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민주화 운동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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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평 수용소 유혈 봉기
1.1. 개요
1.2. 창평 수용소 유혈 봉기 상황
1.3. 영향
2. 황해제철련합기업소 민주 의거
2.1. 개요
2.2. 황해제철련합기업소 의거 상황
2.3. 영향
2.4. 반론
3. 평가
3.1. 정치범 수용소에 있던 수용자들의 집단 탈북
3.2. 시장경제의 부분적 승인 허용
3.3. 대규모 탈북 난민의 발생
4. 참고 자료



1. 창평 수용소 유혈 봉기[편집]



1.1. 개요[편집]


당시 1987년 5월 인근 수용소에 경비병으로 입대했던 안명철씨는 온성 제12호 수용소 폭동진압작전에 참여한 소대장과 분대장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전해들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온성지구에 오랫동안 살았던 탈북자 문현일씨도 수용소가 해체된 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현지 주민들로부터 대학살의 진상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1.2. 창평 수용소 유혈 봉기 상황[편집]


이들에 따르면 사건은 탄광에서 일하던 한 정치범이 보위원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를 당하다가 반항해 그를 때려 눕히면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본 보위원은 그 사람을 총으로 쏴 사살하자 결국 화가난 사람들은 그사람을 결국 밟았으며 현장에는 200여명의 정치범이 있었는데 흥분한 이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어 그와 함께 있던 보위원까지 죽인 후 산을 넘어 보위원 사택까지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삶을 포기하며 살아가던 정치범 수천 명이 합세하여 그 규모가 5,000명을 넘게 되어 마침내 대규모 봉기로 번졌다고 하며 이때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대접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많은 사람을 독려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보위원들을 발견할때마다 닥치는대로 밟거나 때리는 등 그러한 일이 벌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었으며 인근 수용소 경비대 병력과 장비까지 동원해 고사포와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뒤 수용소를 포위하고 닥치는 대로 사격하여 유혈 봉기에 가담했던 5,000여명 전원을 몰살시켜 버렸다.
봉기 진압 후 시신은 불태우거나 인근 야산에 집단 매장하였으며 이때 무자비한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그리고 안타깝게 사망한 보위원 가족과 희생자들은 인근 사월리 공동묘지에 묻어 애도를 하며 이 사람들에게 안타깝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국가안전보위부 정보원이었던 김씨는 당시 온성 수용소에서 하루종일 사격 소리가 울려 전쟁이 일어났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곳 정치범 3분의 1 가량이 학살당하였으며 보복 사건까지 일어나 그 사건으로 수용소가 해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생존자는 다른 수용소로 분산해서 수용됐다고 밝히며 당시 요덕 제15호 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강철환 기자도 1988년 말 - 1989년 초 요덕 관평역 보위부 관할 구역구 내에서 온성으로 이송되어 온 1,000여 명의 정치범들을 직접 목격한 바 있다고 밝혔고 이를 바탕으로 더욱 학대가 심하였다고 증언하였다.출처


1.3. 영향[편집]


1984년 8.3 인민소비품 생산 운동이 일어난지 단 3년 만에 결국 번진 민주화 운동이자 시민 봉기로까지 번진 사건이며 특히 5,000여명이 가담한 이 시위로 인하여 결국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으며 더욱 8.3 인민소비품 생산 운동의 소문이 수용소까지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유혈 봉기를 만들어 냈으며 특히 주민답게 살고 싶은 마음에 모두가 힘을 합한 봉기이지만 실패를 하여 결국 의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고 2년 뒤인 1989년 5월 27일과 1989년 8월 11일에 김정일이 시장경제의 부분적으로 승인하여 개인부업을 사실상 묵인하였다.
특히 8.3 인민소비품 생산 및 처리에 관한 규정과 가내편의봉사업 관리운영규정을 공포하여 승인해 가내작업반과 가내생산협동조합 및 가내편의봉사업을 정식적으로 창업을 허용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크다.


