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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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중반인 1920년 6월 홍범도를 필두로 최진동, 안무 등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화민국 지린성 허룽현 펑우둥(鳳梧洞, 한국명 봉오동)에서 정규 일본군인 월강(越江) 추격대대와 교전한 사건. 대중들 사이에서는 독립군의 대표적인 전과로 청산리 전투와 함께 '대첩'이라는 말도 붙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한국사 학계가 연구한 역사적 사실과 대중들이 인식하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2019년 영화 봉오동 전투로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각인됐지만 실제 역사적으로 부합하는 사실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그냥 영화로 보자.[2]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 지역에서 조선 독립군의 무장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1920년 5월 독자적인 조선 독립군 및 독립 투쟁 세력을 소탕 및 토벌하기 위한 작전을 펴게 되었고 이때부터 만주 지역에서도 조선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방해하고 소탕하기 위한 일제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홍범도가 이끌었던 대한독립군[3] 은 북간도 지역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만주 지린 성 봉오동으로 집결하여 한반도 진공 작전에 돌입했다.
2. 전개[편집]
2.1. 봉오동 전투 이전[편집]
1920년 6월 2일 만주에 있던 항일 군대 60여 명은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오후 4시 30분에 종성군 풍곡면 동포 경찰주재소 남쪽 6,000m 지점으로 내려왔으며 항일 군인들은 일제 군경과 총격전을 벌여서 경찰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러자 일제는 종성에서부터 경찰 14명과 헌병 3명을 보내 올렸다.[4]
6월 3일 신민단원 약 30여 명이 두만강 대안의 삼둔자 마을에 머물렀는데 지휘자는 박승길이었다. 항일 군인들은 온성군 남양동 상류의 강양동 대안에서 두만강을 건너 온성과 종성 일대로 나아갈 예정이었다.
다음 날 6월 4일 오전 5시 온성군 남양의 두만강 상류에 약 15m 지점인 강양도에서였다. 일제 군인들은 주변을 수색하다 무언가를 발견했는데 두만강 남안에 쪽배 2척이 있었다. 이걸 보자 일제 군경들은 항일 부대원들이 올 것을 느껴 부근을 수색했다. 그러던 차에 삼둔자 마을에서 약 17~18명이 두만강을 건너오는 걸 발견했는데 일제 군경들은 바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신민단 부대는 건너는 걸 중지하고 삼둔자 부근 두만강 북안에 있는 버들방천에 은폐하였다. 그리고 일제 군경은 대응 사격을 하였다. 총격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신민단 병사들은 삼둔자 상촌[5] 에서 큰 기와집인 김명오 노인 집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6]
일제 군경 부대인 남양수비대(남양수비대 10명, 헌병 경찰 7명 합계 17명)는 추격대를 조직했다. 신미[7] 중위는 추격대를 인솔해서 오전 11시경에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 삼둔자로 침공했다. 항일 군대를 추격하려고 중국 영토를 침범한 것이다.[8]
당시 일제는 항일군("불령선인")이 있을 장소라고 생각하면 들어가기 전에 총을 쏘며 '위력수색'을 했는데 일본군은 이걸 '암탐사격'이라고 했다.[9] 의심이 되는 인원이 있으면 무조건 쏘고 봤다. 그러다 민간인들이 놀라 도주하면 그 사람들을 체포해 심문하려 했고 여의치 않다고 생각하면 현장에서 바로 사살했다. 말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도 쉽게 처리하기 위해 그대로 사살해 버렸다. 일제 군경은 이런 방식을 당연히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10][11]
일제 군인들이 침공한 삼둔자는 한인 농민들이 정착하면서 만든 마을이기 때문인지 남양수비대는 이곳을 주요 독립군 근거지라고 판단했다. 일본군은 그 마을을 수색하면서 무차별로 발포하며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이 마을 주민들을 독립군의 주요 지원 세력이라고 생각했고 항일군과 지역 주민들은 어차피 구별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근거로 하여 무차별 사살을 당연하게 저질렀다.[12]
남양수비대는 그런 수색을 하다가 한 농민에게 정보를 얻었는데 신민단 부대원들이 쉬고 있던 집이 어딘가 하는 내용이었다. 남양수비대는 삼둔자 서쪽 산기슭을 따라 전진하면서 김명오 노인의 집으로 다가간 후 포위해서 공격하려고 하였다. 신민단원들은 일본 군경들이 온 것을 눈치채고 얼른 집에서 빠져나와 서남쪽 마패 방향으로 후퇴했다.[13] 남양수비대는 포위하면서 집을 공격했다. 김명오 노인의 아내와 장남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노인의 아들인 김종식의 아내와 손자는 중상을 입어 결국 사망했다.[14]
