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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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어형
3. 서유럽의 봉건제
3.1. 9~10세기 : 발생
3.2. 11~12세기 : 발전
3.3. 13~14세기 : 붕괴
3.4. 이해를 위한 키워드
4. 유사 봉건제도
5. 동아시아의 봉건제도
6. 평가
7. 마르크스주의 사관에서의 봉건제
8. 봉건제와 현대 지방자치
9. 현대의 봉건제
10. 창작물에서의 봉건제
11.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봉건제(封建制, feudal system) 또는 봉건주의(feudalism)는 토지를 통해 주군봉신() 간에 형성되는 관계, 또는 그러한 관계에 대한 제도를 가리킨다.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더 복잡하다. 정작 중세인들은 '중세 봉건제'라는 개념을 알지도 못했고, feudalism이라는 용어는 1800년경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당시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불합리한 과거의 관습이나 사회현상은 전부 봉건제라고 불렀다. 당장 '봉건계약'의 종류가 위키백과 목록에 있는 것만 해도 수십 개는 되는 이유다. 따라서 '중세시대에는 봉건제 때문에 이러이러한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일이 있었다'는 식의 설명은 대개 선후관계가 뒤바뀐 설명이다.

역사학자들이 조선 같은 동아시아 왕조 국가나 카페 왕조 말기의 프랑스 같이 상당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수립한 전근대 국가들을 '봉건 왕국'이라고 지칭할 때의 봉건제는 이 feudalism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미개한 전근대 사회라는 뜻이다. 단어의 기원 자체가 중세시대(특히 유럽)에 대한 멸시를 담고 있는 데다가 대중적으로 중세 사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유발하기 때문에 현대의 많은 중세사학자들이 기피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맥락에 따라 다르지만 봉건제는 '중앙집권관료제'와 대비되는 지방분권형 정치 체제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만 현대 사학계에서는 역사가 일원적인 발전 과정을 가진다는 관점을 지양하고 있기 때문에 봉건제가 발전한 것이 중앙집권제라고 하지 않는다.


2. 어형[편집]


한자 '봉건(封建)'은 원래 주나라의 제도를 설명하던 단어이다. 근대 일본인들은 서구의 퓨덜리즘(feudalism)의 번역어로 그들에게 익숙한 봉건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물론 동아시아와 서구의 봉건제는 개념과 역사적 경험이 많이 다르다.

봉건제도, 봉건제, 봉건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중세 서유럽의 퓨덜리즘(feudalism)이 일반적인 논의의 대상이다. 서유럽의 퓨덜리즘(feudalism)은 아니지만 유사한 세계의 여러 제도들도 존재한다.


3. 서유럽의 봉건제[편집]



3.1. 9~10세기 : 발생[편집]


서양에서는 카롤루스 대제프랑크 왕국에서 고대 게르만족의 종사 제도(COMITATUS, Gefolgschaft, retinue)와 후기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恩貸地, beneficium)가 결합하여 봉건제도(Feudalism)가 나타났다.

이 가운데 COMITATUS는 라틴어 단어. 백작령도 같은 말로 쓰이는데 이는 COMITATUS는 제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제도 하 구성원인 COMES가 황제의 측근 관료로서 곧 백작이 되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고대 말~중세 초 유럽사에서는 이외에도 원수정(로마 초기 제정)이나 영역제후령 혹은 prince(fürst)의 영역 등 다양하게 번역되는 PRINCIPATUS처럼 문맥에 주의해야 하는 단어가 꽤 많다.

고대 게르만족의 자유민은 곧 무장을 갖춘 전사로 자기 자신과 일족을 지키는 자였다. 게르만족의 관습에서는 이러한 자유민들이 주군을 모셔 종사가 되고, 주군이 전투력이 필요하면 종사들을 소집하여 싸우게 하는 대신, 그 대가로 전리품을 분배받는 종사제도가 존재했다. 이러한 종사제에서 나타난 전형적인 전사 계층이 허스칼이다.

한편,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는 야만족 출신 군인이 국경을 수비하는 대가로 국가가 일정량의 먹고 살 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카롤루스 마르텔부터 샤를마뉴의 시대 동안에 게르만족 군주들은 두 제도를 적절하게 결합한다. 가신들을 동원해서 주변을 정복하고 정복한 토지를 약취해서 가신들에게 전리품으로 뿌리며, 동시에 해당 토지가 있는 지역의 행정관으로서 임명하여 지방을 자신의 가신화 하고자 했다. 샤를마뉴가 정복한 땅에 하나의 주(州, gau)를 설치하여 자신의 가신을 주 행정관으로 파견하고, 그곳의 장원 중 하나를 은대지(beneficium)로 설정하여 은대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행정관이 가지게 해서 행정관의 급여로 삼는 것이다.

이 시대에 가장 많이 약취 당한 토지의 원주인은 다름 아닌 가톨릭 교회로, 농노가 딸린 토지들은 대체로 원래 교회의 가산이었다. 이렇게 뿌린 토지, 즉 은대지(beneficium)는 기본적으로 군주의 소유가 되어 가신들에게 일시적으로 하사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런데 사실 이 분배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황제가 땅을 '나눠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정반대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정도. 개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지역의 유력자인 게르만 부족장이 샤를마뉴 제국에 항복하면, 그 부족장이 다스리던 땅을 황제가 가지고, 황제는 부족장의 군사적 충성을 대가로 다시 그 부족장에게 받았던 땅을 그대로 '하사'했다. 즉 충성을 대가로 자치권을 그대로 보장받은 것. 해당 지역에서 좀 힘 있는 조폭들이 샤를마뉴한테 '당신의 봉신이 될 테니 우리 동네 교회 땅 주인이 나임을 인정해주시오' 하고 '거래를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부족제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이 더 늦게 시작되었던, 중세 초 기독교 세계의 변방인 독일지역에서 두드러졌는데, 후대에 부족 공국이라 일컬어지는 영역제후들이 그러하다.

샤를마뉴 제국의 군주들도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저런 지방 유력자가 그대로 자신의 본거지 관직으로 임명되었다간 자신들의 지방 지배력이 약화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실제로 그들의 관구와 관직을 주기적으로 전환하는 순찰사 제도(missi dominici)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귀족 사회에 새로운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는 인사 제도가 없었으며, 혈연과 가문이 매우 중시된 당대 사회의 특성 상 결국 저런 관직은 혈연에 따라 돌려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순찰사 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 당대에 이미 한 사람이 여러 관구의 행정관직을 맡는 경우가 흔했고 친인척, 심지어 자식에게 관직이 세습되는 일도 너무나 흔했다. 당대 사회 사람들 역시, 원래는 관료의 급여 개념으로써 수여된 은대지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해야한다는 등의 요구를 끊임없이 했기 때문에 은대지와 행정관구직은 시간이 지날 수록 빠르게 세습 자산화 되었다.

이후 카롤링거 제국의 계승자들이 자기들끼리 땅을 갈라먹는데만 몰두하고 노르드인 바이킹마자르족(헝가리인)의 침입에 아무런 손을 쓰지 않자 황제의 권위는 추락하게 된다. 게다가 전조도 없이 빠르게 약탈오고는 황제군이 오기 전에 빠르게 도망치는 롱쉽과 유목민 경기병을 대응할 군사행정기술이 없던 시대인지라, 그냥 지방 토호에게 해당 지역의 관료 직위를 준 다음에 '네가 알아서 막아봐' 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끝내는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옛 프랑크 제국의 왕국 모두 카롤링거의 후손이 끊기면서 자유민이자 군주의 봉신으로서 동등한 신분을 지닌 유력영역제후가 모여 새로이 군주를 선출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탄생한 군주는 유력 영역제후 중 하나로서 그들의 대표자 격이었기에 그 권력이 나머지 제후를 압도하지 못하였다.

예컨대 프랑스 왕국에서는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는데, 카페 가문은 겨우 파리의 백작에 지나지 않아 각지의 제후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나마 카페 왕조의 창시자인 위그 카페는 단순한 백작이 아니라 모계 조상이 샤를마뉴 대제였고 스스로 프랑크 공작에 오를 정도로 강한 세력이었다. 그렇기에 그나마 국왕으로 선출되고 국가를 그럭저럭 끌고 간 것이다. 사실 유럽의 군주들 절대다수는 (실제로건 조작이건) 샤를마뉴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원래 각지의 자유민들은 황제 혹은 왕을 주군으로 모시는 자유민 전사였지만, 황제나 왕들이 야만족의 침공에 손을 쓰지 않자, 차라리 더 가까운 세력가들과 사적인 봉건 계약을 맺어서 자신을 의탁하는 길을 선택한다. 지방 귀족들 역시 게르만의 종사제 전통과 사유지 및 은대지를 중심으로, 하나의 영역제후령 또는 자유 토지령을 형성해 영주로 변화하여 지방민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영주(중세) 항목 및 봉토 항목, 작위/유럽 항목, 농노제 항목도 참조.

이러한 지방 권력들은 군주권과 로마보편법을 무시한 비합법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약해진 군주권은 이러한 비합법적 지방 권력의 확산과 성립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런 비합법적인 호족들에게 합법적인 지위인 공작, 백작 등의 작위를 사후에 수여하는 형식으로 호족들을 중앙권력제도 내에 편입시킨 것이 바로 봉건제도의 기본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후에 수여한 작위들은 이전에 있던 현실 권력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같은 등급의 작위들도 실제로는 각 작위마다 권한이나 의무가 달랐고, 중앙의 통제가 충분하지 못하다면 중앙에서 인정한 권한과 의무를 무시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러한 과정에서 영주들과 귀족들은 무엇보다 무력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군사력이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각지에서 무기와 갑옷, 공성 및 수성 기술, 축성 기술, 전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각 지방은 사실상 각각의 군사적 소국가가 되어갔다. 당시 문헌 자료들이 봉신을 의미하는 vasus와 전사를 의미하는 miles를 동의어로 사용하기까지 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군사적 조력은 봉건제의 일부, 충성 맹세로 인해 생성되는 의무가 되었다.

초기의 성주들은 주로 목책과 참호로 둘러싸인 망루로 이루어진 초보적인 성채를 건설했지만, AD 11-12세기에 돌로 지어진 성채들이 널리 퍼지면서 봉건 제도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9세기 이후부터 진행된 이 봉건제도의 발전에 등자과 중무장 기병의 탄생이 얼마간 연관되었다는 주장도 일각에 존재한다. 등자가 발명되어 중무장 기병이 '카우치드 랜스', 즉 겨드랑이 사이에 창을 끼우고 돌격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중장기병의 효용이 급상승했고, 황제를 위시한 영주들이 봉신들에게 중무장 기병을 부양하기 위한 땅을 분배한 것이 봉건제도가 진행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등자 대논쟁(Great Stirrup Controversy)'이라 불릴 정도로 꽤 유명한 떡밥. 하지만 서양 봉건제의 시작 자체가 밑에서부터 권력이 모여 위로 올라가는 형태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좀 더 복합적인 사회경제적 원인이 존재했고 등자와 중장기병의 탄생은 어느 정도의 원인이 됐을 뿐 결정적인 원인으로 지목하기는 어렵다.

