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악기 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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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민족악기(남한국악기에 해당하는 개념) 개량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

1. 개요
2. 역사
3. 종류
3.1. 현악기
3.1.3. 옥류금
3.1.5. 어은금속
3.1.6. 그 외
3.2. 관악기
3.2.1. 저대속
3.2.4. 새납속
3.2.5. 그 외
4. 장단점
5. 합주 편성
5.2. 민족기악중주
6. 대한민국에서의 용례
7. 중국 조선족들의 용례
8. '고악기'의 리바이벌?


1. 개요[편집]


해방 후 남북 양측에서는 노선과 방법이 다르기는 했지만, 모두 일제강점기 시절 왜곡되고 탄압받아온 전통음악에 대한 복원과 보급에 힘썼다. 또 전통악기를 개량하거나 전통음악 어법을 활용해 새로운 창작곡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시도도 마찬가지로 양측에서 계속 행해졌지만, 이들 분야의 방법론과 결과물은 서로 많이 달랐다. 남한에서 주로 악기 자체에 대한 개량 작업 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국악관현악 등 여러 편성으로 조합해 연주하는 창작 국악 노선이 주가 된 반면, 북한에서는 일단 악기부터 대대적으로 개량한 뒤 그것을 자국의 음악 노선에 맞추는 식이었다.

물론 남한에서도 악기 개량에 대한 움직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성천이 개량한 월금이나 비파, 저음역에 특화시킨 저음 해금이나 대형화로 음역 확대를 꾀한 아쟁, 명주실 대신 철사를 사용한 철가야금이나 철아쟁 등이 나온 바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개인이 개량한 것이라 보편화되지 못했고, 그나마 널리 보급된 것은 현의 개수를 늘인 개량 가야금 정도다.

이에 비해 조선로동당의 일당 독재 체제였던 북한에서는 '예술은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이념과 국가의 주관 하에 대규모 개량 사업을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충돌이나 시행 착오, 실패작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 결과 개량된 악기가 기존의 악기를 밀어내고 상용화되기 훨씬 용이했다.

아래의 서술은 국립중앙도서관의 북한자료센터에서 열람할 수 있는 북한 자료에서 가능한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했다는 우상화를 빼고 남한에서 연구한 2차 사료와 조합한 것을 간추린 것이다.


2. 역사[편집]


북한 측 문헌들인 조선민족악기(박형섭 편저. 1994 문학예술종합출판사)나 조선민족악기도감[1]에 의하면, 북한의 악기 개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0년대 무렵이라고 한다. 이 시기 동안 김일성이 개량 사업에 관한 소위 '교시'를 여럿 내렸다고 하는데, 물론 기본적인 취지야 좋았다지만 개중에는 김일성 자신의 취향에 좌지우지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악기 개량은 아니지만, 김일성은 판소리의 소리꾼들이 종종 내는 칼칼한 목소리(탁성)를 매우 싫어했다. 이 때문에 '판소리에서 탁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공식적인 교시를 내렸고, 이에 반발한 많은 전통음악인들은 숙청 혹은 실각했다. 비슷한 논리로 김일성은 기존 민족악기들이 연주 가능 음역이 좁고 탁한 '쐑소리' 를 내며 삼분손익법 등의 조율법으로 인해 조옮김(transpose)이 제한되어 있다고 비판했고, 이에 따라 악기 개량도 이런 점의 개선에 주력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북한의 악기 제작자들이나 음악학자, 연주자들은 이 과정에서 이미 오래 전에 서구식 평균율에 의한 악기 개량을 시작한 중국의 사례를 많이 참조했고, 자국의 민족악기들도 선율을 연주할 수 있는 모든 음률악기는 가능한한 평균율에 맞춰 조율할 수 있도록 개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대신 한반도 전통음악 특유의 농음(떠는 소리)이나 시김새는 가능한한 살리려고 했고, 널리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가내수공업 식이 아닌 대량 생산이 가능한 규격화/정밀화된 설계로 개량했다.

이 개량 사업은 1960년대 후반 김정일이 문화예술 부문에서 정치 인생을 시작하면서 가속화 되었는데, 그 결과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많은 수의 민족악기들이 개량되어 연주 일선에 투입되었다. 이후에도 비록 빈도는 많이 줄었지만 새로운 형태의 개량 악기들이 계속 선보여지고 있다. 다만 이렇게 개량되는 악기도 거의 대부분이 속악 전용 혹은 속악에도 쓸 수 있는 악기에 한정되어 있고, 정악 전용 악기는 복원 사업하는 정도 외에는 일체의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3. 종류[편집]


민족악기들 중 가장 많이, 그리고 집중적으로 개량된 것은 현악기관악기였다. 각 악기속 별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음역도 평균율 체계에 따라 맞춰져 있으므로 국제표준 음높이 기보법에 따라 설명한다.


