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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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상세
3. 주요 인물과 작품
4. 영향력
4.1. 문학
4.2. 영화
4.3. 음악
4.4. 사회 정치적 영향


1. 개요[편집]


비트 세대(Beat Generation), 비트닉(Beatnik)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에 걸쳐 한참 방황하던 젊은 청년층과 일용직 노동계를 전전하던 사회 하류층들을 아우르는 용어로서 단순한 세대 지칭 용어가 아닌 그 당시의 사회적 기조와 전반적인 분위기, 더 나아가 예술과 문학적 사조까지 포함하기도 하다.

미국/서유럽의 일반적인 세대구분과 굳이 연결 짓자면 가장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 1901년 - 1927년 출생)의 후반, 침묵세대(Silent Generation, 1928년 - 1945년 출생)의 초반과 겹치며 쉽게 말해서 191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생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보면 편하다. 한마디로 1917년~1933년[1] 이라고 보면 된다.

2. 상세[편집]


이 단어는 작가 잭 케루악이 쓴 소설 <길 위에서>(On the Road, 1957)에서 처음 등장했다. 후에 소설가 존 클레론 홈스가 '뉴욕타임즈 매거진'에 ‘비트 제네레이션’을 정의하는 글을 기고하며 널리 알려지게 됐다. 비트 세대란 단어는 1948년 잭 케루악과 존 클레론 홈스가 대화를 나누던 도중 나왔다. 당시 두 사람은 ‘상실의 세대(Lost Generation)’라 불리던 당대 젊은 세대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었다. 대화 도중 케루악은 ‘이들은 완전히 지친(beat)세대’라며 이 단어를 언급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겉으론 물질적, 사회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지만 이로 인해 더욱 범람하기 시작한 물질주의산업화의 거센 물결과 전쟁의 여파를 완전히 씻어내고자 무조건적인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려는 국가의 태도는 전쟁이 끝난 직후 다시 일터와 학업으로 복귀한 당시 젊은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기성세대들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이들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채, 알맞은 틀에 맞게 살기를 바랬고 법과 여러 제도들을 이용하여 각종 규제와 억압을 줄곧 가하고 있었다. 허나 이들은 이미 여러가지 면에서 지쳐있었고 거기에 더해서 옥죄어 오는 사회적 규범은 역으로 이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어른들 눈에만 보기 좋은 허울뿐인 전쟁 이후의 평화와 안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기반이 쌓인 기성세대들과는 다르게 여전히 공장이나 일용직 노동자, 파트타임 잡 위주로만 다니며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게 대부분이었던 비참한 현실의 젊은 층들은 본인들을 줄곧 컨트롤하고 '착실한 청년'으로만 만들려는 기존 사회에 큰 반항심리가 생겨버렸다. 이러한 심리는 곧바로 행동으로 표출되기 시작했고 문학계와 대중문화도 이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한 세대의 거대한 사회적 조류가 되어버린다.

당시엔 지극히 상식이었던 정장이나 클래식한 드레스가 아닌 본인들이 일할 때나 입었던 후줄근한 근로 복장인 청바지와 캐주얼 재킷, 티셔츠를 공식석상에서도 맘껏 입고 다니고 터부시되던 이른 나이의 음주와 흡연, 심지어 마약까지 접하거나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폭주를 뛰고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는 등, 기존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일탈 행위들을 일삼게 된다. 또는 일종의 방랑자나 아웃사이더로서 자기들만의 가치관을 맘껏 표현하기 위해 모여서 시와 소설을 쓰거나 줄곧 취향을 저격하는 음악과 영화만 하루종일 감상하고[2] 심지어 당시 서구권에서는 생소하다 시피한 불교도교에 심취하는 등, 독특한 행위들을 일삼는 힙스터 기질을 갖추기도 하였다. 애초에 '힙스터'란 용어의 탄생 자체가 이들 세대와도 연관이 있는데 1940년대 후반에 비밥과 블루스를 즐기던 젊은 백인 친구들을 칭하기 위해 탄생한 용어가 다름아닌 힙스터다.