날이 저물자 남양수비대는 부근 산중에 야영하며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15]
일본군은 적은 병력으로는 항일군("불령선인")을 토벌할 수 없다고 판단해 병력을 증원했다. 일제 군경들은 야스카와 추격대대(월강 추격대대)를 편성해서 6월 7일 새벽에 후안산 쪽으로 침공했다. 추격대는 길 안내자를 찾기 위해 병사 1명을 보냈다. 당시 후안산에선 신민단 부대원들 14~15명이 최진포라는 사람의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최진포의 아내와 형수는 불을 켜 놓고 식사 준비를 했다. 마침 그 집이 일제 병사의 눈에 띄어 일제 병사는 그 집으로 들어갔다가 뭔가 의심이 들어 함부로 남의 집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누워 있는 신민단원이 있었다.
신민단원 1명은 그 자리에서 바로 총을 쏘아 일제 병사를 쓰러트렸다. 신민단원들은 바로 뒷문으로 빠져나가 봉오동으로 후퇴했다. 항일군과 일본군은 갑작스런 상황에 맞닥뜨렸다. 둘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양쪽 모두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최진삼의 아내(최진포의 형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당했으며 일본군은 무고한 민간인 6명을 체포했다.[16]
2.2. 봉오동 전투[편집]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800~900여 명은 일제의 추격대가 오는 걸 알게 됐고 추격대를 격퇴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봉오동은 분지(산지로 둘러싸였고 지역 안은 평평한 지역) 형태였고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골짜기가 25리 정도 형성되어 있었으며 골짜기 안에는 마을 세 개가 있다. 홍범도 부대는 지형을 고려해서 4개 중대로 편성했고 각 중대를 포위하는 형태로 갈라 놓아 배치하였다.[17]
당시 홍범도 부대들은 신식 총기로 무장했지만 기관총 같은 무기를 가졌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화력이 딸렸다. 거기다 일본군은 포병을 지원 부대로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는 기관총을 쓰기 어려운 장소였다. 또 매복할 경우 피아 구별이 힘들어서 일제군이 포병을 쓰기 힘들었다. 홍범도는 의병 시절 부족한 화력을 극복했던 방법을 봉오동에도 그대로 적용했다.[18] 그리고 일제군을 기다렸다.
대기하던 남양수비대는 야스카와 추격대대가 오자 그쪽으로 합류했다. 추격대는 8시 30분경부터 봉오동 하촌에서 집집마다 수색하였는데 자기네들이 보기에 의심되는 민간인이 있으면 바로 사살했다.[19]
조선인 민간인들은 집을 빠져나와 피란을 갔다. 많은 집들은 사람이 없어 비어 있었다. 석현 주재 중국인 순경들은 순찰하다가 일제 추격대를 발견했다. 중국인 경찰들은 일제 추격대에게 자신들 땅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였지만 일제 추격대는 중국 경찰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더욱 침입하였다.[20]
추격대는 늦은 아침을 지어 먹고는 한 농민에게 가서 수레에 기관총을 실으라 요구했다. 수색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다 다시 마을 주민들을 발견했다. 추격대는 그 마을을 향해 "암탐사격"을 하며 무차별로 쏴갈겼다. 피란 가지 못한 한인 민간인들은 기관총에 살해됐다.[21]
오후 1시경 추격대 척후병이 매복 지점으로 다가갔다. 항일 군인들은 그 척후병을 그대로 보내 줬고 추격대 본대를 기다렸다. 추격대 본대는 그 장소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암탐사격'(위력수색)을 했다. 여러 곳에 무차별 사격했지만 홍범도 부대는 대응하지 않았다. 일본군 내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추격대는 행군 종대 대형이었다. 추격대는 홍범도 부대가 매복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매복 성공 여부가 아니다. 병사들이 홍범도의 사격 통제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홍범도 부대는 짧은 기간에 모집해서 편성한 부대였으나 훈련은 제대로 받은 부대였다.[22]
추격대가 매복 장소로 다가왔다. 홍범도가 하늘을 향해 총을 쐈고 동서남북에 매복하던 항일군이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들은 화력이 우세했으나 지형 문제 때문에 그 화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제대로 반격도 못 하고 퇴각했다. 항일군은 그런 도주하는 일본군들을 계속 추격하며 사격했다. 그러다 오후 4시 20분경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항일군 지휘부에서는 파란 손깃발을 흔들었다. 항일 군인들은 물러났다. 일본군들은 6월 7일 밤 함북 온성 유원진 건너편까지 철수했고 사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다시 철수했다.[23]
홍범도 부대는 일제 추격대를 격퇴했다.