2. 황해제철련합기업소 민주 의거[편집]



2.1. 개요[편집]


1998년 8월 노동자들 회의에서 토의된 결론은 한 가지 방도로 중국에 압연 강판을 넘겨 옥수수로 바꾸자는 결론이 나왔으며 제철련합기업소 책임비서와 지배인은 북한 지도부에서 알아 주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들이고 고위 권력층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하여 처리하게 되어 있는 이 일을 제철소 간부들만 알고 외부가 모르게 처리하도록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회의에서 당 책임비서와 지배인은 우리가 뭐 반동 노릇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들을 먹여 그들이 생산에 참가함으로 강철 생산을 하자는 의미라고 역설하며 더욱 김정일에 명령을 안겠다고 다짐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2.2. 황해제철련합기업소 의거 상황[편집]


배에 타고 있던 일행을 전원 체포하였고 포승줄로 묶어 북한에서는 보기 드문 승용차에 싣고 어디론가 끌고 갔으며 이를 보위부로 데려갔다고 알려져 있으며 비밀에 부쳐졌던 이 사실을 보위부가 어떻게 알았나 하고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가서 알고 보니 누가 이 사실을 고발하여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어느 거리 골목에서도 노동자들을 위한 제철소 책임 간부들의 용단을 두고 주민들의 칭찬 어린 목소리가 울려나왔으며 이를 전야가 흐르게 되었다고 밝히며 송림시 골목에서 황해제철련합기업소 사형수 8명을 보았으며 고문을 당한 후유증인지 모두 걷지 못하여 옆에서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라는 사복 입은 청년들이 질질 끌고 말뚝을 세워놓은 곳으로 갔다고 밝혔다.
송림 중앙재판소장이 사람들에게 사형선고문을 읽었으며 조선로동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위반하고 국가물자를 외국에 팔아먹는 국가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배에서 현장 체포된 후방 부지배인과 판매과장, 그리고 연루된 제철소 업무 부지배인과 생산과장을 비롯한 간부들 8명을 즉석에서 총살에 처하였다고 밝히며 사형을 집행하였으며 이때 김일성을 간호하던 간호사가 황해제철련합기업소 직원을 옹호하자 결국 명령 불복종죄로 즉결 처형시켜 사람들이 모두 화가 나고 황해제철련합기업소 의거가 시작이 되었다.
노동자들이 더 이상 간부들을 숙청하지 말라고 우리를 먹여 살리고 제철소를 위한 간부들의 행동은 잘못이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며 공장 구내 길에서 몇천 명이 모여 앉아 의거를 한다고 밝혔다.
이 소식에 온 송림시 안의 주민들이 너무나도 통쾌해 격려어린 말들을 아끼지 않았으며 노동계급이 다르긴 다르다고 밝혔고 노동자들은 배짱이 있다는 말들이 많았으며 북한에서 이와 같은 시위를 일으킨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라고 밝혔으며 시위자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당국을 대표하는 간부가 나서서 들어줄 때까지 앉아 시위를 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철소 구내에서 어지러운 통곡소리가 들려왔으며 순간 주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정신 없이 구내 안으로 달려 들어가다가 나타난 광경 앞에 모두 아연 실색하며 그 자리에 멈추었다.
제철소 구내 안의 아스팔트 길에는 통곡하는 사람들 가운데마다 보기에도 싫은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으며 수백 명의 인민군들이 기고만장하게 서서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무슨 구령소리가 나더니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시위자들이 쓰러졌고 수십 명이 압사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잔인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이때 통곡소리가 울려퍼졌으며 특히 슬픈 목소리들이 많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2.3. 영향[편집]


1995년 국가정지사태로 인하여 결국 1996년 고난의 행군으로 인한 상황으로 결국 벌어진 시민봉기사건으로 결국 엄청난 파장으로 몰고 온 사건이기도 하며 특히 벌어진 뒤 3년 만에 이 진상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기사에도 나온 사건이었다.해당 기사
특히 1998년에는 천리마 대고조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였고 200일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며 그다지 성과는 없었을 때였으며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3년 뒤인 2001년 10월 3일 김정일의 10월 3일 방침으로 인하여 경제개혁의 약속과 함께 미미하지만 7.1 경제개혁조치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출처


2.4. 반론[편집]