당연시여기는 출세나 사회적 경쟁에는 냉소를 지으며 그것에 목을 메거나 최우선시 하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좀 더 원초적이면서 기존의 것들을 깨부수거나 바꾸는 것을 역사상 가장 두드러지게 추구한 첫 세대이기도 하다. 후에 작성된 이들의 사회 문화적으로 끼친 영향력 또한 이러한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3. 주요 인물과 작품[편집]


  • 잭 케루악 - '길 위에서(On the Road)', 1957.
  • 윌리엄 S. 버로스 - '네이키드 런치(Naked Lunch)', 1959.
  • 찰스 부코스키 -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Love Is a Dog from Hell)', 1977.
  • 리처드 브라우티건 - '미국의 송어낚시(Trout Fishing in America)', 1967.
  • 앨런 긴즈버그 - '울부짖음(Howl)', 1956.
  • 게리 스나이더 - '거북섬(Turtle Island)', 1975.
  • 닐 케시디
  • 그레고리 코소
  • 필립 웨일런
  • 로렌스 펠렝게티
  • 루 리드
  • 밥 딜런[3]
  • 레너드 코헨[4]


4. 영향력[편집]



4.1. 문학[편집]


이렇듯 젊은 세대 전체의 분위기가 새로운 물결로 흘러가자 문학적으로도 비트 세대에 속한 작가들은 기존 사회 규범에 반항하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지향했다. 그들의 인생은 바로 ‘표현’ 그 자체였다. 케루악, 긴즈버그, 윌리엄 버로스, 닐 캐서디, 허버트 훈케, 루시안 칼, 데이빗 캐머러, 캐롤린 캐서디(닐 캐서디의 아내) 등이 당시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길거리와 젊은이들이 모인 곳들을 돌아다니며 마약, 술, 섹스에 탐닉하며 날 것 그대로를 추구했다. 미국 전역을 횡단하며 느낀 것을 수필과 시, 소설로 표현하였고 미국을 벗어나 멕시코를 비롯한 다른 나라를 경험하면서 느낀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의 문제점과 부숴나가야 할 것, 그리고 새롭게 구축해야 할 것, 당시엔 낯설었던 동양철학에 대한 조심스런 탐구나 본인들의 생각들을 가감없이 글에 담기도 했다. 이들을 한데 묶는 일종의 새로운 움직임을 뉴 비전(New Vision)이라 칭하며 당시의 비트 세대 문학가들을 뉴 비전 시대 작가들이라고도 칭한다.

영화 킬 유어 달링이 이들의 당시 스토리를 그대로 담아낸 영화이며 이들 문학가들이 가장 처음 이 세대를 정의내리고 이해하며 움직인 사람들로 평가받는다.

이 세대 문학가들의 대표작들로는 앨런 긴스버그의 '울부짖음과 기타 시편(Howl and Other Poems)'(1956년), 윌리엄 S.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Naked Lunch)'(1959년),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On the Road)'(1957년)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동시기에 김수영이 비트 문학에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 남아있다. 김수영은 영문학도여서 영미권 문학 동향에 대해 조예가 깊었고,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직간접적으로 접한 것으로 보인다.

토머스 핀천은 단편집인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서문에서 잭 케루악의 대표작 '길 위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한에서 최고의 작품이라 언급한다. 핀천의 자유분방한 문체나 이야기의 구조를 비추어 보면 물론이요, 또 그 세대 출신 작가 답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4.2. 영화[편집]


이들의 영향은 문학계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스튜디오 전성기의 마지막을 구가하던 할리우드에서도 이들의 수요와 갈망을 충족시킬 만한 아이콘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일부 연극판에서만 사용되던 메소드 연기법을 영화판에 첫 적용시킨 엘리아 카잔 감독을 통해 말론 브란도라는 불세출의 배우가 혜성같이 등장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와일드 원, 워터프론트같은 작품에서 그만의 거친 반항아 캐릭터와 사회질서를 온몸으로 조롱하고 싸워내는 걸출한 연기실력, 그에 걸맞는 뛰어난 비주얼이 맞물리면서 말론 브란도는 비트 세대가 제대로 열광할 수 있는 첫 대중문화계 우상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속옷이나 잠옷 개념이었던 티셔츠가 그를 통해 유행이 되어 일상복으로 탈바꿈한 사실도 유명하다. 베레모가죽재킷, 오토바이도 크게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제임스 딘은 그의 뒤를 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복장 내지는 일용직 근로자의 일복이었던 청바지를 패션 아이템으로 크게 유행시키며 위태롭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색다른 반항아 이미지를 구축했고 큰 인기를 구가한다. 도로를 질주하다 교통사고로 일찍 떠나버린 그의 요절도 비트 세대의 감성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 와중에서도 우상화 뿐만이 아니라 풍자도 있었는데 로저 코먼의 초기작 버켓 오브 블러드는 B급 호러 영역에서 뉴욕 비트 세대의 문화와 허영심, 속물성을 풍자하기도 했다.

