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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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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시대 말기 탁발선비족이 세운 왕조로 중국 중세사의 한 흐름을 만들었다.
선비족은 영웅 단석괴 이후, 지속적으로 후한과 서진을 공격했고 5호 16국시대의 혼란을 틈타 남진해 국가를 세웠다. 북위는 5호 16국시대 후기에 등장하여 제3대 세조 태무제때 화북을 통일하고 남북조시대를 형성했으며, 후대의 수·당 제국의 바탕을 이루었다. 수도는 지금의 다퉁이었다가 제7대 고조 효문제 때 낙양으로 천도했다.
거란의 요나라, 여진·만주의 금나라 및 청나라, 몽골의 원나라와 같은 '정복왕조' 국가들이[2] 여러 제도적인 노력[3] 을 통해 지배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반면, 북위는 제7대 효문제 시절 성족상정을 실시, 선비족의 성씨를 중국식으로 개칭하고 중국 문화를 크게 받아들였다.(한화정책) 북제와 북주 시절에는 이 조치를 다시 되돌리고 한인 귀족들에게 선비족의 성씨를 하사하기도 했으나(호화정책), 선비족의 한화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수·당의 지배 계급인 관롱집단을 한화된 선비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호·한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북위가 일방적으로 중국 문화에 동화된 것은 아니다. [4]
당대의 국호는 그냥 위(魏) 혹은 대위(大魏)였고, '북위'라는 표현은 이전 시기 전국시대의 위나라나 삼국시대의 조위와 같은 여타 '위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이 붙인 표기 방식이다. 즉 당대를 바탕으로 한 소설과 사극에서 '북위'로 자칭하는 표현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라는 이야기이다.
또는 황실의 성씨를 국호 앞에 붙여 탁발위(拓跋魏) 또는 원위(元魏)라고 부르거나[5] 북방 이민족의 위나라라서 호위(胡魏), 시기적으로 나중에 등장한 점을 감안하여 후위(後魏)라 부르기도 하는데, 막판에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북위 표기가 통용되고 있다. 애당초 중국 24사 정사에 《위서》가 《북위서》로 들어가 버렸다. 다만, 주변국에서 타브가치라고 부른 사례가 있기에 고유 명칭은 '타브가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선비족의 한 갈래인 탁발선비(拓跋鮮卑)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나라였다.[6]
315년 사마씨의 서진 정권으로부터 하사받았던 기존의 국호인 대(代)[7] 를 386년 태조 도무제 탁발규가 위(魏)'로 바꾸고 칭제건원했다. 탁발선비족이 예전에 조위에게 조공을 바쳤던 적이 있고, 옛 조위가 처음 시작된 봉토였던 하북에 도읍하여 '위나라'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일단 북위 사람들은 서진으로부터 분봉받은 대나라의 후예로써 자신들이 옛 서진을 이은 진짜 중원의 정통왕조라고 생각했고, 남쪽의 동진 등 한족의 남조는 섬 오랑캐(島夷)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때문에 《북위서》 같은 이 시기 사서에 동진의 시조인 중종 원제 사마예를 두고, 우금과 사마예의 어머니인 하후광희가 사통해 낳은 아이가 사마예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거나 동진은 가짜 사마씨라는 의미로 참진(僭晉)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동진의 정통성 부정과 본인들의 정통성 숭조의 이유로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후연(後燕)의 황제 모용수는 탁발선비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쳐들어왔지만 도리어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며 제대로 자존심을 구겼다. 북위는 이를 계기로 힘의 균형이 역전되기 시작한 틈을 타 397년 후연의 수도 중산을 무너뜨리면서 본격적으로 화북에 진출하기 시작했다.[8]
제3대 황제인 세조 태무제 시기에 북하, 북연과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했다. 이때 한족 관료로서 북위 조정에 몸담고 있었던 최호의 국사필화(筆禍)사건이 터져 청하 최씨 일가 및 그와 관련된 한족 귀족 세력들이 대거 처형 및 숙청되었다. 그 후 북위는 남조와는 달리 황제권이 귀족과 대등하거나 좀 더 우위에 있는 경향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이 남북조 간 국력이 차이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남조의 경우, 귀족들의 집안 싸움 + 황실의 개판 정치로 나라가 도통 하루도 조용하질 못했다.
