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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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토마스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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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 트윈스 등번호 56번
클레투스 데이비슨
(1999)

브래드 토마스
(2001~2004)


트래비스 보우어
(2005)
한화 이글스 등번호 26번
세드릭
(2007)

토마스
(2008~2009)


카페얀
(2010)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번호 36번
에드윈 잭슨
(2009)

브래드 토마스
(2010~2012)


클리트 토마스
(2012)




파일:/image/001/2008/07/03/PYH2008070311560006300_P2.jpg

브래들리 리차드 토머스
Bradley Richard Thomas

출생
1977년 10월 22일 (46세)
뉴사우스웨일스 시드니
국적
[[호주|

호주
display: none; display: 호주"
행정구
]]

신체
193cm / 99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소속팀
미네소타 트윈스 (2001, 2003~2004)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05~2006)
한화 이글스 (2008~2009)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2010~2011)
슝디 엘리펀츠 (2012~2013)
중신 슝디 엘리펀츠 (2014)[1]
시드니 블루삭스 (2011~2013)[2]


1. 개요
2. 경력
3. 은퇴 후
4. 연도별 성적
5. 여담



1. 개요[편집]


오스트레일리아의 前 야구 선수. 2008~2009년 한국프로야구한화 이글스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었다.

LG 트윈스에서 뛰었던 외국인 투수 크리스 옥스프링, 넥센 히어로즈에서 뛰었던 애드리안 번사이드와 같이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야구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호주에 은메달을 안겨준 멤버이다.

영어권 인명인 Thomas는 외국어 표기법상 토머스로 쓰는 것이 옳으나 KBO 리그 진출 시 등록명이 토마스였다.


2. 경력[편집]


1995년 LA 다저스와 계약을 맺었으나 1997년 5월 9일 계약이 해지되었고, 5월 12일 자유 계약 선수로 미네소타 트윈스에 입단하였다. 주로 마이너리그에서 활동하다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보스턴 레드삭스일본프로야구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를 거쳐 2008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였다. 당시 한화 이글스는 기존의 마무리 투수였던 구대성의 무릎 수술로 인한 마무리 부재를 고민하고 있었고, 결국 2007시즌에 11승 13패라는 호성적을 보여준 외국인 선발 투수 세드릭 바워스를 포기하는 용단을 내려가며 토마스를 영입한다.[3]

시즌 초기에는 한국의 일교차 심한 봄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여 첫 등판을 블론세이브로 맞이하는 등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이 시기 야구팬들 사이에서 '또맞스', '불마스'로 불렸다. 과거 한화에서 뛰었던 외국인 마무리 레닌 피코타의 악몽을 재현하나 우려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기량도 회복되어 '토마신', '또막스' 등으로 별명이 변하며 한화의 초중반 상승세에 일조하였고, 어느새 삼성 라이온즈오승환세이브왕을 놓고 경쟁할 정도에 이르게 된다. 비록 시즌 후반기에 팀이 몰락하여 경쟁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지만, 그래도 시즌 3승 6패 31세이브에 평균자책점 2.84를 거두어 2008년 세이브 순위 2위에다 KBO 리그 사상 최초의 30세이브 외국인 투수가 되었다.

구종은 150Km대의 강속구와 슬라이더, 체인지업. 구위는 위력적이지만 추위에 약한 모습과 2이닝 이상 투구하면 구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4]

2008시즌 종료 후 일본프로야구 구단에서도 영입 제의가 들어왔으나, 이런저런 물밑 협상 끝에 직전 시즌 연봉보다 25% 인상된 계약금 5만 6천 달러, 연봉 30만달러 등 총액 35만 6천 달러에 재계약하였다. 소문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도 오퍼가 들어왔으나 딸 시에나가 한국이 좋다고 해서 가족회의 끝에 한국에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한화는 2009시즌을 완전히 죽을 쒀서 토마스는 마무리 투수로서 할 일도 없었고, 본인의 성적까지 신통치 않아 한화의 상승세를 잡고 늘어지는 일까지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덕분에 폭주기관차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였다.

2009시즌 부진의 이유는 아내의 결핵 투병 때문이었다고 하며, 2군에 내려갔던 이유도 간병하느라 컨디션도 그리 좋지 않은데 잠시 쉬다 오라는 식으로 보냈다는 것이 거의 정설. 후반기 들어 구위를 조금씩 회복하면서 다시 호투를 거듭하였으나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팀에서 마무리 투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호주 대표팀으로 불려가서 쿠바전에 마무리 등판했다. 순식간에 쿠바 타선을 잠재워 버리는 엄청난 포스를 보여줬다. 그러나 팀은 타선의 힘이 약간 모자라서 1점 차로 패배했다.

