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즈네프 독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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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브레즈네프 독트린(Доктрина Брежнева)은 소련의 제5대 서기장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1968년 11월에 폴란드 통일노동당 5차 대회의 연설에서 발표한 독트린이다. '제한주권론' (Доктрина ограниченного суверенитета) 이라고도 한다.
2. 상세[편집]
이 독트린은 그해 8월에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을 막기 위해 군사개입한 것을 정당화하는 주장이다. 독트린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될 수 있다.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자본주의 국가로 바꾸려고 하거나 공산권 국가가 종주국인 소련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을 하려고 한다면 그 해당 국가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진영 모두에게 문제가 되므로 소련은 그 해당 국가로 전차를 몰고 가서 반동분자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려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물론 국제법상으로는 엄연한 내정간섭이지만 당시 소련이 최전성기였던 데다 이미 냉전이 굳어진 시점이었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시달렸기 때문에 서방 국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비난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보면 서방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이럴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그 당시의 미국도 따지고보면 남말할 처지는 못되었던 것이 브레즈네프 독트린만큼은 아니더라도 중남미나 동남아시아 국가, 중동 등에 내정간섭을 한 경우가 많기도 했다. 그레나다 침공 사건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를 지원하면서 100만명 이상이 학살당하는 일을 방조한다든가, 칠레의 군부 쿠데타를 사주해서 피노체트가 집권하게 된 일이 대표적이다.
또 마르크스 사상에는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할 것을 요구하는 국제주의가 명시되어 있으므로 서방의 비판 이외에 제2세계 내부에선 명분상 문제가 없었다.
결국 소련은 기어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20만 대군을 체코슬로바키아에 파견하여 폴란드군과 헝가리군, 불가리아군,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특히 스탈린 사후부터 소련과 거리를 조금씩 두던 중국은 이를 사회주의적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소련이 제국주의로 타락했다고 맹비난했다. 중소결렬 이후 계속 악화되던 중소관계는 결국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폭발했다.
물론 소련도 직접 개입은 부담이 컸는지[2]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적용된 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는 중앙유럽 국가에 대한 압박 용도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 예로 폴란드에서 1980년에 레흐 바웬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폴란드 연대노조가 총파업을 일으켰을 때 이 독트린에 의거하여 소련군이 출동 준비를 갖추고 폴란드 정부를 압박하자 이에 폴란드 군부가 스스로 1981년 12월 13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바웬사를 비롯한 폴란드 자유노조원들을 체포한 것을 들 수 있다.
1988년 3월에 일명 '신사고(新思考) 외교'[3] 를 펼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를 방문하여 발표한 소련의 새로운 외교방침인 이른바 '신(新) 베오그라드 선언'에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부정함으로써 이 독트린은 비로소 폐기되었고 이후 동구권 민주화의 불씨를 당기게 되어 동유럽 혁명으로 이어졌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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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독 군대인 국가인민군의 개입은 "나치 독일의 침략을 재현"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음을 우려한 브레즈네프가 막판에 중지시켰다.[2] 위성국이라고 해도 주권이 인정되는 주권 국가였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는 남발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서방만큼은 아니라도 바르샤바 조약기구 역시 그 나라 국민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요구되는 데다 혼란이 장기화되면 미국이나 유럽이 손을 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3]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이 펼친 외교정책. 신사고 외교를 주창한 소련 정부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철폐,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의 철수, 동서대립의 해소, 동구권의 민주화와 통일의 용인, 핵무기 감축 정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