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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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 | Qi Dynasty


파일:북제-남진.png

지도의 연한 주황색 부분 (557년 기준)
550년 ~ 577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동위
북주
별칭
북제(北齊), 후제(後齊), 고제(高齊)
위치
중국 화북 동부
수도
업성(鄴城) (제1수도)
진양(晉陽) (제2수도)
면적
910,000km² (572년 기준)
인구
22,000,000명 (564년 기준)
민족
선비족, 한족
언어
중세 북방 중국어, 한문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화폐
오수전
정치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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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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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조 문선제 (550년 ~ 559년)
숙종 효소제 (560년 ~ 561년)
세조 무성제 (561년 ~ 565년)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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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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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북위의 분열
2.2. 북제의 건국
2.3. 후경의 양나라 귀순
2.4. 고양의 공포 정치
3. 쇠퇴와 멸망
3.1. 후주 고위와 북제의 멸망
3.2. 북제 멸망의 원인
3.3. 부흥운동
4. 역대 군주
4.1. 발해 공작
4.2. 고제 국왕
4.3. 북제 황제



1. 개요[편집]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의 왕조다. 존속 기간은 550년 ~ 577년. 다른 제나라랑 구분키 위해 북제, 호제(胡齊)[1], 고제(高齊)라 일컫기도 한다.

북위동위서위로 갈라졌을 때, 동위의 효정제 원선견이 권신 고환을 530년 평양군공에 책봉하면서 공국(公國)으로 건국되었으며 549년 고환의 뒤를 이은 고징이 제왕(齊王)으로 책봉되면서 왕국(王國)으로 격상됨과 동시에 국호가 제정되었다. 이로서 제 왕국의 명목상 종주국인 동위는 껍데기만 남았으며, 550년 고징의 뒤를 이은 2대 제왕 고양에게 동위 황제 효정제가 선위하면서 원위를 멸망시키고 정식 제국으로 개창되었다

577년 서위의 후신인 북주에게 멸망당했다.

스스로는 제나라라고 칭했지만 소도성이 세운 남조의 제가 같은 이름이었기에 북제라고 한다. 그래서 육조의 제를 남제라고 부르기도 한다.[2] 다만 남제는 북제가 세워지기 50년 전인 502년에 멸망한 상태여서 둘이 겹치지는 않는다.

오늘날에는 중국사의 수많은 단명 왕조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 짧은 기간 동안 고구려와는 거란과 유민 송환 문제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북주랑 같이 돌궐에게 조공하였으며, 신라 진흥왕을 책봉하기도 하였다. 북제가 존재했던 시기는 신라 진흥왕(540년 ~ 576년)의 재위 기간과 정확히 겹친다. 신라는 564년과 572년에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무성제 고담은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에 봉했다.


2. 역사[편집]



2.1. 북위의 분열[편집]


북조의 북위는 효문제 원굉의 정책으로 강대해 졌으나, 나중에 선무제 원각의 황후였던 호태후가 나라를 말아먹고, 거기에 육진의 난이 일어나 위기에 빠졌다. 호태후는 매우 음란한 여자로 자신의 친아들 효명제 원후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독살하고, 원후의 딸, 즉 자신의 손녀를 아들로 속여 황제로 세웠다. 당시 이주영(爾朱榮)[3] 장군이 호태후와 '가짜 황제' 원소, 대신들 2,000여 명을 황하에 처넣거나 처형하는 하음의 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은 다음 효문제의 조카 효장제 원자유를 세웠다. 이주영은 효장제에게 자신의 딸이자 효명제의 후궁이었던 이주씨(이주영아)를 시집보냈다. 효장제는 이주영을 암살하기 위해 이주씨가 아들을 낳았다는 거짓 소문을 내는데 이주영은 속아서 입궁했다가 효장제에게 암살당했다.[4]

이로써 효장제가 실권을 차지하는 듯 했으나, 이주영의 조카 이주조가 다시 난을 일으켜 효장제를 죽여버렸다. 하지만 이주영의 부장 고환이 이주조를 쳐부수고 난리를 수습한 다음 대승상, 대장군에 올라 실권을 잡았다. 당시 황제였던 효무제[5]는 고환에게 모욕을 당하자 참지 못하고 고환을 치려다가 실패하자, 을 타고 홀로 수도 낙양에서 장안으로 도망가버렸다. 고환은 추격했지만 잡지 못하자 효무제를 불려들였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효무제의 친척[6]인 원선견을 황제로 세우니, 북위는 효무제를 옹립한 우문태서위와 효정제를 옹립한 고환의 동위로 분열되었다.


