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엡스타인

덤프버전 :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이름
브라이언 엡스타인
BRIAN EPSTEIN

헌액 부문
아멧 어터건 상[1] (Ahmet Ertegun Award)
멤버
(개인 자격)
입성 연도
2014년


브라이언 엡스타인
Brian Epstein

파일:cca21c9a08a1da6300471265d2aaf07e.jpg}}} ||
본명
브라이언 새뮤얼 엡스타인
Brian Samuel Epstein
출생
1934년 9월 19일
잉글랜드 머지사이드리버풀
사망
1967년 8월 27일 (향년 32세)
잉글랜드 런던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직업
사업가, 매니저, 기획자
소속
NEMS 엔터프라이즈
서명
파일:briansig.gif
[ 펼치기 · 접기 ]
신체
180cm
부모
아버지 해리 엡스타인
어머니 퀴니 엡스타인
형제
남동생 클라이브 엡스타인
학력
레킨 대학 (졸업)
왕립연극학교 (연기과정 / 졸업)
혈통
리투아니아계 영국인
러시아계 영국인
유대계 영국인
활동 기간
1961년 – 1967년
종교
유대교
묘소
커크데일 유대인 묘지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비틀즈를 만나기 이전의 삶
2.2. 비틀즈와의 만남
2.3. 약물 복용과 사망
3. 평가
4. 기타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만약 제5의 비틀이 있다면 그건 바로 브라이언일 것이다.

폴 매카트니#


만약 그가 나에게 그들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을 레코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스타일을 줬다... 그는 그들에게 취향을 보여주었고...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매력과 옷차림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는 것을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옷을 입히는 데 있어서 상당히 엄격했다. 그는 공연이 끝날 때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도록 시켰다. 브라이언이 그걸 다 줬다. 그는 소중한 사람이었고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 마틴#


영국의 사업가이자 비틀즈의 매니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매니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비틀즈를 만나기 이전의 삶[편집]


어렸을때 배우가 되는 꿈을 가지고 왕립연극학교에 진학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리버풀에 있는 집안이 운영하는 가구 가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가족이 음반 부서를 열게 되었을때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그 담당을 맡게 되었다. 엡스타인의 사업 수완으로 좋은 수익을 얻게되자 가족은 음반만을 판매하는 가게로 업종을 전환하고 가게 이름을 NEMS (North End Music Stored)로 정하였으며 엡스타인은 가게 사장을 맡게 된다.


2.2. 비틀즈와의 만남[편집]



파일:brian-epstein-1934---1967-1963-from-left-to-right-ringo-starr-george-harrison-epstein-paul-mccartney-and-john-lennon-photo-by-paul-popper_popperfoto_getty-images.jpg

1963년의 비틀즈와 브라이언 엡스타인(가운데)

지금 돌이켜보면 브라이언 엡스타인 덕이에요. 그는 정말 우리를 유명하게 만든 사람이었어요. 브라이언은 품격있었어요. 리버풀 상류층 같았죠.

폴 매카트니, The Beatles: Eight Days a Week – The Touring Years#


그들의 재능이 없었더라면, 그는 매니징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없었다면 우리 중 누구도 비틀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 마틴 루이스 (프로듀서, 비틀즈 학자)#


1961년 말, 비틀즈의 팬이 비틀즈의 음반을 요구했으나 NEMS에는 비틀즈의 음반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고, 비틀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팬들에게 비틀즈가 '캐번 클럽'이란 곳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을 듣고 찾아간다. 비틀즈를 만난 엡스타인은 큰 감명을 받아서 그들에게 매니저가 없으며, 현재 구하는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비틀즈의 매니저가 된다.

