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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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의 주요 수상 및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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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Влади́мир Ашкена́зи | Vladimir Ashkenazy

파일:Vladimir_Ashkenazy.jpg
본명
블라디미르 다비도비치 아시케나지[1]
Vladimir Davidovich Ashkenazy
Влади́мир Дави́дович Ашкена́зи
출생
1937년 7월 6일 (86세)
[[소련|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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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러시아SFSR 고리키
국적
[[소련|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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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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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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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피아니스트, 지휘자
학력
모스크바 음악원
수상
제2회(1962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1위
제5회(1955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2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피아노 1위(1956)

공식 사이트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연주
3. 여담



1. 개요[편집]



소련 출생의 아이슬란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1937년 구 소련의 고리키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예비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1955년에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쇼팽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듬해인 1956년에는 생애 최초로 공산권을 벗어나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해서 우승을 차지한다. 이 때 보여준 연주실력 덕분에 아쉬케나이지의 이름이 서방에서도 본격 알려지게 된다.

1962년에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2] 이듬해인 1963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시절에 만난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토룬 요한스도티어(Thorunn Johannsdottir)와 결혼하였다. 원래 소련 국적이었던 아쉬케나지는 이 결혼으로 인해 1974년에 아이슬란드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결혼후 아들을 낳은 아슈케나지는 공산국가였던 조국 소련을 떠나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으며 영국으로 이주한 후 4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서방 세계에서 아쉬케나지는 연주회와 레코딩 양쪽에서 모두 주목받는 젊은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았으며 30살에 접어들면서 피아노 독주 연주자를 넘어 실내악 연주자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한편 아쉬케나지는 1970년대부터는 지휘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1975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본격 지휘자 경력을 시작한다. 이어 로열 필하모닉의 지휘자이자 음악감독,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와 독일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 베를린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앙드레 프레빈의 뒤를 이어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및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이 때 러시아/소련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었다.[예시] 하지만 로열 필이 재정난으로 휘청이자 1994년에 로열 필 지휘자(& 음악감독)를 사임하였으며, 1998년에는 체코 필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해서 2003년까지 활동하였다.

이어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동경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직을 맡았으며 2009년부터는 호주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겸 예술 고문직을 맡았다.

일반적인 피아니스트 출신 지휘자들이 대부분 지휘 활동에 전념하는 것에 반해 최근까지도 아쉬케나지는 앨범을 내는 등 피아니스트로의 활동도 멈추지 않고 있다.

2020년 1월 나이와 건강 때문에 음악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2. 연주[편집]


피아니스트 아슈케나지는 거장급 연주자 중에 가장 표준적인 연주 스타일을 갖고 있다.[3] 그의 연주를 두 가지 표현으로 요약하자면 규범적인 연주와 학구적인 연주'라고 할 수 있는데, 튀거나 자의적인 해석을 개입시키지 않고 작곡가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하는 모범적인 연주로 정평이 나 있다. 기교나 감정표현 역시 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말그대로 딱 균형이 잡힌 연주를 들려준다.

이런 음악성 덕분에 아슈케나지는 바로크 시기의 음악부터 현대 음악까지 폭넓은 연주 레퍼토리를 갖고 있으며, 어떤 작곡가의 어떤 음악을 연주해도 무난함 이상의 안정적인 연주를 보여준다. 어떤 곡을 누구의 연주로 들어볼까 고민이 될 때 아슈케나지의 연주를 선택하면 최소한 실망할 일은 없다. 때문에 피아노 지망생이나 피아노 연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아쉬케나지의 연주를 많이 참고한다고 한다.

이처럼 기복이 적은 안정적인 연주력 덕분에 아슈케나지는 여러 개의 전집 음반을 녹음했는데, 대표적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집과 쇼팽,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 전집 등이 있으며 모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연주 스타일이 협연이나 실내악에도 잘 어울리기 때문에 그가 참여한 실내악 음반 중에도 명반이 꽤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이츠하크 펄만(바이올린), 린 하렐(첼로)과 같이 녹음한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 전곡 음반.