다만 북위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보이는데 예를 들어 북위의 역대 군주들은 기록이 좀 적다. 남조의 경우 유송 전폐제의 재위기간은 1년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지른 악행이 빼곡히 기록되었지만 북위의 황제들은 도무제, 태무제, 효문제 등 몇몇만 빼면 기록이 부실하며, 특히나 북위의 황제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듯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젊은 나이에 붕어했다. 비슷하게 전한 말기, 후한 중기~말기, 조위 말기, 손권 사후의 오나라, 남조의 역대 왕조, 북제, 북주 등의 사례를 들어 보면 이는 북위 역시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없을 수가 없는 나라인 것을 암시한다. 특히나 북위 말기에는 호태후와 숙종 효명제(제9대) 간의 권력 다툼, 호태후의 효명제 독살, 이후 효명제의 딸을 황제로 추대했다가 원조로 바꾼 일, 근친상간을 한 제14대 효무제 등 북위 황실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또 분열 이후의 북제와 북주 황실도 막장[9] 인 걸 감안하면 북위 역시도 막장끼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실 이게 결정적인 문제인데 땅만 보면 남조가 북조보다 더 강할 거 같지만 실상 미개척지도 많았고 앞서 말한 대로 귀족들이 사분오열되어서 강역에 비해 실제 지배 범위는 좁았다. 현대 중국의 경우, 옛 남조의 중심지인 장쑤성, 저장성, 상하이시 등 강남 지방이 중국에서 제일 잘 살고 인구가 많은 지역이긴 해도 중국 전체로 봤을 때 이들 강남 지역과 광둥성을 제외하면 양쯔강 이남보다 이북의 인구밀도가 훨씬 높은데 당대엔 오랜 기간 더 개발되어 온 쪽이 북조의 화북지역이었으므로 당연히 기존의 발전도를 토대로 국력의 우위를 점했을 것이 당연하다.
5세기 말 제7대 고조 효문제 시기에 적극적인 한(漢)화정책을 추진했는데,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문제가 강력하게 실행한 한화정책으로 인해 권력에서 소외된 비(非)한화 선비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523년,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된 육진의 대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6진(六鎭)이란 북방의 몽골계 유목제국인 유연(柔然)을 방어하기 위해 낙양 천도 이전의 원래 수도인 평성(平成, 지금의 다퉁 시) 부근에 설치한 군사 도시를 말한다.
본디 낙양 천도 이전의 6진은 수도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귀족 중에서도 최상급의 엘리트들이 대거 복무했으며, 주둔군도 후한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효문제가 밀어붙인 낙양 천도 이후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문벌에서는 소수 선비족이 한족에게 동화된 반면, 군대에서는 선비족들이 강하게 남아 있어 양대 민족이 서로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새로운 수도인 낙양으로 이주한 귀족들에게는 중앙 권력과 문벌귀족으로의 진입 등 온갖 혜택이 돌아간 반면 군, 특히 이전까지 후한 대접을 받았던 6진의 주둔군은 날이 갈수록 처우가 열악해지는 것을 느끼며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군인 계층의 분노가 마침내 대규모 반란으로 번지게 되었다.
육진의 난은 선비족 출신의 무장인 이주영(爾朱榮)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그는 권력을 잡은 이후 궁중 암투로 인해 제10대 경종 효장제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휘하 장수들이 이합집산을 벌이며 북위의 운명을 놓고 싸우게 되었다.
육진의 난 진압 결과 선비족의 이주영(爾朱榮) 집단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주영 집단의 휘하에는 고환(高歡), 우문태(宇文泰), 후경(侯景)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주영은 530년 궁중 암투로 인해 사위인 효장제에게 암살당했고, 이에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복수하기 위해 군을 일으켜 효장제를 시해한 뒤 원엽(元曄)(제11대)을 옹립했다. 그러나 방계로 정통성이 낮았던 원엽은 531년 이주세륭(爾朱世隆)에 의해 폐위되었고, 절민제(節閔帝) 원공(元恭)(제12대)이 옹립되었다.
이에 반발한 하북 각지의 명족들이 이주씨에 대한 반항 운동을 시작했고, 과거 휘하 장수였던 고환과 연계하여 안정왕 원랑(元朗)(제13대)을 추대하며 연합 정권을 수립했다. 532년 연합군은 업성을 점령했고, 이주조는 토벌군을 보냈으나 한릉산 전투에서 대패했다. 수도 낙양마저 연합군에게 함락당하자 이주씨 일족은 소멸했다. 낙양에 입성한 고환은 이주씨가 세웠던 절민제(전폐제) 원공과 과거 옹립했던 후폐제 원랑을 함께 폐위시키고, 새로 효무제 원수(제14대)를 옹립했다.