3.1. 현악기[편집]



3.1.1. 해금[편집]


북한에서 (서양식 악기 분류에 따르면) 찰현악기류 민족악기 중 가장 역점을 둔 것이 해금의 개량이었다. 1960년대에는 울림통을 크게 만들면서 소리구멍을 추가하는 작업이 행해졌고, 이렇게 개량된 초기형은 영화음악단[2]의 민족관현악단에서 선보여졌다.

이어 1970년대에는 현의 개수를 바이올린족 현악기들처럼 네 개로 늘이고 지판을 추가해 정확한 음정의 연주가 용이하도록 했다. 활도 기존에 줄 사이에 걸치듯이 고정되어 있던 것을 악기와 분리시켰고, 바이올린족 악기의 활과 거의 흡사한 모양새로 바꾸었다. 울림통의 재질이 앞판은 오동나무, 뒷판과 테두리는 복자기나무 혹은 고로쇠나무로 정해진 것도 이 시기였다.

동시에 음역별로 세분화해 소해금-중해금-대해금-저해금 네 가지 종류의 악기가 나왔고, 연령과 신체 비율을 고려한 각기 네 종류의 규격화된 악기들도 제작되었다. 이것 역시 바이올린족 악기와 유사하며, 북한 측 규격 분류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어른용: 4/4
미성년용: 4/3
소년용: 2/1
어린이용: 4/1


  • 중해금
해금을 비올라와 비슷하게 개량한 것으로, 조현 역시 비올라와 유사하게 도-솔-레-라(C3-G3-D4-A4) 완전5도 간격으로 한다. 역시 실음은 기보음보다 장2도 낮아 B플랫조 악기로 분류된다.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C3~A6까지 3옥타브를 넘는다. 간혹 독주 악기로 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중주나 합주에서 쓰인다. 연주 자세는 소해금과 동일하며, 이 때문에 바이올리니스트가 간혹 비올라도 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해금 연주자가 중해금 연주를 겸하는 경우도 있다.

  • 대해금
해금을 첼로와 비슷하게 개량한 것으로, 조현 역시 첼로와 유사하게 도-솔-레-라(C2-G2-D3-A3) 완전5도 간격으로 한다. 역시 실음은 기보음보다 장2도 낮아 B플랫조 악기로 분류된다.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C2~A5까지로 4옥타브에 약간 못 미치지만, C6까지도 이론상 연주할 수 있다. 소해금만큼은 아니지만 독주 악기로도 쓰이고, 중주나 합주에서도 사용된다.

연주 자세 역시 첼로와 유사하게 울림통 밑의 쇠막대기를 바닥에 고정시켜서 연주하는데, 쇠막대기의 굵기는 첼로보다 더 굵은 편이다. 울림통도 소해금이나 중해금에 비해 훨씬 큰데, 다만 소리구멍의 경우 첼로처럼 앞판에 나 있지 않고 지판을 경계로 한 테두리 윗쪽에 나 있다. 첼로와 비교하면 대해금의 울림통이 더 작고 원통형이며, 이 때문에 지판과 울림통이 만나는 영역이 첼로보다는 좁아서 고음역의 운지가 수월한 편이다.

  • 저해금
해금을 콘트라베이스와 비슷하게 개량한 것으로, 조현 역시 콘트라베이스와 유사하게 E2-A2-D3-G3 완전4도 간격으로 한다. 역시 B플랫조 악기이지만, 소해금~대해금과 달리 실음은 장9도가 낮게 울린다. 음역은 기보음보다 한 옥타브 낮춘 실음 기준으로 E1~G4까지 3옥타브를 약간 넘는다. 음역이 매우 낮은 관계로 독주 악기로서는 한정적으로만 쓰이고, 주로 중주나 합주에서 저음 연주를 담당한다.

울림통은 해금속 악기들 중 가장 크지만 대해금과 마찬가지로 콘트라베이스보다는 약간 작은 편이며, 소리구멍은 규격화가 덜 되었는지 콘트라베이스처럼 울림통 앞판에 난 것과 대해금처럼 테두리 윗쪽에 난 것 두 가지가 모두 쓰인다. 악기가 크기 때문에 보통 서서 연주하거나 콘트라베이스용으로 제작한 높은 의자에 앉아서 연주하며, 활은 콘트라베이스의 독일식 활과 유사한 것을 사용한다. 또 현의 장력 때문에 콘트라베이스와 마찬가지로 나무 조율펙이 아닌 웜나사로 된 톱니식 조율펙이 부착되어 있다.

