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니프 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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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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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US 에어웨이즈의 역합병



파일:BRANIFF.jpg
브래니프 국제 항공(Braniff International Airways)[1]
IATA
BN
ICAO
BNF
BCC[2]
27
항공사 호출 부호
BRANIFF
설립년도
1928년
소멸년도
1982년 5월 12일
허브공항
댈러스-포트워스 국제공항[3]
댈러스 러브필드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
LA 국제공항
마이애미 국제공항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
캔자스시티 국제공항
자회사
브래니프 호텔
브래니프 경호 시스템
브래니프 에듀케이션 외
보유항공기수
115 (1979년 당시)
런치 커스터머
B707-220
취항지수
81 (1979년 당시)
1. 개요
2. 역사
2.1. 초기
2.2. 중기: 제트기 시대
2.3. 몰락
3. 특이사항




1. 개요[편집]


미국 국적의 항공사였다. 1982년 금융위기로 파산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회사이다.


2. 역사[편집]



2.1. 초기[편집]


폴/토머스 브래니프 형제가 1928년 5월 28일 동생 폴의 이름을 따 항공 운수를 시작한 게 최초이다. 실질적인 운영은 동생 폴(1897~1954)이 맡았으며 형 토머스는 지원을 했는데, 당시 토머스 브래니프(1883~1954)가 오클라호마에서 꽤 날리는 보험 설계사였기 때문에 수월한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동년 6월 20일 첫 상업운행을 개시했으나, 유니버설 항공에 인수당한 후 1930년 회사를 다시 차렸다.

이후 형제는 회사를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폴의 노력으로 회사는 1934년 미국 우정국으로부터 항공우편 운송권을 받았고[4] 1935년에는 최초로 멕시코에 취항했다. 토머스는 몇 차례의 주식공모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면서 많은 자본을 확충했다.

이후 텍사스를 중심으로 노선을 확장해나갔으며, 많은 인수합병을 통해 회사를 키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민간 항공 위원회는 브래니프 항공에 카리브해, 중앙/남아메리카 운수권을 부여했다. 이후 브래니프 항공은 남미 노선을 집중적으로 확장시켜 메이저 항공사로 발돋움하며, 인수합병으로 미국내 노선도 집중적으로 확장해 왔다.

그런데 1954년, 토머스 브래니프가 사냥 차 비행선을 탔다가 추락사하였고, 그 해 말에는 폴 브래니프마저 암으로 별세했다. 브래니프 형제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경영자로는 부회장이었던 찰스 비어가 선임된다.


2.2. 중기: 제트기 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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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8월에 샌안토니오 국제공항에서 촬영된 보잉 707-220(N7073)

찰스 비어는 안정적인 경영을 바탕으로 다가오는 제트기 시대에 맞춰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해나갔다. 1959년 12월 19일에는 보잉 707-220을 운항하기 시작했고,[5] 1961년에는 보잉 707의 동체 단축형인 보잉 720도 도입하며 1960년대 중반까지 자사 항공기들을 제트기로 빠르게 대체했다. 1964년에는 보잉이 제작할 예정이던 초음속 여객기인 보잉 2707을 주문예약하기도 했다.[6]

1964년에 브래니프 항공은 보험지주 회사인 그레이트아메리카 코퍼레이션에 인수되었다. 그레이트아메리카 회장 트로이 포스트는 기존 경영진의 보수적 경영을 못마땅해했고, 운영진을 교체시켰다. 1965년 5월에 새로 사장이 된 하딩 로렌스(Harding Lawrence, 1920~2002)[7]는 회사를 현대적이고 주목받는 이미지로 대대적으로 개편시켰다. 특히 브래니프 항공이 고용한 디자이너 알렉산더 지라드(Alexander Girard, 1907~1993)는 위에 나와 있듯 다소 밋밋했던 CI도 참신하게 바꾼 것은 물론이고, 기체의 도색도 무려 15개의 다른 색을 쓰게 하여 매우 색채적으로 바꾸었으며,[8] 항공기와 매표소, 게이트 라운지 등에 각자 다른 색을 칠하는가 하면, 터미널에서 비행기로 가는 동안 여승무원들에게 플라스틱 버블을 쓰게 하고[9] 복장도 우주적으로 뜯어고치는 등 새롭고 다채로운 시도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 로렌스는 총 13종의 항공기를 운영하던 브래니프 항공이 '국내선은 727, 하와이는 747, 남미는 DC-8로 운항하라'는 식으로 단 3종의 기체만 운항하게 바꾸었으며, 그 결과 로렌스가 브래니프를 이끌던 15년 동안 브래니프의 재정 규모는 1965년의 1억 달러에서 1980년의 15억 달러로 무려 15배나 증가했다.

