보컬

  • 김광숙[C][8] - 전 평양학생소년궁전 예술창조과 성악지도교원
보천보전자악단 창단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가수로 노래 기량이 매우 뛰어나 공훈배우 칭호를 수여받았고 일본공연 이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북한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아 김광숙의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정도였다고 한다.

  • 리분희[D]
다른 가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적으나 꾀꼬리 같은 창법으로 <녀성은 꽃이라네>와 <지새지마오 평양의 밤아>같은 여러 인기있는 곡들을 불렀다. 그 외에는 주로 다른 가수와 2중창을 불렀다.

  • 전혜영[C][9] - 현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성악지도교원
1983년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일본공연 중에서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를 요구와 다르게 서글프게 불러 당시 공연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적이 있어 김정일의 눈에 들어와 보천보전자악단의 가수가 되었고 <휘파람>같은 인기곡으로 북한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키가 매우 작으며 창법도 불안정해 나중에는 성대마비를 겪었으며 이러한 전혜영이 인민배우가 된것은 김정일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 조금화[D] - 현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성악학부 대중가요강좌 강좌장
보천보전자악단의 전성기 당시 유일한 저음가수로써 구수한 목소리로 민요를 잘부른단 평을 받았다. 그녀가 녹음한 초반기 곡들은 중저음을 섞어부르다 나중에는 저음만을 사용하는 등 창법에 변화가 있었다.

  • 리경숙[D] - 현 평양제2음악학원 성악학부 강좌장
<반갑습니다>,<다시 만납시다>같이 통일에 관련된 노래를 불러 남한에서 전혜영과 더불어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가수로 그녀가 부른 <내 이름 묻지마세요>는 당시 북한에서 엄청난 인기를 불러왔다고 한다. 또 리경숙은 악단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어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고 이는 그녀가 녹음한 곡들만 봐도 얼마나 우대 받았는지 알 수 있다.
  • 윤혜영[10]
보천보전자악단 전성기 이후 편입된 가수로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특색있으며 노래실력이 뛰어나 후반기 악단의 군가와 영화음악의 녹음에는 대부분 그녀가 참여하였다.[11]
  • 김정녀[12] - 현 금성학원 성악강좌 강좌장
윤혜영과 동시에 편입되었으며 높은 음역대를 잘 소화해내고 민요창법에 특화되어있어 보천보전자악단의 후반대 민요곡들의 녹음에는 거의 대부분이 김정녀가 참여하였다.
현송월은 본래 왕재산경음악단의 가수였으나 후반기 원년가수들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투입되었다. 그녀는 저음가수로 노래실력이 뛰어나 <준마처녀>같이 인기있는 곡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 지휘자
    • 김연수[13] - 현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협주단 지휘자
  • 연주자
    • 전 권[A] - 피아노. 현 왕재산예술단 당비서[14]
    • 김해성[A] - 신디사이저
    • 김문혁 - 신디사이저. 현 피바다가극단 작곡가
    • 권경학 - 신디사이저. 현 평양음악학원 교원
    • 리 문 - 엘렉톤. 현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협주단 전자악단 기술지도원
    • 박의현 - 일렉트릭 기타. 현 만수대예술극장 음악연출가
    • 강철호[D] - 엘렉톤. 현 왕재산예술단 작곡가
    • 송 광[D] - 일렉트릭 기타. 현 금성 제1중학교 교원[15]
    • 김영일 - 베이스 기타. 현 문화성 군중문화국 책임부원[16]
    • 최문철[D] - 드럼. 현 평양영화음악녹음소 연주가
    • 장정원 - 피아노
    • 강금철 - 엘렉톤
    • 김승협 - 엘렉톤
    • 최영철 - 일렉트릭 기타[17]
    • 김 진[D] - 탬버린.구두 타악기
    • 김원일 - 신디사이저 현재 알수 없는 이유로 제명[18][19]

리종오와 김광숙은 각각 2016년, 2018년 사망하였다. 둘 다 김정은이 직접 조화를 보냈고 특히 리종오는 김일성상, 김일성훈장 수훈에 로력영웅 칭호까지 받았다 보니 특집 화면편집물(다큐멘터리)까지 방영했을 정도였다.