이 점은 노르만 정복 전까지 독자적으로 봉건제가 성립해가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상황에서도 드러난다. 중세 초에는 후대의 독일 지역이 그러하듯, 부족제적 제후인 prince에 대응하는 "ealdorman"과 그 가신 전사들이 존재하였으나, 7왕국 간 전쟁과 더불어 특히 노르드인의 침공으로 거치면서 국왕 아래로 ealdorman/jarl(데인로 성립부터 앵글로-노르드 왕조까지의 영향으로 전자에서 후자로 대체. 초기에는 대륙의 공작에 가까운 지위였으나, 노르만 정복 직전에는 이미 대륙의 백작과 같은 위치에 있었음)과 shire reeve(=sheriff)를 비롯한 다양한 국왕 대리인(reeve), 왕의 thegn(king's thegn), 기타 지역적 thegn(일반적으로 대륙의 남작과 비견되는 위치. 흔히 종사나 호족으로도 번역됨)과 huscarl 등으로 이어지는 위계가 형성되었다. 잉글랜드 내 기마문화는 노르만 정복 이후에야 도입되었으므로, 봉건제 탄생에서 등자와 중장기병의 탄생이 중요 요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3.2. 11~12세기 : 발전[편집]


사실 봉건제의 발생과 발전 양상은 같은 카롤링거 제국 지역에서도 국가별로, 지역별로 차이가 크다. 이런 양상은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의 카롤링거 왕조 권역 또는 영향권에 집중되어 있지만, 우리가 익히 알듯 유럽은 스칸디나비아나 동로마, 폴란드 등 다른 국가들이 있고 이들의 봉건제는 또 다르다. 이슬람의 제도도 봉건제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 1000년을 이어간 중세의 모든 정치 체제는 발전 과정에 따라 비슷한 요소들로 길게 이어져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봉건제라 규정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프랑스의 경우는 카롤링거 왕조의 단절로 카페 왕조가 들어서자 왕의 권위가 한방에 대추락한 덕에 위에서 설명한 왕의 실권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봉건제가 바로 성립했다. 왕이 '너흴 백작으로 만들어준 게 누군지 잊었느냐!' 하자 백작들이 '댁을 왕으로 만들어준 건 누군데?' 하며 대놓고 개길 정도였다. 프랑크 제국의 관료로서 유력자였던 툴루즈나 아키텐 등 남부 영역제후들은 카페 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킨 장본인들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이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노르망디나 플랑드르 등 북부 영역제후보다도 군소 영주의 난립에 더 많이 시달렸다.[1]

반면 신성로마제국은 카롤링거 가문이 단절됐기는 해도 교황에 의해 다시 제위가 부활하였고, 교황에 의해 대관 받은 로마 황제라는 권위는 제후들의 난립을 상당히 방지하였다. 덕분에 공작, 백작 등의 작위가 황제가 내린 관직이라는 명분이 오랫동안 살아있었고, 그 명분을 바탕으로 황제는 여러가지 실권을 행사했다. 황제는 드문드문이나마 제국의회를 소집했고, 제국 의회에서는 제국 전체에 통용되는 국가 공법을 입법할 수 있었다. 또한 프랑크족의 자유민 배심원 법원이나, 황제가 파견한 법관에 의한 법원 등이 유지되었다. 한편 제후들이 가진 사유토지와 영지도 대강이나마 구분되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하인리히 사자공의 거대한 공작령을 몰수하기도 했고 듣보잡 백작이었다가 황제로 벼락출세한 루돌프 1세는 보헤미아 왕인 오타카르 2세에게서 오스트리아 공작령을 뜯어내기도 하는 등 황제들이 충분한 권한을 행세했다.

한편으론 제후의 사유토지도 원래 무지막지 넓은 경우가 많아서 그 자체로 영역제후령을 이뤄 영방국가로 변하기도 했다. 흔히 유럽사를 프랑스사 중심적으로 이해해서 '중세에는 봉건제로 왕의 실권이 약했고 중세 이후에 절대왕정이 열린다'고 일컫지만, 신성로마제국의 분권화는 오히려 중세를 거치면서 분할 상속, 황제의 견제 등을 통하여 서서히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프랑스와 독일 지역의 왕권 차이는 징집법을 예시로 들어서 확인할 수 있다. 국경의 요새를 수비하는 병사를 예로 들자면, 프랑스의 경우 그 병사들은 봉토를 수여받아 그 봉토에서 농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군인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해당 지역의 영역제후가 자기 필요를 위해서 소집한 가신들이었지 왕의 명령으로 소집된 군은 아니었다. 반면 독일이라면 그 요새 주변에 사는 자작농이 제국 공법에 따라 1년에 40일의 복무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이 경우도 직접 명령권자 자체는 해당 지역의 변경백이지만, 변경백 직위 자체가 황제가 임명한 작위라는 명분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저 자작농은 명목 상이나마 황제 휘하의 제국군이었다.

이 시기는 봉건계약이 사회하부로 확대된 시기이다. 봉토 항목과 기사(역사), 서전트 항목을 참조하자. 이 시기에는 다양한 직무에 대한 대가로 토지가 수여되었으며 토지를 보유한 자는 곧 그 주군에게 봉건적 의무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 전쟁 수행의 의무였다. 하지만 이 시기 동안에는 동시에 프랑크 시대의 '자유민은 곧 농민이자 전사'라는 관념과 왕권과 함께 무너져 허울뿐인 징집법도 동시에 존재했다. 그래서 영주들에게 봉토를 받은 최말단의 배신 기사나 자유농민까지도 여전히 자유민으로서의 의무가 존재했고, 거대한 영지를 보유한 귀족들에게는 왕에 대한 봉건적 의무와 자유민으로서의 의무가 동시에 존재했다. 때문에 중세의 전투가 기사들만의 싸움이었을거란 인식과 달리 일반 자유민들도 징집되어 보병으로 활용되었다. 다만, 기사들의 전력이 워낙 막강했을 뿐더러[2], 대규모 보병을 위한 대규모 군수물자를 멀리 나를 교통 능력이 부족했던 점, 무엇보다 징집에 대한 저항이 매우 심했던 관계로, 봉건 계약에서는 거의 대부분 기사의 동원만이 명시되었다. 물론 보병은 어떤 이유에서건 계속 필요했던 관계로 기사가 대동하는 종사들, 직할령이나 전장 근처 현지에서 징집한 자유민, 그 외 교회에서 동원한 자유민 등이 보병으로 활용되었다.

사실 위에서 말한 신성로마제국에서 제국공법에 의한 동원령은 자유농민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운 의무였다. 기본적으로 전근대 군대가 다 그렇지만 복무하는 동안에 비용은 자신의 재산을 써야했으며, 중장기병의 수요가 점점 커지자 불과 3결의 토지[3]를 가진 이들에게는 기병으로 무장하여 복무해야한다는 법령이 생기는 등 의무가 지나치게 커지자 소규모 자유농민들이 그러한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대토지 보유 영주들에게 자신을 투탁하여 농노가 되는 등의 문제가 생겼다.고려 시대랑 똑같은데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는 황제 직속의 대영주들이 보유한 가신과 측근 기사들 위주로 구성되어 결국 프랑스와 똑같은 발전 과정을 거친다.

봉건 사회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세금은 없었다. 영주가 자신의 직할령에서 땅을 빌려간 농노들에게서 현물과 부역을 통해 착취하든가, 사유지인 영지에 사적으로 세운 교회는 영주의 소유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가 걷는 십일조 등을 취하는 것으로 물적 자원을 얻었다. 군주조차 영주들이나 영주들 휘하의 신민들에게서는 세금을 걷을 수 없었고, 군주는 자신의 사재로 생활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겼다.

대신 타유(taille)라는 경조사비 형식의 독특한 세금이 발달했다. 원래는 '선물', 혹은 '부조'라는 뜻이었다. 주군이 돈을 갑자기 많이 써야하는 등의 일이 있을 때 가신들이 주군을 위해 부조의 성격에서 기부하는 것이었다. 주군의 자식이 결혼할 때, 주군이 포로가 되어서 몸값을 내야할 때, 주군이 토지를 강제로 구매해야할 때 등의 상황에 적용되었는데, 유래 상으로는 기부였으나 세금으로 정착해버린다. 이 타유세는 프랑스 혁명 전까지 남아 있었는데, 그 유래가 매우 봉건적인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특히 현대인들에게도 유명한 책으로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시대가 어느땐데 아직도 타이유가 현역이냐' 며 프랑스를 까는 구절이 있다.

한편 이 시대는 기독교(가톨릭)의 영향이 강해지며 기존의 게르만의 습속 등과 결합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11세기경부터 카롤링거 왕조 적부터 내려왔던 보호의 위탁 의식, 즉 봉신 맹세 의식이 3단계로 자리잡았다.

  1. 첫 번째로 신하가 되어 따를 것을 맹세하는, 봉신이 양손을 군주의 두 손 사이에 집어넣고(immixtio manuum), 항상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복종과는 차별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선언(volo)을 했다.
  2. 두 번째로 성경 또는 성유물을 놓고 충성을 맹세했다.
  3. 마지막으로 군주의 입술??????? 또는 칼에 입맞춤(osculum)을 했다. 봉신의 지위를 획득하는 의식은 양도한 봉토를 상징하는 한 줌의 흙덩이와 나뭇가지, 또는 홀을 군주가 수여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러한 의식은 후대로 갈수록 꼭 필요하지는 않게 되기도 했다. 농업 계약에 쓰이던 방식으로 작성된 서면에 등록을 하는 방식으로 봉토를 획득하거나, 중세 후기에는 특히 도시에서 실질적으로 '봉사'의 개념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봉신의 신분과는 관계없이, 부르주아나 여성 권력자들의 발흥에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봉토 또한 이전의 봉건적 관계에서 탈피한 매우 다른 방식, 즉 군사나 의무보다는 땅과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춘 양도가 지정되게 되었다.

봉건제를 이루는 토대들을 오직 관습법과 구전에 의존해서 수백 년이나 유지했던 프랑스와 달리, 이탈리아는 봉건제를 이루는 제도들이 이르게 입법 및 성문화 되었다. 11세기 초 밀라노의 군주였던 대주교 아리베르토(Ariberto da Intimiano) 휘하의 봉신들과 그들의 배신(陪臣)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배신은 봉신의 봉신, 프랑스어 : Vavasour, 유럽 봉건제에서 배신은 남작 아래에 봉토를 수여받은 최하위 비자유 귀족으로, 자기 아래에 가신을 두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주로 기사서전트(sergeant), 미니스테리알리스(ministerialis) 등 봉사로서 봉토를 획득하는 말단 지배층이 해당한다.

아리베르토는 롬바르디아 철관을 신성로마황제에게 주는 대가로 밀라노 교구의 우월성을 인정받은 대영주로, 당대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를 제일 크게 위협하는 라이벌이었다. 배신들은 중간 봉신들에게 수여받은 토지를 사유재산으로써 세습받는 것을 요구했고, 반면 아리베르토 휘하 봉신들은 토지가 당대에만 수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신들이 동맹을 조직하면서 반란이 계속 확대되었고, 결국 황제가 직접 개입하게 된다. 황제 콘라트 2세는 아리베르토를 견제하고자 하급 귀족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고, 1037년에 교회가 봉신들에게 수여한 봉토는 세습이 가능하다는 법을 입법한다. 여기서 봉토에 관한 칙령(Edictum de beneficiis) 또는 봉토법(Constitutio de feudis)이 나왔다고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이런 성문주의 경향으로 인해, 상기한 봉신 맹세 의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봉신 계약에는 저런 거창한 의식보다는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3.3. 13~14세기 : 붕괴[편집]


중세 말부터 진행된 서유럽의 중앙집권화 경향 및 사회문화적 변화에 의해서 근세에 이르면 고전적인 형태의 봉건제는 붕괴된다.