라는 설이 앱스타인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설이기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NEMS는 당시 리버풀 최대의 음반 매장이었기에 리버풀의 음악 소식을 담은 잡지인 'Mersey Beat'가 매번 판매되었고, 심지어 브라이언은 해당 잡지에 음악 칼럼을 기고하고 있었다. 비틀즈는 해당 잡지에서도 상당히 관심있게 다루고 있었던만큼, 엡스타인이 비틀즈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고 음반사를 경영하는 위치에서 그런 히트 밴드의 음반을 판매 안 할리가 없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애초에 리버풀의 젊은이들의 관심이 비틀즈에 몰리는 걸 알고 있었고 관심을 지니게 되어 계약을 하게 된 것이다. 2002년, Mersey Beat의 탄생에 관한 기사에서 폴 매카트니는 이에 대해 "브라이언은 이미 비틀즈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인 '비틀즈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나'를 보면 'Mersey Beat'를 만든 빌 해리는 존의 학교 친구였고, 비틀즈에 관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잡지를 만들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비틀즈에 관해 묻자 그를 캐번 클럽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비틀즈 멤버들과의 만남이 있었다고 말했다.

비틀즈와 매니저 계약을 맺은 직후, 브라이언은 거친 로커스 스타일을 하고 무대에 나오던 비틀즈에게 깔끔한 모드도련님 스타일[1]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브라이언은 매니저가 되자 비틀즈를 성공시키는 차별화되는 전략을 마련하고 차근차근 실천에 옮긴다.

1. 멤버들에게 우선 청바지와 가죽 자켓을 입지 말도록 하고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고 연주하도록 하였다.

2. 연주할 때나 연주 중간 휴식할 때, 절대 담배를 피지 말고 음식도 먹지 말도록 지시 하였다.

3. 머리 스타일은 짧은 스포츠형이 아닌 바가지를 뒤집어 씌운 듯한 모양의 독특한 장발 Mop-up 헤어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였다.

4.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나 혹은 노래 말 가사에 정치,종교, 섹스,마약 등의 민감한 주제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5. 연주가 끝난 다음 항상 네 명의 밴드 멤버들이 동시에 청중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도록 하였다.

6. 비틀즈를 일반 청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일차적으로 영국 TV에 출연 시킨다.

7. 그 다음 미국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시키는 전략을 마련하였다.[2]

#


이후, 당시 대형 음반 매장을 경영한다는 위치를 이용해서 1962년 1월 1일 데카 레코드에서 오디션을 볼 기회를 주선했으나 데카측에서는 비틀즈 같은 록 밴드들은 곧 유행이 다해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계약을 맺지 않았다. 사상 최악의 실수

당시 데카 레코드에서는 오디션을 녹음한 데모 테이프를 제공했고, 브라이언은 이를 사용해서 홍보에 나섰지만 어떠한 레코드사에서도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브라이언은 기존 밴드들처럼 오디션용 커버곡을 연주하지 말고 차라리 자작곡들을 제대로 녹음하여 밴드의 실력을 홍보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되고 EMI 산하 팔로폰 레코드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록 밴드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브라이언은 조지 마틴을 찾아가 시험 음반을 만들게 한다. 브라이언의 예상대로 조지 마틴은 비틀즈의 실력에 감명을 받아서 비틀즈와 음반 계약을 채결한다. 이후 비틀즈는 조지 마틴의 요구대로 드러머 피트 베스트를 추방시키고 링고 스타로 교체 한다. 1962년 비틀즈는 엡스타인이 그들을 지휘하는 계약을 맺었다. 흔히 사업과 법률 교육을 받는 오늘날의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매니저들과 달리 엡스타인은 자신의 강한 본능에 의존해 그룹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공연 중 흡연, 식사, 욕설을 중단하라고 말했고, 무대 위에서 함께 머리를 숙이게 했고, 비슷한 머리 모양, 정장, 넥타이를 매게 했다. 가죽 재킷과 청바지는 금지되었다.

결과적으로,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본인의 전략을 모두 성공시켜, 비틀즈를 전세계 최고의 밴드로 만들었다. 브라이언은 비틀즈를 세계 명성의 사다리에 올려놓았다. 런던 레코드 레이블의 상류층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그는 EMI의 팔로폰 레코드와 비틀즈를 계약시켰다. 브라이언은 또한 빈틈없는 마케터였다. 당시 그가 진두지휘한 프로모션 팀은 로큰롤 역사상 최고의 마케팅과 홍보팀이라고 평가받는다.