2.3. 결과[편집]
일본군은 "독립군을 20여 명을 죽이고 아군(일본군)은 1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간도' 국자가에 있었던 일본 영사분관에 소속된 와쿠이 경부가 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결과는 약간 달랐다. 와쿠이 경부가 조사한 '복명서'에 따르면 "아군(일본군)의 전사 병졸 1명, 부상 5명. 7명 또는 10여 명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고 한다. 일본 측의 사카이 간도 총영사 대리 보고서나 야스카와 소좌 보고서를 교차 검증하면 일본군은 사상자 10명 안팎 정도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4]
그러면 일제가 죽였다고 주장하는 "20여 명", 그리고 독립신문에 나온 "시체 24"는 무엇일까? 그 인원의 대다수는 민간인 사망자였다. 당시 항일군들은 전투를 벌인 뒤 마을을 정리했는데 마을에서는 "남동의 남녀노소 24명의 시체를 처리하고 부상자 2명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무차별 사격을 하며 죽인 민간인들이다. 또 서육린은 "무릇 한민들 촌이면 집집마다 수색하고 사격하여 한민 남녀 17명을 살해하였다."는 증언을 했다. 일본군이 죽였다는 전과의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들이다.[25] 추격대는 항일 군인들은 잡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민간인만 학살하다가 10명 안팎이 다치거나 죽는 뻘짓을 한 것이다.
한편 한국 최초 보도인 6월 10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보도에서는 일본군 사상자 12명, 독립군의 피해는 불명이나 버리고 간 유기시체가 12구라고 하였다. 6월 20일자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도 비슷한 보도를 인용했는지 대동소이하다. 6월 22일 상하이 '독립신문'에서도 비슷하게 "적 사상병 12명. 아군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6월 20일 공보호외에서는 사상자가 120명이라고 적었지만 6월 24일 독립신문 86호에는 사자(死者)가 120명이라고 바로잡았다.#[26] 그러나 같은 날 후속보도에서는 적의 주장이라는 전제 하에 일본군의 사상자가 12명이라고 했다.# 한편 1920년 6월 23일자 중국 <상해시보>에서는 독립군의 전과가 일본군 사상자 120여명이라는 보도를 냈다.# 이 같이 여러 보도들이 오락가락하다가 12월 25일 새로이 발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의 독립신문 제88호에서는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157명,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 독립군 피해는 전사자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 등이라고 발표했다.
3. 성과 논쟁[편집]
봉오동 전투를 서술할 때 "삼둔자 전투"와 "안산 전투"를 같이 서술하는 경우가 흔하고 이 문서에서도 둘이 봉오동 전투와 같이 서술되어 있다.
3.1. 삼둔자 전투[편집]
삼둔자 전투의 규모를 살펴보면 <독립운동사>[27]
에는 "5, 6일동안 있었던 두 차례의 싸움(삼둔자전투와 안산전투 - 저자)에서 독립군은 적병 1백 20여 명을 사살했다"라고 적혀 있다.두 차례 전투에서 1백 20명을 사살했다고 하니 삼둔자 전투 한 차례만으로는 얼마나 되겠는가? 절반이라면 60명, 3분의 1이라 해도 40명가량 된다. 당시 강양동 습격전에 동원되었던 독립군이 모두 40명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접전하여 아군의 병력만큼 적을 소멸한다는 것은 대단한 고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투 문제를 둘러싸고 안화춘 선생이 수차 조사 방문하여도 이런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는 없었다. 필자 역시 안화춘 선생의 아래와 같은 판단에 동의하는 바이다.
