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대한민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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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의 전래[편집]


한반도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인도-중앙아시아-북중국을 통해서 맨 먼저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지고, 백제, 신라 순서대로 차례대로 전해졌다고 하는 북방전래설이 정설이다.

한편 인도에서 동남아시아 바닷길을 통해 중국 남조를 거쳐 백제로 부파 불교가 유입되었다는 남방전래설도 존재하나, 북방전래설에 비해 지지세가 약한 편이다. 물론 이는 부파 불교의 직수입을 부정하는 것이지 불교를 북조'에서만'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니며[1] 특히 북조와 거리가 있는 백제와 신라는 남조로부터도 불교를 받아들였다.

후대에 불교가 남북국, 고려를 거쳐 천 년 동안 번영을 누리는 사이에 절과 절끼리 누구 절이 더 오래되고 어디 부처가 더 영험하고 어디 스님이 더 고명하다 하는 식의 배틀이 붙어서 경쟁적으로 자기 사찰의 연대를 끌어올리고 고명한 고승들의 이름에 갖다 붙이기 바빴다. 때문에 절에서 전해지는 기록들[2] 가운데는 가려서 봐야 할 기록들이 많다. 신라 제2대 남해 차차웅[3] 원년(서기 4년)에 석가모니 금불상 53구가 지금의 강원도 고성 땅에 이윤하였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신라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기록들은 상대적으로 고대국가화와 불교 도입이 늦었던 신라 측에서 가공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4]

불교 도입에 대한 기록은 이미 그 이전부터 민간에 의해 어느 정도 퍼져 있었던 것을 공인한 시점을 말하고 있으며, 불교를 한반도에 전한 승려들의 경우 처음에는 '신통력'이라고 할만 한 특별한 재주 내지는 대규모의 공동 의료, 건축사업 등 현지 주민들을 모으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방식으로 포교를 수행하였는데, 왕실은 승려들이 포교를 위해 보이는 신통력이나 주술에 의지하여 왕실의 안녕을 빌고 또한 불교의 반야 사상과 정토 신앙을 재래신앙을 대신해 전란에 동요하는 민중을 통제하고 그들의 저항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지배이념으로 써먹고자 불교를 수용했던 것이지만, 당시 민중들의 마음을 얻고 포교를 수월하게 하고자 승려들이 민중들의 생활 속에 밀착하며 목소리를 들으려 애쓴 점이나,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할 의료 및 건축 사업을 펼쳐, 민중들의 생활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틀림없다.


1.1. 고구려[편집]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이 사신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아도라는 승려가 또 고구려에 왔고, 소수림왕은 초문사와 이불란사라는 두 절을 수도에 지어서 각기 주지로 있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東晋)의 고승 도림(道林)이 고구려 승려에게 청담격의(淸談格義) 불교의 대표자인 법심(法深)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372년 이전에 이미 문화교류의 방편으로 민간경로로 전파되었음을 알게 한다. 또 평양 근교인 황해도 안악군안악 3호분[5]에는 불교의 상징인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어서 (주로 중국 군현이 설치되기도 했던) 평안도 및 황해도 지역의 중국계 망명인들을 통해 불교가 민간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광개토대왕은 재위 2년(392년)에 평양에 절 9곳을 지었으며, 광개토대왕의 연호 영락(永樂)이 불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고구려의 네임드 승려들은 주로 평양 천도(427년) 뒤의 기록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장수왕의 첩자로써 백제의 개로왕에게 접근해 백제의 국력을 쇠잔하게 만든 도림(道琳)을 비롯해 신라로 망명해 팔관회와 백고좌회의 법을 신라에 처음으로 전했다는 혜량(惠亮)이 있고, 중국에서 주로 활약한 승려로는 삼론종을 배우고 중국에서 주로 활약하며 포교에 나섰던 승랑이나 평원왕 때 고구려 승상 왕고덕의 명을 받고 북제로 가서 승려들의 계율을 배워 왔다는 의연이 있었다.

고구려의 승려들은 중국에서 배워온 불교를 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주로 신라와 왜국)에서도 전파했는데, 왜국에 간 승려로는 소가노 우마코가 처음 백제로부터 받아온 불상을 모실 절을 짓고 비구니 세 명을 출가시켰을 때 하리마에서 고려의 환속승 혜편(惠便)을 모셔다 세 비구니에게 계를 주었다고 한다. 혜자(惠慈)가 왜국에 머물면서 쇼토쿠 태자의 정치 자문 역할을 해 주기도 했으며, 유명한 호류지 금당벽화를 그린 담징도 고구려 승려였다.[6]

그러나 고구려 말기 영류왕이 당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고, 연개소문이 집권한 뒤에도 연개소문이 기존의 귀족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도교를 장려하면서 절을 빼앗아 도관으로 바꾸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고, 이에 항의하던 승려 보덕이 고구려를 떠나 백제로 망명하기도 했다. 당서에는 평양성이 함락될 때 연남건으로부터 평양성의 성문 수비 임무를 맡았던 신성(信誠)이라는 부도(승려)가 당군과 짜고 밤중에 몰래 평양의 성문을 열어서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되어 있어서 고구려 말기 불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연씨 가문과는 멀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 백제[편집]


백제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384년(침류왕 원년)에 동진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 기록대로라면 북중국~고구려로 이어진 북방전래설과는 별개의 백제에 불교의 남방 전래가 이루어진 셈이지만, 마라난타는 해동고승전에 인도 내지는 중앙아시아 파키스탄 출신으로 되어있기는 하지만 마라난타가 실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풍납토성에서 연꽃무늬 기와가 발견되는 등, 침류왕 시기를 전후해 백제에서 불교를 도입했다는 것은 정설로 인정된다고 한다.

