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11세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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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파일:259_pio_XI.png
제258대 베네딕토 15세

제259대 비오 11세

제260대 가경자 비오 12세


제259대 교황
비오 11세
Pius XI

파일:external/goyaproduccioneses.files.wordpress.com/pio-xi.jpg
교황명
비오 11세 (Pius XI)
본명
아킬레 암브로조 다미아노 라티
(Achille Ambrogio Damiano Ratti)
출생
1857년 5월 31일
오스트리아 제국 데시오
사망
1939년 2월 10일 (향년 81세)
바티칸
재위기간
1922년 2월 6일 ~ 1939년 2월 10일 (17년 4일)
문장
파일:external/www.casadellescatole.org/PioXI.jpg

1. 개요
2. 즉위 이전
2.1. 학구파 사제
2.2. 교황청 외교관
3. 재위기간
3.1. 교황선출
3.2. 파시즘, 나치즘에 얽힌 문제
3.3. 업적
4. 선종



1. 개요[편집]



가톨릭의 제259대 교황.


2. 즉위 이전[편집]



2.1. 학구파 사제[편집]


1857년 5월 31일 밀라노에서 견직물 공장장의 아들로 태어난 비오 11세는 1879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철학, 신학, 교회법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 지내며 고대 및 중세 교회 고문서 연구를 통해 고문서학자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 결과 밀라노 암브로시오 도서관을 거쳐 교황 비오 10세의 초청으로 바티칸 도서관으로 옮겨가 도서관장까지 역임하기에 이른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성직자들과는 달리 스포츠맨으로서 등산 애호가의 모습도 보이기도 했다.


2.2. 교황청 외교관[편집]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비오 11세를 교황 순시관으로 임명해 폴란드로 파견했고, 얼마 후에 주폴란드 교황대사로 격상시켰다. 1920년 소련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바르샤바에서 급히 피신한 타국 외교관들과는 달리 폴란드에 남아 소련과 대화하려 했으나 불상사가 벌어질 것을 우려한 베네딕토 15세가 그의 소련행을 막았다. 비오 11세는 소련과의 접촉을 끊지 않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폴란드인들의 반감을 샀고, 오해를 풀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폴란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 11세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자들과 한 편이 되었던 최초의 교황 특사 중 한 명이었고, 이는 냉전과 독재 시기의 성직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3. 재위기간[편집]



3.1. 교황선출[편집]



  • 비오 11세의 즉위식 동영상
1922년 1월 22일 베네딕토 15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콘클라베에서 1922년 2월 6일 총 14표를 획득하여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3.2. 파시즘, 나치즘에 얽힌 문제[편집]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여 비오 9세 이래 반 세기 넘게 문제되었던 교황령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였으나 파시스트를 고발할 권리를 팔아 먹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영국의 신문 가디언이 2013년 1월 21일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바티칸은 어떻게 무솔리니의 수백만의 자금을 이용하여 비밀스러운 부동산 제국을 건설하였나? 라테라노 조약의 대가로 무솔리니에게 현재 시가 5억 파운드에 달하는 현금을 지원받았다는 점이 확인되었으며, 당시 무솔리니에게 받은 돈은 조세포탈을 위한 역외지역에 설립된 지주회사를 통해 관리되었다는 점 역시 영국의 전시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비오 11세는 파시스트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견해를 취했던 사람이다. 1931년에 발표한 회칙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Non Abbiamo Bisogno)》를 통해 비오 11세는 파시즘과 무솔리니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고, 이 때문에 교황은 선종할 때까지 무솔리니와 불편한 관계를 지속했다. 한편으로는 나치와도 실제로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는데 1937년 회칙 《깊은 근심과 함께(Mit Breender Sorge)》[1]을 발표해 나치즘을 신이교주의라 비판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모든 유혹에 저항하라고 되어 있다. 결국 바로 다음 날 친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의 신을 신봉하는 자들'이라는 기사를 냈고 2년 후 비오 12세가 즉위하자 나치 기관지인 《다스 라이히》는 비오 11세와 비오 12세를 한데 묶어서 유대인 교황들이라고 폄하했다.

비오 11세의 주치의가 프란치스코 페타치인데, 공교롭게도 주치의의 딸인 클라라 페타치베니토 무솔리니와 내연관계였다.


3.3. 업적[편집]


나치 독일 내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국종교협약을 맺었고 노동자 권익보호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레오 13세가 반포한 회칙 '새로운 사태' 4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한 회칙 '40주년'은 노동 운동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나아갈 바에 대해 이정표를 제공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 노동자들의 성인으로 여겨진 사람은 성모 마리아의 남편인 나자렛의 성 요셉이었다. 후임 교황 비오 12세 대에 이르러 노동절5월 1일이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지정된다. 또한 성심수녀회 창설자인 복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를 시성했다.

한국순교자 79위를 시복한 교황이기도 하다. 또한 전주교구광주대교구를 설정했다.

파스칼리나 레네르트와도 인연이 있는 교황이다. 어느 날 비오 11세가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에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파스칼리나 수녀가 당시 추기경이자 자신의 직속 상관이던 비오 12세를 통해 연설문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를 한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비오 11세는 문제의 연설문을 수정한 뒤 파스칼리나 수녀를 불러 크게 칭찬하면서 앞으로 비오 12세를 많이 도와주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4. 선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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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ages.fineartamerica.com/the-tomb-of-pope-pius-xi-joel-sartore.jpg
교황의 시신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비오 11세의 무덤
1938년 11월 25일에만 2차례나 심장마비를 겪은 교황은 급속도로 쇠약해졌으며, 결국 1939년 2월 10일 "내 영혼은 평온하게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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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인 라틴어로 된 회칙이 아니라, 독일어로 발행되어 모든 교구의 성당에서 낭독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