"1백 50명을 소멸했다는 봉오동 전투를 당시 <독립신문>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반면 그보다도 앞서 1백 20여 명을 설멸했다는 삼둔자 전투는 크게 알려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전투는 소수 병력의 접전으로서 섬멸전이 아니고 쌍방 간의 사격전 후에 삼둔자 북방으로 퇴각한 전투로 판단된다."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59~260
3.2. 안산 전투[편집]
(...)이때 사망한 부녀의 아들 최상준(1909년생, 안산 전투 당시에 12살) 노인이 생존해 있었다. 필자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3년 사이에 세 번 방문하여 그 자세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최상준 노인은 당시의 전투 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5호 동네는 최진욱, 최진삼, 최진국 3형제의 가족과 최원준, 최성일 등 다섯 최씨가 살고 있는 동네였다. 나의 아버지는 최진삼(둘째)이고 어머니는 김숙정이다. 경신년(1920년) 음력 4월 20일 밤에 조선으로 모연하러 나갔던 신민단 대원 10여 명이 피륙과 신을 둘러메고 돌아와 나의 삼촌 최진국의 집에 묵었다. 밤이 깊었고 또 시장기와 피곤에 지쳤으니 밤을 지내고 이튿날에 봉오동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삼촌댁 혼자서 10여 명의 밥을 짓기 힘드니 나의 어머니를 불러 함께 밥을 지었다. 바로 이때 일본군이 왔다. 독립군들은 되는 대로 누워 자고 있었고 모연대를 환영하러 온 신민단 안산 책임자 최명극과 그 외 두세 명이 자지 않고 앞으로의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일본군 병졸은 불쑥 머리를 들이밀며 들어오다 놀라 소리를 지르며 오던 길로 달아났다. 최명극이 뛰어난 사격술로 한 방에 그놈을 처치하자마자 그 총소리가 신호가 되어 일본군들이 삼촌 최진국의 집에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옷도 벗지 않고 자던 독립군들은 뒷문으로 빠져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철퇴하던 독립군 중 한 명이 전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집 안에 있던 독립군들이 다 나가자 나의 어머니와 삼촌댁 두 부녀자만 집 안에 남았는데 총알이 쉴 새 없이 문과 벽을 뚫고 들어오니 너무도 무서워 백부 최진욱의 집으로 가자고들 했다. 삼촌댁이 먼저 뒷문으로 빠져 시형네 집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 집 안에 홀로 남은 나의 어머니가 뒤따라 달려나오다가 백부와 삼촌집 중간 거리에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때는 벌써 어슴푸레 새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일본군들은 독립군들이 빠져나간 뒤에 5호 동네에 들어와 최진동, 최운산, 최진국(최진포라고도 불렀음) 3형제와 신민단 안산 책임자 최명극과 모연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왔던 안산 아랫마을의 김환영 등 5명을 체포하여 평양 감옥으로 압송했다. 》
이것이 소위 《안산 전투》의 전모이며 이것은 도문시 곡수에 계시는 리종만, 잡혀간 5명중의 최명극의 아들 최해룡(74), 김환영의 손녀 김귀인(77) 등에 의하여 확인되었으니 이로 보아 독립군들이 먼저 매복하여 왜군이 오기를 대기한 것도 아니었고 산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음을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안산 전투》라고 명명하는 것보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작은 마찰이라고 함이 더 적절한 것이다. 이 마찰에서 일본군 1명 즉사, 독립군 1명 전사, 최상준의 어머니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일본 측의 보고 서류에 《아군(일군) 병졸 부상 1인, 불령선인 즉사 1인, 지방인 즉사 1인, 포로 6명》이라고 쓰여진 사상자는 최상준을 비롯한 최해룡, 김귀인, 리종만 노인들의 구술과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삼둔자 전투와 안산 전투에서 적 1백 2여 명을 섬멸했다는 기록은 실제 사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61-262
3.3. 봉오동 전투[편집]
6월 22일 상하이 '독립신문'에 따르면 "적 사상병 12명. 아군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 전과가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은 임시정부 국무원이 통신을 받고 공포한 '호외'에 근거해서 "적 120명을 섬멸하였다"고 보도했다. 6월 24일 독립신문에서는 "적의 사자 60, 부상자 50이고 아군은 부상자 2명"이며 "촌민의 사상자는 9명"이라고 보도했다. 6월 10일 간도국민회 제1남부지방회의 '호외'에서는 "적 전진부대 150명을 섬멸하고 아군 사망자는 근근이 3명"이라고 보도했다. 6월 13일 간도국민회 제2지방회의 '공보'에서는 "1. 적의 대대장, 중대장, 준사관 각기 1명. 병졸 49명이 즉사."라고 보도했다.