고환은 진양에서 마음대로 북위 조정을 주물렀다. 효무제는 고환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낙양에서 탈출하여 장안으로 도망가 우문태(宇文泰)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에 고환이 황족 원선견(元善見)을 추대하면서 화북 지역에는 효무제를 받아들인 우문태 세력과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한 고환 세력이 동·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북위는 고환의 동위(東魏)와 우문태의 서위(西魏)로 분열했다. 고환은 수도를 동쪽의 업(鄴)으로 옮겼고, 옛 북위의 수도였던 낙양은 동위와 서위 양국의 최전선 지대로 바뀌며 잿더미가 되었다.
동위와 서위는 여전히 원씨들이 황제였으나, 둘 다 고환과 우문태의 꼭두각시 내지 허수아비 황제들이었다. 결국 고환의 차남인 현조 문선제 고양이 효정제를 폐위하여 동위는 북제가 되었고(550), 우문호에 의해 공제 원곽이 폐위되고 우문태의 적자이자 3남인 효민제 우문각이 즉위하면서 서위는 북주가 되었다(557). 이후 북주의 젊은 황제인 고조 무제 우문옹이 북제의 암군인 후주 고위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했다(577). 북주와 남조의 진나라(陳)는 대립하다가 북주의 어린 황제인 정제 우문천을 폐위한 고조 문제 양견이 수나라를 세우고 진나라의 암군 진숙보를 멸망시키면서 서진의 멸망 이래로 분열된 남북조를 통일했다.
역대 탁발부 지도자들과 대나라 군주들이다.
어째서인지 북위는 쉰 살 넘게 산 황제가 없다. 단순히 단명한 것을 넘어 어린 나이에 즉위-젊은 나이에 사망-다시 어린 나이에 즉위-다시 젊은 나이에 사망이라는 후한 중후반이나 동진이 연상되게 할만큼 단명이 잦았다. 남안왕을 제외하고 도무제부터 효명제까지만 평균을 내보면 북위의 황제들은 평균 12세 즈음에 즉위해서 18년 정도 재위한 뒤 30세 즈음에 사망했다.(사실 이것도 태무제로 인해 평균이 좀 올려진 것이다.)
1. 개요[편집]
오호십육국시대 말기 탁발선비족이 세운 왕조로 중국 중세사의 한 흐름을 만들었다.
선비족은 영웅 단석괴 이후, 지속적으로 후한과 서진을 공격했고 5호 16국시대의 혼란을 틈타 남진해 국가를 세웠다. 북위는 5호 16국시대 후기에 등장하여 제3대 세조 태무제때 화북을 통일하고 남북조시대를 형성했으며, 후대의 수·당 제국의 바탕을 이루었다. 수도는 지금의 다퉁이었다가 제7대 고조 효문제 때 낙양으로 천도했다.
거란의 요나라, 여진·만주의 금나라 및 청나라, 몽골의 원나라와 같은 '정복왕조' 국가들이[2] 여러 제도적인 노력[3] 을 통해 지배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반면, 북위는 제7대 효문제 시절 성족상정을 실시, 선비족의 성씨를 중국식으로 개칭하고 중국 문화를 크게 받아들였다.(한화정책) 북제와 북주 시절에는 이 조치를 다시 되돌리고 한인 귀족들에게 선비족의 성씨를 하사하기도 했으나(호화정책), 선비족의 한화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수·당의 지배 계급인 관롱집단을 한화된 선비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호·한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북위가 일방적으로 중국 문화에 동화된 것은 아니다. [4]
당대의 국호는 그냥 위(魏) 혹은 대위(大魏)였고, '북위'라는 표현은 이전 시기 전국시대의 위나라나 삼국시대의 조위와 같은 여타 '위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이 붙인 표기 방식이다. 즉 당대를 바탕으로 한 소설과 사극에서 '북위'로 자칭하는 표현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라는 이야기이다.