또 다른 대표적인 업적이 바로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을 성사시킴으로서 비틀즈의 인기를 미국으로 확장시키며 비틀즈를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밴드로 발전시킨 것. 1963년 말, 브라이언은 뉴욕에서 런던으로 온 팬들에게 둘러싸인 비틀즈를 본 에드 설리반에게 그들이 그해 겨울 첫 미국 투어를 시작할 때, CBS에서 방송중인 아주 인기 있는 일요일 밤 텔레비전 쇼인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할 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시켰다. 이 방송에 출연하면서 비틀즈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엡스타인은 당시 비틀즈의 인기를 더욱 더 끌어올릴 수 있도록 모든것을 실현시켰다. 그는 뛰어난 매니저이자 홍보가였다.

또 비틀즈의 콘서트를 극장과 강당에서 뉴욕의 쉐아 스타디움과 같은 스포츠 경기장으로 옮기는데 도움을 주었고, 다른 그룹들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처럼 그의 업적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에게도 실책이 있다. 비틀즈 경영 부문의 저작권 분야에서는 이해력이 떨어졌다는 것. 현대 경영자가 확보할 수 있는 법률적 도움을 회피하면서, 그는 현명하지 못하게 저작권로열티 대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을 허용했고, 이로 인해 비틀즈의 멤버들은 그들의 노래에 대한 소유권을 잃게 되었다.# 그렇게 흩어진 판권은 마이클 잭슨 등 여러 판권자의 손을 거치다가 21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말끔히 해결될 수 있었다.[3]

1963년 이후 비틀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엡스타인은 셜리 블랙을 위시한 다른 가수들과도 계약을 맺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엡스타인은 레코드 가게 이름을 따서 'NEMS 엔터 프라이시스'라는 매니지먼트 회사를 만들었으며, 이 회사에는 비 지스, 지미 헨드릭스, 크림이 계약하기도 했다. 브라이언은 비틀즈를 최고의 슈퍼 스타로 만드는 데 성공하자, 브라이언은 현명하게도 비틀즈의 사업적인 면에 전념했고 그들의 음악적인 면에서는 더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진정한 음악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간섭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밴드의 음악적 판단과 조지 마틴의 지도를 신뢰했고 그들의 음악적 방향을 지시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사업적인 면에 전념하여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2.3. 약물 복용과 사망[편집]


그러나 엡스타인은 비틀즈가 인기를 얻으면 얻을수록, NEMS 소속의 다른 가수들이 비틀즈만 차별 대우한다면서 항의하고 폴 매카트니가 점점 매니지먼트일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비틀즈가 더 이상 자신과 매니저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거라는 불안감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수면제와 정신안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한다. 세계 최고의 밴드는 매니저를 하기에도 쉽지 않았다.

1967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한 시점에서 발매될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기존의 비틀즈 이미지와 맞지 않아서 시장에서 실패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4] 자신이 비틀즈에 사업관계 이상으로 애정을 느끼고 있는 것을 자신의 성적 지향게이와 결부시킨 후에는 약물 복용량이 더욱 증가했다고 한다.




브라이언이 죽은 후 엄청난 공백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사업과 재정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돌봤고, 그 후에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조지 해리슨, The Beatles Anthology, page 268#


잔 웨너[5]

: 브라이언이 죽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존 레논: 저는 그때 우리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저는 사실 음악을 연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두려웠습니다. 전 '우린 이제 X됐어(We've fucking had it now)'라고 생각했어요.#

― 1971년 롤링 스톤의 인터뷰에서


결국 비틀즈 멤버들이 웨일스에 휴가를 가있던 8월 마지막 주에 바르비투르산의 과다 복용으로 사망, 시나고그(유태교 사원)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사망 전날 어머니와 오랜만에 저녁을 같이했고 검사결과 또한 자살로 판명되진 않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지나치게 많은 종류의 약물을 복용한 것이 사인으로 확정되었다. 비틀즈와 여러 가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당시 비틀즈 멤버들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모두 넋이 나간듯 멘붕에 빠져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6]영상 비틀즈 멤버들의 구심점으로 존재하던 그의 죽음은 이후 폴 매카트니의 프로젝트 주도와 그에 대한 멤버들의 반발로 이어져 비틀즈 해체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7]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라 그의 장례식을 유대교 랍비가 참가하여 유대교 장례로 열렸다.