일각에선 이런 보도들이 모두 오보거나 과장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연변대 역사학 교수 박창욱 선생의 논문을 인용한다.
『제2북부 지방회의 통보에서 대대장 1명이 죽었다는 것은 오보이다.
대대장이라면 안천(야스카와 - 글쓴이) 소좌를 말하는데 안천은 그 후 돌아가서 전투 상황을 보고했다. 거기다 같은 해 10월 21일 청산리 전역('청산리 전투'-글쓴이)에서는 백운평 전투에서 선봉 추격대 90명을 거느리고 직소에서 북로군정서의 교성대와 싸웠다. 어떤 자료에서는 안천 소좌가 거느린 1개 대대 병력이 참가하였다고 나오는데 과장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평시 편제에 근거하면 보병 1개 대대는 600~700명의 병력이다. 이런 과정으로 하여 전과에서도 "120명 또는 150명을 섬멸"하였다고 하는데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다.』[28]
100명을 사살했다는 건 물론 사상자가 그 정도라는 잘못된 정보를 참으로 알고 썼거나 사기 고취를 위해 의도적으로 부풀린 선전이다.
또 강룡권 교수가 현지 답사를 하고 현지인들의 증언을 들었는데 이에 따르면 일본군이 패배해서 독립군이 추격한 형태가 아니라 독립군은 적극적으로 기습한 후 적극적으로 후퇴한 형태였다. 일본군이 학살을 벌인 이유는 독립군을 사살하지 못한 패배 때문이라고 하며 본인들이 독립군에게 사살당한 탓이라는 증언이 없다. 일본군에게서 대량 사상자가 나온 이유에 독립군의 사살은 언급되지 않으며 일본군 내부끼리 오사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봉오동 전투는 점심 때쯤부터 시작되었다. 보리 저격 때가 되여 쾌청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와 소낙비와 우박을 억수같이 퍼부으니 삿갓에 구멍이 난 것은 물론 머리 위에 이고 있던 함지도 깨질 정도였다. 소나기가 내리면서부터 총소리가 멎고 싸움이 끝이 났다. 일본군들은 호박골로 퇴각하면서 조선 풍리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오던 지원병과 피파골에서 저들끼리의 싸움이 붙었다.