침류왕의 아들이었던 아신왕은 즉위 원년인 392년 "불법을 숭상해서 복을 구하라"는 소칙을 내렸고, 민중에게 불교의 신봉을 권유했다. 이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앞두고 내부 결속을 강화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 백제 불교는 아신왕 이후 개로왕 때에 이르러 한강 유역을 잃고 남쪽으로 밀려난 뒤에도 성왕 - 위덕왕 때에 이르러서 특히 융성하였는데, 성왕은 재위 19년(541년)에 중국 남조 남량에 사신을 보내 열반경 등의 불경과 장인 및 화사(화공)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인용된 미륵불광사사적에는 겸익이라는 승려에게 명해 인도에 가서 율부를 배워오게 하였다고 한다.[8]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자신의 자만 때문에 신라군에 죽자 괴로워하다 출가를 결정하기도 했다.[9] 백제금동대향로는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지었던 능산리의 절에 바쳐진 향로였다.

백제 때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는 절들의 경우는 대부분이 웅진-사비 시기로 연대를 잡고 있다. 고창의 선운사의 경우 위덕왕 24년(577년)에 창건되었는데 절의 창건자인 검단선사[10]가 현지 산에 숨어서 약탈을 벌이던 도적들에게 소금 굽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먹고 살 길을 마련해 주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현지 주민들은 해방 전까지 보은염(報恩鹽)이라는 이름으로 선운사에 소금을 공납했다고 한다.

중국의 기록에는 "백제에는 절과 도관이 아주 많다"고 할 정도로 백제의 수도에는 많은 절과 도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제의 경우 후기로 갈수록 불교로 기우는 경향이 강해졌는지, 성왕이 죽은 뒤에 왜국의 소가노 우마코가 백제의 왕자 부여계(후의 혜왕)에게 "듣자니 당신의 나라에서는 국신을 섬기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는데,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부터 모셔온 신을 그런 식으로 대접해서 뭐가 좋을 것이 있겠냐"고 지적하거나, 법왕 때에는 아예 살생을 금지시키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풀어주거나 고기잡는 도구들을 모아 불태우기도 했다고 하며, 기존에는 토속신앙의 제단에서 행하던 기우제를 절에서 대신 행하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일본 불교는 백제가 불교를 전래한 시점에서 시작된다. 성왕 때에 백제의 달솔이었던 노리사치계가 성왕의 명을 받고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왜로 가서 불법을 소개했고, 이때 소가노 우마코를 중심으로 불교를 수용하자는 숭불파와 토속신을 버리고 이방의 신을 섬길 수는 없다는 배불파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 끝에 숭불파가 승리했다. 이후 왜국 왕실에서도 절을 지어 불교를 숭배했는데, 이때 절을 지을 기술을 백제의 장인들이 전수했다고 한다.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를 지을 때 백제에서 공사를 위해 파견되었던 장인 금강중광(金剛重光) 및 세 사람의 장인이 세운 곤고구미(金剛組)는 21세기까지도 살아남아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로 꼽혔으나, 2005년에 파산하고 현재는 브랜드명만 남아 있다.


1.3. 가야[편집]


가야의 수로왕의 아내이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야로 오면서 불교를 가져왔다는 남방 전래설이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으며, 현재도 수로왕비릉 옆에 당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이 남아있다. 실제로 이 석탑의 재질은 한반도에서 나오지 않는 돌로 되어 있기는 한데 생긴 거는 석탑이라 하기 어렵다. 그러나 허황옥의 실질적인 출신지에 대해 이견이 많은 데다, 삼국유사 내용에 따르면 허황옥이 처음부터 불교를 퍼뜨리려고 가져온 것이 아니라, 처음에 가야로 가려고 배를 띄웠을 때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서 배가 뜨지 못하자 부왕이 부적 삼아 배에 싣고 가라고 해서 준 것이라 주술적인 의미가 강했다고 한다. 일연도 수로왕 때에는 아직 해동에 절을 짓고 불법을 받드는 사례가 없었다고 지적한다. 삼국유사에는 금관국 8대 왕이라는 질지왕 2년 임진(452년)에 가야에서 처음으로 왕후사(王后寺)라는 이름의 절을 지었고 그 절에 탑을 모셨다고 하였다.

위의 일화들이 가야 관련 기록 특성상 좀 부정확하고 설화적인 면모가 강하지만, 늦어도 후기 가야 때는 분명히 불교가 들어와있었던 것을 직간접적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다. 최치원이 저술한 석순응전에서 대가야월광태자와 거덕사, 월광사 이야기가 전하고 대가야 멸망 당시 사다함이 넘었다는 대가야의 성문 전단문(栴檀門)의 '전단'이 힌디어 찬단(Chandan)을 음역한 다분히 불교적 용어이며,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 천정에 연화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도 그 근거다.

1.4. 신라[편집]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가량 늦은 법흥왕(528년)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불교가 들어온 것은 더 앞선 눌지 마립간 때로, 고구려 승려인 묵호자(墨胡子)[11]가 모례(毛禮)[12]의 집에 머물면서 불도를 전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당시의 불교는 기복 신앙의 형태였고, 공인되지는 못했다. 눌지왕 때에 양에서 이 전해졌는데 당시 신라 조정에서는 아무도 사용방법을 모르던 차에 묵호자가 나서서 향의 이름과 사용법을 알려 주고, 마침 병을 앓고 있던 왕녀의 병을 고친 것을 계기로 왕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나타난 불교 수용 과정에서의 갈등은 두 가지로 파악된다. 첫째로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들 수 있다. 이차돈 등의 불교도의 불교 공인 요구와 왕권 신장 및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한 새로운 지배 이념을 필요로 하는 왕권의 요구가 상응한데 반해, 부족 합의제의 고수를 지향하는 전통 귀족 세력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불교 승인요구를 극력 거부하였던 것이 그 형태이다. 둘째로 종교적, 문화적 갈등을 들 수 있는데, 법흥왕의 불교 승인 요구에 대하여 귀족층과 전통 부족 세력을 대표하는 대신들이 승려들의 머리 모양, 옷차림새 그리고 그들의 언변에 상당한 비난을 가한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되었는데 그 과정상 결코 순조롭지는 못했다.