3. 평가[편집]


대중음악에서 가장 유명한 매니저들 중 한 명으로, 비틀즈를 만든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AllMusic#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매니저 이상의 사람이었다. 그는 음악 선교사였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그들의 성공에 엄청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다섯번째 비틀'로 자주 불린다. 참고로 브라이언 앱스타인 만큼 중요하다고 평가 받으며 마찬가지로 제5의 멤버로 평가 받는 사람은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다.

비틀즈를 만든 사람(The Man Who Made "The Beatles")이라는 전기가 나올 정도로 그가 비틀즈의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는 탁월한 음악 사업가이자, 비틀즈의 든든한 정신적 대들보였다. 브라이언은 당시 비틀즈 관련 사업을 이끌었고, 비틀즈의 세계적인 성공의 결정적인 기여도 했으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비틀즈의 이미지[8]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브라이언은 그들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비틀즈의 프로듀서를 조지 마틴으로 발탁시킨 것도 브라이언 엡스타인이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비틀즈가 해체되게 된 간접적인 영향 역시 제공했다. 그의 사망 이후 새 매니저를 선임하는 과정에서 앨런 클라인을 선임하고자했던 조지 해리슨, 존 레논, 링고스타와 리 이스트먼[9]을 선임하고자 했던 폴 매카트니가 3:1로 부딪히면서 앙금이 깊어졌다는[10] 것이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거론되기 때문이다. 또한 널리 알려진 주장은 아니지만, 존 레논이 오노 요코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을 한 것 역시 엡스타인의 사망 후 의지할 곳[11]을 잃은 존이 오노 요코를 만나 의지하게 되면서 다른 멤버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는 설도 있는 바, 그를 비틀즈의 역사와 분리시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라고 불리는 거칠고 지역적인 음악 밴드를 세계에서 가장 큰 밴드로 바꾸기 위해서 그의 비전을 실천했다. 브라이언은 비틀즈가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큰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목표를 세웠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비틀즈의 신인 시절 했던 가장 유명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제정신이 아니신가 보군요. 이 소년들은 폭발할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그들이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커질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합니다.[12]"# 결과적으로 브라이언은 비틀즈의 성공을 위해서 막대한 기여를 했고, 비틀즈는 전세계 최고의 밴드가 되었다. 그가 비틀즈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알수 있는 발언은 1997년 폴 매카트니가 BBC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발언인 '엡스타인이 제5의 비틀'이다. 2006년 신시아 레논은 인터뷰에서 "브라이언이 없었으면 비틀즈는 어디에도 없었을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를 발굴해서 세계 최고의 밴드로 키운 중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대중음악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4. 기타[편집]


  • 에피(Eppy)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브라이언 엡스타인 본인은 '엡스타인'이라고 자신을 불렀다.

  •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매니저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명성과 맞먹을만한 매니저는 역시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 톰 파커 대령(Colonel Tom Parker). 이쪽도 브라이언처럼 매우 능력있는 매니저였다. 자신이 담당한 연예인들을 스타로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브라이언은 비틀즈 팬덤에서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 관계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이고, 톰 파커 대령은 엘비스를 망친 인물로 유명해 엘비스 팬덤이 굉장히 싫어하는 인물이다.

  • 1964년 래리 케인이라는 기자가 브라이언 엡스타인에게 비틀즈의 인기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물었는데, 브라이언은 "래리, 21세기의 아이들은 비틀즈의 음악을 들을 것입니다.(Larry, the children of the 21st century will be listening to the Beatles.)"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아무래도 사업가이다보니 소련의 관영매체에서 비틀즈를 비난할때마다[13] 단골로 써먹던 멘트가 그를 런던 출신 부르주아지라고 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정작 그가 러시아계 영국인이라는걸 생각하면 묘하다.

  • 영국 육군측에는 "구제불능의 민간인"이라는 이유로 해임되었지만, "정숙하고 양심적이며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이라는 좋은 평을 받았다.