네 종류 모두 4현에 지판이 있고 활이 독립된 형태로 개량되었기 때문에 바이올린족 악기들의 연주법 거의 모두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2000년대 초중반에는 활이 너무 바이올린족 악기들과 똑같았기 때문인지 개량 전 해금의 활과 비슷한 모양새의 것으로 다시 바꾸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몇 년 가지 않아 다시 기존 활을 쓰고 있어서 무산 혹은 보류된 것으로 보인다.


3.1.2. 가야금[편집]


북한측 기록에 의하면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개량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종래의 12(또는 13)현에서 19현으로, 다시 21현으로 현의 개수를 늘려 연주 가능 음역을 확대했고, 줄의 재질도 기존의 명주실에서 장력에 강한 가느다란 철사를 나일론으로 감싼 것으로 바꾸었다. 또 부두줄(돌괘)을 없애고 피아노처럼 조율못을 죄고 풀어 조율하는 식으로 조현 방식을 바꾸었고, 악기 밑의 소리구멍도 기존의 한 개에서 각각 해와 구름, 초승달 모양의 세 개로 늘렸다. 받침대를 붙여 높이를 높이기도 했다

19현 악기까지는 기존의 5음계 조현을 기본으로 했지만, 21현으로 바뀐 최종판이 나온 뒤로는 12음 평균율에 의한 7음계로 조현하도록 바뀌었다. 기보음보다 실음이 장2도 낮기 때문에 서양악기 식으로 분류하면 B플랫조 악기이며,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G3~F6까지 3옥타브 약간 못미치는 정도다. 각 현은 숫자대로 임시표 없이 장2도 또는 단2도 간격이 되도록 조율한다. 파생 악기로 사이즈를 줄이고 현의 숫자도 15현으로 줄인 아동용 악기인 아동가야금이 있으며, 음역은 역시 기보음 기준으로 G3~G5까지 2옥타브다.

이외에 중저음역을 담당하는 대가야금과 조옮김이 용이하도록 개량한 전조가야금이 있었지만, 1970년대 초반 이후 도태되어 쓰이지 않고 있다.


3.1.3. 옥류금[편집]


1970년대에 재래 전통악기인 와공후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부각시켜 새롭게 만든 악기다. 사실 그 이전인 1960년대에도 하프와 흡사한 형태로 개량한 공후가 나왔고 얼마간 쓰였지만[3] 이후 도태되어 이 옥류금 개발로 이어졌다. 초기형 옥류금은 1973년 3월 쯤에 나왔다는데, 현의 개수는 29현이었고 각 현의 반음계 조정은 손으로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 초기형 모델은 김정일의 지도를 거쳐 1980년대에 와서야 상용화될 수 있었다. 이 최종 개량형은 33현으로 줄 개수가 늘어났고, 공명통 크기도 커졌다. 공명통의 재질은 앞판에 오동나무, 뒷판에 복자기나무 혹은 고로쇠나무를 쓰도록 정형화되었다. 반음계 조정도 하프처럼 페달을 밟는 식으로 바꾸었고, 악기 앞면 기준으로 도(C)-레(D)-미(E)-시(B)-라(A)-솔(G)-파(F) 식으로 일곱 개 온음정에 따라 배열되어 있어서 누르는 정도에 따라 음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정도를 조정할 수 있다.

음역은 기보상으로는 G1~A6까지 5옥타브를 약간 넘어서 개량 발현악기 종류 중 가장 넓은 음역을 갖고 있다. 다만 실음은 이것보다 단2도 낮게 나오며, 이 점도 하프와 유사하다. 페달의 음정 조절에 다소 결함이 있어서 아직 개량이 덜 된 악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3.1.4. 양금[편집]


1960~70년대에 집중적으로 개량되었는데, 울림통과 현 사이를 떼어주는 괘를 종래의 나무 대신 구리(황동)로 바꾸면서 위치도 종래의 중심부에서 양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원래 괘가 있었던 중심부에는 괘 대신 줄베게를 놓아 타점을 변경하면서 세게 칠 경우 울림통까지 때리게 되는 현상을 방지했다. 1970년대에는 여음 조절을 위해 발로 밟는 페달을 추가했고, 줄의 개수도 67개로 늘리면서 크기도 상당히 커졌다. 참대나무를 얇게 깎아 쓰던 채도 개량되었는데, 넓고 굵은 대나무를 깎아 머리 부분을 솜털로 감은 펠트채를 주로 쓴다.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C3~G6까지 3옥타브 반이며, 실음은 장2도 낮게 난다는 점에서 B플랫조 악기로 분류된다. 치는 채의 경우 여러 종류의 펠트채를 쓸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손가락으로 뜯어서 연주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기존 양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편이다. 다만 개량 과정에서 악기가 커지고 페달까지 추가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의자에 앉거나 서서 연주해야 하고 바닥에 걸터앉아 연주하기는 불가능하다.