2.2. 북제의 건국[편집]


동위의 효정제 원선견은 정말 무기력한 황제였다. 원래 고환은 효무제의 도망으로 협천자이령제후[7]를 할 유리할 조건을 놓친 경력이 있어서 겉으로나마 원선견을 공경했다. 무엇보다 고환은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아뢰고, 감히 권력을 독점하지 않았으며 연회에서는 부복을 하고 축수를 했다. 원선견이 법회를 열고 수레를 타고 향불을 피우면서 가면 고환은 향로를 받쳐들고 도보로 그의 뒤를 따르니 고환의 부하들 역시 공손했다.

하지만 547년, 고환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장남 고징은 오만하여 연회에서 황제에게 술을 따르는 것도 군신 간의 예의가 없었다. 이에 화가 난 원선견은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이 어찌 이렇게 삶을 도모한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런데 고징에게 황제로서는 당연한 호칭인 짐이라고 했더니 짐? 짐은 무슨 놈의 개대가리 같은 짐이야! 개나 줘버릴 짐 같으니!라는 치욕적인 말을 들었다. 즉, 너따위가 무슨 황제냐?라고 공경대부 앞에서 엄청난 망신을 당한 것이다. 거기에 고징이 중서 황문랑 최수서에게 주먹으로 세 차례나 구타를 하도록 명하니 그대로 당했으나, 오히려 그에게 비단을 내려 사과해야 했다.

물론 원선견이 아주 바보는 아니라서[8] 한편으로는 몰래 고징을 죽이려 했지만 세력이 부족하여 결국 발각되었다. 이에 고징이 군대를 이끌고 입궁하면서 폐하께서 어찌하여 반역을 생각하십니까?라고 따졌다. 이에 원선견은 정색을 하며 '예로부터 신하가 군주를 배반한다는 말은 있으나, 군주가 신하를 배반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자신이 반역을 꾀하면서 어찌 짐을 책망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이에 고징은 탁자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대성통곡하면서 사죄하였다. 그러나 사흘 후, 원선견은 고징에 의해 함장당에 연금되었다. 원선견은 하도 갇혀 있다보니 바람 좀 쐬려고 가끔씩 말을 탔는데 고징은 원선견이 효무제처럼 달아날까봐 겁이 나서 감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걸 고징의 심복이 목격하자 심복에게 대장군(고징)께서 말을 타시지 말랍니다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때마침 고징이 음식 나르는 노비 난경(蘭京)[9]에게 암살당하자 원선견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징의 동생 고양이 태연한 기색으로 진압군을 지휘해 뒷수습을 말끔히 하고, 권력을 재빨리 장악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원선견은 결국 고양에게 선양을 해서 목숨이라도 건지려고 했고 중산왕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끝내 고양에게 짐독으로 살해당했다. 일단 원선견은 성 북쪽에 매장되었으나, 얼마 후에 무슨 생각인지 고양이 원선견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업성을 흐르는 장수에 던져 버렸다.


2.3. 후경의 양나라 귀순 [편집]


이런 혼란 속에 고징 시절 하남태수였던 후경이 배신하여 하남의 영지를 가지고, 남조 양나라소연에게 귀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548년). 고징은 모용소종을 파견하여 후경과 양나라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하남을 되찾았다.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양나라가 동위와 수교를 맺자 위기에 몰린 후경은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작은 영토 하남을 노리다가 양무제의 말년도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양나라는 후경이 살해된 뒤에도 북제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다가 이에 반발한 진패선이 친북제파들을 죽이고, 진(陳)나라를 세우면서 일단락되었다.


2.4. 고양의 공포 정치[편집]


북제의 초대 황제인 문선제 고양은 위에서 잠시 언급한 고환의 차남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형 고징이 549년 노비 난경에게 암살당하자 침착하게 난리를 수습하고 권력을 강화한 다음 선양받았다.

