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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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0대 어라하
비유왕 | 毗有王

출생
(음력)

420년대 추정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사망
(음력)

455년 9월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제20대 어라하
427년 12월 ~ 455년 9월 (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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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부여(扶餘)

비유(毗有) / 비(毗)[1] / 비유(毘有)[2]
부왕
구이신왕 / 전지왕[3]
왕자
부여경사, 부여문주[4], 부여곤지[5]
종교
불교
왕호
비유왕(毗有王)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삼국사기》 기록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백제의 제20대 건길지.

백제의 제11대 군주 비류왕과는 다른 인물인데 살았던 시대도 다르고 각각 한자 표기도 다르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백제의 제11대 국왕인 비류왕과 헷갈리면 곤란하다. 옛날에는 똑같이 비류왕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했고 발음상 거의 비슷하기에 제11대 비류왕, 제20대 비유왕 이런 식으로 몇 대 군주인지 구분하여 말하는 경우가 많다.


2. 생애[편집]


출생에 대해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이신왕아들 혹은 전지왕서자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려시대 당시 있었던 자료에도 두 가지 전승이 모두 있었다고 한다. 구이신왕이 15세에 비유왕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즉위 당시 비유왕은 9세에 불과하므로 구이신왕이 20세에 비유왕을 낳았다면 비유왕은 4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령 관계를 생각한다면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중시된다고 한다.[1]

송서》(宋書)에 따르면 이름은 '비(毗)'.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고 하며 능력을 잘 살렸는지 외교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남북조시대유송에게 조공을 자주 바쳐 425년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칭호를 받았고, 이후 매년 사신의 파견이 있었다. 이후 원가 7년(430년)에 “여비(余毗, 비유왕)에게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의 계승을 허락했다.”라고 하여 정식으로 백제왕이 되었다. 더불어 고구려에 대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한때 적이었던 신라를 회유해 나제동맹을 성립시켰다.

신라의 눌지 마립간은 과거 내물 마립간 시절에 백제 동맹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구려의 군사 지원을 받은 대가로 고구려군에게 내정간섭을 받던 중이었다. 눌지 마립간은 여기서 벗어나 자주 노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홀로 고구려에 대항하기는 어려웠다. 백제 역시 진사왕 때부터 줄곧 고구려에 밀리던 상황에서 왜국이나 가야 이외에도 동맹국이 더 필요했다. 백제와 신라 양국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는 것을 비유왕은 간파하고 먼저 433년 7월, 434년 2월과 9월 신라에 사신과 선물을 보내며 화친을 청했다. 신라 역시 434년 10월에 화답해 왔다.

여기서 발생한 문제는 왜국이 백제와는 친하다지만 신라와는 대대로 원수지간이라는 점이었고, 431년 왜국은 신라를 침공하기도 했다. 신라와의 화친 시도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 백제와 왜국 사이에 관계가 어긋났는지 438년 왜왕 진은 유송에 조공하면서 백제가 왜국의 속국인 것처럼 언플을 하기도 했다.[2] 그래도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완전히 악화되지는 않고 본질적으로는 계속 우호 관계가 유지되었다.

450년 비유왕은 유송에 방물을 바치면서 국서를 올려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를 서하태수(西河太守) 추인해주도록 요청하고, 표문으로 이림(易林)·무점(式占) 및 요노(腰弩)를 요구했는데 송문제 유의륭은 백제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고 한다. 당시 서하지역은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가 지배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에 유송 측도 그냥 명목상으로 허락해 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 풍야부는 북연 황실 출신의 인물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436년 북연이 북위에게 멸망당한 후 고구려로 망명한 마지막 황제 풍홍과 그 일족은 438년 장수왕에 의해 제거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로 유입된게 아니냐는 것.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臾雲霧晦冥飛去 王薨

가을 9월에 흑룡한강에 나타났는데 잠시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자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


승하 당시의 기사가 의미심장한데 기록에 따르면 한강흑룡이 나타났다가 날아가자 승하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백제 내부의 정쟁에 휘말려 시해당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고, 검은색이 북방을 뜻함에 따라 백제의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에서 암살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3] 비유왕의 유해가 빈 들판에 가매장되었다는 도림의 언급으로 보아 매장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던 듯. 아무래도 비유왕의 승하시에 정치적으로 큰 혼란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승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자연스러운 죽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에서 암살했을 수 있다는 설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게 비유왕 승하 직후 곧바로 고구려의 백제 침공이 이어졌다는 것. 백제 왕이 승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쳐들어왔을 수도 있지만 먼저 자객을 보내 왕을 암살한 후 백제의 혼란을 야기하는 사전 모략을 벌이고, 쳐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검은색은 북방을 상징하고 용이 나타났다는 위치도 고구려와 국경이 맞닿은 한강이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백제의 북쪽에 있었던 고구려에서 비유왕을 죽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것이다. 둘 다 수용한다면 당시 백제 내부에 정쟁이 있었고, 고구려 역시 이 점을 이용해서 비유왕 반대 세력과 모종의 결탁을 해 비유왕을 암살한 후 백제 내부를 더욱 흔들어 놓았다는 해석도 가능한 부분이다.