  • 화폐경제의 발달 : 기본적으로 봉건제와 장원제는 화폐 경제 발달의 미비로 현물 조세를 중앙까지 옮기기는 어려우니까, 현지에서 나오는 식량/부역/병역을 관료에 대한 급여이자 행정 비용으로 지급하는 성격이었다. 화폐 경제가 발달함으로써 돈을 통한 조세를 중앙으로 걷을 수 있게 되자 저런 봉토 지급도 사라지며, 영역제후 귀족들에게 걷지 않았던 조세도 걷기 시작한다.
  • 장원의 붕괴 : 화폐 경제와 상업과 해외 교역이 발달하자 토지에만 기반한 경제를 유지하는 영주들은 상대적으로 재정난에 시달린다. 장원의 토지들은 지속적으로 분할되는 동시에 법의 발전으로 인해 기존의 농노들의 토지점유권이 실질적인 재산권으로 변화하여, 장원의 토지들은 분할되고 해체되었다. 그렇게 해체된 장원이 부르주아 계급에게 팔려나가거나 분할, 임대되는 일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 용병의 등장 : 기사 신분이 세습 계급화 되어서 군인으로서의 전문성이 점점 떨어지는데다가 비용이 높아 비효율적인 봉건 가신들의 역할을 용병이 대신하게 된다.
다만 이들 용병이 기사와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이유에서 기사 신분이라도 용병으로 활동하는 사례는 빈번했다. 나눌 재산이 부족하거나 아예 장자상속이 정착되면서, 기사나 영주의 차남 이하는 가문을 경영하게 될 장남의 관료로 봉사하거나 근방의 주교·수도원장을 지망하는 게 아닌 이상 기회를 찾아 떠돌았고, 많은 경우 용병으로 활동하였다. 혹은 토지를 가진 경우라도 배신(봉신의 봉신)이거나 소규모 봉토의 남작 혹은 기사라면 더 많은 수입을 위하여 보수를 받고자 전장을 전전하였다. 즉, 여기서 언급하는 용병의 대두는 기사가 직업적·군사적 정체성 대신 사회계급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서 직접 군역을 수행하기보다는 방패세(scutage) 등을 지불하고 영지 경영에 전념하였던, 화기의 발달 훨씬 전부터 진행되었던 현상을 의미한다.
  • 법학, 관료제의 발전 : 특히 프랑스의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한 법학의 발전은 전 유럽에 법치주의를 전파했다. 게르만의 종사제 관습에 기반해서 지역권력을 휘두르던 영주의 입지는 갈수록 줄었고, 농민들은 관습에 따라 임의로 부과된 의무를 철폐하고 문서화된 의무 증서에 따라서 세금을 매길 것을 요구했고, 국왕은 영주가 휘두르던 재판권을 자신이 파견하는 관료와 법관에게 수여했다. 필리프 2세 이후 13세기 동안 프랑스에서는 세네샬, 바이이(대법관) 등 다양한 직위의 관료가 신설되었다.
  • 민족, 국가 의식 등장 : '영역'의 성격이 강했을 뿐 주권-국민-영토가 결합된 '국가'라는 개념이 부족했던 중세적 관념이 타파되고 근대적 국가 의식이 생겨났다. 아주 단적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13세기 이전에는 제국이나 왕국조차도 '사람 딸린 토지'로 영역이나 심지어 사유재산에 더 가까운 것이었는데, 그런 개념이 종결되는 것이다. 특히 영국프랑스는 백년전쟁을 통해 이런 결과가 강화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공통사항이며, 세세한 부분에서는 국가별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과정을 거쳐서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또한 봉건제가 붕괴되었다는 표현과 달리, 봉건제의 잡다한 흔적들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으로 완전한 근대국가가 탄생하기 전까지 전 유럽에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로 잔존했다.


3.3.1. 잉글랜드 왕국[편집]


영국은 윌리엄의 정복 이래로 상당히 강한 관료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노르망디 공 윌리엄은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점령하여 기존의 앵글로색슨 귀족들을 대량학살했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며 자신의 노르만 사병들 중 최측근에게 잉글랜드 영주 자리를 나누어줬는지라 군신 유대관계가 비교적 강했다. 즉 대륙의 봉건제와는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권력을 내려주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이때 이미 서유럽의 관료제와 법제는 현대인들의 편견과 달리 상당히 발전해 있었고, 이렇게 토지를 나눠주는 과정 역시 철저히 문서화 된 관료제적 방식으로 이뤄졌다. 둠즈데이 북이 그런 잉글랜드의 문서화된 관료제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노르만 정복 이후로 잉글랜드의 모든 토지의 법적인 소유자는 왕이었다. 노르만 사병들은 대대적으로 토지를 분봉받아 남작과 영주(Lord)들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 대륙과 달리 이들은 서로 사적 분쟁으로 토지를 점유하거나 병합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며, 토지를 상속하기 위해선 왕의 허가를 받고 상속세를 납부해야했다. 게다가 그들이 내려 받은 토지 중 4분의 1의 토지는 왕을 위한 것으로 지정되어 토지 소득 중 그만큼은 왕에게 납부해야 했으며, 데인세라는 토지에 대한 직접세도 또 부과되었다.

백작과 공작 등 샤를마뉴 봉건관료제도가 이식되었으나, 백작이나 공작이 자신의 영지에서 행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재판 수입 가운데 일부(벌금형이 나오면 그 중 3분의 1은 피해자, 3분의 1은 왕, 3분의 1은 백작)만을 받는 것과 징집된 군인들을 지휘할 권한 뿐이었다. 백작령은 그저 행정구역일 뿐, 소유한 영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백작령에 백작의 소유토지가 없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옥스포드 백작 소유의 부동산은 대부분 에식스에 있었다. 백작들은 자신의 백작령 내부의 남작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을 수도 없었다. 남작들은 전원 왕에게 직접 충성해야했다. 공작은 백작을 봉신으로 두는 영역 군주가 아니라, 백작 중 명예 서열 상 더 높은 이들에게 주는 칭호에 불과했다. 때문에 공작령과 백작령의 크기나 역할이 비슷했으며, 잉글랜드 내의 비왕족 공작위 자체가 14세기에야 생겨난다. 공작과 백작들은 영지를 소유하고 다스리는 존재라기보다는 관할구 내의 토지들의 임대차 네트워크(물론 왕으로부터 토지를 빌린 남작과 영주들)를 관리하는 관료들이었다.

이조차도 백작령에서 재판권, 군사징집권, 징세권은 국왕의 대리인인 셰리프(sheriff)가 행했다. 이 셰리프는 옛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고유 관료제에서 비롯한 지위로, 축약하지 않고 쓸 때는 shire reeve라고 썼으며, 과거에는 이외에도 다른 여러 reeve가 존재하였다. 이들은 징세청부업자처럼 국가에 선금을 지불한 다음에 그 대가로 직위를 사는 형태였으며, 이를 맡는 주 계층은 기사이거나 남작 정도의 영지를 가진 하급 귀족이었다. 이들 상당수는 세습에 성공했으나, 국왕이 임의로 물갈이 하는 것도 쉽게 가능했다. 군사에 대해서 징집권은 있는데 지휘권은 없으니 반항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유럽 본토의 봉건제는 (마치 조선의 과전법처럼) 봉급으로써 행정 구역의 토지 일부에 징세권을 부여받았던 것이, 중앙 정부가 맛이 가자 행정·군사관료들이 행정 구역 전체를 소국가처럼 다스린 것이 시작이었으나, 영국은 재판·군사·징세권을 전부 중앙 정부가 파견한 관료가 통제하였기에 영국식 봉건제는 오직 '군사적' 부분에만 치중했고, 시골의 조그만 남작령 장원 하나에도 최소한 몇 명의 기사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계약이 아닌 중앙정부의 규정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런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제'는 정복왕 윌리엄부터 둠즈데이 북으로 그 청사진이 만들어졌고, 그의 아들인 헨리 1세 때에 이미 틀이 잡혔다.

실제로 노르만 정복 이후의 영국사 상 국왕이 영국 내부의 영지 상속으로 골머리를 썩거나, 대영지를 가진 영주가 독립을 시도하는 등 지방분권적으로 나아갈만한 사건 자체가 없다. 영역의 절반 가량이 상속만으로 뜯긴 프랑스랑 대조적이다. 심지어 귀족들에게 세금 걷기가 어려웠던 프랑스, 신성로마제국과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자유민=남작=귀족들을 징세의무자로 지정했고, 왕은 그들에게서 세금을 직접 걷는 것도 가능했다. 이 토지세는 프랑스의 타유세(taille)에서 본따서 탈레이지(Tallage)라고 불렸다. 영국 암군의 대명사 존 왕이 당한 귀족들의 반란도 바로 저 남작들의 반란이었고, 탈레이지는 마그나 카르타에 의해서 폐지된다.

카르타(헌장)에 대해서도 프랑스, 신성로마제국과 비교하면 명확해진다.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은 저러한 카르타가 일부 영지, 일부 도시 등에만 적용되는 경우가 흔했으나 영국은 '귀족을 포함한 모든 자유민'에게 적용되는 마그나 카르타가 존재했다. 의회 역시, 게르만족의 풍습으로서 전 서유럽에서 항상 행해졌으나, 지방 단위의 의회가 아닌 국가 단위의 대의회가 꾸준히 열린 것은 영국 뿐이다. 국가 조직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니까 권력을 두고 싸울 때 국가를 해체하는 것이 아닌 국가 전체를 걸고 싸운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윌리엄 정복왕 이래로 영국은 항상 통일된 국가 관료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3.2. 프랑스 왕국[편집]


앙주 제국을 붕괴시킨 필리프 2세 이후 프랑스도 비슷하게 영지 단위를 넘어선 단위의 국가, 국민, 애국심 등의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카페 왕조 이래로 왕권이 바닥부터 시작한 입장이라서 오히려 중앙집권이 가능했던 면이 있다. 샤를마뉴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봉건제에 의한 관료제, 즉 공작과 백작을 중심으로 한 봉건관료제에서는 프랑스 왕은 그냥 백작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아서 동쪽의 신성로마제국 같은 강한 왕권을 곧바로 휘두르는 것은 꿈도 못 꿨다. 그래서 프랑스 왕들이 선택한 방법은 샤를마뉴식 관료제가 아닌, 직할지 관료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백작령이나 공작령이 후계가 단절되어서 왕에게 돌아갔을 때나 세습을 통해서 영지를 획득했을 때, 혹은 돈을 주고 영지를 사들였을 때, 프랑스 왕들은 새로운 백작이나 공작을 임명하는 대신 왕실 직할지로서 계속 다스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치안판사(bailiff)나 지사(seneschal) 등 국왕이 임의로 임명하는 '직할지 관료' 조직이 발전했다. 이러한 왕의 관료들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남작이나 기사 출신에서 많이 충당되었다

흔히 프랑스의 중앙집권 과정을 프랑스 통일이라고 표현하나, 사실 이러한 점진적인 합병은 통일이라기보다는 얼기설기 긁어모아 이어붙인 형태에 더 가까웠다. 프랑스 왕권이 워낙 시궁창이다보니 각 영지마다 다른 법이 마구 생겨났는데, 프랑스 왕은 저렇게 긁어모아진 영지들의 법을 건드리지 않았다. 죽어나가는건 다른 동네로 전근될 때마다 법이 생판 달라진 치안 판사들 이 경향은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 이어진다. 프랑스 왕국 전체의 의회, 즉 삼부회가 자주 열리지 않은 것은 역설적으로 이 프랑스 왕의 권력이 매우 미약한 것에서 기인하는데, 왕권이 워낙 약하니 왕국 전체에 통용되는 법을 만들 수가 없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왕권이 약할 때도 안 열리고 강해도 안 열리는 삼부회 왕국 전체의 의회가 아닌 각지의 지방 의회는 꾸준히 계속 열렸다.

중세 말~근세 초기 프랑스의 중앙집권을 가속화한 것은 백년전쟁이라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 난리통에 기사와 귀족이 대거 갈려나갔는가 하면, 농민들이 흩어지기도 했다. 백년전쟁에서의 피해가 여러모로 장원을 무너뜨리는 데에 한몫 했다. 특히 영국이 이 전쟁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아보면 어떻게 프랑스의 봉건제가 그렇게 근본적이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는지 알 수 있는데, 영국 본토 관점에서는 이 전쟁의 장소가 바다 건너인 까닭에 이 전쟁이 자국을 황폐화할 위험한 상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위험한 골드러시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귀족과 평민을 막론한 수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기사, 귀족들을 붙잡아 몸값을 챙기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는 푸아티에 전투, 크레시 전투, 아쟁쿠르 전투 등에서 엄청난 수의 중기병들이 궤멸당했고 제대로 된 대처가 불가능했다. 심지어 영국군 지휘관들은 슈보시(chevauchee)를 시행했는데, 이는 건물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싹 다 불태우고 죽여버리는 행위를 의미했다. 북유럽인들보다도 더하지만 명예로운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병력이 쉽게 분산되기에 엄청난 피해를 입지만, 적 영지에 막대한 피해를 가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흑태자가 이끈 어마어마한 규모의 슈보시가 있다.