고양은 과단성과 능력이 있어 능력 있는 신하들에게 나라를 맡겨 안정시켰다. 고양은 정신이 멀쩡할 때는 이성적이고 유능한 왕이었지만 문제는 술이 취하면 그야말로 미치광이 사이코패스가 된다는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고양이 말년에 갈수록 술취한 날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술 취하면 살인 의욕이 치솟는지라, 죄수들을 살인용 더미로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그 살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중에는 그냥 재판 받던 사람까지 넣어야 할 정도였다. 살인용 더미를 데리고 다닐 것을 추천한 대신도 두 번이나 끔살당할 뻔할 정도였으니 죄수들이 당할 운명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고양은 원선견의 을 강에 쳐넣고, 북위의 원씨 일족 700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도살했다. 이때 갓난아이도 위에서 떨어뜨려 창으로 찔려 죽이거나 불태워 죽이고 시신들은 모두 장수에 버렸다. 그 후 장수에서 잡힌 물고기 뱃속에서 사람의 손가락이나 손톱이 나오는 경우(...)가 자주 생겨서 오랫동안 성 사람들은 장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태평광기에 따르면 고양은 광무제가 중흥할 수 있었던 것은 (왕망이) 유씨를 모두 주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겼기에 원씨를 대대적으로 주살했는데, 이때 죽은 자가 1,0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시신은 장수(漳水)에 버렸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다 (물고기 뱃속에서) 손톱이 나왔기에 원랑어(元郎魚)라 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차마 먹지 못하였다. (원씨 가운데) 오직 원만(元巒), 원장춘(元長春), 원경안(元景安)의 세 집안만이 주살을 면했는데, 원만은 그의 딸을 상산왕 고연(高演)의 비로 삼았고, 원장춘과 원경안 등은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었다. 원경안의 형 원경호가 차라리 부서진 옥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와는 되지 않겠다[10]라고 말했다. 원경안이 그 말을 아뢰었더니 고양은 다시 죽였다. 이로부터 원씨의 자손들은 나이와 귀천에 상관없이 살아남지 못했다.

또 고양은 술을 마시고 친어머니 누씨를 모독한 패륜아이기도 했으며[11] 아버지 고환의 첩이었던 이주씨[12]를 범하려다가 실패하자 로 죽였다. 또 자신의 첩 설씨가 예전에 다른 남자와 사통했다는 이유로 찢어 죽인 뒤 그 인피악기를 만들고,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살육하는 등 공포 정치를 한 폭군이었다. 무엇보다 나체밀가루로 분칠을 하고 발가벗고 다녔으며 높은 대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즐기는 등 그냥 미친놈이었다.

고양은 결국 재위 9년 만에 죽었으나,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 연호가 천보(天保)였다. 그나마 당시에는 '정치가 위에서 군주는 어두웠지만 아래에서 능신들에 의해 맑았다.'라고 평가받았다.

3. 쇠퇴와 멸망[편집]


고양의 장남 폐제 고은이 그의 뒤를 이었지만 "폐제"에서 짐작하듯 다음해 고환의 6남 효소제 고연이 찬탈해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고은은 고양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다르게 학문을 좋아하고 바른 사람이었지만, 심약하여 고양이 매우 싫어했다. 한번은 금봉대에서 죄수들의 목을 자르라고 했는데 결국 자르지 못했고 채찍으로 맞았다. 이때부터 말더듬이가 되고, 발작을 일으키며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한다. 고양도 이를 우려했는지 고연에게 미리 '네가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면 마음대로 하되 부디 내 아들을 죽이지는 말아라!'라고 말할 정도였다. 고연은 고양의 유언대로 찬탈은 했으나, 결국 조카 고은을 살해하고 말았다.

그래도 고연은 능력이 있어서 고양의 폐정을 개혁하고, 크고 작은 정무들을 모두 자신이 보았다. 그러나 고연 역시 다음해에 사망했는데, '태자는 죄가 없으니 네가 봐서 좋을 대로 처리하되 앞 사람을 본받지 말라'라고 고환의 9남 무성제 고담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고담이 뒤를 이었는데 고담도 형 고양과 판박이였다. 고담은 형 고연을 본받아 자신이 황제가 되었지만 결국에는 조카 고백년을 죽여버렸다. 무엇보다 고양은 잔인하고 음란했지만 능력은 있는 군주였으며 고연은 능력도 있고 부지런한 군주였으나, 고담은 무능한 군주였으며 동시에 음란하고 잔인하기만 했다. 고담이 고양의 황후였던 자신의 형수 이씨를 범해 딸을 낳게 했는데, 이씨가 부끄러워 딸을 방치해 죽게 하자 화가 난 고담은 네 년이 내 딸을 죽였으니 네 아들도 죽이겠다라며 고양의 아들 고소덕을 활로 쏴서 죽이고, 능력 있는 고연의 아들 고백년도 결국 제거했다. 그런 다음 이씨를 녹초가 되도록 구타하다가 초주검이 되자 수레에 실어 비구니로 만들어버렸다.

고담은 부역을 가중시키고, 사치를 누렸는데, 고양은 그나마 능력이라도 있었지만 고담은 아무 능력도 없었다. 565년 4월, 아들인 고위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제로서 정무를 보면서 음란사치에 빠졌고, 568년 12월 업궁의 건수당에서 사망했다. 결국 고담의 아들 후주 고위 대에 이르러 북제는 멸망하고 일족은 장애인들을 제외하면 북주 우문씨에게 모조리 멸족당하고 만다.


