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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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제6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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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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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베드로
리노
아나클레토
클레멘스 1세
에바리스토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알렉산데르 1세
식스토 1세
텔레스포로
히지노
비오 1세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아니체토
소테르
엘레우테리오
빅토르 1세
제피리노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갈리스토 1세
우르바노 1세
폰시아노
안테로
파비아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고르넬리오
루치오 1세
스테파노 1세
식스토 2세
디오니시오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펠릭스 1세
에우티키아노
카이오
마르첼리노
마르첼로 1세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
에우세비오
멜키아데
실베스테르 1세
마르코
율리오 1세
제36대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베리오
다마소 1세
시리치오
아나스타시오 1세
인노첸시오 1세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제45대
조시모
보니파시오 1세
첼레스티노 1세
식스토 3세
레오 1세
제46대
제47대
제48대
제49대
제50대
힐라리오
심플리치오
펠릭스 3세
젤라시오 1세
아나스타시오 2세
제51대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심마코
호르미스다
요한 1세
펠릭스 4세
보니파시오 2세
제56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요한 2세
아가피토 1세
실베리오
비질리오
펠라지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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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1-120대]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제65대
요한 3세
베네딕토 1세
펠라지오 2세
그레고리오 1세
사비니아노
제66대
제67대
제68대
제69대
제70대
보니파시오 3세
보니파시오 4세
아데오다토 1세
보니파시오 5세
호노리오 1세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74대
제75대
세베리노
요한 4세
테오도로 1세
마르티노 1세
에우제니오 1세
제76대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비탈리아노
아데오다토 2세
도노
아가토
레오 2세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제85대
베네딕토 2세
요한 5세
코논
세르지오 1세
요한 6세
제86대
제87대
제88대
제89대
제90대
요한 7세
시신니오
콘스탄티노
그레고리오 2세
그레고리오 3세
제91대
제92대
제93대
제94대
제95대
자카리아
스테파노 2세
바오로 1세
스테파노 3세
하드리아노 1세
제96대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레오 3세
스테파노 4세
파스칼 1세
에우제니오 2세
발렌티노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제105대
그레고리오 4세
세르지오 2세
레오 4세
베네딕토 3세
니콜라오 1세
제106대
제107대
제108대
제109대
제110대
하드리아노 2세
요한 8세
마리노 1세
하드리아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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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대
제112대
제113대
제114대
제115대
포르모소
보니파시오 6세
스테파노 6세
로마노
테오도로 2세
제116대
제117대
제118대
제119대
제120대
요한 9세
베네딕토 4세
레오 5세
세르지오 3세
아나스타시오 3세
미즉위 선출자
스테파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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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1-180대]  
제121대
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제125대
란도
요한 10세
레오 6세
스테파노 7세
요한 11세
제126대
제127대
제128대
제129대
제130대
레오 7세
스테파노 8세
마리노 2세
아가피토 2세
요한 12세
제131대
제132대
제133대
제134대
제135대
베네딕토 5세
레오 8세
요한 13세
베네딕토 6세
베네딕토 7세
제136대
제137대
제138대
제139대
제140대
요한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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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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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대
제143대
제144대
제14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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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오 4세
베네딕토 8세
요한 19세
베네딕토 9세
제146대
제147대
제148대
제149대
제150대
실베스테르 3세
베네딕토 9세
그레고리오 6세
클레멘스 2세
베네딕토 9세
제151대
제152대
제153대
제154대
제155대
다마소 2세
레오 9세
빅토르 2세
스테파노 9세
니콜라오 2세
제156대
제157대
제15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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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대
알렉산데르 2세
그레고리오 7세
빅토르 3세
우르바노 2세
파스칼 2세
제161대
제162대
제163대
제164대
제165대
젤라시오 2세
갈리스토 2세
호노리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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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레스티노 2세
제166대
제167대
제16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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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대
루치오 2세
에우제니오 3세
아나스타시오 4세
하드리아노 4세
알렉산데르 3세
제171대
제172대
제173대
제174대
제175대
루치오 3세
우르바노 3세
그레고리오 8세
클레멘스 3세
첼레스티노 3세
제176대
제177대
제178대
제179대
제180대
인노첸시오 3세
호노리오 3세
그레고리오 9세
첼레스티노 4세
인노첸시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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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1-240대]  
제181대
제182대
제183대
제184대
제185대
알렉산데르 4세
우르바노 4세
클레멘스 4세
그레고리오 10세
인노첸시오 5세
제186대
제187대
제188대
제189대
제190대
하드리아노 5세
요한 21세
니콜라오 3세
마르티노 4세
호노리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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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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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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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레스티노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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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1세
클레멘스 5세
제19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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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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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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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인노첸시오 6세
우르바노 5세
제20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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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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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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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12세
제20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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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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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노 5세
에우제니오 4세
니콜라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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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1대
제212대
제2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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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노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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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바노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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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5대
클레멘스 8세
레오 11세
바오로 5세
그레고리오 15세
우르바노 8세
제236대
제237대
제238대
제239대
제240대
인노첸시오 10세
알렉산데르 7세
클레멘스 9세
클레멘스 10세
인노첸시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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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41대 이후]  
제241대
제242대
제243대
제244대
제245대
알렉산데르 8세
인노첸시오 12세
클레멘스 11세
인노첸시오 13세
베네딕토 13세
제246대
제247대
제248대
제249대
제250대
클레멘스 12세
베네딕토 14세
클레멘스 13세
클레멘스 14세
비오 6세
제251대
제252대
제253대
제254대
제255대
비오 7세
레오 12세
비오 8세
그레고리오 16세
비오 9세
제256대
제257대
제258대
제259대
제260대
레오 13세
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비오 12세
제261대
제262대
제263대
제264대
제265대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제266대