이후 브래니프 항공은 베트남 전쟁 수송계약을 체결하고, 상술했듯 공격적이고 미래적인 마케팅 컨셉으로 사세를 확장시켰으며, 1965년에는 보잉 727-100QC 모델을 도입해 심야 화물운송 서비스를 시작했고, 1967년 2월 1일에는 팬 아메리칸 그레이스 항공[10]을 인수해 남미에서 입지를 넓혔으며, 1971년 1월 15일에는 보잉 747-100 운항을 시작했다. 참고로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브래니프의 747-100은 도색 때문에 'Great Pumpkin'이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그러면서 1970년대에는 매년마다 8대의 새로운 제트기 함대를 추가하며 브래니프 항공은 업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함대를 보여주었다.

1970년 4월 18일부터 1974년 1월 13일까지는 제트레일(Jetrail)이라며 댈러스 러브필드 공항 주차장부터 공항 터미널까지 3개의 역을 갖춘 2.8km 길이의 모노레일을 깔아 서비스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는 세계 최초의 완전 자동화 모노레일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은 서비스 기간 동안 1천만명 이상의 승객이 이용했으며, 브래니프가 댈러스-포트워스 국제공항으로 허브를 옮긴 1974년 1월 13일 이후에도 계속 운영되었지만, 1974년 9월 1일에 운영이 중단되고 남아있는 시설들은 1978년에 해체되었다고 한다.

1973년에는 '모빌의 아버지' 알렉산더 칼더를 초빙해 플라잉 컬러즈(Flying Colors)라는 신도색을 만들었으며,[11] 1977년에는 유명한 의류 디자이너 로이 홀스턴(Roy Halston, 1932~1990)를 초빙해 새로운 디자인의 승무원 유니폼을 만들어 큰 호평을 받았다. 이 유니폼은 고풍스러운 디자인도 디자인이었지만, '지금까지 착용한 가장 간단하고 착용감 좋은 유니폼'이라는 찬사도 받았다.

2.3. 몰락[편집]


1978년, 카터 행정부에 의해 항공운수 자유화가 실시되었다. 이 때문에 1978년 말부터 LA와 보스턴에 허브를 신설하고 노선을 대규모 확충하게 되는데,[12] 효과는 좋았지만 하필이면 오일쇼크가 발생해서 전체적인 유지비가 상승, 적자를 기록한다.

한국 노선에 취항하던 1979년부터는 에어 프랑스영국항공과 합작해 콩코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13] 노선은 댈러스 - 워싱턴 D.C - 런던/파리. 그러나 이 사업은 큰 적자를 내며 망해버렸고 이 일은 회사에 있어 매우 큰 악재로 돌아와 건실하던 브래니프를 망하게 하는 직접적 요인이 된다.

유지비도 유지비였지만[14], 애초에 브래니프가 운영하던 댈러스~워싱턴 D.C 노선 경로[15][16]에서 콩코드 손님이 나올 리가 없었다.[17] 브래니프 항공은 나중에는 10%의 추가요금까지 없애 일반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과 가격이 같게 했지만 승객들은 늘지 않았다. 애초에 댈러스부터가 탈 만한 수요층이 없는 걸... 결국 1980년 6월 30일 콩코드 서비스를 종료한다.