3.1. 후주 고위와 북제의 멸망[편집]


사실 동쪽의 북제는 처음에는 부강했었다. 중원이라 불리는 지역 대부분을 점거하면서[13] 함곡관을 경계로 평야 지대가 모두 북제의 영토였다. 특히 바다에 면하는 황하 하류를 끼고 있었기에 농산물이 풍부했다[14]. 돌궐과 손을 잡고 거란을 견제하기도 했다. 고위만 해도 폐제 고은-효소제 고연-무성제 고담의 짧은 재위 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11년을 황위에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망할 나라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북제는 북주에 비해 한족세력이 강한 나라였다. 이주영에게서 분립할 때, 고환은 발해와 산동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자립할 수 있었다. 또한 북위의 한화정책 영향을 강하게 받아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체제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또한 남조와 가까워 선진문화의 수입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북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진양에 주둔하는 선비족 무인 세력의 힘이 꼭 필요했고 이들이 북제 황실 권력의 원천이었으므로 북제는 선비족 무인들과 한족 귀족세력의 대립에 고질적으로 고통받아야 했다.[15] 양측은 서로 숙청할 것을 황제에게 계속 충동질했는데, 때문에 근본적으로 진양의 선비족 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수 없고 업의 한족세력을 불신한 북제 황실의 입장이 북제의 공포정치와도 무관하지 않다. 반대로 북주는 뒤떨어진 문화와 강력한 선비족 세력을 바탕으로 부병을 이루어냈으니 북제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북제는 유리하게 시작했으나 선비족과 한족세력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선비족은 북주로, 한족은 남조에게 도망칠 위험을 계속 감수하고 살아야 했다. 문선제는 능력있는 황제였지만 이 둘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 결국 실패하였고 정치에 관심을 잃고 음주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북제의 문화와 체제는 수나라에게 넘어가 율령체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북주의 고답적인 주례체제는 당연히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고위의 후반기 치세가 문제였다. 고위가 화사개(和士開), 고아나굉(高阿那肱), 목제파(穆提婆), 한장란(韓長鸞) 등의 간신들을 신임하면서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특히 곡률광[16], 고숙[17]이라는 뛰어난 명장들이 이들의 참언에 의해 살해되었다. 선비족을 우대하고 한족의 율령 체계를 거부하는 공포 정치를 유지하면서 북제는 계속 쇠퇴하여, 결국 국력과 군사력으로 압도하였던 북주와 진나라에게 영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북제가 쇠약해져 가는 것을 지켜본 북주 무제 우문옹(宇文邕)은 출병을 결심했다. 575년 북주군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순식간에 영토를 잃고 말았다. 577년 후주는 장남 고항에게 양위하였고, 북주군의 추격을 피해서 도피를 하지만 결국에는 부하들이 배신하면서 3월 청주(青州)에서 유주 고항과 함께 북주군에게 생포되었다. 그 후, 북제는 멸망하였다. 북주는 고위를 온공(温公)으로 봉했지만, 577년 일족과 함께 살해했다.

결국 북제는 고위가 곡률광을 죽인 지 5년, 고장공을 죽인 지 3년 만에 멸망했다. 고위는 막판에 자신의 8살 난 아들 고항을 황제로 세우고 태상황을 칭했으나, 결국 항복했다. 그러나 반역죄로 모함받아 고추[18]로 입을 막아 질식사당하고, 고씨 황족들은 모조리 멸족당했다.[19] 그런데 후주 고위의 어머니이자 무성제 고담의 황후였던 호태후와 고위의 황후 목씨는 살아남았는데 이들은 북주의 수도 장안에서 기녀가 되었다. 남편 고담 못지 않게 음란하던 호태후는 화사개와 사실상 부부였으며 며느리까지 부추겨 장안에서 기녀가 된 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태후로 사는 것은 기녀로 사는 것보다 재미가 없다!"


비록 망국이지만 전직 태후와 전직 황후가 서비스한다는 소문에 해당 업소는 불야성을 이루었고, 그 후로도 호태후는 열심히 즐기다가 수나라 초기에 사망했다.

반면 북주의 무제 우문옹은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율령을 정비하고 국력을 강화했으니, 점차 국력이 역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북주의 율령이 과연 그렇게 찬양할 만한 것인가라는 의견도 있다. 단적인 예로 수문제 때 제도 정비에 북주의 율령보다도 북제의 율령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북주를 이어받은 수나라의 법제도의 기반이었던 형서요제가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법을 관장하는 관리들이 어려움이 있었고 형서요제에서 다루는 죄가 1537가지인데, 북제 법률서는 949가지이며 간결하고 요점을 추려서 이해하기 쉽다는 이유로 수나라의 법을 정비할 때 이를 참고했다고 한다.