또는 황실의 성씨를 국호 앞에 붙여 탁발위(拓跋魏) 또는 원위(元魏)라고 부르거나[5] 북방 이민족의 위나라라서 호위(胡魏), 시기적으로 나중에 등장한 점을 감안하여 후위(後魏)라 부르기도 하는데, 막판에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북위 표기가 통용되고 있다. 애당초 중국 24사 정사에 《위서》가 《북위서》로 들어가 버렸다. 다만, 주변국에서 타브가치라고 부른 사례가 있기에 고유 명칭은 '타브가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2. 역사[편집]
2.1. 건국[편집]
선비족의 한 갈래인 탁발선비(拓跋鮮卑)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나라였다.[6]
315년 사마씨의 서진 정권으로부터 하사받았던 기존의 국호인 대(代)[7] 를 386년 태조 도무제 탁발규가 위(魏)'로 바꾸고 칭제건원했다. 탁발선비족이 예전에 조위에게 조공을 바쳤던 적이 있고, 옛 조위가 처음 시작된 봉토였던 하북에 도읍하여 '위나라'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일단 북위 사람들은 서진으로부터 분봉받은 대나라의 후예로써 자신들이 옛 서진을 이은 진짜 중원의 정통왕조라고 생각했고, 남쪽의 동진 등 한족의 남조는 섬 오랑캐(島夷)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때문에 《북위서》 같은 이 시기 사서에 동진의 시조인 중종 원제 사마예를 두고, 우금과 사마예의 어머니인 하후광희가 사통해 낳은 아이가 사마예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거나 동진은 가짜 사마씨라는 의미로 참진(僭晉)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동진의 정통성 부정과 본인들의 정통성 숭조의 이유로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후연(後燕)의 황제 모용수는 탁발선비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쳐들어왔지만 도리어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며 제대로 자존심을 구겼다. 북위는 이를 계기로 힘의 균형이 역전되기 시작한 틈을 타 397년 후연의 수도 중산을 무너뜨리면서 본격적으로 화북에 진출하기 시작했다.[8]
2.2. 정복군주 세조 태무제의 화북 통일[편집]
제3대 황제인 세조 태무제 시기에 북하, 북연과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했다. 이때 한족 관료로서 북위 조정에 몸담고 있었던 최호의 국사필화(筆禍)사건이 터져 청하 최씨 일가 및 그와 관련된 한족 귀족 세력들이 대거 처형 및 숙청되었다. 그 후 북위는 남조와는 달리 황제권이 귀족과 대등하거나 좀 더 우위에 있는 경향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이 남북조 간 국력이 차이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남조의 경우, 귀족들의 집안 싸움 + 황실의 개판 정치로 나라가 도통 하루도 조용하질 못했다.
다만 북위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보이는데 예를 들어 북위의 역대 군주들은 기록이 좀 적다. 남조의 경우 유송 전폐제의 재위기간은 1년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지른 악행이 빼곡히 기록되었지만 북위의 황제들은 도무제, 태무제, 효문제 등 몇몇만 빼면 기록이 부실하며, 특히나 북위의 황제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듯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젊은 나이에 붕어했다. 비슷하게 전한 말기, 후한 중기~말기, 조위 말기, 손권 사후의 오나라, 남조의 역대 왕조, 북제, 북주 등의 사례를 들어 보면 이는 북위 역시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없을 수가 없는 나라인 것을 암시한다. 특히나 북위 말기에는 호태후와 숙종 효명제(제9대) 간의 권력 다툼, 호태후의 효명제 독살, 이후 효명제의 딸을 황제로 추대했다가 원조로 바꾼 일, 근친상간을 한 제14대 효무제 등 북위 황실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또 분열 이후의 북제와 북주 황실도 막장[9] 인 걸 감안하면 북위 역시도 막장끼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실 이게 결정적인 문제인데 땅만 보면 남조가 북조보다 더 강할 거 같지만 실상 미개척지도 많았고 앞서 말한 대로 귀족들이 사분오열되어서 강역에 비해 실제 지배 범위는 좁았다. 현대 중국의 경우, 옛 남조의 중심지인 장쑤성, 저장성, 상하이시 등 강남 지방이 중국에서 제일 잘 살고 인구가 많은 지역이긴 해도 중국 전체로 봤을 때 이들 강남 지역과 광둥성을 제외하면 양쯔강 이남보다 이북의 인구밀도가 훨씬 높은데 당대엔 오랜 기간 더 개발되어 온 쪽이 북조의 화북지역이었으므로 당연히 기존의 발전도를 토대로 국력의 우위를 점했을 것이 당연하다.