  • 브라이언이 사망하기 두 달 전인 6월 25일, 비틀즈와 찍힌 사진. 브라이언과 비틀즈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사진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168-1.jpg}}} ||

  • 조지 마틴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에 대해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선 그가 그들(비틀즈)을 골랐다. 그는 실제로 '난 너희들의 매니저가 되고 싶어... 난 너희들을 돌보고 싶어.'라고 말했다. 만약 그가 나에게 그들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을 레코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스타일을 줬어... 그는 그들에게 취향을 보여주었고...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매력과 옷차림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는 것을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옷을 입히는 데 있어서 상당히 엄격했다. 그는 공연이 끝날 때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도록 시켰다. 브라이언이 그걸 다 줬어. 그는 소중한 사람이었고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 1964년 자신의 자서전 'A Cellarful of Noise'를 출판하기도 했다. 비틀즈의 초창기 시대 브라이언의 매니징 이야기가 적혀있다. 다만, 브라이언이 직접쓴 책이 아니고 브라이언의 조수이자 'NEMS 엔터 프라이시스'의 홍보 담당자 데렉 테일러가 대필한 책이다. 브라이언은 친했던 존 레논에게 이 책의 제목을 붙여달라고 했고, 레논은 장난으로 "퀴어 유대인(Queer Jew)"을 제목으로 하라고 했다. 레논은 나중에 엡스타인의 동성애를 언급하면서 그 책의 제목을 "소년들의 지하실(A Cellarful of Boys)"로 지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 그래픽 노블 <다섯 번째 비틀즈: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이야기>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생애를 다루었다. 비틀즈가 아닌 브라이언의 복잡했던 내면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비틀즈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내용이 불친절한 편.

  • 2014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비공연자 부문의 헌액됐다.# 그의 헌액을 위해 비틀즈 팬들은 무려 15년간 캠페인을 하기도 했다.# 음악가의 매니저로서 최초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헌액된 인물 중 한 명이다.#[14]

  • 비틀즈 팬이 올린 그의 컬러 영상.#

  • 엡스타인은 처음에 비틀즈라는 이름을 리버풀 콘서트 청구서에서 보았을 때 바보같이 들렸다. 하지만 그는 직원들에게 그들에 대해 물으면서, 비틀즈가 그의 단골 손님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놀랐고, 때때로 Cavern의 쇼들 사이에서 NEMS를 둘러보았고, 그가 상대했던 멤버들을 좋아했다.

  • 그들의 사업 거래와 함께, 엡스타인과 조지 마틴은 가벼운 우정을 쌓았다. 그는 마틴과 그의 아내가 될 주디 록하트-스미스와 오후나 저녁 외출을 할 때 함께 했다. 엡스타인이 두 사람에게 준 결혼 선물은 은색 냅킨 반지 세트였다.

  • 브라이언의 사업 파트너 중 한 명으로부터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바나나 커버와 함께)첫 번째 앨범의 사본을 받았고, 1967년 휴가 동안 거의 끊임없이 들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영국으로 데려오는 것을 고려했지만 일이 제대로 풀리기도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 당시 비틀즈의 매니저로 유명해져, 1964년 10월 18일 당대 최고의 인기 예능 중 하나였던 "What's My Line?'의 출연하기도 했다.#

  • 그는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을 선호했지만 팝 음악 트렌드에 대한 감각은 예민했다.

  • 2015년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기념하는 명판이 리버풀의 그의 생가에서 공개되었다. 이 기념비는 1934년 그가 탄생한 로드니 가 4번지에 세워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_81166730_81166729.jpg}}} ||

  • 리버풀에 있는 비틀즈 관련 최대 박물관으로 알려진 'The Beatles Story'에도 브라이언을 기억하기 위해 헌정된 곳이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rianinline(2).png}}} ||

  • 2019년 브라이언 엡스타인 탄생 85주기를 맞아, 비틀즈 팬들이 리버풀의 그의 동상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2020년 이 프로젝트는 코로나 19로 중단되었지만, 2021년 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의 사망 55주년이 되는 2022년 8월 27일,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동상이 리버풀에 있는 그의 가족의 넴스 레코드 가게의 이전 장소 근처에서 공개되었다. 동상의 조각가 중 한 명인 제인 로빈스는 폴 매카트니의 사촌이다.#