3.2. 북제 멸망의 원인[편집]


보통 잘 알려진 일화로, '강을 끼고 대치하던 북제와 북주 사이에서 처음에는 겨울에 도강을 막기 위해 국력이 약한 북주가 얼음을 깼는데, 나중에는 북제가 얼음을 깨는 처지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실 원래부터 황하 동쪽 하동 분지가 북주 땅이었다. 원래는 하동이 동위 쪽이었는데 여기를 따인 시점부터 동위, 북제의 방어선의 부담이 가중되기 시작한다. 즉, 해당 일화에 나온 양측의 황하 경계 인근 북주도 아니라 서위 시절에 우문태가 점령한 땅이었던 것. 당장 북주의 명장 위효관이 지키던 옥벽성부터가 하동 땅이고 포판은 사원 전투 이후에 점령했다.

때문에 서위-북제의 경우엔 근본적으로 지형상으로 방위에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북제의 공식적인 수도는 업이지만 군사력의 집결지이자 북제 황제들이 실질적으로 기거했던 곳은 태원(진양)이다. 동위서위가 갈라진 534년 고환 시절부터 북제 황제들의 활동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태원과 업도 사이를 왕래하였다. 534년부터 북제가 멸망하는 577년의 43년 사이에 북제황제들은 양측 지역을 37회 왕래하였는데 진양에 머무른 기간이 약 29년, 업도에 머물렀던 시간이 14년으로 진양에 있던 기간이 업도에 있던 기간의 배이다. 문선제를 제외한 폐제효소제, 무성제, 고위는 모두 진양에서 즉위하였고, 만약 계승자가 태원에 없을 때는 진양으로 달려가 즉위하였다. 따라서 진양은 실질적인 수도였고 정치 중심의 소재지였다. 이러한 취약성이 있었지만, 원래 북위 군사력을 장악한 이주영의 본거지가 진양이기도 했고 북제 군사력의 근간인 육주선비(六州鮮卑)가 진양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북제 황제들은 진양을 버리고 업에 계속 머무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북제에게 있어서 진양은 말할 것도 없이 사새지지라 불리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하북이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양은 원래 이주 씨의 근거지였는데 육진의 난을 계기로 남하한 북진민들이 이주씨의 통제 아래 진양에 거주했다. 그 뒤 고환은 진양을 근본으로 삼아 황제를 통제했고 고징이 암살 당하자 고양이 진양에 갔다. 이후 북제가 건국되고 업도가 수도가 되었지만 진양의 군사적 중요성은 오히려 강화되었는데 때문에 북제 황제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진양에 머물렀는지 알 수 있다.[20] 진양이 군사적 중요성이 커진다쳐도 군사 중심지와 수도가 동일시할 필요는 없었지만 문선제가 업에서 즉위한건 진양의 훈귀들이 그의 즉위를 반대해서 그렇고 문선제도 즉위 후 원훈들의 묘에 즉위 사실을 보고해야 했다. 제나라 황제의 즉위는 강력한 군사집단인 진양의 훈귀 집단의 승인이 있어야했으므로 북제 황제들은 이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이다.

또 고위는 진양이 함락되면 업이 아닌 북삭주로 가려고 했다한다. 그 이유는 북삭주는 같은 종족인 선비 강병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업은 한인의 근거지로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제는 항상 한인과 선비족들의 알력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북제 말기 선비족을 우대하는 방침도 사실은 이들의 군사력이 북제를 유지하는 힘이었기에 버릴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북제 황제들은 강력한 군사 지도자로써의 모습을 연출할 필요가 있었고 무리하게 숙청을 하거나 후대에 폭군으로 보이는 짓들을 한 것도 이것에 영향이 없다고 볼 순 없다. 결국 이런 이유로 북제는 업에 도읍을 정하였지만. 그 군사상 중심은 진양에 두고 황제들이 항상 업과 진양을 오갔으며 북위가 말기에 낙양에 천도한 후 원래 근거지로부터 고립되었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노력하였다.