최상준의 증언-도문시 오공촌
(...)전투 당시 애기 주먹만 한 우박이 쏠아져[29]
한 메터 앞도[30] 보이지 않으니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싸움을 끝내고 보니 독립군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땅에 풀썩 주저앉으며 "독립군들이 안개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어두워서야 호박골로 후퇴하던 일본군은 피파골에서 오는 자기 쪽 지원군들과 오해로 말미암아 전투가 있었다.리종만의 증언 - 도문지 홍광향 홍위촌(곡수)
경신년에 나는 13살이었는데 관개지 땅에서 농사지었다. 일본 토벌군은 하전자에서 5호 동네를 거쳐 남봉오골 마을엔 들리지 않고 고개 하나 넘어서 마촌에 당도했다. 그때 우리 집은 마촌에 있었는데 전날에 벌써 피란 가고 마도윤 로인 혼자만 남아있었다. 일본군은 마촌에서 아침을 지어 먹은 후 마도윤 로인을 협박하여 서수레에 경기관총 2정을 싣고 봉오동으로 갔다. 첫 총소리에 말탄 일본 군관이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다. 싸움을 몇 시간 하다가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폭우가 쏟아지며 우박까지 퍼붓는 통에 어느 편도 총을 쏠 수가 없었다. 누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천지신명이 독립군을 도와주었다. 소낙비가 그치자 독립군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일본군은 손실을 입고 호박골로 후퇴하면서 산중에 피란 갔던 백성들에게 분풀이를 하며 18명이나 참살했다. 이와 같이 백성을 마구 죽이던 놈들이 얼마 못 가서 저들끼리 싸워 떼죽음을 당했다. 그것을 봉오동에서 전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지원하러 오던 일본군과 피파골로 후퇴하던 일본군이 서로 마주치자 상대방을 독립군으로 알고 격렬한 싸움을 벌인 것이다. 싸움에서 큰 손해를 본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용배미(훈춘시 량수진[31]
경영촌)에 천막을 치고 3일이나 묵어있다가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배를 타고 돌아갔다.그 외에도 안산의 김동진(1986년에 72세), 남봉오동의 한동선(1986년도에 75세), 김리환(1986년에 75세)등 로호들을[32]
방문했는데 그들 모두는 폭우가 전투를 종결지었다고들 했다.이처럼 실제 조사 자료를 종합해 보면 봉오동 전투는 일제의 퇴각과 독립군의 추격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독립군의 주동적인 매복적으로부터 시작하여 독립군의 주동적인 후퇴로 끝난 것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64~266 [33]
위의 일본군끼리의 팀킬은 피파골 전투라고 부른다. 일본군 간의 오인 전투는 위의 두 명 말고도 여러 명이 증언하는데 강룡권 연구원은 "1986년 7월 6일 연변력사연구소의 리룡화 선생과 함께 경영촌을 방문"해서 "유민섭(72), 리성발(71), 리복녀(84) 등 로인들을 찾아 피파골 싸움에 대한 진위를 물었더니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고 한다.[34]
피파골 전투까지 감안하면 알 수 있는 점은 교과서 등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군 전사자 150명 선은 허구일 수도 있다. 일본군 사망자 = 독립군이 사살한 일본군이 아니다. 십수 명선으로 정리되는 일본군 사상자의 대부분이 아군 오사로 발생했다는 증언까지 있다. 일본군 사망자 중 어디부터 독립군이 사살이고 어디부터 일본군끼리의 오사로 인한 사고인지 불분명하며 그 숫자도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세윤 고구려 연구재단 연구위원은 2005년 기사에서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의견을 남겼다.기사 기사에서 장세윤은 일본군 자료는 자신들의 피해를 너무 축소해 보고했을 가능성이 크며 여러 자료를 감안할 때 봉오동 전투에선 일본군 100여 명이 살상됐고 청산리 전투에선 일본군 400∼500명 살상, 독립군도 그에 못지 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35]
일본 측에서 정리한 당대의 야스가와 소좌 보고서인 <봉오동부근전투상보> 간도 일본 총영사 대리 사카이 요사키치의 보고서, 간도 일본영사분관 와쿠이 복명서 등 일본 측에서의 정리한 자료는 일본군의 전사자는 1명 부상은 2명에서 10명 선이다.#[36] 또 일본군의 전사자 영령을 합사하는 야스쿠니 신사에 봉오동 전투 희생자는 아예 없다. 청산리 전투도 11명 죽었다고 합사했는데 설령 일본군이 희생자 수치를 줄였다고 해도 150명이 죽었다면 적어도 수십 명 혹은 수 명은 합사해야 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합사자가 아예 없다는 건 희생자 수치에 대해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37] 그렇다고 하더라도 2차대전 말기 일제가 역사적으로 불리한 기록에 대해 축소하거나 왜곡한 사례를 감안한다면 이 역시 조작 및 왜곡되었음을 의심해 볼 여지는 있다.[38]