3. 청소년 상대 사상 교육 전개[편집]


청소년들을 상대로 김정일 찬양가를 보급하도록 했는데 이를 김정일이 청소년들을 상대로 전자음악을 이용한 사상 교육에 주력하여 청년 전위로 키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청소년들에게 이 악단의 노래들을 따라 부를 것을 독려하고 있다. 북한은 여러 정책가요들을 열거하면서 "이들 노래에는 청년들을 우리 당에 끝없이 충실한 청년전위로 키우려는 김정일의 숭고한 뜻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로동청년"은 적극적인 노래보급 사업을 전개, 청년들로 하여금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창조한 노래들을 늘 힘있게 부르며 수령에 대한 충성심을 키우도록 조직정치 사업을 짜고 들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


4. 주요 작품[편집]


1988년 <잊지말자 우리 우정>(김광숙)을 시작으로 1989년 <휘파람>(전혜영),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리분희)가 북한 주민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 축복하노라(1990)
  • 어머니 우리당이 바란다면(1992)
  • 백두의 말발굽소리(1993)
  • 승리의 열병식(1993)
  • 우리는 당의 군대
  • 통일무지개(1993)
  • 따사로운 그품이 그립습니다(1972년 창작된 노래를 편곡)

5. 악단의 위상[편집]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북한에서 인기 있었던 최고의 여가수는 최삼숙이나 김옥선, 황금주 정도였다.

음악의 종류도 민요, 영화음악, 혁명가극 음악정도로 제한되었는데, 혁명가극 음악이라 함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을 성악으로 부른것이고, 민요라 함은 아리랑과 타령들을 독창, 중창, 합창, 다른 방식으로 다른 가수들이 부른것을 몇년이 지나도록 틀어주는것, 방송에 나가는 노래는 '동지애의 노래'로 고정되어 지루하기 짝이 없던 북한의 음악계였다.
그런 고리타분한 북한 음악계에 전자악기를 연주하는 보천보전자악단은 북한 주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당연히 열광한 북한 주민들을 필두로 1980년대 후반에 생활가요 열풍을 몰고오며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이미 1988년부터 보천보전자악단의 노래는 굉장한 인지도를 얻었고 1990년대 들어가며 김광숙, 전혜영은 독보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나머지 가수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의 인기를 얻었고 이들의 노래가 당시 북한 노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20]

1991년에 나온 '내나라 제일로 좋아'라는 노래를 가지고 영화를 제작하라는 지시를 직접 했을 정도로 당시 북한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90년 보천보전자악단 예술인 독창회에 1987년 국제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했던 인기 성악가 조청미가 참가하기도 했었다.
김정일의 글[21]에도 여러번 등장했으며 만수대텔레비죤에선 매주 공연이 방영되기도 했다.

보천보전자악단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북한 가요계를 뒤흔들어놓았으나 그 이후부터는 악단의 인기는 예전의 위상을 되찾지못하다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2021년도에도 리경숙과 '도시처녀 시집와요'를 다룬 특집물을 내보낼 정도로 보천보전자악단은 북한에선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의 역사중 하나로 봐도 좋다.

특히 지금까지도 광명성절 공연에 나오는 노래의 대부분이 보천보전자악단의 노래를 편곡해 내놓고 있으며 태양절 공연에도 비중있게 보천보전자악단 원곡이 편곡되어 등장한다.[22]

6. 일본 공연[편집]


북일문화교류협회가 주최하고 NHK와 아사히신문의 후원으로 1991년 9월 17일부터 10월 27일까지 일본 공연을 하였다. 공연은 도쿄도, 센다이시, 히로시마, 기타큐슈, 오사카, 교토, 고베, 히메지 등에서 있었으며, 일본 순회공연을 위하여 노래 '반갑습니다'가 만들어졌다. 보천보전자악단의 공연은 재일동포와 친북 성향의 일본인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으며 무대에서는 북측 노래와 일본노래 등이 불려졌다.