이곳이 공격에 취약한 곳이 되었던 이유는 북주의 수도 장안과의 사이가 거대한 평지로 연결되어 진격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즉 북제 입장에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아니다. 고환으로부터 우문태가 독립한 이후 장안과 진양 사이의 지역은 한번 승세를 타면 파죽지세로 상대국의 수도까지 순조롭게 진격할 수 있었다. 즉, 양측이 이 지역에서 붙은 거대한 회전에서 한번 이기면 그걸로 승패가 결정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양과 장안 사이의 지역은 서로의 급소를 겨냥할 수 있는 전략상 요충지였다. 그런데 만약에 북제가 황하 인근의 하동이라도 보전하고 있었다면 북제가 황하를 경계로 국정을 안정화 할 수 있었겠지만 거길 빼앗겼기에 북제 입장에선 진양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에 압력이 가중되었다. 물론 북제의 주력이 진양에 집중된 만큼 진주의 방어가 튼튼하기 때문에, 북주는 처음에는 낙양→업으로 공격하는 루트를 선택하지만, 계속 실패를 거듭했다. 나중에서야 북주는 북주 무제 우문옹이 루트를 바꾸어 진양을 직접 공격하면서 타격을 주려고 했고 이게 먹히면서 북제는 멸망한다. 요약하자면 북제의 주력이 진양에 집중했던 것은 북주의 공격에 유리했지만 반면에 북주의 공격을 받아 한 번에 붕괴될 경우 대치할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군사적으로 취약하였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동위-북제는 원래부터 서위-북주가 군사력이 강했고 실질적인 지형상의 우세도 북주가 가지고 있었지만 북제가 군주와 장수들의 역량으로 이를 잘 막아내는 처지였다. 육진의 난 이후 육진이 분해되어 버리면서 실질적으로 북위의 중심지였던 북제 지역의 군사력이 위태로워 진 것도 북제 열세의 이유였다. 즉 북제 입장에서는 지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대책이 별로 없는 상황이라 그냥 군주와 장군의 군사적 역량으로 정면 돌파해서 무조건 북주를 싸워서 이기는거 말고는 답이 없었다. 육진이 망하고 난 뒤엔 하북 어디나 돌궐과 북주의 사정권이니 내몽골 회복이나 남벌 성공 후 천도 외에는 답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21] 이런 상황에서 바로 위에서 보듯이 후주 고위가 당대의 명장들을 자기 손으로 숙청해버리는 등의 실책으로 나라를 신나게 말아먹었으니 형세 역전이 안 될 리가 없었다.

북제가 망할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고위는 우문옹이 공격해왔을때 기연지(祁連池)에서 황후 풍씨(풍소련(馮小憐), 고위가 아끼던 애첩), 고아나굉 등과 함께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보고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 구원병도 보내주지 않았다. 평양이 함락당하자, 고아나굉이 고위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고위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갔다. 우문옹은 고위의 군대는 여전히 강하다고 생각하고 후퇴하고 평양에는 양사언(梁士彥)을 남겨 지키게 했다. 우문옹은 얼마 후에야 다시 북벌했는데 이는 개전 초기에 북제가 우세했음을 시사한다. 북제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 평양을 공격했고 얼마 후 성벽에 구멍을 냈다. 다시 북제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바로 직전이었는데 이때 갑자기 고위는 공격을 멈췄다. 왜냐하면은 풍씨를 불러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유례를 찾기 힘든 막장 플레이에 평양은 북주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 상황에서 고위는 풍소련과 간신 목제파가 패닉 상태가 되어 도망가자고 하자 고위는 진양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진양으로 돌아온 고위는 사촌인 고연종(高延宗)과 고효형(高孝珩)에게 진양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삭주(朔州)로 도망가려 했지만 고연종은 이를 말렸다. 그러자 그는 먼저 태황태후 호씨와 아들 고항(高恆)을 먼저 삭주로 보냈다. 그런데 정작 북주군이 진양에 다다르자 그는 진양을 고연종에게 맡기고 자신은 삭주나 돌궐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매승랑(梅勝郎)의 제안으로 업성으로 도망 갔는데 고아나굉도 함께 갔다. 이 상황에 이르자 당옹(唐邕)을 비롯한 북제의 신하들은 도망가기 바쁜 고위보다 고연종이 황제에 오르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다. 그래서 결국 고연종은 사양하다가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아 비정통 황제로 남아 있다.

다음 날 북주군의 진양 공성전이 시작되었고 동문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고연종의 군대는 북주군을 막아 우문옹은 거의 죽을 뻔 했다. 하지만 고연종의 부대는 이 승리에 도취해 부대를 재편성하지 못했고 다음 날 북주의 공격으로 진양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북제 제2의 수도 진양의 함락은 북제의 정예 군사력이 모조리 소멸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북제 멸망이 기정사실화 됐음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 진양 함락 이후 북제가 저항하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진 것도 이 때문이다. 즉 진양과 그 주변에 북제의 정예부대가 포진하였고, 이들이 패하자 다른 지역의 군대를 차출하여 대항하기 어려웠던 것이 북제가 진정으로 패망한 원인이다.