3.1.5. 어은금속[편집]


북한에서 개량되었다는 발현악기 중 가장 수상쩍은 악기로, 연주 원리로만 따지면 비파월금을 개량한 것으로 보이지만 외관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만돌린이나 발랄라이카에 근접한 악기인데,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1960년대 초반부터 군사 야영을 하면서 만들기 시작했고 어은동이라는 곳에서 완성했기 때문에 거기서 착안한 명칭이라고 한다. 조선민족악기도감에 나온 사진에 의하면 1960년대에 나온 악기는 현재의 것보다는 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상용화된 것은 오히려 옥류금보다도 늦었고, 1994년에 발간된 조선민족악기에도 소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후술할 배합관현악 관련 이론서에도 일체 언급이 없는데, 2005년에 북한의 예술 전문 잡지 '조선예술'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대략 1995년부터 도입되어 1997년부터 본격적인 보급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4] 이 기사에 따르면 1995년 12월 24일에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분리된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당시 조선인민군공훈합창단)이 어은금과 손풍금(아코디언)이 주가 된 편성의 부속 관현악단을 처음 선보였고, 2년 뒤인 1997년 12월 24일에 개최한 공연에서는 어은금과 손풍금 위주의 관현악단과 기존의 바이올린족 현악기 위주의 서양식 관현악단을 번갈아 기용하자 김정일이 '어은금과 손풍금을 주로 쓴 관현악단 연주가 좋습니다'라고 평하면서 공훈국가합창단의 반주 관현악단 편제가 싹 바뀌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공훈국가합창단 외에도 인민보안성 직속 예술단인 인민보안성협주단과 만수대예술단에서 각각 여성어은금병창과 어은금가무병창을 선보이며 악기의 대중화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5]

모든 악기가 4현으로 되어 있고, 옥류금과 마찬가지로 울림통 앞판은 오동나무, 뒷판은 복자기나무 혹은 고로쇠나무를 쓰도록 되어 있다. 지판에는 24개의 프렛이 붙어 있어서 음정을 짚기가 수월한 편이다. 현은 손가락이 아닌 피크로 뜯으며, 이 때문에 만돌린이나 발랄라이카처럼 빠른 연음 연주(트레몰로)가 가능하다. 실제로 이 악기를 사용한 곡들에서는 일반적인 주법보다 트레몰로 주법을 더 많이 사용한다.

  • 소어은금
가장 작은 크기의 어은금으로, 소해금과 마찬가지로 독주와 중주, 합주 모든 영역에서 널리 사용된다. G3-C4-E4-A4로 각각 완전4도-장3도-완전4도 간격이 되게 조율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런 음 간격의 조율은 다른 어은금속 악기도 마찬가지다.

  • 중어은금
소어은금보다 1.07배 큰 어은금. 조현은 C3-F3-A3-D4로 하며, 해금속 악기로 따지면 중해금 포지션에 해당한다. 소어은금과 달리 독주 악기로서는 그리 많이 쓰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 대어은금
소어은금보다 1.63배 큰 어은금. 조현은 C2-F2-A2-D3로 하며, 해금속 악기로 따지면 대해금 포지션에 해당한다. 주로 중주나 합주에서 연주된다.

이외에도 2012년에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새해맞이 학생소년 예술공연에서 저해금의 절반 수준으로 크게 개량된 악기 한 종류가 더 확인되었다. 크기가 소어은금~대어은금 같이 품에 안고 연주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인지 바닥에 30도 가량 눕히듯이 세워놓고 연주하며, 피크를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만 퉁긴다. 또 현의 장력 때문인지 다른 어은금과 달리 금속제 나사못으로 된 조율펙을 쓰고 있다. 아직 명칭은 북한 언론에서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해금속 악기들의 분류법을 참고하면 저어은금일 가능성이 높다.


3.1.6. 그 외[편집]


현금(거문고)의 경우 해방과 한국전쟁 후에도 어느 정도 사용되었지만 큰 개량 사업 없이 도태되었는데, 심지어 언급까지 금기시 되었는지 1994년 서적에서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다가 2001년 서적에 와서야 소개되었다. 다만 1960년대 까지만 해도 별 탈 없이 쓰였는데, 북한에서 작곡된 국악 계통 작품 중 남한과 여타 교포 사회에서 곧잘 연주되는 독주곡 '출강'도 이 당시 거문고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김용실의 작품이었다.

아쟁의 경우 1960년대 초반에 산조아쟁을 기반으로 소아쟁(8현), 중아쟁과 대아쟁(각각 12현)으로 개량되어 조선인민군협주단의 민족관현악단에 도입된 바 있다. 이와 별도로 줄을 철제로 바꾸고 개수도 네 개로 줄인 4현아쟁도 나왔지만, 모두 1970년대 초반 이후로 도태되었다. 다른 저음 찰현악기들인 대해금과 저해금의 상용화로 인한 버로우로 여겨진다.

