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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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부라이다 사우디 1.jpg

파일:부라이다 사우디.jpg

1. 개요
2. 역사
2.1. 알 아부 알리얀
2.2. 알 무한나
2.3. 현대
3. 갤러리



1. 개요[편집]


아랍어: بريدة
영어: Buraidah

사우디아라비아 중북부의 도시. 하일리야드, 메디나주바일 중간 지짐의 오아시스에 위치한다. 인구는 75만명으로, 알카심 지역의 주도이다. 네지드 지역 최대의 농경 지대로, 도시 서쪽에 펼쳐진 관개 농지 덕에 사우디는 극미하긴 하지만 밀 수출국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아랍에서도 유명한 대추야자 생산지로, 매년 축제가 열린다. 다만 이러한 농업 생산력은 근래에 관개 시설이 갖춰지며 생긴 것이고, 근대 이전에는 남쪽의 우나이자가 일대의 정치 / 농경 중심지였다. 부라이다란 이름에 대해서는 사하바 부라이다 빈 알 하시브가 무함마드의 명으로 이곳에 우물을 판 것, 찬 (아랍어로 바르드) 물이 많은 것, 샘 주변에 파피루스 (아랍어로 알바르디)가 자라던 것 등 여러 유래설이 있다. 확실한 것은 수자원과 관련되었다는 점.

역사적으로 16세기 중반 ~ 20세기 초반까지 알 아부 알리얀 토후국과 알 무한나 토후국이 있었고, 우나이자를 제외한 알카심 지역 대부분을 다스렸으나 현재까지 잔존한 우나이자의 알 술라임 왕가와 달리 사우디 직할령으로 흡수되었다. 시가지는 우나이자와 함께 순환도로로 둘러져 광역권을 이루고 있다. 도심의 국왕 칼리드 공원에는 1985년 한국의 금호건설이 세운 높이 66m의 급수탑인 부르즈 부라이다가 있고와 부라이다 박물관이 위치한다. 시가지 남부의 대추야자 숲 옆에는 매년 여름마다 축제장으로 활용되는 넓은 농산물 시장이 있는데, 이름이 대추야자 도시 (مدينة التمور)이다. 서쪽 농장 지대 방면 15km 지점에는 알카심 주도답게 아미르 나이프 빈 압둘아지즈 국제공항과 알카심 대학교가 위치한다.

2. 역사[편집]


파일:사우디 부라이다 1.jpg
옛 왕궁인 부라이다 박물관

2.1. 알 아부 알리얀[편집]


부라이다는 1577년 알 카심 토후국의 중심지로 세워졌다. 그 왕가인 타밈 부족의 알 아부 알리얀 가문은 18세기 들어 다리비, 하사니 계열로 나뉘어 내분을 벌였다. 1740년에는 모스크에서 8명의 가문원이 살해되는 참극이 있었다. 1760년대에는 베두인들의 침공에서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성벽이 둘러졌다. 1770년 부라이다는 1차 사우디 국가 (디리야 토후국)의 군주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의 아들 사우드에게 점령되었다. 다만 사우디에 복속한 후에도 하사니 계열 내에서 동족 상잔을 벌이다가 1780년 후자일란 빈 하마드의 즉위로 안정되었다. 그러던 1782년 카심 지역에선 반와하비 봉기가 일어났고, 알 하마드 부족은 부라이다의 경쟁 도시던 앗샤마스 및 다리비 세력과 함께 부라이다를 포위하였다.

장기간의 포위를 이겨낸 부라이다 주민들은 앗샤마스를 파괴하여 보복하였다. 그후로도 부라이다의 혼란은 이어졌다. 1786년 이라크 남부 문타피크 후국의 아미르 투와이니 빈 압둘라 알 샤비브가 동북쪽 50km 지점의 앗타누마를 습격한 후 부라이다를 포위하했지만 역시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만 와하비 전쟁 중인 1817년 이브라힘 파샤의 이집트 군은 신식 무기를 앞세워 부라이다를 포위한 끝에 아미르 후자일란의 항복을 받아내었고, 도시의 안전을 대가로 스스로 인질이 되어 이브라힘 파샤와 함께 떠난 후자일란은 이듬해 메디나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아들 압둘라가 계승했으나 곧 암살되어 친척 라쉬드가 즉위했는데, 그 역시 압둘라의 모친인 룰와 빈트 압둘라흐만이 궁전의 화약고를 터뜨려 궁과 함께 폭사시켰다.

뒤이어 즉위한 압둘라 빈 무함마드 역시 1820년 튀르크 장교 후세인 베이에게 살해되었다. 그후로 가문 내부의 골육상쟁이 이어진 끝에 형의 죽음을 복수한 무함마드 빈 알리 알아르파즈가 즉위하였다. 하지만 1827년 2차 사우디 국가 (네지드 토후국)의 투르키 빈 압둘라는 그를 폐위하고 알주프 (두마툴잔달) 총독으로 봉하였는데, 역시 얼마후 해임되어 1842년 자신이 죽인 전 아미르의 아들에게 살해되었다. 한편 투르키에 의해 봉해진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는 34년간 장기 집권하며 안정을 가져왔다. 1858년 약화된 네지드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오랜만에 다리비계 아미르가 봉해졌으나 결국 압둘아지즈가 복위하였다. 이에 네지드의 파이살 빈 투르키는 압둘아지즈의 경쟁자인 무함마드 알가넴에게 우나이자 주민들과 함께 부라이다를 공격하게 하였고, 1861년 압둘아지즈는 살해되었다. 2년 후 파이살은 방계 왕족을 봉했다가 같은해 폐위하며 아부 알 알리얀 왕조는 멸망하였다.