이상의 내용은 '중국 북조 지방통치 연구(최진열)'와 '중국 중세 호한체제의 정치적 전개(박한제)'의 요약본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3.3. 부흥운동[편집]


577년 북제가 멸망한 후 북제의 영주자사 고보녕은 북주 우문옹의 회유를 거부하고 돌궐로 망명했던 북제 황족 고소의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부흥운동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북제 영토 대부분은 북주에게 넘어갔고, 북제 부흥운동 세력의 활동범위는 요서지역과 유주 일부에 그친 정도였다.

그러나 고소의는 580년 돌궐군의 배신으로 북주로 넘겨졌고, 촉 지역으로 유배보내졌다가 몇 년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고보녕은 583년까지 영주를 점거한 상태로 요서 일대에서 북주 - 수나라에 대항했지만 583년 수나라의 토벌로 세력이 와해된 뒤 도주하다가 부하의 손에 목숨을 잃으면서 북제의 부흥운동은 끝나게 된다.

4. 역대 군주[편집]



4.1. 발해 공작[편집]


대수
시호
성명
재위 기간
추존
발해문목공(渤海文穆公)
<헌무왕 추존>
고수생(高樹生)
-
1대
-
고환(高歡)
530 ~ 531


4.2. 고제 국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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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시호
성명
재위 기간
추존
진주사군(秦州史君)
<헌무왕 추존>
고호(高湖)
-
추존
태위무정공(太尉武貞公)
<헌무왕 추존>
고밀(高謐)
-
추존
문목왕(文穆王)
<헌무왕 추존>
고수생(高樹生)
-
1대
헌무왕(獻武王)
고환(高歡)
531 ~ 547
2대
문양왕(文襄王)
고징(高澄)
547 ~ 549
3대
-
고양(高洋)
549 ~ 550


