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예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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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예멘 내전
حرب شمال اليمن الأهلية
North Yemen Civil War

1962년 9월 26일 ~ 1970년 12월 1일
장소
예멘 왕국
교전국 및 교전 세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Mutawakkilite_Kingdom_of_Yemen.svg.png 예멘 왕국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사우디아라비아
파일:북예멘 국기.svg 예멘 아랍 공화국
파일:시리아 국기.svg 아랍 연합 공화국
지원국 및 지원 세력
파일:요르단 국기.svg 요르단(1962~1963)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이란 제국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리비아 국기(1969–1972).svg.png 리비아(1969~1970)
지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Mutawakkilite_Kingdom_of_Yemen.svg.png 무함마드 알바드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Mutawakkilite_Kingdom_of_Yemen.svg.png 하산 이븐 야히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Mutawakkilite_Kingdom_of_Yemen.svg.png 압두라흐만 빈 야히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Mutawakkilite_Kingdom_of_Yemen.svg.png 무함마드 빈 후세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Mutawakkilite_Kingdom_of_Yemen.svg.png 압둘라 빈 하산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파일:북예멘 국기.svg 압둘라 알살랄
파일:북예멘 국기.svg 압둘 라흐만 알이리야니
파일:북예멘 국기.svg 하산 알암리
파일:북예멘 국기.svg 압둘 라티프 다이팔라
파일:북예멘 국기.svg 하무드 알자이피
파일:시리아 국기.svg 가말 나세르
병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Mutawakkilite_Kingdom_of_Yemen.svg.png 22만명(1965)[1]
파일:북예멘 국기.svg 3,000명(1964)
파일:시리아 국기.svg 13만명(1967)
피해규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Mutawakkilite_Kingdom_of_Yemen.svg.png 4만명 전사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1천명 전사
파일:시리아 국기.svg 15,194~2만 6천명 전사
10만~20만명 사망
결과
공화파의 승리
예멘 왕국 멸망
196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왕당파 지원 중단
1967년 이집트 원정군 철수

1. 개요
2. 전개
3. 결과와 후일담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62년부터 1970년까지 벌어진 예멘 왕국에서 벌어진 공화파와 왕당파 간의 내전이다. 예멘 왕국은 1918년 11월 예멘 북부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건국되었다. 이후 왕당파와 공화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국제적으로 남예멘을 식민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왕당파를, 아랍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소련이 공화파를 각각 지원했다. 이외에도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이 왕당파를, 이집트(당시 아랍 연합 공화국)가 공화파를 지원했다. 전쟁 결과 공화파가 승리하여 예멘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1962년 수립된 예멘 아랍 공화국이 북예멘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북예멘 내전에 이집트군이 대거 참전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북예멘 내전은 이집트의 베트남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집트 원정군 자료에 따르면 1962년 10월부터 1964년 6월까지 발생한 이집트 원정군 전사자는 15,194명에 달했다. 비교하자면 6일 전쟁에서 발생한 이집트군 전사자가 9,800~1만 5천명으로 추산된다. 케네스 M. 폴랙(Kenneth M. Pollack)의 Arabs at War: Military Effectiveness, 1948–1991(2002)에 따르면 이집트 원정군 전사자는 2만 6천명까지 올라간다.

2. 전개[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74px-North_Yemen_in_its_region.svg.png
예멘 왕국의 위치
근대 예멘의 북쪽은 1918년까지 오스만 제국이, 남쪽은 1967년까지 영국이 각각 사나아덴을 중심지로 삼아 지배했다. 외세가 물러간 후 오스만 제국령에는 자이드파가 다스리는 예멘 왕국이 들어섰고, 영국령에는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이 들어섰다. 이때 예멘 왕국은 일종의 신정국가로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북예멘 내전의 발단은 1962년 9월 19일 이 예멘 왕국의 왕 아흐마드 빈 야히야(Ahmad bin Yahya)가 사망한 후 발생한 군사쿠데타이다. 쿠데타 세력은 왕정 폐지 및 예멘 아랍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흐마드의 후계자 무함마드는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으로 도주해 북부의 시아파 부족들과 연합하여 통치권을 회복하고자 했고, 이후 전면적인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이집트와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는 쿠데타 직후 예멘에 개입했다. 이집트는 9월 29일 현지 상황을 평가하고 공화파 신정부에 필요한 것을 파악하기 위해 알리 압둘 하미드 장군을 파견했다. 이때 이집트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동행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과거 예멘의 왕가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당파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우선 10월 2일부터 8일까지 화물기 4기를 예멘 왕당파 부족에 보내려고 했으나 중간에 조종사들이 이집트 아스완 쪽으로 튀는 바람에 실패했다. 소련은 예멘의 신정부를 곧바로 승인했고,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의 왕당파 지원 중단 및 이집트군의 철수를 제안했지만 이집트의 영향력 확대에 경기를 일으킨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은 거부했다. 예멘 서남부 타이즈에 머물던 미국의 임시대리대사 로버트 스투키(Robert Stookey)는 본국에 공화파가 일부 국경지대를 제외한 나머지 예멘 전역을 통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토를 보장하면서도 12월 19일 예멘 아랍 공화국을 승인했다.