이러한 상시적인 전쟁 상태가 길어지자, 이전과 같이 왕이 오직 왕령에서 나는 수입만으로 왕국의 방어를 위한 비용을 충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데에 프랑스인들 전체의 의사가 모여진다. 때문에 14세기에 들어 프랑스는 처음으로 신민과 귀족들에게서 세금을 걷기 시작한다.

사실 14세기 초반까지 엄밀한 의미의 조세는 프랑스 왕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귀족들의 의무 중 군주에게 바치는 부조(taille, 타유)가 존재하긴 했으나, 이것은 봉신들이 주군에게 순전한 호의(dona gratuita)로 상납하는 무상 증여의 개념이었으며, 신민에 대해서는 군주나 영주의 자의적인 착취(exactio)만 존재했다. 이전까지 프랑스는 국왕이 기본적으로 그 자신의 재산으로 살아가(vivre du sien)는 것이 전통적인 미덕이었다.

이때 중세 최고의 법학 연구 기관이었던 파리 대학에서 양성된 법학자들이 프랑스 왕을 위해 아가리와 펜을 열심히 놀려주었고, '왕국의 방어를 위한 명백한 필요(necessitas evidens)'가 있을 때 왕은 왕국 전역의 일반 신민들에게서 봉건적 부조를 받을 수 있다고 정당화하여 전쟁 보조세(subsidium guerrarum)가 탄생한다.

또한 유명무실화 되었던 전 신민에 대한 군사소집령인 아리에르반(arrière-ban)도 부활하여 전국민에 대한 동원 체제가 시작되었으나, 이건 너무나 반발을 심하게 산 관계로 흐지부지되며 세금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금방 바뀐 대신, '회색 지대'의 병력들이던 용병들을 고용하여 군대로 활용하는 규모도 급격히 확대된다. 또 이전과 달리 병사에게 봉토를 수여하는 대신 계약을 맺고 현금으로 급여를 지불하여 맨앳암즈 혹은 장다름을 구성하여 상비군으로 활용하게 된다. 또 이 과정에서 군사에 대한 징집권과 훈련권도 왕의 고유 권한으로 넘어가는 법령이 재정되어 위에서 말한 치안판사(bailiff)나 지사(seneschal) 등이 행하게 된다.

위와 같은 중앙집권이 계속 된 결과, 왕이 다시 여러개의 영지를 묶어 공작령, 백작령으로 재편해 왕실 방계에게 나눠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영지의 징세권과 사법권과 징집권은 왕이 임명한 관리에 의해 행해지게 된다. 왕에 의해 새로 임명된 영주들은 이전과 같은 자유토지를 가진 독립적인 호족이 아닌 그저 대규모의 면세 토지를 보유한 지주에 불과하게 되며, 지방 의회와 왕이 임명한 관료들이 실질적으로 더 큰 권한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백년전쟁과 부르고뉴 전쟁을 마친 프랑스는 프랑스 내에서 독립이나 분열이나 자치권 확대를 노리며 전쟁을 내는 귀족 세력은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의 중앙집권은 여전히 봉건적이었다. 왕은 각 영지의 지방 의회와 개별적으로 협상을 해야했고, 전쟁 동안 그러한 협상 내지 계약은 계속 갱신되어야 했으며, 세금의 필요성 자체를 전쟁에서 찾은 특성 상 전쟁이 끝나면 그런 협상은 왕에게 좀 더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근세 앙시앙 레짐 동안 프랑스는 행정구역과 사법구역과 군사관구가 서로 전부 다른 이상한 모습이 나타났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군사권과 행정권과 사법권을 각기 따로따로 점진적으로 왕이 사들이는 형식으로 프랑스가 통일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앙시앙 레짐 문서에서 더 자세히 프랑스의 봉건적 잔재들을 볼 수 있다.

3.3.3. 신성 로마 제국[편집]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지역은 중세 성기 이후로 가장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을 보인 지역이다. 한자 동맹의 결성이나 동방식민운동 모두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비약적인 경제 성장과 인구 성장의 결과로 나타난 일들이었다. 독일 지역은 더 이상 노예 말고는 팔 것이 없는 가난한 동네가 아니었으며, 광산업과 금속산업의 발전에도 힘 입고, 각지의 제후들이 화폐 주조권들을 황제에게 따내면서 화폐 유통도 활성화 되었다. 수 많은 자치 도시들이 발생하여 도시법이 발전하였고 독일의 도시자치법은 동유럽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때 많은 농노들이 한 몫 잡게 되었는데, 예컨대 ministerialis들은 도시 내 관료로서 사회적 특권을 획득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농노가 도시인이 되어 경제적 능력을 쌓았다. 이들은 그렇게 얻은 능력으로써 법제적 지위의 상승도 꾀하였고, 차츰 자유민으로 해방되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샤를마뉴의 봉건관료제의 고향이다보니 그 구습이 해체되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도 저 샤를마뉴식 봉건관료제의 틀 내에서 개혁을 더하거나, 귀족-교황-황제의 균형속에서 주도권을 잡아서 권력을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것만 가능했을 뿐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선거제로 인해 황제 가문이 획획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황제들은 제국 전체의 중앙집권을 추구하기보다는 그냥 자기의 세습 가능한 직할지 내에서 중앙집권을 추구했다.

15세기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사실상의 세습체제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합스부르크 황제들은 수 많은 제국 개혁을 추진했다. 영구 란츠 평화령, 제국 일반세, 영구 제국회의, 제국 재판소, 제국 통치 자문회 등 실제로 그러한 개혁은 다수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관료 지위가 토지와 일체화되는 경향은 계속 진전되었고, 결과적으로 제국 내부 개별 영지들은 개별 국가화되고, '지방분권적인 중앙집권'으로 발전한다. '지방분권적인 중앙집권'이란, 즉 영지를 가진 각지의 제후별로 내부적으로 중앙집권에는 성공했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신성로마제국 전체로서는 중앙집권 이룩에 실패한 채 국가연합과 연방국가 사이 느슨한 정치제로서 남았던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타격은 종교 개혁이었다. 이 현상의 결과로, 30년 전쟁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주권국가로서의 제국은 사실 상 소멸하게 된다. 합스부르크가 열심히 했던 개혁들은 중앙집권국가의 행정체계보다는, 현대 EU의 기구들처럼 국제기구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 명목 상의 황제위를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은 직할지인 오스트리아 등지를 다스리는데에 집중하게 된다.


3.3.4. 이탈리아[편집]


일단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리소르지멘토 이전까지 딱히 '이탈리아 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오도아케르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난 뒤 '이탈리아 왕' 칭호를 얻었다가, 돌고 돌아서 이탈리아를 침략한 프랑크인들과 카롤링거 왕조와의 관계 덕에 결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해당 칭호를 가져간다. 물론 온갖 공국들과 백국, 변경백국 등이 난무하지만, 다들 신성 로마 황제, 동로마 황제, 교황, 프랑스 국왕 등 각각 충성하는 주군 자체가 달랐으며, 여기에 따라서 해당 영지의 특징이 갈렸다.

물론 샤를마뉴의 영토에 한번 편입이 된데다가, 서유럽권과 바짝 붙어 있는 특성 때문에 북이탈리아는 봉건주의 체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토지를 수여하고 군사적 봉사를 요구하는 계약은 이탈리아에서도 성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약은 계약서에 서면상으로 이뤄졌지, 알프스 이북 같은 기사 서임식 같은 의식은 발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기사 계급 역시 발전하지 않았다. 정치-군사 권력의 중심지가 도시가 아닌 장원으로 옮겨간 알프스 이북과 달리, 이탈리아는 여전히 주교좌 도시가 정치-군사 권력의 중심지였고, 군사력의 핵심도 여전히 시민보병이었다.

하지만 남이탈리아는 북이탈리아와 사정이 달랐다. 시칠리아 왕국노르만인의 침공으로 정복되어 형성된 왕국이었기 때문에, 봉건적 귀족들과 다양한 사회계층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왕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3.3.5. 나바라 왕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편집]


이베리아 반도는 애초에 중세는 레콩키스타로 점철되어 있어서 피레네 산맥 이북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애초에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마지막 보루로 삼은 서고트 왕국의 잔여 세력들이 그 근원이었고, 그에 따라 프랑크 제국식 행정에 근원을 두는 봉건 제도는 애초에 발전하지도 않았다. 백작(count)과 공작(dux) 자체는 존재했으나, 그것은 로마법이 공통된 근원이어서 이름이 겹쳤을 뿐, 프랑크 왕국의 그것과 성격이 같지는 않았다.

이베리아 북쪽에서 군벌들이 지방을 장악하며 사후에 저러한 관직명을 얻은 것과 달리, 이베리아 국가들은 정복지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기독교 유민들을 정착 시키는 등 행정적 장악을 해야하는 입장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은 서고트 왕국 시절부터 로마식 법제가 잘 유지되었고, 그에 따라 도시 위주의 행정과 의회 개념이 잘 이어졌다. 의회(cortes)에 투표권이 있는 주도급 각 도시들은 일부 교구와 귀족의 라티푼디움을 제외한 주변의 행정을 장악하였다.

때문에 스페인, 포르투갈은 대토지 귀족이 군벌로 성장하여 왕에게 개기는 일보다는, 의회에서 귀족들만이 아닌 도시 부르주아나 성직 귀족들 등 다양한 계층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충돌하고 왕은 그러한 문제들을 조율하는 위치로서 권위를 행사했다. 말하자면 동시대의 북이탈리아랑 비슷한데 왕과 의회가 있어서 내전에 덜 시달리는 상황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열기 위해 대서양으로 나간 것도 포르투갈은 대토지 귀족보다는 상인과 도시 부르주아 계층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

3.4. 이해를 위한 키워드[편집]


중세 봉건제를 군주와 신하간의 관계로 이해하려고 들면 동아시아에는 그 유사한 정치체제도 없었기에 동아시아인은 이해하기 힘들다.하다못해, 주군과 봉신이라는 용어도 중세 봉건제를 설명하기에는 전혀 적절하지 않다. 봉건제는 본질적으로 쌍무계약이며, 오히려 봉신이 갑이고 왕이 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설명이야 주군과 봉신관계라 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권력이 내려오는 것이 전혀 아니다. 게르만 부족제 관습에 기반한 군벌들과, 로마 제국에서 계승된 관직 개념이 결합하여 구성원들 간의 계약이 얽히고 섥혀 국가와 비슷한 모양새가 형성된, 제도라기보다는 사회적 상황에 가까운 것이었다.

봉건제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와 개념이 전혀 다른 몇개의 키워드를 확인한 후에 그것들을 조합한 맥락을 통해 비춰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로 봉건제 시절의 중세 유럽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당시 유럽에는 오늘날의 국가 개념이 없었거나 미약했다는 것이다. 즉 '구성원 전체를 위한 공적인 국가'가 없었다. 그러한 모델의 국가는 중세 후기인 13세기에나 등장했다. 그럼 중세인들은 국가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사실 공공을 위한 국가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데, 이 공공의 기준은 하나의 도시, 시민(자유민)에 머물러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부터 이어진 시민 공동체가 곧 유럽의 공공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운영은 시민 공동체에서 선출된 능력있는자가 자신의 힘으로 공공에 봉사하는 것으로 이뤄지는 것이 유럽에서 공공 국가(Res publica)의 개념이었다. 때문에 왕은 물론이고 둑스, 코메스 등 '공직'을 맡은 유력자도 시민(자유민)에 대한 무조건적인 주인이나 지배자가 아닌, 그들을 지키는 '보호자'로 의무를 다해야하는 존재였다. 물론 이것도 명분의 형태가 다를 뿐 지배권의 일종인 것은 맞다.