소지 마립간정월 대보름의 유래를 전하면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서 간통하고 있던 분수승과 궁주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이를 불교 탄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야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력을 배제해 나가는 과정에서 고구려 승려들을 처형했다는 것. 우연인지 소지왕 때 고구려에서 아도 화상과 그의 제자들이 건너오는데, 아도 화상은 '앓지도 않고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두 이야기를 결부시켜 보면 묘한 이야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흥미로운 해석을 하고 있는데,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서 포교를 했던 묵호자와 아도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법흥왕 때 (527년) 귀족들의 봉불(奉佛) 반대 주장에 대하여 이차돈(異次頓)은 자신의 목을 베어 분분한 의견을 결정토록 자청했고, 이차돈은 죽음에 임하여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는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당신께 신(神)이 있다면 나의 죽음을 통하여 이적을 행하소서." 이 말을 끝으로 처형되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피[13][14]가 솟구쳤고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등 이적이 나타나 중신 귀족이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15]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이차돈의 죽음을 그대로 종교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일연은 정치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주체는 대왕(大王)이었고 그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은 군신(群臣)들이었다. 즉 법흥왕이 그의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로써 그 일을 벌였고 봉불을 반대하던 군신들에게 연대 책임을 물게 하여 그네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흰 젖빛의 피' 는 신화적 기술 양식의 일종으로 당대 왕 측근들에 의해 조작된 풍문으로 간주 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법흥왕은 불교 수용 정책을 강력히 관철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부족합의제를 지향하던 귀족층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고 중앙 집권적인 왕권 전제 통치를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왕실에서는 지방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신장하기 위하여 부족 연맹체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재래 신앙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용 과정상의 갈등은 왕권의 지원과 불교도의 재래 신앙과의 융화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무마되고 극복되었고, 재래 신앙은 대체로 불교 신앙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수용 과정상 중국 불교가 직수입 되는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를 거치면서 한층 더 토착화되었고, 다른 나라에 비해 어느 정도 민중화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불교 수용 공인을 둘러 싸고 지배권력 내부에서 이해 관계를 달리 하여 갈등이 치열하였으나 대체로 합의에 의해 외래 종교가 받아들여졌다는데 있다.

비록 신라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밀접하게 불교를 국가와 정치면에 직결시켜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불교를 도입한 뒤의 신라는 상당히 불교적으로 바뀌었는데, 법흥왕과 진흥왕은 만년에 승려가 되어 출가하였고, 진흥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에 비겼으며[16] 진평왕은 아예 자신을 포함한 왕실 일족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불경에서 언급한 석가모니의 가족 이름으로 바꾸었다.

고구려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도 신라였는데, 고구려에서 망명해 온 승려들이 신라의 승단 조직이나 불교 사상의 전래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는 것. 대표적으로 신라 진흥왕 때의 거칠부는 젊은 시절 승려로서 전국을 유랑하다가 고구려에서 혜량이라는 승려를 만났고, 혜량은 그가 신라에서 온 사람이고 장차 무장이 될 것을 알아보고서 "나중에 전쟁 때문에 이곳에 오게 되더라도 나를 해치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11년(551년) 신라가 백제, 가야, 왜국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거칠부는 길에서 혜량을 알아보고 말에서 내려 반갑게 맞았다. 혜량은 이때 "내 나라가 어지러워서 얼마 안 가서 망할 것이다. 나를 신라로 데려가 달라"고 했고, 거칠부는 혜량을 데리고 신라로 돌아와 진흥왕에게 소개했다. 이후 신라에서 승려들에게 국가가 승직(僧職)을 제정하고 등급을 부여하는 것, 신라에서 최초로 팔관회와 백좌강회를 열도록 권한 것도 혜량이었다는 것이다. 또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백제 땅에 살고 있던 승려 보덕이 원효의상에게 열반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편 중국 남북조 중 북조 위주로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17]나 남조 위주였던 백제[18]에 비해 신라의 경우 진흥왕 이전 나제동맹기에 백제를 매개로 한 중국 남조 계통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진흥왕 때 고구려승 혜량을 통해 북조 불교까지 신라에 유입된데다 한강 유역 점령 이후에는 남북조 중 어느 한 쪽과 주로 교류한 고구려, 백제와 달리 남북조와 골고루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백제나 고구려와 달리 신라는 초기부터 남북조 두 계통의 불교가 융합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신라 불교가 역사가 짧으면서도 급속히 발전한 만한 요인이 여기에 있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원효가 서당화상(誓幢和尙)이라고 불린 것도 서당(誓幢)이 신라에서는 군부대의 이름으로 쓰였다는 것에 주목해 원효가 일종의 군종 스님 역할을 했었던 것이 아니겠느냐는 해석도 있다. 원효가 살았던 7세기는 삼국간의 전쟁이 가장 격화되어 결국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와 마지막 일전까지 벌인 난세였으므로 군종 승려 역할이 필요했을 시대적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2. 남북국시대[편집]


통일신라의 불교는 이전의 정치 이념으로서의 귀족 불교, 왕즉불 사상을 벗어나 대안, 혜숙, 혜공, 그리고 원효의상 등 여러 승려의 노력에 힘입어, 거리와 신분을 초월한 불교의 대중화로 나아갔다. 국력과 왕권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8세기 중대 신라에 들어서 수도와 왕실을 중심으로 정립된 불교는 한반도 전체에 대중적이고 일률적으로 전파되었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과 똑같은 정형화된 석탑이 전라도 지역이든 황해도금강산이든 신라 전국 각지에서 자리잡고 있고, 한반도 각지 명산에 있는 대부분의 역사가 오랜 사찰들이 이 시기에 창건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시기에 창건되었다는 사찰 중에는 1차 사서나 금석문, 혹은 통일신라 양식의 석탑이나 석등 등의 존재로 통일신라에서 창건한 사찰이 맞는 경우도 있지만, 또다른 상당수는 후대 고려~조선에 창건되었으면서도 좀 있어보이려는 의도로 사찰의 역사를 늘려잡은 케이스도 많다. 아무튼 사실이든 아니든 전국 대부분의 고찰들이 이 때를 창건 시기로 잡는다는 점에서 대략적인 상한선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통일신라의 불교는 화엄종선종이 주류를 차지했다. 화엄종은 대립과 항쟁을 지양하고, 구성원이 서로 융합하여 잠엄한 세계를 이룬다는 우주의 질서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통일국가의 상징으로 대접받아, 전제왕권국가의 율령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다. 당나라에 다녀온 유학승들은 당시 당나라 불교에서 크게 유행하던 선종도 배워왔지만, 이러한 이유로 화엄종과 선종을 둘 다 배워서 돌아온 경우가 많았다.