주성하 기자가 2001년 조선일보 월간지에 황해제철연합기업소 노동자 폭동 사건이라는 탈북민의 기고가 실렸다고 밝히며 황해북도 송림시에 있는 황해제철연합기업소에서 간부들이 균질압연강판을 중국에 판매해 옥수수로 밀매하면서 노동자에게 배급을 하며 보위사령부가 탱크를 몰고 몰려와 간부들을 무리로 처형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다음 날 노동자 수천 명이 제철소 정문 앞에 모여 이에 항의하자 수십명을 탱크로 깔아 압사시켰고 주장하며 처형장에서 김일성의 간호사를 하던 여성이 마이크를 뺏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고 반발하자 그를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는 묘사까지 자세하게 보탰다고 밝혔다.
처형된 사람들을 매장하였는데 밤에 사람들이 몰려와 봉분을 만들고 수백 개의 헌화를 하고 갔다는 등 이후 다른 탈북민의 그럴듯한 설명들까지 보태졌다고 밝히고 있어 이런 말들을 토대로 황해제철연합기업소 폭동이 중국 천안문 항쟁과 유사한 북한의 대표적 인민 항쟁이라고 추앙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다.
오직 제철소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업도시라 아사자가 전국 평균 이상으로 나왔다. 제철소 당위원회에선 직장 스스로 먹고살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철제일용직장 같은 부서에서는 석유곤로나 불고기판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지만 제철소 핵심인 강철직장은 판매할 것이 없었다.
전기가 없어 철도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며 결국 이들은 제철로 바닥에 깔린 철로 만든 타일인 침목판을 뽑아 판매하였으며 신의주에서 보위사령부 중좌 한 명이 송림에 잠입해 깔판을 사갈 거간꾼으로 위장해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걸려든 사람은 성길이라는 이름의 제철소 선전대 대장이었다고 하며 그의 집에 도청기를 설치해 연관자들도 색출하였으며 몇 달 뒤인 1998년 8월 초 오전 3시경 보위사령부는 공포감을 주기 위해 인근 탱크부대의 전차들을 동원해 송림에 진입하였으며 주로 장갑차들이었고 탱크는 수대 뿐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이들은 미리 찍어둔 간부 11명을 체포해 처형하였으며 송림시 안전부 부부장, 강철직장 보위지도원, 제철소 당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선전대 대장 등이 포함되었으며 도씨 성을 가진 송림에서 알아주는 거간꾼도 들어 있었으며 이들에게 씌워진 죄명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 간첩 등이었으며 처형은 송림시에서 제일 큰 철산 광장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루어지게 되었다.
황해제철연합기업소 폭동 사건처럼 몇몇 탈북민이 지어낸 거짓말이 한국 사회에 혼란을 빚어낸 사례는 여러 건이 있으며 탈북민의 말을 무작정 받아 쓰다간 언젠가는 곤경에 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1] 동아일보 기사
1997 ~ 1998년경에 황해북도 송림시에 있는 황해제철소에 대한 보위사령부의 대규모적인 검거와 공개처형이 있었으며 당시 탱크도 동원되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고 밝히며 언급하고 있다.
당시 황해제철연합기업소는 가동이 중단되면서 거기 노동자들은 사실상 실업자나 마찬가지이며 식량을 공급받을 데도 없으며 가만히 앉아 죽을 처지에 처한 노동자들이 설비를 해체하고 전기 설비에서 동을 농민시장에 판매하여 공장은 거의 페허로 되다시피 하였다고 밝혔다.
황해제철소는 북한에서 규모가 김책제철소 다음가는 큰 제철소였으므로 김일성과 김정일이 가장 많이 관심을 가지는 공장이면서 한 때는 자동화 수준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정도였으나 그 공장이 페허가 되다시피 하였으니 김정일이가 대노한 것이라고 밝힌 증언이 송림사건에 가장 현실적인 증언이라고 언급하게 되었다.출처, 출처


3. 평가[편집]



3.1. 정치범 수용소에 있던 수용자들의 집단 탈북[편집]


이때를 기준으로 정치범 수용소에 있던 수용자들이 대거 탈북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특히 이때를 기준으로 강철환 기자와 안명철 경비원 그리고 강철환 기자의 친구인 안혁까지 많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거나 혹은 고난의 행군으로 사람들이 집단으로 중국으로 통하여 탈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3.2. 시장경제의 부분적 승인 허용[편집]