나제동맹을 맺었던 신라는 약속대로 원병을 보내와서 반고구려 노선을 확실히 했으니 적어도 외교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신라는 이전부터 백제보다는 친고구려에 가까웠고,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대왕이 신라를 지켜준 대가로 고구려군을 주둔시켜 예속된 상태였다. 신라가 고구려 종속을 떨쳐내고, 나제동맹을 맺도록 비유왕이 신라를 끌어들인 것만 해도 상당한 업적이다. 물론 먼 훗날 결과적으로는 나제동맹이 깨지게 되지만 그건 100여 년이나 뒤의 일이고,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이후 50여 년간의 역사를 보면 나제동맹이 없었으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위례성과 한강 유역이 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개로왕 시해 이후 문주왕웅진성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부터가 문주왕이 데려온 신라 지원군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성왕전성기 시절 신라의 힘을 빌려 중흥을 맞이한 것도 나제동맹 덕분이었다.


3. 기타[편집]


  • 어째서인지 《일본서기》에서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데 전왕인 구이신왕이 《일본서기》에서만 언급되고 중국 측 사서에서 없는 사람 취급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즉위년도는 429년으로 구이신왕이 사망한 428년의 이듬해이기 때문에 《일본서기》 기준으로는 비유왕이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된 셈으로 대표적인 이주갑인상의 희생자이다. 전지왕의 누이라고 나오는 부여신제에 대한 기사는 《일본서기》 기준으로 308년이지만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428년으로 비유왕의 치세기이다. 30년 후인 《일본서기》 기준으로 458년[4] 기사를 보면 유랴쿠 덴노에게 후궁으로 보내진 부여적계가 이시카와노 타테(石河楯)라는 남자와 밀통하여 처형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사 직후부터는 이주갑인상이 사라지고 연도가 다시 정상대로 돌아와 개로왕의 치세기가 된다. 부여적계가 처형되자 놀란 개로왕은 자신의 동생인 부여곤지를 왜국으로 파견한다. 즉, 연대 조작으로 일컬어지는 이주갑인상이 끝나는 지점과 묘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비유왕의 치세기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비유왕의 치세기에는 장수왕의 남하에 맞서 신라와 연합전선을 꾸리고 친선을 도모했는데 이를 왜국 측에서는 반발했기 때문에 비유왕을 《일본서기》에서 일부러 누락시켰다는 해석도 있다. 신라와 가깝게 지내는게 고까운게 아니라 신라와 군사 연합을 형성하며 왜국의 유용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에 왜국 측의 발언권과 입지가 축소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도 그럴것이 433년에 형성된 나제동맹 이후에 왜왕 진(珍)이 438년에 송측에 백제와 임나 신라 가야 모한 진한 등의 군사권을 요구한다. 나제 동맹으로 대고구려 전선의 축이 변하는 것을 의식한 왜왕은 왜왕 자신이 대고구려 전선의 선봉은 왜국이라고 요구하여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포섭 이란것. 실제로 이 시기에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소원해서 양국간 교류가 상당기간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 다만 정말 비유왕이 정쟁에 휩쓸려 희생되었다면 애초에 《백제삼서》에서부터 비유왕에 대한 모종의 기록말살이 있었고 이를 인용한 《일본서기》에서도 예기치 않게 그의 치세가 반영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4세기 말엽부터 시작되어 5세기 말까지 지속된 백제 왕권의 불안과 지속되는 왕들의 암살을 보면 일견 합당한 해석, 모종의 정쟁 때문에 비유왕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당대 고위층들이 《백제삼서》를 작성하거나 《백제삼서》의 근간이 되는 단편적인 문헌에서 의도적으로 비유왕의 치세를 누락시켰고 이것을 《일본서기》가 그대로 받아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의 첩자 도림이 말했듯이 비유왕의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과 아들인 개로왕이 자신의 일가 친족들을 중용하고 또 집착했던 것들을 본다면 진짜로 정쟁에 밀려 권신들에게 시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 《일본서기》에서는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여 아예 언급도 없지만 어째서인지 《신찬성씨록》에는 비유왕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말다왕(동성왕)의 자손들의 뿌리에 대해 설명하며 '부여곤지는 비유왕의 아들이며 그 부여곤지의 아들은 말다왕이다'라며 스치듯이 언급하는데 《일본서기》와 대조적이다.