2.3. 고조 효문제의 한화정책[편집]
5세기 말 제7대 고조 효문제 시기에 적극적인 한(漢)화정책을 추진했는데,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문제가 강력하게 실행한 한화정책으로 인해 권력에서 소외된 비(非)한화 선비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523년,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된 육진의 대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2.4. 육진의 난(북진의 난)[편집]
6진(六鎭)이란 북방의 몽골계 유목제국인 유연(柔然)을 방어하기 위해 낙양 천도 이전의 원래 수도인 평성(平成, 지금의 다퉁 시) 부근에 설치한 군사 도시를 말한다.
본디 낙양 천도 이전의 6진은 수도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귀족 중에서도 최상급의 엘리트들이 대거 복무했으며, 주둔군도 후한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효문제가 밀어붙인 낙양 천도 이후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문벌에서는 소수 선비족이 한족에게 동화된 반면, 군대에서는 선비족들이 강하게 남아 있어 양대 민족이 서로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새로운 수도인 낙양으로 이주한 귀족들에게는 중앙 권력과 문벌귀족으로의 진입 등 온갖 혜택이 돌아간 반면 군, 특히 이전까지 후한 대접을 받았던 6진의 주둔군은 날이 갈수록 처우가 열악해지는 것을 느끼며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군인 계층의 분노가 마침내 대규모 반란으로 번지게 되었다.
육진의 난은 선비족 출신의 무장인 이주영(爾朱榮)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그는 권력을 잡은 이후 궁중 암투로 인해 제10대 경종 효장제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휘하 장수들이 이합집산을 벌이며 북위의 운명을 놓고 싸우게 되었다.
2.5. 북위의 동·서 분열[편집]
육진의 난 진압 결과 선비족의 이주영(爾朱榮) 집단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주영 집단의 휘하에는 고환(高歡), 우문태(宇文泰), 후경(侯景)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주영은 530년 궁중 암투로 인해 사위인 효장제에게 암살당했고, 이에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복수하기 위해 군을 일으켜 효장제를 시해한 뒤 원엽(元曄)(제11대)을 옹립했다. 그러나 방계로 정통성이 낮았던 원엽은 531년 이주세륭(爾朱世隆)에 의해 폐위되었고, 절민제(節閔帝) 원공(元恭)(제12대)이 옹립되었다.
이에 반발한 하북 각지의 명족들이 이주씨에 대한 반항 운동을 시작했고, 과거 휘하 장수였던 고환과 연계하여 안정왕 원랑(元朗)(제13대)을 추대하며 연합 정권을 수립했다. 532년 연합군은 업성을 점령했고, 이주조는 토벌군을 보냈으나 한릉산 전투에서 대패했다. 수도 낙양마저 연합군에게 함락당하자 이주씨 일족은 소멸했다. 낙양에 입성한 고환은 이주씨가 세웠던 절민제(전폐제) 원공과 과거 옹립했던 후폐제 원랑을 함께 폐위시키고, 새로 효무제 원수(제14대)를 옹립했다.
고환은 진양에서 마음대로 북위 조정을 주물렀다. 효무제는 고환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낙양에서 탈출하여 장안으로 도망가 우문태(宇文泰)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에 고환이 황족 원선견(元善見)을 추대하면서 화북 지역에는 효무제를 받아들인 우문태 세력과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한 고환 세력이 동·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북위는 고환의 동위(東魏)와 우문태의 서위(西魏)로 분열했다. 고환은 수도를 동쪽의 업(鄴)으로 옮겼고, 옛 북위의 수도였던 낙양은 동위와 서위 양국의 최전선 지대로 바뀌며 잿더미가 되었다.
동위와 서위는 여전히 원씨들이 황제였으나, 둘 다 고환과 우문태의 꼭두각시 내지 허수아비 황제들이었다. 결국 고환의 차남인 현조 문선제 고양이 효정제를 폐위하여 동위는 북제가 되었고(550), 우문호에 의해 공제 원곽이 폐위되고 우문태의 적자이자 3남인 효민제 우문각이 즉위하면서 서위는 북주가 되었다(557). 이후 북주의 젊은 황제인 고조 무제 우문옹이 북제의 암군인 후주 고위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했다(577). 북주와 남조의 진나라(陳)는 대립하다가 북주의 어린 황제인 정제 우문천을 폐위한 고조 문제 양견이 수나라를 세우고 진나라의 암군 진숙보를 멸망시키면서 서진의 멸망 이래로 분열된 남북조를 통일했다.