한때 가장 높은 수익과 성장률을 보이던 브래니프 항공은 이 콩코드와 기타 여러 이유 때문에 매우 큰 하락세를 타게 된다. 1978년까지 흑자였던 항공사는 1979년 약 4천만 달러의 손실을 낸 이래 80년 1억 2천만 달러, 81년 1억 7백만 달러의 손실을 낸다. 게다가 안 그래도 이때 오일 쇼크로 유류비가 94% 상승한 상황인데도 과도하게 허브를 신설하고 장비를 도입하는 바람에 대규모의 부채가 쌓였다. 또한 본사마저 러브필드에서 댈러스-포트워스 국제공항으로 옮기며 엄청난 돈이 깨져나갔다.

계속되는 재정난으로 채권단은 하딩 로렌스를 회장직에서 내려오게 하였고, 결국 로렌스는 1980년 12월 31일에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채권단은 아시아/유럽 지역 노선을 철수시키게 했는데, 이때 후술할 한국 노선도 폐지되었다. 그 와중 1981년 여름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으로 또 손실을 입었다.[18] 이후 퍼스트 클래스를 없애는 등 계속해 자구책을 내놓았지만 내놓는 족족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1982년 5월 11일에 브래니프 항공은 파산을 선고받았고, 바로 다음날인 1982년 5월 12일, 브래니프 항공은 영업을 중단하고 폐업함으로써 54년간의 역사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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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당일에 댈러스-포트워스 국제공항에 머물러 있는 브래니프 항공의 비행기들.

브래니프 항공의 폐업에는 황당한 에피소드가 2개 전해진다. 먼저 1982년 5월 12일 아침에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에 있던 승객들은 브래니프 항공의 모든 항공편이 갑자기 결항되자 당황했지만, 얼마 후 '브래니프라는 회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듣고 모두 하기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이날에 이미 공중에 떠 있던 브래니프 항공 소속 비행기들은 목적지에 접근한 경우가 아니었으면 모두 강제로 호출되어 브래니프 항공의 허브 공항이던 댈러스-포트워스 국제공항으로 회항당했다고 한다.

파산 이후, 1983년 기존의 자재를 인계받아 다시 시작했다가 망했고(1983~1989), 다시 한 번 시작했다가 망했다.(1991~1992) 그리고 9년 뒤인 1991년팬 아메리칸 항공도 똑같은 일을 겪게 된다.[19]

혹자는 이 항공사의 몰락에 대해 '다채로움을 지향하던 항공사답게 최후까지도 다채로웠다'라고 농담조로 말하기도 한다.

3. 특이사항[편집]


  • 계열사를 보면 알겠지만 항공사 치고는 사업이 매우 다각화되어 있다. 항공사가 호텔도 운영하는 건 흔한 편이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 경호 부문과 교육, 부동산까지 운영했는데, 모회사인 항공사가 망한 이후에도 존속한 자회사들도 많았다고 한다.

  • 1979년 9월 18일부터 1980년 10월 12일까지 약 1년간 보잉 747SP로 한국 김포국제공항에 취항했는데, 당시 브래니프 항공의 보잉 747SP는 김포-LA 노선을 주 2회 왕복운항했다고 한다.