뉴욕에서 이뤄진 아방가르드/인디 영화도 비트 세대랑 관련이 있다. 존 카사베츠 (특히 그림자들)와 셜리 클라크가 대표적인 비트 시기에 데뷔해 인지도를 얻은 영화 감독으로 꼽힌다.

4.3. 음악[편집]


빙 크로스비프랭크 시나트라로 대표되던 당시 절대 주류였던 스탠다드 팝과 기성 스윙재즈는 더 이상 그들을 흥분시키거나 위로해주지 못했다. 지치고 피로한 일상을 보답받기 위해 이들은 더욱 자극받고 싶어 했으며 새로운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를 더욱 깊이 탐닉했고 거기에 더 나아가 변화된 음악적 조류를 갈망해왔다. 이들의 이러한 심리는 음악계에서도 반응을 일으켰으나 다만 비트 세대에서도 전기와 후기로 어느 정도 분리가 되는 모습이 보여진다.

194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1950년대에는 이미 일찍이 성년에 접어든 초기 비트니들은 재즈를 누구보다도 뼛속깊이 즐겼던 세대로 유명하다. 정확히는 기존의 스윙재즈보다 새로운 리듬과 초창기 재즈의 즉흥성을 되살린 비밥에 크게 열광한 부류들이다.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는 이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특히 찰리 파커의 마약 남용과 방탕한 삶을 힙하다고 여겨서 실생활에서 카피하는 문제아들이 있었을 정도다. 쿨 재즈의 대부인 마일즈 데이비스도 이들 세대를 몰입시킨 뮤지션이기도 하다. 이렇듯 비밥과 비트 세대는 일종의 동반자로서 후대에 어느 한쪽이 언급되면 무조건 같이 언급될 정도로 한데 묶여서 취급되는 경향이 상당하다. 신 시대 재즈 매니아들이었던 이들을 통해 '멋있는 것', '세련된 것'을 칭할때의 쿨(Cool)이란 의미가 은어로서 정립되었다.

약간 어린 후기 비트니들은 이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음악 DJ였던 빌 헤일리는 리듬 앤 블루스를 좀 더 단순화하여 컨트리 뮤직과 뒤섞어 비트 세대들을 공략한 히트트랙들을 선보였고 이게 제대로 먹혀버렸다. 순식간에 몇년이 지나지 않아 척 베리, 리틀 리차드와 같은 뮤지션들을 통해 여기서 더욱 발전한, 매우 경쾌하면서 그루비하고 살짝 거친듯한 새로운 유행가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리젠트 머리를 한 잘생긴 청년이 등장하여 이 음악을 신드롬과 같은 인기와 함께 사회문화적 주류로 이끌어 냈고 이것이 바로 로큰롤, 즉, 록 음악의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다만 이들은 1960년대의 비틀즈로 완전히 정의내려진 록(Rock) 자체와는 거리가 좀 있다. 록은 엄연히 이들의 뒷 세대인 1940~1950년대 초반생들이 주축이 되어 꾸려지고 지지를 받은 음악이었으며 비트 세대보다는 베이비부머와 히피 세대에 더 가까운 문화였다. 비트니들은 밴드로 완전 무장한 록보다는 비밥 재즈와 고전 알앤비, 좀 더 나아가서 초기 로큰롤까지를 향유하던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록 밴드 뮤직이 점령한 시대(1960~70년대)에 이들은 청년 세대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1950년대 로큰롤 가수와 1960년대 록 밴드 패션만 봐도 차이가 크다. 데뷔 시절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습을 보면 잘 넘겨진 리젠트 머리와 핏이 맞는 청바지, 재킷, 티셔츠 위주의 당시 비트닉 패션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을 보인다. 얼핏 보면 제임스 딘의 패션을 그대로 빼다박은 듯한 모습일 정도. 그에 반해 1960년대 중후반 히피가 주류였던 시절의 비틀즈나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의 모습을 보면 어마무시한 장발(남성 뮤지션들의 경우 덥수룩한 수염), 기장이 긴 나팔바지와 허름하고 나풀거리는 컬러풀한 상의와 각종 악세서리를 비롯하여 히피의 특성이 그대로 보여진다. 실제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히피 세대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히피 문화가 이미 크게 일어난 시기였던 1968년에 그런 유행의 조류를 따르지 않고 컴백 무대에서 한창 때의 말론 브란도를 연상케 하는 가죽 재킷과 약간 헝클어진 리젠트 헤어의 패션으로 컴백 무대를 가졌었다.[5]