3. 여담[편집]
- 르네 그루세의 명저인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는 북위가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에 비견되는 '중국의 보호자'로 묘사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5호의 중원 침입을 유사한 선상에 놓고, 그러한 분열 양상을 통합하여 안정시킨 국가였던 프랑크 왕국과 북위로부터 일정한 알레고리를 포착해 낸 듯하다.
- 북위는 고구려의 해동패자로서의 지위를 인정해 고구려 왕에게 정동장군(征東將軍)이란 고위 관직을 하사했다. 또한 고구려 사신을 남조의 사신 다음으로 대했으며 489년(장수왕 77년, 북위 고조 효문제 19년)엔 남조 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동급으로 대해 남조 사신이 크게 항의한 바 있었다.
- 중국 역사상 유례없이 독실한 불교 국가였으며, 이 시대에 만들어진 윈강 석굴과 룽먼 석굴, 둔황석굴이 유명하다. 그럼에도 태무제 같은 억불군주가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태무제 시기에 벌어진 법난때는 다른 때와는 달리 승려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등 그 수위가 제일 셌다.
- 황태자로 책봉된 황자의 생모를 처형시키는 자귀모사(子貴母死)라는 냉혹한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훗날 외척의 세도를 막기 위한 처사였다고 한다. 아무튼 북위 고조 효문제의 유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음 황제인 제8대 세종 선무제 때 자귀모사 제도는 시대에 뒤쳐지는 제도라면서 철폐되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제1대 황제였던 태조 도무제가 자귀모사라는 명분하에 태자였던 탁발사의 어머니를 처형했다. 탁발사가 밤새 대성통곡을 하자 도무제는 태자가 나약하다며 오히려 죽이려고 들었다. 그러자 태자 탁발사는 밤에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 잠적해버렸다. 이후 도무제가 없어진 태자를 대신하여 아들들 중 하란부 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탁발소를 제위에 앉히려고 했다. 자기 어머니도 죽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탁발소는 급히 외가인 하란부로 달려가 이를 알려 하란부 휘하의 군사를 모았고, 새벽에 몰래 황궁으로 쳐들어가 부황인 도무제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북위의 창업 군주가 자귀모사 제도로 인해 외척도 아닌 자기 자식에게 죽은 것이었다. 탁발소가 어머니도 살리고 제위에 오르려는 순간, 잠적했던 폐태자 탁발사가 외척의 군대를 이끌고 대역죄인 소탕을 명분으로 삼으며 갑자기 나타나 하란부와 탁발소 일당을 쓸어버리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제2대 황제인 태종 명원제였다. 명원제는 하란부의 쿠데타 사건을 통해 외척의 위험성을 깨달아 자기 어머니를 죽인 자귀모사 제도를 오히려 더 강화시키고 공고히 다져갔다. 이후 제8대 황제인 세종 선무제가 없앨 때까지 자귀모사 제도는 중단되는 일없이 실행되었다.
- 동성왕 치세하의 백제를 무려 세 차례나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최 왜 침공했는지, 육로로 침공했다면 왜 고구려가 길을 열어줬는지 의문이고, 주로 기마 부대로 편성된 유목민 군대가 해상으로도 가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와 침공의 진위 여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관련 내용은 백제-북위 전쟁 문서 참고.
- 위진남북조에서 진나라와 더불어 가장 오래 존속된 왕조이기도 하다. 자그마치 148년이었다. 1위는 진나라로 156년 동안 존속했다.[14] 허나 이는 좁게 따진 것이기에 북위의 전·후신인 대나라, 동·서위까지 합쳐서 계산한다면 북위는 200년이 넘기에 북위가 앞선다.
- 동진 멸망기의 인물인 사마금룡이 북위 귀족 출신의 부인과 함께 묻힌 사마금룡묘가 발굴된 바 있다. 동진이 멸망할 때 북위로 망명한 한족 귀족 남성과 선비족 귀족 여성의 결합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한다
4. 추존 황제[편집]
역대 탁발부 지도자들과 대나라 군주들이다.