프란치스코







제257대 교황
Pius X
비오 10세

파일:pope-pius-x.jpg
교황명
비오 10세 (Pius X)
본명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
(Giuseppe Melchiorre Sarto)
출생
1835년 6월 2일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 제국
파일: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국기.svg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리에세
사망
1914년 8월 20일 (향년 79세)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로마 사도 궁전
재위기간
1903년 8월 4일 ~ 1914년 8월 20일
(11년 16일)
즉위미사
1903년 8월 9일
장례미사
1914년 8월 23일
시복
1951년 6월 3일, 비오 12세
시성
1954년 5월 29일, 비오 12세
축일
8월 21일
사목표어
Instaurare Omnia in Christo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회복하며)
서명
파일:비오10세서명.png
문장
파일:비오10세문장.png
교황관열쇠, 그리고 방패가 있는 전통적인 교황 문장 형식을 지니고 있다.[1] 방패 상단부에는 오른발로 책[2]을 얹고 있는 성 마르코사자가 새겨진 베네치아 총대주교 문장이 있고, 하단부에는 거친 바다 속에 이 놓여 있으며 위에는 황금육각성이 떠 있는 만토바 주교 문장[3]이 있다.
언어별
성명

라틴어: Sanctus Pius PP. X
이탈리아어: Papa San Pio X
영어: Pope Saint Pius X

1. 개요
2. 즉위 전
3. 교황 선출
4. 재위 기간
5. 예언과 기적
6. 시성
7. 기타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교회에서 사도직의 가장 큰 장애물은 신자들의 소심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들의 비겁함입니다."

가톨릭의 제257대 교황이자 성인. 축일은 8월 21일.

당시 기독교 교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대적 풍토를 거부하고, 오히려 전통적인 해석 및 관습을 계속 유지하도록 장려한 가톨릭 전통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각종 부조리로 문란해지고 해이해지던 교회 시스템 및 성직자 교육 등의 면에서 이를 다시 바로잡는 중요한 쇄신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특히 교회법과 성무일도[4] 등을 개정하고 새로이 체계화한 20세기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 중 하나다.

비오 10세는 탈권위적이고 대중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종교의 모습을 거부하되 폐단은 과감히 없애, 현재의 가톨릭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에 대해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보다 더 유명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예감하고 막아볼려고 동서분주(東西奔走)했고 100% 적중률(?)의 예언과 기적의 교황 이미지도 존재한다.