7. 악단의 해체[편집]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생활가요 열풍이 사그라들고 김정일의 관심사도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에 돌려지면서 악단은 2000년대부터[23] 쇠락기를 걸었다가 결국 2008년도에 해체된다.
2008년 이들의 뒤를 잇는 소백수라는 4인조 중창단이 등장했고 계몽기가요와 모란봉음악을 주로 방송과 앨범으로 내놓았다.
해체후 악단의 일부 가수들은 은하수관현악단이나 왕재산예술단 공연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해체 이후에도 보천보전자악단의 앨범은 계속 발매되다가 2012년 182집 앨범을 마지막으로 발매가 중단되었다.
이후 2015년 2월 '추억의 노래'라는 이름의 특별 공연을 위하여 잠시 재결성되었으며, 또한 보천보전자악단의 특별 공연은 2015년 10월 개최된 로동당 창건 70주년 경축 1만명 대공연 무대까지 이어졌다.


8. 공연 영상[편집]


북한/문화/공연 영상 참조

1988년 9월 9일 목란관에서 진행된 첫 공연 이래로 줄곧 목란관에서 촬영되던 보천보전자악단의 정규 녹화실황과 영상물은 1995년에 녹화된 <장군님 품속에서 10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촬영되지 않았다.[24]

파일:샘물터에서.gif

파일:우리장군님제일이야.gif
편집/원본 비교

공연 영상도 다른 악단에 비하면 많이 알려져있지만,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것들도 많다.
2011년 대대적으로 방영된 보천보전자악단 공연들과 독창회들은 원본과 대조해볼때, 화면 편집도 심하고 없어진 부분도 많았다.[25]
일례로, 이경숙 독창회 1부의 경우 원본에 실린 외국 노래는 물론, 국내 노래까지 편집되어 20분이 넘게 줄어들었다.

2011년에 내놓은 모든 영상들이 이런 현상이 있으며 원본의 경우 알려지지 않은경우가 꽤 있는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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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천보전자악단 공연중에서 전시가요연곡(1995, 3)에서 나온 장면이다.[2] 북한 문화예술 현황분석 연구(2011), 책임연구 박영정 · 공동연구 오양열 · 전영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ISBN 978-89-6035-274-2, 119~120 페이지[3] 1991년 당시에서 현송월, 김정녀, 윤혜영이 추가되었고 연주가는 김원일과 최영철, 김해성, 김진이 사라지고 김승협, 장정원이 추가되었다[4] 저 공연에 현송월, 전권이 불참했다.[A] A B C D E F 인민예술가[5] 1989년 인민예술가, 1991년 김일성상, 1992년 김일성상, 1994년 김일성훈장, 2014년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2016년 사망했다.[6] 1992년 김일성상, 2014년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7] 황해도 봉산군 출생, 1992년 김일성상을 받았고 2017년 폐렴으로 인해 향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B] A B 2014년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C] A B 인민배우[8] 1988년 공훈배우, 1992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D] A B C D E F G 공훈배우, 1992년 수여[9] 1991년 공훈배우, 1992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10] 1977년생[11] 다만 1995년 이후론 공연 녹화물이 남아있지 않아 이 시기의 모습은 앨범으로만 볼수있다[12] 1975년생[13] 공훈예술가[14] 시인 전동우(1931~1999)의 아들이며, 인민배우 김광숙의 남편이다.[15] 공훈배우 조금화의 남편이다.[16] 공훈배우 리경숙의 남편이다.[17] 일본공연 이후 악단을 탈퇴한 것으로 추정됨[18] 제명된 이후 공연 영상에서 그가 나온 장면은 전부 통편집되었다.[19] 예측이지만, 1995년에 공연 녹화물 촬영이 중단된것이 김원일 제명에서 영향을 받았을수도 있다. 1995년이라면 창단 10주년이고 기념 앨범까지 발매했으며 가수들도 전부 건재했는데 굳이 방송 송출이 정지된것은 작은 이유때문은 아닐것이다.[20] 가요뿐만 아니라 영화음악도 어느정도 비중을 차지했는데, 민족과 운명(1992~2006), 도시처녀 시집와요(1993), 민족의 태양(1989), 기다려다오(1988), 나의 행복(1988) 등의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21] 북한에서 로작이라고 부른다.[22] 보천보전자악단이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가 김정일 찬양가요 보급의 태동기와 김일성 추모공연 보급 시기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23] 1999년부터 목란관에서 악기들이 아예 치워졌다.[24] 이유는 모르겠으나 1996년부터 악단 해체까지 악단을 기록한 녹화물이 일체 없다는 소리다.[25] 김원일의 제명이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