둘째로 자유민의 기준이다. 본래 지중해 세계에서 자유민이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여 무장하고 공동체가 전쟁에 휘말리면 종군하는 이들이었다. 단 한가지 명심할 점은 저 자기 소유의 토지, 즉 자유 토지는 세금을 원래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토지를 경작한 것에 대해 세금을 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소유한 토지를 빌린 대가였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봉토를 가진 영주들은 어떨까? 그들은 토지의 소유자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자기 봉토 내에서 땅을 빌려 경작하는 농노들에게서 대가를 받는 입장이었지, 국가에 대해 세금을 내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민으로서 종군을 통해 공동체에 봉사하는 입장이었다.

귀족들이 자유민에게는 주인이나 지배자가 아니지만 비자유민(농노)에게 지배자다. 농노는 땅에 종속된 존재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즉 봉건사회 유럽에선 땅과 그 땅에 사는 인민주권이 결합되지 않았으며, 하나의 영역(영지)은 사람이 딸린 부동산의 개념으로 이해됐다. 마치 임야를 소유한 사람이 임야 내의 나무를 당연 소유하지만 따로 나무를 팔 수 있듯 농노도 그런 존재로 취급됐다. 때문에 봉건사회에서는 '로마인의 황제' 냐 '로마(땅)의 황제'냐가 철저히 구분되었다. 전자는 자유민들에게 권력을 위탁 받는 공적인 존재고, 후자는 로마땅을 사유재산으로 소유해 그 신민들을 지배하는 존재인 것이다.

고대 로마의 유력자들이 경제적으로는 라티푼디움과 노예를 통해 힘을 확보했다면 중세 유럽에서는 장원과 농노를 통해 확보했고, 고대 로마에선 군사적으로 파트리누스-클리엔테스 관계로 사병을 만들어서 힘을 확보했다면 중세 유럽에서는 게르만 종사제의 탁신 관계로 힘을 확보한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로마로부터 이어 받은 '시민들의 공공의 업무'가 존재하는 곳이 도시 내부라면, 도시 외부의 촌락 질서는 게르만 전통의 탁신제에서 유래한 봉건주의로 돌아간 이중적인 질서의 세계가 중세였다.

때문에 '공공의 업무를 위해 일한다'와 '권력'이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 군사력, 경제력 등 권력은 봉건질서에 따라 '사유물'로써 움직였고 공공의 업무는 저 사유물인 권력을 이미 소유한 자에게 당연히 위탁되었다. 권력이 없으면 공공의 업무를 수행할 수 없으니까.

사실 이러한 자유민에 대한 개념은 지중해 세계에서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다름 아닌 성경에서도 왕을 옹립하는 것은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사무엘서 상편에 왕정을 비판했다. 또 로마는 제국이 되고서도 시민들에게는 세금을 거의 걷지 않았으며 비시민 내지 외국인인 속주민들에게만 세금을 걷었다. 속주는 공화정이 공공 자산으로써 보유한 부동산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비튀니아 왕국의 왕은 죽으면서 '자신의 왕국의 상속권자는 로마 공화정'이라는 유언을 남겨서 로마가 졸지에 속주를 하나 얻은 경우도 있었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왕 개인이 왕국을 재산으로 보유한 것이었다면 로마는 공화정이라는 집단 지도 체제 형식으로 다른 나라를 재산으로 보유한 것이다. 다만 시민이어도 국영지로 분류되는 땅을 빌려서 경작한다면 그 땅의 지대를 납부했다.

셋째로 법에 대한 이해이다. 서로마 제국은 붕괴했지만, 로마법은 실효성이 있는 법으로써 계속 남았다. 동아시아에서 법이란 그저 군주가 선포하고 반포하는 일방적인 규칙이었지만, 서구의 법은 자유민들의 모임에서 만들어진 규칙이었다. 때문에 군주도 법에 구애 받았고, 반대로 왕이나 국가가 없어도 자유민들이 모여서 합의한다면 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시민들이 있는 도시는 한둘이 아니다. 고대 로마 시절에야 모든 시민들의 중심지는 로마라는게 모두에게 인정되었다. 때문에 로마에서 선출된 원로원 의원들이나 황제가 온 제국을 통치해도 권위가 있었으나, 붕괴된 서유럽에는 그런 중심 도시가 없었다. 때문에 온 영역에 퍼져 있는 시민들의 의사를 제대로 수렴하는걸 포기하고, 게르만 부족 군벌들끼리 알아서 공직을 돌려먹는 체제 열명도 안되는 유력자 집단도 일단 민회는 민회다! 가 형성되었고 수도정해지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통치하는 체제가 됐다. 그러면서도 영역이 좀 안정되자 의회를 소집해 대의제로 공공의 의사를 수렴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사실 이러한 이유로 중세 초기인 400~800년 까지는 당대 사람들은 딱히 서로마가 멸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의 동맹인 게르만 부족 군벌들이 서로마의 영역을 좀 장악했을 뿐, 로마가 세운 도시에 살던 로마 시민들은 여전히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이 있는 이상 여전히 서로마의 영역은 로마였다. 서고트 왕국이나 반달 왕국, 프랑크 왕국이 로마의 법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존중한 이유가 바로 그것.

중세 유럽에 나타난 여러 사회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농노들은 시민 공동체에 들지 못한, 공공의 기준에 들지 못하는 존재로 노예와 자유민의 중간 계급으로 간주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다못해 '빌런' 이라는 멸칭부터가 '촌놈'쯤 되는데, 기득권을 가진 시민이 도시에게 지배받는 촌락과 촌민을 어찌 생각했는지 나타나는 단어다. 중세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많은 도시가 형성되어 자치를 행한 것도 유럽의 도시 중심적 관념과 연관있다.

영지 또한 흔히 이해하는 것과 달리, 개별 소국가보다는 부동산+공직을 맡는 영역이 결합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유민들의 공동체가 곧 공공이며 자유민들이 만든 규율이 바로 법이었기 때문에, 왕을 잃은 귀족들은 그들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왕을 뽑고 의회를 조직했으며 법을 만들었으며, 왕 역시 하나의 게르만 부족 군벌 나부랭이자유민으로서 공공에서 만들어진 법을 준수해야 했다. 또한 군주 이하의 유력자들, 즉 귀족은 군주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되는 소유물이 아닌 같은 자유민으로서 군주와 대립도 가능했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군주에게 협조해야하는 상하관계이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 군주의 권위가 추락하고 지방에서 사병을 가진 유력자들이 발흥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국가가 갈갈이 찢어져 군벌들끼리 싸우고 승리자가 국가를 먹었던 것과 달리, 서구가 내부에서 끝없는 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국가를 유지한 것은 법과 공공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달랐던 것이 원인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승자가 곧 국가 권력의 뿌리가 되어 모든 것을 독식하지만, 서유럽에서는 국가와 법은 사회계약의 연장이므로 누가 승자인지 정할 필요 자체가 없이 같은 공동체에 속한 자유민들끼리 합의함으로써 국가를 형성했다.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 국가끼리는 '국가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정복 전쟁도 없었다. 그저 그 지역이 어느 귀족의 소유인 '부동산'인지, 그 귀족은 어느 군주의 봉신인지의 개념만 존재했기 때문에, 정복 전쟁은 그저 군주의 개인 부동산의 소유권을 두고 초대형 결투 재판을 여는 것[4]에 더 가까웠으며 그러한 전쟁을 하겠답시고 신민들을 동원하거나 세금을 매기면 폭정으로 여겨졌다(이론적으로는 그랬고 현실적으론 전쟁 터지면 전쟁세가 나오긴 했지만...지금도 집주인이 돈 필요하면 임대료를 올린다.). 반대로 그저 결혼 좀 잘해서 상속을 받아 국가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동군연합이라는 서유럽만의 특수한 케이스도 생겼다.

이 서구의 봉건제는, 봉건 제도 이후 또는 그 이전에 출현한 왕과 왕의 이름으로 기능하는 관료 집단이 통치하는 '제도'가 아닌, , 귀족, 기사라고 불리는 무장집단 간에 형성된 어정쩡한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제도라기보다는 사회적 상황에 더 가깝다. 서양 봉건제에서의 상하 관계란 결코 쌍무적 계약 관계나 충성 관계 같은 간단한 말로는 설명될 수 없다. 군주(황제, 국왕)와 대봉건 봉신(강력한 영역제후)이 있다면 대봉건 봉신 휘하의 소봉건 봉신(영지를 가진 자작, 남작 등 성주층) 및 배신(기사, sergeant, ministerialis, 기타 고용인 등)이 있고, 또 다시 도시의 코무네나 장인 조합, 주교령, 실질적 주교령, 수도원 등 각지의 세력이 법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거미줄처럼 얽혀 다양한 관계를 생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한 기사의 입장을 서술하면 이렇다. 기사 하나가 여러 영지를 소유했는데 그 영지마다 각기 다른 주군과 계약을 맺어 여러 주군을 동시에 모시거나, 혹은 영지마다 지위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주군이 여럿이라면, 그 주군들이 서로 싸우거나 동시에 소집령을 내리는 경우도 있기에, 두 명 이상의 주군이 동시에 군사적 봉사(군사 지원)를 요청할 경우 한쪽 주군에게 먼저 간다는 내용의 '특정 영주에 대한 충성 서약(liege homage)'이라는 게 도입될 정도였다.

이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귀족들의 상하관계는 무척 복잡하게 꼬였다. 기사였던 레프고의 아이케(Eikie von Repgow)는 저서인, 작센의 관습법을 서술한 작센의 거울(Sachsenspiegel, Specchio sassone)에서 봉건제가 6개의 등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표현했다. 왕이 1등급이고, 주교와 수도원장, 수녀원장이 2등급, 평신도 제후가 3등급, 자유 영주가 4등급, 수사판사와 자유영주의 봉신 또는 그러한 자격 보유자가 5등급, 봉신의 봉신들이 6등급이었다. 이것만 보면 마치 상위 등급이 하위 등급의 상관자, 명령권자처럼 보이지만, 이 등급은 정치적 제도 또는 상하관계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회적 계급을 나타낸 것일 뿐이다. 한국사에서 조선 시대에 선비가 중인보다 윗등급이지만 선비가 의사나 역관에게 바닥을 기라고 명령할 권리는 없었던 것과 같았다.(다만 거부하면 두들겨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도 같다)

왕-봉신-봉신의 좁은 국면에서 보자면 명목상 상하 관계가 성립되긴 하지만 명령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소급적 봉신(봉신의 봉신)에 관한 관계 또는 의무를 규정한 문서는 그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도 봉신의 봉신에 대한 명령권이나 충성의 강요를 법적으로 실행한 예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봐도 무방한데, 1330년대의 한 법학자에 의해 공식화된 표현인 "누군가가 당신에게 나의 봉신의 봉신이 내 사람이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시오."에서 잘 드러나 있다. 물론 법학자가 설명한다는 점에서 볼수 있듯이 엄밀히 따지면 명령관계는 아니지만, 봉신의 봉신이 무리한 경우가 아니라면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경우도 적었다.