발해의 불교는 자료가 너무 없어서 알려진 바가 없기는 하지만 일단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나 동경용원부 지역에서 많은 불상들이 발굴되고 있는데, 구국 - 상경 지역에서 관음상이 주로 발견되는 것에 반해 서경압록부-동경용원부 지역에서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象)[19]이 주로 발견되며, 이는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지역적 차이에서 비롯된 차이점이라고 한다. 훗날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자리잡은 거란족요나라여진족금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게 된 것도 발해의 영향이 크다는 주장도 있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명을 통해 발해 문왕이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는 존호를 썼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금륜(金輪)이나 성법(聖法)은 불교의 용어이다. 861년 발해에서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이거정이 전해준 불정존승다라니경이 일본 시가현 오츠시 이시야마지(石山寺)에 소장되어 있다.


3. 후삼국시대[편집]


하대 신라에서 불교는 대규모의 사찰, 불상, 탑, 종을 지어 호사한 신라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고 왕실 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해 주었고 그 대가로 승려들은 엄청난 땅과 노비를 기부 받았는데, 그러한 행위가 너무 심해져 한 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신라 불교가 봉건 지배계급과 밀착하여 사치와 타락의 길로 떨어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신라 골품제의 모순으로 귀족 내부의 권력 다툼이 생기는 한편 지방의 호족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지방 호족의 성장과 함께,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깨달을 것을 주장하는 지방의 새로운 불교 종파로 선종이 성장해 왔다. 이 당시 9세기의 신라는 골품제가 신분체재의 모순을 드러내 봉건 체제가 점차 흔들리고 있었고, 지방의 호족세력이 사회 모순을 극복할 주체로 떠오르면서 선종은 그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선종은 직설적이고 간명한 방법과 평등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당시 귀족 불교인 교종이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지배자의 복을 비는 일만 일삼던 때에 비하여, 상당히 지방민중에게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선종도 하나의 착취자였던 호족의 이념적 기반에 불과 했다. 호족들에 의해 농민들은 땅을 잃어 유랑하였고 마침내, 그 착취자들에 대항하여 맞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도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산간에 은둔하며 참선에 전념하는 산중불교로 자리 잡는다.

신라 봉건 사회의 모순이 극에 이르러 귀족들 사이의 내분과 민중 봉기가 극에 달한 9세기에는 미륵 신앙과 도참사상이 민중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았다. 미륵 신앙은 백제 말, 고창 지방에서 검단에 의해 일어났고 민중적인 실천 불교로써 민중 속에 파고들기 쉬웠다. 그리고 삼국 시대에는 비록 왕실과 귀족층의 주도하에 전개되었으나 민중의 고난을 동정하는 태도를 취하여 개인적인 구원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원, 민중 구제를 위한 집단적인 신앙이었다. 특히 진표의 미륵 신앙이 대표적이었는데, 그는 소외된 지방에서 - 신라의 중심지가 아니라 - 미륵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참조 웹페이지:http://compassion.buddhism.org/main2/0300.htm

4. 고려 시대[편집]


고려 역시 앞선 신라, 후삼국과 궤를 같이하여 숭불정책을 펼쳤다. 애초에 창업군주인 태조 왕건조차 건국 당시 도선 국사의 불교 및 도교가 혼합된 사상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 게다가 훗날 왕건은 유훈인 훈요 10조를 통해 연등회팔관회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정도. 왕건의 이러한 불교 진흥 정책은 당시 호족들 대부분이 불교를 믿고 있었고 백성들 역시 불교를 신봉하는 경우가 많았던 시대 배경상 국론을 통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왕실의 안녕을 빌어 국운의 가호를 입기 위해 불교를 중히 여겨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다시 말해 이 시기 고려의 불교는 다분히 호국불교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4대 광종 대에 와서는 왕건 대부터 존재했던 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제도를 체계화하고, 국사(2번 항목) 및 왕사 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각 절에 사원전이라는 이름으로 토지 소유를 허용하고, 승려에게는 각종 역에서 면제되는 혜택을 부여했다. 이러한 각종 혜택은 훗날 불교 타락의 단초가 되기도. 이미 이 당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불교 관련 지출로 인해 각종 문제가 생기자, 6대 성종 시기에 와서는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서 보이는 것처럼 연등회 및 팔관회를 줄이는 등 과도한 불교 관련 지출을 줄이고자 하는 모습이 있었지만, 얼마 안 가 8대 현종 시기에 연등회와 팔관회가 부활하면서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가 무작정 숭불의 나라였던 것은 아니었다. 국가에서도 교단을 제어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는데 당장 훈요 10조에서도 도선의 이름을 빌어 사찰의 남설을 금지하는 대목이 있다. 국사와 왕사는 명목상으로는 왕의 스승이기는 했지만 결코 불교가 왕의 위에 존재하지는 않았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관장하는 계단(戒壇), 즉 관단에서 계를 받아야 했다. 국가가 승려의 수를 조절하는 장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불교가 절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시무 28조에 나와 있는 것처럼 고려는 정치는 유교, 종교는 불교로 이분화 되어 있는 나라였다.[20] 딱히 조선 시대 들어서 유불이 교체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

신라에서 교종이 흥했던 것에 대한 반동으로 후삼국을 거쳐 고려 초기에는 선종이 흥했으며, 왕건 역시 선승에게 귀의할 정도였다. 하지만 귀족층에서는 여전히 지배층에게 매력적인 교종이 인기를 누렸고, 고려에서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지배층은 교종을 신봉하게 되었다. 특히 균여로 대표되는 화엄종이 왕실 및 귀족의 지원을 받아 성행하고 있었다. [21] 교종과 선종 두 종파를 통합하려 하는 움직임이 자연히 여러 승려들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먼저 이를 구체화하려 했던 인물이 '대각국사'란 호칭으로 불리는 의천(1055~1101)이었다.

