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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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성립
3. 비스마르크의 외교 및 국내 정책
4. 의의
5. 한계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비스마르크 체제는 1871년 독일 제국의 건국 이래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주도된 1889년까지 이어진 독일 제국의 국내 정치 체제 겸 국제 외교 체제였다.


2. 성립[편집]


알브레히트 폰 론에 의해 칸츨러로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철혈 정책을 통해 프로이센 왕국의 군사적 발전을 꾀했으며, 노련한 외교술로 프랑스 제2제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킨 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전을 이끌어내었다. 이로써 통일된 독일 제국이 수립되었으며, 비스마르크는 제국 수상으로서 제국의 노선을 결정하게 된다.

결국 1871년 중부 유럽의 강대국 독일 제국이 수립됨에 따라 독일 제국의 칸츨러인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는 유럽의 체제가 형성된다. 빈 체제 이후 다시금 유럽에 성립된 현상유지 형태의 동맹 체제가 바로 비스마르크 체제가 된다.


3. 비스마르크의 외교 및 국내 정책[편집]


그의 외교와 국내 정책을 요약하면 반불친러식민지보다는 국내산업 우선이다.

우선 그는 중부 유럽 내에서 독일 이후의 강대국더이상 생겨나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킴과 동시에 유럽에서는 더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동쪽의 인접한 강국인 러시아 제국과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손을 잡으면서 보수적 군주제를 유지하는 세 제국의 사이를 돈독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1873년 10월 3제 동맹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하는데 러시아의 발칸반도로의 진출, 그리고 거기서 오는 오스트리아와의 태생적인 충돌로 인하여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1881년에 3제 동맹은 다시 맺어지고, 1884년에 갱신되었으나 1887년에 최종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그래도 러시아와 독일은 1887년에 재보장 조약을 통해 그나마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동맹은 비스마르크의 실각 이후 빌헬름 2세가 팽창주의로 넘어가면서 결국 최종적으로 파탄나게 된다.

한편 비스마르크는 3제 동맹이 어려워지면서 프랑스 고립 정책이 힘들어질 것을 대비하여 또 다른 동맹국인 이탈리아 왕국을 끌어들이게 되고, 1882년 이른바 삼국 동맹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고,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 동맹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또한 비스마르크는 팽창주의보다는 국내 산업 역량의 발전을 우선시했는데, 이는 독일 제국의 화학 및 공업력이 막대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일부 타협하기도 했는데, 그 산물이 사회보장제도이다. 이후 다른 열강들도 자국에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한다.


4. 의의[편집]


비스마르크 체제는 빈 체제 이후 유럽에 나타난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국가를 묶는 동맹 체제이자 집단 안보 제도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체제는 향후 베르사유 체제, 이후에 형성되는 EU에도 적용될 정도로 유럽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19세기가 식민지 쟁탈전의 시기가 된 데에도 비스마르크 체제가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유럽이 안정되어있으니 유럽 각 열강들도 비유럽 세계로의 세력 투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열강의 대결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형태로 피할 수 없었음이 드러났다.


5. 한계[편집]


완벽할 것 같았던 비스마르크 체제는 태생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단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가 너무 좋지 못했다. 우선 제일 큰 문제는 독일의 이웃국인 러시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지속적인 갈등의 불씨가 있었다는 점이다.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발칸반도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범게르만주의의 한 축으로 독일로서는 어쨌거나 잘 지내야만 하는 사이였다. 비스마르크는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한 프랑스 고립 정책으로 러시아에게 손을 내밀었고 동맹국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는데 이 역시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라예보 사건(과 그로부터 시작된 7월 위기)에서 보듯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갈등은 결국에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고야 말았다.

또한 해당 체제는 외교를 통해 군사 문제를 풀고자 했는데 문제는 이 시기부터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적 확장정책을 펼치면서 동시에 군비 확장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다는 데 있다. 결국 비스마르크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해 외교적으로 유지되던 체제는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켜야 하는 시기로 넘어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군사정책 중심으로 외교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그동안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유럽 내 최고의 제국으로 스스로 고립을 자처했던 영국의 패권이 서서히 약화되면서 유럽에서 힘을 키우고 있던 독일을 견제하게 되었고 모든 체제가 어그러지는 결과로 가져오게 된다.

결국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이후 영국과의 정면충돌도 불사하겠다면서 야망을 불태우던 빌헬름 2세세계 정책이 시작되었고,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상황으로 끌려나가게 된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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