8.3 인민소비품 생산 운동의 경우 생산품목의 결정, 판매가격의 설정에 관해 기업 측에 자율성이 부여되어 있으며 기업은 이 운동으로 번수입의 일부를 국가에 바쳐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수입의 20 - 25%를 국가에 납부하여야 한다.
8.3 인민소비품의 생산은 국가로부터 기업에게 내려오는 계획 과제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은 금액지표의 것이며 예를 들면 기업은 종업원 1인당 매월 5원씩 8.3 인민소비품 창조 운동으로 벌도록 지시가 내려오지만 어떤 품목을 생산할 것인가 대해서 기본적으로 가내작업반에 맡겨져 있다.
가격은 사실상 협의가격으로 되어 있어 직매점에 나와 있는 상품은 수요자와 가격을 교섭하여 합의에 도달하면 그 가격으로 팔 수 있으며 기업은 자신의 8.3 인민소비품이 잘 팔리지 않으면 인하하고 자신의 제품이 잘 팔리면 인상을 한다.
가내작업반 관리운영규정은 그 적용 대상이 기관과 기업소 및 협동단체와 노동자구와 동의 인민반에 조직된 가내작업반, 부업반, 가내편의봉사업, 협동조합식당과 가내축산반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가내작업반 관리운영규정에는 이것 외에 식료품 가공 및 생산의 확대가 등장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고 가내작업반, 부업반, 가내편의봉사업, 협동조합식당, 가내축산반이 생산한 제품은 생산자와 직매점간의 협의에 의한 가격으로 정한다.


3.3. 대규모 탈북 난민의 발생[편집]


주민통제기능의 마비는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대규모 탈북사태로까지 이어졌으며 이들 탈북자들은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을 떠돌고 있으며 중국에만도 10만 ~ 40만여 명의 탈북자가 공안원을 피해 숨어다니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이같은 상황을 틈타 자본주의 풍조와 이른바 황색바람이 북한 사회에 서서히 퍼지고 있으며 특히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동경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색바람이 사회주의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독소라는 북한의 선전이 주민들에게 더이상 먹혀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식량난은 또 많은 서민가정을 파탄지경으로 내몰았으며 많은 가정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국경지방으로 어머니는 농촌으로 떠나가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유랑하며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김일성 사후 나타난 사회상 중의 또 하나는 다산의 장려이며 북한은 식량난 등 요인으로 파생된 인구 감소가 사회문제화 됨에 따라 3명 이상의 자녀를 둔 가정에 대해서는 유치원 우선 배려 등 각종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출처


4. 참고 자료[편집]


  • 북한 8월 3일 인민소비품 생산 운동 연구 - 윤경은 | 북한대학원대학교 | 2017.12
  • 북한의 개인수공업에 관한 연구 - 최인제 | 북한대학원대학교 | 2017.12
  • 북한의 1990년대 경제위기와 기업 행태의 변화 - 이석기 | 서울대학교 | 2003.08
  • 북한의 개혁개방정책 추진 전망 - 임강택 | 통일연구원 | 2001.12
  • 북한의 제2경제 - 최수영 | 통일연구원 | 1998.02
  • 북한의 기업관리체계 및 기업행동양식 변화 연구 - 이석기 | 산업연구원 | 2003.12
  • 민주조선 | 1989.08.11 ~ 1989.08.21
  • 민주조선 | 1989.05.27
  • 조선중앙통신 | 2013.06.21
  • 로동신문 | 2016.05.09
  • 북한의 군수산업 정책이 경제에 미치는 효과 분석 - 임강택 | 통일연구원 | 2000.11
  • 북한 외화 통용 실태 분석 - 이석기 | 산업연구원 | 2012.12
  • 북한의 시장 - 기업 개혁과 노동 인센티브 제도 - 양문수 | 한국노동연구원 | 2004.06
[1] 그러나 재반론도 적지 않은게 사실 주성하 기자도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기사가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해명도 전혀 없는 상태이다. 어찌 보면 믿거나 말거나 수준으로 봐야할 듯 싶기도 하다. 해당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