2. 즉위 전[편집]


1835년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검소하게 살았고 심지어는 신발이 닳아 빠질까봐 맨발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오랫동안 신학교 교수신부를 역임하다가 1875년 트레비소의 주교가 되었고,[5] 이후 만토바 주교를 거쳐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서임되었다. 당시 그가 주교 및 대주교직을 지내고 있을 때 깊은 신앙심과 성실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시민들에게 상당한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1903년 7월 20일, 교황 레오 13세가 서거하자 새 교황 선출을 위해 7월 26일 베네치아를 떠났다. 신자들이 "곧 다시 돌아오십시오, 추기경 전하!"라고 외치자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군중은 살아서도 죽어서도[6] 다시 못 돌아올 착한 추기경에게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

3. 교황 선출[편집]


파일:external/www.catholictradition.org/papal-gallery74.jpg

본인은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며,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려 하면 웃어넘기곤 했다. 그렇기는 해도 그가 농담을 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내가 교황이 되든지 아니면 죽을 것임을 당신은 압니다. 이는 깰 수 없는 사건이지요. 나는 9년 동안 톰볼로에서 보좌신부를 지냈고, 그 다음 9년 동안은 살자노에서 주임신부였으며, 다음 9년 동안 트레비소에서는 종교법 고문을 지냈습니다. 그 후에는 9년 동안 만투아의 주교였고, 이제는 다시 9년 동안 베네치아 총대주교를 지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교황이 되든지, 아니면 죽든지 할 것입니다.

그의 동료가 "그렇다면 나는 전자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후자를 바랍니다. 교황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 또한 그는 교황선거가 끝나면 베네치아로 돌아가려고 표를 미리 끊어 놓았는데, 교황으로 선출되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설마 본인이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던 모양. 행운의 기차표???

사실 행운의 기차표 덕이라기 보다는(...), 이탈리아의 윗동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입이 있었다. 전임 교황 레오 13세의 온건한 진보 성향, 그리고 반(反) 헝가리 정책[7]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자신의 명의로 크라쿠프 대주교인 푸치나 추기경이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던 것.[8] 레오 13세 재임기 1887년부터 국무장관이었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1843~1913)이 콘클라베에서 유력 후보자로 떠올랐는데,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추기경들 다수가 그를 지지하고 있던 상태였다. 거의 대부분의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은 람폴라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커지자, 이에 거부감을 가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거부권을 행사했고, 결국 람폴라 추기경은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9] 결국 1903년 8월 4일 실시된 제7차 투표에서 베네치아 총대주교 주세페 사르토, 즉 비오 10세가 선출되었던 것. 이 때의 기억 때문인지 비오 10세는 이듬해 개별 국가의 콘클라베 간섭을 금지하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거 개입권을 폐지했다. 그리고 아쉽게 교황 자리를 놓친 람폴라 추기경에게는 성무회의 의장직을 제수했다.#


4. 재위 기간[편집]


파일:external/www.salemcatholic.org/Pius-X-tiara.jpg
전임자 레오 13세 때에 불었던 가톨릭교회의 자유주의 바람이 비오 10세 교황 때에 많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비오 10세의 치세는 반동의 시기로 평가받는다. 당시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신학자들은 집필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몇몇 책은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하였다.

훗날 교황 요한 23세가 되는 안셀로 론칼리가 1905~1914년 사이에 고향 베르가모 교구장 자코모 라디니타데스키(Giacomo Radini-Tedeschi, 1857 ~ 1914) 주교 밑에서 비서 신부로 일하던 시절, 주교는 당시 가톨릭 기준으로 좌파적인 신념을 지니고 사회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비오 10세와 충돌했다. 비오 10세는 주교에게 벌려놓은 사업을 멈추라고 명령하였다. 주교는 비오 10세의 명령에 순명하였으나 내적으로 큰 아픔을 겪었고, 요한 23세는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요한 23세가 당시 천주교 내에서 '근대주의자'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평가를 받았던 것도 라디니타데스키 주교의 영향이 컸다.[10]

이런 행적, 성향으로 인해, 비오 10세는 약 반세기 후에 즉위하는 개방과 탈권위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진 요한 23세와는 대척점에 서는, 20세기 가톨릭 역사에서 전통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반발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비오 10세의 이름을 따서 성 비오 10세회를 세울 때 단체 이름에 비오 10세의 이름을 올린 데에는 이러한 부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비오 10세는 가톨릭 신자에게 영성체를 자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어린이 첫영성체 나이를 기존의 10~12세에서 7세까지 낮추어 영성체를 쉽게 해주는 결단을 내렸다. 이전에 많은 신자들은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 해도 보통 1달에 한두 번 정도 영성체할 뿐이었고, 많은 이가 대축일 때에만 영성체를 하였다. 또한 비오 10세는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나이인 7살이 지나고도 한참 후까지 첫영성체 시기를 미루는 것은 성체를 치유가 아니라 보상으로 여기는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다. 비오 10세 교황은 또 "존엄한 성체성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런 관행은 많은 악의 원인이 됐다"며 이런 관습이 "순진한 어린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게 만들었고 영적 양식을 박탈했다"고 밝혔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도 어렸을 적 비오 10세의 영성체 개혁의 혜택을 입어 만 6살인 1911년 말에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또한 1908년에는 성심수녀회 창설자 소피이 바라를, 1910년에는 프랑스잔 다르크복녀로 시복했다. 1911년에는 천주교 대구대교구를 설정했다.