비파도 1960년대 중반에 소비파, 중비파, 대비파, 저비파 네 규격으로 개량되어 민족관현악단에서 러시아 민족관현악단의 발랄라이카와 비슷하게 현악 그룹을 이루기도 했지만, 1970년대 초반 이후 해금속 악기들에 밀려 도태되었다. 게다가 1970년대 이후 간행되고 있는 북한 음악 서적들에도 개량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고, 2000년대에 와서 새롭게 보급된 어은금이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어서 완전히 병풍 취급을 받고 있다.


3.2. 관악기[편집]


관악기들은 주로 대금이나 중금, 소금 등 가로피리와 단소, 피리, 새납(태평소)의 세로피리 종류가 개량되었다. 특히 재질 면에서 기존 악기와 매우 큰 차이점을 보여주는데, 대나무에서 박달나무흑단나무, 자단나무 같은 경질 목재로 재질이 바뀌었고[6] 플루트오보에처럼 금속 키를 달아 반음 연주와 조옮김을 쉽게 했다. 저대류와 단소류의 경우 취구부와 지공부를 분리해 케이스에 보관할 수 있도록 추가 개량되었다.


3.2.1. 저대속[편집]


북한에서 ~금 종류의 가로피리를 칭할 때는 저대라고 하며, 1960년대부터 개량되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다. 음역에 따라 저대-중음저대-고음저대 세 종류로 나뉘는데, 농현 효과는 확실히 보장되도록 했지만 판소리의 경우와 비슷하게 김일성이 갈청소리를 싫어했던 관계로 청공을 모두 없애버렸다.

  • 저대
대금(북한식으로는 대함)의 개량형 악기로, 저대속 악기 중 가장 길다. 서양식 기준으로는 기보음보다 실음이 장2도 낮은 B플랫조 악기다.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D4~A6까지 2옥타브 반이다.

  • 중음저대
중금(북한식으로는 중함)의 개량형 악기. 서양식 기준으로는 기보음이 실음보다 단3도 낮은 E플랫조 악기다.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D4~A6으로 저대와 동일해 보이지만, 실음이 단3도 높게 나기 때문에 저대보다는 약간 높다.

  • 고음저대
소금(북한식으로는 소함)의 개량형 악기. 저대와 동일한 B플랫조 악기지만, 기보는 실음보다 단7도 낮게 한다.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C4~G6지만, 실음 음역은 거의 피콜로와 유사하다.

세 악기 모두 독주에서 합주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고, 특히 고음저대의 경우 크기가 가장 작기 때문인지 유아용 악기로도 많이 사용된다. 고음역으로 갈 수록 악기가 작아지는 것은 음향학 이론상 당연한데, 취구와 지공 사이도 당연히 짧아진다. 다만 취구 끄트머리가 짧게 만들어지는 피콜로에 비해 고음저대의 경우 취구 끄트머리가 오히려 좀 더 길게 늘어뜨려지듯이 만들어진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인데, 중국의 고음 가로피리인 디즈(笛子)와 유사한 설계다.


3.2.2. 단소[편집]


1960년대에 집중적으로 개량되었다고 하며, 고음단소의 경우 1960년대 후반에 단소 개량의 부산물 격으로 나왔다고 되어 있다. 개량 원리는 저대와 유사하지만, 청공이 없어져 소리가 크게 달라진 저대와 달리 단소는 그렇게까지 큰 소리의 변화가 없었다.

  • 단소
기보음이 실음보다 장2도 높은 B플랫조 악기이며,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C4~A6까지 2옥타브 반 가량이다. 독주부터 합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 고음단소
명칭대로 고음 전용 단소로, 크기도 단소보다 작고 피콜로의 세로피리 버전으로 보면 된다.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C5~D7까지 2옥타브 약간 넘는 수준이며, 고음저대보다는 음역이 약간 좁은 편이다. 독주악기로도 쓰이지만, 주로 중주와 합주 음악에 편성된다.


3.2.3. 피리[편집]


다른 관악기들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량되었는데, 다만 기존의 소피리(세피리)의 경우 개량 작업이 순탄치 않았는지 1970년대 중반 이후 도태되어 현재 널리 쓰이는 개량 악기는 대피리와 저피리 두 종류다.[7] 목제 울림통과 리드 사이에 금속제 연결관을 부착했고, 리드도 물컵에 담가 불려야 할 정도로 두꺼웠던 것을 좀 더 얇게 만들었다.

  • 대피리
대피리 항목 참조.