파일:braniff_strip.jpg
  • 승무원에게 여러 겹으로 다채롭게 디자인된 옷을 입혔는데, 이 강점(?)을 살려 승무원이 스트립을 하는 파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 스페인포르투갈, 중남미에서는 광고가 큰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전 좌석 가죽시트임을 강조하려고 "fly in leather"를 그대로 직역해서 "en cuero"라 썼는데, 현지인들에겐 이게 "en cueros", 즉 홀딱벗고 비행기에 타세요(fly naked)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사 항공 라운지를 "Rendezvous Lounge"라고 썼다가 난리가 났는데, 이는 브라질 포어 속어로 'Rendezvous'가 창녀란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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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멸 당시의 데이터[2] Boeing Customer Code, 보잉사 고객코드[3] 본사 소재[4] 전년도 터진 메일 스캔들의 영향이 컸다.[5] 브래니프 항공은 B707-220의 런치 커스터머이기도 한데, 이 기종에 따로 장착한 P&W JT4A-3 터보제트 엔진의 연비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판매량은 총계 5대뿐이었다. 심지어 그 5대도 다 브래니프 항공이 사갔다고 하며, 1대가 시험 비행 중에 조종사 훈련생의 실수로 엔진 4개 중 3개가 분해되어 강에 추락하는 사고로 유실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운항된 707-220은 겨우 4대밖에 없었다.[6] 물론 보잉 2707은 개발이 취소되었고, 이에 따라 브래니프의 주문도 자동으로 취소되었다.[7] 브래니프에 오기 전까지는 1955년부터 일해온 컨티넨탈 항공의 부사장이었는데, 그가 컨티넨탈에서 일한 10년 동안 항공사는 이전의 5배 규모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이런 능력이 브래니프가 로렌스를 초빙한 이유일 것이다.[8] 이후 7개의 색상이 쓰이는 것으로 최종 확정되었다.[9] 그러나 균열 등의 보관 문제와 보딩 브릿지의 도입 때문에 딱 1개월밖에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사진[10] Pan American-Grace Airways, 1928년에 설립된 미국의 항공사. 판아그라(Panagra)라는 약칭으로 더욱 유명했으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팬 아메리칸 항공과 미국의 화학 기업 W.R.그레이스 앤 컴퍼니(W. R. Grace and Company)의 합작 투자로 설립되었다. 미국 동부 해안과 남미 서부 해안을 오가는 루트로 유명했다.[11] 남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색채를 바탕으로 3원색을 사용해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도색을 만들었다. 사진[12] 16개의 도시에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32개의 신규 노선을 개설했다. 홍콩 등 아시아에 진출하게 된 게 이때이다.[13] 특이사항으로 브래니프가 도입한 기체는 공동운항을 상징하듯이 반반도색을 했다. 왼쪽에는 브래니프, 오른쪽에는 영국항공/에어프랑스의 도색을 했다. 후에 싱가포르 항공이 공동운항 할 때도 같은 방식으로 운영했다.[14] 가뜩이나 운영시기가 오일쇼크가 한창일 때였다.[15] 전 구간 내륙 노선이었다. 여기서 초음속 비행을 했다가는 지상에 소닉붐이 울리면서 아래에 사는 주민들에게 큰 민폐가 되며, 그렇다고 초음속 운항을 안 했더니 가격은 퍼스트, 좌석은 이코노미라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거기다 편당 최다 탑승률이 15명이었으니, 적자가 안 나는 게 이상할 판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콩코드 여객기 승객이 92~120명인 것을 감안하면, 최대 승객의 1/6~1/8만 태우고 비행기를 운항한 셈. 요즘 기준으로 보면 보잉 777-300ER에 40~55명만 태우고 운항한 셈이다.[16] 그나마 콩코드가 흑자를 본 대서양 노선의 경우에도 먼 바다로 나가고 나서야 초음속 비행을 시작했기에 소닉붐 논란에서 자유로웠으며, 비슷하게 싱가포르항공도 싱가포르 - 바레인 - 런던 노선에서 영국항공과의 공동운항으로 콩코드를 리스했을 때 전 구간 초음속 비행을 하다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소닉붐으로 인한 민원이 들어와 역시 창렬이 되어 탑승률이 바닥을 기었다.[17] 콩코드의 주 수요층이 비즈니스 고객인데, 두 지역 모두 비즈니스 수요가 있다기엔... 차라리 시카고 같은 비즈니스 수요가 보장된 곳에 투입했다면 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소닉붐 때문에 시끄럽다고 빗발치는 항의는 못 피했을 테지만...[18] 로널드 레이건이 관제사들을 대량해고시키고 그 자리에 군 관제사들을 채워넣은 것으로 유명한 그 사건이다.[19] 다만 차이점은 이쪽은 보잉 747을 무리하게 도입하고 알맞는 수요가 안 나는 노선에도 투입하는 바람에 사실상 이 항공사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