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제시
(♥ 0)
||
정체자: 畢節市
한국 한자음: 필절시
구이저우성(貴州省) 서북부의 도시. 성도 구이양시(貴陽市)에서 서북쪽으로 120km, 쭌이시에서 서남쪽으로 140km, 루저우시와 자오퉁시에서 각각 남쪽과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지명의 유래는 일대의 소수민족인 이족의 주요 씨족인 비지씨에서 유래하였다. 최근까지만 해도 비제지구(毕节地区)였다가 2011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중국의 지급시 치고도 관할 면적이 넓은 편인데, 무려 26,852km²로 강원도보다 넓다. 따라서 관할 인구가 690만명으로 성내 최대 규모이며, 도시 자체에는 약 130만명이 거주한다.
북쪽에 장강의 지류 츠수이허(赤水河)가 흘러 구이저우 성에서 구이양과 함께 고대부터 중원의 지배력이 간헐적으로나마 이어지던 고장이었다. 다만 현대 들어 매우 낙후되어 1987년 1인당 소득이 289위안에 그쳤는데, 당시 구이저우 성장 후진타오의 노력으로 2019년에는 28,378위안으로 급성장하였다.
활발한 지각변동으로 구릉 지대가 많은 시난 지역 답게 시내에도 크고 작은 언덕이 많으며, 시가지 동부에는 비제대학교가 있다. 도시 동북쪽 8km 지점에는 산업단지가, 동남쪽 12km 지점에는 비제 페이슝 공항이 자리한다.
상고대에는 촉나라의 남쪽 변경이었고, 진나라 대에는 파군(巴郡)에 속하였다. 한나라 대에는 익주(益州) 산하 장가군과 건위군에 속하였고, 촉한 대에는 주제군(朱提郡)이 더해졌다. 서진 시기에는 영주(宁州) 산하 주제, 장가, 건녕군의 관할이었다. 수나라 대에는 찬씨(爨氏)의 노록부(盧鹿部)가 세워져 중원에서 자립했고, 당나라 초엽 대리국령이 되었다가 검주도독부(黔州都督府)에 편성되었다. 오대십국 시대에는 학주(郝州), 휘주(暉州), 공주(龔州), 보주(寶州), 녹주(禄州)에 속하였다. 송나라 대에 비제 동부는 나씨(羅氏)의 귀국부(鬼國), 오살부(烏撒部), 비나부(毗那部) 등에 속하였다. 원나라 대에는 불설선위사(不薛宣慰司), 오몽선위사(烏蒙宣慰司)가 설치되었고, 후자는 오살부를 치소로 하였다.
명나라 대에는 수서선위사(水西宣慰司), 오살군민부(烏撒軍民府), 영녕선무사(永宁宣抚司) 등에 속하였다. 동시에 오살(烏撒), 필계(畢節), 적수(赤水), 영녕(永宁)의 4위(衛)가 설치되며 현 지명의 기원이 된 비제(필계)가 처음 등장하였다. 1389년(홍무 22) 성벽이 음력 섣달 그믐에 준공되어, 필절(畢節)[1] 이라는 현재의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명말청초 무렵 오살구민부는 오살토부(烏撒土府)로 바뀌었고, 4개의 위는 각각 현이 되었다. 청나라 대인 1666년 일대에는 대정부(大定府), 검서부(黔西府), 평원부(平远府)가 추가되었고 오살토부는 위녕부(威寧府)로 개편되었다. 1683년 검서, 평원부는 주로 격하되어 대정부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1687년 대정부 역시 주로 격하되어 위녕부에 귀속되었다. 여기에 검서, 필절현(畢節縣)까지 더해져 현 비제시 일대는 위녕부 하에 통합되었다.[2]
1729년 대정주는 부로 복구되었고, 이번에는 위녕부가 주로 격하되어 검서 & 평원부 및 필절현과 함께 그에 귀속되었다. 신해혁명 후 부와 주가 폐지되며 일대는 귀서성(贵西道)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1935년 귀서성 제4행정독찰구의 전원공서가 필절(비제)현에 설치되며 역사상 처음으로 현 도심이 일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일대는 비제전구(毕节专区)로 개편되었다. 1955년 웨이닝현은 웨이닝 이족 후이족 먀오족 자치현으로, 1958년 다딩현이 다팡현으로 개칭되었다. 1970년에는 수이청현이 수이청특구로 승격되어 류판수이 지구로 이관되었다. 같은해 비제전구는 비제지구(毕节地区)로 바뀌었고, 1994년 비제현이 현급시로 승격된 데에 이어 2011년 지급시로 편성되었다. 기존 현급시는 치싱관구로 바뀌었다.
관내에 비제 페이슝 공항(毕节飞雄机场)이 있으며, 국내선 전용이다. 철도역의 경우 관내에 비제역(毕节站)이 존재하며, 청구이고속철도(成贵客运专线)가 지나간다.
원래 볼거리가 없는 구이저우임을 감안하더라도 인근 협곡이나 수목원 정도 외에는 관광지가 거의 없다.