왕당파 세력은 북부 고원지대에 거점을 형성하고 사우디아라비아 및 영국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탈환하고자 하였다. 이집트의 지원을 받은 공화파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간 내전은 이후 8년간 지속되었다. 공화파는 북예멘의 남부 대부분 및 북부의 도시와 도로망을 통제했고 왕당파는 사막과 시골 지역을 통제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로 물자와 용병을 파견하여 왕당파를 지원했다면 이집트는 자국군을 대거 파병하여 공화파를 도왔다. 1962년 10월 5천명 미만이던 이집트 원정군은 2개월 후 1만 5천명이 추가 배치되었다. 이집트군은 1963년 말 3만 6천명, 1964년 말 5만 명, 1965년 말 5만 5천명[2]으로 증가했다. 이집트군은 사막전과 시가전에 익숙했지만 산악지형이 대부분인 예멘에서 벌어지는 산악전에는 무지했다. 심지어 제대로 된 지도조차 없는 상태에서 싸웠으므로 이집트군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예멘 왕국 대사를 지낸 아흐메드 아부 제이드(Ahmed Abu-Zeid)는 본국에 현지 부족들은 충성심은커녕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의식조차 전무하다며 좋게 물자 지원이나 하는게 낫다고 보고했으나 그렇게 정성들여 써낸 보고서들은 본국의 높으신 분들에게 단 한줄도 읽히지 않고 처절히 씹혔다(...)
파일:1967년 북예멘 내전 전황.jpg
1967년 북예멘 내전 전황 지도.
검은색이 공화파, 붉은색이 왕당파 지역이다.
1965년부터 소강상태가 지속된 내전은 1967년 6월 이집트가 6일 전쟁에서 당한 경이적인 참패를 기점으로 전황이 급변했다. 북예멘 내전에 지나치게 병력을 쏟아부은데다[3] 6일 전쟁에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이집트는 북예멘 내전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해 8월 하르툼 협정에서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북예멘 내전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고, 이집트 원정군은 같은 달 1만 5천명을 시작으로 해가 지나기 전에 완전히 철수했다. 알살랄은 이집트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으나 그해 압둘 라흐만 알이리야니가 이끈 온건파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이집트군이 철수하고 공화파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왕당파는 11월 말 무함마드 빈 후세인의 지휘 하에 수도 사나에 대한 총공세에 돌입했다. 사나 공방전에서 공화파는 10배가 넘는 압도적인 숫적 열세에 처했지만 소련, 시리아, 남예멘의 지원 그리고 고지대에 있다는 지형상의 이점을 바탕으로 저항했다. 게다가 왕당파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원을 끊어버렸기 때문에 탄약 부족도 심각해졌다. 해가 바뀐 1968년 2월 7일 사나의 공화파는 70일에 걸친 전투 끝에 포위를 해제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공화파는 내전에서 사실상 승리했다. 왕당파도 온건파가 중심이 되면서 그해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3. 결과와 후일담[편집]


1970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는 공화파로부터 왕당파를 정부에 포함시켜주겠다는 합의를 받아냄에 따라 예멘 아랍 공화국을 승인했다. 예멘 아랍 공화국은 1990년 남예멘(예멘 민주 인민 공화국)과 통일하였다.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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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만명은 정규군, 20만 명은 친정부 부족의 비정규군.[2] 13개 보병연대, 1개 포병사단, 1개 기갑사단, 특수부대 및 공수부대 연대 몇개로 구성됨.[3] 게다가 이 병력은 당시 개판 5분 전이던 이집트군에서도 나름 가려뽑아 보낸 정예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