이상훈 육사 교수 같은 경우 많이 인용되는 야스가와 소좌의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 대해 가필이나 수정 흔적이 있다며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이 교수는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일본군 보병대 중심의 추격대 상황만 기록돼 있을 뿐이어서 경찰과 민간인이 다수 소속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토벌대 상황은 전혀 알 수 없다"며 "봉오동전투 당시 두만강 하류 일대에 500명을 초과하는 일본군이 집결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독립군 전과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상훈 교수도 일본군이 정확히 몇 명 죽었는지는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으며 이어 독립군 측 전과 기록에 대한 검토와 봉오동 전투 전개 과정에 관한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 측과 일본 측의 사상자 부분은 기록의 크나큰 상이성으로 인해 많은 의문이 남아 있으며 아직 명확한 수치는 불명이다. 한국 측의 독립신문 88호 호외 부분이나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가 쓴 <진정서> 같은 회고록 등은 일본군의 피해가 다대하다고 기술했지만 이 사료의 신뢰성에 의문을 표하는 시각은 많다. 또 홍범도가 쓴 <홍범도 일지>에서는 일본군 370명이 전사했고 후원병 100명이 존재하여 결과적으로 5~600명이 죽었다고 기술했다. 일반적으로 홍범도 일지는 과장으로 보지만 장세윤 같은 경우 출동한 일본군 숫자와 비슷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신빙성이 있다고도 주장했다. 즉 이와 같은 회고는 숫자 그 자체에 집착해서가 아니라 승전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강조하고 싶어하는 심정의 표현이라는 것이다.[39] 그렇다고 한국 측 자료만 이상한 게 아니고 이상훈 교수는 일본측의 야스가와 소좌 보고서도 쉽게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제시한 바 있으니 한일 양측의 자료가 정확히 연구되어 교차검증을 통해 앞으로 봉오동 전투의 전과 부분에 있어 명확한 연구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본문단을 쭉 읽어 보면 알겠지만 한국측 자료라는 것이 대부분 카더라에 의존한 기사나 추측성 증언인 반면 일본측은 공문서를 근거로 하고 있고 추격을 피하는 입장인 독립군측이 전장을 수습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하간 청산리 전역을 연구한 기고에서 신효승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항일 독립운동에서 그 실상과 의의를 생각하지 않고 <전과> 부분에 집착하는 것은 항일 독립운동사를 명확하게 보는 관점은 아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김학철 선생 역시 봉오동-청산리 전투 당시 독립군의 전과나 자신이 활동한 조선의용군의 혁혁한 전과보다는 "윷진아비마냥 일본군이 쓰러질 때까지 달려든" 불굴의 정신을 강조하며 비슷한 말을 남긴 바 있다.# 즉 그 본질은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부분을 억지로 강조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키우는 데만 열중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열세의 전력에서도 용맹히 항거한 독립군의 전과가 형편없다고 굳이 깎아내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설령 전과 부분에서 명확한 대첩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우세해도 독립군의 게릴라 수준의 장비와 병력, 보급, 훈련도의 여러모로 열세한 상황에서 일본 제국 정규군과 한바탕 싸운 그 정신과 의의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봉오동-청산리 전역과 여러 전투를 전과 부분에 매몰되지 말고 그 자체의 의의를 보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
4. 유적지[편집]
기존에 세워져 있었던 전적지비.
새롭게 세워진 전적지비.[40]
2018년 8월 28일 확인한 결과 전적비의 앞쪽 기록이 모조리 삭제되어 있었다.[41]
내용이 수정된 후의 모습.
해당 전적지비는 중국 도문시 수도국 봉오 저수지에 위치해 있다. 다만 봉오동 전투의 격전지나 봉오동 촌락은 전적지비가 있는 봉오 저수지에서 북쪽으로 8~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라고 한다.
봉오동 전투의 주역들인 최진동, 박승길, 이화일 등이 먼저 대전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고 2021년 8월 이들의 상관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반환되면서 안무 강상모를 제외한 봉오동 전투의 주역 대부분이 대한민국에 안장되었다.
5. 미디어[편집]
이 전투를 다룬 영화가 없던 터에 바로 명량의 김한민 감독이 차기작으로 제작/기획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리고 감독은 살인자의 기억법을 만든 원신연 감독이 맡아 유해진, 류준열, 조우진을 주연으로 2019년에 영화로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