이 귀족들의 위계 서열을 간단하게 도식하면 이렇다. 프랑스 왕국이 3분의 1은 왕의 직할령, 3분의 1은 가스코뉴 공작, 3분의 1은 툴루즈 백작에게 지배되는 상태라고 가정. 툴루즈 백작과 가스코뉴 공작은 둘 다 프랑스 왕의 직속 봉신이다. 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비슷했다... 이 때 프랑스 왕이 귀족 자문회의를 모집하면, 툴루즈 백작은 가스코뉴 공작보다 명예 상 서열은 낮으나 가스코뉴 공작에게 꿀릴 것은 없다. 영지의 규모가 비등비등해서 실제 힘도 비슷할 뿐더러, 둘 다 왕의 신하로서 대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위 상 서열의 문제로, 툴루즈 백작은 자기 휘하의 봉신들에게 남작 작위만 줄 수 있고 가스코뉴 공작은 자기 휘하의 봉신들에게 백작 작위도 줄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프랑스 왕이 툴루즈 백작 휘하의 남작들에게 백작 작위를 임명한다면, 툴루즈 백작은 같은 백작을 봉신으로 둘 수 없어서 영지가 분해된다. 하지만 가스코뉴 공작령을 분해하려면, 그 휘하 작은 백작들에게 공작위를 줘야한다. 공작은 명예와 명분 상으로 백작보다 높으므로, 다수의 공작이 우르르 생기면 프랑스 왕 입장에서는 귀족 자문회의에서 높게 대접해줘야하는 봉신이 우르르 늘어나는 셈이 된다. 그래서 프랑스 왕은 가스코뉴 공작의 영지를 분해하는 것은 보류하게 된다.

이 도식과 비슷하게 전개된 것이 신성로마제국으로, 거대한 부족 공국들이 주인을 잃을 때마다 그 영지를 잘게 쪼개서 작은 공작령들과 백작령으로 쪼개버리는 식으로 귀족의 권력을 줄이고 황제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강화했다. 덕분에 신롬 내부의 영지 지도를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모자이크처럼 잘게 쪼개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왕이 국가의 최상위 등급인데도 왕의 실질적인 권력은 무척 제한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노르망디의 바이외 주교의 예시를 들자면 100명의 기사를 종사로 두고 있었는데, 주교의 직접 주군인 노르망디공이 병력을 요청하면 20명의 기사만 파견하면 됐다. 그런데 프랑스왕이 소집병을 내리면, 노르망디공이 다시 바이외 주교에게 소집령을 내리고,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이 바이외 주교에게서 얻은 기사는 10명으로 줄었다.

말하자면 왕은 각 영지들의 대표인 동시에 좀 큰 영지를 가진 대영주 정도의 위상 정도이다.기업으로 치면 최대주주 수준 즉 1:1로는 다른 영지를 발라버릴 수 있겠지만, 좀 힘센 영주 서넛이 뭉치면 힘든 수준. 그리고 1:1 뜨고나면 이미 만신창이라서 다른 대영주한테 발린다. 그 예로 카롤링거 왕조 후기~카페 왕조 초기 프랑스 국왕은 아키텐이나 노르망디 공작 등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무려 아키텐과 노르망디의 공작이자 앙주의 백작이며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리처드 1세는 당시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 입장에서 엄청난 눈엣가시였고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알짜 땅들만 죄다 보유;;; 심지어 아래 서술된 영국의 봉건제 특징을 참고하면 알 수 있듯 잉글랜드는 봉건국가치고 왕권도 강하며 국가 동원력도 매우 강했기에 더욱 거슬렸을 것이다. 필리프 2세의 문서를 참조하면 봉건제 특유의 정치 싸움을 알 수 있으니 참고.

신성로마제국은 반란으로 황제가 영주에게 무릎을 꿇거나 감옥에 갇히는 등 많은 수모를 당했다. 물론 관료제 국가의 허수아비 군주(예: 삼국지의 헌제)와 달리 엄연히 고위급 대영주요 왕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함부로 개기면 영주도 박살났다. 왕에게 개기는 영주가 있는데 영주를 짓밟는 왕이 없을리가 없다. 그 예로 존 왕이 필리프 2세의 말을 안 들었다가 영지를 왕창 뜯겨버린 바 있다.

사회적 상황이 아닌, 제도의 관점에서도 서양 봉건제를 규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샤르트르의 주교 퓔베르는 아키텐의 기욤 5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신은 무엇보다 자신의 군주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며, 조언과 원조를 줌으로써 선행을 베풀어야만 하고, 군주는 그의 봉사에 보답할 의무가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굳이 비틀어 보자면 군주가 봉신의 충성에 보답할 의무를 성실이 이행하지 않는다면, 봉신은 군주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응할 권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봉건제 내에서 왕에게 적대적인 가문들은 비밀도 아니었고 반란도 수 없이 일어났다. 알기 쉽게 예를 들면 현대의 반대 정파의 정치인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식적으로 싸우듯 대놓고 반목했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 적대적인 가문이나 왕이나 자신들이 봉건계약관계로 주군과 신하인 것은 인정했으며, 군사력까지 동원한 내란급의 역모가 실패해도 가문은 거의 처벌받지 않았고 당사자마저도 손쉽게 풀려났다. 서로가 치고박아도 가족끼리 죽이지 않는 것처럼, 선을 넘진 않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반항은 '당연한 권리'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설령 왕이 반란을 진압해도 반란군에 대해서 처형이나 작위 박탈을 선택하면 방금까지 왕과 함께 반란을 진압한 이들조차 그것을 폭정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쉽게 말해 현대에서 불법시위를 한다고 기관총을 갈기는 수준이고, 당연히 국제 인증 미친놈이 된다.

반면 반란이 성공해 국왕군을 격파하고 왕을 포로로 사로잡았다할지라도, 내란군은 대의명분에 따른 안건 몇 건을 강요할 수 있을 뿐, 국왕을 살해하거나 왕조를 갈아버리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서양사를 읽다보면 수많은 군주들이 신하들에게 격파당해 포로로 억류되는 일을 수없이 볼 수 있다. 동아시아의 유교적 질서에서는 어떤 정치체제든 역모는 곧 사형과 집안말살에 해당하는 큰 범죄로 취급받았으며, 만약 그 역모가 성공했다면 왕을 하야시키고 왕의 일가친척과 신하들은 물론 그 사돈의 팔촌까지도 모조리 다 갈아버리는 게 일반적이었다는 점과 비교해 큰 차이가 있다.

이런 부분들을 현대시대로 비유하면 회사의 경영진, 이사회와 유사하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프랑스를 회사라고 가정하면 파리 백작이자 프랑스의 왕은 파리 백작인 본인의 지분 3%와 일드 프랑스 공작령 안에서 봉신들이 지지해주는 지분 8% + 부르봉 공작 등등이 지지해주는 우호지분 20% 를 가진 최다주주이기에 경영진이자 사장인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와 경쟁했던 프랑스의 프로방스 백작은 지분이나 명분으로는 밀리지만 동맹인 마르세유 백작의 지분 5%와 다른 친척, 우호지분 등등을 가지고 프랑스 회사의 유력임원인 대주주 상무가 된다. 당연히 이 둘 사이는 좋을래야 좋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둘은 서로를 사장과 사원 간의 관계라는건 인정하며 서로 간의 갈등이나 내전 및 전쟁도 가급적이면 '프랑스'라는 회사 안에서 정한 내부규범이나 규칙으로서 해결하려고 한다. 둘 중 하나가 이 '선'을 넘으면 그 때부터 다른 쪽도 외국을 부르고 반란을 일으키는 식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또한 종교에 기원한 30년 전쟁 역시도 황제가 선을 넘어버리자 그저 독일 안의 내전이란 틀에 머무르던 영주들이 외국을 부르며 더 더 막나가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그 당시의 봉건제는 주군과 신하라기보다는 말단 대리급들까지 일정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로 이해하는게 오히려 이해가 쉽다. 그리고 이 지분이라는 것은 회사의 주식을 몇장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닌, 노조까지 설립하여 회사 안에서 그들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령 프랑스의 프로방스 휘하 영주들은 그들 직계라인에 따라 총무과 과장인 프로방스 백작에게는 충성하겠지만 기획팀이나 그들 과장의 경쟁자인 사장에 대해서는 반감을 공유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시스템으로 비유하는 게 터무니 없지않은 것이 이사회 시스템의 원본은 자금을 가지고 지분을 평가한다는 것만 다를 뿐, 중세 봉건제의 법률을 기본으로 이탈리아에서 발달했기 때문이다. 서구권의 봉건제에서 기인한 게 바로 기업 이사회 시스템이라 볼 수 있기에 봉건제의 사건들은 이렇게 이사회, 회사의 입장으로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아주 쉽다.

당연히 현실의 경영분쟁처럼 서로 적대하는 임원들끼리 찬반이 격심하게 갈리는, 역사에서 내전이라 불리는 게 발생하는 상황은 그 시대에도 현실의 이사회 표결 수준으로 자주 일어났다. 하지만 봉건제에서도 이사회처럼 내전의 승자도 프랑스라는 회사의 규정에 따라 사장이 이겼건 상무가 이겼건 해당하는 안건만 조정할 수 있을 뿐, 그 이외 안건과 무관한 지분이나 사항의 변경은 위법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를 승자가 불복해 거스르는 것은 거기 속한, 대주주인 본인의 지분 역시 다른 주주들에게 존중받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았다.(실제로 선을 넘은 이들은 공공연한 왕따를 당했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근대적 국가 혹은 공적 국가 개념이 매우 강했으며 거기에 더하여 과거제와 같은 공적 인사체계까지 존재하였으므로, 유력계층도 그러한 법제체계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이익을 취하려고 하였다. 이 점은 관료제 등 근대 국가적 요소가 발달해가던 근대 유럽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런데 고대 로마에서 이어져오는 자연법 사상이나 게르만의 관습법 사상 하에서는 군주조차 거기에 종속되었던 것과는 달리, 동아시아의 법이라는 것은 비록 천명 관념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구체적 구현에 관해서는 궁극적으로 군주의 자의에 휘둘리는 바가 컸으므로(법가사상부터가 법은 군주의 도구라는 게 공적인 견해다), 자연스럽게 반역에 대한 취급이 훨씬 엄중하였던 것이다.(반대로, 찬탈에 성공하면 위법따위는 무시해도 그만이었다.)


4. 유사 봉건제도[편집]


봉건제도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의 기준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단순히 '행정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세금을 부여하지 않는 토지를 바탕으로 사적으로 자율성이 높은 집단을 만들어두는 제도'를 봉건제로 본다면, 봉건 제도와 유사한 형태는 중국, 로마, 조선 등 고도의 관료제를 발달시킨 나라에서조차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장 조선에는 과전법이 있었고, 명청시대 중국에는 실제로 봉건 왕이 존재했다. 청나라의 봉건왕이 사고를 친 것이 바로 삼번의 난이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대다수 국가들은 모두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이 아닌 지방의 유력자가 존재했고, 이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봉건제와 유사한 지방 분권 체제가 존재한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해서 개인의 친분에 따른 유사 봉건제가 유지되기도 했는데, 남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중앙과 지방의 대립은 21세기 현재도 존재하며,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또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1346년로마제국의 일부 영토를 점령한 후 세르비아 제국을 칭하고 펴낸 법전에 서유럽 국가들의 봉건제와 비슷한 법을 도입했다.

반대로 로마-게르만 제국인 카롤링거 왕조에서 발달한 '개인과 개인 간의 계약'에 바탕한 사회정치적 상황을 봉건제로 본다면, 프랑스-독일-이탈리아-영국을 제외하면 전세계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특이한 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중세 유럽사의 거장인 마르크 블로크의 경우 후자에 더 무게를 두어서, 카롤링거 제국 + (윌리엄에 의한 영국 정복 이후)영국 외 타 지역에서는 비슷한 제도조차 발생하지 않았다고 본다.