의천은 '교관겸수'의 교리를 바탕으로 개성 흥왕사에서 교단 통합 운동을 시작하면서 천태종을 도입하였고, 이후 국청사를 세우면서 선종의 통합도 이루려 하였다. 천태종의 개창은 교종에게는 별 영향이 없었지만 선종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는데 이는 천태종으로 개종한 승려들 전원이 선종 승려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특히 의천은 송, 요, 신라 등의 경전 주석서를 모아 4000여 권에 달하는 '교장'[22]을 펴냈는데, 이러한 경전의 편찬은 교종 위주의 천태종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도 꼽힌다. 실제로 의천은 선종을 상당히 싫어하여 교장에 선종 계열 경전은 넣지 않았고 요나라에서 선종의 경전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천태종은 교단을 사상적으로 통합한 것이 아니라 인적으로 통합한 것에 불과하였다. 의천 사후 천태종이 분열하면서 교단 통합은 이어지지 못했고, 훗날 지눌(1158~1210)의 등장 이전까지 고려 불교는 다시 교종과 선종의 양립 구도를 이루게 된다.

무신정변 이후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던 교종은 몰락하고 무신 정권의 후원을 받는 선종이 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 중심으로 불교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지눌이다.

지눌은 명종 18년이 되던 1188년에 공산(현재의 팔공산)의 거조사에 머물면서 세속화되어 가던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정혜 결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 적극적 보살행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 송광산 길상사(현재의 송광사)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깨달음 이후 남아있는 무명을 수행으로 사그라뜨리자는 돈오점수와 이론 학습과 참선을 함께 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고 "선으로써 체를 삼고 교로써 용을 삼아야 한다."고 말해 선, 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그의 사상에는 "교는 부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의 마음이라."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다분히 선종 중심의 교리가 드러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눌은 종래의 9산 선문을 조계종에 통합하는 등 교종을 중심으로 교선일치를 시도한 의천의 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특히 의천의 천태종이 실패로 끝난 데 반해 지눌의 법통은 현재 대한민국 조계종이 주류로 자리잡을 정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지눌의 뒤는 '유불 일치설'로 유명한 지눌의 제자 혜심이 이었다. 혜심은 노자와 공자 두 성인이 각각 가섭보살, 유동보살이라는 내용의 한 불교 경전[23]을 인용하면서, 유교도교, 불교나 결국 본질 면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혜심이 주장한 유불일치설은 오히려 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유불일치설 외에 주목할 만한 움직임으로는 참회 수행을 통해 업을 제한다는 것을 목표로 한 요세의 백련결사 등이 있다.

원 간섭기에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24]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불교 의식이 유행하면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거기다 관단 제도가 무너지고 절로 도망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승려의 수는 무한정 늘어났고 승려의 증가는 인적 자산의 감소로 이어졌다. 이러한 불교의 타락과 부패상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던 중 공민왕 대에 승려 보우가 흐트러진 불교 교단을 재정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9산으로 나뉘어 있던 선종 종파를 조계종 한 종파로 다시 통합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지눌을 중천조로 삼고 보우를 중흥조로 삼아 중요하게 여긴다.

고려시대 가장 유명한 불교 관련 문화재로는 고려 23대 고종 당시 제작된 팔만대장경이 있다.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된 동기는 현종 때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초조대장경을 조판하니 거란군이 물러갔듯이 이번에도 그 불력을 믿어보자'며 다시 대장경을 조판하게 된 것인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팔만대장경은 2007년 6월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고려 시대의 불상은 전 시기인 통일신라 시대와는 달리 정교함이 떨어지고 대신 크기가 확대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종래에는 이것을 지방색이 강하게 드러나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크기의 불상은 국가의 지원 없이는 만들기 어렵다고 보아 고려인들의 불상을 보는 안목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즉 고려인들은 우아하고 섬세한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보다는 크고 아름다운 불상이 더 성스럽다고 여겼을 수 있다는 것이다.

5. 조선 시대[편집]


조선 시대의 불교에 대해 흔히 '숭유억불'로 생각하며 불교가 쇠퇴하기만 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심지어 '조선시대 쇠퇴해서 사라진 불교가 무슨 전통 종교냐.' 같은 반응도 나오곤 한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억제받았다는 해석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시대에 타카하시 토오루가 타율성과 정체성론에 입각해 저술한 『이조불교』에서 만들어진 편견이 확대되고 재생산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사실 조선시대 불교 연구는 박사학위 논문이 10여 편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미진하며, 그나마도 2000년대 들어 연구가 진행되는 형국이다. 최근에는 '조선도 숭불 국가였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오버. 하지만 조선시대를 단순히 일방적으로 폐불만 한 시대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특히 후대의 사람들이 조선을 바라보는데 시선이 매우 正史위주였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쉽게 생긴다. 조선의 건국세력인 신진사대부들에게 있어 새 왕조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전 왕조에 대한 부정과 폄하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신진사대부들이 집중한 것이 고려 불교의 타락과 혹세무민이었다. 고려에서도 중요한 왕정수호 세력이자 지방권력의 중심이었던 사찰의 권력과 재산을 몰수하고, 당시 백성들에게 새로운 나라인 조선이 고려때보다 낫다는 걸 명분으로 하기 위해 숭유억불을 했지만, 어차피 백성에겐 높으신 분들 얘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삶은 그저 안정,평안 추구였고, 법을 지키고 윤리를 지키면 살수는 있지만 천재지변이나 인재같은 불가항력 사건을 백성들이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했고, 신앙을 괴력난신이라며 부정했던 현세주의 규범체계였던 유교는 백성들에게 정신적 대안이 되긴 어려웠다. 그래서 백성들은 유교적 율법으로 살되, 신앙에서 불교를 남겨두고 자신의 평안과 가족의 평안은 각자 모시는 신의 뜻대로 이어갔다. 그렇게 불교는 국가 통치철학과 율법체계에서 현세부분이 사라지고 정신적인 부분만 민간신앙의 형태로 유지가 된 것이다.

