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나로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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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성과와 한계
4. 영향과 기타



1. 개요[편집]


브나로드 운동(В народ 運動)은 1930년대 초반 일어난 민중 계몽 운동이다.


2. 상세[편집]


파일:external/gnnews.newsk.com/2007090414250.jpg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 기사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 브나로드!!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브나로드라는 말의 어원은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지식인층[1]에서 "민중 속으로 (В Народ)"[2]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몽 운동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3]. 이 말은 민중 계몽 운동의 고유 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는데 하필 러시아어라 이념대결이 치열했던 당시에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오해받기도 해서 단어만 차용했다고 누누이 강조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1917년에 공산화되었으므로, 러시아가 공산화되기 전 19세기에 있었던 브나로드 운동을 차용한 거라 공산주의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사상은 사회주의적인 사상으로 간주된다. 자세한 내용은 브나로드 운동(러시아) 참고.

이미 1920년대부터 지식인 계층과 종교계 등에서 농민들을 상대로 계몽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브나로드 운동이라 칭하는 운동은 동아일보의 주도로 일어났다. 한편으로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학생운동이 어려워진 학생들도 운동의 방향 전환을 모색했고 민중들을 계몽하는 쪽을 선택하면서 운동에 호응하게 된다.

1931년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명칭 아래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민중 계몽 운동을 독려했다. 동아일보는 의욕적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해 야학을 통해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는 한편 시국 강연, 위생 강연 등의 강연 활동도 진행되었으며 이런 활동상을 수기와 기사 등으로 알리는 학생 기자들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구체적으로 여름 방학 기간 중에 농촌으로 내려가 봉사 활동을 하고 야학을 만들어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한글을 교육한다는 내용이었다.


3. 성과와 한계[편집]


1931년부터 34년까지 진행된 브나로드 운동은 1,320처에서 5,751명의 학생이 참여하여 97,598명에게 강습을 진행했다. 특히 1934년에는 만주·일본 등 국외까지 이 운동이 확산되기까지 했다. 배부된 교재는 무려 210만 부나 되었다.

그러나 브나로드 운동에는 명백한 한계도 있었다. 애당초 한글을 가르치는 것에 일제는 의심의 눈으로 주시했다. 일제가 브나로드 운동을 일시적으로 용인한 건 학생 운동의 힘을 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아일보가 이 운동을 통해 농민의 계몽뿐 아니라 학생들의 사상 선도도 꾀했다는 것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편집장이었던 이광수의 주의 사항에서 볼 수 있다.

지방에 있는 동지들과 협력하여 이 운동을 건실하게 할 것.

글과 셈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운동에 혼합하지 말 것.

지방 지국의 알선을 받아 당국의 허가를 받은 후에 할 것.

동포에 대한 봉사이므로 품행에 주의할 것.

건강에 유의할 것.

이런 당부는 브나로드 운동을 철저히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전개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제에 순응적인 한계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브나로드 운동은 국가적 지원이 결여된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데 한계가 있었고 그로 인해서 목표로 했던 문맹 퇴치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났다. 1945년 문맹률 조사에서 문맹률이 무려 78%에 달해 1930년 문맹률 77%(일본 국세 조사)와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 이를 반증하며, 한반도에서 문맹 퇴치는 1945년 광복이 되고 대대적인 문맹 퇴치 운동이 벌어지고 나서야 실효를 거두게 되었다. 실제로 1945년부터 35년이 지난 1980년 즈음에 한반도의 문맹은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문맹률이 77~78%에 달했다는 것은 일제 당국이 조선의 문맹 퇴치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글과 셈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운동에 혼합하지 말 것", 즉 정치성이나 독립운동을 완전히 배재하고 순수한 교육 계몽 운동으로 진행하는 주의 사항 같은 경우, 브나로드 운동과 같은 공개적인 대중 운동의 특성상 합리적인 전술로 볼 여지는 있다. 당시 식민지였던 한국의 상황이나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성향 등을 생각하면 특별한 지침이나 주의 사항이 없는 한 이 운동은 필연적으로 독립운동의 성향을 강하게 띨 수밖에 없는데, 비밀 조직을 통한 지하 운동도 아니고 공공연히 이뤄지는 대중 운동에서 독립운동의 성격이 드러나버리면 당연히 일제 당국에 의한 엄청난 탄압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참여자의 정체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대중 운동의 특성상 일단 탄압의 대상이 되면 회피하거나 저항할 수단조차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순식간에 궤멸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객관적으로 보면 브나로드 운동과 같은 공개적 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은 시작하자마자 탄압에 의해 운동 역량을 대부분 손실하는 것이 불가피한,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운동이 될 수 있으므로 (꼭 독립 운동을 하려거든 지하 운동으로 비밀리에 하고) 공개 운동 자체에서는 탄압의 빌미를 주지 않도록 독립운동의 성격을 전혀 포함시키지 말고, 대신 장기적으로 독립운동 및 독립 국가 건설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교육 계몽 활동에 초점을 맞추자는 전략 자체는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저 발언을 한 사람이 당시 문학계와 언론 등에서 친일 작업에 앞장섰던 이광수라는 것. 이광수의 행적을 볼 때 해당 주의 사항이 '독립운동의 전술적 고려'보다는 '일제에 대한 타협이나 굴복'으로 읽히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다.


4. 영향과 기타[편집]


비록 공식적인 브나로드 운동은 4년만에 막을 내렸지만 지식인층의 민중 계몽 운동의 전통은 계승되어 후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에는 쇠퇴했지만 대학생들의 여름방학 기간의 농활이 브나로드 운동을 계승했다 볼 수 있다.

소설가 심훈은 브나로드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브나로드 운동의 장려를 위해 소설을 집필했는데 그것이 바로 상록수(소설)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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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로드니키(인민주의)라고 칭해지는 이들. 아나키스트들도 다수 참가했던 운동으로 농촌지역의 계몽에 초점을 맞추고 차르제를 계몽된 인민과 함께 무너뜨리려던 운동이였다. 하지만 의의로 농촌에서의 인민들이 계몽에 너무 더디고 특히 차르에 대한 충성심이 지나치게 높았기에 실망했던 많은 나로드니키주의자들이 ‘흑화’하여 허무주의로 변해 차르암살, 테러 등으로 흘러갔던 비운의 운동이다. 나로드니키는 이후 20세기 초반 러시아 혁명당시 사회혁명당으로 다시 부활하며, 이번에는 니콜라이 2세의 실정으로 인해 농민들마저 차르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지지 세력을 얻게 된다.[2] 현대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브나로트'가 맞지만 이 당시 사용했던 표기를 따라 브나로드로 표기한다. В(v)는 '~에', '~로'라는 뜻을 지닌 러시아어 전치사이고 Народ(narod)는 국민, 인민, 대중, 민족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영어로 번역하자면 대략 'to people' 정도의 의미가 된다.[3] 19세기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과 1920년대 조선의 브나로드 운동은 매우 흡사하다. 다만, 19세기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에서는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기도 하였다는 데에서는 차이점이 있다.[4] 등장인물인 채영신은 최용신이라는 당대 실존 인물을 모델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