- 탁발모: 성황제
- 탁발대: 절황제
- 탁발관: 장황제
- 탁발루: 명황제
- 탁발월: 안황제
- 탁발추인: 선황제
- 탁발리: 경황제
- 탁발사(俟): 원황제
- 탁발사(肆): 화황제
- 탁발기: 정황제
- 탁발개: 희황제
- 탁발쾌: 위황제
- 탁발린: 헌황제
- 탁발힐분: 무성황제
- 탁발역미: 시조 신원황제
- 탁발사막한: 문황제
- 탁발실록: 장황제
- 탁발작: 평황제
- 탁발불: 사황제
- 탁발녹관: 소황제
- 탁발의타: 환황제
5. 역대 황제[편집]
어째서인지 북위는 쉰 살 넘게 산 황제가 없다. 단순히 단명한 것을 넘어 어린 나이에 즉위-젊은 나이에 사망-다시 어린 나이에 즉위-다시 젊은 나이에 사망이라는 후한 중후반이나 동진이 연상되게 할만큼 단명이 잦았다. 남안왕을 제외하고 도무제부터 효명제까지만 평균을 내보면 북위의 황제들은 평균 12세 즈음에 즉위해서 18년 정도 재위한 뒤 30세 즈음에 사망했다.(사실 이것도 태무제로 인해 평균이 좀 올려진 것이다.)
5.1. 비정통[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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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골어족이나 튀르크어족에 속했다고 여겨지는 언어이나 사용자가 없는 사어이기에 둘 다 정설에 이르지는 못한 상황이다. 다만 동호계는 몽골계의 선조로 보기 때문에 보통은 몽골어족쪽을 더 유력하게 본다.[2] 정복왕조는 카를 비트포겔의 이론이었다. 사회학을 기반으로 하여 유목왕조와 한족왕조를 설명한 서구 학계의 이론이다.[3] 고유 문자의 제정이나 2원적인 통치 조직의 형성 등[4]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진인각은 선비족 지배 계층들이 수·당을 건국했다는 학설을 지지했다. 서양학계에서는 북주와 북제를 프랑크 왕국에서 갈라진 메로빙거 왕조 및 카롤링거 왕조 등과 비교한다.[5] 이 경우 삼국시대의 위나라는 조위(曹魏)가 된다.[6] 탁발선비는 종종 타브가치(tabgachi)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이 둘은 물론 동일한 집단의 다른 표기로 여겨지나 엄밀한 의미에서 타브가치와 탁발선비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즉 타브가치의 원 발상지는 대흥안령 산맥 북쪽의 알선동(嘎仙洞)이었는데, 이후 북중국과 인접한 내몽골 지역으로 집단이 이동하면서 서요하와 동몽골 지역에 본래 거주하던 선비족 집단과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 3권 -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의 <알선동> 파트 참조.[7] 대나라는 본래 춘추전국시대 산서성 북쪽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국가였다.[8] 중산이 함락당한 이후 후연은 상당한 내분을 겪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도무제 탁발규에게 얻어맞고 난 시기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아 완전히 분열되고 말았다. 그 여파로 인해 요서의 북연과 산동의 남연으로 나뉘었다.[9] 북주의 경우 우문호의 전횡과 선제 우문윤의 실정이 있고, 발해 고씨의 북제는 제대로 된 황제 노릇한 사람은 죄다 비정상이었다.[10] 북위 황실도 성을 탁발(拓跋)에서 원(元)으로 고쳤다.[11] 조정내에서 30세 이하의 관료가 호어를 쓰다 적발될 경우, 불이익을 줬다.[12] 선비족 귀족들 간의 등급을 정하고, 같은 급끼리의 귀족들만 결혼 가능케 하여 선비족들끼리 뭉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13] 제천 의식의 일종.[14] 서진과 동진은 영토나 주변 정세가 달라졌을 뿐 근본적으로 황실의 성씨, 정치체제 모두 동일한 왕조였다. 당장 정사인 《진서》(晉書)도 서진과 동진을 별도의 왕조로 보지 않고 모두 아울렀다.[15] 탁발보근의 아들. 이름은 실전되었으며 탁발보근이 죽은 뒤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그해 12월에 사망함.[16] 329년 탁발흘나가 도망가자 추대받아 재위.[17] 북위 문성제에 의해 추존됨.[18] 북위 효장제에 의해 추존됨. 추후 절민제 때 폐지.[19] 북위 효장제에 의해 추존됨.[20] 북위 효무제에 의해 추존됨.[21] 양무제에 의해 괴뢰 황제로 책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