조선 전기 불교 정책은 '규모의 축소'로 요약할 수 있다. 이미 고려 말부터 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으나, 실제로 이를 억누르려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한 것은 조선시대 들어와서였다. 태조 대에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출가하기 위하여는 양반은 100필, 평민은 150필, 천민은 200필을 내게 하였다. 태종 대와 세종 대에는 사전(寺田)을 몰수하고 사노(寺奴)를 속공시키는 등 불교계가 지나치게 점유한 부를 축소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11개 종단을 7개로, 세종 때는 다시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였다. 국가 공인 사찰에는 면세 특권이 있었는데, 종래에는 수천여 곳이 있었던 듯하지만 조선시대가 되자 태종 때 242개, 세종 때에는 36개로 줄였다.[25] 그러나 세종 말년에는 부인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아들 수양대군(세조)에게 명하여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목적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담은 석보상절을 훈민정음으로 지어 바치고, 신하들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세조 대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였고 도첩 발급을 20필로 줄였다. 그러나 동시에 자격 미달인 승려를 가려내도록 도첩 발급 자격을 엄격하게 하였다.

성종은 보통 억불의 군주로 통하고, 실제로 사림파가 많이 진출한 성종 때에는 불교를 억압한 정책이 많다. 그러나 그것도 도첩 발급 일시 중지 등 인적 자원의 유출 방지에 머물렀다. 승과 폐지 등에 대해서는 '조종지유훈'을 내세워 유지하도록 하였고, 경국대전에도 도승법과 양종, 승과 규정을 법제화했다. 연산군 대에 승과가 폐지되는 등 불교는 큰 타격을 받지만 딱히 숭유억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연산군은 유교ㆍ불교 둘 다 밟은 왕이라.

중종 대에 사림파가 집권하고 도첩제가 폐지되면서 이후로는 특별한 억불 정책이 시행되지 않는다. 아마도 더이상 불교가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인 듯하다. 명종문정왕후가 1551년 선교 양종을 복구시키고 도첩제를 부활시켰으며 1552년에는 승과를 재개하였지만 문정왕후 사후 다시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때 승과에서 합격한 인물들(대표적인 예가 유정대사)이 임진왜란에서 승병으로 활약하면서 불교의 위상은 재평가되었다. 그 후 조선의 시책은 적극적인 억불보다는 방임을 택했고 승려라는 인적자원에 주목해 요역에 편입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백곡 처능이 1661년 현종 때 폐불의 부당함을 논하는 '간폐석교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승려가 감히 억불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고도 무사했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조정이 봉은사와 봉선사를 해체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려는 억불정책이 실제로 축소되어 봉은사와 봉선사가 건재했다는 점에서 일대 분위기 전환을 보여준다. 간폐석교소는 무려 8천 자나 되는 긴 상소문으로, 조선시대 상소문 중 가장 길다. 그 내용도 불교계에 대한 조선 정부의 잘못과 불교탄압의 이론적 타당성의 부족, 과거 삼국시대 국가들과 고려가 불교를 보호했다는 이야기, 중국의 유학자들이 불교를 신앙한 사실과 역대 왕/왕후들이 왕실의 개인사찰인 원당을 지은 것까지 언급하여 성리학 중심 왕조 국가체제 하에서는 상당히 예민한 내용까지 있다. 심지어 경주의 불국사는 2016년 1월 사찰 재건에 유림이 지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말년의 세종세조, 그리고 문정왕후의 숭불을 개인적인 불심의 발로로 보기 쉬운데, 조선은 개인의 호오로 정책이 바뀔 만큼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비록 위정자들은 억불을 견지했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천 년 동안 불교를 믿어왔다. 이러한 경향이 바뀐 시점을 대략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로 추정하는데, 성리학이 확산되고 고려의 유습이 사라지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후 임란을 거치면서 왕실에서 짓던 내불당은 실록에서 사라지지만, 여러 왕족들[26]의 개인 사찰인 원당(願堂)을 철폐하는 문제는 조선 후기에도 실록에 몇 차례 등장한다. 정조 초기 원찰건립이 금지된 이후에도 왕의 무덤을 관리할 원찰이나 조포사들은 여전히 잘만 건립되었다. 당장 수원 용주사만 해도 정조가 자신이 집권 초 내린 원당 철페령을 우회하여 지은 절이다.[27]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국가에서 불교를 보호하지 않고 방임하였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불교 행사는 조선 중기에는 완전히 사라졌고, 국가는 더이상 절의 주요 시주자가 아니었다.[28] 국가의 보호가 없다보니 유학자들은 정기적으로 절에 레이드를 가곤 하였고, 조선 후기 들어서는 양반들이 더욱 심하게 사적 수탈을 하였다.[29]

다만 이 시기에도 국가의 보호를 받는 특수 사찰들은 건드리지 못했는데, 이유는 이런 사찰들은 근처의 왕릉을 관리하거나[30], 조선왕조실록을 보관/관리하는 중책을 맡은 사찰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실록보관을 맡은 사찰들의 경우, 나라에서 유사시 주지가 실록 보호를 위해 지역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밀부를 받기도 했을 정도였다.