4.3. 북제 황제[편집]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 기간
능호
-
-
사공부군(司空府君)[A]
고경(高慶)
-
-
-
-
-
이부부군(吏部府君)[A]
고태(高泰)
-
-
-
-
-
진주사군(秦州史君)[A]
고호(高湖)
-
-
-
-
-
태조태위무정부군
(太祖太慰武貞府君)[A]
고밀(高謐)
-
-
-
-
-
문목황제(文穆皇帝)[A]
고수(高樹)[22]
-
-
-
-
고조(高祖)[B]
태조(太祖)[A]
신무황제(神武皇帝)[B]
헌무황제(獻武皇帝)[A]
고환(高歡)
-
-
의평릉(義平陵)
-
세종(世宗) [A]
문양황제(文襄皇帝)
고징(高澄)
-
-
준성릉(峻成陵)
-
-
-
,<제왕(濟王)>,
고양(高洋)
-
549년 ~ 550년
-
1대
현조(顯祖)[B]
위종(威宗)[23]
문선황제(文宣皇帝)[B]
경열황제(景烈皇帝)[24]
천보(天保) 550년 ~ 559년
550년 ~ 559년
무녕릉(武寧陵)
2대
-
민도왕(愍悼王)
,<폐황제(廢皇帝)>,
고은(高殷)
건명(乾明) 560년
559년 ~ 560년
-
3대
숙종(肅宗)
효소황제(孝昭皇帝)
고연(高演)
황건(皇建) 560년 ~ 561년
560년 ~ 561년
문정릉(文靖陵)
4대
세조(世祖)
무성황제(武成皇帝)
고담(高湛)
태녕(太寧) 561년 ~ 562년
하청(河淸) 562년 ~ 565년
561년 ~ 565년
영평릉(永平陵)
5대
-
-
,<후주(後主)>,
,<온국공(溫國公)>,
고위(高緯)
천통(天統) 565년 ~ 569년
무평(武平) 570년 ~ 576년
융화(隆化) 576년
565년 ~ 576년
-
-
-
초공애제(楚恭哀帝) [25]
고엄(高儼)
-
-
-
비정통
-
-
,<안덕왕(安德王)>,
고연종(高延宗)
덕창(德昌) 576년
576년
-
6대
-
-
,<유주(幼主)>,
고항(高恒)
승광(承光) 577년
577년
-
비정통
-
-
,<범양왕(范陽王)>,
고소의(高紹義)
무평(武平)
578년 ~ 580년
-
비정통
-
-
고보녕(高保寧)
안태(安太)(?)
580년 ~ 5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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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비, 즉 호인의 영향이 짙어 그리 부른다.[2] 대표적으로 고구려, 백제 등이 나와서 자주 인용되는 남쪽 제나라의 역사를 "남제서"라고 한다.[3] 성이 이주씨로 선비족의 대추장이다.[4] 이때 효장제는 옛날에 왕윤동탁을 암살하는 데 사용한 방법을 연구하여 응용했다고 한다.[5] <북사>에서는 효무제라고 기록했으나, <위서>에서는 출제(出帝)라고 기록했다. 도망친 황제라고 조롱하는 의미가 강하다.[6] 효문제의 증손자.[7]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을 내림.[8] 돌사자를 들고 담장을 넘으며 시와 부를 읊는 등 문무를 겸비한 황제였다.[9] 포로가 되었던 양나라 서주 자사 난흠의 아들로 난흠은 제물을 주며 석방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10] 여기서 나온 말이 일본군 대본영에서 좋아했던 옥쇄이다.[11] 술에 취해 늙은 어머니가 앉아 있는 의자를 넘어뜨려 죽이려고 했다. 술이 깨자 불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했으나, 누씨의 만류로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12] 이주영의 딸 이주영아(爾朱英娥)로 효명제의 첩이었다가 효장제의 황후가 되었다. 그러다 고환이 이주씨를 첩으로 삼아 5남 고유(高浟)와 13남 고응(高凝)의 두 아들을 낳았다. 이후 팽성태비(彭城太妃)로 추존되었다.[13] 수도가 북위의 낙양에서 천도한 업성이었다. 당시 낙양은 북주와의 경계지역으로 황폐화. 난릉왕입진곡의 무대[14] 물론 북주 역시 후에 (사천)땅을 병합하면서 상당한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된다.[15] 쉽게 말하면 북위 말기의 상황과 비슷한데 북위보다 더 안 좋은 점은 화북의 절반을 북주라는 강자가 차지하고 있었고 또 그 북주가 파촉을 정벌하는 등 국력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16] 북주의 무제는 곡률광의 피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고위는 고장공마저 독살했다.[17] 고씨 일족으로 난릉왕이라는 작위를 받아 난릉왕 고장공이라고 한다. 삼국지주유에 비견될 만한 미남자였으나 최후는 그런 거고 뭐고 없다.[18] 그러나 콜럼버스 이후에나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고추가 이 시대에 있었을 리가 없다.[19] 오직 장애인들만 촉 땅으로 보내져 천수를 누렸다.[20] 길게 말할거 없이 진양은 조간자가 세운 도시이자 조씨의 근거지였다. 그 다음대인 조양자 시기에 조씨와 지씨의 대결이 있었는데 이 때 조양자는 이 진양에서 3년이나 농성전을 벌였고 결국 지씨와 조씨 모두 피해를 입은 사이 조양자가 이전부터 지씨에 불만이 많던 한씨와 위씨를 끌어들여 지씨를 멸했다. 그만큼 진양이 튼튼하다는 얘기.[21] 게다가 동위, 서위가 북제와 북제로 막 교체된 무렵에 북방에서도 유연이 망하고 돌궐이 흥기하는 이변이 터졌다. 유연은 그래도 북방민족 중에서 꽤 만만한 수준이었으나 돌궐은 전성기이던 4대 카간 타발카간 시기에는 북주와 북제의 황제들을 '남쪽의 아이들' 이라고 칭할 정도로 잘 나갔다. 물론 이는 북위가 둘로 쪼개져서 북방민족을 견제할 힘도 약해진 것이긴 하나 그게 아니더라도 돌궐은 카스피해까지 영토를 확보할 정도로 강했다. 북주도 버거운데 위에는 돌궐이라는 신흥강자까지 나왔으니 북제 입장에서는 전선 두개가 위험한 셈이다. 게다가 북제 초반기에 남조에서도 양나라가 망하고 진나라가 들어서는데 진나라는 남조 국가들 중에서 그래도 진패선-진천-진욱이라는 정상적인 황제라인이 이어졌고 덕분에 북제가 망해갈 무렵엔 망해가는 북제를 쳐 일시적으로 회하 일대를 영토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나마 가장 만만할 전선이 남조쪽인데 남조쪽도 이지경이었다. 북주도 삼면전선이다만 그래도 말했듯 북제를 상대론 우위, 남조를 상대로도 촉 지역까지 먹어 우위가 되었고 또 이 시대에만 해도 장강 남쪽은 장강 북쪽보다 인구가 한참 적었다. 남조 입장에서도 수도권에 국경이 있는 북제가 그나마 멀리 떨어진 북주보다 더 버거웠을 것이고... 이정도면 돌궐만 신경쓰면 되는 수준.[A] A B C D E F G H 북제 문선제 추존.[22] 고수생(高樹生)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B] A B C D 북제 후주 추존.[23] 북제 폐제 추존.[24] 북제 후주 추존.[25] 북제 유주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