2010시즌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입단해, 4월 29일(한국 기준) 미네소타전에 구원 투수로 나와 2.1이닝 2탈삼진. 승리투수가 되었다.[5] 2010시즌 디트로이트의 선발이 무너지고 시즌 중반 주마야의 시즌아웃, 돈트렐 윌리스와 니푸더의 부진으로 상대적으로 많은 기회를 잡았는데, 주로 롱 릴리프 역할을 수행하며 땜빵 선발로 출전하기도 했다. 시즌 성적은 49경기 출장 6승 2패 69.1이닝 평균자책점 3.89로 얼핏 보면 준수한 성적이지만 승계주자 실점률이 49%에 달할 정도로 분식회계가 잦았다.

시즌이 끝난 후에는 구대성, 옥스프링과 같이 호주 프로야구 리그의 시드니 블루삭스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2011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시즌을 보내지 못하고 나오면 엄청나게 얻어맞았다.

2012년 대만프로야구 슝디 엘리펀츠에 월 1만 5천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입단했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호주 대표팀에 뽑혔으며 1라운드 B조에서 맞붙은 한국과 호주의 경기에 등판하였다. 이 때 해설을 맡았던 박찬호는 친정팀에서 마무리를 맡았던 투수인데 아느냐는 질문에 "미국에 있었던 때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불평 불만이 많았다더라. 마무리이면서도 6, 7회와 같이 이른 시점에 등판하는 데 불평을 했다고 들었다."고 언급했다. 어디서 어떻게 들은 평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무리가 6회에 등판시키는데 불만이 없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6]

2014년 3월 20일에 벌어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호주 리그 올스타 팀 친선경기에도 참가, 8회에 팀이 대량실점을 당한 후에 등판해 1실점(이전 투수 승계주자 실점)으로 틀어막고 내려갔다.

2013년 이후 슝디 엘리펀츠에서 퇴단 후 2014년 하반기에 재입단했다가 다시 퇴단했다. 대만에서는 통산 59세이브로 현재 CPBL 통산 세이브 9위를 기록하고 있다.

3. 은퇴 후[편집]


이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2017년부터 호주에서 Tickled Pink Travel라는 여행 업체의 MD[7]를 맡고 있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01
MIN
5
0
2
0
0
16⅓
9.37
20
6
14
1
6
2.082
49
-0.6
-0.7

2003
3
0
1
0
0
4⅔
7.71
6
1
3
1
2
1.929
63
-0.2
-0.2
2004
3
0
0
0
0
2⅔
16.88
7
0
1
0
0
3.000
31
-0.5
-0.3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WHIP
2008
한화
59
63⅓
3
6
31
(2위)
0
0.333
2.84
52
3
27
63
1.18
2009
45
50
2
5
13
(5위)
0
0.286
2.88
43
2
21
56
1.26
KBO 통산
(2시즌)
104
113⅓
5
11
44
0
0.313
2.86
95
5
48
119
1.2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10
DET
49
6
2
0
0
69⅓
3.89
77
4
29
7
30
1.529
108
0.6
0.1

2011
12
0
1
0
0
11
9.00
17
1
6
1
7
47
2.091
-0.5
-0.7
MLB 통산
(5시즌)
72
6
6
0
0
104
5.80
127
12
53
10
45
1.731
75
-1.1
-1.9


5. 여담[편집]


아이러니하게도 본인보다 딸인 시에나 토마스가 더 인기가 있다. 2008년 4월 27일, 한밭야구장 경기에서 KBO 최연소 시타자로 등장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그 날 1루에서 시에나와 하이파이브했던 김태균이 9회 끝내기 역전 투런을 쳐 '김로리'란 별명이 추가됐다(…). 그 이후로도 카메라에 간간히 비칠 때마다 애교 만점의 모습을 보여주어 팬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세를 탔다. 거리에 나가면 아버지보다 시에나를 더 많이 알아봤단다.

신경현에 의하면, 실력있는 투수이긴 했지만 중요한 경기에선 옵션을 이유로 등판을 거부하는 등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 선수들 사이에선 평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마이너리거였던 2001년,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한 아메리칸항공 AA11기에 탑승할 뻔했는데 팀이 극적으로 플레이오프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면서 예약을 취소했다고 한다.

영화 머니볼에서 빌리 빈이 선수 목록을 살펴보는 장면에서 잠시 등장한다.
파일:attachment/머니볼/토마스.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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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년 시즌 이후 퇴단했다가 14년 하반기에 재입단. 이때 팀 이름이 슝디 엘리펀츠에서 중신 슝디 엘리펀츠로 바뀜.[2] 윈터 리그로 활동[3] 다만, 상황에 따라 선발도 겸직할 수 있는 용도로 영입. 본인도 인터뷰에서 처음엔 선발 투수로 영입된 줄 알았다가 마무리를 맡게 됐다고 술회했다.[4] 그 때문에 연장전에 돌입할 때는 토마스의 뒤를 받쳐줄 또 다른 구원투수가 필요했고, 그 와중에 발굴된 것이 2년차 투수였던 김혁민.[5] 참고로 이 때 미네소타의 인기 스타 조 마우어를 잡았다.[6] 당시에는 김성근의 SK가 한창 호성적을 올릴 때라 이에 영향을 받아서 투수 기용을 변칙적으로 하는 팀이 많았다. 소위 벌떼 야구가 그것.[7] Managing Director, 상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