또한 사찰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불리는 데 열중했기 때문에 고전소설 홍길동전에서는 의적이 되어서 맨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해인사 탈취였다.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볼 수 있다. 민중의 시선에서 볼 때 고려시대와 같이 부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국가적으로 불교를 핍박한다면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까지 조선 시대의 승려는 천인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소위 '팔천론'의 근거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경국대전에서는 승과에 합격한 승려에게 문무 관료와 같은 대접을 해주고 있다. 또한 호적에 편재된 승려 중에는 양반 출신의 승려도 자주 보인다. 양반이 자기 발로 천인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요역 면제를 근거로 승려를 천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렇다면 고려 시대도 승려를 천인으로 보았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오히려 승려에게 요역을 부과함은 승려에 대한 일말의 존중까지 사라진 증거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승려의 한양 도성 출입 금지도 약간 의문시된다. 문헌에는 승니(僧尼)의 도성 출입만 금하므로 비구니만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비구는 상관하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기본적인 노선이 숭유억불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생각보다 덜 억불이었다는 것이지 억불이 아니었다고는 할 수가 없다. 수백 년간에 걸친 억불 때문에 실제로 조선의 승가는 거의 붕괴할 형편에 놓였다. 구족계를 받은 정식 승려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구족계를 받아야만 정식으로 비구/비구니가 된다. 그리고 구족계를 받은 승려 10명이 있어야 또다른 사람에게 구족계를 줄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구족계를 받은 승려 10명을 모으지 못하여 평생 사미로만 사는 승려들이 속출했다. 또한 사미 스승이 사미 제자를 거두는 형편이었다.

조선 후기에 불교의 계맥이 어찌되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범망경(梵網經)이라는 대승불경에 따르면, 세상에 계를 전해줄 스승을 찾을 수 없을 경우에는 스스로 부처나 보살 앞에서 계를 받기를 청하며 이레 동안 참회하며 기도하여 계를 받을 수가 있다.[31] 이렇게 하여 실제로 계를 받았는지 여부는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나는지 여부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계를 받음을 '상서로운 조짐으로 계를 받았다.'는 뜻에서 서상수계(瑞祥受戒), '자기 스스로 계를 받기를 맹세하여 받았다.'는 뜻에서 자서수계(自誓受戒)라고 부른다.

순조 26년(1826)에는 승려 금담(金潭)이 계를 전해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여 지리산 칠불암에서 제자 대은낭오(大隱朗悟)와 함께 부처에게 직접 계를 받기를 청하며 7일간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제자 낭오의 이마로 햇빛이 비치자 금담은 낭오가 서상수계를 하였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금담이 오히려 낭오에게 계를 받기를 청하니, 스승이 제자가 되고 제자가 스승이 되어버렸다. 낭오는 자신이 받은 서상수계가 유효하다고 믿고 여기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계를 전수해주었다.

그런데 범망경의 내용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해도 누군가가 정말로 서상수계를 하였는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또다른 문제가 있다. 범망경에 따르면 이런 방법으로 받을 수 있는 계는 보살계이다. 그런데 정식 승려(비구/비구니)가 되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계는 구족계이므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범망경의 내용을 엄격하게 따른다면, 설령 대은낭오가 정말로 서상수계를 하였다고 해도 유효한 구족계를 전수받지 못한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약 70년이 지나 고종 29년(1892)에는 승려 만하승림(萬下勝林)이 중국 북경에 있는 법원사(法源寺)를 찾아가 창도한파(昌濤漢波) 율사로부터 고심여형(古心如馨 1541-1615)이 전한 계맥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승림이 굳이 중국까지 찾아가 수계함은 낭오가 받았다는 서상수계가 유효한지 의심했기 때문이다.[32]

19세기에 금담이 낭오와 함께 서상수계를 시도하고 승림이 굳이 중국에까지 가서 구족계를 수계한 이유는 조선에서 유효한 계를 전수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구족계를 수계한 비구/비구니가 없다면 제대로 된 승가라고 할 수 없다. 19세기에는 구족계를 수계하지 못하는 승려가 넘쳐서 서상수계를 시도한 사람마저 있을 정도로 승단이 붕괴한 것이다. 수계와 계맥의 유효성은 1980년대에 조계종이 합동수계식을 하기 전까지 불교계에서 계속 문제가 되었고, 심지어 지금도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 불전은 큰 변화를 겪었다. 우선 불상의 광배가 사라지고 대신 후불탱화를 그려넣어 좁은 공간에 더 많은 도상을 배치했다. 좌대 대신 공양물을 올려놓을 수 있는 불단을 설치하고, 많은 전각을 지을 재력이 없다보니 대웅전이 여러 기능을 겸하였다. 또한 신도들이 불전 안으로 들어오게 되자 기존의 마루 바닥에서 온돌 바닥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조선 이전에 지어진 불전들은 바닥이 마루다.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봉정사 극락전은 온돌이 깔렸지만 후대에 설치한 것으로, 온돌을 뜯어내면 마루가 보인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현재의 절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조선시대 불상은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조선시대 불상은 주로 공부하는 선비의 형상을 한 것이 많다. 이때에는 불상을 조각하는 조각승들이 몇몇 유파로 나뉘어 불상만 봐도 어떤 유파에서 만들었을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개별화가 되었다.