5. 예언과 기적[편집]


생전에 기적을 많이 일으켜 일찍부터 살아있는 성인으로 대접받았다. 팔이 마비된 한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의 팔을 잡았는데 팔이 순식간에 고쳐지자, 그 남자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성인 교황 성하! 성인 교황 성하!" 하고 외쳤으나 비오 10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조용히 있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온통 종기로 뒤덮인 한 아일랜드인 소녀가 찾아오자, 소녀의 머리에 손을 대자 즉시 나았다고 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도 있었다고 전한다. 임신을 못하는 여인들에게는 잉태하리라는 것을, 갈라진 부부들에게는 재결합을 그리고 아주 기쁜 다른 사건들도 미리 말해 주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예언은 어쩌면 제1차 세계대전이다. 교황비서였던 메리 델 발 추기경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혹은 여러 해 동안 없을 거라고 말할 때마다, "1914년이 가기 전에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신학생들이 서로 대적하기 위해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눈물을 흘리며 "그대들이 고백하는 신앙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애긍심과 동정심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하였다.

1914년 8월 20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6. 시성[편집]


파일:external/2c5bc542462ea3cdaaebbed3ffbaf7696a9a67da5f63a12da36f418f43e7416e.jpg
교황의 시신

파일:external/4.bp.blogspot.com/old+tomb+of+pius+x.jpg
파일:external/4.bp.blogspot.com/Piusxtomb2.jpg
시성 이전의 지하 무덤
시성 이후 현재의 무덤

역대 교황들의 시신은 영구보존을 위해 장기를 제거하거나 방부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비오 10세는 생전에 유언으로 이를 금지했기 때문에, 사망 당시의 상태 그대로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비오 10세를 기리는 여론이 높아지자 교황청에서는 시성 작업에 착수해 1944년 5월 19일 교황의 시신을 지하 무덤에서 꺼냈다. 그런데 교황의 시신은 아무런 방부 처리 없이 안장되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30년 동안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후 2차례의 병자 치유가 비오 10세의 전구로 인한 기적으로 공인됨에 따라 1954년 5월 29일 비오 12세가 주재한 비오 10세의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교황 비오 5세가 1712년 5월 24일 시성된 이래 교황이 시성된 것은 242년 만의 일이었다.

성인 교황의 유해는 지하 무덤에서 옮겨 대성당 내부에 있는 자헌 경당의 제대 아랫쪽 유리관에 새로 안치하였는데, 은제 가리개로 얼굴과 손은 덮어놓았다.


7. 기타[편집]




8. 둘러보기[편집]


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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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6대 레오 13세

제257대 성 비오 10세

제258대 베네딕토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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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전통적인 문장 형식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쓰였다가 교황 베네딕토 16세 때 바뀌었다.[2] 책에는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평화가 있기를, 나의 복음사가 마르코여)라고 쓰여있다.[3] 바다의 닻과 황금육각성의 상징은 히브리서 6: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4]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공적이고 공통적인 기도문이 쓰인 책이다.[5] 교구 고문(1875년~1884년), 공위 주교좌 부참사회장(1879년~1880년)[6] 로마에 안장되었다.[7] 헝가리가 슬라브족을 탄압하는 것에 맞서 예수회 선교사를 보내 지원하고, 공공연히 헝가리의 교육정책에 간섭했다.[8] 이게 가능한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신이 신성 로마 제국이었는데, 암흑시대 말기부터 교황 선출에 대한 반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9] 『교황 사전』176쪽,『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110쪽 참조.[10] 훗날 요한 23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직전인 1958년에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 100주년 기념으로 건축된 성지 내 지하대성당의 봉헌을 주재했는데, 이 성당의 이름은 '성 비오 10세 대성당'이다. 두 사람의 악연을 생각하면, 꽤나 아이러니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