현대 학계에서는 전근대 국가 특유의 지방분권적 제도를 봉건제로 번역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封建(봉건)'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근대 일본의 영향으로 'feudal'을 번역하는 말이 되었는데,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동양의 봉건제도와 유럽의 'feudalism'이 명확한 유사성 없이 오히려 실제를 오도시키는 경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양자 간의 어의적, 역사학적 유사성에 대해서 동질성보단 차이가 크므로 'feudal'을 '봉건'으로 번역함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지양하는 것이 중론. 실제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리즈(Loewe and shaughnessy [eds.], 1999)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번역할 때 'feudal'이라는 용어를 아예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사학계에서는 feudal 를 번역할만한 마땅한 대체 번역이 없기 때문에 feudal 을 '봉건'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 봉건이란 말이 단순히 '구시대적 사회상'을 부정적으로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 변질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혼란을 만들고 있다.


5. 동아시아의 봉건제도[편집]



5.1. 중국[편집]


파일:주나라의 봉건제.png
갑골문에서 작위가 보이는 걸로 보아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했었으나,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건 기원전 11세기 중국에서 주나라가 사용한 제도다. 봉토를 하사하여 나라를 이루게 한다는 뜻으로 '봉건(封建)' 제도라고 불렀다. 근현대 학자들은 봉건을 봉방건국(封邦建國)으로 풀어서 설명하기도 한다. 해석을 잘 해야하는데, 진시황 이전에는 나라의 개념이 달랐고 나라를 뜻하는 邦과 國도 의미가 달랐으며 國은 정치주체로서 실질적인 지배권력을 행사하는 성읍을 뜻하고 邦은 國의 지배력이 미치는 범위의 땅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영지를 봉하고 성읍을 세워 지배하게 한다는 뜻이다.

천하의 주인 천자가 공훈을 세운 자, 지방의 세력가/유력자, 대규모 씨족의 장, 왕족 등에게 토지를 봉(封土)하여 나라를 세우게 한다(建國)는 개념이다. 왕은 중앙의 직할지(왕기, 기내, 중국)만 직접통치하고 나머지 땅은 제후에게 나눠주어 다스리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중세~근세에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보여지는, 이 문서 상단에서 설명한 Feudalism 통치와는 전혀 다른데, 사실 이 봉토라는 것은 실제로는 전혀 주나라의 땅이 아닌, 화하족이 아닌 이민족이 들끓는 낯선 땅이었기 때문이다. 즉, 땅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저기 가서 식민지를 세워라. 잘 세워지면 대대로 거기 지배권을 줄게' 하는 것. 이렇게 분봉된 제후는 주나라의 가부장적 질서, 즉 종법 질서에 따라 주나라 천자를 모시는 신하가 되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과 같은 성씨를 가진 가문원이었으므로, 동성(同姓) 제후라고 불린다.

한편 주나라 주변의 다른 도시국가들도 이성(異姓) 제후라고 불리며 가문은 다르지만 주나라의 종법 질서에 편입되어 주나라 중심의, 중국 특유의 천하관에 끼어들게 된다.

흥미롭게도 "봉건"이라는 용어는 근대에 다시 언급되는데, 이때는 고대 중국사의 개념이 아니라 구미권의 의회정치에 대한 동아시아적 이해라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전제군주적 통치는 "군현"으로 일컬어졌다.


5.2. 한국[편집]


중국사의 봉건제는 이미 기원전에 끝났고 한국사 왕조들은 고대부터 중국의 군현제를 참조했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중국식 봉건제는 도입되지 않았다. 다만 삼국시대에는 귀족들이 자체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걸 암시하는 기록은 무척 많다. 고구려만 해도 멸망할 때 귀족들이 사람 몇만호를 이끌고 투항했다는 식의 기록이 나오는걸 보면 귀족들이 자체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게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히고, 구체적인 행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실상은 알 수 없다.

한편 지방에 존재하는 군벌화 된 호족 세력은 고려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신라 시대 말기의 몰락과 분열도 이 호족 세력들에 의한 것이다. 그 이후 통일된 고려는 그러한 호족들의 연합 세력으로 출발한 나라였기 때문에 각지의 호족들이 여전히 사병을 보유한채 문벌 귀족을 형성하여 중앙 정치도 장악하였고, 음서를 통해 관료직도 상당수 세습되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관료에게 주는 급여였던 전시과 역시 그 시작은 호족들이 가지고 있던 영지를 전시과로 설정한 것으로, 호족을 관료로 임명하며 그들에게 다시 그대로 그 영지를 전시과로 주는 식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귀족들의 영지처럼 세습되었다. 공음전 역시 이런 현상을 부추겼다. 그렇게 고려 시대 내내 지방 호족 군벌이 계속 존재하였다가, 결국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이 열리고 만다.

5.3. 일본[편집]


일본의 봉건제는 헤이안 시대 율령제의 붕괴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다. 공지공령제 원칙에 따라 농민이 군사로 징집되어야 하는데, 일본 조정의 행정 경험은 영 미숙했다. 지방관의 수탈이나 노역, 강한 세부담 등으로 인해 농민들이 본적지를 벗어나고 도망하거나 유력자에게 위탁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결국 율령제가 붕괴되어 토지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개간지를 영구히 면세 시켜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 정책은 결국 대귀족과 호족들이 장원을 형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렇게 조정이 통제할 수 있는 농민들이 줄어들어 군사력이 붕괴되자, 지방 곳곳에 해적과 군당이 날뛰게 됐는데, 조정은 이를 통제하기 위해 중하급 귀족 계층을 군정 일치의 지방관인 국사(고쿠시)로서 파견했다. 이 중하급 귀족들은 일족 전체가 직업적인 전사 집단이 되었고, 후대까지 이어지는 무사의 시조가 된다. 또한 지방관으로서 파견된 이들은 지방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장원을 형성하고 지방의 봉건 귀족 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가마쿠라 체제의 초창기 다이묘들도, 무로마치 체제의 슈고 다이묘들도, 에도 체제의 신반 ~ 도자마 다이묘들도 모두 막부라는 구심점하에 자신의 영지를 인정받고 협력하며 세습하는 봉건적 성격을 갖고 있다. 무로마치와 에도 시대 사이 전국 다이묘 정도가 예외적.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존재한 다이묘와 이들이 다스렸던 등의 제도를 모두 합쳐 '봉건 제도'라 불렀다. 이는 당대 일본 유학자들이 자국의 정치·사회 상황이 중국의 봉건 제도와 유사했다고 보고 같은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다만 일본의 봉건 제도는 유럽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평가된다. 대신 일본의 봉건제가 유럽처럼 쌍무계약의 형태로 존재했는가를 놓고서 논쟁의 여지가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봉건제 당시 유럽처럼 농노들 또한 존재했었다. 다만 에도 시대의 경우에는 중국의 군국제와 유사한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이유는 쇼군의 직할 영지가 300~400만석에 달한데다가 여기에 또 쇼군의 직속부하인 하타모토들에게 나눠준 봉지도 그쯤 되었는데 전국시대 기준으로 일본 전토의 석고지만 그 당시에는 1700만석이었음을 감안하면 전국의 반 가까이 휘두르다시피 했다. 이는 봉건 제후를 세우지만 봉건 제후들은 몽땅 왕족들로만 세우고 또 기존의 봉건제와는 달리 직할지를 상당히 많이 늘렸던 군국제와 유사한 면이 많다.

물론 실질적인 석고는 조금 달라서 예시를 들면 대마도는 실제 석고는 1만이 안 되었지만 조선과의 무역과 외교를 감암해 1만석 격으로 인정되어 다이묘 대우를 받았고 홋카이도의 마츠마에 번은 너무 추워 쌀농사 자체가 안 되었지만 에조와의 무역으로 수익을 냈기에 마찬가지로 1만석 격으로 인정되어 다이묘 대우를 받았다. 이 외에는 많은 번들이 개간을 하는 등의 노력으로 실제 석고보다 더 많은 수익을 냈다. 심지어 조슈 번은 메이지 유신 즈음에는 공식 석고보다 실제 석고는 3배 가까이 되었을 정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근대에 군현과 더불어 사용되었는데, 이쪽은 정반대로 기존 정치구조를 "봉건"으로 칭하고 "군현"을 추구해야 할 새 정치제로 보았다. 이는 쇼군 하 다이묘로 권력이 분화되었던 점을 봉건에 대입하고, 근대 유럽의 중앙화 국가를 군현에 대입하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심상은 "폐번치현"을 비롯한 관련 용어에도 반영되었다.

중세 유럽의 공후백자남의 작위가 실제 그 영토의 넓이나 부유함, 영향력이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큰 관계는 없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고 중국 역시 주나라와의 친소관계에 따라 작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은나라의 후신이라 공작 칭호를 받은 상나라나 이민족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국토의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남작 칭호를 받은 초나라처럼 실력과 등급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고 예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의 봉건제는 어느 시대에서나 명목상의 "격"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에도 시대의 경우 실제 석고의 차이가 난다는 건 분명 알고 있었지만 1번의 번주로 인정받는 다이묘는 석고가 얼마든지 간에 같은 "격"으로 인정받는 한편, 실제 석고나 영행력이 아무리 높아도 다이묘가 아닌 다이묘의 배신이나 하타모토들은 그저 "사무라이"일 뿐이었다. 따라서 예우, 결혼 등에서 엄격한 차이가 있었으며 이를 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6. 평가[편집]


서구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된 중세까기 풍조로 인해서, 수백년 간 봉건제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나쁜 것 정도로 평가되었다.

사실 이 '봉건제에 대한 평가' 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애매하다. 사실 위의 유사 봉건제도 문단이나 동아시아의 봉건제도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여러 문화권의 지방분권적 경향을 죄다 봉건제도라고 퉁쳐 말하는 일도 흔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봉건제로 한정해서 '평가'를 내리려해도, 국가는 커녕 지방마다도 다른 것이 봉건제였다. '제도가 아닌 사회적 상황'이라는 표현은 괜한 것이 아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 중앙집권적 봉건제라는 해괴한 체제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봉건제가 무조건 지방분권적이라는 관점도 틀렸다.

특히 근대프랑스 혁명 때 혁명 정부는 '봉건주의의 철폐'를 선언했으나, 루이 16세 시절에는 이미 중세에 성행한 봉건주의 계약 따위는 있지도 않았고, 장원은 해체된지 오래였으며 농노들은 이미 다 법적으로 자유민이 된지 오래였다. 작위를 가졌다고 영지를 수여받지도 않았고[5], 땅이란 계약서에 서명해서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었다. 기사는 없었고, 평민들도 총병과 보병으로서 군복무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뭐가 봉건제냐고? 농민들과 평민들을 괴롭히는게 바로 봉건제야."라는 순환논법으로 별 의미도 없이 봉건제 철폐를 선언한 것.

다만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사문화된 봉건적 특권을 내세우며 농민들을 수탈했으며 말이 좋아 자유민이지 실제로 어느 누구의 영향없이 땅을 가진 농민은 극소수였으며 그나마 자영농도 자기 땅인데도 봉건적 관습 때문에 귀족들에게 꼬박꼬박 지대를 납부해야 했다. 그리고 혁명시기에는 농민들 사이에서는 쫓겨난 귀족들이 자신들을 학살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이 외에 높은 빵값, 징세청부업자의 농간 등까지 합쳐 모두 봉건제 탓으로 돌려서 봉건제 자체는 아니지만 봉건제의 잔재때문에 농민들이 고생한건 맞고 혁명정부 입장에서도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말뿐이나마 봉건제를 폐지한다는 선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근대 유럽의 지식인들은 중세 유럽의 모든 것을 나쁘게 평가하려 들었지만[6], 막상 현대에 와서는 중세 봉건제가 차라리 더 나은 부분도 있었다는 점이 재조명되기도 한다. 의외로 중세 농노의 삶이 19세기 영국산업혁명기 유럽의 도시 노동 빈민보다 오히려 더 적은 노동시간, 더 많은 휴식, 더 많은 사회적 보호 장치를 누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는 등 중세의 여러 단면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게 되었다.