얼마 없는 볼거리 중 하나인 인근 석회암 협곡
1. 개요[편집]
정체자: 畢節市
한국 한자음: 필절시
구이저우성(貴州省) 서북부의 도시. 성도 구이양시(貴陽市)에서 서북쪽으로 120km, 쭌이시에서 서남쪽으로 140km, 루저우시와 자오퉁시에서 각각 남쪽과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지명의 유래는 일대의 소수민족인 이족의 주요 씨족인 비지씨에서 유래하였다. 최근까지만 해도 비제지구(毕节地区)였다가 2011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중국의 지급시 치고도 관할 면적이 넓은 편인데, 무려 26,852km²로 강원도보다 넓다. 따라서 관할 인구가 690만명으로 성내 최대 규모이며, 도시 자체에는 약 130만명이 거주한다.
북쪽에 장강의 지류 츠수이허(赤水河)가 흘러 구이저우 성에서 구이양과 함께 고대부터 중원의 지배력이 간헐적으로나마 이어지던 고장이었다. 다만 현대 들어 매우 낙후되어 1987년 1인당 소득이 289위안에 그쳤는데, 당시 구이저우 성장 후진타오의 노력으로 2019년에는 28,378위안으로 급성장하였다.
활발한 지각변동으로 구릉 지대가 많은 시난 지역 답게 시내에도 크고 작은 언덕이 많으며, 시가지 동부에는 비제대학교가 있다. 도시 동북쪽 8km 지점에는 산업단지가, 동남쪽 12km 지점에는 비제 페이슝 공항이 자리한다.
2. 역사[편집]
상고대에는 촉나라의 남쪽 변경이었고, 진나라 대에는 파군(巴郡)에 속하였다. 한나라 대에는 익주(益州) 산하 장가군과 건위군에 속하였고, 촉한 대에는 주제군(朱提郡)이 더해졌다. 서진 시기에는 영주(宁州) 산하 주제, 장가, 건녕군의 관할이었다. 수나라 대에는 찬씨(爨氏)의 노록부(盧鹿部)가 세워져 중원에서 자립했고, 당나라 초엽 대리국령이 되었다가 검주도독부(黔州都督府)에 편성되었다. 오대십국 시대에는 학주(郝州), 휘주(暉州), 공주(龔州), 보주(寶州), 녹주(禄州)에 속하였다. 송나라 대에 비제 동부는 나씨(羅氏)의 귀국부(鬼國), 오살부(烏撒部), 비나부(毗那部) 등에 속하였다. 원나라 대에는 불설선위사(不薛宣慰司), 오몽선위사(烏蒙宣慰司)가 설치되었고, 후자는 오살부를 치소로 하였다.
명나라 대에는 수서선위사(水西宣慰司), 오살군민부(烏撒軍民府), 영녕선무사(永宁宣抚司) 등에 속하였다. 동시에 오살(烏撒), 필계(畢節), 적수(赤水), 영녕(永宁)의 4위(衛)가 설치되며 현 지명의 기원이 된 비제(필계)가 처음 등장하였다. 1389년(홍무 22) 성벽이 음력 섣달 그믐에 준공되어, 필절(畢節)[1] 이라는 현재의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명말청초 무렵 오살구민부는 오살토부(烏撒土府)로 바뀌었고, 4개의 위는 각각 현이 되었다. 청나라 대인 1666년 일대에는 대정부(大定府), 검서부(黔西府), 평원부(平远府)가 추가되었고 오살토부는 위녕부(威寧府)로 개편되었다. 1683년 검서, 평원부는 주로 격하되어 대정부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1687년 대정부 역시 주로 격하되어 위녕부에 귀속되었다. 여기에 검서, 필절현(畢節縣)까지 더해져 현 비제시 일대는 위녕부 하에 통합되었다.[2]
1729년 대정주는 부로 복구되었고, 이번에는 위녕부가 주로 격하되어 검서 & 평원부 및 필절현과 함께 그에 귀속되었다. 신해혁명 후 부와 주가 폐지되며 일대는 귀서성(贵西道)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1935년 귀서성 제4행정독찰구의 전원공서가 필절(비제)현에 설치되며 역사상 처음으로 현 도심이 일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일대는 비제전구(毕节专区)로 개편되었다. 1955년 웨이닝현은 웨이닝 이족 후이족 먀오족 자치현으로, 1958년 다딩현이 다팡현으로 개칭되었다. 1970년에는 수이청현이 수이청특구로 승격되어 류판수이 지구로 이관되었다. 같은해 비제전구는 비제지구(毕节地区)로 바뀌었고, 1994년 비제현이 현급시로 승격된 데에 이어 2011년 지급시로 편성되었다. 기존 현급시는 치싱관구로 바뀌었다.
3. 교통[편집]
관내에 비제 페이슝 공항(毕节飞雄机场)이 있으며, 국내선 전용이다. 철도역의 경우 관내에 비제역(毕节站)이 존재하며, 청구이고속철도(成贵客运专线)가 지나간다.
4. 갤러리[편집]
원래 볼거리가 없는 구이저우임을 감안하더라도 인근 협곡이나 수목원 정도 외에는 관광지가 거의 없다.
얼마 없는 볼거리 중 하나인 인근 석회암 협곡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9-12 00:05:23에 나무위키 비제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