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찰 복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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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察 福康安
(1754년 ~ 1796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청나라의 인물. 만주 양황기 출신이다. 만주어로는 푸차 푹앙안.

건륭제의 처남인 부찰 부항[1](傅恒)의 3남으로 건륭에겐 처조카가 된다. 명문가의 자손이 능력과 총애까지 갖추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시.


2. 생애[편집]


복강안의 집안인 "양황기 사제부찰씨(鑲黃旗沙濟富察氏)"는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합할 때 그의 휘하에 가담하여 개국공신 노릇을 했다. 고조부 합시칠(哈什屯), 증조부 미사한(米思翰), 백부 마제(馬齊)가 모두 의정대신을 지내고 아버지 부항과 큰형 복령안, 둘째형 복륭안은 모두 군기대신을 지내는 관력을 자랑하는 명문가였다. 복륭안은 건륭제의 부마, 복령안은 건륭제의 사촌의 부마가 되어 혼맥까지 든든하게 갖춘 것은 덤이다.

여자 쪽은 어떤고 하니, 건륭제의 첫 황후인 효현순황후가 된 고모를 필두로 하여 복강안의 누이 중 한 명은 건륭의 11황자 영성(永瑆)[2]의 적복진, 다른 한 명은 철모자왕인 예친왕 도르곤의 후손 순영(淳穎)의 적복진이 되어 이쪽 역시 非황족으로서는 이보다 높은 지위를 생각하기 어려운 위치에 이르렀다.

아버지 부찰 부항은 황궁 시위를 거쳐 군부의 실세가 되었다. 부항은 문무겸비한 인재로, 문재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무용도 대단했다. 1754년 준가르 정벌을 두고 다른 대신들이 모두 말릴 때 부항만이 건륭제를 지지했고 정벌이 결정되자 선봉으로 나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768년 건륭제의 버마원정에도 선봉에 섰으나 전황 자체도 잘 안풀렸고 부항 자신도 남방에서 병에 걸려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부항은 네 아들을 두었고 그중 복강안은 셋째였다. 건륭제는 부항의 장례식에서 너의 아들을 내 아들처럼 키우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복강안을 어릴 때부터 자금성으로 데려와 키워 황자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했다.

여기에 아버지를 닮아 복강안 본인도 무술이 뛰어나고 건륭제의 총애까지 더해지니 이미 10대에 벼슬을 시작하여 20대 초뱌에 온복을 따라 2번에 걸쳐 대금천, 소금천을 공격하여 승리한 공으로 삼등가용남(三等嘉勇男)이 되었으며, 외직으로는 몽군기와 정백기의 도통, 정백기 만주도통이 되고 내직으로는 내대신, 어전대신 태자태보를 거쳐 공부상서에 이르는 출세가도를 달린다.

30대에는 병부상서 총관내무부대신(1784년)을 시작으로 하여 수많은 상서와 대신 직위를 맡으며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 대만과 티베트의 반란을 거듭 진압하면서 작위가 일등가용공을 넘어 가용충예공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청의 보호국인 티베트를 침공해 온 네팔 구르카 족과 전투를 벌였다. 다만 이 전투는 평원에 특화된 청나라군이 불리한 고산지대에서 벌어진데다가, 상대가 전투민족인 구르카였기 때문에 청나라측이 패했으며, 강화조건으로 티베트가 네팔에게 세폐를 바치는 대신, 청군과 네팔은 형식상 군신관계를 맺고 네팔의 통상을 허가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40대에 접어들어서도 황족만이 봉해지던 고산패자에 오르는 등 왕성하게 활약했으나 가경제 원년, 묘족의 난을 진압하러 남방에 출진했다가, 42세에 과로로 호남성의 진중에서 죽었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40대의 나이로 남방에서 군무 수행 중 요절한 것이 된다. 사후 문양(文襄)이라는 시호와 가용군왕(嘉勇郡王)에 추봉되고, 태묘에 배향되었다. 군왕 역시 오직 청나라 황실인 아이신기오로 씨만 받을 수 있었던 영예였다.

3. 기타[편집]


건륭제 통치 기간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으로, 그 유명한 니오후루 허션도 복강안과는 겨룰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푸차 가문과 니오후루 가문의 차이도 있고, 군부의 거물인 복강안과 함부로 다투기 힘든 것도 있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내정을 맡던 화신과 외정을 맡던 복강안이 마주칠 일도 적었다.

건륭제 재위 내내 신하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오죽하면 건륭제가 부항의 부인과 간통하여 나은 사생아 아니냐는 야사도 있다. 부항의 다른 아들들도 황실과 거듭 혼사를 치렀는데[3] 정작 이 집안에서 건륭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복강안이 공주와 결혼하지 않았던 것은 복강안이 사생아라 공주들과는 배다른 남매가 되기 때문에 결혼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야사이긴 하나 남아있는 초상화에서 알 수 있는 외모 역시 비슷하다면 비슷한 점이 많이 보이는 등[4] 야사치고는 호사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꾸준히 회자되는 떡밥이라 각종 매체에서는 이 사생아설이 빈번하게 묘사되곤 한다. 부항이 젊을 때엔 사천, 섬서, 감숙 등 최전선에 자주 나가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건륭제가 북경에서 술김에 불륜을 저질렀다거나, 노년기에는 여러 황자들보다 복강안을 더 신임하는 부황의 모습에 황자들이 시기하는 묘사도 나온다.

외정에서는 대단히 엄격한 태도를 취했는데, 양광 총독으로 있을 때부터 외국 상인에 대해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영국이 청나라에 통상개방을 요구하기 위해 보낸 조지 매카트니 사절단이 왔을 때는 사신들에게 황제를 알현할 때 삼궤구고두례를 올리라고 했다. 매카트니는 이게 한이 되었든지 영국으로 돌아간 이후 회고록에서 복강안에 대해 악평을 하고 그의 군대가 서양에서는 이미 도태된 조총(화승총)을 쓰는 것을 비웃었다. 당시 영국은 좀 더 개조된 머스킷 소총을 쓰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치를 좋아하고, 돈을 물쓰듯 썼다.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긴 가경제도 복강안의 사치를 매우 비판했다고 한다.

4. 대중매체[편집]


황제의 딸의 주연 복이강이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하였다. 건륭의 부마가 되었다라는 점을 생각하면 형인 복륭안과 합쳐져서 모티브가 되었다라고 봐야한다.

연희공략: 금지옥엽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어머니 희탑랍 이청을 죽게 한 위영락에게 복수하기 위해 위영락의 딸 소화공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음모를 꾸민다.

김용의 비호외전서검은구록에 등장한다. 서검은구록에서는 진가락과 외모가 닮아 홍화회 인물들이 이를 이용해 계략을 꾸민다. 비호외전에서는 건륭제의 사생아로 등장한다. 건륭제의 명령을 받고 무림을 통제하려 한다. 작품 초반에 마춘화를 유혹하는 등 풍류공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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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륭의 원후였던 효현순황후의 동복 동생이다.[2] 조선인 출신 김신다리의 후손인 숙가황귀비 금가씨 소생[3] 첫째는 강희제의 손자인 애신각라 영존의 사위가 되었고, 둘째형 복령안은 건륭제의 사위였다.[4] 부항 초상화의 인상은 # 마음씨 넉넉해 보이는 아저씨같은데, 복강안 초상화의 인상은 # 건륭제가 젊었을 때의 모습과 비슷하게 오만함과 교활함이 배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