2.2. 알 무한나[편집]


1863년 부라이다의 아미르로 봉해진 무한나 빈 살라흐 아바 알카일은 우나이자로 추방된 알 아부 알리얀 가문에 의해 1875년 암살되었다. 뒤를 이은 아들 하산은 네지드의 압둘라 빈 파이살에게 하소연했으나 후자가 오히려 알 아부 알리얀 편을 들자 분노하여 사우드 왕가에 도전하기 시작한 하일의 알 라시드 가문과 동맹하였다. 이후 부라이다와 리야드 간의 산발적인 전투가 있었고, 하일의 무함마드 알 라시드는 병력을 빌리러 찾아온 알 아부 알리얀 가문원들을 처형하며 하산의 신뢰를 얻었다. 1881년 라시드-무한나 군대는 부라이다 동쪽 70km의 앗줄피를 점령하였고, 이듬해 우르와 전투에서 사우디 군을 격파하였다. 1887년 압둘라 빈 파이살이 알카르지로 축출했던 조카들이 그를 사로잡자 무함마드 알 라시드와 하산은 곧장 남하해 리야드를 점령하고 압둘라를 하일로 압송하였다. 다만 이후 하산은 무함마드 알 라시드와 대립하게 되어 우나이자의 자밀 알 살림과 동맹하였다.

그에 힘입어 1889년 압둘라의 동생 압둘라흐만은 리야드를 되찾는다. 1890년 하산-자밀의 카심 연합군은 카라아 전투에서 라시드 군을 격파하였고, 무함마드 알 라시드는 물라이다 평원으로 후퇴하였다. 1891년 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물라이다로 진격했으나, 평원에서 라시드 측의 기병대가 진가를 발휘하며 카심 군대는 대패하였다. 부라이다를 포함한 카심 전역은 라시드령이 되었고, 하산은 알바삼 가문에 의탁했다가 죽이거나 투옥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투항하였다. 하산의 동생 이브라힘은 압둘라흐만과 함께 하라이밀라 전투에서 다시 라시드 군에 맞서지만 패하고 도주하다 살해되었다. 이후 압둘라흐만은 리야드를 포기하고 남은 살림, 무한나 가문과 함께 쿠웨이트로 망명한다. 1901년 앗사리프 전투에 이어 1902년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리야드를 수복하고 3차 사우디 국가를 세우자 살림, 무한나 가문 역시 돌아와 카심 지역의 수복에 나선다.

1904년 사우드-살람-무한나 연합군은 파이다툴시르 전투에서 라시드 군을 격파하며 우나이자를 수복하였고, 곧바로 북상해 얼마간의 포위 끝에 부라이다 역시 수복하였다. 그리고 하산의 아들 살라흐가 무한나 가문의 새 아미르로 등극하였다. 얼마후 (기존에 라시드 가문을 지원하던) 오스만 제국이 평화 교섭을 위해 장교 아흐메드 파이디를 파견하자 살라흐는 그와 접촉하여 부라이다가 오스만 보호 하에 라시드, 사우드 가문 양측 모두로부터 자유로운 지위가 되길 청했으나 불발되었다. 이로써 카심 지방은 친오스만의 부라이다, 친사우디의 우나이자, 친라시드로 나뉘었다. 다만 1906년 압둘아지즈가 부라이다 동쪽의 라우다트 무한나에서 라시드 아미르 압둘아지즈를 전사시키며 승기를 잡자 대세는 사우디 왕가에 기울었고, 같은해 부라이다에 입성한 압둘아지즈 국왕은 살라흐를 폐하고 사촌 무함마드 빈 압둘라를 아미르로 봉하였다. 리야드로 압송된 살라흐는 얼마 후 살해된다.

즉위 직후 무함마드는 다른 사촌인 술라이만 빈 하산이 오스만 조와 연대하여 찬탈하려는 음모를 진압하였다. 다만 얼마후 사우디 군은 무함마드가 라시드 가문의 술탄 빈 하무드에게 보낸 동맹 제의 서신을 가로챘고, 이에 압둘아지즈는 재차 부라이다로 향하여 무함마드로 하여금 재차 충성 서약을 하게 하였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서약을 배반하고 라시드 가문과 재차 동맹을 맺었다. 1907년 9월, 라시드-무한나에 부라이다 동쪽의 무타이르 부족까지 합세한 북부 연합군은 부라이다에 집결하였다. 이에 압둘아지즈는 정예 병력을 모아 북상하였고, 현재 부라이다 시가지 동부인 앗타르피야에서 벌어진 전투는 사우디 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라시드 가문이 부라이다의 상단을 공격하여 안좋아져있던 여론은 이로써 폭발하였고, 1908년 5월 21일 주민들의 초대로 북문을 통해 입성한 압둘아지즈는 곧장 궁전을 포위해 아미르 무함마드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2.3. 현대[편집]


항복한 무함마드는 이라크 망명을 청하여 허락되었고, 이로써 3세기 넘게 이어지던 알카심 후국은 멸망하고 부라이다는 사우디 왕가의 직할령이 되었다. 1909년 가뭄과 흉작으로 인한 기근과 1919년 네지드 역병을 겪은 후 1956-67년 겨울동안 무려 57일간 비가 계속 내려 도시가 침수되고 주민들이 고지대로 피신하는 일이 있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별일 없이 사우디의 주요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3. 갤러리[편집]


파일:사우디 부라이다 2.jpg
새해의 부라이다 타워
파일:부라이다 사우디 12.jpg
매년 7월 혹은 8월에 열리는 대추야자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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