노동자가 쓸모가 없어지면 자르고 새로 고용하면 됐던 산업혁명 시기와는 달리, 중세의 농노는 외부에서 충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악독하게 혹사 시킬 수도 없었다. 오히려 빈 땅도 있고 행정력도 약해 농노가 도망칠 것을 우려해야 할 수준이다. 거기다가 "행정력이 약하다"라는건 다른 의미도 가진다. 국가의 개입을 걱정할 필요 없이 영주만 치우면 그만이기에 농노들이 폭동을 일으켜 뻘짓하는 영주를 쫒아내버리는 사례도 꽤나 흔했다. 이를테면 독일 지역에는 디트마르셴(Dithmarschen)이나 프리지아의 프리지아 자유국(Fryske frijheid)와 같은 아나코 생디칼리슴 코뮌 자유농민 공화정[7]이 들어서기도 했다.

후일 근대 공화정으로 이어지는 자유도시들도 중세 봉건제가 절정에 달한 시대에 생겨나고 발전했다. 도시법, 상법 등도 봉건제 시대가 남긴 유산이다.

당시 유럽의 산업 구조와 생산력, 전반적인 기술력으로는 이 이상의 체제를 만들기 쉽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를 식민지화를 하기 전의 여러 '봉건제의 사회 구조'와 동시대 '중앙 집권적 관료 기구를 갖춘 군주제 국가'를 비교해볼 때, 봉건제는 내부적으로 광범위한 부조리, 잦은 전쟁과 약탈, 폐쇄적인 신분제 등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기에, 과연 봉건제가 그 당시에 있어서 최선이었냐라는 의견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 부분도 중앙 집권 국가들도 보였던 모습인 만큼 저걸 도식적인 이분법으로 봉건제만의 문제였다고 할순 없다. 경제학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야기하는 "시장이냐, 국가냐"의 논쟁처럼, 이는 정치의 문제로 바라보는게 바람직하다 보여진다.

마르크 블로크는 주저 《봉건사회》에서 저항권의 주요한 기원이 서양 봉건제도에 있음을 갈파한 바 있다.


7. 마르크스주의 사관에서의 봉건제[편집]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서 모든 인간사회는 '원시 사회 - 고대 노예제 사회 - 중세 봉건제 사회 - 근대 자본주의 사회 - 공산주의 사회'의 5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설명된다. 마르크스는 이 순서대로 사회의 토대인 경제구조가 발달하고 그에 맞게 상부구조(정치, 문화, 종교 등)가 변화하면서 역사가 발전했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20세기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국에서 '봉건'이라는 단어를 구시대상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도 마르크스식 사회발전론에서 유래했다. 정작 본래의 마르크스주의는 동양 경제사를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라는 별도의 이론으로 설명했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따르면, 아시아는 고대 노예제와 비슷한 사회에 해당했다. 이 이론과는 다르게 한국사의 보편성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된 주장이 '동아시아에서도 봉건제가 쇠퇴하는 동시에 산업화의 맹아가 나타나고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이었다.

근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에도 시대를 봉건제에 해당된다고 자평했으며, 조선과 한민족에 대해서는 봉건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노예제 사회에 머물러 있다는 정체성론을 주장했다. 정체성론의 대표적인 학자인 후쿠다 도쿠조는 1903년 봉건제의 유무로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한국의 한국사학계는 이런 식의 정체성론을 식민사관이라 규정해 배격하고, 한민족 중심의 자본주의 맹아론을 펼쳐 반박했다. 일제강점기백남운 등은 '아시아적 봉건제' 개념을 도입해 통일신라와 고려가 봉건제 사회였고 조선이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조선의 지주-소작농 관계가 농노제를 비롯한 서양의 봉건제와 같다는 시각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이렇게 동양의 전근대를 봉건적이라 보고 거기에 자국의 사정들을 끼워맞추려는 시도들은 맹목적인 유럽중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로는 모조리 논파되었으며, 한국에는 봉건제가 없었다는 것과 일본에는 봉건제 비스무리한 무언가(?)는 있었으나 유럽의 봉건제와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합의되었다.

8. 봉건제와 현대 지방자치[편집]


현대 유럽권은 동아시아권에 비해서 지방자치와 지방균형발전이 상대적으로 잘 이뤄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중앙집권적 관료제인 동아시아 전통과, 봉건제인 유럽 전통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견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도 않다. 전근대 시절 봉건제는 현대의 지방 자치와 달리 무력을 갖춘 지방 토호들의 폭력적인 통치로 인해 오히려 시민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방해하고 억압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혁명 전 자유주의자들은 봉건영주와 대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계몽 전제군주에게 협력해 봉건영주를 타도하고 절대왕정 성립에 큰 역할을 한다. 일본 같은 경우도 오히려 봉건제를 극복한 메이지 유신 이후에야 세력을 떨칠 수 있게 되었는데 근대국가 정비에 중앙집권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전근대 봉건제와 현대 지방자치제를 동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시대적인 변화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편 현대 지방자치제라는 단어(municipality)의 어원은 라틴어 Municipium 이다. 이 무니키피움은 자치가 행해지던 도시를 말했다. 또한 중세의 체제를 그냥 봉건제라고 퉁치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고대 로마에서부터 이어진 도시 자치 전통은 가톨릭 주교 선거를 통해 게르만의 체제인 봉건제와 별개로 계속 이었다. 자유도시코뮌 항목을 참조. 위 특징 목차에서 언급하였듯 중세 유럽은 봉건제와는 다른 연원을 두고 있는 질서가 계속 이어진 이중적인 세계였던 것이다. 지방자치의 기본적인 형태인 지방법, 지방선거 등이 이러한 도시 자치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방자치제의 뿌리는 봉건제가 아니라 고대 로마에서부터 이어졌다고 보는게 합당하다. 다만 봉건제가 지방자치 자체의 유래라고는 할 수 없어도 지방자치가 원활히 작동하도록 하는 요소인 지역 정체성이나 소속감, 지역 문화는 봉건제 전통이 중앙집권적 관료제 전통보다 더 영향을 줄 가능성은 있다.


9. 현대의 봉건제[편집]


의외로 최근까지 봉건제를 유지한 국가가 존재한다. 유럽 대륙의 안도라 공국이 1993년까지 봉건제를 유지했으며, 영국 왕실의 직할령인 채널 제도의 사크 섬은 무려 2006년까지 봉건제를 유지했다. 놀랍게도 사크 섬에 거주하는 주민 대부분이 봉건제 철폐에 반대했다.참조


10. 창작물에서의 봉건제[편집]


판타지 및 양판소에서 이상할 정도로 열렬히 선망하는 제도이다. 양산형 판타지하면 중세 유럽이고, 그 안에 동양풍(그중에서 주로 일본)을 조금 첨가하는 게 흔한데 둘다 봉건제 사회로써는 가장 잘 알려진 문화권들이니 이점도 한몫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히 대리만족을 위한 장르인 양판소들의 특성 상, 독자가 이입할 주인공을 위한 시대적 배경이다. 권력이 귀족 계층이라는 문학적 도구를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에, 주인공이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거나 획득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매우 쉽기 때문. 물론 현대 판타지도 돈 액수로 표현이 가능하니까 양판소 속의 봉건제만의 장점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양판소랑 현판은 수요층의 차이가 있는 법이니.

이런 대리만족용 배경도구라는 특성 상, 작품이 전재하는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작 중 봉건사회 상은 꽤 다르다. 한마디로 주인공이 귀족이면 귀족들이 군주를 이겨먹고, 주인공이 군주(왕, 황제)이면 군주가 절대권력을 가진다. 세세한 건 작품마다 다르지만 기본적인 클리셰는 그렇다.

현실 중세 분위기를 살리고 싶어하는 남성향 판타지면 귀족 권력이 강해도 그다지 이상하진 않은데, 바로크~빅토리아 시대의 심상이 강한 로맨스 판타지에서 귀족들 권력이 강하게 나오는 경우는 현실에 대입하면 꽤 이상하게 보인다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바로크 시대 쯤 되면 귀족들의 영지는 이미 다 해체 당한 시대인데. 물론 근세에 귀족들이 어마어마하게 강했던 신성로마제국이나 러시아 제국 같은 경우가 있으니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덕분에 로판 속 제국과 제일 닮은 현실 나라는 러시아 제국이라는 농담도 있다. 주인공들은 전부 총살당할 운명

Warhammer(구판)브레토니아는 이 봉건제로 운영되는 국가들이다. 문제는 브레토니아라는 진영 자체가 봉건제, 기사도, 농노제를 까려고 만든 블랙유머로 가득한 진영이라는 것. 이 동네는 농노들한테 "십일조" 대신 "십구조"를 걷는다. 당연히 농노들의 삶의 질은 개판이지만 브레토니아 땅이 씨앗만 뿌려도 저절로 밀이 자라나는 개사기 지력 보유+어쨌든 기사들이 농노에게 확실한 보호를 제공한다는 설정상 그럭저럭 유지되는 중이다. 이 동네는 고전적인 오크와 고블린부터 시작해서 반인반수 괴물들, 쥐 인간, 다크엘프 해적들, 사방에 널린 네크로멘서들, 바이킹, 지천에 널린 악마 신봉자들 등등등 살아남기가 굉장히 빡세다. 어디 동네 깡촌에서 대악마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설정인지라... 브레토니아 외에도 다른 진영인 제국(Warhammer), 드워프(Warhammer), 하이 엘프(Warhammer)도 국가가 봉건제도로 유지되고 있다.

Warhammer 40,000인류제국 역시 부분적으로는 봉건제다. 제국십일조만 충실히 납부한다면 다양한 제국의 귀족들이 행성총독의 지위를 세습해나갈 수 있고[8] 스페이스 마린들이 통치하는 각 챕터 모성들, 아뎁투스 메카니쿠스가 통치하는 포지 월드 등 제국의 행정력이 간접적으로만 미치는 지역들이 많다. 다만 이들이 카오스와 연관되어있거나 세금을 미납하는 등 제국에 반기를 든다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작살나게된다.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는 중세 봉건제를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아주 잘 구현했다.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중세 봉건제를 이해하기에는 좋은 게임이다.

SF 배경으로도 봉건제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엔 초광속 기술의 한계로 인해 중앙집권이 불가능하다는 설정이 붙는 경우가 많다. 잘 알려진 예로는 이 대표적.

배철수의 만화열전 고우영 열국지에선 나레이션 배철수가 봉건제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하긴 했는데..

배철수 : (전략) 여기서 봉건제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저기 저 만화열전 출연자들이 호시탐탐 내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 바로 봉건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 김경식.

김경식 : 예?

배철수 : 너 조심해. 야 김학도.

김학도 : 예?

배철수 : 너도 조심해.



11.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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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극상이란 게 내가 하면 내 부하도 하는게 당연한 현상이다.[2] 중세 말까지도 보병이 필요하면 기사들이 그냥 하마해서 보병으로 싸웠다.[3] 중세에는 hide 라고 해서 1가구를 부양할 수 있는 생산력을 가진 토지를 단위로 세었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그 넓이가 상이했다. 한국사로 치면 결(結)과 그 의도가 완전히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옮겼다.[4] 실제로 프랑스는 중세에 영주 간의 선전포고 때는 근세의 결투 신청과 마찬가지(상대방에게 장갑을 던지는 것)로 장갑을 상대방에게 보내는 것으로 시작했다.[5] 다만, 왕실 구성원의 경우 진짜로 영지를 일부 수여받기도 했다. 그냥 국유지를 하사하는 걸 영지라는 이름으로 즌 것이다. [6]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던 혁명의 시대였던 만큼 봉건제를 까내릴 수 밖에 없기도 했다.[7] 원어인 Bauernrepublik는 국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농민들이 어떠한 지배자 없이 스스로 운영한다는 뜻으로 쓰인다.[8] 대표적으로 네크로문다를 통치하는 헬모어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