다만 이런 유형의 연주자가 항상 그렇듯이 연주 자체는 훌륭하지만 개성이 부족하다거나 청중을 열광시킬만한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기교적인 측면이건 음악성 측면이건 그의 연주를 넘어설 수 있는 연주자는 매우 드물다. 나온지 수십년이 지난 그의 음반들이 아직도 클래식 팬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바흐, 파르티타 BWV 829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Op.13


쇼팽, 에튀드 Op.25 No.6
쇼팽, 발라드 Op.23


리스트, 도깨비불
차이콥스키, 뱃노래


라흐마니노프, 에튀드 Op.39 No.2
쇼스타코비치, 전주곡과 푸가 Op.87 No.7

한편 아슈케나지는 1975년부터 지휘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1981년 런던의 로열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초빙되면서 지휘자로도 본격 데뷔했다.

3. 여담[편집]



  • 2022년 11월에 올라온 근황. 팔순이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정정하다.

  • 그가 존경한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와의 일화다: 모스크바에서 리흐테르를 만난 아슈케나지가 용기를 내어 "제 연주 좀 들어주실 수 있나요?"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리흐테르의 집에 초대받아 연주를 끝내고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리흐테르가 아무런 흠도 안잡고[4] "아주 잘했어"라고 말했다. 놀라서 조언을 부탁하니, "아니, 그냥 굉장히 잘했어."라고 대답했다. 이에 더욱 당황한 아슈케나지가 "하지만... 흠잡을 부분이 있을텐데요?"라고 하니까, "모르겠네. 지적할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좋아서 아무 말도 하기 싫네. 자넨 아주 훌륭한 연주자야, 앞으로 행운을 비네."라고 대답했다. 이에 아슈케나지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5][6]

  • 키가 168cm 정도로 체격이 작은 편에 속한다. 이 때문에 손도 크지 않지만 기교적으로 막히거나 힘들어하는 경우가 없이 어떤 패시지도 무난하게 소화해낸다.(엄지손가락은 엄청 크다.) 특히 손가락을 넓게 벌려야 하는 것으로 악명높은 라흐마니노프의 곡도 매우 훌륭하게 연주한다.[7]

  •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연주자로 여러번 내한 연주를 했다. 피아노 연주자로 온 적도 있고 지휘자로 온 적도 있는데 2008년에는 EU 유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해서 임동혁과 협연을 하기도 했다.[8]

  • 실력은 두 말 할것도 없고 인간성도 매우 훌륭한 연주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국내 팬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높다. IMF 시절에 내한했을 때 한국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개런티를 20%만 받아간 것은 유명한 일화.

  • 국내 피아노 조율 명장 이종열은 악기에 까탈스럽고 민감한 피아니스트 때문에 진땀을 뺄 때가 많았다. 아쉬케나지가 피아니스트인 아들과 내한했을 때 리허설을 마친 뒤, 이종열이 다시 무대 위 피아노를 점검하고 있었다. 아쉬케나지가 갑자기 무대로 걸어나오길래 또 무슨 엄청난 요구사항이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아쉬케나지는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좋은 피아노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고 다시 들어갔다. 아쉬케나지는 피아노 타박을 안 하기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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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종 '아쉬케나지'나 '아슈케나지'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아시케나지'가 올바른 표기이다.[2] 차이코스프키 콩쿨은 공동 우승인데 이때 공동우승자는 영국 출신의 동갑내기 존 오그돈(John Ogdon).[예시]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1번, A-B-A' 중 A' 부분 대부분의 타 피아니스트들이 여기서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카덴차처럼 흘려버리는 파트를 아슈케나지는 메인 테마를 잘 살려서 연주했다.루간스키와 비교해보자. [3] 지휘자 아슈케나지 역시 이런 성향을 갖고 있다.[4] 리흐테르는 까다로운 성격만큼 무자비한 비평으로 유명했다.[5] (출처 인터뷰 영상) 피아노계에서 손꼽히는 거물인 그가 수십년전의 일화를 회상하면서 목소리까지 떨며 감격에 젖어있다. 가히 클래식 피아노계의 정점이라고 칭송받는 거장한테 이런 찬사를 듣다니 그 어느 피아니스트가 감격하지 않을까.[6] 특히 극렬한 악보원칙주의자였던 리흐테르에게 아슈케나지의 정석적인 스타일은 매우 취향에 맞았을 거라고 추정된다. 물론 스타일은 스타일이고 어디까지나 실력이 특출나서 칭찬받은 것은 자명하다.[7] 강철 타건과 큰 스케일로 유명했던 에밀 길렐스도 키가 170cm에 미치지 못했다.[8] 이 때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