4.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三國史紀)

[ 본기(本紀) ]
1권 「신라 1권 (新羅 一)」
2권 「신라 2권 (新羅 二)」
박혁거세 · 박남해 · 박유리 · 석탈해 · 박파사 · 박지마 · 박일성
박아달라 · 석벌휴 · 석내해 · 석조분 · 석첨해 · 김미추 · 석유례 · 석기림 · 석흘해
3권 「신라 3권 (新羅 三)」
4권 「신라 4권 (新羅 四)」
5권 「신라 5권 (新羅 五)」
김내물 · 김실성 · 김눌지 · 김자비 · 김소지
김지대로 · 김원종 · 김삼맥종 · 김사륜 · 김백정
김덕만 · 김승만 · 김춘추
6-7권 「신라 6-7권 (新羅 六-七)」
8권 「신라 8권 (新羅 八)」
9권 「신라 9권 (新羅 九)」
김법민
김정명 · 김이홍 · 김융기
김승경 · 김헌영 · 김건영 · 김양상
10권 「신라 10권 (新羅 十)」
11권 「신라 11권 (新羅 十一)」
김경신 · 김준옹 · 김청명 · 김언승 · 김수종 · 김제융 · 김명 · 김우징
김경응 · 김의정 · 김응렴 · 김정 · 김황 · 김만
12권 「신라 12권 (新羅 十二)」
13권 「고구려 1권 (高句麗 一)」
14권 「고구려 2권 (高句麗 二)」
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
고주몽 · 고유리
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
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
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고궁 · 고수성
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
고우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
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
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고원 · 고건무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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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 · 최치원 · 설총 · 최승우 · 최원위 · 김대문
47권 「열전 7권」
해론 · 소나 · 취도 · 눌최 · 설계두 · 김영윤 · 관창 · 김흠운 · 열기 · 비녕자 · 죽죽 · 필부 · 계백
48권 「열전 8권」
향덕 · 성각 · 실혜 · 물계자 · 백결선생 · 검군 · 김생 · 솔거 · 지은 · 설씨 · 도미 · 필부
49권 「열전 9권」
50권 「열전 10권」
창조리 · 연개소문
궁예 · 견훤




《삼국사기》 <비유왕 본기>

一年冬十二月 비유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왕이 4부를 순행하고 백성들을 위무하다
二年 왜국에서 사절이 도착하다
三年 송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年冬十月 해수를 상좌평에 임명하다
二年冬十一月 지진이 일어나고 큰 바람이 일어나다
二年冬十二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三年夏四月 송의 문황제가 선왕의 작호를 책봉하다
七年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다
七年秋七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八年春二月 신라에 사절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선사하다
八年秋九月 신라에 흰 매를 보내다
八年冬十月 신라에서 좋은 금과 구슬을 보내 오다
十四年夏四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四年冬十月 송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一年夏五月 대궐 남쪽 연못에서 불길이 일어나다
二十一年秋七月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신라로 달아난 사람들이 발생하다
二十八年 별이 비처럼 떨어지고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八年秋八月 누리 떼가 발생하여 곡식에 해를 끼쳐 흉년이 들다
二十九年春三月 한산에서 사냥하다
二十九年秋九月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나고 비유왕이 죽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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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비류국
비류왕
































덕좌왕























































부여질







































































































장남



13대
근초고왕




12대
계왕
























14대
근구수왕






















































섭정
훈해왕



찬탈
설례왕

























부여신제

























19대
구이신왕





























부여주












































































































순타태자




26대
성왕



(?)





















부여법사




28대
혜왕



(?)























아좌태자


29대
법왕




























30대
무왕





























부여교기

























32대
풍왕


부여선광


















부여문사

부여문선

부여덕장


부여사


부여창성



























[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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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도학, 1995; 이기백, 1996)[2] 왜왕 진남조 유송에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六國諸軍事(육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을 자칭하고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백제 또한 유송과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왜국의 속국이 아닌 건 유송도 알고 있어서 거절당하고 '안동대장군'과 '왜왕'의 직위만 수여되었다.[3] 반론도 있는데 자체가 의 수호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는 '용=물=흑색'이라는 통념이 있었다. 당장 용의 순우리말인 '미르'가 물에서 파생된 단어다.[4] 458년은 이주갑인상에 의해 보정된 년도가 아니다. 즉, 이주갑인상이 종료된 직후의 기사이다. 애초에 현전해지는 교차검증할 수 있는 사료들이 없는 탓에 어느 시점부터 이주갑인상이 종료 되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그 직전의 기사 453년 혹은 이 해당 기사 이후부터는 이주갑인상은 소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