  • 2019년 7월, 비틀즈와 브라이언 엡스타인 사이에 쓰여진 첫 번째 계약서가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됐다. 낙찰금액은 27만 5천유로. 한화로 약 3억 6천만원에 달하는 돈이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해당 계약서는 1962년 1월 24일에 쓰였다. 이때만해도 드러머는 링고 스타가 아닌 초기 멤버 피트 베스트였다. 이후 링고 스타가 합류하면서 엡스타인과 비틀즈는 두 번째 계약서를 썼다. 계약내용에 따르면,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일을 찾는 것과 스케쥴 관리, 홍보등을 맡고 ”의상과 메이크업, 음악, 아티스트의 행동에 관한 모든 문제에 관여한다”고 되어있다. 엡스타인은 전체 수익에서 10%를 받기로 했다. 단, 비틀즈의 수익이 1주일에 120파운드를 넘을 경우에는 15%를 가져간다는 계획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폴 매카트니가 엡스타인의 수익을 20%에서 낮추는 협상을 했다고 한다.#

  • 2012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브라이언 엡스타인역을 맡은 전기 영화가 개봉 될 예정이었으나, 제작이 취소됐다.#

  • 2020년 7월, 그의 전기 영화가 제작된다는 뉴스가 발표됐다. 제목은 '마이더스 맨(Midas Man)'. 요나스 오케르룬드[15]가 감독을 맡으며,# 제이콥 포춘 로이드[16]가 엡스타인을 연기한다.# 2021년 11월에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5. 관련 문서[편집]




6. 외부 링크[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1 08:49:15에 나무위키 브라이언 엡스타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비틀즈가 이 스타일로 바꾼 건 모드족과 관계가 없다.[2]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신호탄이 된 역사적인 방송이다.[3] 그래서 비틀즈는 2018년이 되어서야 곡을 유튜브에 업로드할 수 있었다. 퀸이나 건즈 앤 로지스 같은 메이저 록밴드들이 2000년대 중후반부터 곡들을 유튜브에 풀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늦은 것이다.그래도 이 밴드에 비해서는 양반이다[4] 그의 유언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발매할 때 자켓을 갈색 종이 봉투로 포장하여 사람들이 놀라지 않게 할 것'이었다고 한다.[5] 롤링 스톤의 창립자다.[6] 특히 브라이언과 친했던 존 레논의 충격받은 표정을 볼 수 있다.[7] 그래서 '엡스타인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비틀즈의 역사는 달라졌을까?'하는 떡밥은 비틀즈 팬덤의 단골 떡밥이다.##[8] 흔히 비틀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바가지 머리의 풀먹인 양복을 입은 모습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만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더 후와 마찬가지로 로커스 스타일이었다.[9] 린다 이스트먼, 그러니까 폴 매카트니의 아내가 되는 린다 매카트니의 아버지다.[10] 물론 이전에도 폴 매카트니와 다른 멤버들 사이의 갈등은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폴 매카트니가 지나친 완벽주의 정신으로 일관하여 페퍼상사 세션에 들어서는 비틀즈 멤버들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조지 마틴마저 폴 매카트니를 설득시키기 위해 설설 기는 분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갈등이 폭발한 것은 신임 매니저 선임 과정에서 폴과 다른 멤버들이 3:1로 싸운 것이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11] 존 레논은 어릴적 아버지가 집을 나가서 부정 결핍을 앓았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폴 매카트니에게 많이 의지한 면도 있었다고.[12] 비틀즈를 데리고 데카에 오디션을 보러갔는데, 거기서 퇴짜를 맞자 열받은 브라이언이 한 말이다. 이 말은 들은 데카의 관계자들은 브라이언을 반쯤 정신나간 사람 취급했다고 한다. 참고로 데카 레코드에서는 "로큰롤은 쇠퇴하는 장르고 미래가 없다. 비틀즈는 실패할 것이다"라며 비틀즈와 엡스타인을 물먹였으며 이는 대중음악사 사상 최악의 실수로 거론된다.[13] 비틀즈는 60년대의 공산권에서도 인기 폭발이라, 불법 빽판이 나돌고 제2의 비틀즈를 꿈꾸던 여러 청년들이 일렉트릭 기타를 만들려고 공중전화기의 장비를 훔쳐가는 것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될 정도였다.[14] 또 다른 인물은 롤링 스톤스의 매니저 앤드류 루그 올덤.[15] 매카트니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한적이 있다.[16] 퀸스 갬빗,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