허나 비트니들의 시대의 편견을 깨부수려는 모습과 독특한 관념이 후대의 록 뮤지션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긴 했는데 다름아닌 포크송의 대부이자 포크 록의 창시자인 밥 딜런이 이러한 비트니들의 시적 영향을 받아 자기만의 철학을 담은 가사를 써내려갔으며 밥 딜런의 깊이있는 가사는 록 음악계 전체로 퍼져서 히피 문화나 그 이후의 시적 메시지를 담은 모든 가요 장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실제로 밥 딜런은 활약 시기가 1960년대인 후세대 뮤지션임에도 불구하고 비트 세대와 히피 세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는 주요 인물로서 분류되기도 한다.

사실 1960년대 이후 록 뮤지션 중에서는 비트 세대에 가까운 뮤지션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다. 일단 루 리드 본인이 비트 세대 막차에 가까웠고 [6], 가사나 음악 역시 비트 문학 영향이 지대했다. 밴드 패션 역시 비트 세대에 가까운 차림새로 일관했다. 활동 근거지 역시 히피들의 본거지였던 미국 서부 지역이 아닌 뉴욕이었고, 러브 앤 피스로 대표되는 히피 세대의 낙관주의랑 반대로 음침하고 거칠고 실험적인 음악을 했다.

4.4. 사회 정치적 영향[편집]


이들은 이후 1960년대를 대표하는 히피 문화와 68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얼핏보면 이들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기엔 십수년의 차이가 나는 시대적 간극만 봐도 그렇고 실제 조류의 흐름상으로도 완전히 같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비트 세대들은 '기존의 것과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고자 발버둥 친, 경우의 수가 무한한 혼란스러운 움직임에 가까웠다면 히피는 '이상적인 자유평화의 이룩, 물질 문명에 대한 적대적인 거부'라는 확실한 거대 명분을 목표로 삼고 움직였다. 68운동도 이와 마찬가지로 히피와 같으면서 거기에 더해서 '성차별, 인종차별, 정치적 권위주의보수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타파와 철폐'라는 결과론적으로 기존의 정치권까지 일부 뒤바꿀 정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비트 세대, 혹은 비트니들은 이후에 벌어진 히피처럼 어떠한 특정 목표를 위해 하나로 뭉쳐서 그들만의 뚜렷한 새 규칙을 만들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던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어떤 정치•사회운동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금 시선에서는 '문화적 움직임을 적잖게 바꾼 마이너힙스터 부류'에 가깝다. 젊은층들 사이에서의 보헤미안적인 공통점은 분명했고 기존의 것을 거부하려는 심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분명히 있는 셈이다.

다만 일부 비트니들이 1960년대에 접어들며 히피와 68운동을 주도한 새로운 젊은이들(1940년대~50년대 초반생들)을 본인들이 추구해온 사상(특히 신좌파 사상에 완전히 물든 부류)으로 사로잡거나 선동한 측면 또한 분명히 존재하며 이렇다보니 완전히 칼로 무 베듯이 철저히 구분하기가 힘든 부분도 존재한다. 당장 비트 세대의 문학적 아이콘이자 용어를 정의내린 장본인인 잭 케루악이 히피 문화의 시작을 알린 사람 중 한 명인 것만 봐도 어느 정도 겹치는 면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실제로 밥 딜런 같이 히피랑 나이차가 얼마 안 나는 후기-말기 비트니에 속하는 인물들은 비트 커뮤니티와 히피 커뮤니티랑 활동이 겹치는 경향도 있었다. 불교나 힌두교 같은 탈 기독교 종교에 대한 히피 세대의 관심 역시 비트 세대가 불을 지펴 히피 문화가 받아들였다고 보는 시각이 크다.