  • 저피리
저피리 항목 참조


3.2.4. 새납속[편집]


새납(태평소)도 마찬가지로 1960년대부터 개량되기 시작했고, 1970년을 전후해 등장한 장새납이 새납속 개량 악기의 대표 주자 격으로 쓰이고 있다. 이외에 몸통까지 아예 금속제로 만든 중저음역 확장판인 대새납과 저새납도 만들어졌지만, 대피리/저피리에 밀려 도태되었다.

  • 새납
초기 새납 개량의 결과물로, 기보음이 실음보다 단3도 낮은 E플랫조 악기다.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F4~C6(또는 D6)까지 1옥타브 반 정도다. 지공만 나 있던 기존 악기의 울림통에 금속 키를 일부 부착해 조옮김과 운지가 용이하도록 했지만, 음역이 비교적 좁은 관계로 특별히 농악이나 취타 풍의 독주 악구를 연주할 때 외에는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는다.

새납을 좀 더 길게 늘인 형태로, 부분적으로만 키를 단 새납과 달리 거의 오보에 수준으로 금속 키를 많이 달아 반음 연주가 용이하게 만들었다. 기보음보다 실음이 장2도 낮은 B플랫조 악기이며, 음역은 기보음 기준으로 D4~G♯6까지 2옥타브 좀 넘게 확장되었다. 새납보다 소리가 부드러운 편이라 독주 외에 중주나 합주 등에도 널리 쓰인다.


3.2.5. 그 외[편집]


퉁소도 1960년대 전반에 단소와 비슷한 식으로 개량되었고, 1970년대 중반까지 독주와 합주 등에 쓰였지만 이후 도태되었다.

나각의 경우 종래의 소라 껍데기 대신 금관악기처럼 구리 등의 금속을 주재료로 하고 밸브나 피스톤를 달아 연주 가능 음역 내의 모든 반음들을 연주할 수 있도록 개량되었고, 1963년에 열린 민족악기 전람회에서 소라각, 중라각, 대라각, 저라각 네 규격의 악기로 선보여졌다.

이 개량 나각들은 1970년대 초반 혁명가극 운동의 시발점이 된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의 민족관현악단판 편성에도 도입되었지만, 얼마 안 가 도태되어 해당 악기들을 위해 지정된 파트들은 소라각→트럼펫, 중라각→호른, 대라각→트롬본, 저라각→튜바 식으로 모두 서양 금관악기로 대체되었다.[8] 심지어 비파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이후의 북한 음악 서적들에서는 개량 사실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안 될 정도인데, 김정일이 민족금관악기 자체를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기 때문에 개량 후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거나 모종의 문제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금관악기에서는 서양금관악기를 흉내내여 민족금관악기라는것을 만들어 배합할 필요가 없다. 금관악기로는 양악기를 그대로 쓰면 된다.

-김정일, 음악예술론 (1992 조선로동당출판사) 중 89페이지의 배합관현악 관련 언급 발췌



3.3. 타악기[편집]


타악기의 경우 현악기나 관악기와 달리 크게 개량된 것은 없다. 다만 꽹과리의 경우 좀 더 반들반들한 모양새로 개량되었고, 장구의 경우 여러 규격으로 만든 것을 꽹과리와 징, 자바라와 함께 드럼 마냥 늘어놓아 한 사람이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장구 세트도 있었지만 이것도 도태되었다.


4. 장단점[편집]


일단 이러한 대폭적인 개량으로 악기들의 음량이나 연주 기교에 있어서는 제한 사항이 많이 사라졌고, 특히 중저음역 악기들이 지속적으로 개발, 개량되어 남한의 국악에서 비교적 미흡하다고 할 수 있는 중후한 음색을 쉽게 뽑아낼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서양음악과 중국음악의 영향이 지나치게 반영되어 기존 악기가 지닌 특색을 깎아먹었다는 비판도 남한에서 제기되고 있다. 개중에는 장새납이나 단소, 옥류금 같이 남한 국악인들도 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악기도 나왔지만, 서양식 12음 평균율에 악기를 맞춰놓은 결과 산조시나위 같은 기존 전통음악을 연주할 때 음색이 많이 달라지는 등의 역효과도 적잖게 나오고 있다. 북한에서야 이들 전통음악을 거의 무시하고 서양음악 이론을 대폭 수용한 소위 '민요풍'의 창작곡만 연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단점이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특히 저대류와 해금류의 경우 남한에서는 상당히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전자는 위에 서술한 대로 청공을 없애 특유의 긴장된 음색을 완전히 쌈싸먹었다는 이유에서, 후자는 음색이 너무 부드러움 일색이 되어 중국의 얼후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는 이유에서 특히 문제가 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순화 작업이 북한 국악인들의 공감대가 아닌 최고 권력자의 취향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까이고 있는 형편이다. 참고로 저대에 청공을 뚫으면 어떻게 될까? 음색 대폭발!