6. 일제강점기[편집]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개항지를 중심으로 들어오던 일본 조동종, 정토종, 정토진종 등의 일본 불교종파들이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더욱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반면에 한국의 기존 종파들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만해 한용운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승려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본 불교와 결탁해 친일 행적을 보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일본식 대처승 문화가 들어와, 해방 후 비구 대처 분쟁의 씨앗이 잉태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당시에는 대처승은 시대변화에 따른 신문물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각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만해 한용운도 저술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대처승 제도를 찬성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한편으로는 조선시대부터 편찬되기 시작하던 불교 의례집이 완전하게 정비된 시기이기도 하며, 현대 한국 불교에서 불교의례시 가장 기본으로 삼는 <석문의범>이 이때 출간되었다. 그 이전 조선조에 백파긍선이 <작법귀감>을 편찬하긴 했으나, 그 이후에도 내용의 차이를 보이는 의례집들이 나오는 등 의례내용이 완전히 통일되지 않았으나 <석문의범>출간 이후로 한국 불교의레는 석문의범을 중심으로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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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조 양나라는 사찰이 2,846개소, 승려 82,700명이 있었을 정도로 불교가 융성했다. 당장 동아시아 불교에서 스님이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처음 생긴 게 남조의 양무제의 영향이다.[2] 13세기 고려 시대의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이러한 사찰 전래의 문헌들을 가리켜 사중고기(寺中古記)라고 부르고 있다. 현전하는 사찰의 연혁을 기록한 사지(寺誌) 또는 사적기(寺蹟記)는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에 불타버린 절들을 다시 짓고 절의 기록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편찬되었다. 이밖에는 해당 사찰을 창건하거나 중창한 승려들의 비석도 존재하는데, 이들 기록들은 당연히 부풀리거나 빠지거나 왜곡된 부분을 가려서 봐야 하기는 하지만, 의외로 그런 점만 걷어내고 나면 현전하는 불교 관련 기록 가운데 한국사의 부족한 시간대를 보충할 자료로 꼽히는 기록들도 많다.[3] 차차웅이 고대어로 무당이라는 뜻이라는 것은 유명하다.[4] 사실 이 기록들을 그대로 믿을 경우, 석가 이전 전불시대의 불국토가 바로 한국이다. 흠좀무. 이미 고려 시대의 일연도 해동에서 불교는 고구려에서 먼저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백제와 신라로 전해졌음이 틀림없으므로 신라 시대의 기록들은 과장된 것이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5] 무덤 주인에 대해서 중국 전연에서 망명해온 동수라는 설과 고구려 고국원왕(또는 미천왕)이라는 설이 나뉜다. 일단 묵서명으로 보아 4세기 초의 무덤임은 틀림없다고.[6] 그러나 해당 벽화와 담징의 생몰연도가 맞지 않는다고 담징이 그린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7] 재미있게도 침류왕 사후 아신왕을 제치고 즉위했던 진사왕도교를 신봉했다고.[8] 다만 이 기록에 대해서는 진위여부를 두고 논쟁이 많다.[9] 물론 이는 신하들이 말려서 그만두었다.[10] 여기서 선사라는 말은 선종 도입 이후에나 쓰인 말로 후대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11] 이름 때문에 서역승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피부색이 검은 서역인'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12] 이름을 우리말로 해석해 '털레', 즉 털보가 아니었겠냐는 해석이 있다. 또한 '털레'에서 '절'이라는 이름이 파생되었다고도 본다.[13] 밝은 달빛 아래 유혈(흘러나오는 피)이 흰 피처럼 보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14] 이 흰 피가 정액이라는 주장도 있다. 도교에는 '신선은 몸 속에 정액이 가득해서 신통한 능력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파벌이 있다. (물론 농담이다. 백혈병은 백혈구에 이상이 있는 병이지 피가 하얗게 되는 병은 아니다.)[15] 이차돈 순교 당시의 이적이 발현한 광경은 이차돈 순교비에 상징적이지만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어 있다.[16] 진흥왕이 지은 황룡사의 창건설화는 인도의 아소카 왕으로 이어지는데, 아소카 왕은 인도를 최초로 통일하고 자신이 불교를 통해 전국을 아우르고자 했던 대표적인 전륜성왕으로 꼽힌다. 로마 제국기독교를 자국의 종교(나아가 국교)로 삼고 난 뒤에 로마 시민들의 1인자이자 군사 지휘관이라는 로마 황제의 지위에 덧붙인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라는 역할을 동양에서는 전륜성왕이라는 역할이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17] 당연히 고구려는 바다 건너에 있는 남조보다는 육지로 바로 이어진 북조와 교류가 많았다.[18] 원래 백제는 수백년간 남조와 주로 교류했다. 개로왕북위에 고구려 치게 도와달라고 국서 보낸 한 번을 제외하면 유독 북조와 교류한 기록이 적다.[19] 두 분의 부처(석가모니불, 다보여래불)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본뜬 부처라는 뜻.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석가여래의 영축산 설법에 땅에서 다보여래의 사리를 담은 탑이 솟아나 부처의 설법을 찬탄하고 그 거룩함을 증명하였다는 이야기.[20] 왕건 역시 불교를 존숭했지만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중시하면서 유교적 정치이념도 적절히 받아들였다.[21] 사족으로 고려 시대에 지어진 향가 작품 '보현십원가' 11수도 균여가 지은 것이다.[22] 흔히 '속장경'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 학자가 붙인 이름으로 당대에는 교장이라고 하였다. 초조대장경은 경전을 모은 것이고 교장은 경전의 주석서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대장경의 속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하여 학계에서도 교장이라는 표현을 권장한다.[23] 현재 연구상으로는 위경일 가능성이 높다.[24] 기존 왕즉불 사상에서 고려왕=부처의 권위가 고려왕이 아닌 원나라 황제에게 넘어가서 원황제=부처가 되었고, 원나라에서 계를 받은 스님들이 등장했으며, 고려의 거대 사찰들은 원나라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5] 종전에는 이 사찰 수를 공인 사찰이 아니라 사원 자체의 수를 이만큼 줄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체 사찰의 수를 이 정도 줄이려면 엄청나게 파괴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다. 거기다 성종실록에 전국 사찰이 만여 곳 정도 있다고 하는데 백 년만에 300배로 늘어나기는 불가능하다.[26] 실록에는 궁가(宮家)라고 나온다.[27] 정조 자신이 새로 절을 지음을 금지했기 때문에, 용주사는 지을 때에 '과거 여기 절이 있었다 카더라.'면서 재건의 탈을 쓰고 공사했다.[28] 다만 왕실은 여전히 불교의 주요 고객이었다.[29] 다만 이러한 사적 수탈이 단순한 수탈이 아니라 관의 수탈로부터 양반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간주된 사례도 많이 나왔다.[30] 대표적인 예가 용주사[31] 상좌부 불교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수계함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32] 그런데 사실 만하승림이 받은 계맥 또한 고심여형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수계했다는 데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역시 서상수계이다. 만하승림은 이 사실을 몰랐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