이들은 1960년대 영국의 사회현상을 대표하는 모드족의 파생에도 의도치 않게 연관이 있다. 이들의 힙스터적이고 반항아적인 기질과 비밥을 좋아하는 특성같은 수박 겉핥기 식의 몇몇 포인트들이 변질되어 전해지면서 모던 재즈를 중심으로 흑인 음악 위주로만 들으며 분수에 안맞게 비싼 양복입고 스쿠터 끌고 다니는 하류층 양아치집단인 모드족이 탄생해버린 것이다. 이 모드족은 한 마디로 비트니들의 허세와 반항기만 더 크게 물려받은 특이 케이스 집단이라 볼 수 있다. 정작 소수문화에 대한 비트니들의 관심,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과 서로의 개성을 추구하고 존중하는 태도들은 물려받지 못한 그냥 코스프레 양아치 집단이었다.

실제로 모드족들은 극단적인 록 매니아인 로커즈와 수시로 시비를 붙거나 패싸움을 일으키기 일쑤였고 이 당시에 얼마나 험악했는지 그 유명한 시계태엽 오렌지의 원작자 앤서니 버지스가 '이 작품은 모드족 놈들이랑 로커즈 놈들 패싸움질 하는걸 보고 영향받아 쓴 작품이다.'라고 대놓고 밝혔다. 이후 히피 문화가 생기면서 대부분이 히피로 전향했으나 몇몇은 하드 모드로 또 변질되어 더욱 폭력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 서구권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이자 인종차별의 온상인 그 유명한 스킨헤드 갱스터로 남아버리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변질되기 전의 원류인 비트 세대도 그렇고 초기 모드족들도 재즈와 소울, 알앤비를 주로 즐기며 흑인 음악에 경외를 표하던 집단들이었는데 이제는 그 누구보다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며 타 인종과 타 민족을 혐오하는 범죄집단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모드족이 비트세대의 허세와 반항기만 물려받지는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모드족 세대는 엄연히 실용성과 세련된 디자인을 추구하는것으로 시작됐으며 그저 현대의 욜로족이나 차브족 마냥 사치,허세, 명품의 상표나 희소성만을 따지는 양아치 집단으로 간주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분수에 안맞게 돈만 펑펑 써서 양복을 입는다기엔 그만큼 평일에 스스로 부지런히 노동하여 저축한 돈으로 적당히 양복을 갖추는 정도였고, 이 역시 주말에 라이브 클럽문화를 즐기기 위한 수단중 하나였다. 근본이 노동자 계급이었기에 이들은 노는만큼 성실한 워킹홀릭의 면모도 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쿠터는 그 당시 영국에 저렴하게 유통되는 소형 이동수단이었으니 자동차를 탈 돈을 아끼고싶던 모드족에겐 탁월한 선택이었을것이다. (그 당시에 진짜 사치는 고가의 가죽자켓과 고출력 바이크를 소비하며 카페를 전전하던 로커스 집단에서 더 보였다.) 오히려 노동계급인 이들의 입장에서 당시의 중산층 비트닉들의 난해하고 빈티지적인 라이프스타일은 이해하기 힘든것이었고. 도리어 자신들을 모더니스트로 칭하며 양복도 고전적이거나 거추장스럽지 않게 미래지향적이고 가성비와 디자인을 추구하면서도 평소에는 노동계급적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기성세대의 고전성을 거부하고 다른방향으로써의 나름의 반항을 한 셈이다.

이들이 아무 생각없이 고급문화와 상류층만을 동경했다면 기존의 고전적 정장을 입거나 당시 존재하던 귀족,상류층 자제들의 모터사이클 폭주족 로커스 문화를 마냥 뒤따라갔겠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의 반항이 나름 비트적인 마인드를 마냥 허투루 겉핥기로 배운것은 아님을 증명한다.