또 규격화한 덕에 대량 생산이 쉬워졌다는 장점마저도 경제난으로 인해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데, 90년대 초반에는 농사를 짓는다고, 90년대 중반에는 연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수많은 삼림을 개발살낸 바람에 90년대 말에는 악기 만들 재료가 없어 악기 제작자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5. 합주 편성[편집]


대부분 서양악기의 구조나 연주 원리와 호환되기 때문에 서양악기와 혼합 편성하는 기악 중주나 관현악 편성에도 용이하며, 특히 관현악 편성의 경우 아예 '배합관현악'이라는 이름으로 이론화하고 있다.


5.1. 배합관현악[편집]


항목 참조. 문서가 길어서 항목이 분리되었다.


5.2. 민족기악중주[편집]


물론 남한의 국악관현악처럼 민족악기가 거의 주가 되도록 편성하는 민족관현악도 가능하지만, 이상하게 이런 편성으로 작곡된 곡들은 많지 않고 연주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시도 자체가 없지는 않았는데, 악기 개량 사업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반 부터 성동춘과 정세룡, 신영철 등의 작곡가가 민족악기만의 혹은 민족악기에 서양 타악기를 혼합 편성한 민족관현악 작품들을 작곡하고 이론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민족관현악 작품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는지, 민족관현악 작품의 창작을 독려하는 기사가 1960년대 후반까지도 계속 나오곤 했다.[9] 이렇게 민족관현악 작품 창작이 부진했던 것은 아마 개량 작업의 과도기에서 빚어진 혼란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민족관현악 작품을 쓰면서 자신의 경험을 잡지 '조선음악' 1967년 4월호 부터 꾸준히 연재했던 신영철도 개량된 민족악기와 개량되지 않은 소위 '고악기'의 혼합 편성 때 음색이 조화롭지 못하고 연주 기교에도 제약이 많다는 단점을 인정한 바 있었다.

그리고 소위 혁명가극 창작 시대였던 1970년대를 지나면서 상술한 것처럼 개량 민족악기 중 아쟁과 비파, 나각 등이 퇴출되면서, 1980년대 이후로는 연주되지 않고 있다. 이 시대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5대 혁명가극 중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의 총보와 그 이후 나온 '밀림아 이야기하라', '당의 참된 딸', '금강산의 노래'의 총보인데, 전자의 두 가극에서 관현악은 민족관현악 편성으로 작곡되었고 후자의 세 가극은 전면 배합관현악 혹은 부분 배합관현악 편성으로 작곡되었다. 현재는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 모두 전면 배합관현악 편제로 손을 봐서 연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민족관현악이 사실상 소멸된 대신, 그보다 좀 더 작은 편성의 민족기악중주는 보편화되어 있다. 배합관현악 항목과 마찬가지로 배합관현악편성법의 6~8페이지를 참조하면 이렇다.

  • 찰현악기

소편성
중편성
대편성
제1소해금
2~3
3~4
5~6
제2소해금
1~2
2~3
4~5
중해금
0
(2)
(4)
대해금
1~2
2
4
저해금
1
1
2

특이하게 중해금이 기악중주 편성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 발현/타현악기

소편성
중편성
대편성
가야금
1
1
2
양금
1
1
1~2
옥류금
0
(1)
1

마찬가지로 어은금도 해당 문헌에서는 빠져 있지만, 편성할 때는 전면 배합관현악과 비슷한 비율로 추가한다.

  • 죽관악기

소편성
중편성
대편성
고음단소
0
(1)
1
단소
1
1~2
2
고음저대
1
1
1
중음저대
(1)
1
1
저대
1~2
2
2~4
장새납
0
1
1~2
새납
0
(1)
(1)
대피리
0
1
2
저피리
0
1
1

새납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별도 편성하지 않고, 장새납 주자가 가끔 농악풍 악구를 연주해야 할 때 새납으로 악기를 바꾸어 연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 타악기: 꽹과리, 징, 장구 등

타악기는 곡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지만, 대체로 배합관현악과 비슷하게 편성한다.


6. 대한민국에서의 용례[편집]


1980년대 후반까지 남한에서 북한의 악기 개량은 거의 금기시 된 주제였으나 이후 민주화와 남북 교류로 인해 남북 예술인들이 제한적이나마 교환 공연을 가지고 북한의 악기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남한으로 유입되면서 백안시하는 풍토는 많이 약화되었다.

실제로 남한에서도 김대성이나 김성기 등의 국악관현악 작품에서 저대나 장새납 같은 북한 개량 관악기를 추가 편성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고, 옥류금 같은 경우에도 가야금 연주자들이 악기를 익혀 연주하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다. 다만 외국을 거쳐 들어오기 때문에 가격도 비싸고 고장나면 수리하기도 힘든 편이라, 아직 국악관현악단들의 정식 상비 악기로 쓰이지는 못하고 있다.

