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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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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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파일:토리노 FC 엠블럼.svg

38대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다니엘 프레멜
(1928~1929)

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1930)

밀루틴 이브코비치
(1930)
밀루틴 이브코비치
(1932)

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1932~1933)

불명
(1934)
브라니슬라프 세쿨리치
(1934)

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1934)

불명
(1935)
밀로라드 아르세니예비치
(1935~1936)

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1936~1937)

베르나르드 히글
(1938)



유고슬라비아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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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Благоје Марјановић
Blagoje Marjanović

출생
1907년 9월 9일
베오그라드
사망
1984년 10월 1일 (향년 77세)
베오그라드
국적
[[유고슬라비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display: none; display: 유고슬라비아 왕국"
행정구
]]

신체
171cm, 72kg
직업
축구선수(공격수[1]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SK 유고슬라비아 (1920~1924)
SK 올림피야 (1924~1925)
BSK 베오그라드 (1925~1939)
SK 추카리치키 (1939~1941)
FK 디나모 판체보 (1945~1948)
NK 프롤레테르 오시예크 (1949)
감독
BSK 베오그라드 (1953~1956)
토리노 FC (1957~1958)
칼초 카타니아 (1958~1959)
FK 포베다 프릴레브 (1959)
국가대표
58경기 37골 (유고슬라비아 / 1926~1938)

1. 생애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 뒷이야기
4. 수상
4.1. 클럽
4.2. 개인
4.3. 감독



1. 생애[편집]


마르야노비치는 1907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주부였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의 마르야노비치는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살았고 그의 형제 니콜라와 공을 갖고 놀기를 즐겼다. 그러다 몇몇 소년들이 보여준 축구 묘기에 넋을 잃은 마르야노비치. 이 순간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렇게 축구에 꽂혔고 돈을 탈탈 털어 축구공을 산 그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축구 연습을 하는데 시간을 쏟았다.

이런 마르야노비치를 처음 주목했던 팀은 바로 SK 유고슬라비아였다. 이 팀에서 그는 어린 선수로 남아있었지만 라덴코 밀로비치에 의해 BSK 베오그라드로 팀을 옮겼다. 마르야노비치는 이곳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보였고 아웃사이드 라이트였던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와 강력한 공격 옵션으로 활약했다.

그래서였을까, BSK 베오그라드는 처음 선수들에게 돈을 줄 무렵 그와 티르나니치에게만 돈을 주기 시작했었다. 이 당시 대략 32달러[2]를 받았다고 알려졌었는데 그만큼 큰 사랑을 받는 선수였고 전 선수에게 돈을 줄 때도 가장 많은 돈을 받았다.

국가대표팀에서도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올림픽에서는 포르투갈을 만났고 2대1로 패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모사[3]는 출전 자체를 못했고 네덜란드 관광만 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2년 후의 초대 월드컵에서는 달랐다. 전 경기에 주전으로 출전했고 한골을 넣었다. 그리고 여러 친선 경기들에서 그는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고 당시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에는 친정팀 BSK, 이탈리아 등지에서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1961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우반신 마비와 함께 말을 못하게 되었다. 모사는 1984년에 사망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마르야노비치는 초기 선수 생활에는 패싱에 맛을 들여서 득점을 많이 기록하진 않았지만 BSK에서 그의 스타일을 바꾸었다. 슈팅 파워는 평범하여 힘이 실린 슈팅을 구사하지는 않았지만 정확한 슈팅으로 수많은 득점을 기록했고, 온 몸이 무기인 공격수였다.[4] 게다가 발리슛에 능하여 공이 어디로 오든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축구 지능도 뛰어났고 프리킥 역시 잘 찼다.

30년대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축구 스타였고, 탁월한 골 스코어러였다. 주로 활동했던 BSK 베오그라드에서는 당연히 역대 최고의 선수이고 대표팀에서도 총 36골을 넣어 역대 득점 4위에 이름이 올라있다.


3. 뒷이야기[편집]


  • 모사는 선수 생활 도중 몇 차례 해트 트릭을 기록하였는데,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1934년 베오그라드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기록한 해트 트릭이었다. 그의 활약으로 유고슬라비아는 브라질을 8대4로 이겼는데, 이 경기가 바로 브라질 대표팀 역사상 최다 실점이 기록된 경기였다. 그리고 이 경기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모사의 기술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 중에는 오스트리아의 전설적인 명장 후고 마이슬도 있었다.[5] 그는 마르야노비치가 분더팀에 있었으면 완벽한 팀이 되었을 것이라 극찬했다.
  • 마르야노비치는 자신의 명성을 즐기며 살았다. 또한 유명한 바람둥이였는데, 그의 바람기는 하이두크 스플릿과의 경기를 앞두고 한 달마시안 여성을 만나면서 끝을 맺었다. 그녀의 이름은 플라닌카 쿨리치. 결국 마르야노비치는 쿨리치와 1938년에 결혼하였고 이는 대중과 기자들에게 큰 화젯거리였다. 그리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 2010년에는 몬테비데오, 신의 축복이 있기를, 2014년에는 몬테비데오에서 봐요, 이 당시의 유고 대표팀을 다루는 2편의 영화가 세르비아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몬테비데오, 신의 축복이 있기를에서는 당시 유고 대표팀의 거의 모든 선수들이 다 나온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모사와 티르나니치인데 그들의 우정과 사랑싸움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6회: 1924(SK 유고슬라비아), 1930–31, 1932–33, 1934–35, 1935–36, 1938–39(이상 BSK 베오그라드)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준우승 4회: 1926(SK 유고슬라비아), 1927, 1929, 1937-38(이상 BSK 베오그라드)
  •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1회: 1934(BSK 베오그라드)


4.2. 개인[편집]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득점왕 3회: 1930, 1934-35, 1936-37(BSK 베오그라드)


4.3. 감독[편집]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준우승 1회: 1954-55(BSK)
  •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2회: 1953, 1955(이상 B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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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센터 포워드, 아웃사이드 라이트[2] 현재 가치로는 대략 450달러쯤 된다.[3] 마르야노비치의 별명.[4] 발뒤꿈치, 가슴, 심지어는 로 득점한 적도 있다고 한다.[5] 1930년대를 주름잡았던 분더팀의 그 감독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