모드족 세대가 개성을 추구하고 존중하는 태도들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의견은 당시 서브컬쳐 특유의 통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개인주의적인 입장으로 볼 수도 있다.[7]

게다가 스킨헤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처음부터 인종주의는 커녕 1960년대 영국에 유입된 자메이카계 흑인 노동자들의 문화가 백인 노동계층 젊은이들의 문화와 섞이면서 퍼진 서브컬처이다.[8] 1960년대에 브리티시 모드와 자메이칸 루드 보이 등의 스타일의 영향을 받은 하드 모드가 발전해서 1969년경 스킨헤드가 나타났다. 즉, 스킨헤드 문화 자체는 원래 인종차별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처음부터 스킨헤드들이 듣던 음악도 레게와 스카였고, 초기엔 흑인 스킨헤드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지금도 이러한 1969년의 문화 그대로의 양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트래디셔널 스킨헤드라고 부른다. 이들의 문화를 요약하면 노동자계급, 축구, 맥주, 레게, 스카 정도가 될것이다. [9]

모드족과 로커스에 관한 이야기인 시계태엽 오렌지는 당시 신문사의 보수적 분위기와 보도되는 사건들로 인한 사회불안적인 요소에 대해 기성세대인 작가의 반감이 반영된 결과에 가깝다. 실제보다 과장된 면이 많다. 물론 모드 문화가 폭력성을 띄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당시 영국 특유의 과격한 노동계급 문화에서 파생된 것이란 사회적 맥락을 볼 필요성은 있다.