이외에 북한 개량 악기들의 연주를 합법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음반들도 있는데, 일본의 금강산가극단 민족기악합주단이 녹음한 민족기악곡집 '소통'과 민족관악곡집 '들판에서', 고음저대 독주곡집 '금강선녀', 장새납 독주곡집 '열풍'까지 네 종류의 CD로엔 엔터테인먼트에서 출반하고 있다. 2010년에는 소해금 항목에서도 언급한 박성진이 서울미디어에서 주로 서양 명곡들을 편곡해 수록한 CD 두 장 분량의 독집 앨범을 발매했다.


7. 중국 조선족들의 용례[편집]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중국 조선족들은 주로 북한을 통해서 문화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조선족 전통음악인들은 북한 개량 악기나 그것을 또 2차 개량한 악기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 옌지(연길)의 조선족가무악단에서 사용하는 악기들 역시 북한제 악기들이 많다.

가야금의 경우 북한의 21현 가야금에 두 줄을 더 붙여 개량한 23현 가야금을 많이 쓰고 있고, 북한 현지에서 유학한 김계옥과 박미화 등의 유명 연주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신진 국악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25현 가야금도 북한의 21현 가야금과 조선족의 23현 가야금 사례들을 참고하기도 했다.

옥류금의 경우에도 한중수교 이후 김계옥과 박미화가 한국에 초빙되어 공연과 강의를 하면서 자신들이 평양 유학 시절 평양음악대학 옥류금 교수 김길화에게 부전공으로 배운 연주를 선보인 것이 최초의 본격적인 소개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1990년대 이후 종종 국악 전공생들이 중국에 유학해 조선족 교수나 강사들로부터 북한의 개량 악기들과 그 연주법을 배워오기도 하고 있는데, 남북 문화예술 교류가 활성화될 때까지는 조선족 음악인들을 통한 간접적 습득이 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


8. '고악기'의 리바이벌?[편집]


1990년과 1998년에 각각 범민족통일음악회와 윤이상통일음악회 참관을 위해 두 차례 방북한 음악학자 노동은은 그 동안 북한에서 '부패한 왕족이나 귀족들이나 즐기던 음악'이라는 이유로 디스 당하던 종묘제례악이나 문묘제례악, 영산회상 등의 정악이 다시 복원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한 바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를 전후해 평양의 민족음악연구소에서 정악용 악기를 포함한 소위 '고악기'전반의 복원을 단행했고, 세부적인 면에서는 남한의 국립국악원이 복원한 것들과는 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원전에 충실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이런 고악기는 복원만 하고 실제로 연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대세였는데, 2000년도 후반 무렵부터 평양음악대학 민족기악학부 교수진이 중심이 되어 개최하는 '민족전통음악발표회'에서 거문고 중주나 퉁소와 기악중주 등 고악기가 주축이 된 전통음악의 연주가 연 1~2회 가량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파일:attachment/geomungotrio.jpg

거문고 중주. 개량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남한의 거문고와 같은 형태의 악기로 연주하고 있다.

파일:attachment/tungsosolo.jpg

퉁소 독주. 연주자 뒤에서 반주하고 있는 악기들이 소해금이다.

비록 속악 위주고 전통음악 전승자의 자격 평가를 겸한 시연회 성격이 강한 소규모 공연이지만, 북한에서 그 동안 고악기와 전통음악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있던 시각을 어느 정도 수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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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남숙, 백명일, 렴광식 공저. 2001 문학예술종합출판사[2]영화 및 방송음악단.[3] 1990년대 이후로는 개량 사실 자체도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화보 '조선' 의 1964년 제7호 표지와 1966년 제3호 32페이지에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혁명군대의 성격에 맞는 화선관현악' (기고자 불명). 조선예술 2005년 12호 23~24페이지[5] '어은금과 손풍금을 배합한 우리 식 관현악' (천정희 기고). 조선예술 2002년 11호 61~62페이지[6] 그럼에도 이들 관악기는 북한에서 '죽관악기'라고 통칭된다. 목관악기는 이미 서양악기를 칭하는 명사가 되어 있으니 이렇게 부르는 모양이다.[7] 이 때문에 꼭 소피리를 써야 할 경우, 개량 소피리가 아니라 기존의 소피리를 그대로 쓴다. 북한에서 개량 악기가 아닌 기존의 악기가 쓰이는 매우 드문 사례.[8] 사실 국악기에서도 더 대중적인 금관악기나발이었는데, 왜 굳이 나각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9] 연단 '혁명적인 민족관현악작품을 더 많이 쓰자' (성동춘 기고). 조선음악 1967년 8월호 32~33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