현재 영국에서 모드문화에 대한 인식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며, 이들 역시 비트족들의 좋은 점들을 계승한 점이 많이 있었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모드족 문화는 스킨헤드, 루드 보이, 펑크와 같은 많은 브리티쉬 서브컬쳐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고 재평가받는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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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도 비트 세대가 많이있다. 박정희, 최규하,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비트 세대이다.[2] 이 당시 미국에서는 마야 데렌 같은 아방가르드 영화가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한층 더 나아가 독립 영화가 태동되기 시작했다. 역사상 첫 독립 영화로 꼽히는 존 카사베츠그림자들은 이런 비트 세대 문화와 (심지어 찰스 밍거스를 기용했다.) 밀접한 관련이 있다.[3] 엄밀히 말해 밥 딜런은 태어난 년도를 따진다면 비트 세대보다는 좀 더 뒷 시기의 인물이나 그의 가사 작법이나 문체는 비트닉 문학에게 크게 영향받은 것이었으며, 본인도 비트 세대의 영향력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긴즈버그와 펠렝게티 등의 비트 문학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딜런은 문학 평론가들 사이에서 종종 '최후의 비트 시인'이나 '비트닉과 히피 사이의 가교를 이은 인물'로 평가받는다.[4] 싱어송라이터 데뷔 이전에 이미 비트닉 시인/소설가로서 등단했으며, 음악계에 입문한 이후로도 주로 비트 작법에 기반하여 가사를 썼다. 태어난 년도도 1934년생으로서 딱 중후기 비트닉 세대에 들어간다.[5] 실제로 당시의 골수 히피들은 본인들이 그토록 사랑해 맞이않는 록 음악을 처음으로 널리 알린 엘비스 프레슬리를 별로 안좋아했다. 대놓고 말하면 안좋아한 정도가 아니라 싫어했을 정도이다. 당장 패션도 그렇고 종교, 특히 서구권의 보통 종교인 기독교를 부정하는 경우가 많은 히피들은 기독교 신자이자 가스펠 음반도 거리낌없이 내던 엘비스와 맞지않았으며 반전운동과 무조건적인 평화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던 히피들과 군대를 자진해서 다녀온 엘비스는 상극 그 자체였다. 골수 히피들이 추종하던 뮤지션은 엄연히 1960년대에 데뷔한 록 밴드들(그 중에서도 사이키델릭과 초기 하드록)과 포크송 가수들이었지 초기 로큰롤 스타였던 엘비스는 분명히 아니었다. 물론 엘비스는 저런 골수 히피가 아닌 그냥 적당히 히피 문화도 즐기던 당시의 대다수 평범한 록 매니아 청년들 사이에선 여전히 최고의 우상으로서 군림해왔다. 오히려 가스펠 음반과 스탠다드 팝도 훌륭히 소화하며 기성세대도 사로잡아 국민가수로 거듭났었다.[6] 심지어 상술한 밥 딜런의 팬이기도 했다.[7] 대다수 영국의 서브컬쳐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요소중 하나가 구성원간 취향 공유, 그리고 구분짓기가 별로 없는 유사성이다. 이는 후일 모드족의 후신격인 펑크 문화 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어 존재한다.[8] 물론 그때에도 파키배쉬등의 문제가 있었긴 했다. 당시 막 유입된 파키스탄계 이주민들을 차별하고 갈구고 때리는 일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일에는 흑인 스킨헤드들도 가담했다(...) 1950년대에 유입된 서인도제도 이주민들이 10년 지나서 새 이주민들을 괴롭힌 것. 파키스탄은 무슬림이지만 흑인들은 대체로 기독교, 것도 영국의 식민지인 카리브해에서 온지라 성공회 교도라서 종교적으로 백인들과 합심했다. 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면 파르시계 인도인이었던 프레디 머큐리도 '파키스탄인' 프레임에 싸잡혀서 차별당했던 경험이 극 중 장면으로 등장한다.국뽕+지역감정+훌리건[9] 스킨헤드가 인종차별주의로 오인되는 경우는 1980년대 영국의 대공황 때문에 외국인을 혐오하는 하류층 청년들이 늘어나면서 어찌하다보니 스킨헤드 = 네오 나치라는 공식이 만들어진것에 기반한다. 이에 따라 "노동자로서 일체감을 느끼는 문화적 정체성으로서의 스킨헤드가 저기 정치인들이나 입에 담을 분리주의와 차별의식, 우월의식으로 썩고 있다"며 내부 싸움도 일어나기도... 사실, 그냥 머리를 빡빡 미는 것은 사회적 불만의 표출일 따름이고 그 자체가 꼭 정치적 성향을 띠는 건 아니다. 다만 백인 우월주의 성향의 스킨헤드들이 1980년대에는 미국까지 퍼졌고 1980년대 말부터 소련이 무너지면서 러시아와 독일 동부와 동유럽 등에서도 나타났다. 독일민주공화국의 스킨헤드는 노동윤리와 징병제 찬성, 애국심 등 기성 사회에서 보기에 "좋은"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당국에서 존재하는지 파악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당시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소련은 해외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정도는 알 수가 있었고 암암리에 암시장에서 수입음반이나 복제음반이 돌고 있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록 음악과 서브컬처가 많이 확산되었었다고 한다. 다만 유럽의 네오 나치들이 스킨헤드로 머리 모양을 통일하게 된 건 의외로 1980년대 후반부터이다. 한편 스킨헤드=네오 나치'라는 공식을 떠올리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것을 주로 삼는 Skinheads Against Racial Prejudice (SHARP)같은 집단도 있다. 1987년 뉴욕시에서 처음으로 결성됐으며 영국으로도 퍼졌다. 래시(RASH, Red and Anarchist Skinheads)처럼 좌파 성향의 스킨헤드 그룹도 있다. 좌파적 내지는 그런 부류의 가치관을 가진 스킨헤드 집단은 레드스킨이라고 부른다.[10] 이들을 주제로한 영화 콰드로페니아의 인기나 더 후 비틀즈 킹크스 등을 위시한 모드밴드 그리고 영국의 국민밴드 The Jam 의 본토에서의 인기와 70년대 펑크 문화 에서 일어난 모드리바이벌 그리고 이들의 직계 후손인 브릿팝의 열풍 (오아시스 같은 밴드들) 등이 이를 증명한다. 영국에서도 오아시스노엘 갤러거와, The Jam폴 웰러, 더후피트 타운젠드, 리버틴즈피트 도허티 등 모드문화의 세례를 직격으로 받은 뮤지션들은 아직까지 서로 친분이 깊다. 또한 수많은 포스트 펑크 밴드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에 까지 영향을 안뻗은 곳이 없을 정도다.